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강-창 10장 15-20절(가나안족속)1608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0장 15-20절입니다. 구약성경 12페이지입니다.
창 10:15-20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가나안의 지경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이었더라.”
성경에 보면 땅이 지명과 이와 결부된 거기 살았던 종족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우리가 아는 성경에서의 복음이라는 것은 지명 알고 또 종족을 안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복음이지요. 사도들이 그것을 증거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땅의 어떤 지명을 보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필히 알아야 할 것은, 땅의 종족과 지명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를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일단 그렇게 연결되면 참 쉽지요. 쉽게 말해서 땅의 지명, 지묘동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관계는?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대구시 수성구 파동과 예수님의 부활의 관계를 논하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게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그냥 살던 동네인데. 힌트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이들이 함의 족속이라는데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족속이 11가지 나와요. 11가지가 나오는 족속을 하나로 묶어버려요. 함의 족속이다. 함의 족속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렇게 보면 되겠지요. 함의 족속이 누구냐, 무엇이냐 하는 것은, 함의 족속 말고 다른 족속의 자리가 무엇이며 그들의 위치가 무엇인가를 대조하고 비교하면 되겠지요.
지묘동에 내가 살고 있다. 이것하고 복음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지묘동에 내가 살든 누가 살든 이걸 한데 묶는 겁니다. 묶어버리면 아담의 족속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의 족속이 무엇이며, 그 아담의 족속이라고 부르는 의미는 뭐냐? 아담의 족속에 섞여 오시면서도 기존의 육적인 아담의 족속이 아닌 분과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되는 가운데서 복음의 윤곽이 드러나는 겁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을 어떻게 끄집어내는가? 집단 추수할 때 묶는 것처럼 묶어줘야 돼요. 개인으로 하면 안 되는 겁니다. 묶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함의 노선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에 보면, 이 함의 노선 말고 다른 노선이 있습니다. 셈의 노선이 있습니다. 야벳도 노선이 있고요. 셈과 야벳의 노선과 달리 함과 가나안 족속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묶어 놓고는, 여자들 머리 묶듯이 묶어 놓고는, 그렇게 집단화시켜놓고는 일방적으로 그들의 운명과 미래를 결정지은 선포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들은 저주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민족은? 대조적으로 셈과 야벳은 축복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성경에만 나와 있어요. 일상적으로 동네에서 이웃과 함께 살다보면, ‘당신은 저주받은 사람, 나는 복 받은 사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거든요. 그냥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 겁니다.
지난 화요일 오후에 대전의 두 번째 강의 제목이 ‘시장과 포도원’이었습니다. 시장이라는 것은 집단적이 아니에요. 개인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이 시장바닥에서 내가 가치를 지녀서 나를 채택할 수 있도록, 나를 써먹을 수 있도록, 남들이 원하는 가치 있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지. 그걸 안고 죽치고 있으면 “당신을 쓰겠습니다.” 그래서 데려가게 되면 거기서 돈이 생기고 그 돈 가지고 어디서든 한평생 먹고 사는 거예요.
현실에 대해서 알려면 시장원리만 알면 그게 곧 현실이에요. 각자 역량과 능력을 함유하고 있고 남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그 사이에서 돈이 생겨서 그 돈 가지고 살아가는 그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그게 전부지요. 그러면 나만 점포처럼 죽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옆에서도 개인적으로 자기의 역량과 기능을 가지고 소비자를 찾잖아요. 그러니 거기서 경쟁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사는 것이 힘든 이유가 전부 다 경쟁 때문입니다. 경쟁 없으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요. 현실이 뭐냐? 딱 시장 바닥이다. 시장통이다. 그런데 왜 살기 힘든가? 경쟁 때문이다. 경쟁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스트레스 받아요. 왜냐하면, 내가 차고 나오려고 하는데 방해하는 요소가 많기 때문에 제키면서 내가 잘났다고 해야 되니 매사가 전부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나만 최고고 나만 돛대인데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서 따라붙으려고 하니 얼마나 힘듭니까?
