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없는 제물(창22;7-10) 1706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6. 17. 07:22
2017-06-14 20:37:51조회 : 69         
   없는 제물 17061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없는 제물(창세기 22:7-1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fzUCSk2V-Q0, Hit:3
 이근호17-06-14 21:26 
없는 제물 

2017년 6월 11일                         본문 말씀: 창세기 22:7-10 

(22: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22: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22: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22: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영생이라는 것은 오래 길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체적으로 어떤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등장하는 인물인 이삭과 아브라함은 바로 이 영생의 체계에 초청받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이들의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 숨겨진 천국의 구조가 펼쳐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시험이 주어진 것은 아브라함이지 이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진정한 모습을 직접 아브라함에게 찾을 것이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다가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하나님의 시험의 직접적인 상대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시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해되지 않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과 나무는 있는데 제물이 될 ‘어린 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겁니다. 이것이 이삭은 하나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고 싶어하지만 거기에 비해 아브라함의 시험은, 아브라함 자체가 하나님께서 스스로 구성하려는 시험의 일부가 되는 개입되는 겁니다. 

이삭은 본인이 시험 치는 자로 나섭니다. 이는 자신이 시험을 통과할 주인공으로서, 시험 뒤에도 그대로 성공자로서 살아남기를 원했던 겁니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해내는 자로 계속 남고 싶은 겁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이삭은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나와” 

즉 불도 있음입니다. 나무도 있음입니다. 그런데 ‘어린 양’은 ‘없음’입니다. 이삭이 기대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불과 나무도 어린 양 까지 모두 ‘있음’으로서 갖추어져서 그 ‘있음’을 가지고 치르는 제사를 통과해서 이 시험 이후에도 본인들이 계속해서 ‘있음’으로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어린양이 결핍되어 있으니 이삭은 아버지에게 질문을 하는 겁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의심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그 자체가 이미 시험에 걸려든 꼴이 되어버린 겁니다. 즉 왜 내가 기대한 시험문제가 아니냐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왜 아브라함은 사전에 “사실은, 내 아들아. 네가 제물이란다”라는 말을 아들에게 하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이번 시험이 ‘있음’이 주도권을 쥐는 시험이 아니라 ‘없음’이 주도권을 갖고 움직이는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이 ‘없음’이 블랙홀과 같은 작용을 하면서 모든 ‘있음’을 끌어당기는 구조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이 알지 못하고있는 그 ‘없음’이 중심되는 세상에서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 두 부자(父子)는 ‘없음’이 부르는 곳으로 찾아가야 하는 겁니다. 이삭같은 사고방식에서 아브라함 같은 사고방식으로 전환되지 아니하면 ‘없음’ 중심으로 구성되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삭’의 의심부터 논리를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사람에게 이해되는 시험이란, 본인의 있음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즉 “주님이여. 제가 이 정도로 하나님의 시험과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순종하는 나의 존재를 죽어서라도 저 천국까지 이어지게 하옵소서”라는 식입니다. 인간의 의미란 자신이 질문을 던질만한 분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수립되는 겁니다. 질문하는 자로서 해답을 획득하게 되면 그것으로서 그분으로부터 의미있는 존재로 낙인찍히는 것으로 스스로 자부합니다. 

이것은 곧 ‘법 준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이러이러한 법을 준수하게 되면 나는 법 준수자로 인정받겠지”라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 법 앞에서는 모두 헛사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은 이미 인간을 가두어놓고 그 어떤 의미도 저주로 바꾸어버립니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법 안에서 모든 인간들은 법을 아무리 준수하고자 하여도 자신들이 저주받는 자로 확인될 뿐입니다. 

‘나의 있음’은 그냥 있음이 아니라 ‘저주받을 자’로 있음
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자체가 이미 시험에 빠진 상황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한 시험이란 보다 인간들의 근원적인 형편을 폭로케 합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시험에 참여하게 만든 것은 구원을 결정짓는 근원적인 시험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4:6-7에 보면,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악마가 그동안 인간들에게 부지런히 시도했던 그 ‘시험 통과하기’의 궁극적인 한계까지 담겨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오기가 있습니다. 이 오기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극한까지 끌어오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 목표 지점을 악마가 선점에서,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시험을 관장합니다. 

