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강-창 22장 3-7절(이삭과의 동행)1706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3-7절입니다. 구약성경 27페이지입니다.
창 22:3-7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처음에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사환 둘, 이렇게 총 네 명이 길을 떠났는데 어느 지점에 가서 사환 둘은 보내고 달랑 아버지와 아들만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산까지 올라갑니다. 올라가면서 그냥 곱게 가면 되는데 곱게 가지 않고 이삭이 참다못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여, 제사하러 가는 것은 내가 아는데 불과 나무는 있지만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했어요. 이런 이삭의 이야기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지금 이삭이 생각한 그 번제는 평소에 이미 인간들 수준에서 알고 있는 번제입니다.
인간들은 제일 중요한 양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양을 잡으려면, 불과 나무가 있어야 된다, 이 삼종세트가 될 때 하나님 앞에 드리는 번제, 제사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보기에는 거기서 어떤 요소가 빠졌느냐 하면, 번제할 어린양이 빠져 있어요.
번제할 어린양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느냐,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삭으로 하여금 그러한 궁금증이 나오게 했다는 말은 이삭 네가 생각하는 그 번제는 지금 하나님이 받고자 하는 번제가 아닌 거예요. 이삭은 하나님 앞에 제사하면서 그 제사개념이, 내가 드리고자 하는 제사개념과 하나님이 아버지에게 지시한 제사개념이 단절되어 있고 끊어져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양 있고, 나무 있고, 불 있으면 기계적으로 갖다 바치고 볼일 보고 산에서 내려와서, 제사 한 번 잘 드렸다, 이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인양 그렇게 생각을 한 거예요. 사환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런 제사 같으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런 제사를 의도적으로 시키지를 않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한 그 제사를 지시한 이유는 이삭의 입에서 당황스러운 고백이 나오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제사는 이미 하나님이 안 받는다. 너희들이 이미 알고 있는 그 번제와 제사는 내가 안 받는다는 그 말입니다. 병원에 환자가 오게 되면 보통 의사들이 진찰을 하고 병명을 이야기하지요. “당신은 독감에 걸렸습니다.” 혹은 “당신은 결핵입니다.” 혹은 “암에 걸렸습니다.” 보통 의사가 이렇게 하잖아요.
“당신은 죽음에 걸렸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의사는 없어요. 왜냐하면 의사가 암에 걸렸다, 결핵에 걸렸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기술적 문제입니다. 기술적 문제는 기술적해법이 있기 마련이에요. 항생제 쓰시고, 이런 약물 쓰시고, 이렇게 기술적 문제는 이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의사도 “죽음에 걸렸습니다. 그냥 죽으세요. 죽음에 걸린 사람을 부활시킬 그런 재주는 나에게는 없습니다.” 이런 의사는 없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고 제사를 드릴 때는 기술적 문제로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지시했을 것이고 그 지시를 기술적으로 제대로 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에 대한 정답이고 해법이라고 지레짐작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보면서 우리가 아셔야 될 것은 창세기 22장에 기도제목이 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제사 어떻게 드립니까, 양이 없는데 양을 어디서 구합니까, 이런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일체 여기에 없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일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시한 번제의 완성자는 아브라함도 아니고 이삭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시한 번제를 완료, 완성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 빨려 들어가고 말려들어가는 거예요. 구원이라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구원작업을 설정해놓고 거기에 자기의 구원받는 사람을 집어넣어서 그들로 하여금 일을 시키면서 그들로 뭘 느끼게 하느냐?
내가 생각했던 그 구원, 내가 생각했던 그 제사, 그걸 하나님이 안 받는다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믿음, 이것을 일체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시한 것에 따라가면서 뭔가 이 일을 시작하시고, 꾸미시고, 진행시키는 그 주도자, 일의 주체자, 우리가 일을 하면서도 우리가 일의 주체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그 일에 말려든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누굴 구원합니까? 주님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은 다른 분을 구원하는데 그 다른 분 구원에 우리가 말려들어간 겁니다. 우리는 그분의 구원에 말려든 시다바리에요. 하나의 일꾼.
5절에 보면 상당히 수상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나님의 지시는 자기 아들 이삭을 바쳐서 죽이라고 했어요. 두 사람이 갔다면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만 돌아와야 되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둘 다 돌아온다고 이야기했어요. 말해봤자 못 알아듣는 사환들에게, ‘너는 몰라도 돼’ 하는 식으로 장난삼아 이야기했는지, 아니면 ‘설마 하나님이 내 아들을 죽일까? 살게 하시겠지.’라는 생각으로 했는지 그것은 모르지만 어쨌든 간에 아브라함은 뭘 알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한 그 지시에 대해서 그 모든 완료는 자기소관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압니다.
