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하라 2013년 3월 17일 본문 말씀: 하박국 2:18-20
(합 2:18, 개역)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합 2:19, 개역) 『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합 2:20, 개역)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사람들이 일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중의 하나가 바로 ‘잔소리’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집에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이유는,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이 많은 사람과 산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기에 이들은 말이 없는 쪽을 선택합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좋이하는 이유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쪽에서 말을 하게 하는 그런 관계로서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우상=말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이 말없는 신을 선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사기 17:1-6에 보면,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또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제사장을 삼았더라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상은 말이 없습니다. 그저 인간들에게 의해서 조종받을 뿐입니다. 바로 이런 신을 사람들은 선호합니다. 자식이 어미의 돈을 가져가자, 어미는 자식이 가져간 줄도 모르고 마구 저주해버립니다. 그런데, 사태의 결말을 알고 보니 자신이 자식을 저주한 셈이 되기에 이 저주가 무서워서 저주를 제거할 방책을 취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상을 만들고 그 신상을 잘 관리하고 섬겨서 저주를 떨쳐내는 전문가인 레위인을 급료를 주고 고용하게 됩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신상 쪽에서 잔소리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인간들이 제풀에 고민해서 신을 섬깁니다. 이 섬김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이겠습니까
출애굽기 3:10-12에 보면,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나옵니다. 그것은 친히 자신이 만드신 그 백성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섬김을 받고 싶어 ‘나의 백성 만들기’에 나서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하는 자들이 알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섬길 자 만들기’ 작업에 있어 인간들이 어떤 생각으로 우상을 섬기려했던가도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세상이 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온갖 고상하고 경건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로 가득 차 보이는 모양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모든 인간들이 자기만 섬기겠다는 정신으로 가득합니다. 예를 들면, 인류 종말을 경고하는 영화에서, 슈퍼 박테리아 때문에 모든 인류가 거의 다 죽고 소수만 남아서 휑하게 비워있는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구하는 장면 같은 것은 평소에 인간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대형 마트의 많은 물건을 원없이 마음 놓고 자신이 갖고 싶은 충동을 반영하는 겁니다. 자동차에 블랙박스를 다는 것은 그 어떤 명분에도 불구하고, 저 넓은 도로를 통째로 자기 혼자 원없이 드라이빙 하고 싶은 평소의 충동을 보여주는 겁니다. 어떤 물건을 구입하든지 아니면 어떤 일에 종사하더라도 인간의 평소의 충동을 감출 길이 없는데 그것은 오로지 이 세상이 ‘자신만을 위한 세상이어야 한다’는 정신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벌써 섬김의 상대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런 인간을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방식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훈련이나 연습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저 매일같이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신봉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으로 만들어낼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 끝에 나오는 ‘잠잠하라’입니다. 즉 인간들이 말 못하는 우상으로 신을 대신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예 인간의 말문을 막는 식으로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게 하십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그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과거사가 들통나고 맙니다. 다급해지고 당황스러운 여인은 자신의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사를 품은 채 해결책에 나서겠다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제시합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고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된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은 답변하십니다. “이곳도 아니요 저곳도 아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하면 그것이 섬김이다. 그 날이 올 것이다”고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있어 잠잠함을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난 뒤, 그야말로 공포의 산물이었습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로 외침으로 표현합니다.
욥도 막상 하나님을 만나니 유구무언,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잠잠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 만나니 잠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한 행위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는 방식을 끄집어내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좌를 통해서 조치를 취하십니다.
먼저는 율법을 보내오셨습니다. 일종의 메시아께서 타고 오시는 미끄럼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율법을 타시고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대로 “다 이루셨다”고 외치시고 그 분의 영을 보내주시면 우리는 잠잠한 가운데 모든 공로와 은혜를 하나님의 몫으로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보좌하는 천사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잠잠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