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413a약2장8절(저승사자)-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2장8절부터 봅시다. 8절 읽어봅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라고 되어있지요. 현재 성경이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사람밖에 없잖아요. 사람밖에 없으면 이 세상이 움직이는 법이라 하는 것은 누구하고만 의논하면 되느냐 하면 사람 대 사람으로 의논하면 돼요. 그럼 서로 존중하게 되니까.
그런데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이 만든 법외에 다른 법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라는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이 세상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니까.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 그게 만사 오케이가 되겠지요.
그런데 거기에 율법이 개입됐다. 이러면 이건 인간들이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인간들의 세계가 아니고 누구한테 간섭받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게. 우리끼리 좋게 지내면 만사가 좋다는 게 통한다? 안 통한다? 이게 안 통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의 간섭이니까 일종의 율법의 투입이지요.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런 중요한 말을 해요. 뭐냐 하면 나는 교회가기 싫어. 왜? 하나님께 간섭받기 싫어서.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그러면 교회 가는 사람은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좋게 지내면 만사가 괜찮다가 아니라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누구의 간섭 하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까? 하나님의 간섭 하에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것이 야고보에서는 하나님의 법, 여기 최고의 법이지요. 율법이라 봅시다. 하나의 율법의 투입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의 투입이니까 율법의 여러 가지 조항들이 한 두 개가 아니고 많잖아요. 그런데 율법의 최고의 법이라 했거든요. 여기에. 최고 법이니까 많은 법들이 있는데 그걸 종합해서 최고의 법을 야고보서는 뭐냐 하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그 법이라 되어있지요. 8절에 보면.
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는 최고의 법이라 하는 것은 나머지 여타의 법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이 사랑에서 전부 다 파생된 법이지요. 그러면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살잖아요. 인간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된다 이 말이지요. 이게 불교 신자든 아니면 교회를 안다니든 관계없이 이 세상에 사람뿐이라면 “그래, 니 종교 니가 알아서 믿고, 내 종교는 내가 알아서 믿을게.” 또는 “니 하는 행동대로 하고 나는 나 하는 대로 할게.”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러면 종교도 하나의 취미가 되니까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뭐 상관없고 그리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율법이 투입됐다 해 버리면, 이 모든 인간들이 놀겠다는 이것을 투입한다는 것은 그냥 투입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죠. 인간들끼리 하는 거. 율법의 투입은. 제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세상이라는 것은 인간들끼리 놀이마당이잖아요. 노는 마당이거든요. 세상이라는 것은. 여기에 율법이 투입됐잖아요. 그러면 인간들끼리 그냥 놀 때까지 놀면 이게 옳다. 그르다. 이게 잘못됐다 이 말이지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들끼리 마음 맞추면 OK. 그게 OK.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율법이니까 이게 법이잖아요. 법을 안 지키게 된다면, 누가 이렇게 투입할 때, 이게 법이 투입할 때, 우리는 에이~ 무시해 버리면 되는데. 법이라는 것이 투입되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되느냐 하면 벌칙이 주어져요. 벌칙이. 심판이 주어진다 이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상인이 들어와 가지고 물건사세요. 라고 들어왔다. 우리는 바쁜데 안삽니다. 하고 밀어내잖아요. 외부의 투입이니까 밀어낼 수 있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가면서 너희들 저주받을 것이라. 하면 우리는 놀랩니까? 아이고, 큰일 났다. 저 물건을 살 걸. 안사가지고 저주 받을 걸. 이럽니까? 아니지요.
아닌데, 율법의 투입도 그러냐 말이지요. 반드시 벌칙이 주어지는 거예요. 율법의 법칙이. 그런데 야고보서의 뒤에 보면 뭐냐 하면 여기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중에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 했지요. 자, 이 최고법이 없을 경우에 그냥 법과 법들만 있으면 열개가 있다 칩시다. 아홉개는 지켰는데 하나는 못 지켰어요.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홉개 지켜봐야 소용없다는 거예요. 다 못 지켰으니까 벌칙은 그대로 유효하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어긴 게 아니고 다 어긴 것이라 했거든요.
