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709a 부산강의 : [시편]12(6편)-임플란트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6편입니다. 시편을 강의하거나 설교하면서 어떤 고백만 달랑 나오니까 여기에 살을 입혀야 되잖아요. 살을 입힐 때 억지가 많이 개입돼요. 그리고 살을 안 입히면 교인들이 이걸 보면서 현재 자기 입장을 여기에다 직접 들이대서 자기가 실제로 이런 고생을 하는 것처럼 자기 위로 또는 자기 연민, 자기 격려, 자기 응원, 특히 더 나쁜 것은 자기 정당성, 자기 옹호, 이런 것에 시편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비약되는 겁니다. 시편의 고백과 QT한다는 인간들 사이가 너무 벌어졌어요. 벌어졌으면 시편의 내용과 실제 내용을 촘촘하게 채워야 되고 이어줘야 되거든요. 잘못 이어지게 되면 원래 시편에서 원하는 노선이 아니고 엉뚱한 노선으로 새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불교의 법경처럼 활용할 수 있단 말이죠. 어려울 때 이렇게 위로해주시는구나. 가정이 어려운데 시편 보니까 은혜 받았다고. 은혜 받았다면 시편 보고 어떤 결과를 낳았습니까, 하면 그저 은혜 받았데요. 은혜 받았다면 어떤 결과를 어떤 증거를 대라 하면, 그건 없지요.
시편 말고 다른 성경으로 할 때는 창세기라든지 그쪽에 어떤 사건들이 있기 때문에 목사 입장에서 설교 30분 때우기, 대충 이야기하고 그냥 넘어갈 수 있지요. 시편엔 고백만 달랑 나오니까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바탕을 다 채워야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채우는가? 채우는 방법은 허물고 채우는 거예요. 시편에 나오는 고백이 나의 고백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말은, 나는 신자일리 없다는 자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은 신자일 수가 없어.”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래도 나는 신자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상상이 안 간다고 이야기하겠지요. 그건 여러분 식구 가운데 안 믿는 사람 있잖아요. 믿다가 안 믿는 사람, 그 사람 심정을 이해하면 되지요. 교회 다니다 안 다닌다는 말은, 그때 교회 다닐 때 남들에게 교회 다니는 것처럼 보이고, 신앙인인 것처럼 보였단 말이죠. ~~인 것처럼, 뭔가 보였다는 그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 그렇지 아니한가를 거기다 대입할 필요가 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는 결코 신자일 리가 없어. 나 같은 게 왜 신자야.” 이게 우리 출생에 합당합니다. 부합됩니다. 우리는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신자일 수 없어요. 신자 아닌 게 적당해요. 이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하지 말란 말이죠. 시편에 나오는 고백처럼 자기도 고상한 고백을 할 거라고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시편에 나오는 고백들은 고백이 터져 나오는 그 자리와 우리의 자리가 대척관계에 있다. 마주보고 서로 노리고 원수지간에 있는 서로 섞일 수 없는 견제하는 장소에 우리는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시편을 보면서도 현재 내 자리에서 시편까지 건너갈 수 있는 다리나 어떤 연결고리를 끊어진 상태입니다.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은 우리에게 낯설고 시편의 고백은 우리를 약 올리고. 그럼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삐져서 그럼 앞으로 시편 보나봐라, 하고 쉽게 덮어버리는 요소가 이 시편에 들어있습니다. 너 같은 것은 볼 자격이 없어, 이런 식이란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교회에서 전도할 간곡히 하잖아요. 커피 주고 휴지 주면서 우리 교회 한 번 나와 보세요. 오늘은 비가 와서 안 나왔지만 지하철 타고 오다보면 젊은 부목사와 아줌마 두 명이 늘 하는 게 있어요. 간곡하게 한단 말이죠. 그런 전도를 받는 사람은 그 순간 자기가 정상인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내가 정상인데 저 교회에서 믿는 하나님이 나를 예쁘게 보려고 아주 용을 쓰는구나. 그럼 내가 나중에 마음 풀리고 여유 있을 때 봐주는 식으로 한 번 가주지, 뭐. 이런 건방을 떨어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성경을 문을 두드려도 안 열어주는 곳이에요.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문을 우리가 열 수 없게 돼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아니면 문이 안 열리게 돼있어요. 