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구조와 정서 1809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9. 13. 21:26
2018-09-10 17:24:44조회 : 189         
구조와 정서 180910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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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19.♡.174.132)18-09-13 20:26 

20180910a 부산강의 : [시편]13(7편)-구조와 정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7편 1절에 보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렇게 돼있지요. 시편을 보면서 되게 쫓긴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사는 모습에 빚지지 않는 한 누구한테 쫓기는 법은 없다 이 말이죠. 쫓기는 사람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 또는 신앙과 오늘날 각자 살면 그만인 사람과 연결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시편의 특징은 굉장히 다급하거든요. 한 쪽은 다급한데 한 쪽은 느긋하고. 그런데 다급한 사람이 어떤 신앙적 고백을 내놓을 때 와 닿지 아니하고 그건 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지 우리와 상관없다는 겁니다. 물론 은혜 되고 안 되고는 나도 이 사람처럼 집안에 다급할 때에 갑자기 사고가 일어난다든지 내가 애지중지 키우는 자식이 잘못 된다든지 자기 인생에 장벽이 있거나 몸이 아플 때는 시편을 보면서 눈물 울리면서 은혜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건 자주 있는 경우가 아니고 대부분은 그냥 평온하지요. 

평온한 것과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하실 때에 우리는 생각하기를 다윗은 평온할 때가 없었는가, 늘 쫓겼는가? 그런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어려울 때 하는 이야기가 다윗이 갖고 있던 보편적인 신앙을 대신할 수 있느냐는 것부터 우리가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그걸 의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생을 살면서 어려울 때 한 번 한 이야기가 그 사람의 전부를 다 대신할 수 있고 대변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어려울 때 한 이야기가 대신할 수 없다면 시편은 우리가 어려울 때 볼 책이지 평소에 볼 책이 아닌 게 돼요. 그러면 성경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거죠. 다급할 때 보는 시편이지 평소에는 우리와 상관없게 돼버립니다. 그렇지 않고 시편에 나오는 다급해 보이는 내용이 우리가 평소에 몰랐던 걸 대신한다면 우리도 늘 다급해야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다급하지 않으면 잘못 됐다는 생각이 들 거고.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억지로 다급한 것을 미리 상상해서 용을 써야 되느냐는 문제도 생기거든요. 

그래서 시편 7편 1절만 보면서 우선 이것부터 생각해봅시다. “객관적으로 나는 나를 모른다.” 객관적으로 모른다는 말은, 인간은 어디에 마음 뺏기고 있느냐 하면, 정서에 마음 뺏기고 있어요. 정서란 말 아시지요. 상당히 감정이 풍부한 것, 정서적인 것. 정서란 말이 어려우면 비슷한 말로 기분.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자기가 기분 따라 살다보니까 그때그때 웃기면 웃으면 되고, 슬프면 울면 되고, 날씨 덜 덥고 기분 좋으면 기분 좋다하면 그만이고. 그거는 객관적이 아니에요. 주관적이죠.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서 보라는 책이 아닙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우리는 자기 정서에 푹 빠져서 자기 즐거움에 집착돼있을 때 집착된 내 모습 말고 그 외부의 모든 공기의 순환이나 날씨나 해와 달 모든 것은 누가 운영합니까? 주님이 운영하지요. 주님이 운영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관심 없고 자기 정서에 푹 빠져있는 겁니다. 그럼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은 따로 노시고 우리 따로 노는 게 돼요. 과연 이렇게 따로 노는 것이 성립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따로, 우리 따로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에 그러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중보자에게 넘겼다는 말은, 중보자께서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 우리 자신에게 자기 정서에 빼져있고 매료돼있는 인간에게 중보자적인 요소를 계속해서 인간을 장악하고 다루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이 된다는 말은, 중보자께서 나라는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내가 이해하고 알아줄 때, 아버지도 알고 아들을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 했잖아요.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영생이란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아는 게 영생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자기 정서에 빠져 하루하루 눈떠서 기분 좋으면 좋은 거고 자기 기분에 빠져버렸어요. 이렇게 돼버리면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삶에 있어서요. 저 사람도 자기한테 빠져있고 우리도 우리에게 빠져있고. 객관적인 것은 둘 다 통합한 객관성은 없고 각각 자기 주관에 따라서 자기 스케줄 따라서 살아가는 거예요. 

스케줄이란 말을 했지만 중보자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뭐냐 하면, 중보자께서 프로그램화시킨 거예요. 인간을 만들 때 그냥 만든 게 아니고 프로그램이 안에 들어있어요. 일종에 영화 <매트릭스>와 비슷한 건데 모든 것이 다 이유 없이 태어난 게 없고 어떤 움직임 하나 우리의 발걸음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머리카락 자라는 것, 모든 것은 그냥 중보자와 무관해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집 하나 사는 것도 중보자와 관련돼있어요. 

만약에 내가 집을 구입했다. 나는 집을 구입했다고 하면 불신자와 다를 바 없어요. 똑같아요. 저들도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 내가 어제 낮에 죽은 자(시체)로 봤는데 죽은 자의 특징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있어요. 끊어진 것도 본인 쪽에서 끊은 게 아닙니다. 악마한테 끊도록 허락한 것이고 그것마저 그리스도 앞에서 프로그램화 된 거예요. 악마의 존재와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악마는 예수님의 피조물이거든요. 예수님이 만드신 게 악마에요.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자하는 것도 그리스도가 꼭 해야 될 일의 필수 요건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보면, 악마가 하는 일이 뭐냐? 이 세상 신이 하는 일이 복음의 영광을 가리는 거예요. 그럼 집을 구입했다면 성도는 무엇과 관련돼있느냐 하면, 집을 구입할 때 예수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일을 시켰습니까, 라고 돼야 돼요. 내가 구입했다면 주체가 ‘나’가 돼요. 내가 이번 집 구입에 주인공 노릇한단 말이죠. 그러나 그렇게 되면 불신자와 차이점이 없어요. 중보자의 프로그램이 여기서 나타나지 않은 겁니다. 

그러면 중보자가 우리의 정서에 빠져있고 감정대로 살아가는 불신자와 똑같지요. 그런 사람을 성도답게 특화시키는 것, 성도는 이런 점에 다르다고 특화시키는 방법이 뭐냐 하면, 말씀의 실재성을 접촉하는 일을 해요. 말씀 여러분이 아시잖아요. 말씀에 의해서 천지창조 했으니까. 모든 우주의 프로그램화 된 하나님의 원칙, 원리로 보면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풀의 꽃같이 사라지지만 무엇은 영원하리라? 말씀은 영원하죠. 영원하다는 말은 영원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시적인 것이 잠시 나타났다 없어진다 이 말이에요. 

말은 간단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거예요. 우리 인간 잠시 있는 존재거든요. 잠시에요. 안개가 물방울이잖아요. 물방울은 잠시 만들어졌다가 아침 열시면 없어지잖아요. 이게 야고보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안개라도 괜찮지만 물방울이에요. 안개의 특징은 멀리서 보면 있는데 가까이 오면 없는 것, 사라지는 것, 이게 안개입니다. 멀리서 보면 뿌연데 특징적인 것 하나를 뽑아낼 가치가 없어요. 전체를 안개라 하니까. 전체를 보는 안목에 의해서만 발견되니까. 

인간은 안개 속의 물방울 같은 존재라서 물방울 자체로는 의미 없고 전체로 안개라 보면 되지요. 그것도 잠시에요. 왜 모든 것이 없어져야 되느냐 하면, 있어야 될 것만 있어야 되기에 그런 거예요. 있어야 될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빛이 있으라 하매 있었더라. 모든 것이 말씀만 명령만 있어야 돼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지시만 또는 요구조건, 요구사항만. 

