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새 성전의 구조-광주강의130622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1. 28. 17:34

2013-06-22 02:29:02 조회 : 744         
새성전의 구조 130621 이름 : 이근호 (IP:119.18.6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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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강의(2013. 6. 21) 43-1

에스겔 40장을 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레위기를 읽기가 지루하다고 하는데, 저는 에스겔 40, 41, 42장이 더 지루할 것 같아요. 40장에 보면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뭐가 보이느냐?

천사가 있었고, 그 천사의 손에는 측량하는 장대가 있었고, 이미 완공된 집에 대해서 측량을 시작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주 지루해요.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 흥미 위주나 읽기 편하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납득하고 흔쾌히 동의해서 구원에 이르는 그런 용도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자기 계획서입니다.

40, 41, 42장의 내용은 설계도인데, 지루하게 방 치수, 구조 이런 이야기입니다. 전혀 은혜로운 구석이 없습니다. 당시에 카메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에스겔이 산 위에서 본 광경이 40~42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제가 3장에 그려보았습니다.

에스겔 성전의 평면도인데, 정 방향 이쪽이 500규빗이고, 여기도 500규빗입니다. 1규빗(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은 약 45.6 Cm쯤 됩니다. 가로 228, 세로 228미터.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만들어놓고, 이미 불타버린 솔로몬 성전을 대신해서 이런 성전에서 너희들이 산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옛날 솔로몬 성전에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찾아왔겠지요. 그들이 성전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 열왕기상 8장 나오는데, 병들었을 때도 찾아오고, 전쟁에 패했을 때도 찾아오고, 죄 지었을 때도 찾아오고, 가정에 우환이나 힘들 때 찾아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네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우리 생각에는 꼭 성전에 안 가고 다른 곳에서 기도해도 응답해 주실 것 같은데 왜 하나님은 성전을 고집하실까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까 산 위에서 기도해도 응답하시면 좋겠는데 왜 하필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거기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실무자가 계세요. 그분은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은 철수, 영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주의 이름’을 상관한다든지 대화를 청한다든지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이름(철수, 영이)이라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할 수 있지만 인간의 이름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기에 그냥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들이 상대를 만날 때는 자기 이름을 들고 나오는데 주님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주의 이름’과 관계가 성사되지 않습니다. 성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의 이름’이 이 땅에 나타날 때 어떤 기능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흠 없는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죽음이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과 관계를 맺으려면 자신의 존재는 사라져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나의 회복을 원합니까, 아니면 거듭나기를 원합니까? 구원 받을 때 내가 회복되어서 구원 받습니까, 아니면 내가 다른 인간으로 구원 받습니까? 거듭난다는 것은 지금의 내가 아니고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다른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죽음, 자기 십자가가 없으면 구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는 이유가, 이미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들이 지천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나의 회복을 줍니다. 지금보다 더 뛰어나고, 더 나은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 신과 거래에 나설 때는 우리 이름으로 뭔가를 바치게 됩니다.

이것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나의 이름으로 선물을 주잖아요. 이런 우상적인 방식을 차단하기 위해서 인간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길은 죽음으로 끊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기도하라고 했는가? 기도하면 병도 낫고, 전쟁도 이기고, 가뭄에 비도 내리고, 곡식이 잘 된다는 그런 약속을 왜 했는가?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키면 이렇습니다. ‘비가 안 와서 농사가 안 된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가서 주의 약속대로 기도하면 비가 와서 농사가 잘 될 것이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래서 예루살렘에 가서 기도했고 기도가 응답되어 비가 왔습니다.

그러면 그 농사나 농토가 그 이후에는 누구 소유가 됩니까? 처음에는 자기 것 잘 되기 위해서 갔다가 막상 예루살렘을 거쳐 오게 되면 자신의 것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주의 이름이 그것을 노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농토는 누구 소속인가 하면, 주의 이름으로 회수된 농토가 됩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사람은 본인의 기대와 희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으면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주의 것이 된 사람의 특징은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재산이 있더라도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내 것을 잘 키워서 확장해 보겠다는 것은 주님 앞에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이제 주님의 것으로 바꿔치기하는 그 작업을 주님이 행하시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행하시는 주님의 구원 작업입니다. 물론 내 것 빼앗기고 주님 것으로 등기 이전될 때 화가 나지요. 나는 나의 명예와 행복의 회복을 원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기니까요. 주 안에서 우리는 죽어야 하고, 죽으면 내 것이 없어집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구원 받았습니다. 만약 이것이 나의 회복이라면 우리 직업을 강도로 바꿔야 합니다.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거지가 되어야 합니까? 아니지요. 어차피 죽으면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 받아야지.’하는 생각도 죽음과 함께 다 사라집니다. 의미 없는 겁니다.

우리가 내 것이라고 하는 자체가 주님의 것을 훼손시키는 짓입니다. 우리의 회복을 바라는 것은 주의 이름을 좋아해서가 아니고 내 이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내 이름 값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회복을 바라지요.

