수요설교

애곡하는 야곱(창37;31-35) 1806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7. 4. 16:38
2018-06-27 21:02:40조회 : 106         
   애곡하는 야곱180627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애곡하는 야곱(창세기 37:31-3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cZnqzF8Z158, Hit:26

 이근호 18-06-27 21:40 
슬퍼하는 야곱


2018년 6월 27일         본문 말씀: 창세기 37:31-35


(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7:32)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37:33)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7:35)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생일이란 태어난 날입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아버지 집에서 죽은 자로 떠나간 것은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꿈이 있는 쪽은 꿈이 없는 쪽과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꿈이 없는 쪽은 세상살이를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버티는 겁니다.

요셉도 지금껏 그 세계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이 꿈만 꾸지 않았다면 형들로부터 버림받을 일이 없습니다. 요셉의 뜻이 아니라 꿈의 뜻에 의해서 요셉은 본인이 원치도 않는 살아온 세계와 결별해야 했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 ‘결별’이 되지만 아버지 야곱의 입장은 결별이 아니라 ‘자식의 죽음’입니다.

살아서 나간 자식이 다시 나타날 때는 몸체는 없고 그가 입었던 채색옷만 찢겨진 채로 아버지의 눈 앞에 나타났습니다. 짐승의 피가 묻힌 채로 말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스스로 이 사태를 단정 짓습니다. “내가 유독 사랑하는 자식은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 이제 그 자식은 없다. 내 아들 불쌍해서 어떻게!”라고 절규합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어느 가정사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 벌어진 사건입니다. 아버지에게 있어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란 곧 가장 귀한 것입니다. 자기보다 더 귀한 것이 자신이 사랑한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자식을 하나님이 관여해서 잃게 했다고 한다면 과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애곱은 대성통곡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세상 살아갈 의욕을 잃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자신이 사랑하는 요셉과 함께 있다는 그 사실에 세상을 살아갈 이유를 거기에다 얹습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없어진 겁니다. 아버지 야곱은 본심은 죽은 자식을 따라 자신도 죽고 싶을 뿐입니다.

과연 같이 죽는다고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누구를 죽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그 사람을 따라 죽는다고 과연 그 사람의 세계에 합류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삶이 개인적인 것처럼 각자 죽음도 그들의 삶의 연장이기에 개별적입니다.

마치 주간 근무하다가 야근 연장 근무한다고 해서 일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대낮에 하던 일을 형광등 밑에서 한다고 해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을 때에 대신 살려주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죽음도 각자 죽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대표 죽음’을 성사시키십니다.

그 작업을 위해 일단 꿈을 꾼 요셉과 타인들을 분리시킵니다. 그냥 좋은 관계로 분리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과격하게 ‘죽음 사건’을 통해서 격리시킵니다. 이는 그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대표 죽음’을 행사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상황의 결정체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3:36-3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옵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가 과감하게 자기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예수님과 끝까지 떨어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3에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아직 베드로의 자리가 천국에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 마련에 베드로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 홀로 그 자리를 마련하는데 성공하고 나면, 그 후에 베드로가 그 자리에 앉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베드로의 천국행에 있어 베드로 자신이 기여한 바는 전혀 없게 됩니다. 즉 천국에는 구원될 자의 협조가 전혀 필요치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자신을 ‘산 자’로 간주하게 되면 결국 자기 몫으로 챙길 빌미가 됩니다. ‘나 여기 있음’이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천국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들과 분리시키면서 곱게, 말썽없이 헤어지지 않게 하시는 이유는 기존의 형이 사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이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있음’가 아니라 ‘사건’적인 방식의 삶입니다. 존재란 ‘나의 중심성’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건’이란 그 우발적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요셉이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이 요셉을 주도해서 다루어지게 합니다. 이는 요셉으로 하여금 벌어진 사건의 원인으로 자신의 행함과 연결시키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형들의 세계에서는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결정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즉 “내가 이러이러 하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식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결과를 유발한 각가지 원인들을 임의로 삭제시키고 오직 자신의 옳음을 반증해 줄 가닥만 남길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이 눈에 보이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보이고자 하십니다. 비슷한 세계가 아니라 정반대로 되는 세계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정반대’가 되는 근거는 바로 요셉이 자진해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을 받아 내침을 당한 방식으로 형들 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도 요셉을 따라 나설 위인이 없게 하는 그런 세계를 요셉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몸은 비록 옛요셉 그대로이지만 사람은 전혀 다른 요셉으로 살게 됩니다. 다시 ‘내 인생’이라는 것을 용납 받지 못합니다. 꿈이 주도해서 결과를 생산하는 그런 세계가 요셉의 몸을 통해서 발산됩니다.