즉 “이러이러하게 말씀대로 살면 곧 시험 합격자”라는 그 잣대를 악마가 이미 제정해서 꾸준히 인간 세계를 관리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험을 악마는 광야에서 예수님 상대로 적용시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시험’에 대해서 악마가 제시하는 바로 그 시험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통과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시험이라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마태복음 27:46에 나옵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곧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만이 유일하게 시험에 통과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 빼놓고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이미 통과된 시험의 성격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더 이상 자신의 ‘있음’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의미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7-06-15 15:41 
92강-창 22장 7—10절(없는 제물)1706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 7-10절입니다. 구약성경 27페이지입니다. 

  

창 22:7-10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보통 신약에서 영생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저 오래 사는 것을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생 안에 구조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영생에 어떤 고유한 체계가 있어요. 그냥 오래 산다면 시간만 계속 이어지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천국인지 아니면 지옥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지옥도 마찬가지로 영원토록 이어지니까요. 

  

이 땅에 사는 사람이 천국 간다는 말은 그냥 시간만 계속 무한대로 흘러가는 대로 자기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살면서 그냥 무한정 살아가게 할 수도 있거든요. 아브라함이 930세까지 살았고 그 후 므두셀라같은 경우는 969세, 천살 가까이까지 살았는데 그 많은 세월들이 다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산다는 것이 시간만 때우는 것이 아니고 어떤 구조가, 체계가 갖춰져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지옥이 뭐냐 하면, 고생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지옥이 뭐냐 할 때는 반드시 천국이 뭐냐, 와 대비가 되어야 합니다. 천국 아닌 곳이 지옥입니다. 중간나라는 없어요. 그래서 천국이 뭐냐 할 때 천국을 이루는 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이라 하는데 그 천국이나 영생은 같은 말입니다. 

  

천국이나 영생은 구조가 있어요. 그 구조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지상에서 어떤 체제로 움직이는가를 계속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시험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혼자서 모리아산에 가지 않아요. 

  

자기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의 오늘 본문에서의 차이점은 뭐냐? 이미 하나님의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줬습니다. 이삭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지금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를 시험하는 것을 전혀 몰라요. 모른다면 이것은 이삭과 아브라함의 차이, 하나님의 영생과 영생 아닌 것의 차이를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차이를 통해서 밝혀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삭은 질문을 해요. 아버지여, 이렇게 질문을 한다고요. 사람이 질문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하고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될 상황에 대해서. 질문이 나온다는 것은 과거의 내가 했던 것 그대로 연속해서 미래가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분위기를 가만 보니까 과거에 내가 미리 지레짐작했던 대로 안 되어갈 때 사람은 질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를 들게 되면, 가정이라는 것은 행복이다. 가정이 행복이라는 사실, 결혼한 사람뿐만 아니고 혼전의 총각처녀들도 가정이란 행복이라고 다들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처녀총각들, 결혼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가정이 행복할 것이다,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평소에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과거에 비춰볼 때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다, 라고 결혼 이후의 미래까지 과거의 원리에 그대로 갖다 붙이는 거예요. 

  