‘어떻게 하시겠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제사, 이 번제 드리는 작업이 어떤 절차와 시나리오로 되는지 자기는 전혀 몰라요. 자기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티내는 계기가 뭐냐? 아들이 자신에게 제일 뜨끔한 이야기를 질문했습니다.
“아버지, 번제를 드리는데 요건이 안 되네요. 제사드릴 어린양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고 했는데 사실은 “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 거예요.
나도 모르겠다는 이것이 정답이에요. 왜 이것이 정답이냐? 지금 아브라함이 뭘 모르느냐? 번제에는 양이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양이 들어갈 자리에 왜 사람이 들어가느냐, 그 내력을 모르겠는 거예요. 하나님이 번제에 양을 바치라고 하면 그 양을 바치면 되고 평소에 늘 번제할 때 양을 바쳤어요.
양을 늘 바쳤다면 인간 생각에서 양을 바치는 번제를 받으시는 그런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딱 공식이 정립이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안한다는 말이지요. 양을 바치는데 양 바치는 것보다 아들 바칠까, 라는 아이디어를 인간 쪽에서 먼저 구상해 내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양 바치는 것을 요구했다면 하나님은 일관된 하나님이니까 양 바쳐라, 양 바쳐라, 그리고 양 바쳤지요, 양 바쳤지요, 이렇게 되겠지요. 가끔 소도 바치지만 어쨌든 짐승제물을 바치는데 갑자기 사람 바치라고 하니까 왜 갑자기 비약이 되는지, 비약하는데 있어서 어떤 과정이 생략되었는지, 무슨 취지가 있을 것인데 그게 뭐길래 양 바쳐서는 안 되고 사람 바쳐야 되는 그 내력을 아브라함은 모르는 거예요.
이거 모르면 아브라함은 번제를 자기 번제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내막도 모르면서 번제 드려놓고 하나님의 지시한 번제의 진정한 취지는 주께서 어떤 조치를 할 것을 그저 기다려 보는 거지요. 번제는 아브라함보고 바치라고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자기에게 번제를 바치는 행위에 이 두 사람을 초청한 겁니다.
여기서 오늘 설교에서 풀어야 될 문제가 있습니다. 양을 바쳐야 될 자리에 사람이 왜 굳이 들어가야 되는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1장에 세례요한이 예수님 보고 하는 말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그 대목을 보면서 누구나 생각해야 돼요.
그 양과 예수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아야 돼요. 믿씁니다, 쌍시옷 들어가게 해서 외친다고 믿음을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양 바치라고 했으면 양 바치고 그 양 받아 챙기시면 되었지 왜 거기에 사람이 들어가야 되느냐는 그 말이지요. 그거 모르면 성경전체를 백독한 들 핵심부분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이것이 솔직한 이야기지요.
양 자리에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러한 절차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자기를 정착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자기표현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땅에 나타날 때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 하면, 양 자리에 사람 모습으로 오셔서 양 자리를 자기가 접수하고 점령해버려요.
그냥 사람으로 나타나서 “나 하나님이다.” 이러면 천사밖에 안돼요. 천사가 못한 일을 해야 돼요. 그것은 분명히 양을 드릴 자리에 사람이 끼어드는 겁니다. 사람으로서 끼어들 때 그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 올 때의 자기표현방식이에요. 그런다고 문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그래야 됩니까? 자 문제가 뭐냐?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짠, 나 사람으로 왔지.” 그냥 오시면 되잖아요. 왜 그 전에 양 잡으라고 해놓고, 양 자리를 이 땅에 잡아놓고 그 터에 양이 아닌 사람이라고 뒤늦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그 자리에 들어오는, 절차를 그렇게 가져가시는 그 이유가 뭐냐는 말이지요.
앞엣것 생략하고 어차피 오실 것 짠, 하고 오시면 되잖아요. 그런 것 까지 십자가 안에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것을 설명할 때 이삭이 아버지에게 한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질문을 다시 보겠습니다. 7절에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삭은 뭐는 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번제는 어떻게 드려야 되는가의 조건은 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이삭이. 누가? 아버지가 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무와 불 이런 것은 문제가 없고, 번제 드리겠다는 자신들의 마음에도 문제가 없는데 단지 빠진 것이 뭐냐 하면, 어린양이 빠졌다는 거지요.
