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10b 부산강의 : [시편]13(7편)-구조와 정서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혼자 객기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 혼자 했다고 생각한다면, 산에서 뛰어내려 봐, 하고 마귀의 시험이 똑같이 될 거예요. 네가 모든 걸 할 수 있다면, 저 돌을 떡으로 만들어 봐, 이렇게 하겠지요. 사도 바울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우리가 두 가지 초월을 구분해야 돼요. 초월이 두 가지인데 우선 육에서 나온 초월이 있어요. 정신세계. 인간의 정신세계는 육의 한계를 벗어내고자 관념적으로 정신적으로 뭔가 도피? 추상적으로 자기 자신의 괴로움을 도피하듯이 잊어버리고자 시도하는 것, 원래 초월이 그런 거죠. 세상을 넘어서는 것. 이것은 하늘을 통하는 뚜껑을 열어젖히는 겁니다. 푸른 하늘이 보이도록 하는 거예요.
그럼 아까 우리가 봤던 마태복음 3장 16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위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 열어달라고 한 거예요? 하늘이 무엇 때문에 열립니까? 줄 게 있기 때문에 여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하늘이 안 열린 상태기 때문에 뭘 시도하느냐 하면, 정신세계의 초월을 죽자 살자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종교지요. 철야하고 기도하고 기도원에 가고. 이 모든 것은 괴롭다는 것, 내가 답답해서 온갖 것 동원해서 뚫는 거예요. 어디서 들은 것 있어서 복음, 십자가, 언약, 이런 것들로 쑤시고. 답답한 것도 있지만 대표적으로 컬컬한 심령을 금식하고 단식해서 계속 쑤셔보는 거예요. 뭔가 하늘이 보일 때까지. 죽자 살자 보일 때까지 계속 비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열왕기상 18장에 나오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이 무슨 짓했습니까?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자기를 때립니다. 자학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재산도 바치고 모든 걸 다 바쳐서 하는데 이 초월은 개인적인 초월이죠. 나는 은혜 받았다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았다가 돼요. 교회가 오늘날 있는 이유가, 인간적인 육적인 욕망, 육으로 채울 수 없는 초월적인 정신세계를 보충해서 만든 게 교회에요. 업소지요. 여기서 내놓는 상품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지요. 당신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입니다. 이렇게 행하시면 구원받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행하는 것도 본인이 행하죠. 구원받는 것도 누구 것이 돼요? 내가 구원되죠. 나를 포기하지 못해요. 이런 업소는. 내가 헌금해놓고 다른 사람 은혜 받으면 그런 일은 용납 안 되죠. 헌금한 내가 은혜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갈수록 집착을 강요하게 됩니다. 이번에 은혜 못 받은 것은 당신이 똑바로 안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당신의 자식이 아픈 것은 당신이 죄 짓은 게 있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제가 아까 빌립보서 4장에 사도 바울은 뭐라고 했어요?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홀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움직이는 것예요. 주께서 움직이니까 그 움직임이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주께선 못할 게 없고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대외적으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어딜 주목해야 하느냐 하면, 주님과 사도 바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에 주목해야 될 것 아닙니까?
흔한 말로 성령 받았다고 하는데 말은 맞는데 성령 받으면 어떤 변화가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 이걸 생각해보자. 이 변화에 대해서 신약에 나오죠. 신약에 나온다는 말은 구약에 예언돼있는 거예요. 그 예언된 것이 마침 시편 7편에 보면 나옵니다. 2절부터 보면,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찢고 뜯는 것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 5절에 보면,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
이게 뭐냐 하면, 나를 빈약하게 만드는 거예요. 궁핍하게 만드는 거예요. 나의 모든 가치를 처참하게 마비시키는 겁니다. 추억의 무게는 몇 그램 되지 않습니다. 가볍지요. 주님은 나를 가볍게 만들어요. 나를 가볍게 만들지 아니하면 주의 일이 안 됩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주의 이름을 드러내는데 최적이에요. 시편 8편에 나오는데 미리 보게 되면, 누가 2절을 읽어보세요.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아멘.