요셉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꿈의 전개과정이 됩니다. 자신에게 있어 현존하는 세계는 ‘옛날 살았었던 그런 고향’일 뿐입니다. 전의 세계 안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꿈이 세계, 이것이 요셉의 몸을 통해 구체화되는 야곱 언약의 세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라는 존재감이 주님이 유발하는 사건을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8-06-28 17:38 
144강-창 37장 31-35절(애곡하는 야곱)1806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7장 31-35절입니다. 구약성경 58페이지입니다.

창 37:31-35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채색옷을 보내어 그 아비에게로 가져다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이 대목의 앞뒤를 모른다고 치고 이 대목에서 야곱의 형편, 야곱의 입장에 같이 참여해 봅시다. 야곱이 집에 있는데 자식들이 뭘 들고 와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아들이 살아 돌아올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고 집 나갈 때 입었던 채색 옷만 피가 잔뜩 묻은 채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야곱의 입장입니다. 정작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피 묻은 옷가지가 턱, 하고 자기 앞에 던져졌을 때에 다른 자식들이 뭔가 사태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결론은 났어요. 내 아들 죽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아들의 옷이고 다른 아들들은 그런 옷을 입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33절에 뭐라고 단정 짓느냐 하면,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다시 말해서 내가 좋아하는 아들 죽었다. 간단하게 해서, 집나갈 때는 내 아들이 살아서 나갔는데 지금 그 아들의 신체는 짐승이 다 뜯어먹고 옷만 달랑 찢겨진 채로 아버지 앞에 온 거예요.

요즘 사고 난 16세 소녀 같습니다. 산 위에서 옷만 남기고 죽어버린. 그렇게 될 때 아버지에게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 거예요. 여기서 다른 자식들이 위로를 해도 위로를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자식이 죽었는데 무슨 위로가 필요합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 요셉 불쌍해서 어떡해?” 그런 이야기에요.

아버지는 살아있는데, 그리고 늙은 아버지가 먼저 죽어야 되는데 아직 창창한 젊은 아들, 그것도 가장 좋아하는 아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어버렸으니까 아버지심정은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심정이 35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내가 지금 살아도 산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들이 간 그 죽음의 세계에 나도 지금 당장 죽어서 합류하고 싶다는 겁니다. 더 이상 나는 살 마음도 없고 살 힘도 없다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어디에 나와 있느냐 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책에 나와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책의 목적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책이지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려면 저 하늘의 하나님이 어떤 모양새고, 폼은 어떻게 잡고 있고, 얼마나 멋있고, 대단하고, 그런 것을 나열해주면 우리는 그것을 종합해서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니까 믿을만하다.’ 우리는 그런 것이 상식이라고 여기잖아요.

정작 이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그 방식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고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평소에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긴 것, 그것 때문에 내가 하루하루 버티고 살아가는 희망 같은 것, 그걸 주님께서 아주 묵사발을 만들 때, 그 때 사람들은 ‘대체 내가 하나님을 믿어도 무슨 이익이 있느냐? 아무짝도 소용없다. 하나님을 믿어도 전혀 나에게 보탬 되지 않는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러한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는가?’

아들 많은데 아무나 죽이지 딱 꼽아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그야말로 그 애 없으면 나도 없다 할 정도로, 오히려 나보다 더 소중한 그 애를 하나님께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믿는 야곱, 절망합니다. 그리고 애통하지요. 위로받기를 거절했다는 말은 더 살 힘도 없고 더 살 이유도 없어지게 된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뭐냐 하면, 니들이 하나님을 알기는 알아, 라는 식으로 우리를 윽박지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은 누구 입장이냐 하면, 야곱의 입장,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한 거예요. 아버지 입장에서 자기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안다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 어디를 치고 들어오느냐 하면, “네가 배부르니까 하나님 아는 게 아니야? 네가 지금 살기가 여유 있으니까 남아도는 힘 가지고 교회 나오고 하나님 믿는 게 아니야?”라고 윽박지릅니다. “네가 제대로 하나님을 알기는 알아?” 그래놓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절망케 합니다.

