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상처에서 상처로 1806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6. 13. 16:34
2018-06-11 17:46:03조회 : 158         
상처에서 상처로 180611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X4Y-M9UCWw"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5UAlTfG8lgU" frameborder="0" allow="autoplay; encrypted-media" allowfullscreen></iframe>

 한윤범 (IP:14.♡.134.25)18-06-13 13:22 
20180611a 부산강의 : [시편]11(5편)-상처에서 상처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5편 7절부터.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시편의 내용이 굉장히 사적으로 들릴 겁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내용이 안 나와 있단 말이죠. 사적인 자기 고백을 했다면 나는 나고, 그 사람은 고백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될 이유가 있느냐? 그럴 이유가 없지요. 미국에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겪었다. 그걸 꼭 한국에 있는 사람이 그 일을 똑같이 겪어야 할 이유는 없지요. 그러면 여기 나온 고백이 남의 고백이지 나의 고백이 안 되고. 

그렇다면 성경으로선 가치가 떨어지는 겁니다. 성경은 진리고, 진리라는 것은 너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나에게도 적용돼야 진리거든요. 사람들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렇게 되면 구태여 성경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출발점을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단 말이죠. 그러면 내가 관심 가고 내가 신경 쓴 것은 나에게서 나왔던 것이 나한테 회수되는 것, 이 일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바깥에 있는 성경 시편 5편을 그다지 갈구할 필요가 없겠지요. 오늘 하루 내 일과만 신경 쓰면 되지 시편 5편까지 걱정할 필욘 없다는 말이에요. 다른 말로 시편 5편은 나와 상관없단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귀신들린 청년이 예수님께 왔을 때 귀신이 예수한테 한 이야기가 있어요. 유명한 이야기인데,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나는 내 일만 신경 쓴다는 말이에요. 이걸 귀신이 이야기했지요. 결국 귀신의 이런 고백이 오늘날 인간들의 보편적인 고백이 됐어요. 그래서 인간은 귀신들린 거예요. 미친 거예요. 실성했다고 하는데 인간은 미쳤어요. 사적으로 보면 굉장히 점잖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진리와 연관성이 끊어져버렸어요. 나는 내 일만 신경 쓰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보고, 당신은 나와 상관있느냐고 했단 말이요. 

그 말이 맞는 말이거든요.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는 말을 바로 귀신들린 자, 그것도 귀신이 한두 마리가 아니고 군대 귀신들린 청년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말은 오늘날 입장에서 21세기에 청년들이나 이 시대에 이게 맞는 말이에요. 이 말 외에 아무 것도 안 맞아요. 특히 20대 젊은이들과 같이 살게 되면. 엄마는 밥만 먹여주면 나와 상관없는 거예요. 자식도 심지어 부부도 마찬가지고. 내 일 하기도 바쁜데 당신까지 못 챙긴다는 겁니다. 

챙길 경우가 있지. 안 만나는가? 만나지. 돈과 관련되어서 만나죠. 돈과 관련 없는 데 왜 만납니까? 오히려 반문하게 돼요. 이게 귀신들린 자의 고백이라니까요. 이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죠. 왜 모르느냐 하면, 성경을 안 보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내 일만 신경 쓰지 성경이란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겠다. 성경을 안 보니까 성경 안에 귀신이 이런 고백한다는 것도 모르는 겁니다. 성경을 안 보니까 나 자신을 모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 어떤 입장에 있는지 모른단 말이죠. 

그렇다면 귀신이, 마귀가 인간에게 계속 작용하는 것은 딱 하나만 노리면 돼요. 뭐냐 하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리와 인간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만 하면 마귀 일은 대성공이죠. 끊는 방법은 뭐냐? 네 일은 네가 알아서 살면 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어디로 가는데요? 모르지요. 왜 사는데요? 모르죠. 내 존재의 의미를 몰라도 된다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죽고 난 뒤에 그것도 몰라도 되고. 다만 네 필요에 따라 네가 살면 그만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귀신이 끊임없이 심어주고 있습니다. 

시편 5편 7절을 하고 있는데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에 구체적 사건이 안 나오죠. 어떤 사건에 맞추어서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는지 안 나오지요. 사건이 안 나온 상태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고백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개인적 고백이란 말은 나와 관계없다는 거예요. 

나와 관계없으니까 시편 5편에 이런 이야기 나오면, 나는 나 나름대로 살고 너는 네 나름대로 살자. 각자 살자. 이렇게 되면 성경의 보편적 진리성이 없어진다는 말은 했지요. 성경을 볼 필요 없다는 거예요. 나는 내 인생 살고 너는 네 인생 살면 되고. 성경 펼치니까 시편 5편 나오고, 5편에 보니까 사적인 이야기 나왔으니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렇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귀신의 권세에서 건짐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출이기 때문에 먼저 우리는 귀신의 권세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있어야 돼요. 그다음에 우리론 안 되고 주님이 어떻게 끄집어낼 수 있느냐를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가 속해 사는 이것이 주님과 상관없는 귀신들린 자의 세계가 어떻게 그들은 아무 고민 없이 걱정거리 없이 그냥 이대로 사는 것이 나한테는 딱 적합해, 딱 내 몸에 맞아, 라는 위기감 없이 사는 분위기가 어떻게 형성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성경에 보면 나와요. 

그게 자연 속의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연을 바라보면서 끄집어낸 게 물상화, 물체로 이해한다는 거예요. 자연 속에서 물체의 형상으로 변하는 거예요. 이걸 구약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 하면, 우상이에요. 우상숭배하지 말라 했고, 로마서 1장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형상을 누가 만드느냐? 개가 안 만들어요. 코끼리가 안 만들어요. 인간이 만들지요. 형상을 만들 때 모델케이스가 대자연에서 오죠. 대자연에서 인간이 형상화시킨 겁니다. 인간 주변에 많은 짐승들, 송아지, 염소들 있으니까 출애굽기 32장에서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란 이름으로 뭘 만들 때 주변에 있는 암소의 모양으로 만든 거예요. 그걸 저는 물상화, 물체로 만든 겁니다. 

그러면 만든 이유가, 자연 속에서 터 잡기, 인간만을 위한 터 잡기가 물상화란 작업을 거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단 말이죠. 집 보세요. 물상화잖아요. 옷, 물상화 아닙니까. 자동차, 물론이고. 모든 것이 자연에서 가져온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현대인들은 자연스럽다. 자연의 삶이다. 여기서 뭐가 빠집니까? 귀신, 마귀 다 빠져요. 처소도 빠지고.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일부를 내 것을 가져왔다. 뭐가 문젠데? 많이 가져온 사람은 부자 되고 조금 가져온 사람은 가난하게 됐다. 나는 부자 되기를 애쓴다. 솜씨 있게 능력 있게 보다 많이. 그런 마음도 못 가지나. 이게 뭐가 문제냐? 

그런데 아까 무덤에 있는 귀신들린 청년에게 주님께서 다가갔을 때 귀신이 뭐라 했단 했는가요?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상이 아닌 게 뭐냐 하면, 이미 인간은 자기 주변을 물상으로 둘둘 감아놨는데 여기에 예수님이 왔을 때 남들 보기에는,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있습니까, 라고 청년이 이야기한 건데 청년 안에 있는 군대귀신이,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고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물상화 된 인간들끼리는 아무 문제없어요. 그들끼리는 아주 자연스러워요. 부산에 비 온다, 그게 어때서? 선거철이라 시끄럽다, 그게 뭐가 문젠데? 뭐가 빠졌어요? 귀신의 고백이 빠졌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왔을 때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로 봤습니다. 태어난 곳을 베들레헴이고. 나사렛 동네에서 놀다가 유대나라 왔다 갔다 했다. 끝. 그런 판단과 평가가 뭐가 문제냐 말이죠. 여기 교회 있다, 저긴 절이 있다. 그런 판단이 뭐가 잘못됐느냐는 거예요. 귀신 빠졌습니다. 나는 나대로 살고 너는 너대로 살면 된다. 그러나 골로새서에 보면 인간들의 바라봤던 자연을 누가 만들었다? 예수님이 만드셨다. 하나님이죠. 그러면 자연에서 물체를 끄집어낸 이 조치에 대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이건 분명히 귀신들린 자가 하는 행세라고 지적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아무 문제없어요. 하나님의 지적이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구약에서 언약이고 신약에서 새 언약,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오기 전까지 인간들은 줄곧 그렇게 살아왔고 전통적으로 그렇게 살아왔고 주변을 둘러봐도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좀 어려운 말을 하려고 하니까 제가 주저되는데요. 익명적인 것에 굴복되는 마음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익명적인 것에 굴복할 마음 자세가 돼있다는 말은, 좀 나보다 더 힘세면 ‘예’하고 비빌 마음 준비가 돼있어요. 혼자 있을 때는 천하에 자기가 최고라고 하지만 혹시 훅하고 옆에서 누가 뭐라 하면, 빌 준비 돼있어요.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는 본인을 아무리 분석해도 안 나와요. 나올 수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인간은 귀신의 통치를 받고 있고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익명적이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어떤 초월적 힘을 의식하고 있어요. 초월적 힘에 굴복될 마음의 준비가 돼있다는 말은, 이미 인간이 누구한테 굴복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하나밖에 없는 세계 안에 종노릇하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종교, 신, 그런 단체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요. 

