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11b 부산강의 : [시편]11(5편)-상처에서 상처로 (강의:이근호 목사)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한 곳에 모을 수 있을까요? 지금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너의 모든 행위는 한 곳에서 나왔다. 그러면 우리는 어처구니없지요. 왜 어처구니없느냐 하면, 자연 반대말이 인공이잖아요. 인공은 내가 만들어낸 거고요. 우리 가정, 우리 집 내가 만든 거예요. 자연은 내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 말이죠. 우리는 이 두 관계 밖에 몰라요. 자연 아니면 인공. 자연 속에서 내 집, 대자연 속에서 전원주택. 전부 다 자연과 인공이 관련돼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성전을 만들면 이것도 인공에 속하죠. 자연과 인공 둘 밖에 없어요. 이걸 하나로 숫자 1로 합치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집어넣으신 성전은 자연도 만드신 분이 우리도 만들고 우리의 사사로운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하시고 모든 것을 1에서 나온 다양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 원초적인 1, 근원적인 1이 허락도 없이 내 인공 속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대자연이 아니라 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것, 인공적인 것을 지키려고 하니까 주께서는 쳐내는 거예요. 쳐내니까 우리가 아프지요. 아프고 내 뜻대로 안 되니까 우리가 절망하게 되는 겁니다. 포부가 있어야 살 게 아닙니까. 희망 없으면 못 살잖아요. 한 가닥의 희망과 한 가닥의 목표만 있어도 인간은 버텨내는 거죠. 완전히 다 끊어버리면 그건 자살이죠. 어느 것 하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데로 피할 길만 있으면 힘들더라도 견딜 수 있는데 그것마저 차단되면 사람은 미쳐버립니다.
그러면 성전이 왔을 때 성전은 인공적인 게 아니죠. 성전은 하나님이 주신 거란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인공적인 것과 성전의 취지와 싸우게 되는 겁니다. 싸울 때 누가 이기겠어요? 우리가 지면 복인데 구원인데 이게 안 져요. 안 지고 우리가 성전을 만들어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배당이에요. 이게 교회란 겁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구원이 없어요. 교회를 자기가 돈 내서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희생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구원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인공에 속하거든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겁니다.
그러면 자연도 아니고 인공적인 것도 아니고 성전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합니까? 성전은 숨어있어요. 우리가 진짜 성전에 가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것과 뭔가 아니라는 식으로 싸움을 걸고 나오죠. 그 싸움에서 우리가 졌다고 패배할 때 진짜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이 되는 거예요. 그 고백이 5편 7절에 나오는 겁니다. 한 시간 지나고 시편 5편 7절에 이제 들어가는 거예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 용서, 인자, 긍휼, 사랑 다 같은 말이에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그 다음에 어디로 들어간다? 주의 집에 간다는 말은, 처음부터 주의 집은 우리가 갈 수 없고 용서, 사랑, 인자함, 봐주심, 긍휼, 이런 걸 통해서 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동안 가만 논 게 아니고 우리 나름대로 하나님을 장악하기 위해서 마치 우상을 섬길 때 신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처럼 신마저도 내 마음대로 부리려고 했던 그 모든 시도가 좌절되는 그게 내 뜻대로 안 되는,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임을 돌출하고 그게 노출될 때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입니다.
특히 8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주의 의”죠. 그러면 나의 의는 빠져야 돼요. 평소에 우리는 인공적일 때 하나님의 복을 따낼 때 내 쪽에서 거룩과 경건과 착한 것을 다 끌어 모았잖아요. 괜찮은 것, 이 정도하면 내치지 않을 것들, 헌금, 십일조, 그런 걸 모아놓고 그걸 담보로 돈 빌려달라는 것처럼 복 주라하는 데 그것이 좌절돼야 돼요. 나의 의가 좌절돼야 돼요. 나의 열심과 나의 애씀과 자기관리, 자기절제.
이걸 주일 낮에 설교한 건데 중요하니까 다시 해보겠습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지 말라. 만약에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면 필히 여기서 나의 의가 나와요.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름 열심히 했다. 더는 못합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이 하라는 대로 완전하진 않지만 나름 노력했다는 자기 의가 인생사에 꽂힙 니다. 이건 자기에게서 나온 사건이지 이걸로 통해서 나를 계속 살려내려는 그런 심보가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나, 이 정도 착한데 죽이면 진짜 섭섭합니다.” 이런 것. 죽이려면 저 나쁜 놈 죽이지 왜 나를 죽입니까, 이런 거예요.
