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강-창 37장 25-27절(팔려간 요셉)1808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37장 25-27절입니다. 구약성경 56페이지입니다.
창 37:25-27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요셉에게 형제들이 많이 있었지요. 열 한 명의 형제가 있었고 이 현장에서는 열 명의 형제가 있는데 그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이유가 18절에 나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요셉이 꿈과 결합되어 있으니까 그 꿈이 자신들의 위치를 불편하게 만들지요. 그래서 그 꿈을 꾼 당사자를 우리가 만약 죽이게 되면 그 꿈도 같이 소멸될 것이다. 그러면 그 꿈은 헛꿈이 되고 개꿈이 된다는 식으로 형들은 요셉에 대해서 굉장히 부담감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꿈이라 하는 것은 외부적이고 인간이 터치할 수 없습니다. 자기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만들어낸 꿈일까, 아니면 정말 운명 같은 것일까를 측정하고 테스트하는 방법은 요셉을 죽이는 겁니다.
요셉을 죽여 버리면 그 자체로서 요셉의 꿈은 끝장나는 거지요. 인간들의 이런 아이디어는 인간에게 어떤 희망과 계획이 있더라도 그 당사자가 죽어버리면 그 희망과 계획도 같이 없어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옛날 그리스신화에 스핑크스라는 괴물이 있는데 스핑크스가 사람을 괴롭히고 죽였습니다.
어떻게 죽이느냐 하면, 핑계를 만들어서 사람을 죽이는데 그 핑계라는 것이 뭐냐? 스핑크스는 그리스의 전설인데 스핑크스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 겁니다. ‘너희들은 내 밑에, 내 아래에 있는 거야. 너희들의 지혜는 이 스핑크스의 지혜를 못 따라와.’ 그런 요건이 갖춰진 그 상태를 스핑크스는 원했던 겁니다.
그래서 지나는 사람마다 수수께끼를 내서 못 맞추면 죽여 버렸어요. 그런데 스핑크스가 내는 수수께끼가 뭐냐?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때는 두 발로 걷고 저녁이 되면 세 발로 걷는 게 뭐냐고 질문을 했어요.
그런데 그걸 누가 알아 맞췄다는 말이지요. 오이디푸스죠. 하여간 수수께끼를 알아 맞췄어요. 알아맞추면 ‘알아맞췄구나.’ 그걸로 끝나는 것인데 “그건 인간이다.”라고 정답을 맞춘 순간 스핑크스라는 그 괴물이, 신화적 존재가, 그동안 인간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면서 인간의 우위에, 천상의 세계에 있다고 자부해온 그것이 물에 빠져 자결해요.
옛날 신화의 세계든 무슨 세계든 죽음이라는 것은 진 쪽, 패배한 쪽에 자기의 본성을 드러낼 때는 살아있는 쪽이 승리자가 되고 죽은 자는 패배자가 가야 될 마지막 세계, 그렇게 본 겁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살아있을 만한 정당성이 있기에 살아있다는 것이 인간세계에, 이방세계에 전설로, 신화로 이어져오던 내면적인 원리에요.
자 그렇다면, 지금 요셉도 그리고 형들도 같이 살아 있다는 말이지요. 둘 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정당하기에 살아있기 때문에 둘 다 정당해야 되는데 어느 날 요셉이 꿈을 꿔버렸거든요.
요셉이나 형들이 둘 다 살만해서 사는 사람이라면 그 꿈을 요셉만 알고 있으면 안 되고, 요셉만 반겨서는 안 되고, 요셉만 꿈의 내용을 독점하면 안 되고 형들도 요셉의 꿈에 동의를 해줘야 되고 감당을 할 수 있을 때는 요셉의 세계나 형들의 세계나 동일한 세계라고 쳐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꿈이 개인적으로 출세한다, 그런 꿈같으면 용납이 돼요. “그래, 네가 출세해서 우리도 같이 성공시켜라”가 되는데 그게 아니고 요셉이 있고 다른 형들과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기에 굴복을 하게 되어있다니까요. 평등한 관계에서 계층이 생겨버리는 거예요. 위아래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받았던 꿈의 내용에서 하나는 종이 되고 하나는 주인이 되는 그 내용이 왔을 때에 그 주인 쪽에서는 신이 나서 감당을 하겠지요. 그 꿈에 대해 고이 간직하려고 하겠지요. 그런데 자기가 종이 되고 누구에게 굴복하게 된다면?