그 다음에 실재성이란 것은 유일하게 허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말씀의 실재성은 말씀만은 허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가치는 태어나기 전에 인간의 가치가 있고 죽고 난 뒤에 인간의 가치가 비로소 알려져요. 그래서 이게 어려워요. 태어나기 전에 창세전에 이미 사랑받기로 된 사람과 미움 받기로 정해져 있잖아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있고 그게 말씀의 실재성, 구체적으로 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한 거죠. 그걸 약속이라 하죠. 약속이 구체화 된 것을 언약이라 하고.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있고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알고. 왜? 천국 아니면 지옥, 지옥 아니면 천국이니까. 그러면 중간에는 혼선이 일어나요. 갈치 대가리 떼고 꼬리 자르고 중간을 먹잖아요. 갈치 중간을 먹으면서 어느 식구도 갈치가 이 모습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갈치 중간을 먹으면서 살 때는 분명히 대가리 있었고 꼬리 있었을 것이라고 합체해서 먹잖아요. 먹기는 중간만 먹지만, 나머진 음식쓰레기통으로 날아갔지만. 우리 인생을 그렇게 보잔 말입니다. 

시편 7편 이야기는 그렇게 보자는 거예요. 윗대가리 떼고 꼬리 떼고 나머지로 자기 자신을 규정하지 말자는 겁니다. 붙이자는 겁니다. 대가리 붙이고 꼬리도 붙여서 전체적 안목에서 인생은 무엇이냐? 이렇게 보자는 겁니다. 그러니 정서가 아니에요. 일시적 감정이 아닙니다. “야, 가을이다. 기분 좋다. 해운데 놀러 가자.” 이게 아니고 하루하루 살면서 우리는 일시적인 것에 목매고 사는지 그것이 인생 전부인줄 알고 그것 때문에 싸우고 그것 때문에 신경 쓰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모든 것이 타이밍이 있기 마련인데 먹을 때 있으면 마실 때 있고 날 때 있으면 죽을 때 있고 사랑할 때 미워할 때 다 있는데 왜 내 사랑은 오래 가야 되고 남의 사랑은 없어져도 괜찮고 미워하면 안 되고. 

그래서 사람들은 헤어질 때 사랑을 안다고. 사랑했다가 아니라 헤어질 때 사랑했는지 사랑 안 했는지 헤어지면 알지요. 헤어져보니 좀 아시겠습니까? 안 헤어져도 알지요. 그래서 부부 간에 죽은 사람 그리워진다고 안 합니까. 왜 그러냐 하면, 너는 너고 나는 나로 따로 생각했거든요. 정서적으로 인간은 자기주장이기 때문에. 그런데 죽고 난 뒤에 미웠던 사람이 나의 자아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게 뚝 떨어져 도려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자기 자신이 정신적 장애자처럼 망가진 거예요. 그래서 밉더라도 나중에 죽고 나면 욕까지 하죠. 이노무 영감탱이 일찍 갔냐고. 욕을 하면서도 빨리 내 빈 터를 채워주란 거죠. 

그만큼 인간은 앞뒤가 빠진 것에 대해서 보충하려는 의식이 강렬합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를 때는 태어난 것들을 대신할 그 무엇, 그리고 앞에 죽음을 잊을 정도로 굉장히 행복에 넘치는 그 무엇을 취미란 이름으로 몰입하게 돼있어요. 죽음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허무라든지 부정적인 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우린 매일같이 자기를 촉구하지요. 자기를 채찍질해서 이 취미 끝나면 그 다음 취미로 넘어가고 계속 해주는 겁니다. 

남자들한테는 그런 사회적 장치가 구비돼있어요. 프로야구. 3월말부터 시작해서 10월초면 시즌이 끝나죠. 그 시즌 동안 참 행복했습니다. 롯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시즌이 내 아픔과 불행을 잊게 만들지요. 특히 이대호. 대구는 삼성 좋아해서 삼성의 선수들 팬하고. 프로야구가 요구하는 것도 있지만 본인이 스스로 거기에 몰입하고자 애씁니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도 그렇고. 그래서 유럽 남자들 종교는 축구라고해요. 교회는 안 가고 축구장에 다 가있어요. 이태리, 유럽 전체가 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낚시에 빠진 사람, 어떤 사람은 등산에 빠진 사람, 어떤 사람은 오토바이에 빠진 사람. 

하여튼 이 세상의 정서가 나를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해요. 내가 늘 행복하고 늘 기쁨을 유지할 정도로 세상은 충족시키지 못하니까 세상 즐기는 것도 노력해야지요. 이것이 바로 아까 이야기한 객관적으로 자기 보기에 실패한 겁니다. 인간은 객관이 싫어. 내 정서, 기분에 따라 살고 싶어. 주관적으로 살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내 기분 따라 돈 쓰는데 니가 왜? 그런 이야기하죠. 

그렇다면 다시 시편을 보게 되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주께 피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그러면 언제 정서가 깨지느냐 하면, 내부에서 나에게 사건을 던질 때 나의 행복한 정서는 깨져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모차르트, 쇼팽의 음악을 듣고 자기 정서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있는데 뭔가 문밖에서 요란한 금속음이 들립니다. 보니까 어떤 차가 지나가면서 내 차를 건드렸어요. 그럴 때 클래식에 몰입된 아름다운 정서는 어떻게 됩니까? 위기를 맞아 다 깨져버리죠. 그러면 음악 끄고 빨리 나가서 교통사고 처리해야 될 것 아닙니까? 

바로 시편 7편이 그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바깥에 사건을 일으킵니다. 남한테 쫓기는 걸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윗이 왕일 때 하나님께서 사건을 일으킵니다. 인구조사 할 때 사건을 일으키죠. 사흘 동안 벌 받을래, 석 달 동안 벌 받을래, 삼 년 동안 벌 받을래? 제일 짧은 것 벌 받겠습니다. 제일 짧은 게 메르스 전염병 퍼지듯이 사람들 인구조사 한 인구가 줄어듭니다. 석 달 동안은 다윗이 옛날 쫓기는 아픔, 그때 얼마나 괴로웠으면 지긋지긋했으면 전염병으로 백성들 죽는 게 낫지 자기가 쫓기는 게 힘든 거예요. 지금 시편 7편이 다윗이 쫓기는 이야기, 사건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쫓기는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때 다윗이 중보자 역할하고 있다는 거예요. 시편에. 이제 시편이라는 것이 우리가 다급할 때만 볼 책이 아니고 평소에 대해야 될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인 것을 아시겠지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릴 때에 인간이 있고 하나님 계시다면 그냥 계시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이 안에 중보자 있다고 했지요. 이 중보자의 기능을 지금 시편에서는 다윗이 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들 보기에 다윗이 그냥 다윗으로 보이느냐? 하나님께선 장차 그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있어요. 예수 그리스도 입장에서 보는 겁니다. 

다윗이 쫓기고 움직이는 것은 개인적인 주관적인 정서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 우주를 이야기하는 구조문제에요. 그래서 우리는 구조와 정서를 대립해서 세상을 이해해야 됩니다. 내 정서냐, 내 구조냐? 나는 어떤 구조에 속하느냐, 아니면 내 정서대로 움직이느냐? 그것을 분석해봐야 돼요. 정서라고 한다면 어려울 때 보통 정서적으로 살아가게 마련인데 우리는 정서적으로 좋았을 때와 일시적으로 나빴을 때를 연관을 시킵니다. 

병원이 있을 때 병원 있다고 다 들어가진 않아요. 언제 들어가느냐? 병원엔 아플 때 들어가죠. 아플 때 병원이 있다는 말은 우리에게 아플 때와 건강할 때를 구분 짓는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병원이란 건물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움직인다는 말은, 다윗처럼 급할 때 있고 안 급할 때 있다는 그런 말이 아니고 우리는 늘 객관적으로 알 수 없는 그것을 주관에서 벗어나서 우리를 객관화시킨 존재로 다윗이 우리에게 자기 일로 통해서 사건을 제공하고 말씀을 제공하는 그런 자리에 다윗이 있는 겁니다. 

얼마나 우리가 바쁩니까? 바쁘다보면 못 보지요. 이 말을 분석해봅시다. 바빠서 성경을 못 봅니까, 아쉬운 게 없어서 성경 안 봅니까? 아쉬운 게 없어서 성경을 안 봐요. 성경 안 본다는 말은 그만큼 여유만만하다는 거예요. 스스로 객관 같은 걸 살피지 않더라도 내 행복에 대해서는 충분히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 있는 게 아니고 누구 영광이냐 하면, 나의 영광, 찬란함 할 것도 없이 너무 거창하고 나의 소박한 행복이라 합시다. 나의 행복에 대해서 지장 없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관심 없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내 안에 누군가 나만 쳐다봐, 라고 잡아당기는 게 있어요. 어떤 괴물이 있어요. 오늘 강의주제는 전쟁입니다. 인간은 전쟁 없이는 주관에서 객관으로 나가질 않습니다. 아까 교통사고 이야기했잖아요. 그것도 일종에 전쟁 아닙니까. 가만있는데 외부에서 날 건드렸잖아요. 