나 자신의 의, 이것은 내가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내 인생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 했지요. 그러면 책임져선 안 되는데 왜 자꾸 자기 인생에 책임지려 하는가? 이게 선악에 담긴 원리원칙 때문에 그래요. 선과 악 사이가 벌어졌어요.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나갈 때 여기서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나의 행함, 나의 최선과 나의 의지가 개입됩니다. 내가 원인제공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잘못하게 되면 선도 악이 되고 내가 바르게 살면 악도 선이 된다는 것, 선과 악, 악과 선도 내 행위에 따라서 어느 쪽에 속하는지 결정된다는 이 사고방식이 바로 악마가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주고 심어준 내용이에요.
이걸 어제 낮에 할 수 있다, 능력 있다는 것, 하갈 이야기했지요. 설교를 다 마치고 난 뒤에 어떤 분이 평하기를 하갈 이야기만 했지 사라 이야기는 왜 안 했느냐는 거예요. 멋진 질문이에요. 사라는 없는 거예요. 아기를 못 낳아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능력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없어요. 그럼 사라는 무슨 역할 하느냐? 사라는 차이만 이야기해요. 어떤 차이냐? 하나님의 약속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이 끊어져 있음, 그 차이 남을 보여주는 데 선과 악 사이에 끼어들어야 돼요. 네가 원인제공, 네가 책임진다고 새로운 인생 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선이냐, 악이냐 매일같이 여기에 시달리게 돼요.
만약에 내 인생에 책임지게 되면 여러분은 무거운 짐을 사서 고생하는 겁니다. 평생 쇳덩어리를 열댓 개 다세요. 무거운 짐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번 일했으니까 악하다, 이번 일했으니까 나는 착하다. 착한 일했으니까 복 있을 거고, 악한 일했으니까 벌 받아도 할 말 없다. 이러한 고민, 걱정, 알 수 없는 공포, 두려움으로 평생 시달리세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제시한 해답은 뭐냐 하면, 사라를 집어넣는 거예요. 선과 악은 있음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생명나무는 우리한테 없잖아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생명나무는 격리돼 있잖아요. 격리된 생명나무가 사라의 모습으로 와요. 사라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고 약속에 속했기 때문에. 참 신기하죠. 육체의 반대말이 무 육체가 아니고 약속이라는 겁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하갈은 나쁜 여자, 이게 아니고 그냥 육체에 속하면 다 하갈이에요. 그럼 사라도 신장 얼마에 몸무게 있을 건데 그건 육체 아닌가? 그건 육체라 하지 않고 약속이라 해요. 왜? 능력이 없으니까. 여자로서 아기 낳을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를 통해서 숨겨져 있는 진리가 공개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자에게만 없음이 성립돼요. 아기 못 낳는 여성의 기능이 상실돼요. 한나처럼. 한나가 아기 못 낳으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브닌나가 아기 가진 여자가 적으로 등장하잖아요. 사무엘상 1장에서. 아기 낳는 것이 정상이죠.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대자연 있고 우린 여기 산다. 아기 낳고 산다. 아주 자연스러워요. 뭐가 문제에요? 아기 둘 있어요.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이 하나님의 적이 된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하지요. 아들 낳았다고 주위에서 얼마나 장한 며느리라고 칭찬들 했습니까? 물론 매개체 없이 말로 다 때우지만. 아들 낳았으면 시집에서 다 키워줘야지. 이게 매개 있는 거지.
어쨌든 간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경 덮어버리고 복음 안 듣고 해운대 나가면 돌아가는 게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고 이것보다 더 사실은 없다. 이게 바로 팩트고, 이게 현실이고 우리 선배들도 그렇게 살다 죽었고 우리도 살다 죽을 거야. 해운대 앞 바다 보면서. 여기서 더 새로운 것 이야기하지 마. 골치 아파. 나, 이래 살다 죽을래. 그런 흉내나 서로 모방하며 살 뿐이에요.