어린양만 집어넣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번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누가 하느냐 하면,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이기에 모든 인간은 이런 생각을 갖게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번제로 어린양을 준비를 안 하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준비할 어린양이 없잖아요. 어디서? 인간 쪽에서. 인간 쪽에서 준비할 어린양이 없기 때문에, “나는 어린양만 있으면 온전히 번제를 드리겠습니다.” 하는 그 마음가짐 자체도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는 거예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제사에 대해서 일체 안 받아 준다는 것은 지금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게 첫째 발걸음을 떼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표현의 첫걸음을 떼는 방식이 그겁니다.
이 땅에 인간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뭐냐? 인간이 아니고 인자를 원해요. 중요한 대목인데 시편 8편 4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여기 인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하고 인자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범죄한 상태에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들끼리 서로 통하기 위해서 불러주는 그 인간, 죄인들끼리 서로서로 긍정하고 서로서로 자기존재가치를 챙겨주기 위해서 인간이다, 사람이다, 라고 불러줄 때의 그 인간이에요.
거기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이야기하니까 인간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인간으로 인정해줬기 때문에 제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으니까 우리가 제사 드리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라고 인간 쪽에서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자기 쪽에서,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그 인간의 규정, 개념에 대해서 아무런 하자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생각을 감히 못한 겁니다. 그 관계가 끊어져 있는 관계라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인간과 인자의 차이점은, 인자 속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거기에 들어가 있으면 그 인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진척과정에 따라서 인자가 점점 더 구체화돼요. 시편 8편에 보면 나중에 인자는 어떤 위치에 올라가느냐 하면, 잠시 천사보다 못하고 잠시는 고난 받지만 만물을 그 아래에 복종하게 하는 위상이 인자의 위상입니다.
인간의 위상이 아니고 인자의 위상이에요. 하나님이 만드신 달과 별 모든 것이 인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인자 안에 뭐가 있는가?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어서 인자가 인자답게 등장하는 그 순간 세상 모든 만물은 그 인자 밑에 복종하고 인자중심의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계가 건설되는 겁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찾아오심이고 하나님의 자기표현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작업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 자진해서 돕겠다고 뛰어들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구원받기 때문에 인자되는 작업에, 언약사람 되는 작업에 강제로 끌려들어간 거예요.
끌려들어가면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겪는 그 경험자체가 인간이 인자가 되는 그 절차를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델로, 시범조교로 미리 다 보여주는 거예요. 인간에서 구원받은 인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 절차를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진짜 찾아오셔서 구원해주는 사람 같으면 아브라함에게 일어나는 그 변화가 동일하게 일어나야 그 사람이 정말 구원받은 사람, 또는 구원에 이끌려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절차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경험해야 되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 자신들이 미리 생각했던 그 제사, 번제의 개념은 하나님께서는 일체 거짓된 것이라고 받지 않는다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은 아니야, 라고 한다면 그 전에 뭘 해야 되는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겠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나무 준비하고 불 준비하고 양 준비하는 거예요. 평소에 해 왔던 겁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빠, 뭐가 빠졌네?” “뭐가 빠졌는데?” “양을 안 가져왔네. 양을 왜 준비 안했어요, 아버지?”라고 한 세트로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인간이 할 수 있는 외부에서 인간의 내부로 들어가요. 하나님의 일이.
인간이 준비할 수 있는 것, 양 준비하고 나무준비하고 불 준비하는, 그냥 아무 평범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준비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부정해가면서 인간의 내부로 가져갑니다. 인간의 내부로 가져가면서 양을 준비한다는 이 사고방식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제사와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주지요.
양 준비한 이 제사는 헛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이 해야될 그 배역은 뭐냐? 양 준비해서 양 잡아들이자, 그 내부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그것이 다 헛것이고 헛방이지요. 헛것, 헛방, 허구적인 제사밖에 하지 못하는 그 아브라함과 이삭을 주께서는 유도해서 하나님이 완성하는 그 지점까지 데리고 갑니다.
그러면 그들이 외부적으로 양을 준비해야 된다는 그 사고방식이 주님한테 끌려가면서 나중에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게 하고 죽이게 하고 나중에 수풀에서 준비된 양을 바치는 그 절차를 통해서 뭘 아느냐? 아브라함과 이삭의 내부자체가 양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정립이 되는 사람으로 설정을 하게 되어 있어요.