내가 생각한 결혼은 행복하기 때문에 앞으로 계속 행복하게 될 걸,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아가씨 쪽도 그렇지만 총각 쪽도 마찬가지에요.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 둘이 만났어요. 만났을 때 둘 다 나름대로 자기가 과거에 살았던 경험에 입각해서 이러한 결혼생활이기에 나는 행복할 것이라고 둘 다 일방적으로 딴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둘이 살다가 행복하지 않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이게 부부인가, 이게 내가 생각했던 가정이 아닌 것 같은데?”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이러려고 내가 결혼한 것 아니었어.” 둘이 서로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지금 자기과거에 생각했던 것에 의심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의심이 뭐냐? 시험이라는 겁니다.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 어렵기 때문에 결혼의 예를 들 수 밖에 없어요. 시험이라는 말 자체가 어렵기에. 내가 생각한 대로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질문을 던지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가운데 질문자가 누구냐 하면, 이삭이 질문을 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진짜 내 아들을 잡을 작정이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아요. 이삭이나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시험 친다는 것은 현재 내 상태가 그대로 있고 시험을 치게 되면 시험이 끝나고 난 뒤에 지금 내것은 더 크게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 내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시험에 합격했으니 보상이 당연히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시험을 생각하는 겁니다. 

  

과거에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아마 시험을 친다, 이번 시험에 백점 맞아야지, 백점을 맞으면 과거에 더하기, 내가 원하는 것을 추가해서 더 얻는 것, 이것을 사람들은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삭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중도에 ‘이것은 아닌데?’ 하면서 의심이 들면서, 벌써 시험에 빠진 거예요, 의심이 들면서 내가 생각하는 그 테스트가 아니네, 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수정을 하기 위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그 시험에 합격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아, 내가 정보가 모자랐구나. 그러면 아버지에게 질문을 해서 시험에 합격하는 나로 참여해야 되겠다.’고 질문을 하는 겁니다. 

  

아까 결혼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둘 다 과거의 경험이 달라요. 과거에 체험한 내용이 둘 다 서로 달라요. 둘이 생각하는 결혼관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아무리 서로에게 질문을 해봐야 둘 다 미래에 대해서 책임질 수 없는 사람이에요. 잘해줄게, 하는 그것은 헛소리고 소용없는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도 아니고 뭘 잘해줘요. 

  

책임질 수 없는 사람에게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겁니다. 책임질 수 없는 사람에게, 나는 너 때문에 망했다, 책임전가 하는 거예요. 그것을 일소하는 방법이 뭐냐? 제 3의 인물이 가정에 개입합니다. 자식입니다. 자식이 태어나는 거예요. 자식이 태어나면서 이제는 가정의 행복을 어느 관점에서 봐야 되는가? 

  

너 나, 부부의 관점이 아니라 이 가정에서 우리 때문에 새로 생긴 자식이 보기에 우리 가정이 어떤 가정이냐를 그 쪽 관점에서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식은 결혼이라는 테스트, 그 이후의 산물이기 때문에. 결혼한 남녀, 당사자는 ‘우리 결혼은 잘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자기가 만든 테스트에 스스로 참여했지만 그 결과로, 서로의 오해와 오산의 결과로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비자발적으로 그냥 등장한 것이 자식입니다. 

  

자식이 이야기합니다. “아빠 엄마는 왜 그렇게 싸웁니까?” 그럴 권리 있다는 말이지요. 이걸 오늘 본문으로 하게 되면, 이삭은 ‘테스트를 통과해야지. 어? 그런데 내가 잘 모르는 것이 있네. 질문해야지.’ 이렇게 되지만 아브라함은 본인이 잘 되기 위해서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그 테스트 자체를 위해서, 자신의 질문을 끊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 집어넣어버립니다. 

  

나를 위한 테스트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네가 시험에 통과하면 구원해줄게, 라고 할 때 사람들은 그 구원이라는 것을 과거에 자기가 체험한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천국은 좋은 곳이고, 영생은 좋은 곳이고, 하늘나라는 좋은 곳이다, 이렇게 해서 그 테스트에서 어떻게 하든 간에 이겨보려고 애를 씁니다. 

  

환란 전 3년 반도 통과해야 되고, 베리칩도 안 맞아야 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시해서 언제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인가, 마지막 아마겟돈전쟁은 언제쯤 일어날 것인가를 살펴서 늘 준비해야 되고……. 왜? 정보가 모자라니까 정보를 획득해서 통과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시험관계, 하나님의 영생구조에 참여하지도 않은 이삭의 입장입니다. 질문들을 매일같이 기도를 통해서 해댑니다. “주여, 언제오십니까? 주여, 언제오십니까?” 인간이 기다려서 오는 메시아는 없습니다. 인간이 졸 때, 기름을 준비했던 안했든 열 명의 처녀가 다 잘 때 와요. 