그러나 성경 들추는 순간 주의 원수 나오고 생각지도 않은 내 의가 아닌 주의 의가 나온다고 하니까 우리는 자신을 바꿀 생각은 안 하고, “주의 의? 그것 괜찮네. 그것 어디서 팔지? 교회? 그럼 교회 다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고 그냥 좋은 것 수퍼에서 마트에서 물건 챙기듯이 얻어 챙겨서 담아서 내 것 만들면 유리하게 작용할 줄 알고 있어요. 실제로 주의 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주님은 버림받았는데 그 버림받음, 상처받음이 안 들어있는 주의 의에요. 그게 무슨 주의 의에요. 우상이지요.
로마서 3장에서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어떤 인간도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단정 짓지요. 영광을 돌리겠다고 했지만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너는 저주 아래 조용히 있어. 그래서 어떤 인간도 영광에 이르지 못해요. 여러분, 사람이 평소에 주님 기쁘게 하려고 삽니까, 자기 기쁘게 하려고 살아요? 눈만 뜨면 자기를 위해 살아요. 오늘은 새벽까지 한 숨도 못 잤다. 전부 다 관심사가 자기 기쁨이에요.
우리 계산은 이렇습니다. 주님이 일단 내 기쁨 해주시면 주님께 영광, 선심 쓰겠습니다. 우리는 주고받는 것에 익숙해서 일단 먼저 0순위로 내 것 챙기고 그 다음에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선심 쓸 요량이 돼있어요. 그러나 그게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겁니다. 주님은 반대입니다. 주님은 자기 영광이 우선이에요. 그것 때문에 기능인으로 피조물로 인간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단정 짓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할 말이 없어요.
그 다음에 율법 외에 한 의를 우리에게 줄 때에 반드시 그것은 죽음이 동반돼야 되고 그 죽음에 우리가 참여돼야 돼요.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주님 홀로 자살하면 안 돼요. 뭔가 죽이는 자들이 있어야 돼요. 죽이는 자가 아까 끝부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알 때가 지금이 현실이지.
나는 주님과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내 평소의 생각을 통해서 나 때문에 주님이 힘들어하고 근심하고 고민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가담돼있습니다. 주의 의 생산에 우리는 뒤늦게 가담돼있는 거예요. 나의 의가 주의 의를 힘들게 하고 있다, 나의 의가 주의 의를 가리고 있다는 겁니다. 나의 의 앞장세우는 데 급급해서 남들한테 주의 의를 증거해야 될 우리가 내 의가, 평생 공들인 게 아까워서 주의 의를 가리면서 나는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수고해서 이만큼 살았다. 그걸 남한테 못 보여서 환장을 했어.
우리나라가 월드컵 16강에 못 들어가면 주의 영광을 가릴까요? 대구 사람들 작년부터 시름이 깊어졌어요. 삼성이 꼴찌라. 보통 시름이 아니에요. 부산 롯데 자이언트는 꼴찌를 한두 번 한 게 아니라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지는 게 상식이야. 롯데 자이언트가 지면 내가 져요. 사는 보람이 살아도 헛살았어. 내가 믿는 자식 안 되면 내 인생 헛살았잖아요.
여러분 자식한테 기대했지요. 조금이라도 보람 있으면 살 힘이 생기지요. 그런데 기대 걸었던 자식이 못 되면 누가 죽고 싶어요? 둘이 앉아서, “약 먹고 죽자. 이렇게 살면 뭐하나 같이 죽자.” 실제로 우리 집안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엄마가 약 먹고 죽으려고 한 순간 자식들이 경악해서, “엄마, 공부 잘할게. 안 놀게.” 그래서 공부 잘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소화제였습니다. 허~연 거짓말한 거예요.
그 정도로 자식한테 투자했는데 그 자식이 되는 일이 없다. 이건 내가 되는 일이 없어요. 부산은 롯데 자이언트 꼴찌, 대구는 박근혜는 이제 문제 아니에요. 삼성 라이온즈 맨날 거의 지고 지고 이기고, 지고 지고 이기고. 화들이 나 있는 거예요. 그걸 아까 물상화, 나를 대표할 수 있는 그 무엇, 그것 없이는 사는 이유도 없고 보람도 없는. 얼마나 우리는 대자연과 나밖에 몰라요. 내가 세워놓은 나의 물상화.