네가 이래도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있느냐, 네가 이래도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 라는 식으로 쳐들어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믿으니까 덩달아 키워주고 잘 되게 해줄 줄 알았지요.

만약 내게 자식이 하나 있는데 자식이 예쁘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차라리 나 같은 것은 내팽개쳐도 괜찮은데, 내 인생은 어떻게 망가져도 괜찮은데 진짜 내가 귀히 여기는 자식만큼은 손 좀 안 댔으면 좋겠다. 그 자식은 내가 기도한 공로를 봐서라도 장래가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 나오지요.

그게 엉터리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난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본인이 본인을 설득하는 것뿐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최면 건다고 해요.

안 믿으면서도 믿는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면서 기도 열심히 하고 철야기도라도 하게 되면 갑자기 믿음이 생기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조작이고 속임수입니다. 일종의 까부는 거지요. 하나님 앞에서 까부는 겁니다. 사태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어요. 힘들게 자기를 때리면 하나님께서 대견해 하고 점수 더 줄줄 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속임수에 하나님이 속아 넘어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야곱의 입장이고요. 요셉의 입장은 뭐냐? 오늘 요셉 생일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죽음으로 말미암아, 형들에게 죽음으로 내침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그 전에 살았던 형과 아버지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오늘이 요셉의 생일이에요.

요셉은 새로운 인생을 사는데 이것은 기존의 자기가 알던 자기로부터의 벗어남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야곱은 지금 울고 있어요. 자식 잃었다고 울고 있는데 그것은 야곱 안에 뭐가 있는 것인가? 내가 좋아하는 자식이 나와 함께 살아있을 그 세계가 바로 나의 세계라고 철석같이 믿다가 하나님의 기습을 받은 거예요. 공격을 받은 겁니다.

공격을 받으니까 갑자기 야곱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난 이제 그만 살래. 난 요셉 따라 죽을래.”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런데 요셉은 기존의 아버지와 형들의 세계에 합세한 이상은 요셉도 기존의 야곱세계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요셉은 기존의 형과 아버지의 세계에서 본의 아니게 그쪽에서 밀어내니까, 추방하니까 본의 아니게 그쪽에서 빠져나온 거예요.

빠져나온 세계가 본인이 원했던 세계는 아닙니다. 요셉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와 달라.’ 해서 새로운 세계를 기대한 것이 아니고 기존의 세계가 본의 아니게 밀어내니까, ‘죽어’ 하고 죽음으로 내친 겁니다. 내치는 기존의 그 세계가 죽음의 세계거든요. 요셉을 없애고 싶어하는 세계로부터 요셉은 없어진 거예요.

요셉이 없는 요셉이 된 것이 아니고 사라진 요셉이 된 겁니다. 사라졌든 없어진 요셉이든 간에 기존의 세계에서 요셉은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아요. 식구 중에서 한 식구가 죽었으니까 없는 거예요. 요셉을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은 요셉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내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기습입니다. 공격한 거예요. 하나님이 내 인생에 내 허락도 없이 침범한 겁니다. “나가! 기존의 세계에서 나가! 갈라져 나가.” 나갈 때 기존의 세계에서 “그래. 네가 나 떠나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렇게 환송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가위표(×), 너는 이 동네에서 없어져야 마땅해, 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기존의 세계와 나뉘는 겁니다. 벗어나는 거예요.

거기에 누가 개입하는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할 때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에요. 기존에 살던 내 세계와 원수가 되는 겁니다.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두 번 다시 내 세계에 기어들어오기만 해봐라, 이런 평가를 받으면서 강제추방당하는 거예요.

사람은 사람 없이는 못살아요. 외로워서도 못살지만 사람이 남 도움 없이는 못살잖아요. 그러니까 남에게 치대고 기대는 것이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버릇이에요. 누가 날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눈만 뜨면 생각하는 거잖아요. 누가 내 아쉬운 것 해결해 줄 사람이 없을까,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하는 것이 그거예요.

오늘 누구 만나서 이득을 얻어 볼까, 그 생각뿐입니다. 기존의 세계를 떠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기존의 세계를 떠나면 우리는 죽어요.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죽어라 그 말입니다. 안되지요. 기존의 세계에 있어야 내가 사는데 내가 뭘 믿고 기존의 세계에서 떠납니까? 우리는 절대로 안 떠나요.