지금 이 세상은 중보자가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어요. 그게 에베소서에도 나오고 갈라디아서에도 나오고 여러 군데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 잡은 자의 권세 싸움이지요. 성경에 나와 있거든요. 그런데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전혀 감이 없어요. 그런 감각이 없다니까요. 영적 전쟁의 감각이 없이 그저 경제 감각만 오고. 그저 가게 열어놨으니까 장사 잘 되게 해주시고, 경제가 잘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경제 대통령을 뽑지 영적 대통령을 뽑질 않습니다. 영적 대통령 다 낙선했어요. 안 돼요. 

어느 큰 교회에서 지가 당회장 계속하려고 이번에 여러분의 호응에 의해서 대통령 나옵니다. 교회 돈으로 나와서 떨어진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걸 허경영류라 하는데, 이게 허경영만 있는 게 아니고 대통령선거 때 보면 1~4번 빼놓고 나머진 다 허경영이에요.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가? 자기 종교단체에서 나와요. 그게 불교도 나오고 천주교, 기독교도 나오고. 이참에 전국적으로 자기를 PR할 수 있는 유일한 찬스로 보는 겁니다. 심지어 촌에 가보세요. 벽보에 허경영류가 이름 날리고 있어요. 사진 박고 이름도 거창해. 세계통일협회, 뭐 이런. 통일교만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왜 그렇게 돈 쓰느냐? 자기 교인들 단도리하는 거예요. 나는 신적인 초월적 존재기 때문에 이번 크나 큰 사명을 받았다. 내가 이번에 기도원에서 기도하니까 니가 대통령 해서 남북통일 시키라는 그런 사명을 받았다는 겁니다. 음성을 들었다는 겁니다. 지도 안 되는 걸 알아요. 그걸 통해서 자기 교인들 손아귀에 쥐겠다는 거예요. 영적 카리스마로. 교인들이 불쌍한 건지 바보인지, 참. 

그런 것을 우리가 욕하지만 만약에 내가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그런 생각을 안 하겠어요? 거기 들어있는 괴물이나 내 안에 괴물이나 똑같은 마귀거든요. 마귀는 뭐냐 하면, 너는 소박한 니 가정의 행복만 생각해. 딴 것 생각하지 말고. 이게 마귀의 음성이에요. 드라마 보세요. 모든 드라마가 악마의 보이스가 그 안에 다 삽입돼있습니다. <같이 살래요>에서 아버지2 나오잖아요. 전부 다 잠시 가는 안개 같은 인생입니다. 그 인생에 승부 걸면 안 돼요. 

다윗이 쫓기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로 쫓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안에 들어있습니다. 사람들 성경 안 보지요. 오늘 제목 정했습니다. 마비. 경직됨. 전기로 인간을 쑤시면 마비되죠. 악마가 모든 현대인을 마비시켜놨습니다. 교회, 교인들 마비시켜놨어요. 말씀에 아무 감각 없습니다. 그냥 때 되매 교회 열한시에 나오는 줄 알고 있어요. 말씀으로 산다? 웃기는 소리하고 있네. 돈으로 사는 거죠. 말씀으로 사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애굽처럼 떡으로 사는 거예요. 그 떡은 유월절 어린양에 막혔어요. 떡으로 살던 인간들 죽었습니다. 떡으로 먹였던 맏아들 죽었어요. 

그러면 어떤 단절면을 타고 넘었느냐 하면, 떡으로 살지 않는 세계로의 초청을 받은 겁니다. 이스라엘이. 떡으로 살던 데는 이스라엘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유월절 어린양을 통해서 떡 말고 다른 것으로 영생을 얻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으니 그 국가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왜 이스라엘이냐? 야곱에게 그런 단절면을 초과했던 넘어섰던 경험을 야곱이 갖고 있기 때문에. 요셉도 마찬가지고요. 아브라함, 이삭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 손댔다는 겁니다. 뭘 손댔어요? 그냥 밥으로 먹고 사는 그런 인간 손댈 것 뭐가 있어요? 밥으로 먹고 사는 인간은 필히 하나님 앞에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자고 손을 댄 거예요. 성경 백날 봐도 아브라함은 그리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지. 오늘날 교인들이 그런 식이에요. 이삭? 이름 괜찮네. 이삭은 이삭대로 살고 이삭은 옛날 사람이니까 오늘날 나는 나의 소박한 행복을 위해서 살면 되지, 내가 하나님인가, 천산가. 내 역량대로 살고 행복하게 잘 살면 되지, 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 강의하면서 그 대목 다룰 거예요. 미리 다뤄볼까요? 어렵지만 미리 다뤄보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혈육관계로 연결돼야 돼요. 이건 말이 안되지요. 하나님은 영이신데 인간은 육이니까 연결이 안 되잖아요. 어떻게 영과 육이 연결됩니까? 안 되지요. 그런데 인간과 인간 사이는 혈육으로 연결돼있어요. 내가 태어난 자식과 또 나를 태어나게 하신 조상과의 수평적인 인맥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은 영원함을 뽑아냅니다. 제작해내요. 생산해내죠. 그게 조상숭배입니다. 

인간은 혈육적 범위를 못 벗어나요. 아버지가 살았던 땅에서 내가 살고, 내가 살던 땅에서 자손이 사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의 땅 범위를 못 벗어나죠. 골로새서 3장에 땅에선 죽었고, 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못 알아들어요. 대전에서 강의했음에도 못 알아듣습니다. 다중현실이란 말조차 이건 상당히 어려운 말이 됐어요. 그걸 제가 용어를 만들고 성경으로 해서 그런데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살게 되고 한 주일에 교회 가게 되면 교회 가는 시간이나 교회 안 가는 시간이나 같이 수평적으로 옆에 있는 장소에요. 

한국에 있다 미국 갔다. 그건 좀 멀긴 하지만 같은 옆에 있는 수평적 관계에요. 한국에서 미국 간다고 해서 딴 인간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는 천국 간다는 것은 인간으로선 성립 안 됩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에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말씀을 통해서 이루겠다는 거예요. 인간 보기에는 억지고 하나님에겐 필수적인 작업이에요. 하나님의 자기 숙제요 자기 과제입니다. 인간은 아예 안 되는 일이에요. 안 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되는 일만 하자는 거예요. 뭐냐? 말씀 먹는 것보다 밥 먹는 게 훨씬 잘할 수 있는 거예요. 

말씀 먹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앞에 있는 피자 먹으라고 하면 먹을 수 있어요. 그러나 내 살과 피를 마시라 하면 이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 곁을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간 걸 보고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올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이 유월절 어린양을 극복하고 홍해를 극복하고 광야로 들어선 취지와 동일한 취지에요. 아버지가 보낼 때는 네가 살던 대로 사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애굽에서 한 바꿔치기가 매일같이 실제로 일어나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를 먹고 예수님의 살을 먹을 수 있는 인간으로 내가 만들고야 말겠다는 거예요, 그게. 

이렇게 하면 교회 교인들 반 나갔습니다. 그것도 다 안 나간 것만 천만다행인 줄 알아야 돼요. 예수님에겐 다 나갔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하신 말씀이에요. 성령으로 말씀하게 되면 들어오는 게 아니에요. 있는 자도 다 나가버려요. 제가 어제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복음으로 목회한다는 것은 목회하는 게 아니고 망한다는 뜻이에요. 복음은 기쁜 소식 아닙니까. 어느 정도 기쁘냐 하면, 내 인생 망해도 좋아요, 하는 그게 복음이에요. 그것 안 되면 양다리 걸치는 겁니다. 결국은. 양다리 걸친 것도 아니죠. 지 자라가 수평에서 수평으로 갈 뿐이에요. 