권능이 어디서 나옵니까? 시시하기 짝이 없는 비웃을만한 전혀 힘이 없는 메마른. 힘은 자기 지키는 것이 원래 기능이에요. 내가 힘이 있다는 것은 그 힘으로 나를 보존하고 나를 보호하고 내가 나를 지키려는 겁니다. 여성들이 남자와 결혼할 때 제일 먼저 보는 조건이 뭡니까? 저 남자가 나를 지킬 수 있는가, 내 힘을 키울 수 있는가? 그것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울산강의에서 여자는 신이라 했잖아요. 남자는 몰라요. 여자는 아는데 남자만 여자를 자기 아랫사람으로 보고 있어요. 남자가 등신 같은 거죠. 나중에 퇴직하고 난 뒤에 혼나는 거죠. 아아, 신 맞구나. 그전에는 몰라요. 자기가 돈 벌어주니까 자기 멋대로 하는 그런 주종관계인 줄 알고 있어요. 남자든 여자든 다 같이 신인데 남자는 어릴 때부터 지가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 됐고, 여자는 신이면서도 아닌 척하고 있는 거예요. 여우 같이. 아주 못 됐지요.
오다 보니까 차 안에서 아가씨들이 화장을 해요. 화장을 왜 하느냐? 신이기 때문에 화장을 해요. 신은 절대 아름다움이거든요. 내가 아름다워야 된단 말이죠. 남자는 어지간하면 참지만 신은 조금만 해도 아야, 합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웁니다. 슬퍼서 우는 게 아니고 그게 자기보호 방식이에요. 아주 못 됐어요. 울면서 자길 지키는 거예요.
여자는 조금 주고 전부를 다 가져요. 자기 손으로 부릴 수 있는 정신세계를 쥐려고 합니다. 남자는 육체적으론 힘이 있는데 정신적으론 여자한테 다 쥐어 삽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남자는 스스로 책임자라고 여기는데 여자는 자기만 책임지면 돼요. 인간 속에 그런 악마적인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주의 일을 벌이지 않습니다. 인간을 가볍게 만들어요.
그래서 다윗 같은 경우에는 구약이기 때문에 아주 실감나는 무대가 있어요. 다윗시대에는 실제적으로 창 던지고 활 쏘고 지상에서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 방식으로 되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구약적인 제한적인 지역적인 전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영적 전쟁으로 묘사하게 돼요. 구약의 전쟁을 먼저 보면, 언약이 있는 쪽과 언약이 없는 쪽과 싸우는 겁니다.
지금부터 좀 어려워요. 다윗에게 있어서 언약은 바로 에봇이에요.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이에요. 제사장인데 왕 같은 제사장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줄 때에, 보통 커피숍에서 몇 시에 만나자고 할 때는 시간과 공간만 있으면 되죠. 그런데 그게 중요한 일이면,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는데 옷 좀 꾸미고 나오라고 한다면, 평소에 입던 옷으론 안 된다고 하면, 왜? 사돈 온단 말이야. 이러면 시간과 공간만의 약속이 아니라 심각한 중요한 미팅이 되는 거예요. 사돈이라 하니까.
사돈은 척과 척의 만남 아닙니까. 만나고 난 뒤엔 얼마나 피곤한지요. 개뿔도 없는 것들이……. 전에 설교시간에 이 예 들었잖아요. 순박한 우리 어머니가 자랑할 게 없어서 우리 집안엔 첩이 없고, 노름꾼이 없습니다. 그걸 자랑이라고. 그 정도로 우리 집안 괜찮다는 말이거든요.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인격의 변화를 촉구하는 거예요. 어제 낮에도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주께서 십자가를 줄 때 십자가 관람하고 오란 말이 아니에요. 십자가 속까지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내가 누군지 아는 게 변화입니다. 내가 천사처럼 되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던 하나님이 죄인의 레벨, 어디까지가 죄인이냐,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이란 뭐냐, 죽은 자라 할 때 하나님께선 어떤 의미에서 죽은 자라 하느냐? 주님의 기준을 파악하는 그런 변화가 있어요.