종이 된다는 말은 자신의 꿈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인의 꿈에 종속되는 것이지 본인의 꿈을 본인이 독자적으로 따로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은 접어야 되거든요. 요셉이 살아있는 한 그 꿈은 계속 접어야 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형들은, 특히 나이 많은 큰 형들 말고 루우벤이나 유다 말고, 나이가 적은 형들은 요셉과 같은 지평에서 계속 살 수 없는 존재라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스핑크스 방법대로 가는 겁니다. 네가 죽든지 우리가 죽든지 둘 중 하나 해야 된다. 왜? 둘 중 하는 진실이니까. 그래서 요셉을 죽이고자 한 겁니다. 요셉을 죽이고자 했는데 루우벤이, 맏이가 와서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형들 대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하여 가로되 ……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21-22)
요셉을 죽이지 못하게 해서 채색옷을 벗기고 물이 없는 구덩이에 집어넣었어요. 일단 임시방편입니다. 그 후에 때맞춰 이스마엘족속, 야곱언약에 있어서 야곱으로부터, 야곱후손으로부터 저주받아야 될 이스마엘족속,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상인들인데 그들이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오니까 유다가 하는 말이, 동생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죽이지 말고 팔아버리자고 한 겁니다.
“너희들은 요셉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느냐? 요셉은 우리가 팔고 아버지에게는 요셉이 죽었다고 하자.” 요셉만 입고 있던 채색옷에 짐승 피 발라서 아버지를 속이자고 한 겁니다. 27절에 보면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르우벤도 22절에서 말하기를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이나 유다의 생각이 요셉의 꿈을 의식해서 한 것이 아니고 일단 요셉의 신체를 살리고자 하는 거예요.
요셉의 꿈 중심으로 봤을 때는, 요셉중심으로 봤을 때는 르우벤과 유다가 요셉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요셉에게 중요한 의미는 요셉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의 꿈이 어떻게 전개되느냐 거기에 있어요.
따라서 르우벤이나 유다 두 형이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생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동생들이 무엇 때문에 화를 낸다는 것을 형들은 생각 않고 같은 혈육이니까, 같은 동생이고 형제들이니까 살려보자는 식으로 요셉을 빼돌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꿈의 중요성은 요셉 빼놓고는 다른 형제들이 한결같이 모른다고 판정내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이야기를 무엇과 연관시켜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왜 꿈을 요셉에게 주었느냐, 하는 그 점을 다시 생각해봐야 됩니다.
하나님께 요셉이 꿈을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기대하고 기다린 것도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줬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창세기 37장 처음에 야곱의 족보 이야기,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하면서 대번에 나오는 것이 요셉이야기부터 나오는 겁니다.
야곱의 족보에서 야곱 이야기가 나와야 되는데 야곱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요셉의 일대기가 야곱언약의 주요핵심내용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겁니다. 야곱은 찐빵 같으면 하나의 껍질에 불과해요. 변방으로 밀리게 되는 거예요. 야곱언약이 야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에서 난 자식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도 요셉이 본인이 애써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요셉과 및 다른 형들과의 갈등을 통해서 야곱언약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야곱언약이 이루어지는데 갈등이 왜 필요하냐 하는 점이 핵심요소로 들어서는 겁니다.