그런데 복음으로 망해도 되니까 복음으로는 망해도 안 망해져요. 망하는 것도 내 뜻대로 안 돼요. 주께서 함께 움직일 때 진짜 복음으로 망하는 겁니다. 비행장에서 창문 열고 보면 같이 나란히 수평적으로 나무가 보이고 건물이 보여요. 그러나 일단 비행기 뜨면 창문으로 하늘만 보이지 억지로 보게 되면 저 밑에 땅이 보이잖아요. 복음이란 뗄 수 없는 것을 떼게 하십니다. 그럼 우리가 뗄 수 없는 게 뭐냐? 혈육적 관계에요.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간다면 그때 자식 생각 안 하겠습니까? 아무리 비행기 타고 자기 힘으로 하늘로 떠봐야 땅에 남겨진 손자, 자식 걱정이 또 되는 겁니다. 인간은 육에서 떠날 수 없어요. 육에서 난 것은 육으로 가라앉고 결국 영으로 난 것은 육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돼있어요. 속성 자체가 뜨게 돼있어요. 헬륨가스를 먹었는지 성령을 먹었는지 하여튼 뜨게 돼있어요. 

성경 한 구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그러면 똑같은 구절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한테 희한한 일이 생겼네. 이렇게 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나도 이래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보는 사람이 있어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동일하게 나에게 일어나야 예수님과 영원히 천국에서 사는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란 말이죠. 거의 없지만.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은 참 위대하긴 위대해. 특별한 일이 일어났으니까. 덮자. 이러고 끝나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놓고 자기는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 간다는 거예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누가 유월절 피 발라서 살아났다면 그걸 구경하면 안 돼요. 우리 집도 유월절 피가 같이 페인트칠 돼야 돼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라면 필히 나에게도 일어나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과 합세할 수 없습니다. 교회 50년, 60년 그게 무슨 성령을 대신합니까? 그게 어떻게 비둘기를 대신해요. 집에 비둘기 키울까요? 물론 예수님은 비둘기고 오순절에 사도들과 사람들에게는 불의 혀로 오지요. 불의 혀는 심판의 말씀이에요. 불 심판이거든요. 

전에 설명했는데 구약 전체가 이스라엘 멸망에 관한 이야기고, 이스라엘 멸망시키면서 거기에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냥 멸망시키는 게 아니고 멸망해야 될 이유가 나오죠. 이게 언약입니다. 구약 전체가 구약, 옛날 언약이잖아요. 옛날 언약은 이스라엘나라를 만들어놓고 파괴시키는 주님의 작업이에요. 그러면 파괴시키는 걸 아쉬워하지 말고 어떤 원리와 어떤 기준에 의해서 파괴되었는지 그걸 주목해보란 말이죠. 

주목해보니까 요엘, 하박국, 스바냐, 모든 데 보면 심판이 나오죠. 멸망 소식이 나오죠. 스가랴에서는 마지막에 천사를 세상 모든 구석에 다 보내요. 스가랴에 의하면 이 세상은 당구대입니다. 당구대가 사각이고 포켓이 있잖아요. 포켓에다 천사를 보내는 거예요. 미리 점령, 미리 접수하는 거예요. 아파트 청약하는 것처럼 주께서 천사로 미리 접수한 거예요. 청약 받은 아파트 들어가면 천사가 살고 있습니다. 

모든 세상 어느 구석도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 후미진 곳 없고 하나 빠진 지역 없어요. 미국에 집 사놔도 천사가 살고 있어요. 어딜 가도 이 세상은 이미 접수했단 말이죠. 천사는 지시만 기다리는 거예요. 천사한테 지시합니다. 첫째 나팔, 둘째 나팔, 셋째 나팔, 첫째 대접, 딱딱 지시에 따라서만 천사는 기계 같아요. 인공지능입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할 뿐이에요. 스케줄 따라서 움직이는 겁니다. 어차피 불 심판은 이미 끝난 거예요. 

옛날에는 인간이 모험가 있어서 아프리카 후진 곳에 갔지만 이 세상 어떤 구석도 더 이상 남아있는 구석은 없어요. 스가랴에 의하면. 그러면 이 세상이 멸망했다는 것을 다 안 가보고 시대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바로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증거가 있었어요.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내통했던 하나님과 관계 맺었던 나라잖아요. 그 장소가 성전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성전이 파괴된다면 이 세상은, 이스라엘이 전 세상을 대표하는 제사장 나라거든요. 출애굽기 19장 6절. 이스라엘이 대표 나라에요. 대표나라가 작살났다면 이 세상 개 같은 이방인은 볼 것도 없어요. 다 작살난 거예요. 

그래서 심판을 행사하고 심판이 보편화되고 보편화된 걸 확정짓고 난 뒤에 거기서 뭐가 빠져나오느냐 하면, 의외의 것 또는 여분의 것, 다른 말로 잉여, 흘러넘치듯이 여기서 구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와요. 여분의 것에서 의가 나올 때 이걸 초월이라 할 수 있는데 일반 목수의 아들인데 죽고 난 뒤에 부활할 때는 초월자가 됐지요. 애초부터 초월자가 들어오신 거예요. 초월자를 따라 같이 나와야 될 사람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십자가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자, 갈라디아서 6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지요. 성령을 받은 자, 사도 바울이죠. 

그 사도 바울이 나오면서 이런 말했어요.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우리의 정서에 갇혀있는 것들을 탈출시키는 복음이에요.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더 이상 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무엇을 해도 무죄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무엇을 해도 의다. 의인이 된다. 인간의 양심,
왜냐하면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기 때문에 모든 걸 할 수 있는 거예요.
율법에 개의치 않고 모든 걸 할 수 있는 거예요.
율법이 지적질 할 거예요. 하지만 지적질 하면 할수록 내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의는 돋보일 거예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 되었다는 것은 주님이 주신 관계성이 더욱 더 부각이 될 것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악마가 나를 건드릴 여지가 나한테는 전혀 없다는 거예요.
마음껏 법적으로 고소하고 협박과 공갈과 퍼부으란 말이죠.
직접 주님께서 마귀를 보내서 우리에게 그런 일을 시킬 거예요.
너 이런 짓하다간 우사 당한다. 인간 말종이야. 이러면 집안에서 사회에서 끊어져.
그러면 성도는 그 끊어짐을 확인하기 위해서 지금 주님은 마귀로 그렇게 하는 거예요.
 

부부인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쪽은 둘 때에 끝에 가서 알지 말고 미리 알자는 거예요. 한 쪽은 양심의 법에 의해서 벌벌 떨고 있고 한 쪽은 어째서? 그게 뭐 어째서? 너무 기쁜 소식이라서 여러분 실감 안 나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시시한 일이에요. 무슨 일이 없다? 심각한 일은 전혀 없어요. 왜? 우린 이 세상에서 죽었기 때문에. 골로새서 3장에서 우린 이미 땅에서 죽은 자에요. 죽은 귀신이에요. 

병원에서 죽은 귀신이, 그런 일이 있다고 예를 들면,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위에서 보니까 누워있어요. 그래서 다시 병원에 간 거예요. 심심해서. 놀이삼아 여자 화장실 다 열어보고. 귀신이기 때문에. “아이고, 우리 아빠가 죽었네.” 처음부터 인간은 죽게 돼있어요. 히브리서 9장 말씀이죠. 인간이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모든 것이 말씀만 실재해요. 우리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허깨비에요. 일종의 망령? 오늘 제목으로 망령이 괜찮은데. 아까 마비로 했는데 고치겠습니다. 망령은 너무 심각하다. 악마가 우리를 마비시켜놨어요. 법으로. “너, 그러면 행복 없어진다. 그러면 가정 파탄난다. 서로 도와주고 협조해야지.” 계속해서 우리에게 양보해야 되고 참아야 돼. 성령의 열매를 못 알아봤어? 맨날 성령의 열매, 육의 열매 들이대면서 우리로 하여금 짼다 하지요. 주눅 들게 만들어요. 쪼이게 만들죠. 

우리는 쪼아봐야 한 번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 심판이 있으니라. 이 패 나올 거예요. 백날 쪼아야 장땡 안 나오고 그게 나와요. 제가 여러분에게 만약에 문제를 낸다면, 장땡과 십자가의 관계를 논하라, 뭐 이런 것. 논하기 쉬워요. 장땡인데 시시한데 속하죠. 왜? 십자가에 의하면. 시시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구조가 아니고 사실은 마귀로부터 마비됐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겁니다. 외부에서 사건을 일으켜서. 