애들 공부하는 것, 노력하는 이 전부가 경쟁이잖아요. 그래서 현실에 대해서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왜 현실에서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한 문장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남에게 사기를 쳤는데 그 사기에 안 걸려들어서 화가 나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시장이기 때문에 과도하게 사기 치지 않으면 내가 뽑히지를 않아요. 내 물건을 사지를 않습니다.
눈만 뜨면 저걸 어떻게 꾀어서 사기를 쳐서 저 사람의 돈을 내 것으로 만드는가? 거기에 몰두하다 보니 이게 걸려들면 좀 나은데 잘 안 걸려드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또 타인한테 화가 나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요. 경쟁 없는 곳이 없어서 교회도 경쟁이 되고 말았어요.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해요.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택시 운전사가 심심하니 이야기를 걸잖아요. 자기는 교회 다닌다는 거예요. 전도한답시고 뒤에 있는 아줌마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교회에서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교회 다닌다는 거예요. 십일조를 한다는 겁니다. 기존교회에서 십일조 한다는 그것은 최고신앙 아닙니까? 뒤에 앉아있는 사람은 약간 성질이 좀 있는 분이라서 이야기를 했지요. 길게도 아니고 짧게 했어요. “아저씨, 지옥 갑니다.”
그 이야기할 때가 도착지점에 다 왔을 즈음이에요. 미터기에 5천원이 나왔습니다. 뒤에 탔던 손님이 만 원짜리 내 주니까 5천원 돌려주고, 벌벌 떨면서 5천원 마저 집어던지면서 나가라고 한 거예요. 공짜로 타고 왔다는 거예요. 그 뒤에 탄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지요? 내가 믿음이 좋은데 왜 안 알아주느냐 그 말이에요. 교회가 시장바닥이에요. 자기가치, 자기의, 로마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이 지적하는 자기의, 이거 돋보이는 것.
이 세상에서 저주받은 사람들이……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할게요. 함의 족속이 공포를 유발해요. 어떻게 공포를 유발하는가? 성경 읽어본 사람은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언약세우고 난 뒤에 하나님께 약속을 받아요. 가나안 땅 열 족속을 내가 주시하고 있는데 지금은 네가 점령할 필요 없고 너의 자손이 애굽에 갔다가 아브라함이 현재 살고 있는 땅의 열 족속을 하나님께서 지배한다는 거예요.
거기에 나오는 열 족속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족속입니다. 그럼 우리 생각에는, 함의 자손이나 셈의 자손이나 섞여서 사이좋게 지내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게 설교에서 어려운 대목으로 접어드는 거예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복음 이야기하다가,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이냐, 예수도 하나님이냐, 그 문제가 나왔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님께서, “예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했는데 그 답변이 썩 만족스러운지 느낌이 오잖아요.
저쪽에서의 질문이 뭐냐? 예수님도 성부하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이냐, 아니면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격이 떨어지는 하나님인가? 안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양쪽 다 갖고 있는 것인가의 그런 문제를 논쟁했던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답변했습니다. 인간은 신이 없어요. 인간자체가 신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왜 살아가지? 신이 있으니까 내가 있겠지.’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용도로서 신을 거기에 걸쳐놓은 거예요. 알라가 되었든 여호와가 되었든지 간에 그런 신 자체가 없어요. 힌두교라면 거기에 신이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 신자체가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뭔가 설정해 둬야 할 그런 신이에요. 성경에서는 아예 인간은 신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경우는 하나님 쪽에서 언약을 가지고 찾아오는 경우에 하나님을 알지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몰라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는 한 결국 이스라엘은 인간들에 맞는 바알종교를 섬겨야 되는데 그 바알종교를 섬기는 집단이 뭐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족속입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충돌 없이는 신은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냐, 예수님이 하나님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알고 있던 하나님과 어떤 충돌을 발생시켰는가, 그 충돌 없는 하나님, 충돌 없는 현장에서는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서 후차적으로 그냥 하나의 구색 맞추기를 한 거예요. 냉면전문집에서 냉면이 잘 안 팔리니까 비빔밥도 끼워 팔듯이 그 비빔밥이 신이고 삼위일체고 주 메뉴인 냉면은 본인이 냉면이에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신을 설정해놓고 자기가 만든 신이기에 오죽 잘 믿겠어요? 믿습니다, 믿씁니다, 하는 것은 자기가 만들었기에 그렇게 잘 믿어요.