  

잘 때 오고 잘 때 신랑이 와서 친히 깨우잖아요. “나 왔어요.” “오셨네요.” 이렇게 되는 거지요. 눈에다 성냥개비 꽂아서 잠 오는데 눈이 벌겋게 되도록 버티면서 기다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푹 자라는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푹 자라는 거예요. 내가 깨워줄 테니까. 잠자는 자여, 깨어 일어나라고. 그래서 푹 자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테스트는 나로 하여금 테스트를 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생이라는 구조 안에서, 반드시 테스트해야 될 구조 안에 아브라함 본인을 이미 참여시킨 거예요.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테스트를 통과하는가, 혹은 이삭이 어떻게 통과하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그 안에서 누굴 찾아내야 하느냐?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어느 누구도 통과하지 못할 테스트를 어떻게 통과했느냐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찾아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야 돼요. 찾아내면서 두 종류의 인간을 여기서 밝혀주는 겁니다.

여전히 자기구원에 관심이 있어서 질문을 해대는 이삭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서
주님이 주님을 향하여 하시는 그 영생이라는 구조, 또는 천국이라는 구조,
다시 말해서 테스트를 이미 통과하고 나서의 완성된 구조에 참여된 아브라함
의 태도를 비교해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부터 들어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삭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그것 때문에 이삭을 옆에 붙여준 거예요. 사전에 아브라함이 나불나불 거리면서 “이삭아, 네가 제물이거든. 안됐다만 하나님 뜻이니 어쩌겠니?” “알았어요.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아브라함은 입을 다물어요. 왜? 하나님의 시험은 자기한테 한 것이지 자기 아들 이삭보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이삭과 본인의 차이점을 이 과정을 통해서 분명히 뚜렷하게 드러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삭은 아버지의 이런 기이함……, “불도 있고 나무도 있는데 양이 없네요.” 이삭은 철석같이 양을 잡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삭은 미지의 상황에 초청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삭에 우리 모습을 집어넣는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삭은 말합니다. 7절을 봅시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있다는 것은 존재, ‘있음’입니다. 불 있음, 나무 있음, 그리고 ‘어린양 없음’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천국이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구체화될 때는 없음이 부르는 곳으로 찾아가야 돼요.

세상의 중심이
있는 것들의 결합이 아니고
블랙홀처럼 없는 곳이 중앙지가 되고
있는 것들은 그 없음의 블랙홀에 다 빨려 들어가는 구조
가 되어 있어요. 

  

그런 구조가 영생의 구조요 천국의 구조입니다. 없음이 있음보다 더 우선하고 선행하고 그리고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없음이 불러내는, 없음이 부르는 곳으로 초청받아 가고 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사실은 없음이 아니고 있지요. 자기 아들을 잡아야 되니까. 

  

아브라함이 내 아들을 잡아야 된다는 이것은 이미 시험에 참여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없음 중심……,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는데 그 아들을 죽이잖아요. 있다가도 죽어버리면 없어진 거예요. 없기 위해서 주신 아들 중심으로 이미 마음가짐이 된 상태인데 이삭의 입장에서는 ‘나 있고, 아버지 있고, 불이 있고, 나무 있고, 그리고 빠진 것이 있네요. 어린양이 빠졌네요.’ 