마비됐다는 말은, 나는 내 정서에만 갇혀 살래, 내 기분대로 살래. 복음이고 성경 시편이고 뭐고 몰라. 하나님도 교회 가면 알고 잊어버렸어. 나는 그냥 자식들하고 혈육하고 남편과 아내와 살래. 노동하고 살래. 욕심도 없어. 이것만으로 만족해, 라고 각기 자기 주관이 있어요. 그러나 그건 누구 행복입니까? 자기 행복이죠. 그걸 자기 영광이라 한 거예요. 

자기 영광에 영적으로 마비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도 들어오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도 언제 들어본 이야기인지 관심도 없고. 자기 영광, 자기 안 다치고 남한테 좋은 소리 들으면 그걸로 나는 만족하다. 자꾸 그런 쪽으로 가는 겁니다. 악마가 농약을 뿌리는 것 같아. 선악과란 독약을 뿌려놓으니까 그게 근육을 경직하게 만들고 마비되게 해서 육체적으론 물론으로 정신적으로도 옴짝달싹 못해요. 옴짝달싹 못하는 데서 인간은 종교를 만들어서 나름대로 초월을 시도하네? 어설프게. 마귀가 그런 것 우습게 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 (IP:119.♡.174.132)18-09-13 20:27 

20180910b 부산강의 : [시편]13(7편)-구조와 정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혼자 객기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 혼자 했다고 생각한다면, 산에서 뛰어내려 봐, 하고 마귀의 시험이 똑같이 될 거예요. 네가 모든 걸 할 수 있다면, 저 돌을 떡으로 만들어 봐, 이렇게 하겠지요. 사도 바울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 초월을 구분해야 돼요. 초월이 두 가지인데 우선 육에서 나온 초월이 있어요. 정신세계. 인간의 정신세계는 육의 한계를 벗어내고자 관념적으로 정신적으로 뭔가 도피? 추상적으로 자기 자신의 괴로움을 도피하듯이 잊어버리고자 시도하는 것, 원래 초월이 그런 거죠. 세상을 넘어서는 것. 이것은 하늘을 통하는 뚜껑을 열어젖히는 겁니다. 푸른 하늘이 보이도록 하는 거예요. 

그럼 아까 우리가 봤던 마태복음 3장 16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위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 열어달라고 한 거예요? 하늘이 무엇 때문에 열립니까? 줄 게 있기 때문에 여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하늘이 안 열린 상태기 때문에 뭘 시도하느냐 하면, 정신세계의 초월을 죽자 살자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종교지요. 철야하고 기도하고 기도원에 가고. 이 모든 것은 괴롭다는 것, 내가 답답해서 온갖 것 동원해서 뚫는 거예요. 어디서 들은 것 있어서 복음, 십자가, 언약, 이런 것들로 쑤시고. 답답한 것도 있지만 대표적으로 컬컬한 심령을 금식하고 단식해서 계속 쑤셔보는 거예요. 뭔가 하늘이 보일 때까지. 죽자 살자 보일 때까지 계속 비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열왕기상 18장에 나오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이 무슨 짓했습니까?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자기를 때립니다. 자학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재산도 바치고 모든 걸 다 바쳐서 하는데 이 초월은 개인적인 초월이죠. 나는 은혜 받았다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았다가 돼요. 교회가 오늘날 있는 이유가, 인간적인 육적인 욕망, 육으로 채울 수 없는 초월적인 정신세계를 보충해서 만든 게 교회에요. 업소지요. 여기서 내놓는 상품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요. 당신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입니다. 이렇게 행하시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행하는 것도 본인이 행하죠. 구원받는 것도 누구 것이 돼요? 내가 구원되죠. 나를 포기하지 못해요. 이런 업소는. 내가 헌금해놓고 다른 사람 은혜 받으면 그런 일은 용납 안 되죠. 헌금한 내가 은혜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갈수록 집착을 강요하게 됩니다. 이번에 은혜 못 받은 것은 당신이 똑바로 안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당신의 자식이 아픈 것은 당신이 죄 짓은 게 있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제가 아까 빌립보서 4장에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어요?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홀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것예요. 주께서 움직이니까 그 움직임이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주께선 못할 게 없고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대외적으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어딜 주목해야 하느냐 하면, 주님과 사도 바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에 주목해야 될 것 아닙니까? 

흔한 말로 성령 받았다고 하는데 말은 맞는데 성령 받으면 어떤 변화가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 이걸 생각해보자. 이 변화에 대해서 신약에 나오죠. 신약에 나온다는 말은 구약에 예언돼있는 거예요. 그 예언된 것이 마침 시편 7편에 보면 나옵니다. 2절부터 보면,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찢고 뜯는 것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5절에 보면,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이게 뭐냐 하면, 나를 빈약하게 만드는 거예요. 궁핍하게 만드는 거예요. 나의 모든 가치를 처참하게 마비시키는 겁니다. 추억의 무게는 몇 그램 되지 않습니다. 가볍지요. 주님은 나를 가볍게 만들어요. 나를 가볍게 만들지 아니하면 주의 일이 안 됩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데 최적이에요. 시편 8편에 나오는데 미리 보게 되면, 누가 2절을 읽어보세요.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아멘. 

권능이 어디서 나옵니까? 시시하기 짝이 없는 비웃을만한 전혀 힘이 없는 메마른. 힘은 자기 지키는 것이 원래 기능이에요. 내가 힘이 있다는 것은 그 힘으로 나를 보존하고 나를 보호하고 내가 나를 지키려는 겁니다. 여성들이 남자와 결혼할 때 제일 먼저 보는 조건이 뭡니까? 저 남자가 나를 지킬 수 있는가, 내 힘을 키울 수 있는가? 그것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울산강의에서 여자는 신이라 했잖아요. 남자는 몰라요. 여자는 아는데 남자만 여자를 자기 아랫사람으로 보고 있어요. 남자가 등신 같은 거죠. 나중에 퇴직하고 난 뒤에 혼나는 거죠. 아아, 신 맞구나. 그전에는 몰라요. 자기가 돈 벌어주니까 자기 멋대로 하는 그런 주종관계인 줄 알고 있어요. 남자든 여자든 다 같이 신인데 남자는 어릴 때부터 지가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됐고, 여자는 신이면서도 아닌 척하고 있는 거예요. 여우 같이. 아주 못 됐지요. 

오다 보니까 차 안에서 아가씨들이 화장을 해요. 화장을 왜 하느냐? 신이기 때문에 화장을 해요. 신은 절대 아름다움이거든요. 내가 아름다워야 된단 말이죠. 남자는 어지간하면 참지만 신은 조금만 해도 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웁니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고 그게 자기보호 방식이에요. 아주 못 됐어요. 울면서 자길 지키는 거예요. 

여자는 조금 주고 전부를 다 가져요. 자기 손으로 부릴 수 있는 정신세계를 쥐려고 합니다. 남자는 육체적으론 힘이 있는데 정신적으론 여자한테 다 쥐어 삽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남자는 스스로 책임자라고 여기는데 여자는 자기만 책임지면 돼요. 인간 속에 그런 악마적인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주의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인간을 가볍게 만들어요. 

그래서 다윗 같은 경우에는 구약이기 때문에 아주 실감나는 무대가 있어요. 다윗시대에는 실제적으로 창 던지고 활 쏘고 지상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 방식으로 되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구약적인 제한적인 지역적인 전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영적 전쟁으로 묘사하게 돼요. 구약의 전쟁을 먼저 보면, 언약이 있는 쪽과 언약이 없는 쪽과 싸우는 겁니다. 

지금부터 좀 어려워요. 다윗에게 있어서 언약은 바로 에봇이에요.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에요. 제사장인데 왕 같은 제사장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줄 때에, 보통 커피숍에서 몇 시에 만나자고 할 때는 시간과 공간만 있으면 되죠. 그런데 그게 중요한 일이면,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는데 옷 좀 꾸미고 나오라고 한다면, 평소에 입던 옷으론 안 된다고 하면, 왜? 사돈 온단 말이야. 이러면 시간과 공간만의 약속이 아니라 심각한 중요한 미팅이 되는 거예요. 사돈이라 하니까. 