그런데 그 자리에 그 현장에 누가 들어왔다고 했습니까? 물상화 자리에 내가 원하는 신의 자리에 누가 들어왔다? 십자가 들어왔는데 죽음 없이 들어온 게 아니고 죽음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그 죽음 사건에 우리를 멱살 쥐고 강제로 집어넣은 겁니다. 네가 평소에 너밖에 모르는 너의 보람과 인생의 희망 밖에 모르는 그것이 바로 내 의를 이루는 부정적 역할과 기능자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뭡니까? 십자가가 유일한 사건이라 했지요. 그 유일무이한 사건, 죽음을 앞장세우는 사건에 우리가 결과물로, 이미 결정됐기 때문에 원인 필요 없어요. 그 결과의 다양성, 이게 인생이란 사건으로 우리에게 나오는 겁니다. 목사님, 그것 구라 아닙니까? 구라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시편 5편 7절에서 9절에 뭐라고 하느냐? 주의 의로 성전에 들어가는 거예요. 나의 의로 못 들어갑니다. 이런 고백이 어떻게 남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고백이어야 된다고요. 성령께서 다리를 놓는 거예요. 성령께서 시편 5편과 오늘날 우리 삶을 연결시키는 거예요. 전선으로 연결시키듯이. 접속시키는 겁니다.
착하란 말이 아니죠. 반대말이죠. 네 속성, 네 성질 죽이지 말란 이야기에요. 너 하고 싶은 대로 막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막 사는 거면 자기 막 사는 자체가 대단한 양 하지만 이미 주의 의가 있는 사람, 이미 성전, 십자가 사건에 합류된 인생 같으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이면 막 사는 것이 무엇과 연관된 막 사는 것이에요.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창기, 나 같은 강도, 나 같은 못 돼먹은 인간을 자비와 긍휼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긍휼과 자비가 나오는 근거로써 우리를 그 현장에 사건으로 집어넣었다는 것, 이게 우리가 사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바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도 주의 일에 편입된 거예요.
그렇다면 남들이 내 인생에 대해서 논할 때 그들을 용서하면 안 되죠. 감히 주의 일을 평가했기 때문에 용서하면 안 돼요. 진정한 용서는 용서하지 않는 거예요. 무슨 되도 않는 말을 하는지. 미워하는 것이 사랑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에요. 뭐냐 하면, 네 눈에 나밖에 안 보이지. 그러니까 너는 개야. 너는 용서할 인간이 못 돼. 어떻게 저 같이 살면서도 천국 가느냐? 이렇게 겹쳐서 봐야지요. 주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자라면 용서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용서의 관계가 돼요.
특히 부부 사이에서 용서를 늘 주고받아야 됩니다. 어떤 글에 보니까 남편의 연봉이 8천만 원 밖에 안 돼요. 여자가 화가 나서 이혼하자해서 이혼했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백화점에서 쇼핑할 돈을 충당 못하니까. 그걸 김치녀라 하는데 어떻게 8천만 원으로 내 욕구를 충족하느냐? 이러려고 너와 결혼한 게 아니란 말이죠. 적어도 1억5천 정도는 돼야 되는데 어떻게 8천으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느냐 말이죠.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급수를 높여놨잖아요. 높여놓은 급수를 주저앉힐 방법이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이 정도 돼야 자기만족이거든요. 어떻게 8천만 원으로 나와 같이 살 생각을 하는지 그런 맹랑한 생각을 다 하느냐 말이죠. 그것도 돈이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그런 여자와 이혼해야 됩니까? 고마운 것은 그쪽에서 먼저 이혼하지 하니 이혼해야지요. 어쩌겠어.
돈 함부로 쓰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자기 사치하는 것만 챙길 때 절대로 그런 여자를 용서하면 안 돼요. 우리는 용서할 자격도 안 되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주기도문 보세요.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주라고 했지요. 그것은 인간과 인간끼리 용서하는 게 아니고 매개체가 있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받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용서하는 거예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은 주께서 너를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 용서한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서로 용서가 되지 내가 주제넘게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란 이름으로 그 사람한테 갑질하는 거예요. 너를 용서했으니까 앞으로 고개 숙여. 어떤 지배 욕구가 작용하는 겁니다.