우리는 양적으로 아홉 개 지키고 하나 어기게 되면 그래도 90% 지킨 것이 된 것이기 때문에 100점 만점에 90점이 되는데 율법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다 빵점이, 0점이 된다는 거예요. 그건 왜냐하면 전부 다 최고 법. 최고법과 연관되어있기 때문에 거미줄처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오늘 아주 쉽게 가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간들끼리는 좋으면 그만이에요. 좋으면 그만인데, 율법이 투입됐다는 것은 이건 인간들끼리 좋게 하는 것이 이게 세상사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야고보는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의 투입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잔소리하는 것 같으면 무시하면 되는데 뒤에 뭐가 주어졌다? 벌칙이 주어진 거예요. 심판이 주어졌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심판이 주어졌으니까 우리는 거침없이 지켜보려고 하잖아요. 지켜보는데 열 개 중에서 아홉 개는 지켰는데 한 가지는 못 지켰을 때는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율법에서는 다 어긴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할 겁니다. 그 원리를 찾아야 돼요. 어떻게 해서 열 개중에서 아홉 개를 지켜서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효화되는 이유가 뭐냐, 그 원칙은 제가 설명했습니다. 이게 최고 법에서 파생돼서 연결됐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최고 법이 뭡니까? 이웃을 내 몸같이 그 다음이 뭐라고요? 사랑이 온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로마서13장8,9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다 들어있다. 이리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박스 자체가, 상자 자체가 사랑이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긴 것이다? 지킨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어긴 것이다? 지킨 것이다? 지킨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합니다. 나는 간음 안했다. 살인은 안했다. 그런데 사랑은 못하겠다. 하면 어긴 것이다? 다 지킨 것이다? 다 어긴 것이 돼요.
야고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랑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에요. 그 사랑이라 하는 것은 율법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추가적으로 율법 따라서 주어진 거예요. 최고 법을 주님이 지킨 거예요. 주님이 지켜서 우리에게 사랑이란 박스 안에 넣어주니까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율법을 다 이룬 그 사랑 안에서 이룬 사랑으로서 간주를 해준다는 거예요. 아~ 놀랍지요.
자, 이런 사랑가지고 사도바울에서는 이걸 가지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4자로 하면 기쁜 소식 이지요. 기쁜 소식. 그 다음의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사랑과 이 기쁜 소식을 누구한테 주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겠지요. 누구한테 주느냐. 우리는 나에게 오기를 기대합니다. 나에게. 나에게 오기를 기대하는데, 나에게 오지를 않아요. 나에게 오면 참 좋겠는데 나에게 오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립니다. 우리가 여기서 그래도 지난 번 하고 또 두 번째 하기 때문에 이제는 지난 번에 서툴던 게 이젠 조용히 조신스럽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난번에는 그것도 모르고 고함질렀어요. 세상의 나는 내 중심으로 삽니다. 이게 타고났어요. ‘나는 내 중심으로 산다.’ 어린애들 보면 잘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부부가 있는데 아내가 심심해서 남편보고 놀아 달라 했습니다. 그러면 한 30분 놀아줬어요. 그 다음에 자기 남편 할 일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30분 시간 빼줬으니 고맙게 여기지요.
그런데 어린 애들은 30분 놀아줘도 그새 30분 후에 딴 형이라든지 딴 동생이나 돌보면 화냅니다. 30분이나 놀아줬는데. 엄마 화장실에 가야 되고 엄마 점심식사 해야 되는데 그새 그걸 못 참아서 또 와요. 애들이 막 따라오거든요. 도대체 그 아기의 욕망을 어떻게 다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못 충족시키지요. 그걸 봐서도 애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는 거예요.