사돈은 척과 척의 만남 아닙니까. 만나고 난 뒤엔 얼마나 피곤한지요. 개뿔도 없는 것들이……. 전에 설교시간에 이 예 들었잖아요. 순박한 우리 어머니가 자랑할 게 없어서 우리 집안엔 첩이 없고, 노름꾼이 없습니다. 그걸 자랑이라고. 그 정도로 우리 집안 괜찮다는 말이거든요.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인격의 변화를 촉구하는 거예요.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주께서 십자가를 줄 때 십자가 관람하고 오란 말이 아니에요. 십자가 속까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내가 누군지 아는 게 변화입니다. 내가 천사처럼 되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던 하나님이 죄인의 레벨, 어디까지가 죄인이냐,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란 뭐냐, 죽은 자라 할 때 하나님께선 어떤 의미에서 죽은 자라 하느냐? 주님의 기준을 파악하는 그런 변화가 있어요. 

자, 아까 한 것 다시 해봅시다. 애굽에 있을 때 애굽 사람이나 히브리 사람이나 밥 먹고 살았다. 아무런 차이 없습니다. 그 차이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려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피 발린 사람은 살고 나왔습니다. 피 안 발린 애굽 사람들은 죽었고. 그렇다면 너와 나 사이에서 차이, 기준은 누가 주입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기준을 주입하시는데 그 기준의 내용을 뜯어보잔 말이죠. 그 내용에
하나님 보시는 인간 기준이 들어있어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①너는 이미 죽은 자란 그 기준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죽여서 피가 나왔고 ②그 피를 발랐다는 말은, 우리 집안 죽었다는 뜻이에요.
 

①이미 죽었다는 고백과 ②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매치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냥 죽으면 자살이니까 그리하지 말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죽은 자는 사흘 만에 예수님처럼 부활하잖아요. 죽었기 때문에 부활되는 거예요. 부활이란 말이 죽었음을 전제로 하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게 뭔 뜻이에요? 나는 이미 죽은 귀신이란 뜻이에요. 이 땅의 사람 아니란 뜻입니다. 그럴 때 그걸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 

십자가 안에 들어있으면 바깥의 사람은 십자가 안에 못 들어와요. 그리고 나는 십자가 바깥으로 못 나가요. 이건 내가 하늘 문 열고 성령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기도해서 얻어낸 게 아니기 때문에. 얻어낸 거면 소유가 되잖아요. 얻어낸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장악했단 말이죠. 장악하면서 시편 7편에 나오는 말씀대로 내 것은 궁핍하게 되고 그냥 빈약하다. 다른 말로 하면, 어설퍼요. 세상 지혜도 별로 없어. 하는 짓이 어설프기 짝이 없고. 자기 이익대로 해보려 해도 다 폭삭 망해. 내가 살아보려고 하는 모든 것이 이상하게 안 돼요. 이만하면 느긋하겠지 하는 그 느긋함을 용납하지 않아요. 

손으로 다 긁어낸다 하지요. 처녀가 잘못해서 임신한 걸 낙태시킬 때 의사가 안의 내용물을 다 긁어내잖아요. 주께서 우리를 다 긁어내는 거예요. 긁어낼 게 죽을 때까지 계속 나와요. 육이니까. 주께서 긁어낼 때 쫓겨나가는 것들이 뭐냐 하면, 육의 열매고, 그 육의 열매가 쫓겨났다는 말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육의 열매와 영의 열매 둘 다 아는 사람으로서 기능적으로 그렇게 구성한 겁니다. 그게 성도는 육체와 더불어 죽었다고 해요. 

저에게 어렵다고 탓하지 마세요. 갈라디아서 보세요. 사도 바울은 얼마나 어렵게 하는지. 성령 받은 너희들은 십자가와 더불어 육체가 못 박히게 돼있어요. 육체 죽으니까 정와 욕심도 같이 죽었다고 분명히 나와 있단 말이죠. 괜히 설교 어렵게 하는 게 아닙니다. 나한테 뭐라 하지 마세요. 또 사도 바울에게 뭐라 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은 주님의 지시대로 성령을 통해서 기록한 거예요. 

빈약하기 짝이 없어요. 어느 정도로? 젖먹이처럼, 어린아이처럼. 그래서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네가 하늘나라 못 간다. 구원 못 받는다 했습니다. 주님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요. 우리 힘으로 자기를 내놓으란 말이 아니고, 나의 숙제, 모든 말씀은 주님이 알아서 이뤄요. 


주님이 내게 다가갈 때 너의 모든 것을 빈약하게 만들 것이다. 

그럼 우리를 거지로 만드는 것이냐? 거지로 만드는 방법은 구약적 방법이에요. 

신약적 방법은 그게 아니고 

어떤 재산, 통장이 있다면 그 통장을 사람들은 나와 연관시켜요. 

내 통장, 내 자식, 내 남편, 그리고 내 아내, 부동산, 동산, 

나의 찬란한 과거, 나의 학식, 나의 교회,전부 다 나와 관련시키거든요. 

주님께선 나를 죽여 버린다니까요. 

재산을 날리란 말이 아니고 몸 아프단 말이 아니에요. 

건강하다면 내가 건강하다. 내가 조깅해서 건강하고 자꾸 나와 관련시키는데 

주님께서 건강케 하셨다는 자체가 너는 못난이란 뜻이에요. 


오죽 얼마나 못 났으면 

내가 너를 건강케 하고 내가 하루 식단을 짜야 되고 내가 네 발걸음 인도해야 되고. 

전부 그런 식으로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내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고 주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와보라는 게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한 그것이, 모든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 말이 정말 설명하기 어려워요.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아셔야 되는데, 내가 여기 있으면 타인, 남이 있단 말이죠. 남이 나에게 의문을 제공해요. 질문을 던진단 말이죠. 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뛰어내려보라는 식으로. 질문과 의문을 던질 때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내리라는 마귀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지요. 이 말은 뭐냐? 의문과 질문은 니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예수님에게 의문과 질문을 던지면서 주님을 주님 되게 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렵다 했거든요. 

그럼 왜 의문과 질문을 주님도 하시고 마귀도 하느냐? 내가 바깥으로 나오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누가 나에게 질문을 해줘야 돼요. 이게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욥기에도 나옵니다. “무식한 말로 내가 영광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주님께서 말씀으로 나타나잖아요. 왜 인간은 자기 바깥으로 못 나오느냐 하면,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울산강의에서 한 것 잠시 해볼게요.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대화를 통해서 소통해보겠다는 거예요. 대화란 것이 성립이 안 된다 했지요. 그동안 각자 살아온 인생, 동질성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같은 질문과 답변을 해도 질문과 답변이 따로 놀아요. 쌍방향 대화입니다. 서로 자기가 얻고 싶어서 답변하고 질문해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보라는 말은, 악마가 그동안 인간을 다스릴 때 인간에게 그런 식으로 질문해서 모든 인간이 동질성으로 이미 굳어진 거예요. 30~40대 아주머니들이 모이면 아이들 영어는 어떻게 가르치고, 우리는 중국어까지 한다. 영재발굴단 보면 그런 아이들 많아요. 눈감고 피아노도 잘 치고. 그런 대화하잖아요. 영어는 어느 선생이 잘하고, 입시를 앞두고 이번엔 어떻게 준비해야 되고. 엄마들이 그런 정보를 알려 하잖아요. 그 대화할 때 그 자식이 누구 자식입니까, 누구와 관련돼있어요? 내 자식이거든요. 그런데 그 대화를 자식한테 허락받았습니까? 안 받았지요. 왜냐하면 자식은 나의 동질성의 일부에요. 

아까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허전하다 하셨지요. 시어머니입니까? 그러면 며느리 이용한 거예요.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나름대로 동질성이 따로 있어요. 물도, 밥도 할 때는 자기 동질성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 며느리한테 지시내린 겁니다. 며느리가 어디에 관심 있는지, 드라마 보고 있는지, 교회 갈 시간 됐는지, 그런 건 고려 안 해요. 무조건 남의 사정을 알아도 시키고 몰라도 시키고. 대부분은 모르고 시켜요. 