야곱의 언약이라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느냐 하면, 형인 에서가 저주받고 야곱은 무조건 축복을 받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에서가 저주받고 야곱이 축복받는데 있어서 에서나 야곱이나 결코 언약을 이루는데 원인제공자가 안됩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이미 결정된 문제거든요. 창세전에 결정된 문제라는 그 점을, 어떤 식으로 이 지상에서 그 취지를 펼치느냐 하면,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그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식으로 취지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오히려 그 언약이 성취되는데 있어서 도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훼방하고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 찬 일들 속에서 언약은 기적적으로 방해의 가시덤불을 헤치고 성취되었다, 이렇게 설명되어야 되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그들이 구원받는데 보탠 것이 없다, 가 아니라, 보탠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받는 것들은 축복 받는데 방해했고, 저주받는 것들은 저주받는데 방해했다. 인간이라 하는 기능은 방해만 하는 본질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라는 점을 통해서 언약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서만 달성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왜 야곱의 그런 요소가 본질이 되어야 되느냐 하면, 야곱의 언약은 어디서 흘러들어왔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에서 흘러들어왔거든요. 아브라함언약에 있어서의 하이라이트는 모리아산에서 아버지가 이삭을 잡는 대목입니다.
그냥 이삭을 잡아 죽이면 되는데 수풀에 어린양이 하나 사전에 잡혀 있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이삭이라는 자식이 그야말로 혈육으로 인한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된 자식의 표상이라면 그 자식의 죽음 대신하는, 희생해야 될 다른 하나님의 준비된 요소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뭐냐? 어린양이 준비되어서 이삭을 살려냈거든요. 그 장소 이름을 여호와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 그 앞에 우리가 이해가 쉽도록 뭘 하나 붙입시다. 창세전부터 준비하셨다. 이걸 집어넣으면 이해하기가 아주 쉬워요.
야곱은 복 받았다. 에서는 저주받았다. 이 이야기할 때 이 복과 저주는 창세전부터 준비되었다. 이렇게 설명하시면 아브라함언약과 연속적인 내용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이삭의 운명처럼, 방해되는 요소의 세력들에 의해서 꿈꾸는 자라는, 꿈을 꾸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희생의 길을 가야 되는 거예요.
자 여기서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가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겁니다.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 요셉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다.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요셉의 구원론이 핵심이 되면 안돼요. 요셉의 구원을 위해서 요셉이 있는 것이 아니고 뭐가 있느냐 하면, 칸막이입니다.
야곱언약으로 말미암아 없던 새로운 영토, 새로운 영역, 새로운 장소가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 받음으로 펼쳐지는 겁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지금 죽어서 매장당할 운명이거든요. 매장당할 운명이 르우벤과 유다, 나이 많은 형들에 의해서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다른 장소에 요셉과 그 꿈이 함께 옮겨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야곱언약이 야곱이라는 혈육의 그 범주를 벗어나서 확대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축복을 받아야 될 야곱언약이 야곱의 혈육을 벗어나, 그 한계를 벗어나 다른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말에서 형들의 잘못은 뭐냐? 야곱의 혈육 그 자리가 자신의 본 자리, 자기가 터 잡을 자신의 자리라고 붙들고 있는 그 자체가 언약에 대드는, 언약에 항변하고 언약을 공격하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요셉은 죽어야 되는데 마침 눈앞에 보이는 이스마엘족속 상인들의 약대무리, 그리고 르우벤의 제안……, 물 없는 구덩이에 넣으면 죽지요. 죽는데 마침 하나님의 조치로 그 이스마엘족속 상인들을 만나서 요셉으로 하여금, 죽어서 없어지는 것도 없어지는 것이지만 요셉으로 하여금 그 가족을 떠나서 가족 없는 다른 장소에 가는 것도 야곱 가족의 입장에서는 이미 요셉은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형들은 요셉이 가는 곳에 꿈도 같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았어요. 형들이 고수하려는 이 고정된 자리는 뭐냐? 자기들이 줄곧 살아왔던 자리입니다. 이것은 사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자리에요. 그런데 요셉을 떠나보내는, 그 애굽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려가는 그 자리는 형들 입장에서는 위험한 자리에요.