발목 잡고 제발 내치지 말라고 사정사정하면서 버팁니다. 상사가 화분 던지고, 가위 던지고, 서류파일 던져도, 얻어맞아도, 물론 나갈 때는 매 값 1억 받고 나가지만, 재벌이 그렇게 욕해도 그저 다 얻어맞고 있습니다. 왜? 사는 방법이 그거 외에는 없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보호와 자기안전 외에는 없어요.

늘 생각하는 것이, 나는 무엇으로 보호받고 무엇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이 기본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위험한 곳에 내몬다는 그것은 미친 사람 아니면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놓고 그 안정이 되어 있는 세계에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도하겠다는 자세로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진짜 하나님의 작용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작용은 그들에 의해서 밀침을 당하는 거예요.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남을 죽인다고 한다면 우리가 남을 죽일 수는 있어요. 칼 들고 죽일 수는 있는데 나로 인하여 죽은 사람의 세계에 따라 죽을 수는 없습니다.

동반자살을 해도 그것이 성립이 안돼요. 사람은 개인적으로 태어나기에 죽어봐야 개인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어요. 오늘 본문같이 야곱이 요셉 따라 죽겠다고 해도 요셉의 세계에 야곱이 합류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있으면서 생각하는 저쪽 세계거든요.

살아있으면서 생각하는 죽음은 제대로 된 죽음이 아니고 살아있는 것의 연장에 불과한 겁니다. 야간근무 할 때에 근무하는 일의 내용이 바뀝니까? 안 바뀌어요. 햇빛 밑에서 일하다가 형광등 밑에서 일한다고 해서 자기가 하던 일과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야간연장근무거든요.

낮에 했던 일을 연장해서 밤까지 하는 거예요. 사람이 살아서 했던 그것이 죽어봤자 그 인간의 사적인 죽음, 개인적인 죽음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그 사람은 살아도 하나님 모르고 죽어도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을 알겠다고 자살하지 마세요. 자살해도 몰라요.

남 예수 믿고 죽었다고 따라죽지 마세요. 따라 죽었다고 해서 그 사람도 하나님 아는 것 아닙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요셉에 형들에게 쫓겨나는 것을 소망한 것이 아니에요. 나 형에게 죽을래, 이게 자기 꿈이 아니었어요.

자기도 살고 싶어 하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본능은 자기안전이고 자기 보호하는 것, 어떻게 하면 보호받을까, 그것이 우선이지 죽을 생각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하나님 책이에요. 하나님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강제로 요셉으로 하여금 야곱 아버지의 세계에서 죽는 자, 죽은 자로 강제로 침입해서 분류시켜 버립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지금 이 야곱과 이 형들의 세계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의 세계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가정에 추가해서 꿈이, 하늘의 계시가 요셉에게 주어진 겁니다. 요셉에게 꿈이 주어졌다는 말은 요셉에게만 주어졌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요셉 개인과 요셉 외에 다른 가족들과 분류가 되는 거예요. 요셉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가족에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분류를 누가 했느냐? 요셉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어릴 때 미군이 초콜릿을 주면 그렇게 맛있었어요. 형제가 세 명이 있는데 미군이 와서 나에게만 초콜릿을 줬다 이 말이지요. 너무 귀하고 아까워서 나만 먹었어요. 형과 동생은 그걸 못 먹었습니다. 다 먹고 나서 입에 시커멓게 발라놓고 하는 말이 “아, 초콜릿 진짜 맛있더라.”

이렇게 한다면 다른 형제가 그걸 설명해 보라고 합니다. 얼마나 맛있는데, 어떻게 맛있는데, 그 맛있는 것을 표현을 해보라고. 그걸 무슨 수로 표현합니까? 초콜릿을 나에게 줬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다른 형제들에게 그걸 설명할 수가 없어요. 요셉에게 꿈을 줬거든요. 요셉에게 꿈을 줬는데 요셉과 그 꿈이 없는 다른 형제와 아빠와 엄마까지 요셉과는 완전히 분리되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의 더 남아 있는 그 내용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겁니다. 요셉의 죽는 그 날이 요셉의 생일이라는 말이 그 말이에요. 요셉의 몸이 옛날 형들과 있었던 때의 그 몸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는 새로운 몸으로 분리되는데 저쪽세계, 기존의 아버지와 형들의 세계에서는 이미 요셉은 죽은 자고 없는 자식이 되는 겁니다.