부부가 다투고 싸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서로가 너무 모르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기 위해서 질문, 답변이 오가면서 싸우는 거예요. 아내가 축구 보고 있으면 남편이 아내 편리를 도와준다고 드라마 채널로 옮겼다고 합시다. 왜냐하면 남편 보기에 20년 동안 축구보다 드라마를 더 좋아하는 것이 내 아내라고 남편의 동질성 내용 안에 포함돼있어요. 아내는 축구보다 드라마를 좋아한다. 동질성에는 관성의 법칙이 있어요. 하던 대로 하는 법칙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가 손을 뻗어서 리모컨을 쥐려면 얼마나 에너지가 소비되겠어요. 그래서 이참에 점수 얻겠다고, 내가 알아서 틀어줄게, 하고 채널을 돌렸더니만 화를 벌컥 내는 거예요. 왜 축구 보고 있는데 딴 데 트느냐고. 

남편이 빈약하지 않아서 문제에요. 아는 게 문제에요. 아는 화근된 거예요. 빈약해야 되는데. 남편이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안 돼서 그래요. 자기 딴에 점수 따겠다고 한 건데 그 축구는 보통 축구가 아니고 베트남과 하는 축구에요. 손흥민이 나오기 때문에 남자, 여자 관계없이 봐야 된다. 그 생각을 남편이 알 리가 있습니까. 왜? 20년 동안 축구 싫어했으니까. 그걸 일방적이라 해요. 모든 인간은 일방적이에요. 자기 딴에 남을 배려한다고 배려한 게 일방적이에요. 

그러면 물어보고 하면 되잖아. 물어보기는 싫어요. 왜냐하면 물어보면 종속이 돼버려요. 자, 물어본다고 합시다. 아내 도와준다고 냉장고에서 과일을 내왔다. 왜 그러냐 하면, 전에 너는 가만 앉아만 있고 과일도 안 챙기느냐는 잔소리를 들었어요. 잔소리는 뇌에 스며들거든요. 그래 아내가 밥 할 때 과일이나 물 정도는 챙겨놔야지, 해서 챙겼단 말이죠. 한 번 챙기게 되면 이게 아내의 동질성에 포함이 돼요. 다섯 번 챙겼는데 여섯 번째 안 챙기면 아내는 남편이 삐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던 버릇이 있기 때문에. 과일을 포도를 챙겼어요. 포도 안 먹는 것 알지? 왜 복숭아를 안 챙겼냐? 

이게 스무고개에요.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맞춰나가는 겁니다. 끊임없이 맞춰나가는 거예요. 정치적 타협이거든요. 그러다 아내가 일주일 동안 친정에 간다. 남편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쳐요. 왜냐하면 잃어버린 자기 동질성을 회복하니까 독립만세에요. 그걸 남편이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아내가 전화로, “나 없으니 좋티?” 그때 참아야 하는데 “참 좋다.”하는 순간에 일주일 있을 사람이 사흘 만에 뛰어옵니다. 

인간은 남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악마가 쥐어준 것이 선악과 아는 순간 네가 뭐가 된다? 신이에요. 신은 둘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신이에요. 따라서 신은 자체적으로 동질성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걸 아내란 이름으로, 남편이란 이름으로 처음에는 이용하려고 결혼했지요. 자기 지켜달라고 했는데 살다보니까 집 안에 신이, 괴물이 둘이 된 거예요. 어쩔 수 없이 협상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자나 남자나 처음에 젊을 때는 같이 살고 싶어 하지만 나이 점점 많아지면 세상 천하에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답니다. 통계상. 남자는 그게 좀 적은데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은 정말 여자로서는 비로소 자기를 발견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내가 괴물이고 마귀라는 걸 계속 가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것보다 편한 게 없다. 혼자 산다고 시답지 않게 오지랖 넓게 남자 소개시켜줄게 하지 말고 혼자 사는 게 최고 좋아요. 만약에 결혼한다면 단 조건이 있어요. 내 하인이 된다면 그때는 봐주는 척하고 하지만 혼자 사는 게 최고 좋다는 겁니다. 그만큼 신이에요. 그만큼 꽉 차있는 거예요. 

이게 디모데전서에 보면 나와요. 과부된 자는 재혼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혼자 살아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보면 결혼 같은 걸 아주 올가미 같은 족쇄 같이 느끼고 있는 겁니다. 결혼해서 지들끼리 챙기기 바빠서 언제 주님 챙기겠느냐는 식으로 측은하게 여기는 겁니다. 발목 잡혔다는 겁니다. 그래서 혼자 살 수 있거든 땡 잡았다고 여기고 혼자 살아라. 처녀가 결혼하는 것을 구태여 말리진 않겠는데 죄 짓는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진 않겠는데 안 된 것은 확실하고 고난 있는 것은 분명하고. 처녀로 살거든 땡 잡은 줄로 여겨라, 라고 처녀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도 바울이 목회했으면 처자들 그 교회 안 다닐 가능성이 많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빈약해야 되고 없어져야 됩니다. 없어져야 되는데 뭘 끄집어내느냐? 이번 강의에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인간이 자기 동일성으로 꽉 차있는데 주께선 이래선 천국 안 보냅니다. 이런 상태로 천국 가게 되면 누구 나라 됩니까? 본인 동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나라로 개판 돼버려요. 천국이 아니라 완전히 지옥 돼버리잖아요. 동일성을 끄집어냈는데 그 동일성이 혈육으로 돼있어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갈치 대가리 떼고 꼬리 떼고. 

인간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혈육으로 설명해요. 혈육으로 이해하는 것이 육의 이해의 한계입니다. 우리 아버지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자식을 낳았다는 거예요. 그게 틀렸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있기 위해서 네가 아비라는 기능을 했다는 겁니다. 누가 알겠어요. 이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이삭의 아버지가 누굽니까? 누가 이삭을 줬어요? 아브라함이 아니에요. 이삭의 아브라함이 아니라니까요.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없는 존재에요. 아브람이 있었지 아브라함은 없는 존재라니까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약간 음성을 높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오늘날 교회가 밥 푸다가 교회 갈 때 됐네, 하고 아침에 샤워하고 얼굴 좀 다듬고 차 몰고 와서 교회 예배 참석하고 끝나고 난 뒤에 식사하고 집에 가는 것. 그걸 교회라고 보는 거예요. 정신머리가 정신상태가 완전히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낮에 제가 예를 들면서 은혜 받은 게 있어요. 서해안에서 바지락 줍다가 물때 놓쳐서 죽은 사람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물때를 놓치느냐고 하는데 실제로 바지락 주워보세요. 해 지는 게 아쉽지요. 보이는데. 사업하는 사람이 왜 사업합니까? 돈 버는 게 보이니까 계속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바지락, 바지락 했잖아요. 이 세상은 교회 오는 게 귀찮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지킬 때 꼭 그렇게 지켰어요. 안식일이 귀찮아요. 가기는 가야 되겠고 후딱 안식일 언제 끝나서 장사하나 이것 생각하듯이 오늘날 교회가 꼭 그 모습이에요. 

그래도 교회 되는 것은 뭐냐?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다든지 총각이 있다든지 교회 가면 자기한테 유산을 남겨줄 연로하신 부모가 있다든지 이럴 때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기 때문에, 우리교회 말고 십자가마을 교회 말고 다른 교회, 전부 다 사람 관계에요. 정들었잖아요, 정. 사람 관계없으면 교회도 안 나오지요. 이근호 목사 말로는 교회 안 나와도 구원받는다면서, 갑자기 나를 거기에 또. 이근호 목사는 막 산다면서, 그것까지 다 집어넣는 거예요. 제 뜻은 주의 뜻대로 막 살라했는데 주와 함께는 빼버리고 지가 알던 동질성으로 막 산다고 하는데.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이란 인간 자체는 아브람에게는 없어요. 아브람과 아브라함 사이에 이삭을 집어넣어서 혈육을 끊어버립니다.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내려오는 그 관계가 아들로부터 차고 올라가요. 그러면 아들의 아들이 누구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여럿이 아니고 한 명이죠. 신약 때 마지막 때 오실 한 명으로 인하여 앞에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하는 사람을 생산해냈다. 거꾸로. 