여러분들이 무쇠 솥뚜껑 위에 올라가 보세요. 내려앉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알루미늄 냄비 위에 올라가면 냄비가 찌그러지지요. 내가 내 이름을 생각하고 이것은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하나님의 것이 내가 차지한 자리만큼 우그러듭니다. 우리는 우그러진 것도 모르고 내 소원대로 되게 해달라고 하는데, 주님은 “빨리 비켜라. 네가 내 것을 훼손했다.” 이렇게 나오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고상한 것을 우리가 내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마구 군화발로 짓밟아 왔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을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이것이 내 것이라고 하는 순간 주님이 주신 은혜를 지금 훼손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은 선풍기를 주시면서 감사하라고 하시는데, 처음에는 감사하다가 나중에는 감사한줄 몰라요. 이 자체가 냄비를 찌그러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풍기가 차압을 당해서 남의 집에 가 있다면 그 때 그 선풍기에 대해 감사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되지요. 주님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있는 것을 원치 않고 주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을 렌탈이라고 하는데, 빌리는 것이지요. 우리의 하루하루가 주님께 빌린 세월이기에 이것을 모으지 말고 소모해야 합니다. 모으면 내 것 됩니다. 내 것이 되면 냄비가 우그러져요.

성전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 뭔가 하면, 원하지도 않은 설계도를 왜 보여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네가 있는 자리를 비켜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작업에 내가 방해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날 솔로몬 성전에서 쫓겨났어요. 쫓겨난 이유가 성전은 주의 이름이 계시는 곳인데 그들은 자기 이름을 위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소유하려 했기에 그 성전이 불탔고 그들이 망하게 된 것입니다.

주의 이름은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고 반대가 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날마다 소유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내게 해 준 것이 뭐 있습니까?” 이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을 위해 치워버려야 할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에스겔 새 성전의 설계도를 보여주신 이유가 드러나지요. 만약 에스겔 성전의 설계도를 안 보여 주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을 모실 성전을 지어라.”고 했다면 우리는 어떤 구조로 성전을 짓겠습니까? 아마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필요한 공간들을 염두에 두면서 설계를 할 거예요. “하나님, 제가 경배하는 모습이 잘 모이지요?” 이런 식으로.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 있고 가치 있음을 하나님이 인정해 줄 것이라는 식으로 성전을 만들겠지요.

솔로몬 성전이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불타 버렸다면 새 성전은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임을 보여주는 내용이 이 성전 안에 포함이 되어야겠지요. 하나님이 성전 설계도를 보여주시는 것은 ‘이 성전은 인간 중심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전은 누구 중심입니까? 죄 많은 인간을 대신해서 오실 분이 있어요. 에스겔에서는 ‘인자’라고 했어요. ‘인자’가 거하실 공간이 새 성전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에스겔 41, 42, 43장에 나오는 이 성전을 기본 모델로 해서 거대하게 46년 동안 계속 짓고 있는 성전이 있었지요. 그것을 헤롯 성전이라고 합니다. 헤롯 성전이 이 에스겔 성전을 흉내 낼 수밖에 없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런 성전이 주어진다고 하니까 그 때가 되면 다윗이 이 성전에 좌정한다고 하니까 이 성전을 누가 만약 짓게 된다면 그 사람은 백성들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래서 헤롯이 성전을 건축하게 된 것입니다.

헤롯의 역점 사업 중 최고의 사업이 유대 백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성전을 짓는 일이었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고 에돔 사람입니다. 에돔 사람이면서 유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강제로 할례를 시킨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국가 법에 의해서 강제로 할례를 시행했어요.

유대인들은 여호와 말씀이라고 하면 무조건 따랐어요. 그러기에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면 통치자로서 존중받고 훌륭한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겠지요. 마치 박근혜 대통령이 이단들을 다 척결하고 곳곳에 장로교 예배당을 세워 준다면 장로교 교단에서 대통령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에스겔 40장을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건물 성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에스겔에게 설계도를 주셨고, 직접 측량도 했어요. 측량을 했다는 것은 실제로 땅 위에 건물 크기와 높이 등을 구체적으로 말씀한 것이기에 이 성전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허락한 성전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성전을 헐라고 하시니까 제자들은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성전 짓는 속도가 너무 느리니까 주님이 사흘 만에 완성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제시한 성전은 제자들도 몰랐어요. 나중에 예수님 부활한 후에 알았습니다. 성전은 예수님 자신의 몸을 두고 말씀하신 것인 줄.

그러면 이 에스겔 성전의 의미는 끝났습니다. 성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육체입니다. 예수님 육체 밖에는 성전이 없고 예수님 몸 자체가 성전입니다. 세상의 어떤 학자가 이 부동산 건물로 된 성전이 예수님 몸이라는 것을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베드로, 요한은 제자이지만 그들도 오해했습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부동산 건물에 오시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건물을 헐라는 말은, 인간들의 사고에서 나온 성전은 이럴 것이라는 아이디어는 주님 이름에 의해서 부서질 대상이며 이런 작업에 나서시는 분이 진짜 성전 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아이디어는 다 주님 앞에 부서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합니다. 우리 몸이 성전입니까, 아닙니까? 우리 몸이 성전이라는 생각도 주님에 의해 부서져야 됩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라면 이곳에 성전이 여러 개가 있네요. “너희 몸이 성전이다.”라고 할 때는 우리가 지닌 이 몸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몸은 개별적인 내 몸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너희 몸이 성전이다.”라고 할 때는 각자의 몸을 성전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너희 모두가 하나의 몸을 이루어 성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에베소서 2장이 나오지요. 성령이 연결시켜서 하나의 성전을 이룹니다. 그래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출발부터 내 이름을 위하기에, 내가 잘 되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고 여기기에 성경을 해석할 때 이 점을 포기 못해요. 그러다보니 ‘내 몸은 성전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성령께서 방울처럼 들어오게 되면 내가 가는 곳마다 딸랑딸랑 소리가 나겠지요. 이게 틀려먹은 거예요. 성경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나에게만 성령이 충만하게 오는 것이 아니고 전체 성전을 고려해서 우리의 기능을 분명히 밝혀주는 식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는 것은 내 좋으라고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는 성전을 위하여 내 몸이 봉사해야 하고, 희생해야 할 것을 자각시키기 위해 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나만 잘 되는 것으로 생각해요. 여름에 제과점이나 찻집에 친구들과 같이 가서 팥빙수를 주문했으면 어느 그릇이 더 많이 담겼나를 비교해요.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이런 식으로 비교합니다.