왜 인간이 율법을 투입할 때, 인간과 인간끼리 하게 될 때 자기가 괜찮은 인간이지만, 율법 앞에서 왜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키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느냐 하면 타고난 근성이 자기밖에 모르는 근성이에요. 나는 내 중심으로 사는데,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율법은 세상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하나님 중심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복음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움직입니다. 같을 리가 있습니까? 같을 리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세상은 내 중심으로 산다 말이지요. ‘우리 애는 왜 세월호에 빠져죽었습니까? 다른 애는 멀쩡한데.’ 이런 생각을 빠져 죽은 부모는 하겠지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니 애는 안 빠지고 다른 애는 빠지면 니는 기분 좋아할 이유가 뭐냐?” 라고 물을 때 인간으로서는 답변이 없어요. “다른 애는 다쳐도 우리 애는 안 다치면 우리는 고맙고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할 때 주님께서 물으시기를 “왜 다른 애는 다쳐도 괜찮은데 왜 니 애는 안 다쳐야 돼? 왜 니 애이기 때문에 안 다쳐야 되는지 이유를 나한테 제시해 보라.”고 하면 집사님은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내 애니까 무조건 안 된다는 거예요. 무조건. 무조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냥 우리가 아는 교회 다니는 상식은 뭐냐 하면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 복음 중심이잖아요. 뭔가 우리가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뭔가 같을 리가 있습니까? 없지요. 뭔가 잘못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복음이 나에게 온다는 우기고 있는 이 심보는 잘못 된 거 아니에요? 그렇지요? 왜냐하면 처음 바닥 자체가 바탕 자체가 내게 문제가 있어요. 내게 문제가 있다고요.
내게 문제가 있는데, 주께서 사랑으로 구원한다 하니까 그 사랑 저한테 주세요. 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기존에 문제 있는, 기존에 나한테 문제 있음이 계속해서 뭔가 그 문제를 수정할 생각을 안 하고 그 고집대로 우기면서 천국까지 골인하려는 욕심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욕심으로.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나만.
그러면 아까 한 최고 법을 해 봅시다. 네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 이게 최고의 법이잖아요. 네가 이웃 사랑하기를 할 때 이 내 몸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이에요. 자기 문제점이 있어요. 작은 법을 우리가 왜 못 지키느냐 하면, 큰 법을 우리가 못 지키기 때문에 저절로 우리는 작은 법도 그 파생된 법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을 안 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본질이 우리한테는 아예 없어요. 반드시 뭔가 해주면 그 대가를 바라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중심이지요. 방금 제가 한 말이 틀린 게 아니고 맞는 말이라는 게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최고 법을 지키려고 오신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환영받았어요? 천대받았어요? 천대받지요. 그냥 천대 받는 것이 아니고 너 같은 인간은 우리 사회에서 죽어 없어져야 돼! 하고 죽여 버렸잖아요. 많은 사람이 거기에 찬동했고 제자들은 도망쳤지요.
왜 도망칩니까? 스승을 보호하지 않고 왜 도망칩니까? 스승보다 누가 더 중요하다?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당연히 도망쳤지요. 그렇지요. 제가 지금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가 된다는 것은요, 성도라 하는 것은 교회 나온다고 성도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 나온다고 성도가 아니고 성도는 죄인 + 뭐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그래야 성도됩니다. 죄인 + 성령.
물론 성령은 우리를 인간이 아닌 죄인으로 만들겠지요. 그게 성도잖아요. 그러면 성도는 뭐가 있다? 보통 사람은 성령이 없지만, 성도에게는 성령이 있지요. 그러면 이 성령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할 때, 제자들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 손으로 원할 때 언제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습니까? 못 봅니까? 예수님 한 번 찾아가볼까? 아이고, 여기 계시네.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께서 나타나줘야 눈으로 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못 보거든요. 그렇지요. 그러면 성령 받으면 이건 뭐냐 하면, ‘저승사자’입니다. 성도는 저승사자에요. 왜냐하면 성령이 있기 때문에. 성령은 부활하고 난 뒤에 받는 거예요. 성령 안 받았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가치 없게 여기고, 생각하고 싶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께서 부활할 때 아무나 보면 길가다 보면 다 보입니까? 예수님이 보여줄 때만 보이는 거예요. 보여줄 때만 보이지요. 교회 간다고 성도 만나는 게 아니에요.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끼리만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같은 저승사자기 때문에. 오늘 제목이 저승사자에요.
왜 저승사자라고 하느냐 하면, 저승사자의 가치를 세상 사람들은 그 가치를, 성령 없는 사람은 알아볼까요? 못 알아볼까요? 못 알아봐요. 그 가치를. 저승사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세상에 대해서 일말의 미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의 영을 받았잖아요.