그 다윗이 시편을 쓰신 분이거든요. 시편 전체가 문이라고 보면 돼요. 그리고 어떤 문이야? 안 열리는 문,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 그게 시편이에요. 그러니까 시편을 건방지게 이해한다는 자체가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시편 자체가 못 들어가도록 막는 문이란 말이죠. 어딜 넘봐.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처음부터 인간은 닫혀 있고 안쪽에서 문고리를 잡아당겨도 바깥에서 완전히 자물쇠로 잠가버렸단 말이죠. 이쪽에서 천국 가려고 문을 열려하는데 바깥에서 잠근 거예요. 내 쪽이 문제가 아니고 게을러서 구원 못 받는 게 아니고요. 열심을 다해서 구원을 못 받게 돼있어요. 그러니 교회가 사기꾼이죠. 열심을 다한다고 구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럼 교회는 왜 허락했는가? 네가 어느 정도로 사기꾼과 잘 놀아나는지 교회 다니면서 같이 합작해서 서로서로 위로하면서 교회 놀이하라 이 말입니다. 둘 다 안 돼요. 구원에 넣어주려는 사람도 구원 안 되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구원이 안 되고. 왜냐하면 주도권을 다윗의 자손이 갖고 있다니까. 이 말은 나한테는 내 구원에 주도권이 없어요. 이게 지당한 겁니다. 너무 당연한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목회를 한다는 것은 사기꾼이든지 마술사든지 하여튼 눈속임하는 그런 류 밖에 없어요. 안 되는 것을 된다고 언급하니까 이건 주님 보시기에 같잖지도 않은 이야기에요. 온갖 수완과 요령들을 다 이야기해주거든요.
오늘 시편 6편을 보게 되면, 여기 어떤 사람이 굉장히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인생을 고단하게 사는 지친 모습이 나와요. 그럼 우리는 시편 6편을 보면서 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요.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수척이란 말이 나오고, 3절에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그 다음에 6절 보면, 눈물 나오지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눈물이 풀장을 다 채운 것 같아. “내 요를 적시나이다” 요를 적신 정도는 되지만 침상을 띄운 정도는 너무 심했다는 거죠. 그 다음에 7절에는 근심이란 단어 나오죠. 8절에 행악하는 자 나오잖아요.
이걸 보면서 우리는 자기 연민, 자신에 대한 위로, 자기에 대한 응원, 이런 것을 목적으로 성경을 보는데 시편 6편에 도달하게 되면, 지금 안 괴로우니까 나와 상관없이 지나가고 싶은 내용들이죠. 고생했구나. 또는 좀 안다는 사람은, 주님이 우리 대신 고생했구나. 주님께서 고생한 것 알지. 7장 넘어가자. 시편 7편, 8편으로 넘어가서 위로할 것 없는지 보는 거예요.
제가 총신 졸업하고 난 뒤에 시편에 대해서 글을 쓴 게 있어요. 그때 성서유니온 자리에서 성경고부를 했는데 지금 기억나는데 시편을 어떤 구조로 이야기했느냐 하면, 질고이란 걸 썼어요. 계곡이죠. 이쪽 지점에서 저쪽 지점으로 넘어갈 수 없는 거예요. 질곡이 시편에서 고생, 마음고생, 고난, 괴로움, 행악하는 자에게 시달림. 시달림이 적당하겠네요. 우린 행악하는 자를 모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시달림. 이 알 수 없음을 찾아내야 돼요. 안 그러면 오늘 강의는 헛방입니다.
알 수 없는 시달림. 그런데 꼭 집어서 남편이 괴롭힌다? 아니에요. 자식 때문에? 아닌데요. 뭔가 인생이 불안정한데 알 수 없어요. 취직이 안 돼서 아니라 돈 있고 자식들 무탈해도 알 수 없어요. 늘 불안증세가 일어나는 거예요. 쫓기고. 해답을 미리 말씀드릴게요. 해답은 창세기 1장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뭐라 하시느냐 하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돼있지요. 이건 누구 입장이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창세기 3장에 들어와서 죄 짓고 난 뒤에 무엇을 고집하느냐 하면, 내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에 고착돼있습니다. 우상처럼 거기에 자리 잡았어요. 뭐가?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산사람이면 프로야구 롯데자이언트를 응원하지요. 롯데자이언트는 십 몇 년 동안 소원이 있어요. 올해는 가을야구 해보자. 제발 5등 안에는 들자. 처음에 이대호 펄펄 날 때는 설마 5등 안에는 들겠지 했는데 쭉 내려가서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5~7등 사이를 왔다 갔다 해요. 만약에 롯데가 연승한다. 롯데 팬들은 아침부터 미소가 얼굴에 그득해요. 기분이 좋아요. 왜냐하면 부산이 보기에 심히 좋은 거예요. 부산 땅이.