제자들이 성령 받은 후에 “이제 됐다. 나는 성령 받았으니까 구원은 확실하고, 이제 놀아야지.” 이렇게 했어요? 바울이 성령 받고 고생에 접어들었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끌려가면서 풍랑을 만나고 죽을 고생을 했지요. 스데반 집사가 성령에 충만해서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어요.

주님은 전체를 위하여 각자의 역할을 하라고 성령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성령 받지 아니하면 전체는 생각지 않고 나만 생각합니다. 나만 즐거우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운 것을 나의 것으로 가지면서 주님이 주신 냄비를 찌그러뜨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주님 몸이 찌그러진 상태에서 원상회복이 되겠지요. 따라서 주님은 자기 몸의 회복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안 합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말씀은 아내가 없어야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결혼 전에는 주님을 기쁘게 하던 사람이 결혼해서 아내를 기쁘게 한다고 주님께 소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한 거예요.

그래서 이 성전 자체가 주의 이름이 거해야 되기 때문에 성전에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제사장이 성전에서 활동하지만 제사장의 이름은 없습니다. 성전은 우리를 익명적 존재로 전환시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네 이름 내기 위해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기도, 구제, 금식 등 무엇을 해도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식으로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일(교사, 회사원, 목사, 학생 등)도 주님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해서 하니까 주님의 냄비가 우그러지고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이름 없으면 편해요. 주님 이름이 우리 이름을 이미 차압했잖아요. 그러면 우리 이름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 없는 빈자리에 주님 이름이 차고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이름으로 연결되는데 그것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연결된 상태입니다.

초기 우주인들이 우주선 밖으로 나올 때 우주선과 사람 몸을 연결하는 선이 있어서 마치 아기와 엄마가 탯줄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어요. 탯줄이 끊어지면 죽는 거예요. 그 양상이 오늘날 성도가 존재하는 양상입니다. 주님의 탯줄이 없으면 우리는 죽어요. 따라서 구원은 오직 언약 속에만 담기지 언약 외에는 없어요.

한국교회는 이런 말씀을 거부하지만 이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바울 안에 성령이 있어서 그를 인도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말을 안 듣습니다. 오직 언약 완성을 위해 임하기 때문에 언약대로만 실시합니다. 따라서 에스겔에 나오는 이 성전이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어서 우리가 성령 받아서 성전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오직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만 매일같이 각인 시키면서 모든 사건이 진행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움직이는 제사장의 분주한 몸짓도 자기 이름을 위함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담아서 합니다. 오늘날 성도는 이미 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반복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전이 움직인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애가 성령 안에서 반복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애를 적용할 때 빈 진공상태에 직접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생애를 둘러싼 검은 세력들(요한 계시록에서는 ‘짐승’이라고 하고, 예수님은 이들을 ‘악마’라 했음)이 활개를 쳤기에, 예수님은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심지어 12제자도 예수님의 권능을 받아서 이런 일을 했지요.

제자들이 “우리가 능력을 행하니까 귀신이 떠나갔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그런 것으로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지요. 이런 대화는 바로 이런 그림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할 때 예수님 생애만 오는 것이 아니고 그를 둘러싼 악한 세력도 같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경험했던 것이 이제 우리의 경험이 될 때 이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라는 기존의 개념은, 늘 청소기를 들고 우리 속을 구석구석 청소하면 깔끔해지니까 우리 몸은 거룩하다고 합니다. 때가 끼면 또 청소해서 거룩하게 하고. 이것은 유식불교입니다. 우리나라 옛날 불교의 고승들은 인간의 마음을 거울로 보아서 거울이 깨끗하지 않으면 진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거울이 세상 욕심 때문에 때가 끼면 깨끗하게 청소해야 하고, 거울이 깨끗해지면 세상을 똑바로 보고 바로 행하고 바로 생각하니까 많은 중생들을 진리로 인도해서 선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 주장은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의 주장과 똑같아요. 성령 충만해서 선한 삶을 살면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하잖아요. 인간의 욕망을 종교에서 긍정해 주니까 교회로 절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겁니다. 여기서는 깨끗하게 살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이런 생각 속에 놓여 있던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아, 그것이 아니었네.”하고 구원을 받은 거예요. 내가 더러운 거울을 닦을 필요도 없고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더러운 것을 더욱더 노출시킵니다. 왜냐? 더러운 육신에 주님이 거했기 때문에 더러운 육신은 육신 값을 해야 돼요.