다시 할게요. 성령은 어디서 온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의 영이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고 있다는 말은 죽어서 살아있지만 사람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그 분의 영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지요. 그렇게 영이 지배한다면 성령이 주도권을 쥐고 있겠어요? 내 고집이 주도권을 쥐고 있겠어요? 성령이 주도권을 쥐고 있지요.
그러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가겠지요. 마치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만 사람을 강제로 몰듯이. 구름기둥 인도하는 대로 가야돼요. 밤에는 불기둥 인도하는 대로 가야 되고. 길이 없기 때문에. 천국 가는 길을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한다 이 말이지요. 인도할 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자기하고 똑같은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하루 밥 세끼 먹고 잠자고 까불고 다 까불고 좋은 거 다 좋아하고 백화점 옷 신상 나오면 부럽고 애 공부 잘하면 자랑질하고 싶고. 똑 같은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그 자기의 본색과 죄인이니까 죄의 본색과 성령의 나타난 십자가하고 늘 대조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거든요. 예수님의 증인됩니다. 그렇지요.
지금까지 어렵습니까? 안 어렵지요. 그래서 성령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성경해석은 문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하겠지요. 성령 안에는 누가 계신가,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다 했습니까? 미움 받고 살았지요. 그러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예수님은 왜 미움을 받아야 하는가, 이 땅에서. 라는 그 점을 보여주는데 성경을 거기다가 동원되는 겁니다. 성경해석이.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세상은 인간 대 인간끼리 마음 맞추면 괜찮은 인간이라고 봤지요. 인간끼리. 그런데 거기에 누가 투입됐다? 율법이 투입된 거예요. 율법이. 율법은 하나님의 간섭이라 했지요. 그런데 인간이 간섭하면 내치면 되는데 율법이 간섭하게 되면 내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벌칙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심판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 법을 지키면 될 게 아니냐. 하겠지요. 그 법을 지키면 되는데 아무리 지켜봐도 천개중에 999개 지켜봐도 하나를 어기면 다 몽땅 어기는 것이 되는 이유가 뭐냐가 궁금하다 이 말이지요. 어긴다가 했으니까.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으로 다가서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사랑은 왜 불가능하다 했습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가 없어요. 온전한 사랑을. 세상을 살 때 나는 내 중심으로 산다 말이죠. 이것 때문에 사람은 웃고 울고 하잖아요. 사람이 변명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변명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 중심인 것을 남한테 어필하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상대방이 나를 심판하는 심판주입니까? 같은 집안 식구가 심판주에요? 같은 교인들이 나의 심판주입니까? 그들의 영을 받았어요? 누구의 영을 받았어요? 예수님의 영을 받았지요. 그럼 심판주가 누굽니까? 예수님의 영이잖아요. 그럼 우리를 죄인으로 죽은 자로 간주해서 성령을 줘가지고 구원하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무슨 자로 간주한다? 죽은 자로 이미 간주하지요. 이미 죽었다고 보고. 그냥 죽은 게 아니고 이래서 죽었다고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죄를 우리를 평생을 통해서 끌고 다니면서 우리 중심을 까발려 보여 주시겠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했잖아요. 죄인을 부르러 와서 주님의 성령인데, 이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지고 온 성령이기 때문에 이 성령이 뭐냐 하면 바로 최고 법에 해당되는 곧 사랑의 법이에요. 사랑의 법이에요. 성령이. 사랑을 해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법을 못 지키는데 주님만 법을 지켜서 완성한 그 최고의 상,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최고의 법이 성령 오심을 통해서 우리 속에서 그게 지금 계속해서 실제로 주어지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그러면 아까 저승사자라고 했는데. 저승사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어느 모임이나 교회에 가서 누구하고 만이 이야기가 통한다? 저승사자는 같은 저승사자와만 이야기가 통하겠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과만 통하겠지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무엇을 최고로 여깁니까? 무슨 가치를? 내 중심으로 사는 걸 최고의 가치로 여기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 듣는 것, 예수님의 복음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겠습니까? 예수님의 복음이죠. 그런데 반대로 합시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기중심이지요. 자기중심인데 예수님의 복음은 누구 중심이다? 내 중심은 죄고 예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바로 복음이죠.