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진즉부터 사람을 원했는데, 제사를 드리는 자가 제사 드리는 제물로 바쳐져서 그것이 왜 사라져야 되는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자체인 내가 왜 하나님의 일에 없어져야 되는지, 이걸 수긍하고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오늘 포인트에요. 제사 드린다는 말은 내가 살아 있어서 제사를 드리고 주께서는 내가 드린 제사를 받으시고 “제사 했구나. 복 줄게.” 이럴 경우에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이고, 살아 있는 내가 제사 드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내가 앞으로 더욱더 복을 많이 받는, 그래서 더 나아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사람으로 달라지는 것, 이것이 인간들이 외향적으로 평소에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만약에 내가 사라진다면 내가 더 나아질 리도 없고, 내게 더 이익 될 리도 없고, 내가 더 미래에 아름다운 꿈을 꿀 어떤 것도 동시에 다 같이 사라져버려요. 내가 죽는 마당에 훈장 준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인간의 생각에서 가장 기본은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내가 계속해서 연속으로 유지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자기가 살다가 완전히 단절되어야 된다, 절단되어야 된다, 절멸되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어요. 내 자신이 끊어지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 라는 것을 미리 챙길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끊어지고 나면 거기 뭐가 있겠지, 꼭 이렇게 생각해요.
없어요. 왜? 인간은 인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으로 생각하는 한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죽이고 인자로 태어나는 거예요. 인자의 몸의 지체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래야 모든 만물은 인자 아래 복종하게 되고 그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에요. 그런데 인자라 하는 것은 언약이 주어질 때만 거기서 새롭게 생산되는 것이지 이 땅에는 인자는 없어요. 인간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과 더불어서 발생되는 것이 인자거든요. 이 세상은 인간이라고 우기는 인간들밖에 없어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받는다고요? 아니에요. 주님이 하시는 구원 작업에 우리가 말려들어가 있지요. 쓸려 들어가고 끌려들어가잖아요.
끌려들어가면서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내가 사라져요. 나 구원받아야지, 구원 챙겨야지, 이게 사라져버려야 됩니다. 이게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주고받는 대화가운데서, 구원은 이렇게 절차가 진행되는 거야, 라는 것을 앞서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챙기는 구원을 주께서 생각하신 적이 없어요. 인자의 구원에 딸려서 받는 것이 구원이 돼요. 예수님의 구원에 딸려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구원절차에서 모든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거예요.
어제 가락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군에 갔던 이야기를 했거든요. 군대생활은 괴롭다고 안하고 고롭다고 해요. 군 생활이 괴로우니까, 고로우니까, 자기가 제대할 때 쯤 되면 곧 제대한다고, 나 건드리지 마라, 늦잠자도 깨우지 마라, 고참들이 실제로 그래요.
군복 매무새도 제대로 안하고 이번 토요일에 제대한다고 고함치고 그런다는 말이지요. 그저 제대 날, 구원의 날을 기다리지요. 하지만 정작 구원된다고 확정되는 것은 본인이 제대하고 싶어서 제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국방부에서 명령이 내려와야 돼요.
따라서 변화산의 모세나 엘리야나 모든 구원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 십자가 지기까지는 구원되지 않았어요. 십자가 지기까지. 다시 말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소멸될 때까지. 인간이기에 더 살고 싶다는 내 꿈이 완전히 작살날 때까지. 일체 나는 구원될 수 없는 존재, 그걸 인정하고 기다려야지요.
구원될 수 없다, 라는 자체를 놓고 기다려야지요. 그리고 구원될 수 없다, 라고 지시를 내린 하나님의 그 자기표현방식이 뭐냐? 양 드리면 제사인줄 아는 우리를 양 자리에 하나님이 직접 사람이 되어서 오는 자리로 교체되는 그 순간이 우리가 구원에 말려든, 구원되는 사람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미리 구원되어야 돼요. 그것 때문에 미리 십자가지신 거예요. 구약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처럼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예수님 보고 기뻐했듯이 나중에 십자가를 졌지만 우리 입장에서 이미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제대통지 받고 제대통지에 담긴 의미가 뭐냐를……, 인간에서 인자로 바뀌는 그 작업에, 하나님의 자기 표현방식, 이 세상에 정착하는 방식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 안에 들어 있으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변화가 바깥으로 다시 외부로 나와요. 양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라는 너무나 극히 인간적인 것, 이렇게 드리면 하나님이 구원하고 복 주겠지, 하는 그 인간을 하나님은 언약의 자기완성의 절차 속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집어넣어 버리면, 야, 내가 알던 구원의 조건 같은 것이 다 완전히 깨져버려요. 내가 알던 구원의 조건은 결국은, 나 한 번 살아볼까, 죽어서 좋은데 가 볼까, 라는 악마적인, 악마가 심어놓은 죄악적인 가짜 구원의 조건들이었고 요건들이었습니다. 이것 가지고 예수 십자가에 집어넣어서 구원받으려고 더러운 심보로 한 거예요.