우리가 아는 범죄는 다윗이 ‘내가 주께만 범죄했나이다.’는 그곳에 아직 못 미친 것입니다. 우리나라 폭력영화를 보면 나쁜 짓 종합세트지요. 유괴, 폭력, 살인, 강간 등 온갖 악행이 다 나오지요. 사람들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저것이 나쁜 짓이라면 나는 아직 그 나쁜 짓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자기 거울의 깨끗함을 확인하고 싶은 거지요.

막장드라마에 보면 온갖 나쁜 짓이 다 나오는데 시청률 40% 나와요. 이것을 보면서, “내가 아무리 나쁜 놈이지만 저 정도는 아니다.”라는 데서 오는 쾌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에게 복 주세요. 나는 저런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드라마에서 악역을 하는 사람이 나오면 나는 은근히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 정립되면서 오늘도 어디선가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합니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구원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만이 아니고 옛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전에 가서 기도하면 복 받을 줄 알았습니다. 바로 그것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은 새로운 성전으로 갈아치워야 합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섬겼던 그 버릇으로 새 성전에서도 섬기면 새 성전의 취지가 사라지지요. 이런 짓을 한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본인이에요.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 본인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본인이 본인을 짓는 거예요. 이 말을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고, 바리새인도, 오늘날 한국교회도 그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우리 이름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작용입니다.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그 소자와 내가 같은 몸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이런 이야기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새 성전에서 제사장이 활동할 때 만약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수고가 많습니다. 이런 수고와 고생 덕분에 가족들이 다 복을 받고 나라가 평안하게 되니 당신의 수고는 정말 귀한 일입니다.”라고 한다면 어떤 답변이 나와야 합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은 주님이 시키신 일이고 그분의 능력이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라고 해야 정답입니다. 이것을 내가 행했다고 하면 옛날 솔로몬 성전 망하듯이 또 망합니다.

새 성전에서 제사장이 활동하는 것은 천국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면류관을 반납하는 모습처럼. “이것은 제가 받는 것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종려나무 들고 어린양 예수님을 찬미하는 모습들. “이것은 내가 나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기쁜 마음으로 표현하는 그 세계를 위한 설계도가 바로 에스겔 40, 41, 42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지 말고 이 설계도를 예수님의 생애와 먼저 연결시키고, 또 성령께서 우리를 예수님의 생애에 참여시키는 작업이 오늘날 성도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순서를 에스겔에서 바로 우리에게 가져오지 말고, 에스겔에서 인자 되시는 예수님의 생애에 적용시키고, 그 생애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므로 우리는 에스겔 40장 새 성전에 합류된 제사장으로써의 활동을 통해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10분 쉽시다.

(2013. 7. 11. 08:58 녹취 마침)
 서경수 (IP:121.♡.190.236) 13-07-25 09:42 
광주 강의(2013. 6. 21) 43-2

그림을 봅시다. 이 그림을 볼 때 먼저 동서남북을 봐야 됩니다. 동쪽으로 문이 나 있고 서쪽에는 문이 없어요. 이것은 위에서 본 그림이고, 옆에서 보면 이렇게 생겼습니다. 담 겸용 방입니다. 이 높이가 2.7미터입니다. 상당히 높아요. 그리고 이 위에 1, 2, 3번이 있지요? 이것이 성전입니다. 옆에서 보면 이 성전은 3층 건물입니다. 그리고 한 면은 228미터.

성전은 3층 건물인데 각 층마다 방이 30개 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방이 커집니다. 솔로몬 성전이 이것과 유사한데 이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이제 동쪽 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들어가는데 에스겔에 보면 보통 사람은 못 들어갑니다. 이 문은 장차 오실 분을 위해 남겨두어야 합니다. 누가 오시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오십니다. 왕이 오시는 거예요. 왕이 오셔서 제사장과 결합하면 그것이 성전의 완성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고 제사장이고 성전인데, 자신이 성전을 완성하시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성전을 이루시는 것인데, 성전을 이루시고 죽었습니다. 이 죽음은 구겨지는 것인데,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구겨진 것이 회복됩니다. 그러면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전완성, 거룩이 적용되면서 우리가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한마디 한마디가 빈말이 아닙니다. 구약에 어떤 내용이 있고, 그것이 예수님 십자가와 결합되면서 우리는 구약 완성의 혜택을 입는다는 그 원리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한국교회가 놓치는 것이 뭔가 하면, 구약 사람들이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사실과 그것이 실패로 끝났다는 점을 고려치 않으니까 과거 사람들의 실패를 그대로 답습해요.

바리새인 서기관 모두 실패했지요. 이들은 말씀 위주로 산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실패했어요. 사두개인도 실패했어요. 이들은 ‘지정된 공간에서 신에게 제사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집이다.’ 라고 했는데 그것도 실패했어요. 그렇다면 예배당 지어놓고 주춧돌에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다.’라고 새기는데 이건 문제가 있는 겁니다.

예배당을 지어놓고 ‘이것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주장하려면, 그 교회 목사가 바가지에 물을 떠서 교인들에게 주면 그것이 포도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을 못하면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동쪽 문으로 들어오는데, 이 길은 옛날 에덴동산에서 막혔던 길입니다. 율법에 의하면(레위기 17장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등장하는데 피로 등장합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 곧 생명이다. 따라서 지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성전에서는 죽음을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은 죽이는 일입니다.