거꾸로 가면 제일 위에 누가 있습니까? 아담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이에요. 극과 극이 만난 거예요. 아담이 아담을 만난 겁니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우리를 납치한 거예요. 그런데 그 미래가 창세전이에요. 시간 자체도 일시적인 거예요. 창세전이 미래에서 와서 미래를 뜯어보면 창세전이라. 과거보다 더 과거죠. 최초의 과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전쟁해서 완전히 작살났는데 짓밟히고 다했죠. 그럼 최초의 전쟁이 바로 창세전에 있는 전쟁, 그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미카엘과 싸우는 그리스도와 싸우는 악마, 그 전쟁이 땅에 표현되게 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이상한 용어의 싸움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에요. 남자인데 여자를 통해서 나왔다. 여자는 뭐냐? 모든 인간의 대표자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돼버려요. 

이 땅에 육의 경우에는 대표가 남자에요. 그러나 육이 영과 관련되어서는 남자가 대표에서 탈락이 되고 여자가 등장합니다. 마리아죠.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에요. 예수님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라면 뱀의 후손은 누굽니까? 악마에요. 영적 존재에요. 예수님은 물론 영적 존재지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적 존재가 아니고 그냥 사람이 돼버려요. 

이삭을 약속의 자손이라 하지요. 약속은 영입니다. 자손은 이삭이니까 사람이죠. 약속이 지상에 나타날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사람의 모습이라 하면 가현설이라 해서 사람으로 오신 거예요. 성경에 육신의 모양으로 돼있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정치사를 보자. 메이지유신이라 해서 담당했던 사람들이 있어요. 일곱 명이 있었는데 그 메이지유신이 1930년도까지는 그들의 정권을 쥡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입헌군주제, 왕은 있고 국회, 행정부 있고 물론 사법부 있지요. 이렇게 그 제도에 따라 일본을 정치가들이 인도했어요. 그럴 때 한국은 준자치국으로 다뤘던 겁니다.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한일합방을 했지만 자율권을 허용한 입장으로 합병한 거예요. 정치가들이. 

1930년 이후에 군부가 장악하면서 한국은 죽어났어요. 식민지정책에서 사람을 다룬다는 게 피곤한 일이거든요. 여러분이 파출부를 부린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하나 지시해보세요. 주인이 못할 짓입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파출부라면 결과만 이야기하면 돼요. 냉장고 청소해주시고요, 집안 청소하시면 됩니다. 나중에 그 결과만 확인하면 청소하는 방식에 대해선 문제 삼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정말 무능한 파출부가 오게 되면 시키는 사람이 답답해요. 하나하나 다해야 돼요. 창틀 이건 왜 안 닦습니까? 사람들이 힘든 겁니다. 그래서 단순노동에서는 외국인을 쓰지만 그렇지 않는 노동에서는 한국 사람을 써야 될 이유가, 말이 통해야 되고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야 되지, 외국사람 공부도 못한 사람이 하게 되면 제품 엉망 되거든요. 

그래서 일제에서는 약간의 자치를 줘요. 합병했으니까 천왕을 섬기라 하고. 이걸 왕도정치라 합니다. 그런데 군부가 들어서면서 왕도정치가 황도정치로 바뀌어요. 왕도정치에서 왕은 상징적 존재로 백성과 따로 놀고 나라의 대표자이면 그만인 거예요. 그런데 황도정치가 되면 혈육적으로 모든 백성은 왕의 혈육이 되는 겁니다. 혈육이란 말은 타인이 아니고 한 몸처럼 움직일 때 황도정치라 해요. 그때는 천왕에게 목숨을 바쳐야 됩니다. 천왕폐하만세, 하고 자살폭격대, 가미가제 특공대 나오는 겁니다. 만주를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나라꼴이 엉망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일화에 보면 일본에 신호등이 처음 나왔을 때 시민이라면 신호를 지켜야 될 것 아닙니까. 파란불은 건너고 빨간불은 멈춰야 되는데 일등병이 빨간불인데 건너가는 거예요. 순사가 잡았어요. 왜 잡느냐고 하니까 비록 군인이지만 일단 거리에 나오면 시민이기 때문에 시민법을 지켜야 된다고 했어요. 똑바로 한 거죠. 그러니까 부대참모장이 그 순사가 소속된 경찰서장한테 전화해서 압박을 가하는데 황도의 군인은 초월적인 초법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말라고 나온 거예요. 그건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박정희 시대 때 안기부 요원이 어디서 설쳐도 먹히는 것, 옛날 보안사가 계급도 없이 다 조사할 수 있는 것처럼 초법적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세상의 구조를 군부 또는 파시스트, 전체주의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잘 보여준 거예요. 인간의 본성이 그런 겁니다. 악마로부터 육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내 힘으로 나를 못 지키니까 나보다 힘 센 대통령이나 왕에게 자기 몸을 던져서 눈에 보이는 이 나라 또는 눈에 보이는 이 교회가 하나가 되면 나는 구원받겠지. 목사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받겠지. 이게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에 몸 바치고 나라에 몸 바쳐도 여전히 자기 동일성은 나 잘 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내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강의 결론은 뭐냐 하면, 내가 처참히 망가져도 더 망가진 분이 계셔요. 누굽니까? 바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오신 약속대로 오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타인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질문 던지는 게 아니고 진짜 질문, 창조주의 입장에서 우리 존재의 바탕이 되는 질문을 던집니다. “너, 나에게 왜 그랬어? 아담아, 나에게 왜 그랬어?” 사도 바울에게 찾아오신 주님이, “사울아, 나에게 왜 그랬어?” “주여,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했잖아, 나한테. 네 동일성 때문에. 니 천당 가려고.” 

사도 바울이 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였습니까? 내 행함으로 천국까지 올려놓겠다는 거예요. 그게 자기 정신세계에요. 그게 종교에요. 찾아오는 게 없으니까 나라도 찾아가야 되는 거예요. 주님 찾아오니까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자기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란 말이죠. 내가 이렇게 나 위주로 살아가는 이것마저도 프로그램화 돼있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프로그램화 되어서 같은 마귀 자식으로 살아야 했고, 그것도 이 땅 살 동안 잠시지만 온갖 마귀 짓을 다 하는 이것조차도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그 모습이 내 바깥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거예요. 내가 마귀한테 사로잡힌 그 동일성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는 말은 내 안에 누가 있다? 다른 동일성 들어온 거예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 너 같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주님의 십자가 피로써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육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다른 경계선을 넘은 겁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과 우리는 진짜 영적으로 하나의 혈육이 된 거예요. 하나의 신부가 된 겁니다. 이거는 땅에 속한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혈육으로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 부활함으로 우리가 부활되고 예수님이 하늘의 형상을 입음으로 우리가 하늘의 형상을 입는 내용이 고린도전서 15장에 쫙 펼쳐져 있습니다. 

이 모든 신약의 내용은 우리가 시편 7편을 놓치지 말아야 될 이유와 관련돼있습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시편을 보면서 다윗이 고생했다고 하니까 옛날이야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잠도 오는데 볼 필요 뭐 있나, 하고 덮어버립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고난 받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벌였지요. 그 당시 영적 전쟁 때문에 언약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비-언약으로부터 난데없는 쫓김을 당하고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궁핍하기 짝이 없지요. 

7편 1절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누구한테 피하지요? 주님께 피하는 거예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기 위해서 주께서는 다윗에게 이런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번 일은 주님이 알아서 조치했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서 피하는 겁니다. 그걸 아시고 여러분 잘 하는 시편 23편 봅시다. 비로소 시편 23편이 납득이 될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금 자기가 있는데 가진다는 겁니까, 가고 있다는 뜻입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주께로부터 와서 내가 스스로 힘으로 갈 수 없는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누가 와야 돼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면서 가게 하시는 겁니다. 가게 되면 마지막에 뭡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제 말씀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질문을 던지는 이유를 알겠지요. 우리의 바탕을 문제 삼는 겁니다. 우리의 동질성을 문제 삼는 거예요.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목자가 되어 옴으로 말미암아 네 숙제가 아니라 구원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숙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미 손대고 있는데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관심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남한테 밑지기 싫어하고 내 소박한 행복 챙기는 것이 우선이고 남한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분주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그것 때문에 얼마나 조바심 내었고 조심스러웠습니까? 주여 이제는 그 동일성에서 벗어나서 모든 것이 주께서 시킨 일인 것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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