형들이 가지 않으려는 나쁜 자리에요. 일종의 죽음의 자리지요. 왜냐하면 형들 입장에서는 ‘산다, 혹은 죽는다.’가 뭘 로 결정되느냐 하면, 자기가 살아온 가정이 있으면 그것은 사는 자리에요. 또는 달리 이야기해서 사는데 늘 가능한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셉처럼 상인들 따라갔다는 말은 혈육과 끊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혈육과 단절되는 거예요. 혈육과 단절되어 버리면 그것은 사는데 불가능한, 언제든지 불가능한 새로운 세계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잘 이해가 안 되시는 것 같은데 마태복음 12장 46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저 뒤에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혈육과 끊어진, 혈육의 자리가 아니라 혈육과 무관한 자리에 예수님이 서 있는 거예요. 꿈과 함께 있는 요셉의 태도와 동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께서.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는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그것으로 그치면 안돼요. 예수님의 생애를 구약까지 확대시켜야 돼요. 확산시켜야 됩니다. 어린 예수님, 작은 예수님, 예수님의 분신들, 그것은 구약을 통해서 발견해야 돼요.
왜? 같은 언약 속에서 움직이니까.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서 그들은 움직였다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 때부터 같이 움직인 거예요. 자신의 분신들이니까요. 예수님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요셉에게 일어난 일로 미리 보여주니까요.
그 일어난 일이 뭐냐? 혈육과의 단절, 혈육과의 끊어짐입니다. 그리고 형들은 동생들을 죽여서 매장하는 대신 상인들을 통해서 자기 동네에서 떠나보낸 거예요. 그러면 요셉이 애굽에 내려가서 하는 그 일 하나하나가 형들 입장에서는 어떤 일이냐 하면, 요셉의 죽음과 관련된 일, 요셉의 죽음과 관련된 일이 애굽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형들과 요셉이 헤어졌다고 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요셉에게 꿈이 있는 한, 요셉이 형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동네에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요셉의 그 움직임속에 인사들, 관련된 인물들이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들이 죽였다.’입니다. 우리들이 죽인, 우리가 매장하려고 했던 그 사건이 요셉에게 일어난 사건들이에요. 요셉에게 일이 일어날 때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계속해서 티가 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물위를 걷는다든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기적을 일으키든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든지,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든지 그 모든 일은 그런 분을, 예수님을 내 죄로 인하여 죽게 했다는 것, 그 예수님을 가차 없이 우리가 죽여 버렸다는 그 관련성 끝에 지금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우리는 요셉의 형 입장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가 사는 가능성만 고려해서 예수님을 밀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사는데 가능성만 고려한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양쪽에 강도가 달렸지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한쪽 강도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그 강도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를 십자가에서 내려서 다시 옛날처럼 돌아가게 해주면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해준다는 조건을 걸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지금껏 알고 살아왔던 방식, 그것이 자기생존의 가능성으로 남아있어요. 그 자기의 가능성속에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내가 아이디어를 줄 테니까 그 아이디어에 당신이 동조하게 되면 내가 당신을 구세주로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그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형들을 둘로 나눠봅시다. 요셉보다 나이가 약간 많은 형들은 요셉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했어요. 자기가 종이 될 운명이니까 사전에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나이 많은 형들인 르우벤과 유다는 굉장히 착해 보이고 훌륭해 보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착해 보이고 훌륭해보여도 요셉으로 하여금 자기혈육을 떠나게 하는 그 방식을 막지는 못했고 하나의 대안으로 떠나보낸 거예요. 그것은 뭘 지키고자 했느냐 하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가능성으로 내 목숨을 부지하겠다, 살아온 우리 가족 안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을 계속 고수하는 이것이 우리들의 가장 안정된 삶이라는 이 생각을 절대로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 포기 못하는 의식 때문에 나이 많은 형이든 그 밑의 형들이건 간에 요셉을 안 보이는 곳으로 내쫓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꿈이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내가 살아가는 이 생존의 방식이 하나님이 주신 꿈보다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겁니다.