뜰이 있는데, 그 앞에 사다리처럼 점선으로 되어 있지요. 2페이지에 있습니다. 성전을 출입할 수 있는 문은 남쪽, 동쪽, 북쪽 문을 통과해야 된다. 이 성전은 폐쇄된 곳입니까, 개방된 곳입니까? 문이 있으니까 문은 들어오라고 있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동쪽 문은 들어오라고 있는 문이 아닙니다.

이 동쪽 문은 들어올 수는 있는데 나갈 수는 없어요. 나갈 때는 남쪽이나 북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일반 제사장들은 동쪽 문으로 들어오지를 못해요. 왕만 들어올 수 있지 다른 사람은 못 들어옵니다. 2페이지 다시 봅시다. 방이 있는데 6개입니다. 절에 가보면 부처가 있는 대웅전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개의 문을 통과하지요. 통과할 때 좌우에 무섭게 칼을 들고 흉측한 얼굴을 한 조각상들이 있지요.

이처럼 통과하면서 6개의 방이 있는데 방 크기가 가로, 세로, 높이가 다 2.7미터입니다. 이게 문지기 방입니다. 그런데 시편 84:10에 보면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문지기의 역할은 거룩과 비거룩의 경계선에서 출입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 역할은 하늘나라 천사가 하는 일인데 이것을 구원 받은 성도가 합니다. 문지기가 출입만 통제하는 것이 아니고 왕을 보호하고 찬양하고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문지기로부터 모든 것이 오실 메시아를 메시아답게 드러내는 예행연습을 하는 것인데 이것을 건축 구조물로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오늘날 우리가 예배당을 짓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오실 메시아를 환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은 아무나 가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과 관련된 업무가 되도록 성령께서 새 성전 설계도에 맞춰서 우리에게 일을 시킵니다. 매일의 모든 일과가 거룩과 비거룩의 경계선에 서있는 우리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위해 그런 역할을 하는 것도 모르고 냄비위에 올라가서 내 이름을 위해 냄비를 두드리니 냄비가 찌그러지지요. 주님은 안중에도 없고 나만 잘되면 된다고 여기니까 성전의 기능들이 나와 무관한 것으로 느껴지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이런 역할을 하도록 하십니다.

계속 구조를 살펴봅시다. 동쪽 문으로 들어가니까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뭡니까? 왜 동쪽 문만 이야기하는가 하면 남쪽, 북쪽은 들러리입니다. 동쪽에 마지막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오는 것이 성전의 완성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남쪽, 북쪽은 왕이 오시는 것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들어가면 앞에 계단이 10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 ㅋ 에 또 계단이 나오지요. 성전 가로가 228미터, 세로도 228미터, 동쪽 문으로 계단을 밟고 올라갑니다. 조금 가다가 또 계단이 있어요. 그 계단이 있는 곳을 바깥뜰이라고 하고 그 안쪽은 안뜰이라고 합니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올 때 지대가 높아져요.

바깥뜰에서 올라옵니다. 문지방을 또 통과해요. 그러면 안뜰에 제단이 있어요. 제일 바깥뜰에 벽 겸용 방이 있는데, 방 모퉁이에는 부엌이 있는데 이 부엌은 문지기나 일반인들을 위한 부엌이고, 제사장을 위한 부엌은 따로 있어요. 안뜰 안에 부엌이 있지요. 여기 벽 겸용 방들이 있는데, 총 60개입니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면 제단이 있고, 제단 앞에 보니까 거대한 3층 건물의 성전이 보이는 겁니다. 성전 골격이 소갈비 같아요. 동쪽에 계단이 10개 있고, 올라서면 성소입니다. 성소를 지나 안쪽으로 가면 지성소입니다.

이방인들이 신전(성전)을 지으면 안쪽에 반드시 신상이 있어요. 그리스. 로마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데 거기는 헬레나라는 여신의 신상이 있는데 아주 날씬하고 잘 생긴 여인이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인간이 신을 만들 때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집약시켜 신의 형상을 만듭니다.

모든 신상은 인간에게서 나왔어요. 왜냐? 신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신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신을 만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신을 신이 아니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너는 인간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다.’라고 하십니다. 생명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떴다 하면 그 바닥은 전부 죽음입니다. 죽음을 확인하는 그것이 곧 생명이 생명답게 활동하는 작용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생명이 레위기에서는 피로 나타납니다. 모든 율법은 어디에서 집약되는가 하면 어린양을 잡는데 집약됩니다. 모든 율법은 제사법으로 모아지고, 제사법은 제물의 죽음에 모아지는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에스겔 신상이 있는 그곳에 새 성전의 신상은 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피가 있어요. 천사가 만든 제단에 피가 있어요.

피는 죽음입니다. 피를 그냥 바르면 피가 바짝 마르지요. 피가 안 마르게 하는 방법은 죽음을 사건화 시키고 그걸 반복하게 되면 생생하게 살아 있겠지요. 지금 하늘나라에 어린양의 피가 있고 그 피가 생명의 역할을 하려면 죽음 사건을 매일 되풀이 하면 되겠지요.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는 지성소에 와 있고 우리는 피를 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피로 말미암아 옷이 희어지는 놀라운 효과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지은 더러운 죄가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될 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이 지은 새 성전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첫 번 그림을 보면, 여기 늑골부분에 1층 방이 몇 개 있습니까? 30개의 방이 있고, 뒤쪽에 계단이 있는데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고, 2층에도 30개, 3층에도 30개의 방이 있습니다. 이렇게 방들이 있는데, 이 방들은 제사장들이 숙직하고 교대근무하면서 자고, 제사장의 옷이나 그런 것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됩니다.