어쨌든 간에 시편 5편을 보면서 시편 5편은 언약이니까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만을 챙기기 위해서 물상화하고 있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와버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안 왔다고 본다면, 눈에 보이니까 대자연 있고, 해와 달, 나무, 바람, 불, 땅, 곡식 보이고 집에 가면 나와 내 가족이 보이죠. 그것으로 사는데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게 전부지요. 그래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살다고 그냥 고생 좀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것이 이간이 알고 있는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편 5편은 쓸데없는 책이 되지요. 

그런데 8절에 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갑자기 원수가 나왔단 말이죠. 그냥 살면 되는데 그 원수가 바로 주님과 관련된 하나님의 원수가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지고 가실 때에 거기 그 동네 아낙네들이 예수님이 가련하고 불쌍하다고 울었지요.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나십니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네 딸들을 위해 울라.” 예루살렘의 딸이란 말입니다. 

그 말을 같은 뜻인데 달리 이야기하면, 너는 지금 네 고통이 없다고 생각하느냐는 말이에요. 너는 네 입장에서 참 안 됐다, 불쌍하다. 착하게 살았는데 억울하게 잡혔구나. 남 걱정하는데 네가 예루살렘에 산다는 자체가 예수님 보시기에 오히려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임을 모르느냐는 말입니다. 아픔이에요, 상처에요. 

인간은 자기 상처 없으면 세상 잘 돌아가고 있는 줄 압니다. 우상의 특징은 상처가 없어요. 왜냐? 자기 좋으라고 만들었기 때문에. 부처 앞에서 자기 하소연할 순 있지만 그 부처 자체의 아픔은 없어요. 아파하려고 우상 만들진 않잖아요. 그러나 성령은 주님의 아픔이고 주님의 상처고 주님의 십자가거든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제는 네 몸 아프고 괴롭고 사는 게 힘든 것, 끊어버리고 이제부터 할 일은 예수님은 나 때문에 얼마나 아팠을까, 그걸 알란 말이죠. 그게 성령 받은 취지입니다. 

예수 너는 너고, 나는 나지, 뭐. 난 바빠. 말씀 볼 시간 없어. 나는 나대로 바빠. 당신은 당신대로 바쁘고. 지금 이렇게 돼버리면 우상화 된다고요. 자기 자신을 우상화하고. 예수 자체가 그 사람한테는 우상이 돼버리고. 아픔과 아픔이 교환되지 않아요. 연결되지 않아요. 기껏 지 아플 때나 교회 와서 빌지요. 어찌 이런 일이? 물어내라고. 내 청춘 물어내고, 건강 회복하라고 난리도 아닙니다. 땡깡도 그런 땡깡이 없어요. 그러나 다시 약간에 숨쉴만하면 언제 우리가 주님의 아픔을 알았습니까? 십자가 졌던 고통을 알겠어요. 

우리의 관심사가 예수님의 아픔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귀신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우리가 굴복하는 힘 속에는 예수님의 상처를 알자, 그런 건 아예 들어있지 않습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어떤 고생도 감수하리. 그것만 들어있어요. 지금은 고통이 많지만 고생 덜 하는 조건 하에 내가 필요한 어떤 것이라도 챙기리. 그것만 들어있어요. 늦게 취직해서 돈 번다고 나가시는데, 누굴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주님과 아무 상관없어요. 

그게 바로 귀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요. 당신과 나는 무슨 상관있습니까? 당신 인생과 내 인생이 어떻게 엮일 일이 없다는 거예요. 과연 예수님 공생애와 우리가 엮일 일이 없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가 예수님 혼자 좋으라고 가신 길이에요? 주님 가신 길이 주님 가신 길로 끝나는 거예요? 우리와 무관한 겁니까? 주께서 길이란 말이 주님만을 위한 길일까요? 아니지요. 완전히 고등학교 때 머리 길지 말라고 했는데 머리 길면 학생주임이 머리 깎는 기계로 확 밀어서 부끄러움을 주듯이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만의 인생 한복판에 고속도로 내버리는 거예요. 부끄러워하라고, 네 인생 조지라고. 

이러한 처방을 받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엮였거든. 우리는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이 자연스러워요. 왜냐? 마귀에 들린 게 자연스러워요. 귀신에 복종하며 사는 게 자연스럽고. 귀신도 안 보이고 하나님도 안 보이고 내 인생만 보이니까 그게 아주 자연스러워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건드렸고 나와 접촉했고 나로 하여금 강제로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로 질질 끌고 가시니 세상에 이런 혜택이 어디 있어요. 

이런 인간이 물상화 작업에는 내게 필요한 힘 모으기와 결부돼있습니다. 많은 힘 모을 때 그걸 부자라 하고 힘이 적을 때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말은 인간들은 이 자연을 통해서 누가 나한테 힘만 준다면 언제든지 고개 숙일 용의가 돼있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가위를 던지든 화분을 던지든 월급만 준다면 까짓 것 가위 맞고 화분 맞고 욕 얻어먹지요. 뭐 중요합니까. 밥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대한항공 취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무려 300:1이 넘어요. 그것도 공부 좀 하는 사람들만 300:1이 넘는다고요. 거기에 힘들게 들어갔으면 퇴직 때까지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가위 맞는다고 뭐가 문제입니까? 서류 얼굴에 맞는다고 해서. 욕 얻어먹더라도 오래 붙어있으면 좋겠어. 얼마든지 힘만 모은다면 굴복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뭘 원하느냐?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걸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먼저 이야기하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건 힘 아니죠. 먼저 사랑이란 뭐냐?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70~80%가 사랑이야기일 거예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에 아주 여러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사랑을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기록한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13장에 안 나와요. 어디서 한 줄기로 나와서 여러 갈래로 퍼지는지는 안 나온다 말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생명을 그냥 주는 게 아니에요. 죽음을 매개로 하여서. 매개란 말은 뭐냐 하면, 여기 물이 있잖아요. “물 줄게.” 말이죠. “물 다오.” “물 준다니까.” 이러면 매개가 없는 거예요. “물 줄게.” 말에서 ‘물’이 매개가 돼요. 실제적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잖아요. 말로서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고 해야 소용없다고. 반드시 네 자신의 믿음이 매개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믿음이 매개가 되는 행함을 보이라는 거거든요. 야고보서 2장에서. 

매개란 말은, 기침하시는데 물드세요,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고 실제로 물을 줘야 되잖아요. 예수 믿는 게 왜 엉터리냐 하면, 매개가 없다는 거예요. 사랑이 헛말이 되는 이유가, 사랑이 없을 때는 헛말이 돼버려요. 톱니바퀴가 돌아가려면 이쪽 기계와 저쪽 기계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린다고 하는데 서로 섞여 들어가서 하나가 되면 같이 따라 안 움직일 수 없는 거예요. 샴쌍둥이처럼. 두 사람인데 몸이 붙어서 같이 돌아갈 때 이걸 맞물린다고 하거든요. 물려가죠.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주의 말씀, 사랑이 겉돌아요. 안 물렸어. 주님을 사랑한다, 예수 믿는다는 겁니다. 본인이 매개가 안 돼 있어요. 본인 인생을 통해서 사랑과 희생이 발산이 돼야 되는데 예수님의 죽음이 나와야 되는데 끄덕도 없어. 안 나와. 나오질 않아요. 돈 모아서 미국에 놀러갈까. 애리조나 쪽으로, 그랜드캐년이나. 자기 일에나 자기가 매개하고 있어요. 우리 집안 잘 되고 내 자식 잘 되고. 주님과 아무 상관없어요. 미안하잖아요. 그러니까 믿습니다하고. 미안하니까 기도하고, 미안하니까 사랑하는데 결국은 뭐냐 하면, 주님 내 인생 손대지 마세요. 누가 날 손대면 격분하게 돼있어요. 