자, 아까 한 것 다시 해봅시다. 애굽에 있을 때 애굽 사람이나 히브리 사람이나 밥 먹고 살았다. 아무런 차이 없습니다. 그 차이를 의도적으로 만들어버려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써 피 발린 사람은 살고 나왔습니다. 피 안 발린 애굽 사람들은 죽었고. 그렇다면 너와 나 사이에서 차이, 기준은 누가 주입합니까? 하나님 쪽에서 기준을 주입하시는데 그 기준의 내용을 뜯어보잔 말이죠. 그 내용에 하나님 보시는 인간 기준이 들어있어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①너는 이미 죽은 자란 그 기준이 들어있어요. 그래서 죽여서 피가 나왔고 ②그 피를 발랐다는 말은, 우리 집안 죽었다는 뜻이에요.
①이미 죽었다는 고백과 ②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매치가 되는 것,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냥 죽으면 자살이니까 그리하지 말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죽은 자는 사흘 만에 예수님처럼 부활하잖아요. 죽었기 때문에 부활되는 거예요. 부활이란 말이 죽었음을 전제로 하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는 게 뭔 뜻이에요? 나는 이미 죽은 귀신이란 뜻이에요. 이 땅의 사람 아니란 뜻입니다. 그럴 때 그걸 십자가 안에 들어있다.
십자가 안에 들어있으면 바깥의 사람은 십자가 안에 못 들어와요. 그리고 나는 십자가 바깥으로 못 나가요. 이건 내가 하늘 문 열고 성령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기도해서 얻어낸 게 아니기 때문에. 얻어낸 거면 소유가 되잖아요. 얻어낸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장악했단 말이죠. 장악하면서 시편 7편에 나오는 말씀대로 내 것은 궁핍하게 되고 그냥 빈약하다. 다른 말로 하면, 어설퍼요. 세상 지혜도 별로 없어. 하는 짓이 어설프기 짝이 없고. 자기 이익대로 해보려 해도 다 폭삭 망해. 내가 살아보려고 하는 모든 것이 이상하게 안 돼요. 이만하면 느긋하겠지 하는 그 느긋함을 용납하지 않아요.
손으로 다 긁어낸다 하지요. 처녀가 잘못해서 임신한 걸 낙태시킬 때 의사가 안의 내용물을 다 긁어내잖아요. 주께서 우리를 다 긁어내는 거예요. 긁어낼 게 죽을 때까지 계속 나와요. 육이니까. 주께서 긁어낼 때 쫓겨나가는 것들이 뭐냐 하면, 육의 열매고, 그 육의 열매가 쫓겨났다는 말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육의 열매와 영의 열매 둘 다 아는 사람으로서 기능적으로 그렇게 구성한 겁니다. 그게 성도는 육체와 더불어 죽었다고 해요.
저에게 어렵다고 탓하지 마세요. 갈라디아서 보세요. 사도 바울은 얼마나 어렵게 하는지. 성령 받은 너희들은 십자가와 더불어 육체가 못 박히게 돼있어요. 육체 죽으니까 정와 욕심도 같이 죽었다고 분명히 나와 있단 말이죠. 괜히 설교 어렵게 하는 게 아닙니다. 나한테 뭐라 하지 마세요. 또 사도 바울에게 뭐라 하지 마세요. 사도 바울은 주님의 지시대로 성령을 통해서 기록한 거예요.
빈약하기 짝이 없어요. 어느 정도로? 젖먹이처럼, 어린아이처럼. 그래서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네가 하늘나라 못 간다. 구원 못 받는다 했습니다. 주님은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요. 우리 힘으로 자기를 내놓으란 말이 아니고, 나의 숙제, 모든 말씀은 주님이 알아서 이뤄요.
주님이 내게 다가갈 때 너의 모든 것을 빈약하게 만들 것이다. 그럼 우리를 거지로 만드는 것이냐? 거지로 만드는 방법은 구약적 방법이에요.