주님 이용해서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이 악마적인 구원을 그동안 구원인줄 알았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여,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양 잡으라면 양 잡아 드리겠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이끄시니까 “이상하다. 아버지!” “왜?” “양이 없네요.” “양만 없냐? 제사가 뭔지를 나도 모르고 너도 몰라.” “왜요?” “이 제사는 주님 본인이 완성할 제사기에 우리는 그냥 기다릴 뿐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겠지.” 나중에 보면 십자가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준비했거든요. 무엇을 준비했는지 우리는 이제는 그 순간을 만나면 되지요.
만나는 순간, ‘아, 내가 엉터리구원을 기대하면서 살았구나.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나를 더 사랑했구나. 내 구원을 사랑하고 내가 천국 가는 것을 사랑했구나.’ 바로 이것이 악마의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드린 제사, 예배, 기도, 모든 것을 일체 받지 않습니다.
오늘 창세기 22장에 기도가 없어요. 어떤 기도도 없습니다. 원래 기도란 부르짖는 거거든요. 부르짖을 자격도 안줬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미끄러져 가는 거예요. 끝장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가는 거예요. 끝장 볼 때까지 가는 거예요. 가면서, 주께서 하시겠지. 주께서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을 언급했다는 것은 주께서 뭔가 다 준비하셨겠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 우리의 헌금과 기도와 정성과 착함을 안 받습니까? 십자가 피로만 한다는 이 터무니없는, 누가 봐도 이 어리석고 미련한 짓, 사람의 행함을 일체 다 거부하시고 오직 주님이 “하지 마, 하지 마! 내가 할게.” 오직 주님이 스스로 자기 피를 흘려서 그 피로 새언약을 세우는 이 터무니없는 일을 하시는 이유는, 너 자체가 원래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구원대상도 아닌데 자꾸 구원대상이라고 우기고 있어요. 우리는 이 땅에서 제대할 자격도 안돼요. 그런데 주께서 내가 스스로 구원한다는 이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십자가 능력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거기에 참여시킨 겁니다.
이미 구원시켜놓고, 전역증서에 피가 묻었어요. 내가 열심히 공들여서 3년 동안 군 생활 했는데 왜 피가 묻었지? 이 피가 없으면 제대라는 것도 없다는 거지요. 정리해 드릴게요. 오늘 본문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일단 자기가 아는 수준 껏 소위 신앙생활 한다는 것. 그러니 죄를 지어야 돼요.
신나게 지어야 돼요. 어차피 지으나 안 지으나 죄인인데 죄를 지으면서 자꾸 고개를 갸우뚱 하는 거예요. 성경 하루에 열장 읽는데 마귀가 와서 “그걸로 모자라니 20장 읽어야 앞으로 하는 일이 잘 된다.” 하는데 이상하게 그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1년에 전도 한 세 명 씩 해야 되는데, 헌금은 십일조는 기본이고 십의 2조, 3조는 해야 되는데 이상하게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목사 섬겨야 되고, 교회 봉사를 해야 되고, 이상하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선교헌금 내야 되고 하늘나라 확장해야 되고, 아닌 것 같은데…….
하늘나라는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내가 하는 것은 기껏 이것밖에 안되는데, 뭘 해서, 말씀 순종해서 복 받는다는 이것이 기껏 내가 아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말살되어야 되고, 이것 때문에 주께서 피 흘렸다는 것을 대비해서, 연결시켜서 보는 사람, 그것이 하나님의 준비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체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이것저것 머리 굴리면서, 하나님 이용해서 천국 가서 행복해지려는 수작을 부렸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음을 주께서 일깨워주시고 그런 죄 속에서 주님의 의의 자리가 만들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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