진도 좀 더 나가겠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것은 많이 어려워요.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자연과 인공이 있어요.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살기 위해서 인공적인 것을 자꾸 만들어내요. 이게 문명이라는 거예요. 문명, 과학, 기술, 지혜를 만들어내요. 특히 이방민족들이 잘했지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에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잔소리가 들어온다는 것, 율법과 언약이 들어왔다는 그 차이뿐이지 인간이 자기 필요한 걸 만들어냄에 있어서는 똑같아요.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차이점은 다른 것 없어요. 똑같이 자기만을 위해 살아요. 다만 침투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너의 모든 사건이 네가 의도한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너는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그 모습으로 엮여진 채 있다는 그 점에 차이가 나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인공적인 것이 자연과 대비될 때 어느 정도로 중첩돼있는지 파악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걸 왜 파악해야 되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4월 25일에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편입시켜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내가 참여되었고 참여된 그 자를 주의 흘린 피로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걸 4월 25일에 알았다 칩시다. 그럼 4월 26일에 어떻게 되느냐? 이게 계속 갑니까?
사건이란 말은 계속 안 가서 사건이에요. 계속 가면 사건이 아니고 존재가 돼버립니다. 한 번 존재는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건은 딱딱 끊어져있어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지 사건이 이어진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 말 잘 안 해요. 사건이란 다음을 장담 못한다는 그런 뜻이란 말이죠. 늘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사건인데 주께선 사건을 주셨는데 우리는 존재로 바꿔요.
그러면 우리 인생은 뭐냐 하면, 우리 존재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사실은 사건이 빼곡하게 쌓이고 쌓여서 꼭 창고 같아. 저는 이걸 일기장이라 하는데 우리는 일기 안 써도 늘 머릿속에는 일기장이 남아있어요. 치매 걸리면 오랜 된 일기만 남고 나머지 사건은 다 떠나버립니다. 빼곡하게 쌓여있는 것이 사건으로 나오면 좋은데 존재의 자랑으로 튀어나옵니다. 존재는, “나는 무엇이다”라고 돼요. 이걸 하나로 통합이 돼버리면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그러면 사건을 한 묶음으로 묶게 하는 존재가 어디서 오냐 하면, 죄로부터 악마로부터 유입이 돼요. 실컷 해놓고 내가 했다.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존재를 사건으로 바꾸지요. 그러면 이렇게 돼요. 사건은, “나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무엇과, 무엇과, and거든요. 나는 아침에 세수하고, 밥 먹고, 무엇 하고, 이 연속이 바로 결과적으로 나이어야 하는 거예요. 내가 밥 먹고, 내가 뭘 하고 아니라 주께서 밥 먹게 하시고, 잠자게 하시고, 이 닦게 하시고, 옷 입고 나오게 하시고, 계속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건이 이렇게 되면 이 사건을 유발한 존재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안 보이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역전된 초월이라 합니다. 왜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하느냐고 하는데 내가 약 올리려고 일부러 여러분을 화나도록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행위를 어떻게 한 곳에 모을 수 있느냐는 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키실 때 하늘에 글씨 쓴 게 있지요. 다니엘서에 보면. 그런데 실제로 이뤄진 것은 지상이에요. 보통 초월이란 지상 말고 하늘이잖아요.
그러니까 역전된 초월이 뭐냐 하면, 하늘에서 일어난 일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어디서? 소박한 내 인생 속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시키는 거예요. 주님이 저쪽에 계신 게 아니고 역전됐다니까. 초월, 주님이 팔짱끼고 계시는 게 아니고 지금 일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 안에서. 당신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대라. 그 당시 시편 때 이스라엘 안에서 역전된 초월적 사건이 다윗을 통해서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이 근거에요. 사도행전도 마찬가지고.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게 아니고 성전 미문에 나타나셔서 앉은뱅이를 낫게 한 거예요. 베드로, 요한이 낫게 한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낫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살아 계심을 어디서 찾아야 되는가? 바로 그 사건을 유발한 존재를 주님에게 돌리려면 주님은 안 보이니까 나는 내 존재를 우기지 말고 주님 살아 계셔서 발생된 일을 내가 계속 부여받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럼 내가 없지요.