신약적 방법은 그게 아니고 어떤 재산, 통장이 있다면 그 통장을 사람들은 나와 연관시켜요. 내 통장, 내 자식, 내 남편, 그리고 내 아내, 부동산, 동산, 나의 찬란한 과거, 나의 학식, 나의 교회,전부 다 나와 관련시키거든요. 주님께선 나를 죽여 버린다니까요. 재산을 날리란 말이 아니고 몸 아프단 말이 아니에요. 건강하다면 내가 건강하다. 내가 조깅해서 건강하고 자꾸 나와 관련시키는데 주님께서 건강케 하셨다는 자체가 너는 못난이란 뜻이에요. 오죽 얼마나 못 났으면
내가 너를 건강케 하고 내가 하루 식단을 짜야 되고 내가 네 발걸음 인도해야 되고. 전부 그런 식으로 주님이 그렇게 하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내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고 주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와보라는 게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한 그것이, 모든 것이 되는 거예요.
그런 말이 정말 설명하기 어려워요.
무슨 뜻인지 여러분이 아셔야 되는데, 내가 여기 있으면 타인, 남이 있단 말이죠. 남이 나에게 의문을 제공해요. 질문을 던진단 말이죠. 니 높은 곳에 올라가서 뛰어내려보라는 식으로. 질문과 의문을 던질 때 예수님께서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내리라는 마귀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했지요. 이 말은 뭐냐? 의문과 질문은 니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예수님에게 의문과 질문을 던지면서 주님을 주님 되게 하시는 거예요. 제가 어렵다 했거든요.
그럼 왜 의문과 질문을 주님도 하시고 마귀도 하느냐? 내가 바깥으로 나오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어요. 누가 나에게 질문을 해줘야 돼요. 이게 창세기 3장에 나오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욥기에도 나옵니다. “무식한 말로 내가 영광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주님께서 말씀으로 나타나잖아요. 왜 인간은 자기 바깥으로 못 나오느냐 하면, 자기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울산강의에서 한 것 잠시 해볼게요.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대화를 통해서 소통해보겠다는 거예요. 대화란 것이 성립이 안 된다 했지요. 그동안 각자 살아온 인생, 동질성이 따로 있기 때문에 같은 질문과 답변을 해도 질문과 답변이 따로 놀아요. 쌍방향 대화입니다. 서로 자기가 얻고 싶어서 답변하고 질문해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보라는 말은, 악마가 그동안 인간을 다스릴 때 인간에게 그런 식으로 질문해서 모든 인간이 동질성으로 이미 굳어진 거예요. 30~40대 아주머니들이 모이면 아이들 영어는 어떻게 가르치고, 우리는 중국어까지 한다. 영재발굴단 보면 그런 아이들 많아요. 눈감고 피아노도 잘 치고. 그런 대화하잖아요. 영어는 어느 선생이 잘하고, 입시를 앞두고 이번엔 어떻게 준비해야 되고. 엄마들이 그런 정보를 알려 하잖아요. 그 대화할 때 그 자식이 누구 자식입니까, 누구와 관련돼있어요? 내 자식이거든요. 그런데 그 대화를 자식한테 허락받았습니까? 안 받았지요. 왜냐하면 자식은 나의 동질성의 일부에요.
아까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허전하다 하셨지요. 시어머니입니까? 그러면 며느리 이용한 거예요.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나름대로 동질성이 따로 있어요. 물도, 밥도 할 때는 자기 동질성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서 며느리한테 지시내린 겁니다. 며느리가 어디에 관심 있는지, 드라마 보고 있는지, 교회 갈 시간 됐는지, 그런 건 고려 안 해요. 무조건 남의 사정을 알아도 시키고 몰라도 시키고. 대부분은 모르고 시켜요.
부부가 다투고 싸우는 이유가 뭐냐 하면, 서로가 너무 모르고 있다는 걸 확인시키기 위해서 질문, 답변이 오가면서 싸우는 거예요. 아내가 축구 보고 있으면 남편이 아내 편리를 도와준다고 드라마 채널로 옮겼다고 합시다. 왜냐하면 남편 보기에 20년 동안 축구보다 드라마를 더 좋아하는 것이 내 아내라고 남편의 동질성 내용 안에 포함돼있어요. 아내는 축구보다 드라마를 좋아한다. 동질성에는 관성의 법칙이 있어요. 하던 대로 하는 법칙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아내가 손을 뻗어서 리모컨을 쥐려면 얼마나 에너지가 소비되겠어요. 그래서 이참에 점수 얻겠다고, 내가 알아서 틀어줄게, 하고 채널을 돌렸더니만 화를 벌컥 내는 거예요. 왜 축구 보고 있는데 딴 데 트느냐고.