그러면 복음을 전하면 그 사람은 도망칩니까? 도망 안칩니까? 성령이 없는 사람은 도망을 치겠지요. 왜냐하면 자기에게 뭐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체면과 위신이 최고 중요하기 때문에. 내 가진 게 최고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면 요한계시록 6장 한 번 봅시다. 요한계시록6장에 뭐라고 되어있던가요? 6장15절~17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자, 여기 15절, 16절, 17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 내용이 지금 사람들이 피합니까? 반깁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피하고 있지요.
왜 피합니까? 피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피할 때 각자 자기 토굴, 동굴 속으로 피하지요. 피하는 직업도 다양하지만, 결국은 모든 인간이 다 해당돼요. 그 피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피하게 되면 “내 중심으로 살겠다.” 에 대한 고집이지요. 나는 내 중심으로 살겠다.
그게 내 중심으로 사는데, 자기들끼리는 안 피합니다. 왜냐하면 니도 니 중심이고, 나도 내 중심이고. 안 피하는데. 주님이 오니까, 주님의 복음 소식이 오니까, 성령이 없으니까, 도망가기 바쁜 거예요. 도망치기 바쁜 거예요. 이것이 지금 예수님 재림할 때 이야기지만, 지금 성령을 받은 저승사자들이 활동하게 되면 저승사자에서 나오는 이 복음으로 인하여 똑같은 현상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집안 식구가 네 명이 있는데, 성령 받은 사람이 한 명 있다고 칩시다. 나머지 세 명이 살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중심으로 살아요. 우리 율법 빼고, 복음 빼고, 예수 빼고, 십자가 빼고, 빼고 그렇게 살아가자는 겁니다. 교회 나가서 서로 친하게 지내고 서로 자랑질 해주고 서로 위해주고 그렇게 살자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교회 나가는 것도 뭐가 됩니까? 여기 보세요. 성령 받았다 하는 것은 뭐 + 한다. 죄지요. 교회 나가는 것도 죄에요. 십일조, 헌금하는 것도 죄입니다. 성경 공부하는 것도 죄에요. 죄 아닌 게 없어요. 뭐냐,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면 안 되니까. 이거 십일조 왜 했습니까? 누구 좋아라고? 주님 좋아라고 한 것이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한 거죠.
만약에 “아이고, 목사님. 일방적으로 그리 이야기하면 안 되지요. 나는 헌금할 때 주님 좋아라고 했습니다.” 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겠지요. 주님 좋아라고 했으면 주님의 보호 앞에 피해야 돼요? 안 피해야 돼요? 피할 필요 없지요. 내가 주님 좋아라고 한 것도 뭐다? 이것도 죄였습니다. 라고 나오는 사람이 저승사자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헌금을 할 때 주님을 위해서 했습니다. 하는 것을 점점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으로 했으면 그야말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했다면 헌금했으니까 내 몫으로 돌아오는 거 기대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기대를 안 하지요. 이만큼 헌금을 했으니까 나는 복 받겠고 나는 착하다 생각하고 나는 구원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지요.
그런데 어떤 인간은 헌금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생색을 내겠어요? 안 내겠어요? 낸다 이 말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보여준 최고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랑합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에요.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느냐 이야기했거든요. 요한복음 15장13절에서 이야기했다 말이죠.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지요. 예수님께서 보여준 율법 완성은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게 아닙니다.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한 사랑이지요. 자기가 죽어버리면 소용없다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무가치하게 된다는 공포감을 줍니다. 내가 아무리 잘돼도 내가 죽어버리면 소용없다. 우리 애가 안산에서 그리 공부를 잘해도 세월호 물에 빠지니까 소용없더라. 이리 이야기하잖아요. 내 자식이 죽었는데 내가 힘들어 죽겠어서 세월호에 빠지고 난 뒤에 내가 술로 보낸다. 이리 하거든요. 자식 죽고 난 뒤에 술사랑 했던 모양이라. 왜 자식이 죽었는데 술로 보냅니까? 남의 자식 죽었다고 술로 안 보내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 죽은 자식이 누구 자식이다? 내 자식이에요.