어제 주일 낮에 이야기한 것처럼 감히, “감히 왜 내게 손대느냐?” 네가 뭔데 감히. 인간이 아니고 완전히 귀신입니다. 주님이 손대도 뭐라 해요. 창조자가 와서 피조물에 손대도 뭐라 한다니까요. 우리를 만드신 부모가 손대도 우린 화를 내고 있어요. 이미 나는 독립했다, 이거거든요. 선악과 따먹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주의 원수가 뭔지 근처도 안 갔어요. 계속 그 이야기하려고 밑에 배경부터 말씀드리고 있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할 때 그 사랑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예수님이 말만 하셨습니까? 이 땅에 오셔서 오직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의 힘 모으기만 생각하는 그 순간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찾아오셔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 안에 사랑이 들어있어요.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인간이 내 말을 지킬 수 있는가? 할 수 있거든 해봐라.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거든 해봐. 금식할 때 포마드 바를 수 있거든 해봐라. 기도할 때 중언부언 달라는 기도, 이것저것 달라는 내용이 빠진 기도를 할 수 있거든 해보라는 겁니다. 너를 잊을 수 있거든 잊어보라 이 말입니다. 태생이 나 좋으라고 태어났는데 나를 잊다니요. 어느 정도로 잊어야 하느냐 하면, 참새 봐라. 내가 키운다. 들풀 봐라. 내가 키운다. 따라서 나는 너를 키운다. 그러니까 너는 너에 대해서 잊어라. 이거거든요. 못 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여 버린다. 인간은 심판의 대상. 심판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할 말을 잊어버려요. 고요해요. 

jtbc에서 하는 <비긴 어게인>이란 프로 있지요. 포르투갈에서 노래 부르는 것. 파두하우스에서 포르투갈 전통음악을 할 때 식당책상에 “조용히 하세요.”라고 붙어있어요. 적어도 고귀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현장에서 잡담이나 사적인 이야기, 당신에 관한 필요한 이야기는 입을 다물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우리나라 가수가 주눅이 든 거예요. 세상에 이렇게 조용한 가운데 노래한 적 없고 들은 적도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놓치고 내가 있는지 없는지 제거한다는 것이 얼마나 평소의 생활과는 안 맞는 겁니다. 힘든 거예요. 굉장히 어려워요. 특히 아플 때는 더욱 더 자길 잊을 수 없어요. 상처를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못 잊지요. 나중에 끝나고 난 뒤에 휴우~. 그 현장에 있다는 자체가 너무 힘들어서 아주 정신이 나갈 정도였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이 우릴 심판한다면, 심판대 앞에서 우리 마음가짐이 어떻겠습니까? 꼼짝도 못하지요. 그냥 키우시는 데로 인도하는 데로 살려주는 데로 당해야 되겠지요. 성령을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봅시다. 대자연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쪽에서 대자연을 바라보면서 자기 힘을 키우기 위해서 우상을 만듭니다. 우상이란 부처 같은 형상이 없더라도 초월자를 생각한다. 신이죠. 나 좋으라고 하는 신, 이게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5편 8절에 보면, 여기에 주님께서 원하지 않았는데 인간들이 우상의 자리에 우상이 아닌 창조주의 솜씨가 들어오게 돼요. 요청한 게 아니니까 강제로 들어오게 됩니다. 7절에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죠.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우상은 인간 마음속에 있지요. 인간 마음속에 성전이 들어왔다. 그러면 우상과 성전이 싸우겠지요. 적이란 말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주의 집의 가치를 높이면 하나님 편이고 아군이고, 주의 성전의 가치를 모욕하고 무시하고 배척하게 되면 이건 뭐냐? 곧 주님이 제시한 건데 거기에 대해서 못 마땅한 것은 주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갑자기 평화로운 자리가 전쟁터가 되는 거예요. 

성경을 볼 때 불교의 불경을 보는 것과 차이가 있어요. 불경은 내게 도움 되라고 마음 평정하라고, 염불 같은 것. 불경에 있는 지시와 명령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지킬 수 있다는 내용들로 꽉 차있어요. 또는 지키지는 못하지만 희망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착하게 살자, 열심히 살자. 가훈들 있잖아요. 

착하게 살자 하니까 생각나는데 우리교회 장로님이 참석한 결혼식, 신랑은 60이라고. 어제 오셨는데 신부는 58살이에요. 환갑잔치가 아니고 자기 결혼식에 아는 사람들 다 끌어모았어요. 그 사람이 묵호에서 노는 게 직업이에요. 자기 조직패가 열두 명인데 혈맹을 맺었어요. 혈맹의 내용이, 우리는 늙어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는다. 그 오야봉이 이번에 결혼한 거예요. 그들의 평소에 마음가짐이, 영화에도 나와요. 착하게 살자. 

불경은 그런 거예요. 목표를 누가 정했다? 내가 정해놓고 미흡한 나와 목표 사이에 빈칸을 노력해서 마저 채우면 그거는 내가 되고 싶은 나, 훌륭한 나, 이 대자연 밑에서 신의 모습에 근접해가는 나가 되는 겁니다. 이게 불교라 했지요. 기독교도 있어요. 그게 바로 개혁주의신학입니다. 한국교회 신학이 이 신학이에요. 불교와 똑같아요. 하면 된다는 거예요. 기도 빡세게 하면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복음은 뭐냐 하면, 너는 나의 원수라는 거예요. 자,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이걸 지킬 수 있나? 헌금 해놓고 안 했다고 할 수 있느냐? 분명히 내가 있는데 내가 있다는 자체를 네가 잊을 수 있나? 내가 여기 있음을 잊어버릴 수 있나?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 말은 뭐냐? 찔러주는 거예요. 너는 나의 원수의 세계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나는 너를 심판할 거야. 심판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저주를 전제로 하는 겁니다. 저주 없는 구원은 의미 없어요. 

“나는 너를 미워한다.” 미워함이 없으면 사랑이란 것도 의미 없어요. 미워하기 때문에 사랑이 빛이 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미워하는 짓거리를 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거고 그 미워하는 짓거리를 하고 싶지 않더라도 우리는 배운 게 그것 밖에 없고 아는 게 그것 밖에 없고 습성이 그것 밖에 없어요. 우리는 주님이 싫어하는 걸 그것만 해요. 

미움부터 먼저 배우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대구강의에서. 미움부터 배우지 않으면 사랑은 겉도는 겁니다. 미움에 사랑이 맞물려야 속속들이 사랑이에요. 내 자신이 미움의 대상인 것을  자체가 사랑이에요. 따라서 미워하는 자가 살아온 것도 복이지 마땅한 게 아니에요. 웬 횡재, 이런 복이 다 있나, 하는 그런 마음가짐이어야 돼요. 시편 1편 우리가 했잖아요. 5절을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됐습니다. 벌써 시편 1편부터 성경 자체가 파고 들어와요. 우리가 원한, 우리가 요구한 불경이 아니란 말이죠. 착하게 살자, 이것 아닙니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뭐가 복이냐? 바로 사태파악이 되는 게 복인 거예요. 우리는 내 힘으로 심판을 벗어날 수 없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한 게 시편 5편이에요. 왜 주님한테 우리가 밉상 받아야 됩니까? 내가 너한테 준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 그 성전이 고요한데 온 게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물고기 살아있는 것처럼 팔딱거리고 맨날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아있는 그곳에 주의 성전이 임해버려요. 쳐들어온 겁니다. 