남편이 빈약하지 않아서 문제에요. 아는 게 문제에요. 아는 화근된 거예요. 빈약해야 되는데. 남편이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안 돼서 그래요. 자기 딴에 점수 따겠다고 한 건데 그 축구는 보통 축구가 아니고 베트남과 하는 축구에요. 손흥민이 나오기 때문에 남자, 여자 관계없이 봐야 된다. 그 생각을 남편이 알 리가 있습니까. 왜? 20년 동안 축구 싫어했으니까. 그걸 일방적이라 해요. 모든 인간은 일방적이에요. 자기 딴에 남을 배려한다고 배려한 게 일방적이에요.
그러면 물어보고 하면 되잖아. 물어보기는 싫어요. 왜냐하면 물어보면 종속이 돼버려요. 자, 물어본다고 합시다. 아내 도와준다고 냉장고에서 과일을 내왔다. 왜 그러냐 하면, 전에 너는 가만 앉아만 있고 과일도 안 챙기느냐는 잔소리를 들었어요. 잔소리는 뇌에 스며들거든요. 그래 아내가 밥 할 때 과일이나 물 정도는 챙겨놔야지, 해서 챙겼단 말이죠. 한 번 챙기게 되면 이게 아내의 동질성에 포함이 돼요. 다섯 번 챙겼는데 여섯 번째 안 챙기면 아내는 남편이 삐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던 버릇이 있기 때문에. 과일을 포도를 챙겼어요. 포도 안 먹는 것 알지? 왜 복숭아를 안 챙겼냐?
이게 스무고개에요.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맞춰나가는 겁니다. 끊임없이 맞춰나가는 거예요. 정치적 타협이거든요. 그러다 아내가 일주일 동안 친정에 간다. 남편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쳐요. 왜냐하면 잃어버린 자기 동질성을 회복하니까 독립만세에요. 그걸 남편이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아내가 전화로, “나 없으니 좋티?” 그때 참아야 하는데 “참 좋다.”하는 순간에 일주일 있을 사람이 사흘 만에 뛰어옵니다.
인간은 남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악마가 쥐어준 것이 선악과 아는 순간 네가 뭐가 된다? 신이에요. 신은 둘이 필요 없습니다. 스스로 신이에요. 따라서 신은 자체적으로 동질성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걸 아내란 이름으로, 남편이란 이름으로 처음에는 이용하려고 결혼했지요. 자기 지켜달라고 했는데 살다보니까 집 안에 신이, 괴물이 둘이 된 거예요. 어쩔 수 없이 협상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여자나 남자나 처음에 젊을 때는 같이 살고 싶어 하지만 나이 점점 많아지면 세상 천하에 혼자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답니다. 통계상. 남자는 그게 좀 적은데 여자가 혼자 산다는 것은 정말 여자로서는 비로소 자기를 발견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기가 신이라는 것을, 내가 괴물이고 마귀라는 걸 계속 가는 거예요. 혼자 사는 것보다 편한 게 없다. 혼자 산다고 시답지 않게 오지랖 넓게 남자 소개시켜줄게 하지 말고 혼자 사는 게 최고 좋아요. 만약에 결혼한다면 단 조건이 있어요. 내 하인이 된다면 그때는 봐주는 척하고 하지만 혼자 사는 게 최고 좋다는 겁니다. 그만큼 신이에요. 그만큼 꽉 차있는 거예요.