세상에 있는 개는 다 미워도 자기 개는 안 밉거든요. 자기가 반려신을 만들어놨는데요. 반려신, 신종언어입니다마는, 반려개처럼 반려신을 하나 해놓고 도꾸, 도꾸, 하듯이 신을 자기 맘대로 갖고 노니 오죽 잘 믿겠어요? 그러나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고 난 뒤에는, 너희 중에 내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여호와가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뭐가 추가되었든 그런 것은 전부 다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구약에서 우상의 본질은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사야에 나와요. 없는데 왜 있는가? 네가 있거든요, 네가. 너 자신이 ‘나는 죽어서 좋은데 가야지.’ 그래서 만든 신이 자기가 만든 반려신이 되는 겁니다. 반려신이 적당하네요. 성경을 줘도 몰라요. 성경해석은 예수님만 할 수 있고, 그 예수님의 영인 성령만이 할 수 있지, 인간들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천 독 만 독을 해봐야 결국 돌아오는 것은, 역시 나는 잘났다는 것밖에 안돌아오는데 그게 무슨 하나님이에요. 거기에 무슨 충돌이 있습니까?
그 논쟁하던 분들이 교회에서 배운 것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삼위일체를 배웠던 모양입니다. 존재하는 것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신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런 식으로 집사님에게 물었는데 뭐가 빠졌는가 하면, 십자가가 빠졌어요. 십자가라는 충돌이 빠져버린 거예요. 십자가 없이 ‘예수님이 하나님이다. 믿자.’ 그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복음 전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그게 복음일까요? 아니에요. 어떤 특정한 사람을 신으로 간주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역사 속에 다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 구원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는 ‘어떤 위대한 분이 신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의 주장처럼 ‘예수는 천사 중에서 제일 높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십자가입니다. 오늘 땅의 함의 자손을 묶어야 된다는 말은, 그 함의 자손과 뒤에 나오는 셈의 자손과의 십자가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함의 자손에 없는 것이 셈의 자손에 얹혀요. 하나의 화물기차에 싣듯이 거기에 실어놓습니다. 그렇게 실리는 것이 뭐냐? 셈의 자손가운데 아브라함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이 그쪽에 실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실리게 되면 그 언약은 장차 올 예수님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 언약자체가 함의 족속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고 더 나아가서 셈의 자손 내부에서도 균열을 일으킬 정도로 깨어지는 겁니다. 창세기 15장 끝에 보면, 아브라함이 깊이 잠든 중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네 자손이 이방인의 객이 되었다가 4대만에 올라와서 네가 있는 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하늘의 별 같은 민족의 약속의 땅이 될 것이라고 해줬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지금은 그렇게 안 되는 이유가 아직까지 거기 있는 가나안 열 족속의 죄가 무르익지 않아서, 성숙되지 않아서 그래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저쪽을 재판하고, 심판하고, 경찰기능으로서 그들을 처치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설교한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언약은 뭐냐? 전쟁하는 하나님, 싸움질 하는 하나님, 그냥 좋게 넘어가지 않는 하나님, 치열하게 저쪽을 공격해서 저들로 하여금 기어이 저주의 티를 내게 하고야 마는 기능이 계속 나오는 하나님이 셈의 노선에 실려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은 뭐냐?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도가, 저보고도 그런 질문 많이 하지만, 예수 믿고 성도가 되었으면 할 일이 뭡니까? 저에게 그런 것을 묻지요. 뭘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싸우게 하실 겁니다. 뭘 근거로 싸운다는 말입니까? 당신이 잘난 것, 의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언약 가지고, 복음 가지고, 언약의 완성이 새언약이고 새언약의 완성이 십자가복음이니까 십자가복음 가지고 싸울 겁니다.
