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답(이근호)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120211)

아빠와 함께 2013. 4. 13. 08:33

 

2012년 겨울 수련회 제 9강의 일부를 제시합니다. "사도바울 같은 경우는 제 3의 안목을 갖고 있습니다. 나 있고 내 속의 나가 있는데 이 두 개의 나가 아무리 해도 죄를 짓는 나, 이 죄는 내 속에 있기에 바로 그게 나인데, 나라는 이 죄가 나를 갈구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도록 할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고 외칩니다. 나는 모든 것이 탈진상태, 절망적인 입장이라고 해 놓고 뭐라고 합니까?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되어 있지요.(롬 7:24) 그 사망의 몸은 누구 몸입니까? 자기 몸이잖아요. 그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면 사망의 몸 따로 있고 그 안에 갇혀 있는 꼴로 자기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관찰하는, 내 안에 내가 있는데 그 것을 못 벗어난다고 그것을 관찰하면서 “아, 곤고한 나여!” 하고 외치고 있는 나가 또 따로 있지요. 몸은 몸이라고 치면 나가 두 개가 되지요. 몸 안에, 육신에 갇혀서 어쩔 수 없는 나와 그것을 관찰하고 조사하고 탐색하고 있는 나, 이 둘 합해서 나, 이 나 사이에서 “오호라, 절망이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합니다.”라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제 3의 시선이 뭐냐, 이러한 지경에 이르도록, 이것을 밝히 볼 수 있도록 율법을 주신 제 3의 처소, 공간이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선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감사하리로다, 했으니까 지금 사도바울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안목에 같이 동참하고 있는 거예요. 보통 복잡한 논리가 아니지요. 이 복잡한 것을 한꺼번에 그림으로 일목요연하게 표현할 길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몸이 있고 몸 안에 나가 들어 있고 그 몸을 관찰하고 있는 ‘나’가 있는데 그 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나로 그리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곤고한 몸을 유지하면서 항상 우리 육신이 있는 한 항상 왕복운동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을 지켜보면서 “아, 저렇게 내 모습이 왔다 갔다, 잘났느니 못났느니, 절망했다가 신앙 좋다가, 혼자서 나는 신앙 끝내줘 하다가 나는 신앙도 아니야 지옥 갈 거야.” 혼자서, 아니, 그리스도와 함께 그 왕복운동의 그 고민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이미 십자가 안에서 구원받은 안목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주여,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니라 죄에서 벗어보려고 죄와 사투하고 있고 투쟁하고 있는 허접스러운 나가 현재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의 한계라는 것을 감사함 가운데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짧은답(이근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업(101022)  (0) 2013.04.13
십자가죽음과 부활 (130325)  (0) 2013.04.13
이단(120113)  (0) 2013.04.13
교회란? (120412)  (0) 2013.04.13
”하나님의 형상따라”의 의미 (120524)  (0) 2013.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