  

있음과 있음의 구조에서 어린양이 빠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린양이 없으면 안 되고 있어야 있음의 체제가 다 갖춰진다는 거예요.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이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 이삭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이삭의 이 모습은 오늘날 모든 인간의 모습을 꼭 빼닮았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니까, 여기 있는 내가 찬송하고 헌금하고 순종하고 믿으면 영광되겠다는 식,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이것이 그대로 예수 믿으면 여기 이 땅에서의 있음이 천국에서도 그대로 통하는 있음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지옥 가는 거예요. 없음이 초청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꾸 없음은 결핍이니까 없으면 안 되고 계속 있음으로 내가 납득이 되도록 채워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람이 아까도 했지만, 있게 되면 무엇이 불안하냐 하면, 이 있는 것이 없어질까 봐 불안해요. 그걸 노리고 하나님께서는 테스트, 시험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벌벌 떠는 경우가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하나는 공포고 하나는 불안입니다. 공포라 하는 것은 대상이 있는 경우에 공포고요. 대상도 없는데 떠는 것은 불안입니다. 그 불안은, 내가 있다는 그것을 내가 통째로 다 알아야 되는데 뭔가 빠진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빠져 있는 그 부분 때문에 나머지 있음이 벌벌 떠는 거예요. 

  

돈이 한 십억이 있는데 주식을 투자해서 이걸 더 불려야 하지 않겠는가. 돈이 있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돈이 있음으로서 불안이 없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 있음, 그 이유 때문에 없던 불안도 계속 생기는 겁니다. 있음이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에요. 없음이 중심이에요. 

  

이삭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해 봅시다. 이삭이 번제할 어린양이 없다고 했을 때 이삭의 사고방식을 들여다봅시다. 불이 있고 나무가 있고 그리고 뭐가 하나 누락되었다는 겁니다. 없는 것은 있음이라는 것을 더욱 빛내기 위해서라도 마저 채워야 된다는 거지요. 불이 있고 나무가 있고, “걱정하지 마. 양은 있어.”라고 한다면 온전한 있음이 되어서 온전한 제사가 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법이라고 합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있는 내가 행동할 수 있는 지침서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아,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이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아, 내가 여기 있다고 주께서 알고 계시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있는 내가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지금 있는 나를 그대로 천국에서도 있는 나로 골인시키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아브라함과 이삭의 차이점은,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을 없애버려요. 아브라함보기에는 불이 있고, 나무가 있고, 아들이 있고. 그런데 그 아들은 제물로 없어질 애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살아 있는 내가 법을 지킬 문제가 아니고 이미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 율법아래 있는 거예요. 

  

율법아래서 하나님이 보여주는 것은 죄를 위해서 이삭처럼 죽어야 될 그 모습, 죽음을 짊어지고 가는 그 모습이 곧 하나님이 구원하기 이전의 자기모습입니다. 그 자기 모습을 죽어야 될 이삭을 통해서 보는 겁니다. 법 아래 있는 인간은 누구든지 저렇게 죽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삭은, 자기는 따로 챙기고 자기가 법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있는 내가 불과 나무와 양, 이런 몇 가지를 주면 그걸로 번제를 드려서 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안하니까 그 다음에 질문을 하는 거예요.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믿는다는 것은 없음이 부르는 쪽으로 찾아가는 것이 믿음의 생활이에요. 이 세상에 없으면서도 모든 있는 것들이 그 없는 것에 다 쏠리게 되어 있는 그 중심지점을 찾아가는 겁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저렇게 있음으로 예수님이 있다고 본 것은 본인들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있음인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나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없는 열두 제자가 되었어요. 예수님이 없는 열두 제자라면 예수님처럼 자기도 없어져야 되는데 발목을 잡네요. 

  

베드로 같은 경우에 뭔가 알 수 없는 것이 발목을 잡아요. “너는 예수와 한 패다.” “아니다. 나는 예수 모른다. 나는 예수를 저주한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했을 때 뭔가 베드로 안에 괴물이 있는데 그 괴물이 베드로로 하여금 저 예수님을 못 따라가도록 발목을 잡는 요소가 있어요. 

  

그것을 익히 예수님은 아십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시험받는 장면이 나와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의 시험은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받는 시험과 동일한 시험입니다. 