십자가 복음 가지고 싸우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이 십자가 복음 안으로 못 들어오는 패배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게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못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존재이유는, 언약의 사람, 언약맨의 기능을 계속 하나님께서 하도록 하나님께서 성도 하게 하신 겁니다. 그 언약사람의 모델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했잖아요. 성도에게도 성령이 임하는데 단지 구원이 목적이라서 성령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어떻게 언약을 증거합니까? 그 모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모델이 되어서 보여주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 3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이 세대에서 당신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증거를 보여달라, 당신이 메시아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싸우는 중이에요. 이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사고방식과 행동거지가 뭔가 자신들과 틀리다는 것을 알아요. 틀린 것을 가지고 레위기에서는 분리되었다, 분리되었다는 것을 두자로 거룩이라고 합니다. 뭔가 달라요. 소속이 달라요. 소속이 다르면 그 소속의 본질은 그 소속에 속한 사람의 행동과 말과 태도를 통해서 그 소속되어 있는 영역의 본질이 바깥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함의 자손은 우리 보기에는 그냥 함땅에서 살던 평범한 거주민이지요. 하지만 이 거주민이 열왕기상 18, 9장에 보게 되면, 그 함의 자손의 땅에서 뭐가 범람하는가 하면, 바알이라는 종교가 범람해요. 창세기 10장에서는 바알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아요. 하지만 이것이 무르익어요. 숙성해야 됩니다. 옛날 제가 어릴 때 할머니가 막걸리를 담갔는데 단지를 열어서 막걸 리가 숙성된 것을 보면 마치 유황온천처럼 보글보글 막 올라와요.
그러면 위엣 것은 걷어내고 맛을 보고, 잘 됐다, 해서 먼저 할아버지께 드려요. 할아버지가 막걸리를 즐겨 드시다가 60대에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 좋다는 막걸리 실컷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마신 거예요. 스트레스 왜 받는다고 했지요? 자기 속임수에 남이 안 속아 넘어가니 화가 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게 굉장히 자연스러워요. 그 자연스러움이 바로 함의 족속이 만들어낸 바알종교입니다.
교회에서 바알종교라고 하니 그것은 우상이라고 하는데 참 그게 정말 답답한 노릇입니다. 바알종교에서 바알을 빼버리세요. 그러면 남는 것은 뭐냐? 그냥 종교에요. 종교의 내막이 뭐냐? 땅에서 시작해서 땅의 복을 주는 것을 끝나는 그것이 바알종교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요. 바알종교는 인간을 굉장히 연약하게 봐요. 인간이 연약하니 강자는 신이거든요.
인간이 왜 연약한가? 세상만사가 자기 맘대로 안 되니까 연약한 거지요. 오늘 본문자체가 그거예요. 땅은 그냥 대자연이 아닙니다. 땅 자체가 괴물이 돼요. 땅 자체가 괴물적인 어떤 모습을 보이는데 지금 창세기 10장 이 본문에서는 안 나타나지만 그 함의 땅이 점점 무르익으면 거기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바알 종교가 나와요. 거기서 바알을 떼라고 했지요. 그러면 그냥 종교에요. 종교가 뭐냐? 이것은 나를 위해서 믿는 종교가 그냥 바알종교에요.
정말 제가 지금 나름대로 제일 쉽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 잘되기 위해서 믿는 종교가 바알종교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시를 주기 전까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나라를 만들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를, 뜻을 전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이 없을 경우에는 그것이 종교고 전부에요. 아무 문제없어요. 신을 왜 믿는가? 나 좋으라고. 나의 가정 잘되라고.