제가 어제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어떤 목적과 계산과 기대를 하지 마세요. 그 짓은 지 손가락으로 지 눈을 찌르는 것과 같다고요. 괜히 기대한 게 있고 소망과 목적이 있으니까 그것에 따라서 인생의 색깔이 오르락내리락, 인생 자체가 자기가 설정해놓고 그것 따라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거기에 농락당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조울증도 아니고 되게 좋았다고 되게 울었다가.
그게 뭐냐 하면, 나를 위하는 내가 보시게 심히 좋았더라를 설정해놔요. 목표를. 이 정도 되면 내가 보시에 심히 좋았더라. 나는 그렇게 간주하겠다. 그 다음에 세상에 나갑니다. 이 목적 들고. 세상에 나가서 가까운 사람들 만나보면 지 뜻대로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는 거예요. 마음자세가. 사서 마음고생 되는 거예요.
지 손가락으로 지 눈을 찌르든 말든 자기 기대 없이는 또 살 수가 없는 게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뭔가 계획이 있어야 되고 기대가 있어야 아무지게 노력하는 동기부여가 되죠. 일하는 동기부여가 되려면 뭔가 노리는 게 있어요. 직장 그만두고 퇴직해서 생각해보면 아무 탈 없는데 삶이 재미가 하나도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동기부여가 안 돼서 그래요. 목적이 없는 것은 시체인지 사는 건지 분간도 안 되잖아요. 힘들다는 건 목표가 있어서 거기에 대해서 약간 긴장감도 느끼고 성취감도 느끼고 사는 게 그거지. 뭐 있겠어.
이 둘 사이가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싸우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쉽지요. 내가 보기에 좋았다는 걸 접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걸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걸 쳐다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은 이렇게 하는데 문제는 이걸 모른다는 거예요. 이걸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무엇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가를 아무리 애써도 우리는 모르게 돼있어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걸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아예 없는 것인가? 아니, 있어요.
있다면 어떻게 발견되는가? 내가 보기에 심히 좋은 게 실패로 끝나는 현장에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게 그때 등장해요. 망하는 가운데 감사가 나오게 돼있어요. 내 뜻이 좌절되고 내 뜻이 엉망진창이 되는 그 현장에서 내 뜻이 꺾어지는 그것마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이렇게 했어야 되는 일, 그것이 바로 나는 비록 안 좋지만 주님 보시기에 주님이 원했던 거고 주님이 원래 계획했던 그 뜻이란 말이죠. 그럼 우린 뭐냐? 주님이 원래 계획했던 그 뜻의 시다바리죠. 그 뜻을 위하여 그 뜻을 모르고 우리는 항상 오해와 곡해 속에서 지 뜻 안 된다고 울고불고 하거든요.
케이블에서 방영한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가 있는데 그 드라마의 OST에 있는데 거기 가사를 보면, “고단한 하루일과 끝나고” 아침에 출근하면 하루일과가 메일로 옵니다. 딴 생각을 할 수 없어요. 그 메일이 지시한 그 일을 그 날 다 이뤄야 되고, 못 이루면 잔업을 해야 돼요. 항상 일거리가 잔업 하게끔 주어집니다. 그냥 실실 대충하면 퇴근 못하는 일거리가 주어져요. 그 일거리가 노는 것이라면 그 사람을 직원으로 안 뽑을 테니까. 반드시 회사 그 시간보다 오버되는 양의 일거리를 줍니다. 딴 생각 못하게. 예수님 생각도, 하나님 생각도 전혀 못하게. 그러니까 고단하지요. 일한다고 다 패스 되는 게 아니니까 일을 집중해서 해야지요.