내가 없으면 내가 고민할 것도 없고 내 미래 계획도 의미 없지요. 내일 놀러가야지. 내일 돼봐야 알아요. 한 달 뒤에 계획 잡아도 돼봐야 알아요. 계획 잡힌 대로 되는구나, 이게 아니라 주께서 내 계획 되게 하도록 맞춰주시니 그 다음에 나오는 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가 되는 거예요. 감사한다는 말은 나 아니고 누가 계시다는 뜻이잖아요. 나 보고 감사하는 게 어디 있어요. 나를 이렇게 이끄신 것을 감사하고 고맙다고 나오는 겁니다.
이것과 8절에 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여러분 배웠으니까 묻습니다. 사건입니까, 존재입니까? 이건 사건이죠. 어떤 사건입니까? 나는 주의 의를 받게 된 사건이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원수들을 동원시킨 사건이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욕하고 약 올리면서. 정말 나를 때리면 때렸지 웃으면서 다가와서 나를 약 올리는 사람들, 성질 같으면 패버리고 싶은데 패면 폭력으로 걸리기 때문에 못 패는데, 살살 약을 올릴 때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이거든요.
사건은 오래 안 갑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5년 전에 당한 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거는 적들이 한 게 아니고 사건 다발을 묶어놓은 내가 나를 포기 못해서 자기가 사서 고생한 거예요. 그걸 과거에 발목 잡혔다. 내 기억 층에 내가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전도연이 나왔던 유명한 영화, 이창동의 <밀양>이 있지요. 전도연의 아이가 유괴당해서 죽었습니다. 내 아이 죽인 놈 진짜 용서 못한다고 했는데 자기가 예수 믿고 용서한다고 교도소에 찾아가지요. 교도소에 있는 사람은 과거사건이에요. 피아노 치는 아이 죽인 것 맞아요. 하지만 과거사건이에요. 얼마나 뻔뻔합니까?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쪽이에요. 참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뻔뻔스러움이죠. 그런 뻔뻔스러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여러분 인생을 최고로 결정하는 겁니다. 그런 인생 안 되면 천국 못 갑니다. 도가 넘칠 정도로 내가 봐도 너무 심할 정도로 뻔뻔스러움이 있어야 돼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내 인생 인도했다는 거예요. 이거는 안 그래도 약 오르는데 더 약을 올리는 겁니다. 전도연이 믿는 주님은 그런 주님이 아니에요. 용서하라고 지시한 주님인데 그쪽에선 이미 용서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주님이니까 둘 중에 어느 게 맞는 주님이에요? 미쳐버리는 거예요. 저쪽 하나님을 거짓말로 보는 거예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전도연은 자기 과거에 발목 잡힌 겁니다. 자기 기억 층에 잡힌 거예요.
어제 아픈 것은 어제 아픈 거고, 오늘 아프면 오늘 아픈 거고, 내일 아프면 내일 아픈 거고. 매일같이 아프게 하고 안 하는 것은 주님의 소관이에요. 나는 사건에 그냥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에요. 그 아픔에 나는 원망했고 원망한 것이 주의 의가 깨지는 순간이고. 네가 아무리 아파서 나의 아픔만 하겠느냐고 주의 아픔과 연계시켜서 아팠고, 주님의 아픔 속에서 주의 의를 발견하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이 땅에서 역전된 초월을 벌이는 기능인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고백이 시편 5편 7절, 8절입니다.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이것도 이렇게 설명됩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따져보면 정말 어려워요. 길은 없습니다. 왜 길이 없느냐 하면, 인간은 존재기 때문에 앞에 보이는 것이 다 존재로 보여요. 존재를 칼로 두 동강 내보세요. 두 동강 낸 단면은 보이지만 그 안에 길이 없어요.
미국에 중국집에서 먹고 나면 과자를 주는데 포춘쿠키라 합니다. 그걸 열면 행운의 편지가 있지요. 그렇게 안에 뭔가 들어있어야 되는데 우리 인생길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잘라보면 두 조각이나 나지 그 안에 길이 없어요. 길이 보일 때는 사건이 될 때는 저쪽이 존재가 아니고 사건으로 보이는 거예요. 저 인간을 누가 만들었는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건 내가 나를 보는 것처럼 그렇게 보는 거죠.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처럼 봐요.
