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에 몇 번 참석해 본 가락으로,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강의실에 먼저 가서 접수하고 자리를 잡았다. 늦으면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까닭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여유를 누리다가, 첫 강의를 듣기 위해 맡아 놓은 자리로 향했다. ‘내 자리가 없다.’...나의 물건들과 성경책이 옆으로 치워져 있고, 다른 분이 앉아 계셨다. 이미 꽉 차버린 강의실...빈자리를 찾느라 눈이 바빠진다. 그리고 없어진 자리에 가담(?)하신 분에 대한 원망이 밀려온다. 앞에 빈자리 하나가 발견되고, 속히 그 자리에 앉는다. 바로 강의가 시작되고 첫 강의의 제목을 듣게 된다.
‘장소 없는 장소’
좀 전의 원망의 화살이 방향을 돌려 내 쪽을 겨냥한다. 왜 당연히 나의 자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복음이 꽂히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무엇을 했다, 깨달았다,... 라는 것이 부정되고 ‘뭔가 일어났다’가 살아나게 하신다. 우리가 원인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감사만 나오는 기쁨의 사건들 속에서 빙글빙글 돌게 하신다. 우리가 원인이 아니기에, 우리를 휘감고 분노하게하고 원망하게 했던 ‘왜’ 라는 질문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하시니, 그 순간만은 가벼움과 기쁨으로 절로 감사할 수 있게 해주신다. 그리고 동시에 감사를 느끼는 그 장소가 바로 소돔, 갈보리였음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고 우리가 고통스럽다고 착각할 때, 예수님께서 친히 사건을 덮쳐 복음을 생산시키고 결과물을 수거해 가시며, 주체가 우리가 아님을 우리가 배제되었음을 똑똑히 보게 하신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눈 있는 소경의 삶이 반복된다. 어떤 일들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원인을 찾아 그 결과를 우리 것으로 당긴다. 그 모든 일들에 보이지 않는 매개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다. 예전에 본 영화에서 투명인간이 사람들 틈에 들어와 한 사람의 뒤통수를 치고, 맞은 사람은 자기 주변의 다른 사람을 의심하며 싸움이 일어나고, 분란이 일어나던 장면이 떠오른다. 정작 일을 버린 마귀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가시적인 것에만 의지하는 사람들이 한 쪽에서는 치고 박고, 다른 쪽에서는 우쭐대고, 흐뭇하고... 그 난리 부르스 속에서 복음의 출현이 우리를 얼마나 당황하게 하는지 모른다. 다 같이 한 통속이 되어 똑 같이 행동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향을 돌려놓으시니 같은 것이 다르게 보이고, 그 순간만큼은 우리 자신이 망각된다. 우리가 뭘 했고, 뭘 알았고, 그래서 성도고 하는 이런 잡스러움이 사라진다. 방향만 바뀌었을 뿐, 저들과 하나 다를 게 없다. 다만,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대적하는 행동만 하는지를 철저하게 보게 하심으로 입을 다물게 하신다.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하시기 전에는, 입으로 그리고 온 몸과 마음으로 죄 밖에 지을 수 없는 자들임을 결코 알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보이지 않는 권력에 눌려, 눈치 것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선과 악이 무엇인가... A라는 자의 선악, B라는 자의 선악,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일치하지 않는 수많은 선악의 기준이 이미 가득한 세상. 이 세상의 진정한 선악은 그들 개개인의 선악 기준을 하나하나 파악해서 그들이 만족할 만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이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악이다. 혼자 있을 때조차 우리 속에 자리 잡은 선악의 기준들이 살뜰하게 우리를 고통 속에 붙잡아 둔다. 철저하게 세상 신의 지배를 받는 이곳에서 단단한 입자가 되어가는 우리를 매일매일 깨부수고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시켜 주심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길로 신실하게 인도하신다. 죽음 안에 담긴 생명이 벌이시는 사건을 보게 하시고, 그 사건들 속에서 홀로 별처럼 빛나시고 영광 받으시는 예수님을 바라고 또 바라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