그런데 일할 때는 고단한 줄 몰라요.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일 끝났습니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왔습니다. 그러면 그 날 하루는 갑자기 목표를 잃어버렸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누가 시켜줘야 내가 된다는 것, 옆에서 나한테 지시하고 나를 밀치고 누군가 나에게 이야기하고 명령하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 모호해져요. 그런데 일거리가 끝났으니까 고단한 신체만 남았어요. 그러면 내가 누군지 알려면 어딜 가느냐 하면, 정희네 집, 꼭 술집에 가요. 다시 옛날 이야기하면서, 옛날에 허세 떨었던 이야기하면서 똑같은 남자들 열댓 명 모여서 술을 먹어요. 매일 저녁마다. 술 먹었으니까 자고 아침에 또 출근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내가 되고 싶은 나와 사회가 떠미는, 강제하는 나 사이에 갈등하는데 남의 지시받는 게 그렇게 싫으면 회사 그만두면 되지 않겠느냐? <미생>이란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회사에서 모든 일과는 전쟁이다. 하지만 바깥은 지옥이다.” 지옥이냐, 전쟁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이것저것 다 놔버리면 인간은 자기 존재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렇게 살다 퇴직을 합니다. 내 몸이 퇴직을 한 게 아닙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지시받고 술 먹으면서 화를 냈던 내가 퇴직했어요. 그러면 나라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에요. 내 안을 뜯어보면, 시켜만 주이소. 돈만 벌면 뭐든지 하겠습니다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퇴물, 아무 쓸모도 없이 이제는 폐기처분돼 내쫓기면 안에는 시켜만 주이소가 되는데 사회가 안 시켜주니까 또 미치는 거예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뭘 설명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행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8절에. 시편 1편에 보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죠. 그러면 시편은 (율)법에 속합니다. 법은 짐승이라든지 산천초목에 이야기하지 않아요. 법은 인간에게만 이야기해요. 주님께선 인간을 시비 걸어요. 개나 소나, 원숭이, 낙타에 시비 거는 게 아니고 인간을 겨냥해서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이 다른 짐승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외에는 형상이 없어요.
그런데 형상과 인간 사이가 법으로 연결돼있고 법이란 말이거든요. 언어로 연결돼있어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선악과 심어놓고 그냥 멍하니 쳐다보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17절) 이미 그 관계를 하나님 쪽에서 선악과 심으면서 동시에 그 관계를 굳어지게 한 거예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있다면 생명나무에 대해서 지시한 게 아니에요. 선악과나무에 대해서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돼있어요. 이걸 뱀이나 짐승에게 이야기한 게 아니고 인간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면 선악과 자체가 이미 인간을 겨냥했다는 겁니다. 왜 원숭이한테 안 하고 인간에게 하느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고리를 갖는다면, 형상이 형상답게 되는 것은 주님의 법이 유지돼야 되고, 이 법은 인간의 언어에 의해서 하나님께 지시를 받는 겁니다.
그리고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 게 뭐예요? 금덩어리 받았어요, 돈 받았어요, 뭘 받았습니까? 지시받았지요. 말씀 받았다고요. 말씀과 지시를 받은 거예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이게 뭐냐 하면,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이번에 사도행전 하겠지만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 받아서 슈퍼맨 됐어요? 갑자기 힘이 세졌습니까? 오순절 성령 받은 변화의 조짐이 뭘 이야기하는 거예요? 말을 하는 거예요. 어떤 말?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의 말을 하는 겁니다.
듣도 보도 못한 것, 왜냐하면 인간은 창세기 3장에서 이미 범죄 하고 난 뒤에는 창세기 1장, 2장은 없어요. 창세기 1장에 일어난 일은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듣도 보도 못한 일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 일을 복음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해주지요. 이걸 어제 낮 설교에선 성령이 왔다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 우편에서 오는 거예요. 하나님 우편이 천지창조가 있기 전에 계셨던 자리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왔다는 것은, 인간이 듣도 보도 못한 인간이 범죄 하기 이전에 아니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계획, 그걸 에베소서에서는 창세전의 비밀인데 예정된 비밀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복음이라 해요.