이게 디모데전서에 보면 나와요. 과부된 자는 재혼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혼자 살아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 보면 결혼 같은 걸 아주 올가미 같은 족쇄 같이 느끼고 있는 겁니다. 결혼해서 지들끼리 챙기기 바빠서 언제 주님 챙기겠느냐는 식으로 측은하게 여기는 겁니다. 발목 잡혔다는 겁니다. 그래서 혼자 살 수 있거든 땡 잡았다고 여기고 혼자 살아라. 처녀가 결혼하는 것을 구태여 말리진 않겠는데 죄 짓는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진 않겠는데 안 된 것은 확실하고 고난 있는 것은 분명하고. 처녀로 살거든 땡 잡은 줄로 여겨라, 라고 처녀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사도 바울이 목회했으면 처자들 그 교회 안 다닐 가능성이 많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빈약해야 되고 없어져야 됩니다. 없어져야 되는데 뭘 끄집어내느냐? 이번 강의에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인간이 자기 동일성으로 꽉 차있는데 주께선 이래선 천국 안 보냅니다. 이런 상태로 천국 가게 되면 누구 나라 됩니까? 본인 동일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나라로 개판 돼버려요. 천국이 아니라 완전히 지옥 돼버리잖아요. 동일성을 끄집어냈는데 그 동일성이 혈육으로 돼있어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갈치 대가리 떼고 꼬리 떼고.
인간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는 혈육으로 설명해요. 혈육으로 이해하는 것이 육의 이해의 한계입니다. 우리 아버지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자식을 낳았다는 거예요. 그게 틀렸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있기 위해서 네가 아비라는 기능을 했다는 겁니다. 누가 알겠어요. 이게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이삭의 아버지가 누굽니까? 누가 이삭을 줬어요? 아브라함이 아니에요. 이삭의 아브라함이 아니라니까요.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은 없는 존재에요. 아브람이 있었지 아브라함은 없는 존재라니까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약간 음성을 높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오늘날 교회가 밥 푸다가 교회 갈 때 됐네, 하고 아침에 샤워하고 얼굴 좀 다듬고 차 몰고 와서 교회 예배 참석하고 끝나고 난 뒤에 식사하고 집에 가는 것. 그걸 교회라고 보는 거예요. 정신머리가 정신상태가 완전히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낮에 제가 예를 들면서 은혜 받은 게 있어요. 서해안에서 바지락 줍다가 물때 놓쳐서 죽은 사람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물때를 놓치느냐고 하는데 실제로 바지락 주워보세요. 해 지는 게 아쉽지요. 보이는데. 사업하는 사람이 왜 사업합니까? 돈 버는 게 보이니까 계속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바지락, 바지락 했잖아요. 이 세상은 교회 오는 게 귀찮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 지킬 때 꼭 그렇게 지켰어요. 안식일이 귀찮아요. 가기는 가야 되겠고 후딱 안식일 언제 끝나서 장사하나 이것 생각하듯이 오늘날 교회가 꼭 그 모습이에요.
그래도 교회 되는 것은 뭐냐?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다든지 총각이 있다든지 교회 가면 자기한테 유산을 남겨줄 연로하신 부모가 있다든지 이럴 때는 사람 대 사람의 관계기 때문에, 우리교회 말고 십자가마을 교회 말고 다른 교회, 전부 다 사람 관계에요. 정들었잖아요, 정. 사람 관계없으면 교회도 안 나오지요. 이근호 목사 말로는 교회 안 나와도 구원받는다면서, 갑자기 나를 거기에 또. 이근호 목사는 막 산다면서, 그것까지 다 집어넣는 거예요. 제 뜻은 주의 뜻대로 막 살라했는데 주와 함께는 빼버리고 지가 알던 동질성으로 막 산다고 하는데.
이삭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인데 아브라함이란 인간 자체는 아브람에게는 없어요. 아브람과 아브라함 사이에 이삭을 집어넣어서 혈육을 끊어버립니다.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내려오는 그 관계가 아들로부터 차고 올라가요. 그러면 아들의 아들이 누구냐 하면,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여럿이 아니고 한 명이죠. 신약 때 마지막 때 오실 한 명으로 인하여 앞에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하는 사람을 생산해냈다. 거꾸로.
거꾸로 가면 제일 위에 누가 있습니까? 아담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이에요. 극과 극이 만난 거예요. 아담이 아담을 만난 겁니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우리를 납치한 거예요. 그런데 그 미래가 창세전이에요. 시간 자체도 일시적인 거예요. 창세전이 미래에서 와서 미래를 뜯어보면 창세전이라. 과거보다 더 과거죠. 최초의 과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전쟁해서 완전히 작살났는데 짓밟히고 다했죠. 그럼 최초의 전쟁이 바로 창세전에 있는 전쟁, 그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미카엘과 싸우는 그리스도와 싸우는 악마, 그 전쟁이 땅에 표현되게 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이상한 용어의 싸움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에요. 남자인데 여자를 통해서 나왔다. 여자는 뭐냐? 모든 인간의 대표자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돼버려요.