이 땅에 없는 자식이, 소위 안다고 여기는 것, 자기가 했다고 여기는 것, 가진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 이 정도면 나도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우기는 그 모든 것을 죽은 자에 의해서 완전히 부정당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몰라, 하는 식이 된다 이 말이지요.

이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베드로가 있지요. 최고의 제자 베드로. 요한복음 13장 37절에 보게 되면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제 목숨 내놓고 따라가겠습니다.” 합니다. 그렇게 하니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다고 했어요.

그 이유가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하늘나라에 지금은 너희의 처소가 없다, 자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네 자리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같이 뭉쳐 다니니까 베드로가 오해하기를, 예수님이 계신 그 옆에 우리가 있다고 여긴 겁니다.

베드로뿐만이 아니고 열 두 제자가 다 오해한 것은 예수님과 같이 뭉쳐 다닌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뭉쳐 다니지만 제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매 예수님이 자기 제자들과 분리하려고 해요. 오늘 본문의 요셉과 똑같아요.

요셉이 꿈에 의해서 아버지와 형들의 세계에서 분리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이 분리되어서, 나는 어디로 간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주님 놓치면 나 영생 못 얻는다, 천국 못 간다는 야무진 마음을 가지고 막 붙드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제 목숨 내놓고 가겠습니다.” 하니까 네 목숨 내놓고도 갈 수 없는 나라에 내가 간다.

목숨 내놔도 못가는 나라라면 베드로야 너는 지금 천국을 몰라, 그런 뜻이에요. 너는 지금 하나님을 몰라, 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헌금하고 봉사하지만 목숨까지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목숨을 내놓는다는 말은 다 내놓는 겁니다. 그런데 다 내놓아도 모르는 하나님이라면, 다 던져도 갈 수 없는 천국이라면 애당초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있고 천국에 대해서 아는 바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대로 산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닙니다. 애당초 출생할 때부터 우리는 모르는 존재임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출생하는 거예요. 하나님한테 어떤 혜택을 받아도 우리는 천국을 갈 수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뭐 교회 50년 다니고 목사 되고 장로 되었다고요? 몰라요. 일주일 되었다고 더 아는 것도 아니고 전혀 모릅니다. 알 수 없어요. 분리가 일어나야 됩니다. 어떤 분리? 기존에 속했던 내 몸에서 내가 죽음을 당해야 됩니다. 기존에 있던 내가 나빠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존에 태어난 그 세계 자체가 하나님 모르는 세계에요. 천국 갈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거기에 같이 있었으니까 나는 마땅히 교회 나오니까 하나님 알고 교회 나오니까 천국 간다고 착각들을 하신 거예요. 뭐 교회에서 한 수 배우면, 찬송가 배우고 뭐 배우면, 배운 지식이 쌓이게 되면 하나님께서 봐주겠지, 라는 이상하고 되도 않는 망상들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기존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가야 돼요.

이런 노래 있잖아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그런 노래 있잖아요. 내가 살던 고향은, 그런 가사가 있어요.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제주도 애가 부른 노래입니다. 가사가 내가 살던 고향, 과거형이에요. 내가 살던 고향. 얼마나 중요한 단어에요.

지금 내가 이 세상 사람이잖아요. 이 세상에 살고 있잖아요. 남들은 내가 사는 동네 이것이 전부에요. 눈에 보이는 이것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으면 이 동네는 내가 살았던 동네에요. 내가 살던 고향은……, 내가 살았던 고향이에요. 내가 한 때 그 동네에서 잘 나갔어.

하나님 몰라도 괜찮고 천국 안가도 괜찮다는 막 되먹은 허세, 허풍, 오기, 그걸로 똘똘 뭉쳤던 거예요. 남 따라 살면 그것이 인간사는 것인 줄로 알았지요. 같이 우쌰, 우쌰, 하고 같이 잘난 체하면 그것이 행복인줄 알았지요. 내가 살던 고향은 그래요. 내가 살았던. 그곳에 나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기습하면 나는 죽은 자가 돼요.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나의 생일이 됩니다. 오늘 생일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합니다. 몸은 그대로인데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는 내 몸이 있으면 내 사람인줄 알았는데 막상 분리해서 보니까 내 몸이 있다고 내가 사람이 아니고 나를 둘러싼 주위에서 쏘아대는 사고방식과 윤리도덕이 나를 그 동네 사람으로 만든 거예요.