복음은 듣도 보도 못한 천기, 비밀입니다. 그게 에베소서 3장에서 감추어진 비밀이에요. 뭐 교회 와서 돈 벌고 몸 건강하고. 도대체 하나님한테 건강하게 해 달라, 우리 집안 잘 되게 해 달라. 무슨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는 무엇을 구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예수 믿고 난 뒤에 힘들면 안 되잖아요, 하는데 제가 다시 이야기하지만 힘들어서는 안 된다는 게 뭐냐 하면,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고 고집스럽게 움켜쥐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그래도 사람들이 자기 좋으라고 신을 믿는데 그런 것 안 하면 교회 자체가 안 될 걸. 거기에 대해서 이미 구약에서 네 자로 우상숭배로 된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우상과 라이벌로 같이 등장해요.
그 말이 맞더라도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원래 뜻에 의하면 우리는 살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게 아니고 밟아 죽이려고 태어난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 하고 쫓겨났잖아요. 그러면 창세기 2장의 괜찮던 시절은 잊어야지요. 그때 잘 나가고 벗고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행복했던 그 시절은 뱀과 만난 이후에는 잊어줘야지요. 지금 상황이 지 주제를 알아야지. 범죄 하지 않을 때는 그만한 혜택이 주어졌는데 지금은 자기 자신이 범죄 한 거잖아요.
범죄 한 자에게 주어진 것은 뭐냐? 주님께서 저주로 밟아줄 때 밟히는 것밖에 없어요. 밟아준다는 말을 제가 험악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8장, 19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포도주 틀에 포도를 넣고 짓밟아 터뜨려서 술 되게 할 때 그 모습이 하나님이 진노하는 모습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분노로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거예요. 미국 가나 한국에 있으나 마찬가지에요. 주님의 진노가 아파트 사나 빌라에 사나 해운대 사나 대구 사나 하나님의 진노 없는 곳이 없어요.
진노가 없으니까 회개하면 되겠네요. 회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진노가 없으니까 회개는커녕 오히려 반발만 가중될 뿐이죠. 하나님 믿는데 왜 힘들게 살게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은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이런 식으로. 반발만 자꾸 확대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었어요. 왜냐하면 반발할 때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란 말이죠. 도대체 화는 어디서 나는가? 왜 나는 분노하는가, 왜 나는 성을 내는가? 나는 왜 짜증내는가?
그것은 내 몸이 내 말을 안 들어요. 내 육체의 욕망이 내 말을 안 들어요. 왜냐하면 몸이 먼저 있고 나라는 게 나중에 나왔기 때문에 나중에 나온 것은 취급도 안 해요. 내 몸의 욕구와 욕망이 우선되는 겁니다. 그 욕망은 창세기 3장 이후에 범죄 한 욕망이고 쉽게 말해서 악마의 욕망, 악마의 취지를 우리 인간들이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마구 그걸 방출하고 있고 발산하고 있는 거예요. 움직였다 하면 악마의 뜻이 그냥 나오는 거예요.
악마의 뜻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내버려둬. 제발 내버려두세요. 신처럼 된다는 거예요. 네가 독자적인 인간으로 사는 것이 너한테 가장 행복하다는 겁니다. 너 홀로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는 거예요. 신이라도 네가 신을 선택해서 믿을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내 책임, 내 권한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경이야기가, 시편이야기가 먼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시 정리하게 되면, 우리는 처음 뜻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시편이나 성경의 뜻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로 들려질 수밖에 없어요. 사도들이 이야기할 때 듣도 보도 못한 내용이에요. 마태복음 5~7장 산상설교 끝나고 난 뒤에 그걸 듣던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어떤 평을 내렸습니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그 권세가 어디서 났느냐? 처음 듣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나온 게 아니라 하늘의 권세라고 했어요. 세례요한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예수님이라면 더 그렇게 이야기하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 당시 권력자들이 왜 예수님을 제거하려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행적과 취지와 뜻이 지금껏 쌓아놓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벗어난 그것을 민중들은 신의 권세로 봤고, 바리새인들은 악마의 권세로 본 거예요. 사탄의 권세로 본 겁니다. 자기 자신을 정당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당부를 했어요. 그들과 말 섞을 생각하지 마라. 먼지를 털어버려요.