그렇잖아요. 여기에 누가 토를 달고 누가 이의를 답니까? “교회 왜 오셨습니까?” “나 잘되기 위해서 왔습니다. 나 천당 가고 우리 가족 복 받고.” 그게 바알종교라니까요. 뭐가 없을 때? 하나님의 언약이 없을 때. 뭐가 없을 때?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가 없을 때.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가 없을 때, 십자가의 소리가 안 들릴 때 그게 바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바알종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수가 많을 수밖에 없지요. 교인수가 더 많아야 돼요. 왜 그것밖에 안되는가? 바빠서 교회 못가요. 교회가 자금력을 동원해서 많은 사람을 모아야 해요. 점심을 공짜로 안줘서 그런 거예요. 점심 공짜로 주면 다 오게 되어 있어요. 어차피 교회 예배당 세우고, 교회 투자하고, 지분 얻고, 땅 바치고, 뭔가 바치는 것은 다 그 업보가 쌓이면 극락에 가는 거예요.
업보가 쌓이면 극락에 간다는 것은 불교용어잖아요. 불교라니까요. 그게 바알종교에요. 불교, 바알종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 문제없어, 그겁니다. 지금 내가 약해서 문제에요. 힘이 없어서 문제고 이 시장바닥에서 출세 못해서 문제지요. 출세할 가치가 너무나 많은데 부처가 안 도와주고 하나님이 안 도와줘서 출세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출세해야 되고, 내가 천국가야 된다는 그 나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를 스스로 밝혀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나는 날 때부터 잘났으니까. 나는 잘났다. 시작! 그게 바알종교라니까요. 참 쉽지요. 너무나 쉽지요. “그러면 목사님. 복음 아는 사람도 그런 마음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까?” 복음 아는 사람은……, 지금 5분도 안 지났어요.
복음 아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이 온 거예요. 한 5분 지나서 벌써 다 잊어버렸지요. 10분 지나면 다 잊어요. 바알종교는 날 위해서 오는 것이고 성령이 온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온 거예요. 예수님이 우선이고 우리는 그냥 반찬이고 우리는 스키다시라니까요. 예수님이 회라면 우린 그냥 스키다시, 그냥 곁들이는 거예요.
그런데 바알종교는 바알은 스키다시고 주인공은 나예요. 내가 사는 이 땅에 복을 주시옵소서. 그게 바알종교에요. 그러니까 이 바알종교에서는 충돌이 없어요. 충돌은 여호와 종교와 이스라엘이 등장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실어 나르는 열차가 등장하면서 거기에 비로소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려면 비극이어야 되고, 충돌이 되어야 되고, 마찰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야 내가 문제가 있고, 무슨 탈이 났는지, 어디서부터 잘못 솟아난 열매고 뿌리인지, 이것은 충돌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내 뜻대로 안돼야 돼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다섯자로 이야기하면 ‘주의 뜻대로’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는 그것이 주의 뜻대로. 매사가 내 잘남과 나의 의를 증거하라고 성도된 것이 아니고, 이 못난자도 예수님께서 잘나서 이 못난자도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아무 대가없이, 행함없이 주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거기에 모델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모델이라고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고 그 예수의 오시기 전에 셈의 족속, 그 기차는 어디를 향해 달렸는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기차로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겁니다.
달라요. 성도는 그 뜻이 거룩한 사람이거든요.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리된 사람, 달라도 뭔가 달라요. 열왕기상 18장 19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엘리야가 850대 1의 싸움을 해요. 처음에 엘리야가 등장할 때 18장 17절에 보면,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느냐고 나오지요.
이것이 충돌입니다. 엘리야보고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느냐, 라고 하니까 엘리야가 하는 말이, 당신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다고 하지요.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그래서 850대 1로 붙습니다.
제단을 쌓아놓고 제물 올려놓고 제사할 때 제단위의 고기를 불태울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쪽 신에게서 오느냐를 두고 내기하는 거예요. 그쪽에서는 밤새도록 열광하고 자기 몸을 자해해가면서 광란의 파티를 열어도 불이 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엘리야는 완전히 기를 죽여 버립니다. 양동이에 물을 열두 번 길어서 온 제단을 축축하게 적셔놓으니까 이것은 성냥불로 그어도 불이 안탈 정도에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어요.