  

마태복음 4장의 두 번째 시험을 읽어보겠습니다. 6절에,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이 성경, 법에, 시편 91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편 91편에 보면 하나님의 메시아가 왔을 때 메시아가 과연 메시아냐 아니냐를 알아보려면, 발이 돌에 부딪히는 상황에서도 천사들로 하여금 받들어 모신다는 그런 대목이 있다고 악마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악마가 어느 정도까지 시험을 하느냐 하면, 마치 모든 것을 시험하는데 다 갖다 바쳐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 답잖아, 라는 경지까지 몰아붙입니다. 이게 어려워서 정답부터 말씀드릴게요. 하도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살을 하겠습니까, 아니면 자살한 채로 살아남겠어요? 누구처럼 자살을 할 겁니까, 아니면 자살을 한 채로 계속 살아남을 겁니까? 지금 예수님의 시험은 모든 인간을 비롯해서 어떤 악마도 따라오지 못하는 그 공간, 그 공간에 주님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없음이라는 그 지점이 어떤 지점이냐를 알기 위해서는 악마로부터 예수님이 시험받도록 성령께서 유도해요. 왜 그렇게 하느냐? 악마와 그 졸개들과 인간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어디까지 시험할 수 있는가를 예수님 앞에서 다 노출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악마의 시험에 대해서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1번, 겁낸다. 2번, 자기목숨 바친다. 인간은 1번, 2번, 둘 중 하나 해요. 소위 오기라는 것이 있잖아요. 지난 낮 설교에, 과부가 두 렙돈 헌금해서 그걸 칭찬했다 하면 모든 것을 교회에 갖다 바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사람이 오기라는 것이 있는데 그 오기가 악마의 마음입니다. 

  

어떤 전도사가 기도원에서 계시를 받았는데 아들 바쳐야 믿음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자기 아들을 실제로 죽였어요. 그걸 오기라 합니다. 계속해서 뭘 바치고 행하게 되면 누가 있느냐 하면, 내가 여전히 있어요. 있는 내가 그 주님의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면 나의 영생이 곧 눈에 보이거든요. 

  

4십년, 5십년 신앙생활 했는데 이제 와서 이것은 곤란합니다, 하고 뒤돌아서게 된다면 안 되잖아요. 부자청년 이야기도 알고 있겠다, 부자청년이 통과하지 못한 것 나는 통과하겠다고 가난한 자들에게 가진 것 다 주고 따라간 사람도 있어요. 톨스토이같은 사람이 있어요. 

  

재산 상속 많이 받았는데 몽땅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기는 구원받겠다고 나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테스트는 마귀가 이미 다 알고 있어요. 따라서 마귀가 예수님을 테스트한 것은 자기가 인간에게 다 써먹은 테스트를 한 겁니다. 그 테스트를 할 때 예수님은 답변을 이렇게 해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라고 했어요. 이게 마귀보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마귀에 속한 우리 인간들보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시험에 통과해서 구원된다는 생각 아예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미 구원은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 없어요. 구원은 전부 다 예수님에 일임했어요. 마태복음 27장 46절, 유명한 말씀이지요.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이 사실을 통해서 마귀가 인간을 가지고 뭔가 기대하게 하고 구원과 영생 천국에 대해서 들어가고 싶게 하는 모든 것은 악마적인 시험에서 못 벗어난 인간들의 여망이고 바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구원받지 못해요. 구원받지 못한다면 이 말씀을 왜 줬는가? 천국의 구조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없던 분이 우리를 구원해야 돼요. 지금껏 줄곧 이야기했거든요. 아브라함은 물론 그것을 눈치 챘지요. 

  

오늘 본문 10절을 봅시다. 10절을 보면 끔찍해요.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그 아들을 괄호치고 그 안에 여러분의 자식을 대입시켜 봅시다. 미친 것 아니에요?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지만 어떻게……, 미운자식 같으면 이참에 죽이겠다, 하겠는데 사랑하는 자식이에요. 