쉽게 말해서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을 달래서 구원하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왜냐하면 처음 인간이 태어나기 전 창세 이전의 계획에 의하면 누가 구원받을지 말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겁니다.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한 설교가 있는데 이 성에 내 백성은 많음이라고 돼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 성에서 설교한 이유가 자기 백성을 찾아내는 거예요.
우리나라 대통령이 만약에 브라질이나 독일이나 아프리카 다른 나라에 가게 되면 정상회담도 하고 짬을 내서 누굴 만나느냐 하면, 교민들을 만나지요. 그 교민들이 누굽니까? 에티오피아 같으면 에티오피아 국민이에요? 우리나라 국민이죠. 자기 나라 사람이죠.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한 것은 천국 백성 만나라. 하늘나라 시민권 가진 그 사람을 만나라는 거예요. 만날 때 말로 만나는 거예요. 돈 주고 만나고 놀러가서 만나는 게 아니고. 그 말이 복음이란 말이죠. 그 복음의 내용이 원초적인 거예요. 듣도 보도 못한 걸 만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걱정이 돼서 듣도 보도 못한 말을 어떻게 납득되지? 지금 납득, 설득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 백성, 하나님이 정한 백성이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말을 세상에 그쪽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지나가는 사람이 깜놀. 어떻게 이런 말을 압니까? 진짜 그 고백에 미칠 정도에요. 어떻게 이걸 알아듣느냐 말이죠. 그러니까 설교자가 내가 설교 잘해서, 이게 아님을 내 솜씨가 아님을 설교자도 알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 보고 오히려 설교하는 자가 더 두려운 거예요. 정말 조심해야 되겠구나. 쓸데없는 소리하면 안 되겠구나. 설교에 조금이라도 교인들 끌어 모으려고 수작을 떨어서는 안 되겠구나. 천국 가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안 받아주는 식으로 설교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어제 낮에 제 아내가 그런 이야기해서 제 아내를 다시 봤어요. 내가 깜짝 놀랐어요. “여보, 교회 문제 있으면 그만 둡시다.” 저게 믿음이다! 교회는 주님이 만든다는 사실이거든요. 이걸 어떻게 인간의 이해로 납득이 됩니까. 갑자기 아내 자랑이 됐는데. 접자. 다른 말로 죽자란 말과 같은 말인데 교회는 주님이 만드는 거예요. 그럼 왜 교회가 있느냐? 가짜가 있어야 느껴지게 돼있어요.
교회가 있으면 목사가 붙들게 돼있고, 붙들면 목사 보기에 심히 좋았다는 교회가 되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이건 목사뿐만 아니고 목돈 낸 그 교회 오래된 장로들, 집사들, 이 사람들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자기 자존심인 줄 알고 붙잡는 거예요. 붙잡을 때 백날 복음을 전해도 안 먹혀들어갑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교회가 우상 덩어리에요. 그래서 그들의 목사 뽑을 때는 지가 돈 투자해서 세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 잘 되라고 설교하는 사람만 뽑고, 맨날 당신 와서 교인 몇 명 왔고, 몇 명 빠졌고 그것만 따지는 거예요.
심히 내게 좋아 보일 때 정말 위험한 순간이에요. 심히 좋은 기억이 없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뭔가 내 뜻대로 될 때 내가 신자일리 없어요. 그것에 푹 빠져서. 그것이 내 인생인 양 여기고 있단 말이죠.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살지요. 그러면 사람은 떡을 포기하고 말씀으로 살아야 되는데 떡이 좋을 때는 절대로 말씀으로 올 수 없어요. 돈 세고 떡 먹는다고 바빠서 말씀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 말은 뭐냐? 자기는 원래 자리와 끊어져있는 상태인 것을 본인이 인정을 못해요. 창조 이전의 원리와 원칙과 끊어진 상태를 본인이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남들 그렇게 사는데 나도 그렇게 살지, 뭐. 내가 뭐 별거냐.
야고보서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다는 말이 있지요. 욕심이란 딴 게 아니에요. 내게 주시지 않는 걸 기대하는 게 욕심이에요. 내가 이런 형편에 사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최적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기에 지금 이 상태에요. 내 몸이 아프다든지 집안이 어렵다든지 이 상태가 가장 좋은 상태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이 말은 내가 좋은 것을 주님이 발길로 차버린 겁니다.