태어나면서부터 나에게 습득되고 나에게 쏘아대고 나에게 자극을 준 많은 이야기들, 오늘 내 배를 째고 보면 세상에서 이야기하던 그 많은 구시렁거리던 것들이 내 자아가 되어 있어요. 월드컵 16강 마지막 기회다 그런 것들, 삼성은 매일 지기만 하냐, 북한 문제들. 그런 것이 친숙하고 그런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그 세계에서 죽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죽은자에게 월드컵이 무슨 의미가 있고 야구가 무슨 의미가 있고 북한 핵문제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옛날에 살았던 동네에서는 그게 중요한 문제지만 이미 그 동네에서 요셉은 죽었어요. 물론 사실은 팔려갔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옷에 피가 묻었으니 이미 죽은 자라는 말이지요. 아버지 입장에서.

요셉도 그렇게 알고 있어요. 나는 아버지 집에서는 이미 사라진 존재라고. 이미 없어진 자식이지요. 그 요셉에게 새로운 꿈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이 꿈은 뭐냐? 아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람이 자살한다고 해도 살았던 대로 그냥 갈 뿐이에요. 따라서 요셉에게 꿈을 준 것은 뭐냐?

살아 있다는 이 인간들, 지금 세상에 살아 있는 이 인간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반대되는 세계를 요셉이 준 꿈의 실현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우리가 아는 전부잖아요. 그 세계와 정반대되는 세계를 하나님은 마련했어요. 준비해 두셨습니다. 비슷한 세계가 아니에요. 정 반대에요. 비슷한 세계라면 십자가 죽음 사건, 심각하고 적대적인 사건이 일어날 필요가 없지요. 곱게 갈수 있다는 말이지요.

죽지 않고서는, 살해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다는 말은, 네 목숨을 바쳐도 못 간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세상이라고 알고 있는 그 세상과 주님이 친히 마련하신 천국은 성격상 정 반대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감 잠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알아야 될 것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세계에 요셉을 보낸다면 “아버지 꿈이 이렇게 있는데 천국 갑니다.” 이렇게 좋게 보내도 되는데 왜 형들이 동생을 죽이는 방향으로, 없애서 사라지게 하는 방향으로 급하게 과격하게 내 치는가?

만약에 그 세계가 기존의 현재의 나의 세계라면 그 세계가 내 몫의 세계가 되어버려요. 내가 살아있어 버리면, 잘 들어보세요, 내가 살아있어 버리면 천국도 내 나라가 된다는 말이지요. 내가 살아있다는 그 당연한 이유 때문에 좋다는 것은 다시 내 것으로 환원이 되어버려요. 돌아와 버린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세계가 진짜 주님의 세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는 방식, 다시 돌아올 어떤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요셉을 과격한 죽음으로 내치는 겁니다. 너는 이미 죽은 놈이다. 죽은 놈이 내 것이 어디 있어요? 죽은 놈인데.

세상 사람들은 부자라고 하면 와, 하고 가난하다고 하면 에이, 이렇게 무시하지요. 그런데 개를 보세요. 개한테 부자나 가난한 주인은 아무 차이를 못 느낍니다. 잘해주면 그만이에요. 개 눈에는 돈이 있고 없고가 문제꺼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상관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부자라고 하면 ‘와, 인생 잘살았구나.’ 가난하다면 ‘나 같으면 차라리 죽었다. 살면 뭐하나.’ 이렇게 질타하지만 천국의 세계는 이 세계의 반대가 되기 때문에 돈 많다, 돈 없다, 똑똑하다, 바보다, 병들었다, 건강하다, 아무 차이 없는 세계입니다.

왜? 그 세계는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세계, 내 몫이 용납되지 않는 세계이기에 그렇습니다.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수제자거든요. 예수님이 가신다 하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목숨 바치고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목숨 바쳐도 못 오는 곳이다. 왜냐? 그 나라에 네 자리가 없다.” 요한복음 14장이지요.