이 땅에 육의 경우에는 대표가 남자에요. 그러나 육이 영과 관련되어서는 남자가 대표에서 탈락이 되고 여자가 등장합니다. 마리아죠.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에요. 예수님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라면 뱀의 후손은 누굽니까? 악마에요. 영적 존재에요. 예수님은 물론 영적 존재지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적 존재가 아니고 그냥 사람이 돼버려요.
이삭을 약속의 자손이라 하지요. 약속은 영입니다. 자손은 이삭이니까 사람이죠. 약속이 지상에 나타날 때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사람의 모습이라 하면 가현설이라 해서 사람으로 오신 거예요. 성경에 육신의 모양으로 돼있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정치사를 보자. 메이지유신이라 해서 담당했던 사람들이 있어요. 일곱 명이 있었는데 그 메이지유신이 1930년도까지는 그들의 정권을 쥡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입헌군주제, 왕은 있고 국회, 행정부 있고 물론 사법부 있지요. 이렇게 그 제도에 따라 일본을 정치가들이 인도했어요. 그럴 때 한국은 준자치국으로 다뤘던 겁니다. 1905년 을사조약, 1910년 한일합방을 했지만 자율권을 허용한 입장으로 합병한 거예요. 정치가들이.
1930년 이후에 군부가 장악하면서 한국은 죽어났어요. 식민지정책에서 사람을 다룬다는 게 피곤한 일이거든요. 여러분이 파출부를 부린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하나하나 지시해보세요. 주인이 못할 짓입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파출부라면 결과만 이야기하면 돼요. 냉장고 청소해주시고요, 집안 청소하시면 됩니다. 나중에 그 결과만 확인하면 청소하는 방식에 대해선 문제 삼지 않아야 돼요. 그런데 정말 무능한 파출부가 오게 되면 시키는 사람이 답답해요. 하나하나 다해야 돼요. 창틀 이건 왜 안 닦습니까? 사람들이 힘든 겁니다. 그래서 단순노동에서는 외국인을 쓰지만 그렇지 않는 노동에서는 한국 사람을 써야 될 이유가, 말이 통해야 되고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야 되지, 외국사람 공부도 못한 사람이 하게 되면 제품 엉망 되거든요.
그래서 일제에서는 약간의 자치를 줘요. 합병했으니까 천왕을 섬기라 하고. 이걸 왕도정치라 합니다. 그런데 군부가 들어서면서 왕도정치가 황도정치로 바뀌어요. 왕도정치에서 왕은 상징적 존재로 백성과 따로 놀고 나라의 대표자이면 그만인 거예요. 그런데 황도정치가 되면 혈육적으로 모든 백성은 왕의 혈육이 되는 겁니다. 혈육이란 말은 타인이 아니고 한 몸처럼 움직일 때 황도정치라 해요. 그때는 천왕에게 목숨을 바쳐야 됩니다. 천왕폐하만세, 하고 자살폭격대, 가미가제 특공대 나오는 겁니다. 만주를 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나라꼴이 엉망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일화에 보면 일본에 신호등이 처음 나왔을 때 시민이라면 신호를 지켜야 될 것 아닙니까. 파란불은 건너고 빨간불은 멈춰야 되는데 일등병이 빨간불인데 건너가는 거예요. 순사가 잡았어요. 왜 잡느냐고 하니까 비록 군인이지만 일단 거리에 나오면 시민이기 때문에 시민법을 지켜야 된다고 했어요. 똑바로 한 거죠. 그러니까 부대참모장이 그 순사가 소속된 경찰서장한테 전화해서 압박을 가하는데 황도의 군인은 초월적인 초법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말라고 나온 거예요. 그건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박정희 시대 때 안기부 요원이 어디서 설쳐도 먹히는 것, 옛날 보안사가 계급도 없이 다 조사할 수 있는 것처럼 초법적으로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세상의 구조를 군부 또는 파시스트, 전체주의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잘 보여준 거예요. 인간의 본성이 그런 겁니다. 악마로부터 육으로 살아온 우리에게 내 힘으로 나를 못 지키니까 나보다 힘 센 대통령이나 왕에게 자기 몸을 던져서 눈에 보이는 이 나라 또는 눈에 보이는 이 교회가 하나가 되면 나는 구원받겠지. 목사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받겠지. 이게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에 몸 바치고 나라에 몸 바쳐도 여전히 자기 동일성은 나 잘 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내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 강의 결론은 뭐냐 하면, 내가 처참히 망가져도 더 망가진 분이 계셔요. 누굽니까? 바로 하나님의 언약대로 오신 약속대로 오신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타인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질문 던지는 게 아니고 진짜 질문, 창조주의 입장에서 우리 존재의 바탕이 되는 질문을 던집니다. “너, 나에게 왜 그랬어? 아담아, 나에게 왜 그랬어?” 사도 바울에게 찾아오신 주님이, “사울아, 나에게 왜 그랬어?” “주여, 누구십니까?” “네가 핍박했잖아, 나한테. 네 동일성 때문에. 니 천당 가려고.”