  

조금 전에 질문했거든요. “아버지?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분명히 아버지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 ‘아, 양을 준비하겠지.’ 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자기 아들을 바쳐서 죽이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사람을 죽여 놓고 죽이면서 그 순간에 주께서 양을 준비한다는 것은 그 양이 단순히 양이 아니고 원래 사람 잡아야 되는 그 양이라는 것을 이 땅에 보여준 거예요. 

  

위치를 교체하는 겁니다.
위치를 교체하려면
양이 그냥 양이 아니고 세상 죄를 짊어지는 어린양 메시아라는 것을 알리려면
그 전에 사람을 잡아서 그 양이라는 상징, 형식 속에 집어넣어야 돼요.
그래야 천국의 구조가 되어서 그 원리가 계속해서 굴러가는 거예요. 

  

아들을 잡아버립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잡는다는 말은,
지금 아브라함은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미친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스케줄이 있어요. 

  

사람을 잡되 양으로 표상화 시키고
그 양속에서 다시 메시아를 끄집어내는 스케줄을
아브라함과 이삭이라는 이 가정을 통해서 그 구조를 보여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잡는다는 말은 이미 아브라함은 그 구조속에 있는 거예요.
이거 잡아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거 잡아서 믿음 있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아브라함 자기는 없어요. 

  

그저 하나님의 법 안에 그냥 놓여 있는 겁니다.
자기가 있다고요? 아니에요. 없음이 주도적이고 자기는 없음에 종속된 있음이에요.
없음에 종속된 있음,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잠시 잠간 아브라함 본인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는 모든 짓거리는 이 땅에 있는 자들이 할 수 없는 짓거리에요. 

  

자기 아들을 어떻게 죽입니까?
뭔가 미지의, 없음의 자리에 오실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지금 아브라함은 아들을 상대로 벌이고 있습니다.
이제 끝으로 마태복음 4장의 광야의 시험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마귀는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새로운 일, 네가 메시아다운 일을 해보라고, 용감하고 그야말로 과감한 일을 해보라고, 네가 성전에서 뛰어내려보라고, 주저 말고 겁먹지 말고,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같으면 보란 듯이 뛰어내려 보라고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마귀와 그 뒤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이 기대하고 예상하는 것, 그 자체가 있음에서 나온 시험이라고요.

결혼할 때 이런 자식이 나올 줄을 예상을 못했잖아요. 그래서 결혼이라 하는 것은 두 사람이 짜는 서로 다른 색깔의 자수인데 거기다 자식까지 낳으면 자수가 셋이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거기에 예수님의 피를 확 부어버리면 기존 색깔 없어지고 전부 피 색깔로 구원받아요. 이것은 가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삭이 이런 이야기했다고 해서 이삭이 탈락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아들 잡았다고 해서 탈락도 아니고, 이것은 하나의 구조를 보여주는 자수의 색깔이에요. 

  

예수님이 피가 주어지게 되면 기존의 내가 어떻게 법 지켜서, 전도해서, 헌금해서 구원받겠다는 이 모든 시도가 나쁘다는 정도가 아니고, 악마가 인간을 그동안 얼마나, 이래야 천당간다, 이래야 구원받는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하여 진다, 성경말씀 이 법을 가지고 얼마나 들이댔습니까? 

  

인간은 법을 볼 때
있음으로부터 법을, 성경을 보거든요.
“내가 여기 있다. 성경 펼쳤네.
있는 내가 이 법을 지켜서 하나님 보시기에 저는 법을 지킨 있는 존재입니다.
이 있는 존재를 천국에 고스란히 넣어주는, 영원까지 이어지는 그런 있는 존재가 되게 해 주옵소서.” 

  

이 모든 것이 악마의 시험에 빠진 증거입니다.
구원은 주님만이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유일하게 없는 존재기 때문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블랙홀이 있다는 것을 저희가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시험은 시험도 아니요 진짜 시험은 예수님이 악마에게 받은 그 시험이고 그 시험에 비춰볼 때 어떤 인간도 악마의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이제 깨닫게 됩니다. 주께서 홀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에 그 승리의 능력이 저희들로 하여금 주님의 영생의 구조로 들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