자, 이 성전을 이렇게 지었을 때 안 믿는 사람들은 건물을 보면서 ‘저 건물에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 하겠지요. 여러분들이 시골에 가다가 큰 건물을 보면 궁금하지요? 궁금해서 들어가 보면 작년에 재배한 농작물 등이 보관되어 있어요. 큰 건물은 대부분 창고입니다.

하나님이 지은 집은 무슨 용도로 지었습니까? 방이 많다는 것은 방에 기거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고, 그 사람은 제사장이고, 제사장이 하는 일은 제사 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구약 때는 제사장들은 계속 배출되어야 하고, 되풀이해서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하고, 힘드니까 교대 근무해야 하고 그래요.

히브리서에 보면 그런 것들은 이제 무엇으로 인해 끝났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죄를 씻는 제사는 없습니다. 그 말은 죄 씻는 문제에 대해서 예배 참석한다는 그것이 우리 죄를 씻을 수 있는 근거는 없어요. 그것은 옛날 이야기고 지금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봅시다. 죄가 없어야 구원 받는데 우리 육신에서는 매일 죄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든 말씀으로 죄를 덮었으면 죄 씻는 방법은 끝났어요. 옛날 같으면 양 잡아서 제사장에게 가서 제물 드리고 제사 드리면 되는데, 지금은 그게 없다고 했잖아요. 없으면 죄 씻을 길이 없잖아요? 이게 난감한 문제입니다.

죄는 계속 생산되고 내 쪽에서 죄를 씻을 길은 없고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 성전에서 장차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물이 나옵니다. 녹조현상이 일어났을 때 댐에서 물을 보내면 녹조현상이 씻겨 내려가듯이 성전에서 물이 계속 나옵니다. 그래서 주변 지역에 물고기도 살고 농작물도 풍성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성전 3층 건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밑 동네에 산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성전이 완성되고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7장에서는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겁니다.

이 성령은 나오다 안 나오고, 또 나오다가 그치고 그런 것입니까? 에스겔에 의하면 이 성전 물은 계속 흘러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성전 밑에 사는 주민은 졸지에 홍수를 맞게 되어 있어요. 물을 뒤집어 씌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전 밑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누구의 공로입니까? 자신이 땀 흘려 열심히 농사지은 공로입니까? 아니죠. 성전을 완공시킨 분의 공로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결국 모형인데요, 이 그림을 하나로 집약시킨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일대기 속에 전부 녹아져 있다고 보면 됩니다. 녹아져 있고, 그것이 예수님이 성전 되고, 성령에 의해 그것을 우리에게 집어넣어주면 이제 내가 어떻게 살까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았다는 모습을 주님은 어떤 식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내가 담당할 것인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로 남겠지요.

로토복권 당첨자 추천할 때 번호가 기록된 공이 나오잖아요. 그렇다면 사람이 똑같을 필요가 없어요. 그 구멍으로 나온 공이라면 7번이면 7번 답게 살면 되고, 33번이면 33번 답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너는 좋겠다. 나보다 더 높은 숫자네.” 이런 필요 없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역할을 하게 되면 그것이 전부 한 성령에서 나온 동일한 한 분의 작용입니다.

눈이 발에게 쓸데없다고 하면 안 되지요. 또 발이 눈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각자 받은 은사대로 움직이면 그 전체가 하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전부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을 마셔서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메시아를 만났다.”면서 물동이를 버리고 달려갔을 때 그 여인이 해야 될 일은 목사가 되고 당회장이 되기 위해서 신학교를 가야 합니까? 성경에 나온 그의 역할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치면서 그 무대에서 사라져 버려요.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진행될 때는 화려한 조명이 비취고 무대 위의 배우들 몸짓에 관객들이 웃고 울고 했는데 끝나니까 아무도 없고 정막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내가 죽고 난 후의 모습입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뭔가를 열심히 했는데 죽고 난 후에는 정적만 남고, 다른 사람이 그 무대에서 뛰고 놀지요. 물동이 버린 여인은 그것으로 끝났어요. 소경은 눈을 뜨게 되고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그 사람이 부자 되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습니다. “부자 되세요!” 이런 소리 안 나옵니다.

성전 중심으로 같이 움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일을 하다가 죽으면 아들이 대를 이어서 순번제로 제사장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어떤 제사장이 순번제로 역할을 하던 최종적으로는 지성소에 피는 남습니다.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어떤 일을 하던지 결국 피만 남습니다.

그렇다면 에스겔 40장에서 천사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척량하는 장대를 가졌다는 것은 집 구조, 즉 크기를 척량하는 것인데 신약 성경에서 이 전체가 인격화 되면 예수님의 키가 얼마인지 이런 것을 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그 기능은 이미 정확하게 주님께서 치수대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도 마찬가지로 이미 예정된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대구에서 목회하다 그만두고, 또 대전에서 사업하다가 실패하고, 강원도에서 어부생활 하다가 그것도 접고. 이런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자기가 선택하고 안간힘을 쓰고 산 것으로 보지만 그 사람이 만약 성도라면 자신이 다양하게 일했다고 생각지 않고 그냥 주님이 맡기신 일을 했다고 보는 겁니다.