하지만 그 나라에 내가 자리를 마련하게 되면 그것은 베드로가 없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예수님 혼자 자리를 마련했어요. 예수님이 혼자 마련한 자리에 나중에 베드로가 투입이 되고 합세가 된다면 베드로가 거기 가서 자기자랑 할 수 있겠습니까? 없지요. 자기가 기여한 바가 없는데, 보탠바가 없는데. 그게 천국입니다. 그게 천국이에요.

따라서 천국의 언약을 받은 야곱가정, 야곱가문, 그것을 야곱언약이라고 하는데 야곱이 받은 약속의 실내용을 대표로 완성하기 위해서 요셉을 형들과 아버지로부터 분리시키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도 했지만 창세기 37장에 보면, 2절에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이렇게 나와 있어요.

야곱의 족보 같으면 야곱의 이야기가 나와야 되는데 곧 이어서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라고 해서 요셉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언약은 야곱에게 주어졌지만 그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로는 움직이는 요셉을 통해서 일어나는 그 변하, 사건을 통해서 야곱언약이 지상에 실현되는 거예요.

실현될 때 형과 아버지는 뭐냐? 아무것도 안했지요. 왜? 분리되었으니까. 예수님과 베드로와 분리되듯이. 지금 요셉, 그리고 아버지와 형들의 동네는 완전히 분리되었어요. 왜냐하면 죽은 자로 간주하기에 잊어버리지요. 이미 죽었으니까.

지금 2018년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약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어요. 우리 태어나기 전에 이미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룬 거예요.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나한테 협조도 구하지 않았어요. 태어나기 전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시고 우리를 태어나게 해서 그 다 이룬 그 상황에 일방적으로 집어넣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 갔을 때에 내가 보탠 것이, 공로가 아무것도 없지요. 그냥 공짜로 구원받은 거지요.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수상해요. 내 안을 쪼개보세요. 절대로 천국 내용이 아니고 세상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냥 산채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의 완성 앞에서 우리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네가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계속 네 자랑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바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네가 나빠서가 아니고 네가 태어난 세상 자체가 내 자랑만 하는 세상이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같이 죽게 하셔서 이제는 다시 태어날 때는 주님의 것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누가 앞당겨서 했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요셉이 앞당겨 했어요. 요셉이 앞당겨 한 것은 뭐냐? 요셉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대표로 하는 죽음입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자살하다고 합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개개인의 죽음은 개개인의 죽음일 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꿈을 주셔서 요셉으로 하여금 대표적인 죽음을 죽게 하십니다. 대표적인 죽음을 죽게 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 죽음에 아버지나 엄마나 형들이 거기에 합세를 하게 되면 그들은 그 대표적 죽음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사람이 되고 천국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요셉은 꿈 때문에 자기 형들에게 쫓겨났지만 야곱입장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되잖아요. 사라진 자가 되고. 죽었다는 말은 이제부터 요셉의 주도권은 꿈이 쥐고 있어요. 요셉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이 요셉을 지배하고 다스리게 돼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기존의 요셉은 내가 꿈을 꿨다는 것이 돼요. 내가 꿈을 꾸었다. 그런데 요셉이 팔리고 난 뒤에는 꿈이 요셉을 갖고 놉니다. 그렇다면 꿈은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꿈은 꾸겠다고 해서 꿔지는 것이 아니니까. 우발적으로 꿈이 나타나요. 자기 꿈이 아니고 다른 사람 꿈이라도 우발적으로.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사건입니다. 내가 있어버리면 나라는 존재의 세계에서 무슨 세계로 옮겨가느냐 하면 사건의 세계로 옮겨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매일같이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이것은 내가 잘난 것이고 내 덕이야, 라고 다시 내 자랑할 수 있는 건더기가 없는 거지요. 다시 내 것으로 돌아올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상당히 어려운 말이지요. 좀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요셉은 그 형들 보기에는 비밀의 장소로 옮겨간 거예요.

비밀의 장소라는 말은, 기존에 요셉이 살고 형들이 살았던 곳은 형이 있고 내가 있으면 존재 대 존재의 우열을 논해요. 경쟁하게 되어 있어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둘 다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다는 것, 내가 있기에 남에게 안 지려고 해요.