결국 자식을 사랑한 게 아니고 누굴 사랑한다? 자기는 나를 사랑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갑니까?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뭔가 잘못됐지요. 뭔가. 이 세상 전체가. 그게 저승사자의 눈에만 뜨인다 말이죠. 뜨이는 거예요. 어디 한 군데 고장 난 게 아니에요. 모조리 다 잘못된 거예요. 집사님은 잘못된 동네에 더 살고 싶어요? 빨리 떠나고 싶어요? 빨리 떠나고 싶지요. 그게 저승사자의 마음가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이 붕 떠있다니까요. 저는 이걸 마음에 붕 떴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도는 세상을 스캔한다.’ 스캔한다는 것은 위에서 아래를 드론처럼 죽 조망한다. 그냥 훑고 지나간다. 이 말입니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죽 훑어보는 것. 성도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돼요. 주욱 훑어가야 돼요.
애가 공부하는 거 전문대학 때려치운다고. 알았어. 죽 스캔하는 거예요. 딸이 가출해서 집에 안 들어온다고. 알았어. 스캔하는 겁니다. 알거든요. 지가 가출하고 지가 때려치운다는 것이 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고. 나를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율법을 어기게 되면 그건 뭐다? 바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한테 심판 받을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성도는 성령 받아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이야기, 이런 사람이 별로 없지요. 전부 다 서로 칭찬해주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가지고 이런 소리가 이 복음이 안 들리는 쪽으로 도망치고 싶지요. 거기다가 저승사자가 날아와서 이야기를 해버리면 아까 요한계시록처럼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빼는데 급급한 거예요. 내빼는데 어디로 내빼는가 봤더니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없어요? 아까 요한계시록6장에 보니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복음 피해서 어디로 가느냐가 궁금해요. 저는. 자, 복음을 피했다. 안 듣겠다고 귀를 막았다. 그러면 어디로 피신했느냐. 어디로 갔느냐는 거예요. 결국 피신한 곳은 숨 터보자고 가는 거예요. 휴~ 어휴~ 살았다. 그곳은 뭐가 안 들리는 곳이다? 복음이 안 들리는 곳이에요. 복음이 안 들리는 곳이 정신적인 안식처가 될 수 있어요? 없어요? 저는 그걸 자신만의 아지트지요. 자기중심만을 챙기는 아지트.
아지트와 비슷한 말이 아파트에요. 아파트의 특징은 빌라 정도가 아니에요. 아파트는 문 닫아 버리면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는 거예요. 층간 소음 이외에는 아무도 간섭할 것도 없고. 복도에서 담배만 안 피우면 돼요.
자, 사람들을 보세요. 저승사자의 안목을 가지고 보자. 사람들이 퇴근하면 집에 가잖아요. 그들이 피할 곳이냐 말이죠. 집에 가서 TV를 켰다. TV에서 뭐가 나올까요? 세상이야기 나오겠지요. 결국 그들이 피신하는 곳이 뉴스에서 그대로 나온다 말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이 모든 것이 해결해 줄 수 있어요? 자신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습니까? 없지요.
어디 앞에 나와야 됩니까? 사랑 앞에 나와야 되지요. 사랑은 아까 최고의 법의 사랑은 이 세상에 뭐로 등장한다고 했습니까? 친구를 위해서 뭐하면 최고의 사랑?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죽음 앞에 나와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만 이야기하면 도망쳐요. 만약에 어느 교회에 가서 제가 설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하면 다 도망가 버립니다. 전부 다 싫어해요. 참 희한하지요. 지금까지 오늘 강의한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안 될 정도입니다.
분명히 아까 사랑 안에서 모든 율법을 이루었다 할 때는 아주 기쁜 소식 이렇게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살인, 강도 어떤 것도 사랑 안에서 다돼요. 그런데 그 사랑 앞에 나온다? 안 나온다? 지금 안 나오고 있어요. 이 사랑이 부담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천국가기를 원했을 때 어떤 자세로 천국 가느냐 하면 내 중심을 유지하면서 어디 가겠다? 천국 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이 땅에 하나님께서 그냥 하나님만 계시고 이 지상에 인간만 있고 십자가 사건이 없으면 이 말이 맞아요. 이 땅에서 열심히 내 중심으로 살다가 가면 되는데 그 십자가 때문에 이것이 전부 다 지옥이란 사실이 밝혀져요. 지옥이란 사실이. 그렇게 가겠다는 천국은 사실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 가는 사람은 그런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죠. 내 것 지키면서 내 착함, 내 신앙 연조, 내가 신앙 열심히 헌신한 것, 교회에 봉사한 것, 헌금, 이런 거 다 열심히 말씀대로 사는 것, 이것 다 지켜서 가겠다는 것은 지옥밖에 갈 곳이 없어요.