그 맡겨진 일이 뭔가 하면, ‘네가 어떤 사업을 하든지 상관없이 결국은 예수님 피와 관련된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님 보시기에 다 같은 일이었고, 그 모든 일이 규격에 맞는 것이기에 피와 연결이 가능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제가 어렵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에스겔에 기록된 공간의 치수(크기), 수학적인 양이 신약에서는 인격으로 바뀝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면 치수가 인간성입니까? 아니잖아요. 공간의 크기가 인격으로 넘어오는 논리적 구조가 풀려야 하는데 이게 어렵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에스겔 40장의 주석을 보면 이런 식으로 해석해 놓았어요. “5척, 한 장대, 방이 3개” 등등의 표현을 사람들은 숫자로 이해하고, ‘성전에 들어갈 사람의 수는 정해졌다.’ 이런 식으로 해석합니다. 이게 맞습니까? 틀린 것 같지요? 왜냐하면 치수, 양이 숫자가 되면 동일한 양적 개념이 되지요. 헤아릴 수 있는 개념이 된다고요.

방이 몇 개? 30개. 이건 가능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셀 것 같으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왜 예수님을 못 알아 봤겠어요? 예수님이 옷을 입을 때 보통 사람들처럼 입지 말고 에스겔에 나온 성전 설계도대로 디자인을 해서 옷을 입으면 바리새인들이 보고 “어, 메시야다!” 이렇게 알아 볼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에스겔 40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성전은 3층인데 각 층에 방이 30개인 것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들의 인식에 동조해서 긍정해 주시면 서로 소통이 되겠는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성전을 헐라.”고 했어요. 그런데 주님이 헐라고 하신 헤롯 성전은 에스겔의 설계도를 따라 지은 성전입니다.

그것을 헐면 그곳이 진짜 성전이라고 믿고 그곳에서 기도했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다 무용지물이 되지요. “너희들이 에스겔 40장 해석 잘 못했다.” 그런 뜻이 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까? 성전을 구체적으로 그림으로 보여주니까 그 모양과 크기대로 만들면 된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거주지와 같이 성전을 이해했기에 솔로몬 성전이 불탄 것처럼 이런 성전을 부서져야 합니다. 그런 개념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이것은 인격 개념으로 해석이 되기 때문에 양과 수가 인격으로 전환될 수는 없습니다. 

인격은 죽어야 됩니다. 내가 죽고 내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고 예수님의 것으로 다시 살기 때문에 기존의 치수 개념과 연결시켜 억지를 부리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이 30개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제사장들이 활동을 많이 한다는 뜻입니다. ‘제사장들이 활동을 많이 하면 더욱 제사가 활성화되고, 성전의 활동도 왕성해 지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한다면, 많은 수가 있다고 해서 제사가 잘 된다는 그 아이디어가 곧 우리가 여전히 우리 인격을 고수하고 있는, 죄 된 인격의 미련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 하나님과도 관계해 볼까 하는 그런 심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30개의 방을 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몸입니다. 한 몸이 죽어도 30개의 방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것 다 헐어버리세요. 사흘 만에 이 구조 그대로 다 만들어 냅니다. 방 30개. 그러면 방 30개 만들어 내면, 예수님은 머리고 30개의 지체가 있다. 그러면 30개의 방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구원 받은 셈이지요.

이 세상에 있는 사람 중 30개의 방에 들어가려고 하면 경쟁률이 얼마나 됩니까? 문지기의 방이 6개인데, 그러면 한 사람이 방 하나씩 차지하면 어떻게 됩니까? 문지기를 제사장이 돌아가면서 하지만, 이것도 경쟁률이 굉장히 셉니다.

그러니까 이 해석을 숫자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되고 문지기의 기능, 제사장의 기능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어떤 직업을 어느 장소에서 감당하든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 기능을 이 성전에 입각해서 시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제사장 기능인지 어떻게 압니까? 이 세상의 모든 기능은 마지막에 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뭐라고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고 했어요. 여기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에스겔 40장은 제외한 이야기입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에스겔의 성전 척량대로 다 이루어진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왜 못 알아보았는가? 주님이 죽음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못 알아 봐요. 우리가 들어갈 수 없는 죽음 속으로.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하면, 죽음 속에 있어요. 죽음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따라갈 수 없어요. 물론 죽음 속에 있어도 따라간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이들은 불속에 들어갔어요. 죽음 속에 들어가 보니 그 속에 누가 계셨어요? 예수님이 계셨지요.