이번에 서울 서촌에 궁중족발 사건 아시죠. 벌써 세 번째 이야기하는데 이게 돌출된 사건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서 그래요. 가게 월세를 조금 올렸어요. 삼백 만원에서 천이백 만원으로, 네 배밖에 안 올렸다고. 나 같으면 이천 만원 내라고 했을 건데. 그 사람을 내보내서 빨리 몫 돈 챙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궁중족발이 22년 전통의 집이랍니다. 그러니 단골만 해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장사가 잘 된 거예요. 장사가 빌어먹을 것 같으면 벌써 나갔을 거예요. 장사가 잘 된 게 문제에요. 내 쪽에 힘이 있다는 게 문제에요. 

그래서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 안 믿어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안 믿은 거예요. 아쉬울 게 없으니까. 나는 내 힘으로 사니까 누굴 의지해. 기댈 필요 없잖아요.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예수를 찾을 이유가 전혀 없지요. 부자가 천국 가지 힘든 이유를 아시겠지요. 혼자 사는 자는 내 나라에 오지 말란 말이죠. 니가 그렇게 잘났으면 니 나라 가란 말이죠. 

내 주변에 나를 위한 사건들이 있잖아요. 이 사건으론 천국을 못 가요. 왜냐하면 천국은 어떤 사건이냐 하면, 유일한 천국이에요. 유일한 사건이에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모든 사건은 나 살기 위한 사건인 반면에 예수님의 사건은 죽기 위해 살아가는 사건입니다. 이 유일한 사건과 살기 위한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서로 연결돼있어요. 

사건이란 말은 그 사람의 존재의 본질이 사건이 아니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사건이라 하는 겁니다. 인간은 사건을 잃어버리면 자기 인생사가 되니까 그것이 얼마나 자기한테 고귀한 거예요. 앨범사진처럼. 하나하나가 사건이에요. 그 앨범사진을 쭉 연결하면 자기 인생이잖아요. 나를 위한 나를 드러내고 자랑질하기 위한 사건이란 말이죠. 그러나 그건 살기 위한 사건이에요. 

아무리 사진 찍는 걸 좋아해도 자기 아파 죽는 걸 사진 찍을 순 없어요. 건강한 모습, 웃을 때 찍지 찡그린 걸 찍는 건 범죄자 사진 아니면 그렇게 안 나오죠.  그러나 주님의 사진은 뭐냐? 죽었던 사진만을 우리 앞에 던지는 거예요. 이 사진이 너와 연관돼있다는 거예요. 너는 너 잘난 맛에 살았잖아. 그래서 니가 나한테 상처 입혔잖아. 이 사진 한 번 봐봐. 예수님 십자가 달린 사진이에요. 그게 유일한 사건입니다. 

천국은 유일한 사건에 의해서만 다 이루었다가 되는 나라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지금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잖아요. 전쟁을 해야 되고 이 땅에서 난데없는 낯선 전쟁, 예상 못한 하나님 쪽에서 의도한 전쟁, 내가 의도한 전쟁이 아닙니다. 맨날 우리는 나 살기 위한 전쟁밖에 없잖아요. 나를 죽이기 위한 전쟁은 내가 구상하지 않았지요. 주님 쪽에서 구상한 거예요.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요. 

자살이란 주님의 상처와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는 걸 말합니다. 지가 아파서 지가 죽는 거예요. 지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는 건 자기 아픔만 끝까지 챙기고 가겠다는 장한 마음이 자살이고, 주님과 상처로 연결돼있으면 자살할 이유가 없지요. 왜냐하면 고통스러워도 주님과 연결돼있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서 죽을 때까지 못 죽지요. 

낯선 전쟁을 해야 된단 말이죠. 낯선 전쟁의 기념물이 있어요. 전쟁이 끝났을 때 다 이뤘을 때 나오는 것을 시편 5편에서는 미리 뭐라 하느냐 하면, 성전이라 합니다. 다윗이 성전 지을 때는 전쟁을 대충 거의 다 평정했을 때 하나님이 모든 전쟁을 무사히 주님의 이름으로 끝냈음을 보여주는 것이 성전이에요. 성전 안에 전쟁에서 승리했던 무기가 들어 있겠지요. 

성전 안의 무기가 뭘까요? 다 아시잖아요.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들어있지요.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지요. 사도 요한이 고개 들어 하늘나라 보니까 중앙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있지요.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나오네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그 언약궤에 바로 어린양의 피가 들어있어요. 

결국 이걸 종합하면 피로 승리한다. 피로 승리한다니까 피 찍어 바르면 그걸로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피 성분에 아미노산 영양분 들어있는가요, 미백 효과가 있는가요? 피가 온다는 말은 내 쪽에서 찍어 바르는 게 아니고 피가 나한테 온다는 것은, 피는 유일한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지상에 있는 모든 사건에서 유일하게 발생된 사건이란 말이죠.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서 파생된 연결된 사건이 내 인생을 지배하고 접수하고 장악한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죄만 짓고 주의 피는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이것을 내가 인식하게 되고. 참 어렵다. 나는 죄 짓고 주님은 용서하시고 세 번째, 그걸 내가 인식, 알고.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야 돼요. 인식하는 건 성령이고 죄 짓고 용서하시는 건 십자가 피고. 그럼 여기서 제가 질문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아저씨가 구두 만드는 일을 하는데 그 아저씨는 총각인데 부동산에 돈 많은 옛날 동창생과 연애중이에요. 그런데 그 여자 아들이 돈 없는 아저씨와 연애하는 걸 아주 싫어해요. 엄마와 그 아저씨를 떼어놓으려고 구둣가게에서 행패를 부립니다. 그걸 아저씨 아들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다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언제 적 일인데 하니까 “나, 지금 알았어.” 하는 순간이 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게 인식이에요. 

십자가 죽은 게 이천 년 전 일이죠. 우리는 이천 년 전 일로 알고 있습니다. 성령이 왔다. 그럼 지금 이야기에요. 옛날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당했다. 참 안 됐다. 다 알아요. 성경이란 이야기책에 나오니까. 유일한 사건이, 날 구원한 사건이 내 인생에 침투한 줄 모르고 주님은 주님 인생, 나는 내 인생으로 끝나는 거예요. 주와 내가 무슨 상관있습니까? 줄곧 이런 식이었어요. 그러나 성령이 왔을 때 나를 통해서 십자가 증거 하라고 주께서 내 허락도 없이 내 인생을 아주 작살을 내버렸어요. 내 고통이 아니고 그게 주님의 고통이에요. 너, 그러다 지옥 가. 그것을 우리에게 계속 반복해서 새겨주면서. 물론 십자가 옛날이야기에요. 그러나 그걸 아는 순간 현실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4.♡.134.25)18-06-13 13:23 

20180611b 부산강의 : [시편]11(5편)-상처에서 상처로 
(강의:이근호 목사) 


인간의 모든 행위가 한 곳에 모을 수 있을까요? 지금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너의 모든 행위는 한 곳에서 나왔다. 그러면 우리는 어처구니없지요. 왜 어처구니없느냐 하면, 자연 반대말이 인공이잖아요. 인공은 내가 만들어낸 거고요. 우리 가정, 우리 집 내가 만든 거예요. 자연은 내 눈앞에 펼쳐진 대자연 말이죠. 우리는 이 두 관계 밖에 몰라요. 자연 아니면 인공. 자연 속에서 내 집, 대자연 속에서 전원주택. 전부 다 자연과 인공이 관련돼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성전을 만들면 이것도 인공에 속하죠. 자연과 인공 둘 밖에 없어요. 이걸 하나로 숫자 1로 합치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집어넣으신 성전은 자연도 만드신 분이 우리도 만들고 우리의 사사로운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하시고 모든 것을 1에서 나온 다양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 원초적인 1, 근원적인 1이 허락도 없이 내 인공 속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대자연이 아니라 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것, 인공적인 것을 지키려고 하니까 주께서는 쳐내는 거예요. 쳐내니까 우리가 아프지요. 아프고 내 뜻대로 안 되니까 우리가 절망하게 되는 겁니다. 포부가 있어야 살 게 아닙니까. 희망 없으면 못 살잖아요. 한 가닥의 희망과 한 가닥의 목표만 있어도 인간은 버텨내는 거죠. 완전히 다 끊어버리면 그건 자살이죠. 어느 것 하나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데로 피할 길만 있으면 힘들더라도 견딜 수 있는데 그것마저 차단되면 사람은 미쳐버립니다. 