사도 바울이 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였습니까? 내 행함으로 천국까지 올려놓겠다는 거예요. 그게 자기 정신세계에요. 그게 종교에요. 찾아오는 게 없으니까 나라도 찾아가야 되는 거예요. 주님 찾아오니까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자기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란 말이죠. 내가 이렇게 나 위주로 살아가는 이것마저도 프로그램화 돼있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프로그램화 되어서 같은 마귀 자식으로 살아야 했고, 그것도 이 땅 살 동안 잠시지만 온갖 마귀 짓을 다 하는 이것조차도 주께서 하게 하셨다는 그 모습이 내 바깥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거예요. 내가 마귀한테 사로잡힌 그 동일성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는 말은 내 안에 누가 있다? 다른 동일성 들어온 거예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 너 같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주님의 십자가 피로써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육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다른 경계선을 넘은 겁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예수님과 우리는 진짜 영적으로 하나의 혈육이 된 거예요. 하나의 신부가 된 겁니다. 이거는 땅에 속한 혈육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혈육으로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 부활함으로 우리가 부활되고 예수님이 하늘의 형상을 입음으로 우리가 하늘의 형상을 입는 내용이 고린도전서 15장에 쫙 펼쳐져 있습니다.
이 모든 신약의 내용은 우리가 시편 7편을 놓치지 말아야 될 이유와 관련돼있습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시편을 보면서 다윗이 고생했다고 하니까 옛날이야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잠도 오는데 볼 필요 뭐 있나, 하고 덮어버립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고난 받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벌였지요. 그 당시 영적 전쟁 때문에 언약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비-언약으로부터 난데없는 쫓김을 당하고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궁핍하기 짝이 없지요.
7편 1절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누구한테 피하지요? 주님께 피하는 거예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기 위해서 주께서는 다윗에게 이런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번 일은 주님이 알아서 조치했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서 피하는 겁니다. 그걸 아시고 여러분 잘 하는 시편 23편 봅시다. 비로소 시편 23편이 납득이 될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지금 자기가 있는데 가진다는 겁니까, 가고 있다는 뜻입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주께로부터 와서 내가 스스로 힘으로 갈 수 없는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누가 와야 돼요?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면서 가게 하시는 겁니다. 가게 되면 마지막에 뭡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제 말씀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질문을 던지는 이유를 알겠지요. 우리의 바탕을 문제 삼는 겁니다. 우리의 동질성을 문제 삼는 거예요.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목자가 되어 옴으로 말미암아 네 숙제가 아니라 구원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숙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미 손대고 있는데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관심사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남한테 밑지기 싫어하고 내 소박한 행복 챙기는 것이 우선이고 남한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분주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그것 때문에 얼마나 조바심 내었고 조심스러웠습니까? 주여 이제는 그 동일성에서 벗어나서 모든 것이 주께서 시킨 일인 것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