그런데 거울을 보세요. 거울에 내 모습 보이잖아요. 존재가, 내 영상이 보이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마술을 쓰든지 해서 거울을 가까이 보는데 그러다가 거울 속으로 사라졌어요. 신기하지요. 그게 요셉이에요. 우리가 보통 거울을 보게 되면 내 존재를 되비치는 것이 거울인데 어떤 인간이 거울 보는데 거울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따라 들어가려 하니 딱딱한 거울 면에서 못 따라 들어가는 거예요.

분명이 이 사람이 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따라 들어가려니 나는 못 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꿈의 세계입니다. 계시의 세계에요. 그게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못 따라가는 이유입니다. 함몰했다. 하나님의 계시가 요셉을 함몰했어요. 요셉도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꿈에 장악되어서, 하나님의 뜻에 장악되어서 자기 인생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매일같이 사건들이 퍼부어지지요. 새로운 사건, 새로운 사건이. 그러면 그 사건, 비밀의 장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것은 원인-결과에 있어서 결과만 있고 원인을 찾을 수가 없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제가 웃는 이유가 어려운 말을 해서 죄송해서 웃습니다. 밥을 먹는데 맛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 밥이 맛있는 이유를 찾아요. 쿠쿠 밥솥으로 해서 맛있다. 밥물을 적당히 맞춰서 맛있다. 밥이 맛있는 것은 반찬이 곁들여져서 맛있다.

우리는 괜찮은 것, 좋은 결과가 있으면 그 원인을 억지로 끌어당겨서 그 원인과 결과를 이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구태여 그 원인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해서 이런 벌을 받는구나, 라고 원인과 결과를 잇지 마세요. 그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의 자식이에요. 내가 나쁜 짓을 했기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이제부터라도 내가 착하게 살면 복을 받아서 잘될 것이다.

그것은 이 기존의 세계, 악마의 세계, 천국 못가는 인간들의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원리에요. 내가 이 모양으로 된 것, 이마 넓은 것, 이런 것을 찾지 마세요. 우리의 옛날 버릇이 뭐냐 하면, 뭔가 잘되어도 원인 찾고 못되어도 원인 찾는 버릇이 있어요. 사실은 그것 원인 아닙니다. 진짜 복합적인 원인을 다 끌어내서 나한테 유리한 쪽으로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내 잘남을 증빙하는 자료로 필요한 것만 뽑아서 ‘난 이것 때문에 오늘날 이만큼 잘되었다.’ 혹은 ‘이것 때문에 나는 망했어.’라고 일방적으로 가닥을 설정해요.

그게 바로 기존의 요셉과 형들이 하는 짓거리에요. 그러나 요셉은 거기서 분리되었다 했지요. 분리되었을 때에 죽어가는 나를 살린 거예요. 하나님의 꿈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죽어가는 나를 살렸다면 원인은 십자가에 있을 뿐이지 내 행동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에 내가 책임지지 마세요. 지금 내가 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적의 모습입니다. 어차피 내 잘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주님이 공짜로 주신 구원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삶이기 때문에 이미 원인은 확정적이에요. 확정되었어요.

따라서 그 고귀한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원인에다 쓸데없이 나의 착함이나 나의 못남을 섞어 넣지 마세요. 그것은 반칙입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는데요? 노래 다시 불러볼까요? 내가 살았던 세상은 이런 세상이라고.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니에요. 내가 살았던 세상이에요.

내가 살던 세상이었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는 세상은 내가 살던 세상이에요. 그것 때문에 까불었고, 그것 때문에 주눅 들었고, 그것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고, 그것 때문에 우쭐해서 교만했던. 잘나면 잘난 대로 교만하고 못나면 못난 대로 좌절했던 울고불고한 그 세계.

이제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뚝! 뚝이에요. 그 세계는 결별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인생입니다. 어설퍼도 귀하고 잘나도 주님이 더 귀한 거지요. 끝으로 한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개는 주인의 직업이나 재산의 여부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관심두지 마시고 못났지만 구원해주신, 천국가게 하신 주님의 대신 죽으심, 그 희생을 증거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원인과 결과를 연결했습니다. 그래봤자 나 잘났다, 나 이만큼 겸손하다, 나 이만큼 훌륭하다, 또 세상에 나가서 자기 자랑거리 만드는 것에 불과한 것을 이제는 저희가 알았사오니 지금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그 사도의 고백처럼 같은 고백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