그러면 성전이 왔을 때 성전은 인공적인 게 아니죠. 성전은 하나님이 주신 거란 말이죠. 그러면 인간은 인공적인 것과 성전의 취지와 싸우게 되는 겁니다. 싸울 때 누가 이기겠어요? 우리가 지면 복인데 구원인데 이게 안 져요. 안 지고 우리가 성전을 만들어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배당이에요. 이게 교회란 겁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구원이 없어요. 교회를 자기가 돈 내서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희생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구원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인공에 속하거든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겁니다. 

그러면 자연도 아니고 인공적인 것도 아니고 성전을 찾아가려면 어떻게 합니까? 성전은 숨어있어요. 우리가 진짜 성전에 가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것과 뭔가 아니라는 식으로 싸움을 걸고 나오죠. 그 싸움에서 우리가 졌다고 패배할 때 진짜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이 되는 거예요. 그 고백이 5편 7절에 나오는 겁니다. 한 시간 지나고 시편 5편 7절에 이제 들어가는 거예요.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 용서, 인자, 긍휼, 사랑 다 같은 말이에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그 다음에 어디로 들어간다? 주의 집에 간다는 말은, 처음부터 주의 집은 우리가 갈 수 없고 용서, 사랑, 인자함, 봐주심, 긍휼, 이런 걸 통해서 갈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동안 가만 논 게 아니고 우리 나름대로 하나님을 장악하기 위해서 마치 우상을 섬길 때 신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처럼 신마저도 내 마음대로 부리려고 했던 그 모든 시도가 좌절되는 그게 내 뜻대로 안 되는,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임을 돌출하고 그게 노출될 때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입니다. 

특히 8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주의 의”죠. 그러면 나의 의는 빠져야 돼요. 평소에 우리는 인공적일 때 하나님의 복을 따낼 때 내 쪽에서 거룩과 경건과 착한 것을 다 끌어 모았잖아요. 괜찮은 것, 이 정도하면 내치지 않을 것들, 헌금, 십일조, 그런 걸 모아놓고 그걸 담보로 돈 빌려달라는 것처럼 복 주라하는 데 그것이 좌절돼야 돼요. 나의 의가 좌절돼야 돼요. 나의 열심과 나의 애씀과 자기관리, 자기절제. 

이걸 주일 낮에 설교한 건데 중요하니까 다시 해보겠습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지 말라. 만약에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면 필히 여기서 나의 의가 나와요.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름 열심히 했다. 더는 못합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주님이 하라는 대로 완전하진 않지만 나름 노력했다는 자기 의가 인생사에 꽂힙 니다. 이건 자기에게서 나온 사건이지 이걸로 통해서 나를 계속 살려내려는 그런 심보가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나, 이 정도 착한데 죽이면 진짜 섭섭합니다.” 이런 것. 죽이려면 저 나쁜 놈 죽이지 왜 나를 죽입니까, 이런 거예요. 

나 자신의 의, 이것은 내가 여기 존재하기 때문에 내 인생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책임지지 않으면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 했지요. 그러면 책임져선 안 되는데 왜 자꾸 자기 인생에 책임지려 하는가? 이게 선악에 담긴 원리원칙 때문에 그래요. 선과 악 사이가 벌어졌어요.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나갈 때 여기서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나의 행함, 나의 최선과 나의 의지가 개입됩니다. 내가 원인제공자가 되는 거예요.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잘못하게 되면 선도 악이 되고 내가 바르게 살면 악도 선이 된다는 것, 선과 악, 악과 선도 내 행위에 따라서 어느 쪽에 속하는지 결정된다는 이 사고방식이 바로 악마가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주고 심어준 내용이에요. 

이걸 어제 낮에 할 수 있다, 능력 있다는 것, 하갈 이야기했지요. 설교를 다 마치고 난 뒤에 어떤 분이 평하기를 하갈 이야기만 했지 사라 이야기는 왜 안 했느냐는 거예요. 멋진 질문이에요. 사라는 없는 거예요. 아기를 못 낳아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능력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없어요. 그럼 사라는 무슨 역할 하느냐? 사라는 차이만 이야기해요. 어떤 차이냐? 하나님의 약속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이 끊어져 있음, 그 차이 남을 보여주는 데 선과 악 사이에 끼어들어야 돼요. 네가 원인제공, 네가 책임진다고 새로운 인생 되는 것이 아니다. 너는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선이냐, 악이냐 매일같이 여기에 시달리게 돼요. 

만약에 내 인생에 책임지게 되면 여러분은 무거운 짐을 사서 고생하는 겁니다. 평생 쇳덩어리를 열댓 개 다세요. 무거운 짐에서 못 벗어납니다. 이번 일했으니까 악하다, 이번 일했으니까 나는 착하다. 착한 일했으니까 복 있을 거고, 악한 일했으니까 벌 받아도 할 말 없다. 이러한 고민, 걱정, 알 수 없는 공포, 두려움으로 평생 시달리세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제시한 해답은 뭐냐 하면, 사라를 집어넣는 거예요. 선과 악은 있음을 근거로 해서 나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생명나무는 우리한테 없잖아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생명나무는 격리돼 있잖아요. 격리된 생명나무가 사라의 모습으로 와요. 사라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고 약속에 속했기 때문에. 참 신기하죠. 육체의 반대말이 무 육체가 아니고 약속이라는 겁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하갈은 나쁜 여자, 이게 아니고 그냥 육체에 속하면 다 하갈이에요. 그럼 사라도 신장 얼마에 몸무게 있을 건데 그건 육체 아닌가? 그건 육체라 하지 않고 약속이라 해요. 왜? 능력이 없으니까. 여자로서 아기 낳을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를 통해서 숨겨져 있는 진리가 공개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자에게만 없음이 성립돼요. 아기 못 낳는 여성의 기능이 상실돼요. 한나처럼. 한나가 아기 못 낳으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브닌나가 아기 가진 여자가 적으로 등장하잖아요. 사무엘상 1장에서. 아기 낳는 것이 정상이죠.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대자연 있고 우린 여기 산다. 아기 낳고 산다. 아주 자연스러워요. 뭐가 문제에요? 아기 둘 있어요.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그런데 그 자연스러움이 하나님의 적이 된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하지요. 아들 낳았다고 주위에서 얼마나 장한 며느리라고 칭찬들 했습니까? 물론 매개체 없이 말로 다 때우지만. 아들 낳았으면 시집에서 다 키워줘야지. 이게 매개 있는 거지. 

어쨌든 간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경 덮어버리고 복음 안 듣고 해운대 나가면 돌아가는 게 아주 정상적이고 자연스럽고 이것보다 더 사실은 없다. 이게 바로 팩트고, 이게 현실이고 우리 선배들도 그렇게 살다 죽었고 우리도 살다 죽을 거야. 해운대 앞 바다 보면서. 여기서 더 새로운 것 이야기하지 마. 골치 아파. 나, 이래 살다 죽을래. 그런 흉내나 서로 모방하며 살 뿐이에요. 

그러나 성경 들추는 순간 주의 원수 나오고 생각지도 않은 내 의가 아닌 주의 의가 나온다고 하니까 우리는 자신을 바꿀 생각은 안 하고, “주의 의? 그것 괜찮네. 그것 어디서 팔지? 교회? 그럼 교회 다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고 그냥 좋은 것 수퍼에서 마트에서 물건 챙기듯이 얻어 챙겨서 담아서 내 것 만들면 유리하게 작용할 줄 알고 있어요. 실제로 주의 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주님은 버림받았는데 그 버림받음, 상처받음이 안 들어있는 주의 의에요. 그게 무슨 주의 의에요. 우상이지요. 

로마서 3장에서 예수님께서 화목제물로 어떤 인간도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단정 짓지요. 영광을 돌리겠다고 했지만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너는 저주 아래 조용히 있어. 그래서 어떤 인간도 영광에 이르지 못해요. 여러분, 사람이 평소에 주님 기쁘게 하려고 삽니까, 자기 기쁘게 하려고 살아요? 눈만 뜨면 자기를 위해 살아요. 오늘은 새벽까지 한 숨도 못 잤다. 전부 다 관심사가 자기 기쁨이에요. 