마태복음 5장 3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아멘. 바리새인이 맹세하는 거예요. 맹세할 때 점점 낮아지다가 가장 현실적인 맹세가 뭐냐 하면, 내 머리로 맹세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네가 백날 용을 써도 창세전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대로 갈 뿐이다. 그러니까 현재 내 형편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 되는데, 이게 주님께서 입을 다물라는 이야기거든요. 그 뒤에 나오잖아요. 문제는 입을 못 다물게 우리의 육신이 내 안에 있는 괴물이 나를 들쑤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우리는 시편 볼 때 어떤 마음으로 봐야 된다? 내가 신자일 리가 없다. 그 말이 맞아요. 우리는 이미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 신자일 리가 없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시편도 율법이라 했지요. 그러면 로마서 3장에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와 진노 아래 있음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로마서 3장에서 계속 나가기를 너희들이 백날 그런 자세로 해봐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해요.
지는 행복하지요. 세상에 나가보세요. 행복한 사람 얼마나 많습니다. 특히 해운대 앞 바다에 가면 지금 비오는 데도 행복한 사람 많아요. 자기는 행복한데 문제는 행복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은 아니란 말이죠. 자기 보기에 심히 좋은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건 아니에요. 하나님까지 챙길 것 뭐 있어, 나만 챙기면 되지. 하는데 문제는 심판 날이 오면 모든 것이 개꿈으로 끝나는 거예요. 꿈꾸면서 멋진 일하는 것, 좋지요. 아침 돼서 꿈 깨면 어떻게 됩니까? 꿈이었었어?
꿈 깰 것까지 없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조금씩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데 죽음이 날 끌고 있어요. 생각해보면 지나간 어제가 그렇게 아까워요. 어제 하루가 얼마나 괜찮고 재미있었어요. 그러나 오늘 그 재미있었던 것이 없어졌어요. 국가가 보상해야 됩니까? 어제란 시간이 날아간 걸 누가 보상해요? 내일 되면 오늘이 없어지는 데요. 그냥 팔다리가 잘라지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진짜 모습이에요.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하나님의 그 정해진 자리에서 우리는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이왕 빠져나오지 못할 것 신처럼 네가 하나님이다, 하고 그냥 살면 나름대로 행복할 걸. 이게 마귀가 우리 육체를 통해서 계속 우리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덩달아 께 좋다고 축제 벌이고, 대구는 왜 그리 축제가 많은지. 돈을 다 거기다 쓰는가.
그러면 시편 6편을 어떻게 할까요? 이제부터 이야기합니다. 시편 6편 말씀을 보지 마세요. 안 보면 어떻게 되느냐? 시편 6편 말씀이 그대로 현실화 되어서 자기 백성을 방문합니다. 찾아오지요. 원치 않는 사태가 내 인생에 시편 6편 자체가 덮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편 6편이 다윗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어느새 이게 나를 지적하시고 나를 지목해서 주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왔을 때 ①지켜야 된다. ②지키게 돼있다. 몇 번입니까? 우린 다 알지요. 지키는 게 아니고 지키게 돼있어요. 어떤 식으로 지키는가? 이건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변화. 우리의 변화로. 심령의 변화,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남의 이야기로 여겼던 시편 6편이 바로 my story나의 이야기로 들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행함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되고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견책 받는 것이 어떤 느낌이고, 주의 진노가 무엇이며, 내가 수척한 게 무엇이며, 긍휼이 무엇이며, 영혼이 심히 떨린다는 그 조짐마저 우리가 감지되는 인생이 되면서 그때부터 내 인생은 뭐냐?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인생이 되면서 내 인생은 변화를 통해서 사라져줘야 돼요.
그동안 내가 힘들게 살았던 것은 죽으나 사나 내 인생은 내 것, 내 인생 여기 있다, 내 인생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애를 쓴 거예요. 지가 주인이니까 조절하는 거예요. 때로는 예수도 믿고 때로는 교회 못 간다고 미안해하면서 변명들을 늘어놓으면서 주님과 밀당하는 거예요. 지난 주 빠졌지만 그래도 헌금은 천 원 드렸잖아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위기가 왔을 때 바짝 기도할 테니까 우리 애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주시고. 내가 안 사라져. 내가 안 사라지면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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