죽음 속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그냥 죽으면 안 되고 모든 말씀을 다 성취했던 그 죽음에 합류될 때만 예수님이 함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장소를 어디로 봅니까? 십자가로 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 나는 드디어 에스겔 40, 41, 42장 속에 들어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 내가 제사장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 안에서 사시면 이미 에스겔 40, 41장을 완성하신 그분의 취지가 내 몸을 통해서 표출된다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면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해도 피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구약 때 이야기입니다. 내가 제사장으로 제사를 잘 드렸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프다. 그래서 근심이 생기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면 이 모습을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 옳은 것입니까? 옳지 않지요. 그렇다면 그 제사장은 제사장 역할을 정년까지 하고 은퇴해서 죽어야 됩니다.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게 히브리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사장들은 날마다 제사를 드리는데, 제사 드리는 그 인간이 죽더란 말이지요. 죽는 이유가 뭔가? 죄 때문에 죽는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제사장들이 제사 지낼 때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속죄제부터 드리고 그 후에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면 이 자체가 하나님의 제사법의 완성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죠. 왜냐? 제사장이 메시야가 아니니까.

자기는 맞다고 하지만 늙어 죽고, 병들어 죽는 것을 보니까 결국은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 말씀을 이루었다 여기면서 그냥 제사를 드린 거예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라고 했지요. 그런데 제가 짧은 순간(약 2초)에 돈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내 인격이 의인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제사장은 뭔가? 제사를 지내면서, 속죄제를 드리면서 장차 오실 메시야의 피가 아니면 나도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그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맡은 일을 하면서, 또는 백수로 살면서 예수님 피가 아니면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왕 같은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는 겁니다.

에스겔에서 치밀하게 치수를 제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신 것이기에 인간들에 의해 변동될 사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의 치수를 제는 것은, 이것은 영원한 성전인데 그것은 동쪽에서 다윗 언약에 준해서 왕이 오십니다. 이름은 다윗인데 내막은 여호와. 여호와께서 다윗 왕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로마서 1장 3절에서는 이것을 ‘다윗의 혈통으로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다.’

사도바울이 이 이야기할 때, 에스겔 40, 41, 42장에서 왕이 동쪽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을 그대로 로마서에 집어넣었어요. 그러면 정말 예수님 하시는 일이 무턱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내가 집에서 가정 제단 쌓는 것이 아무 소용없지요? 집에서 제사 지내는 것도 의미 없지요? 왜냐? 두 번 다시 내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도에 내가 참여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어떤 일에 참여해도 그것이 내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를 내세요. 꾹 참는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와 연관 짓지 아니하면 그 자체가 영광이 안 되고, 십자가와 연관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 그것이 주님 십자가 피를 위한 일이라면 그게 영광이 돼요.

그러면 무조건 십자가를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남에게 사기치고, 괴롭히고 해도 주님께 영광됩니까? 그것은 스스로 십자가를 위한 것이라고 거짓말 한 것입니다.

새 성전에 성소와 지성소가 있지요? 여기 아직 예수님이 등장 안했지요? 새 성전 설계도는 장차 오실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신다는 이야기지 동시에 왕이 오지는 않잖아요. 왕은 언제 오십니까? 에스겔 예언이 있는 지 500년 후에 예수님 오셨어요. 그러면 이 성전 장치는 결국 예수님이 합류해서 이룰 일이지요.

성전에서 양이나 소의 피를 바를 때 그것이 예수님 피는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신 어린양이지만 예수님 피가 양이나 소의 피는 아니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숨어 있는 거지요. 우리가 성전을 봤잖아요. 우리는 여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언약에서부터 들어가니까.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주님, 이것은 피와 관련되어 있기에 죄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 영광을 위해 한 것이기에 죄가 아닙니다.” 라고 이야기해도 진짜 완성의 피는 우리의 일에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열심히 했는데 뭔가 일이 꼬이고 뜻대로 안 되잖아요. 마치 제사장이 실컷 제사를 드리고 집에 왔는데 아이가 아프다든지 할 때, 자연적으로 불평이 나오지요. 분명히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했는데 가정의 우환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제사장들이 제사 지내면서 심지어 자기 죄를 위해 속죄제까지 드리면서 한 행위의 완성은 드리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속죄제 드리니까 속제가 완성됩니다.’ 이럴 수는 없단 말이지요. 내가 지금 신약시대에 교사를 하면서 주의 일을 하지만 이것이 완성은 아니에요. 피는 숨어 있습니다. 어떻게? 나의 모든 행위가 주께만 범죄한 것으로 부각시키면서 그 순간 피가 등장하면서 ‘아, 나는 구원 받았잖아. 새삼스럽게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지?’ “내가 주의 복음을 위해 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귀여워해 주시겠지요?” 이런 생각을 왜 했느냔 말이지요.

‘주님의 피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주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자기의식을 떨어버릴 수가 없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우리가 육신에 있는 이상은 육적 풍성함과 섞여서 나올 수밖에 없어요. 피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치 피를 소유해서 구원 받은 것처럼 여길 때 그것이 죄로 드러나게 하시는 그 지평선 너머에 주께서 십자가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냥 쓴 웃음만 짓지요. “안개 같은 인간이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었지? 이미 구원 받았잖아.” 구원 받았으면 범사에 감사하면 될 텐데 “주여, 이것이 주의 일입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까?” 이런 것은 왜 따집니까? 따졌다고 후회하며 돌아서는 순간 또 따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늘 따지는 것이 육신의 모습이고, 그것 때문에 주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 이러한 새언약적인 차원이 성전의 완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을 보니까 참 좋은 세상인데 늘 불만에 가득한 내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솟아난 것입니까?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릴 피를 생각하면서 이미 성전 안에, 그리스도 몸 안에 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7. 25. 09:0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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