우리 계산은 이렇습니다. 주님이 일단 내 기쁨 해주시면 주님께 영광, 선심 쓰겠습니다. 우리는 주고받는 것에 익숙해서 일단 먼저 0순위로 내 것 챙기고 그 다음에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선심 쓸 요량이 돼있어요. 그러나 그게 하나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겁니다. 주님은 반대입니다. 주님은 자기 영광이 우선이에요. 그것 때문에 기능인으로 피조물로 인간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단정 짓지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할 말이 없어요. 

그 다음에 율법 외에 한 의를 우리에게 줄 때에 반드시 그것은 죽음이 동반돼야 되고 그 죽음에 우리가 참여돼야 돼요.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주님 홀로 자살하면 안 돼요. 뭔가 죽이는 자들이 있어야 돼요. 죽이는 자가 아까 끝부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언제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알 때가 지금이 현실이지. 

나는 주님과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내 평소의 생각을 통해서 나 때문에 주님이 힘들어하고 근심하고 고민한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가담돼있습니다. 주의 의 생산에 우리는 뒤늦게 가담돼있는 거예요. 나의 의가 주의 의를 힘들게 하고 있다, 나의 의가 주의 의를 가리고 있다는 겁니다. 나의 의 앞장세우는 데 급급해서 남들한테 주의 의를 증거해야 될 우리가 내 의가, 평생 공들인 게 아까워서 주의 의를 가리면서 나는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수고해서 이만큼 살았다. 그걸 남한테 못 보여서 환장을 했어. 

우리나라가 월드컵 16강에 못 들어가면 주의 영광을 가릴까요? 대구 사람들 작년부터 시름이 깊어졌어요. 삼성이 꼴찌라. 보통 시름이 아니에요. 부산 롯데 자이언트는 꼴찌를 한두 번 한 게 아니라서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지는 게 상식이야. 롯데 자이언트가 지면 내가 져요. 사는 보람이 살아도 헛살았어. 내가 믿는 자식 안 되면 내 인생 헛살았잖아요. 

여러분 자식한테 기대했지요. 조금이라도 보람 있으면 살 힘이 생기지요. 그런데 기대 걸었던 자식이 못 되면 누가 죽고 싶어요? 둘이 앉아서, “약 먹고 죽자. 이렇게 살면 뭐하나 같이 죽자.” 실제로 우리 집안에도 그런 일이 있었어요. 엄마가 약 먹고 죽으려고 한 순간 자식들이 경악해서, “엄마, 공부 잘할게. 안 놀게.” 그래서 공부 잘했어요. 나중에 보니까 소화제였습니다. 허~연 거짓말한 거예요. 

그 정도로 자식한테 투자했는데 그 자식이 되는 일이 없다. 이건 내가 되는 일이 없어요. 부산은 롯데 자이언트 꼴찌, 대구는 박근혜는 이제 문제 아니에요. 삼성 라이온즈 맨날 거의 지고 지고 이기고, 지고 지고 이기고. 화들이 나 있는 거예요. 그걸 아까 물상화, 나를 대표할 수 있는 그 무엇, 그것 없이는 사는 이유도 없고 보람도 없는. 얼마나 우리는 대자연과 나밖에 몰라요. 내가 세워놓은 나의 물상화. 

그런데 그 자리에 그 현장에 누가 들어왔다고 했습니까? 물상화 자리에 내가 원하는 신의 자리에 누가 들어왔다? 십자가 들어왔는데 죽음 없이 들어온 게 아니고 죽음으로 들어온 거예요. 그리고 그 죽음 사건에 우리를 멱살 쥐고 강제로 집어넣은 겁니다. 네가 평소에 너밖에 모르는 너의 보람과 인생의 희망 밖에 모르는 그것이 바로 내 의를 이루는 부정적 역할과 기능자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뭡니까? 십자가가 유일한 사건이라 했지요. 그 유일무이한 사건, 죽음을 앞장세우는 사건에 우리가 결과물로, 이미 결정됐기 때문에 원인 필요 없어요. 그 결과의 다양성, 이게 인생이란 사건으로 우리에게 나오는 겁니다. 목사님, 그것 구라 아닙니까? 구라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시편 5편 7절에서 9절에 뭐라고 하느냐? 주의 의로 성전에 들어가는 거예요. 나의 의로 못 들어갑니다. 이런 고백이 어떻게 남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고백이어야 된다고요. 성령께서 다리를 놓는 거예요. 성령께서 시편 5편과 오늘날 우리 삶을 연결시키는 거예요. 전선으로 연결시키듯이. 접속시키는 겁니다. 

착하란 말이 아니죠. 반대말이죠. 네 속성, 네 성질 죽이지 말란 이야기에요. 너 하고 싶은 대로 막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막 사는 거면 자기 막 사는 자체가 대단한 양 하지만 이미 주의 의가 있는 사람, 이미 성전, 십자가 사건에 합류된 인생 같으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인생이면 막 사는 것이 무엇과 연관된 막 사는 것이에요.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창기, 나 같은 강도, 나 같은 못 돼먹은 인간을 자비와 긍휼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긍휼과 자비가 나오는 근거로써 우리를 그 현장에 사건으로 집어넣었다는 것, 이게 우리가 사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바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도 주의 일에 편입된 거예요. 

그렇다면 남들이 내 인생에 대해서 논할 때 그들을 용서하면 안 되죠. 감히 주의 일을 평가했기 때문에 용서하면 안 돼요. 진정한 용서는 용서하지 않는 거예요. 무슨 되도 않는 말을 하는지. 미워하는 것이 사랑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에요. 뭐냐 하면, 네 눈에 나밖에 안 보이지. 그러니까 너는 개야. 너는 용서할 인간이 못 돼. 어떻게 저 같이 살면서도 천국 가느냐? 이렇게 겹쳐서 봐야지요. 주님의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자라면 용서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용서의 관계가 돼요. 

특히 부부 사이에서 용서를 늘 주고받아야 됩니다. 어떤 글에 보니까 남편의 연봉이 8천만 원 밖에 안 돼요. 여자가 화가 나서 이혼하자해서 이혼했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백화점에서 쇼핑할 돈을 충당 못하니까. 그걸 김치녀라 하는데 어떻게 8천만 원으로 내 욕구를 충족하느냐? 이러려고 너와 결혼한 게 아니란 말이죠. 적어도 1억5천 정도는 돼야 되는데 어떻게 8천으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사느냐 말이죠. 

생각해보세요. 사람이 급수를 높여놨잖아요. 높여놓은 급수를 주저앉힐 방법이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이 정도 돼야 자기만족이거든요. 어떻게 8천만 원으로 나와 같이 살 생각을 하는지 그런 맹랑한 생각을 다 하느냐 말이죠. 그것도 돈이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그런 여자와 이혼해야 됩니까? 고마운 것은 그쪽에서 먼저 이혼하지 하니 이혼해야지요. 어쩌겠어. 

돈 함부로 쓰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자기 사치하는 것만 챙길 때 절대로 그런 여자를 용서하면 안 돼요. 우리는 용서할 자격도 안 되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주기도문 보세요. 나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주라고 했지요. 그것은 인간과 인간끼리 용서하는 게 아니고 매개체가 있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받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용서하는 거예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은 주께서 너를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 용서한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서로 용서가 되지 내가 주제넘게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용서란 이름으로 그 사람한테 갑질하는 거예요. 너를 용서했으니까 앞으로 고개 숙여. 어떤 지배 욕구가 작용하는 겁니다. 

진도 좀 더 나가겠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것은 많이 어려워요. 참아내시기 바랍니다. 자연과 인공이 있어요. 인간은 자연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살기 위해서 인공적인 것을 자꾸 만들어내요. 이게 문명이라는 거예요. 문명, 과학, 기술, 지혜를 만들어내요. 특히 이방민족들이 잘했지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차이점은 이스라엘에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잔소리가 들어온다는 것, 율법과 언약이 들어왔다는 그 차이뿐이지 인간이 자기 필요한 걸 만들어냄에 있어서는 똑같아요. 