그런 주의 길이란 존재 입장에서는 없습니다. 내 쪽에서 길이 있다면 주께서 쪼개서 사건으로 길이 보인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다 주께서 일으킨 유일한 길이 돼요. 주께서 벌이신 무대가 된다 이 말입니다. 사건의 다발이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없던 길이 보이고, 시편 23편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제가 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나는 정경이 뭐냐 하면, 부천입니다.
지방에서 서울에 출세하려고 왔다가 인생 낙오자는 그쪽으로 다 갑니다. 이래서 자유한국당 대변인처럼 잘릴지 모르지만 그 말이 맞아요. 왔다가 집 값 싼 데가 부천이에요. 바글바글. 거기에 전에 알던 목사가 개척한 교회도 있어요. 교회가 바글바글. 1년 내에 문 닫을 교회들 있잖아요. 많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패배자들이 모인 자들에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은 희망을 의미하는 거예요. 언젠가는 부평, 부천을 떠나서 인천 쪽 말고 강남은 너무 심하고 좀 괜찮은,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 나를 인도하사 괜찮게 사는 동네로 가는 거예요. 이게 존재 아닙니까.
지금 사건을 통해서 내가 길인 걸 모르고 내가 괜찮은 존재가 되는 그게 주께서 허락한 길로 여기는 겁니다. 지금 길이 내 안에 있는데 구원의 길이 나와 함께 사건으로 있는데 우리는 어떤 길을 내 존재가 편히 쉴 수 있는, 간섭 안 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나 혼자 쉴 수 있는 그걸 주께서 선하게 인도했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주님 가신 선한 길이 어떤 길이었습니까?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내 존재를 생각하지 않는 길, 갈수록 내 존재 생각 안 해도 되는 길, 더 이상 내 것 챙기지 않아도 되는 길, 그저 주의 사건이 나보다 더 부지런하게 터지는 그 현장, 그게 바로 주의 성전이고. 주의 의가 나오면 성전이거든요. 주의 의가 돋보이는 그 길이 바로 우리 아닙니까. 우리가 사건이잖아요.
성전은 신약에서는 공간이 아니고 우리 몸이 성전이죠. 사건화 된 우리 몸이, 사건이 계속 나오는 십자가 의만 나오는 그것이 오늘날 성전이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래야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성전이 십자가를 통해서 연결돼요. 움직이는 것이 성전이에요. 우리 사는 것이 성전이고. 왜? 사건이 날마다 터지니까. 무슨 사건? 자비의 사건, 사랑의 사건, 용서의 사건. 뭘 근거로? 나 혼자 내 존재가 살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잘난 척, 남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있는 그 현장을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침투하시는 거예요.
9절에 봅시다.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쫒아 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이제 이해되시죠. 사건이기 때문에 너무나 주의 적을 이젠 아는 거예요. 자기도 주의 원수로 살았던 존재기 때문에. 지금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지만. 주님의 뜻에 의해서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었거든요. 나 같이 똑같은 저 사람은 뭐냐? 패역한 인간들이고 그들은 심판받아 합당하며. 참 중요합니다.
제가 그 사람을 미워하라 했지요. 용서 안 하는 걸 먼저 배우라 했지요. 용서하면 안 돼요. 그들을 내가 용서하면 내 앞에 오는 주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훼손돼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했기 때문에 주님이 먼저 용서했다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용서가 안 되면 패역한 자, 이걸 저주시라 하는데 그들은 저주받아야 합당하다고 되는 겁니다.
누구 안목입니까? 내 안목입니까? 주님의 안목이 내 안에 들어와서 그들을 저주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만 그것이 바로 주의 종이란 말입니다. 세상에 저주를 언급하지 않으면 사랑도 의미 없고 구원도 의미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이 본문이 충분히 납득이 되지요. 자기가 하는 행세가 이것밖에 모르니까. 우릴 닮았잖아요.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시끄럽다, 그렇게 나댄다 이 말입니다. 좀 산다고 나대고.