그 제단 쌓을 때 열두 개의 돌입니다. 이게 뭐냐? 집단이에요. 엘리야가 이겼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엘리야도 오해했어요. “하나님이여, 이 바알체제 안에서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여호와의 선지자란 선지자는 다 죽여 버리고 나만 남았습니다.”라고 개인을 이야기할 때 7천명을 남겨뒀다는 겁니다. 집단을 남겨두는 거예요. 개인은 바알종교가 되기에 그래요. 집단을 남겨둔 거예요. 그 집단 7천명은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7천명이에요.
정작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다음이야기입니다. 그래서 850대 1로 싸워서 불이 내려와서 이겼습니다. 이기고 난 뒤에 엘리야는 뭘 얻었습니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제가 이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알종교와의 차이점이에요. 바알종교는 기대하고 난 뒤에 뭔가 획득하는 것이 있어야 돼요. 내가 열심히 봉사하고 난 뒤에 얻어 챙긴 것이 있어야 돼요. 봉사하고 난 뒤에 뭔가 애가 성적이 오르든지 몸이 건강해졌든지 뭔가 있어야 돼요.
그런데 엘리야는 850대 1이라는 전쟁에서 멋지게 승리를 해놓고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은 땄는데 이제는 이세벨이 “잡아 죽어라.” 해서 쫓겨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굉장히 당황합니다. 이기기는 해놓고 “주님이여, 제 일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날 잡아 죽이려고 하니 제가 남은 일이 뭐가 있습니까?” 이제 도망치기 바빠요. 엘리야 잡아 죽이면 현상금 주겠다고 하니까.
지진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안계시고, 폭풍가운데도 안계십니다. 불 속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 후 세미한 소리가운데서, 침묵이지요, 침묵 속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습니다. 네 대에서는 역할이 끝났고 네 바통을 넘겨주라는 거예요. 나중에 불수레 타고 올라가지만. 바통을 넘겨주는데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메섹, 지금의 시리아지요.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그러고 난 뒤에 내가 바알을 추종하는 이것들을 아람나라에 당하고 남는 사람은 예후에게 당하고 예후에게 당하고 남는 사람은 엘리사에게 다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이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하게 하는 것은 기름부음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성령이지요. 기름 붓게 해서, 전쟁은 내가 하고 너는 이 전쟁하는데 그냥 집단적인 열매로서 증거하면 되는 거예요. 성도가 뭘 해야 됩니까? 우리 주님이 다 이루었다, 이 세상 끝났다는 이야기를 하면 돼요. 지난 오후설교 때 했지만 끝에는 그 끝을 증명하는 일만 끝에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더 이상 내 인생에 대해서 더 이상 걱정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끝 날에, 끝물에, 마지막 끝에 나타나야 할 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등장, 성도의 등장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내가 이 땅,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날씨도 더운데 여기서 성공하고말고, 그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에요. 자칫하면 바알종교로 빠져버려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나 잘됐다, 우리가정 잘 풀렸다, 이것은 바알종교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남은 칠천 명은 집단적이에요. 남은 칠천 명은 자기자랑 하면 안돼요. 자랑할 개인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잘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웃습니다. “네 꼴 보니 뭐가 잘되었는데?” “네가 보기에 내가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지? 그러나 너희는 모르는 것이 있어.”
미련하고 어리석음으로 칭칭 감읍시다. 그래서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한, 천국 가는 백성으로서 지금도 모든 것이 완료된, 확정난, 이미 금메달 손에 쥐고 살아가는 것처럼, 이미 천국의 생명을 쥐고, 이 땅이라는 것이 얼마나 죄가 무르익었는지를, 얼마나 종교라는 것이 우상인 것을 마음껏 증거하는 그 즐거움이 처서를 지나 이번 가을에도 계속 되기를 바랍니다. To be continued!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개인으로 시작하지 않게 하옵소서. 개인은 오직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하고 우리는 그 분 덕분에 오늘 밤에 죽더라도 낙원에 갈 수 있는 거룩한 성도된 것을 마음껏 자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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