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겉은 고요한데 속에서는 정체 모를 복잡함으로 뒤죽박죽이다. 차 뒷좌석은 두 아이가 전쟁 중이다. 장난치다가 웃다가 싸우다가...아이들이 홧김에 거친(?)말을 교환한다. ‘누나는 돼지야!, 그럼 넌 똥이다!...내가 똥이면 누나는 인간이야!’....잠깐...뭔가 이상하다...똥 보다 더 센말을 할 줄 알았는데...왠 ‘인간‘?..운전 중 무심결에 듣다가 이제 궁금하다...그 뒷말이...
‘똥보다 똥을 만들어 내는 인간이 더 더러운 거야!‘...갑자기 복잡함이 사라진다...
집에 오자마자 수련회 소감을 써 내려간다. 쓰다가 문득 수련회 때 뱉어냈던 수많은 말들 중 어떤 말이 생각난다. 차라리 말을 말 것을...어떤 분께서 ‘이번에도 글 쓸 거지?’ 물으셔서 절대 안 쓴다고, 이제 게시판에 똥칠 안한다고 장담을 하고 왔는데...이게 무슨 우사스러움인가...그래도...어쩔 수 없다.늘 그렇듯 글은 두서없고 즉흥적이고 본인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이 써 질것이다.
‘부러워하지 마세요. 부러워하면 감사 할 줄을 모릅니다.’
일상에서 감사가 날아 가버린 이유를 들킨 듯이 이 말씀에서 찔림과 통증이 온다. 이미 수련회 교재 첫 소절에서도 느꼈던 감정이다. 감각기관이 없어서 볼 수 없고, 없어서 지각이나 기억 기능도 없고,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미가 부러웠다. 잠잠히 있다가 파장이 전해 질 때 마다 주님이 또 일하시는 구나 느끼는 피조물, 우주의 질서 과학적 체계 따위는 알 필요도 없고 오직 주님이 계시고 일하시는 곳을 중심으로 방향을 틀고 움직이는 피조물이 부럽다. 이렇게 엉뚱하게 말씀을 인식하는 중에 말씀의 관점 전환, 방향 틀기가 시작된다.
육이 있기에 모든 것의 인식과 해석은 육으로부터 시작된다. 인식하고 안다는 것이 어김없이 행함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 행함은 의미가 부여된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고,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휩싸여, 자체적으로 억압을 원하며 자발적 순종으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이런 지각 - 이해 - 결론의 순환과 반복을 통해 권력이 누적되고 그 권력 안에서 규율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규격화, 서열화 되는 집단, 기업, 국가가 형성된다. 참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납득이 간다.
그런데 이런 질서 속에서 어떤 갈라짐이 생긴다. 이미 본능적으로 의식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응시이고, 그 응시의 자리는 구멍이 난다. 그 구멍으로 인해 불안하고 두려움이 유발되어, 구멍을 메워보려는 초조한 시도가 시작된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일 거라는 공포를 사랑으로 바꾸는 인식의 시도, 굿판을 벌이듯 종교적 행위를 시도하며 그 응시의 욕망을 진정시키고 만족시키려 한다. 이런 모든 시도가 무로 돌아가는 낯선 침투가 시작된다. 원인은 없는 데 어떤 결과가 생긴기 시작하고, 전혀 이성적이지도 않고 납득도 가지 않는다. 낯선 결과들이 계속해서 진리를 대동해서 밀어 닥치며 가짜 자아를 드러내고, 그 자아가 만들어 낸 지금까지의 확고한 신념들이 환상임을 밝힌다. 그리고 점점 더 몰아 붙여 공허라는 우리가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로 가게 한다. 있음에서 없음으로...
생명 있음에서 생명 없음으로
권리 있음에서 없음으로
알고 있음에서 알수 없음으로
할수 있음에서 할 수 없음으로
예수님은 경계를 움직이시며 점점 더 이 세상에서 공감하는 이성과 상식에서 멀어지신다. 아무도 자신의 알고 행하는 의로는 천국이라는 곳은 꿈도 꿀 수 없음을 더욱 더 확실히 하시면서...
생활공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며 자아를 구축하고 이런 작업의 반복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합리화 정당화한다. 이런 작업들을 통해서 권력체가 형성되고 법을 동원애서 체제를 더욱 확고히 한다. 혼돈을 질서로 바꾸어 그 안에서 보호와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안정감이 거짓환상이고 지옥임을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는 그 체제를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고 싶지도 않다.
낯선 분이 등장해서 그 체제에 구멍을 내신다. 참 잘하고 있음을 자부하며 구원받기에 손색이 없음을 확인 받기위해 예수님께 나온 부자청년에게 주님은 난데없는 말씀을 발사해 구멍을 내신다. 모든 사람에게 재물을 버리고 따르라 하지 않으신다. 각자에게 결코 버릴 수 없는 그 무언가를 건드시고 그것을 버리고 따르라 하신다. 구멍이 나는 순간은 언제나 불쾌하고 두려운 마음이 먼저 마중 나온다. 계속해서 기존의 견고한 인식에 태클을 거시며, 그 잘못된 인식이 진리가 아님을 들춰주신다. 그리고 스스로는 그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 드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실상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깨닫는 곳으로 내 몰아가신다. 결국 자신의 인식을 믿을 수 없는 순간, 모든 행동이 스톱된다. 알 수 없으니, 믿을 수 없고, 그리고 행할 수도 없다. 내가 내가 아닌,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혼란과 공포에 휩싸인 껍데기 속에서, 원래부터 혼자서 모든 일을 해 오신 분의 교체 작업이 시작된다. 사람이 될 수 없는 분이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이라 착각하고 살았던 살처분 당해 마땅한 좀비를 살아있는 그분의 이름으로 바꾸어 주신다. 살아있으나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가진 주체, 결코 나라고 주장할 수 없는 주체가 생긴다.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온전한 의를 생산해 내신다. 법의 주인이시고 법을 이루시는 유일한 분이시기에 주님이 생산하시는 모든 것은 ‘의’가 된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시어, 이 세상에서 스스로 의롭다 자칭하는 의인들에게 침노를 당하신다. 천국이신 예수님이 이렇게 무참히 공격당하시고, 모든 것을 빼앗기시고, 죽으심으로 이 땅에 천국은 없다. 천국이 잠복되어 들어간다. 눈에 띄지 않고 잠잠한 있는 물속에 다슬기처럼...
모든 것은 이미 주 안에서 종결이다. 종결된 미래가 계속 현재가 되어 작동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의 개념이 무너지고,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의 활동이 매일 매일을 장악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없다.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고 나서 주님 앞에서 능청스레 겸손 떨며 ‘제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말 할 수 없다. 하지만 정말 아무 한것이 없는 자는 그렇게 고백 할 수밖에 없다. 홀로 일하시는 주님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알 수도 없고, 다만 껍데기 안에서 전해지는 세미한 파장을 감지하는 지극히 작은 권력은 항상 이미 벌어진 사건을 소급하면서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일 참 잘~ 하셨습니다.’
수련회 기간 동안, 보이지 않는 손길을 받으며 이 더운 여름에 뜨거운 커피도 즐기면서, 시원하고 즐거운 수련회를 받아 누리고만 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