왜? 그것이 우리가 평소에 몸에 익힌, 내가 생존하는 가능성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 가능성이라면 요셉은 뭐냐? 형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에 요셉을 보냈다는 말은, 요셉이 가는 곳이 너무나 위태롭고 끔찍하고, 매장되어 죽으나 애굽으로 팔려가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이것은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구원하려고 요셉에게 꿈을 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준 언약의 취지가 뭐냐?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에 있는 그 윤곽, 그 경계선을 건지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경계선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경계선이에요. 요셉은 그 경계선 선상에서 움직입니다. 앞으로 요셉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사건들은 요셉이 잘 되었다, 요셉이 살았다, 가 아니에요. 계속해서 요셉은 인간세계의 경계선, 새로운 한계선을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계속해서 생산하고 발굴해 내는 그 역할 때문에 요셉은 그 꿈에 의해서 움직이는 겁니다.
형들은 고정된 삶이고 요셉은 흐름이에요. 움직임입니다. 머무르지 않아요. 계속해서 이동합니다. 그러나 형들은 살아왔던 그 버릇처럼, 지금껏 살아온 방식대로 이 터가 내 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자신의 자리가 없습니다. 혈육도 본 자리가 아니에요. 요셉은 꿈에 의해서 혈육을 떠나야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을 죽은자로 간주해야 됩니다. 지난주일 오전설교에서 했지요.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 시내산은 땅에 있는 거거든요. 예루살렘, 그거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에요.
그러나 약속의 자녀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 그 성전도 아니요, 땅에 있는 시내산도 아니고 오직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 우리 어머니라 했습니다. 이 지상에는 성도가 있어야 될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 산다는 것은 성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성도가 가는 그 세계에 못갑니다. 왜냐?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불가능을 지금 요셉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어린 요셉이. 그렇다면 이 어린요셉 안에 누가 있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은 머물 곳도 아니요 우리가 영원히 살 곳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걸 미리 앞당겨서 보여준 것이 요셉입니다. 오늘본문의 핵심은 뭐냐 하면, 요셉이 형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땅을 거쳐간다는 겁니다.
새로운 지역, 없는 곳을 요셉이 가게 되면 요셉이 움직이는 그곳이 야곱언약, 하나님이 주고자 하는 축복의 땅이 되는 겁니다. 축복의 땅이 어느 지정된 땅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움직이는 그 경계선상이 바로 새로운 땅이에요.
요셉이 짊어지고 있는 그 꿈의 세계가 바로 영원한 천국입니다. 요셉을 어디 지정된 장소에 살리려고 꿈이 있는 것이 아니고 꿈의 세계를 위해서 요셉은 이 지상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계속해서 인간들이 요셉을 붙잡아도 붙잡히지 않는 불가능한 삶으로, 불가능한 운명으로, 흉내 내도 흉내 낼 수 없는, 계속해서 옮겨 다니는 생애를 요셉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의 운명, 성도의 실존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거지요. 이야기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야곱언약은 형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형은 무조건 저주받고 동생 야곱은 무조건 축복을 받아야 돼요. 그런데 이 야곱언약은 하나님의 준비되심이라는 그 취지가 계속 흘러 들어와서 야곱언약 되었어요. 여호와이레입니다.
어디서부터 준비되었느냐? 그것은 창세전부터 준비된 거지요. 창세전부터 준비되었다는 말은 인간이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는다는 그런 내용이 아니고 도리어 인간들은 뭔가 있기에, 자기 나름대로 뭔가 인간 안에 불순한, 반 언약적인, 안티언약, 언약에 대드는, 창세전에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반발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하다든지 안 도와준다는 정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요소들이 이미 있었어요.
처음에 요셉이 꿈을 꾸기 전까지는 불만은 있었지만 그냥 그대로 살았습니다. 꿈을 꾸고부터 그것이 표면화되었고 노골적으로 구체화되어서 전개되는 겁니다. 본격적으로 야곱의 족보가 시작되는 거예요. 자식들이 태어난다고 야곱의 족보가 아닙니다.