자,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오늘 본문에 보면 모든 율법을 지켰거니와 해놓고는 뒤에는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됐다고 야고보가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이 율법이라 하는 것이 그러면 어디를 염두에 두고 율법이 주어졌는가를 볼 필요가 있지요. 율법만 주어진 게 아니고 율법을 지키라고 했고, 지키지 못하게 된 그 배경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배경이 무엇인가를 제가 알려드릴게요. 마태복음16장18절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게 됐잖아요. 그런데 그 교회에 위세가 뭐냐 하면 음부의 권세, 지옥의 권세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이기지 못하지요. 음부란 지옥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권세를 언급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운 교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어떤 없는 단체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지옥의 권세가 여기에 있는 사람을 뺏어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기존의 모든 인간들은 어디에 지금 사로잡혀있다는 말입니까? 지옥의 권세 안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러면 율법이라 하는 것을 주신 이유가 현재 너희들은 어떤 힘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죠. 그 힘이 뭡니까?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힘에 너희들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율법을 주시고 율법의 완성된 모습을 주님이 자신의 십자가로서 이게 사랑이야! 라고 죽음을 보여 준 거예요.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알고 그러면 성도가 저승사자처럼 드론처럼 보면서 세상을 스캔하면서 뭐만 보면 돼요? 세상 사람들, 아파트, 아파트 많잖아요. TV 뉴스 보면 시리아가 어떻고, 미국 트럼프가 어떻고, 한국의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이 어떻고, 김기수인지 건강론 이야기하고, 뉴스 보면 나오잖아요. 그 전체를 뭘 보면 돼요? 뭘 스캔하면 돼요? 이 전체가 뭐다? 지옥의 권세지요.
그러면 이 저승사자라 하는 성도가 그냥 날개 타고 하늘만 돌아다니고 밤에만 돌아다닙니까? 지상에 돈 벌어야 될 게 아닙니까? 돈 벌어야 되지요. 여기서 어떤 파출부를 한다. 파출부 한다고 저승사자가 직업을 가져요. 파출부라는 직업을 갖는다 말이죠. 남의 청소를 해줘요. 청소를 해가지고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돈 준다고 갑질이 시작되지요. 갑질이 시작되면 뭘 느껴요? 갑질이 시작되면 저승사자에 대해서 지옥의 권세자들이 지금 갑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갑질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어른행세, 높은 자 행세하는 거예요.
할 때 여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수모와 수치를 느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성도로 하여금 이건 뭐 오지 말라 해도 느끼게 만들어요. 천국가기 전에 실컷 지옥체험하게 하셔요. 그러면서도 지금 50대 60대 된 겁니다. 연세가. 지옥체험 한다고 팍삭 늙었어요. 저도 마찬가지고. 그들이 예수님이 당했던, 예수님이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 목수의 아들이잖아요. 하나님이지만.
모세는 시내산에 가서 밥을 안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했어요. 그것도 예수님은 수모에요. 인간의 몸을 지냈다는 자체가 주님 앞에는 이게 지옥체험입니다. 무~척 힘든 거예요.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을 때 이미 죄 속에 죄란 잉크물속에 들어온 겁니다. 우리야 죄 지었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이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한쪽 강도가 뭐냐 하면 자기중심이었지요. “예수여, 나를 건져내면 내가 당신 믿어줄게.” 이렇게 나왔지요. 그런데 한쪽 강도는 뭐냐 하면 “우리는 우리 죄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저 분은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당했잖아.” 그런 이야기했다 말이죠.