방시혁이란 사람의 재산이 3조랍니다. 방 씨 중에 돈 제일 많이 벌 거예요. 그 사람이 방탄소년단을 만들었어요. 지금 그런데 만약에 5년 뒤에, 10년 뒤에 방탄이 누구지? 이렇게 나오면 방시혁이란 존재를 잊어버리죠. 그래서 순간적으로 돈 벌었다고 사람이 우쭐댈 수 없어요. 만약에 방시혁이 복음을 안다면 지금 내가 만든 방탄이 뜬다는 것도 내 사건이 아니고 주님의 사건으로 떴기 때문에 나중에 안 뜰 수도 있는 건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3조의 재산을 갖더라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 재산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열린 무덤이라고 자기 자랑질하면 안 되지요.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쫒아 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주를 모르니까 배역할 수밖에. 11절에 봅시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아마 성경을 보면서 정말 어려운 대목을 대라면 기쁨, 감사, 고마움, 이런 거예요. 하박국에 나오지요. 나는 과수원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뭐로 기뻐한다? 여호와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했지요. 가스펠송에도 나오잖아요.
그게 존재로선 불가능합니다. 존재가 사건 다발로 완전히 난도질당해야 가능해요. 쓸데없는 덩어리를 쥐고 살았구나. 나 잘 되기 위해 살았구나. 이것이 어느 날 사건을 통해서 주의 일만 하면 되는데 내 일을 하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덜 뻔뻔스러운 거예요. 자기한테 책임지려고 한 겁니다. 책임지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이 뭐라고 책임을. 책임지는 꼬라지 좋~다. 꼬라지가 지옥 갑니까? 지옥 가려면 책임지세요. 막 사세요. 막 살고 책임지지 마세요.
그 정도 누릴 권한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유자거든요. 이 땅에서 자유자로 살았어요. 주님의 영을 받은 사람도 성령이 그렇게 자유롭게 살도록 이끄십니다. 남의 평가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나를 평하지 말고 주님이 평하도록 하세요. 자꾸 주님이 평하는데 내가 거기서 주님 안 된다고 나대지 말고. 그럴 땐 맞아도 많이 맞아야 돼.
11절에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보디가드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혼자 있지 않다는 거예요. 네가 존재 같으면 존재가 주인공이지만 네가 사건이라면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함께 있어서 주님 증거하라고 네 인생을 끌고가는 것이지 너 잘 되라고 한 건 아니란 말입니다.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에 기쁨 나왔어요. 오늘 처음에 성전 나왔습니다. 성전과 주의 의 나왔고, 주의 의와 동반해서 주님의 원수가 나왔지요. 그러니까 대자연 보고 나, 어느 집안이다. 대학 가고 취직해서 산다. 이런 사람한테는 이런 용어가 낯설어요. 생뚱맞게 주의 의, 주의 원수, 성전, 기뻐하라. 돈만 있으면 기뻐하는 것 아닌가. 이런 사람에겐 정말 생뚱맞고 생소한 일이에요.
그렇다면 이 사람에겐 이런 뜻이에요.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있습니까? 저쪽에서 먼저 알아서 고백해버려요. 난 당신 노는 물에 안 놀겠습니다. 주님 노는 물이 뭐냐? 천국이거든요. 그럼 천국 오지 마라. 교회 다니며 잘 놀아라. 교회 다니며 지옥 가. 교회는 인공적이니까. 내 안에 주님의 성전이 있거든요. 내 안이 교회거든요.
그런데 인공적인 그런 것들, 주의 원수.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주의 인자라 돼있어요. 사랑이죠. 주의 자비로 하여금 저희를 주의 의로, 항상 주의 의만 생각게 하옵소서. 주의 자비로 용서하심으로만 생각해서 그것이 뭐냐 하면, 나는 기쁨이고 세상=지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이 고백이 구약의 다윗의 고백을 성령께서 딱 잡아서 십자가 아래 있는 우리의 고백으로 오늘도 사건으로 돌려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큰 차이 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안 믿는 것조차 주의 일인 것을 우리가 인정하게 해주시고 내가 믿게 된 것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 것을 믿게 하셔서 세상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 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요동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