야곱의 족보의 핵심은 혈육이라는 것, 육이라는 것, 한 번 태어난 혈육은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그러한 선입관을 찢어버리고, 그것을 깨버리고, 그것을 부숴버리고 그 안에 없었던 새로운 저주와 축복의 경계선이 새롭게 창출되는 현상이 일어날 때 그것이 야곱언약이 실현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아주 유교적인 안동 권씨 집안, ‘이리 오너라’ 하는 그런 집안이 있다 합시다. 하나의 예니까 실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안동 권씨 8대 장손 그런 것이 있잖아요. 늘 한복 입고 궁중요리 하고. 관리하기도 힘든 한옥에서 사는 종손계통 있잖아요.
그 집안에 시집올 때 마음 단단히 먹고 ‘나는 이 집안 귀신이다.’ 해서 음식배우고, 집안관리 하는 것 배우고, 유교예절 배우는 그 새댁이 왔는데 오자마자 이틀 만에 성령이 임했어요. 예를 드는 겁니다. 성령이 임해서 집에 있는 제기들 다 불태워버리고 ‘나 이제 제사 안 드린다.’ 할 때에 그 종손과 관련된 많은 어른들이 기절초풍 하겠지요.
뭐라고 하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 믿을 생각 말고 눈에 보이는 네 아버지나 먼저 믿어라. 네 부모나 먼저 잘 섬겨라.” 하는 상투적인 조언을 안 하겠어요? 하겠지요. 그런데 그 새댁이 성령 받았는데? 요셉처럼 꿈을 꿨는데요.
그 새댁이 보여줄 것은 뭐냐? 유교, 윤리라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계속해서 설득하기 위해서, 설명하기 위해서 조달을 하는데 이 윤리가 한계가 있어요. ‘나는 이렇게 점잖다. 훌륭하다. 그래서 우리가문은 대대로 이어진다.’ 그것을 증빙하기 위해서 그 많은 일들, 착하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남을 배려하고 동정하고, 사랑해주고, 그걸 아무리 백날 해도 설명을 다 못해요.
결국은 혈육에서 혈육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이 한계에요. 르우벤과 유다가 자기 딴에 착하게 한다고 동생 살리려고 한 것은 같은 혈육이니 혈육이라는 테두리에 묶으려고 한 거예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요셉은 혈육에 묶이지 않고 혈육 바깥으로 튀어나온 겁니다. 예수님처럼.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바깥으로 튀어나온 겁니다.
튀어나올 때 하나님의 언약은 혈육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 말은, 혈육이 있는 자는 결국은 하나님이 축복을 놓친다는 그 말입니다. 왜? 내가 누군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에. 요셉도 마찬가지로 본인이 누군지 설명이 안 되지만 꿈이 요셉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에 준해서 ‘이래서 너는 하나님이 백성’이라는 것을 꿈이 인도하면서 설명해 줄거지요.
그 설명은 형들과 같이 하는 것이 아니고 형들에게 배척받는, 형들이 가기 싫어하는 불가능의 세계에서, 죽음의 세계에서, 형들에게는 이미 죽었다고 낙인찍힌 그 죽음의 세계에서, 인간들이 어떤 도움이 보태줄 수 없는 요셉 홀로 움직이는 그 세계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반대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기 자신이 죄인에 불과하다는 그 사실을, 그 본질을 노골적으로 요셉을 통해서, 요셉의 인생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 언약의 취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우리의, 성도의 삶은 자기 구원받으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저주와 축복을 가름하는 그 기준은 오직 십자가뿐인 것을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언약적사건을 마주치면서 오직 십자가만 도드라지게 노출시키기 위해서 지금도 창세전에 있던 축복이 우리를 죽이지 않고 살려내면서 요셉처럼 가지고 활용하시고, 운용하시고, 데리고 다니십니다.
성도는 그것을 통해서 골로새서 3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감취어졌느니라, 하는 것을 실감나게 고백하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는데 가능한 그 동네가 하나님께 대드는 악마의 동네, 지옥의 동네, 저주의 동네인 것을 왜 우리는 몰랐습니까? 그저 사는 대로 살아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지 이제는 저희들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를 통해서 저주와 축복의,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오직 십자가의 희생에 있음을 전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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