죄도 없으면서 당한 걸 뭐냐 하면 이걸 ‘억울’이라 합니다. 억울. 성령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제대해야 돼요. 사실은. 벌써 제대해야 되는데 그 제대는 순서에 맞춰서 주의 뜻대로 제대하실 거고. 군에 제대했는데 또 군대생활 할 때 굉장히 억울한 거예요. 굉장히 억울해요.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할 필요도 없는데 당하는 겁니다. 이게 성도가 가야 될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이에요.
주님도 당했기 때문에 주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통곡하면서 울면서 아버지한테 기도했다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이 땅의 지옥이. 하지만, 감사할 것은 이 지옥이 죽는 순간 떠난다는 겁니다. 지옥생활이 끝나는 지점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늙어가는 것이 좋은 점은 점점 더 제대 날자가 가까이 온다는 겁니다. 제대 날자가. 지금 제일 기분 좋아하시는 것은 이 가운데 제일 연세가 많으신 분이. 죽는 것은 우리 뜻대로 안되니까 문제가 되는데. 새치기할 수가 있어요. 그것도 좀 억울하겠지만.
정말 있고 싶지 않은 곳이에요. 뭐가 있고 싶지 않으냐 하면 주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자꾸 옳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옳다고. 뭐냐 하면 자기중심으로 하나님, 예수님 복음을 총동원해서 가리고 있어요. 그걸 계속 가리고 있는 거예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니까 그 벗겨내는 그것이 차마 견뎌낼 수가 없어가지고 도망치는데 어디로 도망치는가, 아파트로 도망치는 거예요. 기껏 도망치는 게 자기 집으로 도망쳐요. 거기는 일단 복음이 안 들리니까 자기 잘남이 있으니까 편한데, 아까 요한계시록 봤지요. 결국은 당해요. 매도 미리 맞는 게 낫다고요. 더 이상 우리 것을 가릴 수 있는 게, 우리가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돼요. 어디 미국, 캐나다 이민가도 소용없어요. 어떤 분은 미국 캘거리 이민 갔다가 밴쿠버로 이사 간 사람이 있어요. 제가 카톡으로 한 분이 있는데. 고생이지요. 한국 사람이 동양인이 외국 산다는 것은 고역입니다. 고역이에요.
하지만, 이미 청춘을 거기에 바쳤으니까 더 이상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힘들지요. 성도가 아니라면 밥 먹고 사는 게 힘들겠지만,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기 살려고 애쓰면서 힘든 게 아니고 주님한테 주는 눈총 있잖아요. 같은 인간이면 같은 인간답게 살아야지.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오는 어떤 오해. 전혀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지옥 속에서도 못 빠져나오면서도 빠져 나왔다고 우기는 거예요. 빠져 나오면 자기중심이 아니어야 돼요. 그런데 자기중심인데 빠져나왔다. 이건 안 빠져나온 거예요. 물론 순간, 순간 자기중심이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가만두지를 않으니까. 그게 바로 죄다. 언제까지 피할래? 어디까지 도망칠래?
그래서 우리가 이 야고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을 많이 안다고 세상을 많이 아는 게 아니고 최고의 법을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한꺼번에 팍! 찰칵! 사진 찍듯이 한꺼번에 사람을 찍어버려야 돼요. 찍어버리면 주님의 보시는 안목이 아까 저승사자의 안목이지요. 옛날 저승사자는 시커먼 옷 입고 다녔는데 요새는 뭐 미니 옷 입어도 괜찮아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세상에 성령 받은 사람은 받은 것을 취소가 안 됩니다. 달라고 해서 받은 게 아니거든요. 달라고 해서 받은 게 아니고 이건 달라고 해서 준 것도 아니고 따라서 가져가시라고 해도 안 가져가요. 성령 받은 것은. 그걸 팔자. 그걸 운명. 이런 팔자, 운명입니다.
목자는 자기가 택한 양은 버리지 않는다는 것.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안다. 그 성령 받은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예수님이 내 것 되는 것은 나는 원치 않음을 온 몸으로 그걸 느끼게 되지요. 내가 주님 것이 돼야 되지 내 잘되라고 예수님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내 가족,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잘되라고 내 앞 길이 지옥에서 출세하라고 있는 게 아님을,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시라는 것. 그런 안목을 가진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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