성도와 성도 아닌 사람의 차이점은 다른 것 없어요. 똑같이 자기만을 위해 살아요. 다만 침투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너의 모든 사건이 네가 의도한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너는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그 모습으로 엮여진 채 있다는 그 점에 차이가 나요.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인공적인 것이 자연과 대비될 때 어느 정도로 중첩돼있는지 파악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걸 왜 파악해야 되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4월 25일에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편입시켜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내가 참여되었고 참여된 그 자를 주의 흘린 피로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걸 4월 25일에 알았다 칩시다. 그럼 4월 26일에 어떻게 되느냐? 이게 계속 갑니까? 

사건이란 말은 계속 안 가서 사건이에요. 계속 가면 사건이 아니고 존재가 돼버립니다. 한 번 존재는 계속 가는 거예요. 그런데 사건은 딱딱 끊어져있어요.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지 사건이 이어진다고 하지 않아요. 그런 말 잘 안 해요. 사건이란 다음을 장담 못한다는 그런 뜻이란 말이죠. 늘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사건인데 주께선 사건을 주셨는데 우리는 존재로 바꿔요. 

그러면 우리 인생은 뭐냐 하면, 우리 존재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사실은 사건이 빼곡하게 쌓이고 쌓여서 꼭 창고 같아. 저는 이걸 일기장이라 하는데 우리는 일기 안 써도 늘 머릿속에는 일기장이 남아있어요. 치매 걸리면 오랜 된 일기만 남고 나머지 사건은 다 떠나버립니다. 빼곡하게 쌓여있는 것이 사건으로 나오면 좋은데 존재의 자랑으로 튀어나옵니다. 존재는, “나는 무엇이다”라고 돼요. 이걸 하나로 통합이 돼버리면 이게 바로 우상이에요. 

그러면 사건을 한 묶음으로 묶게 하는 존재가 어디서 오냐 하면, 죄로부터 악마로부터 유입이 돼요. 실컷 해놓고 내가 했다.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존재를 사건으로 바꾸지요. 그러면 이렇게 돼요. 사건은, “나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나는 무엇과, 무엇과, and거든요. 나는 아침에 세수하고, 밥 먹고, 무엇 하고, 이 연속이 바로 결과적으로 나이어야 하는 거예요. 내가 밥 먹고, 내가 뭘 하고 아니라 주께서 밥 먹게 하시고, 잠자게 하시고, 이 닦게 하시고, 옷 입고 나오게 하시고, 계속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건이 이렇게 되면 이 사건을 유발한 존재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안 보이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역전된 초월이라 합니다. 왜 이렇게 말을 어렵게 하느냐고 하는데 내가 약 올리려고 일부러 여러분을 화나도록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행위를 어떻게 한 곳에 모을 수 있느냐는 그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사건을 일으키실 때 하늘에 글씨 쓴 게 있지요. 다니엘서에 보면. 그런데 실제로 이뤄진 것은 지상이에요. 보통 초월이란 지상 말고 하늘이잖아요. 

그러니까 역전된 초월이 뭐냐 하면, 하늘에서 일어난 일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어디서? 소박한 내 인생 속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시키는 거예요. 주님이 저쪽에 계신 게 아니고 역전됐다니까. 초월, 주님이 팔짱끼고 계시는 게 아니고 지금 일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 안에서. 당신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대라. 그 당시 시편 때 이스라엘 안에서 역전된 초월적 사건이 다윗을 통해서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이 근거에요. 사도행전도 마찬가지고.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게 아니고 성전 미문에 나타나셔서 앉은뱅이를 낫게 한 거예요. 베드로, 요한이 낫게 한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낫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살아 계심을 어디서 찾아야 되는가? 바로 그 사건을 유발한 존재를 주님에게 돌리려면 주님은 안 보이니까 나는 내 존재를 우기지 말고 주님 살아 계셔서 발생된 일을 내가 계속 부여받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럼 내가 없지요. 

내가 없으면 내가 고민할 것도 없고 내 미래 계획도 의미 없지요. 내일 놀러가야지. 내일 돼봐야 알아요. 한 달 뒤에 계획 잡아도 돼봐야 알아요. 계획 잡힌 대로 되는구나, 이게 아니라 주께서 내 계획 되게 하도록 맞춰주시니 그 다음에 나오는 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가 되는 거예요. 감사한다는 말은 나 아니고 누가 계시다는 뜻이잖아요. 나 보고 감사하는 게 어디 있어요. 나를 이렇게 이끄신 것을 감사하고 고맙다고 나오는 겁니다. 

이것과 8절에 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여러분 배웠으니까 묻습니다. 사건입니까, 존재입니까? 이건 사건이죠. 어떤 사건입니까? 나는 주의 의를 받게 된 사건이고, 그리고 주님께서는 원수들을 동원시킨 사건이죠.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욕하고 약 올리면서. 정말 나를 때리면 때렸지 웃으면서 다가와서 나를 약 올리는 사람들, 성질 같으면 패버리고 싶은데 패면 폭력으로 걸리기 때문에 못 패는데, 살살 약을 올릴 때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이거든요. 

사건은 오래 안 갑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5년 전에 당한 일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거는 적들이 한 게 아니고 사건 다발을 묶어놓은 내가 나를 포기 못해서 자기가 사서 고생한 거예요. 그걸 과거에 발목 잡혔다. 내 기억 층에 내가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전도연이 나왔던 유명한 영화, 이창동의 <밀양>이 있지요. 전도연의 아이가 유괴당해서 죽었습니다. 내 아이 죽인 놈 진짜 용서 못한다고 했는데 자기가 예수 믿고 용서한다고 교도소에 찾아가지요. 교도소에 있는 사람은 과거사건이에요. 피아노 치는 아이 죽인 것 맞아요. 하지만 과거사건이에요. 얼마나 뻔뻔합니까?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쪽이에요. 참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뻔뻔스러움이죠. 그런 뻔뻔스러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여러분 인생을 최고로 결정하는 겁니다. 그런 인생 안 되면 천국 못 갑니다. 도가 넘칠 정도로 내가 봐도 너무 심할 정도로 뻔뻔스러움이 있어야 돼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내 인생 인도했다는 거예요. 이거는 안 그래도 약 오르는데 더 약을 올리는 겁니다. 전도연이 믿는 주님은 그런 주님이 아니에요. 용서하라고 지시한 주님인데 그쪽에선 이미 용서가 끝났다고 주장하는 주님이니까 둘 중에 어느 게 맞는 주님이에요? 미쳐버리는 거예요. 저쪽 하나님을 거짓말로 보는 거예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전도연은 자기 과거에 발목 잡힌 겁니다. 자기 기억 층에 잡힌 거예요. 

어제 아픈 것은 어제 아픈 거고, 오늘 아프면 오늘 아픈 거고, 내일 아프면 내일 아픈 거고. 매일같이 아프게 하고 안 하는 것은 주님의 소관이에요. 나는 사건에 그냥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에요. 그 아픔에 나는 원망했고 원망한 것이 주의 의가 깨지는 순간이고. 네가 아무리 아파서 나의 아픔만 하겠느냐고 주의 아픔과 연계시켜서 아팠고, 주님의 아픔 속에서 주의 의를 발견하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이 땅에서 역전된 초월을 벌이는 기능인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나오는 고백이 시편 5편 7절, 8절입니다.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이것도 이렇게 설명됩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따져보면 정말 어려워요. 길은 없습니다. 왜 길이 없느냐 하면, 인간은 존재기 때문에 앞에 보이는 것이 다 존재로 보여요. 존재를 칼로 두 동강 내보세요. 두 동강 낸 단면은 보이지만 그 안에 길이 없어요. 

미국에 중국집에서 먹고 나면 과자를 주는데 포춘쿠키라 합니다. 그걸 열면 행운의 편지가 있지요. 그렇게 안에 뭔가 들어있어야 되는데 우리 인생길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잘라보면 두 조각이나 나지 그 안에 길이 없어요. 길이 보일 때는 사건이 될 때는 저쪽이 존재가 아니고 사건으로 보이는 거예요. 저 인간을 누가 만들었는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건 내가 나를 보는 것처럼 그렇게 보는 거죠.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처럼 봐요. 

그런 주의 길이란 존재 입장에서는 없습니다. 내 쪽에서 길이 있다면 주께서 쪼개서 사건으로 길이 보인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전부 다 주께서 일으킨 유일한 길이 돼요. 주께서 벌이신 무대가 된다 이 말입니다. 사건의 다발이 된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에게 없던 길이 보이고, 시편 23편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제가 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나는 정경이 뭐냐 하면, 부천입니다. 

지방에서 서울에 출세하려고 왔다가 인생 낙오자는 그쪽으로 다 갑니다. 이래서 자유한국당 대변인처럼 잘릴지 모르지만 그 말이 맞아요. 왔다가 집 값 싼 데가 부천이에요. 바글바글. 거기에 전에 알던 목사가 개척한 교회도 있어요. 교회가 바글바글. 1년 내에 문 닫을 교회들 있잖아요. 많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패배자들이 모인 자들에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은 희망을 의미하는 거예요. 언젠가는 부평, 부천을 떠나서 인천 쪽 말고 강남은 너무 심하고 좀 괜찮은,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 나를 인도하사 괜찮게 사는 동네로 가는 거예요. 이게 존재 아닙니까. 

지금 사건을 통해서 내가 길인 걸 모르고 내가 괜찮은 존재가 되는 그게 주께서 허락한 길로 여기는 겁니다. 지금 길이 내 안에 있는데 구원의 길이 나와 함께 사건으로 있는데 우리는 어떤 길을 내 존재가 편히 쉴 수 있는, 간섭 안 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나 혼자 쉴 수 있는 그걸 주께서 선하게 인도했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주님 가신 선한 길이 어떤 길이었습니까? 십자가 길이었습니다. 내 존재를 생각하지 않는 길, 갈수록 내 존재 생각 안 해도 되는 길, 더 이상 내 것 챙기지 않아도 되는 길, 그저 주의 사건이 나보다 더 부지런하게 터지는 그 현장, 그게 바로 주의 성전이고. 주의 의가 나오면 성전이거든요. 주의 의가 돋보이는 그 길이 바로 우리 아닙니까. 우리가 사건이잖아요. 

성전은 신약에서는 공간이 아니고 우리 몸이 성전이죠. 사건화 된 우리 몸이, 사건이 계속 나오는 십자가 의만 나오는 그것이 오늘날 성전이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래야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성전이 십자가를 통해서 연결돼요. 움직이는 것이 성전이에요. 우리 사는 것이 성전이고. 왜? 사건이 날마다 터지니까. 무슨 사건? 자비의 사건, 사랑의 사건, 용서의 사건. 뭘 근거로? 나 혼자 내 존재가 살려고 아등바등 애쓰고 잘난 척, 남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고 있는 그 현장을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침투하시는 거예요. 

9절에 봅시다.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쫒아 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이제 이해되시죠. 사건이기 때문에 너무나 주의 적을 이젠 아는 거예요. 자기도 주의 원수로 살았던 존재기 때문에. 지금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지만. 주님의 뜻에 의해서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었거든요. 나 같이 똑같은 저 사람은 뭐냐? 패역한 인간들이고 그들은 심판받아 합당하며. 참 중요합니다. 

제가 그 사람을 미워하라 했지요. 용서 안 하는 걸 먼저 배우라 했지요. 용서하면 안 돼요. 그들을 내가 용서하면 내 앞에 오는 주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가 훼손돼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했기 때문에 주님이 먼저 용서했다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용서가 안 되면 패역한 자, 이걸 저주시라 하는데 그들은 저주받아야 합당하다고 되는 겁니다. 

누구 안목입니까? 내 안목입니까? 주님의 안목이 내 안에 들어와서 그들을 저주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만 그것이 바로 주의 종이란 말입니다. 세상에 저주를 언급하지 않으면 사랑도 의미 없고 구원도 의미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이 본문이 충분히 납득이 되지요. 자기가 하는 행세가 이것밖에 모르니까. 우릴 닮았잖아요.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시끄럽다, 그렇게 나댄다 이 말입니다. 좀 산다고 나대고. 

방시혁이란 사람의 재산이 3조랍니다. 방 씨 중에 돈 제일 많이 벌 거예요. 그 사람이 방탄소년단을 만들었어요. 지금 그런데 만약에 5년 뒤에, 10년 뒤에 방탄이 누구지? 이렇게 나오면 방시혁이란 존재를 잊어버리죠. 그래서 순간적으로 돈 벌었다고 사람이 우쭐댈 수 없어요. 만약에 방시혁이 복음을 안다면 지금 내가 만든 방탄이 뜬다는 것도 내 사건이 아니고 주님의 사건으로 떴기 때문에 나중에 안 뜰 수도 있는 건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3조의 재산을 갖더라도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는 겁니다. 이 재산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열린 무덤이라고 자기 자랑질하면 안 되지요.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쫒아 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주를 모르니까 배역할 수밖에. 11절에 봅시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아마 성경을 보면서 정말 어려운 대목을 대라면 기쁨, 감사, 고마움, 이런 거예요. 하박국에 나오지요. 나는 과수원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뭐로 기뻐한다? 여호와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했지요. 가스펠송에도 나오잖아요. 

그게 존재로선 불가능합니다. 존재가 사건 다발로 완전히 난도질당해야 가능해요. 쓸데없는 덩어리를 쥐고 살았구나. 나 잘 되기 위해 살았구나. 이것이 어느 날 사건을 통해서 주의 일만 하면 되는데 내 일을 하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덜 뻔뻔스러운 거예요. 자기한테 책임지려고 한 겁니다. 책임지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이 뭐라고 책임을. 책임지는 꼬라지 좋~다. 꼬라지가 지옥 갑니까? 지옥 가려면 책임지세요. 막 사세요. 막 살고 책임지지 마세요. 

그 정도 누릴 권한 있습니다. 예수님도 자유자거든요. 이 땅에서 자유자로 살았어요. 주님의 영을 받은 사람도 성령이 그렇게 자유롭게 살도록 이끄십니다. 남의 평가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나를 평하지 말고 주님이 평하도록 하세요. 자꾸 주님이 평하는데 내가 거기서 주님 안 된다고 나대지 말고. 그럴 땐 맞아도 많이 맞아야 돼. 

11절에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보디가드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혼자 있지 않다는 거예요. 네가 존재 같으면 존재가 주인공이지만 네가 사건이라면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함께 있어서 주님 증거하라고 네 인생을 끌고가는 것이지 너 잘 되라고 한 건 아니란 말입니다.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에 기쁨 나왔어요. 오늘 처음에 성전 나왔습니다. 성전과 주의 의 나왔고, 주의 의와 동반해서 주님의 원수가 나왔지요. 그러니까 대자연 보고 나, 어느 집안이다. 대학 가고 취직해서 산다. 이런 사람한테는 이런 용어가 낯설어요. 생뚱맞게 주의 의, 주의 원수, 성전, 기뻐하라. 돈만 있으면 기뻐하는 것 아닌가. 이런 사람에겐 정말 생뚱맞고 생소한 일이에요. 

그렇다면 이 사람에겐 이런 뜻이에요.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있습니까? 저쪽에서 먼저 알아서 고백해버려요. 난 당신 노는 물에 안 놀겠습니다. 주님 노는 물이 뭐냐? 천국이거든요. 그럼 천국 오지 마라. 교회 다니며 잘 놀아라. 교회 다니며 지옥 가. 교회는 인공적이니까. 내 안에 주님의 성전이 있거든요. 내 안이 교회거든요. 

그런데 인공적인 그런 것들, 주의 원수.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주의 인자라 돼있어요. 사랑이죠. 주의 자비로 하여금 저희를 주의 의로, 항상 주의 의만 생각게 하옵소서. 주의 자비로 용서하심으로만 생각해서 그것이 뭐냐 하면, 나는 기쁨이고 세상=지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이 고백이 구약의 다윗의 고백을 성령께서 딱 잡아서 십자가 아래 있는 우리의 고백으로 오늘도 사건으로 돌려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큰 차이 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안 믿는 것조차 주의 일인 것을 우리가 인정하게 해주시고 내가 믿게 된 것도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 것을 믿게 하셔서 세상 모든 것이 주님의 십자

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요동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부산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조와 정서 180910 이근호  (0) 2018.09.13
임플란트 180709 이근호  (0) 2018.07.13
자기통치 180514 이근호  (0) 2018.05.16
동질성과 정체성 180409 이근호  (0) 2018.04.13
관계 재정리 180319 이근호  (0) 2018.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