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바벨탑(창11;1-5) 16092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30. 07:04
2016-09-28 20:34:09조회 : 46         
   바벨탑 160928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바벨탑(창세기 11:1-5)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R4qLnxv0USA, Hit:3
 이근호16-09-28 21:23 
바벨탑 

2016년 9월 28일                     본문 말씀: 창세기 11:1-5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11: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인간들이 하나였던 시절이 있다는 점이 오늘날 사람들에 입장에서는 상당히 신기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각자 개성들에 의해서 살아가는 시절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모두 다 다같은 정신의 소유자로 봅니다. 그 이유는 모두 동일한 육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육신이란 인간들의 정신으로 온전히 통제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 진면목을 드러내는데 방해받지 않습니다. 인간의 육신은 목적하는 바가 있습니다. 동일한 육신들이라서 동일한 정신 안으로 의견일치를 보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가치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겁니다

왜 인간들은 하늘을 추구할까요? 그것은 땅의 삶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궁색하고 육체의 욕구를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이란 육체를 근거로 해서 발생되는 겁니다. 육신이 불편하면 정신도 힘들게 되면서 정신은 육신이 편해지는 방향으로 상상하게 되고 그 상상히 집결된 행동을 보이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의사통합의 여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당신 인류가 하나(1)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개개인으로 따로 다룰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전체 중의 일부를 발췌해서 조사하게 되면 이는 곧 전체의 성질을 반영하는 표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바벨탑 건립에 동조하면서 나섰다는 것은 모든 인간의 운명을 일괄해서 처리해도 인간들은 할 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 개인 한 개인이 곧 전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전체로 하나로 움직였습니다. 바벨탑 쌓은데 있어 의견 일치를 보았다는 말은 모두다 같은 성질의 집합으로 하나로 묶어도 무방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이들 인간군집을 하나로 보신다는 말은 그런 인류의 정신과 정반대되는 정신자로서 한 사람만 내세워도 하나님의 일에 조금도 지장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1과 1이 대결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을 추구하여 바벨탑을 쌓을 때, 정작 하나님의 생각해놓으신 세상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과 사람의 뜻이 충돌하는 그 지점을 통해서 나오게 됩니다. 

즉 충돌없이는 천국도 없는 겁니다. 부딪힘과 그리고 그로 인해 깨어짐이 없이는 그 어디에는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곧 깨어짐과 갈라짐의 현장에서만 낯설게 드러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집단이 단체로 하늘을 추구하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방향이 인간들이 추구하는 생각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최종적인 뜻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마주치는 그 경험은 인류의 역사 내내 잠재 되어있는 영적 체험으로 작용합니다. 인간들이 만나고자 하는 그 하늘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십니다. 그 시대의 고정된 지역에서 성취시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들 인간들은 뭉개는 그 충돌성을 가지고 지구 전 지역으로 확대시키므로서 마지막날에 기어이 ‘낮아지신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일이라는 것은 곧 악마의 일이 됩니다.(마태복음 16:23 “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인간들의 수가 아무리 많을 지라도 그 통합한 마음은 한결같이 저 하늘나라를 사모합니다. 

이는 곧 인류의 모든 역사 평지가 이미 그 속에 종교적인 의욕과 구원 의지가 충만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국가와 국가가 나뉘어지고 민족이 민족과 구분된다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저지당한 그 하늘로 가고자 하는 의욕은 한결같고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모든 종교를 의심해야 합니다. 

인간의 육신 속에서 인간이 통제 못할 욕망이 있는데 이 욕망이 정신구조에 있어 감당못할 핵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즉 ‘모든 것을 잃더라도 이것만큼은 잃어서는 결코 아니된다’는 양식으로 사람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게 있어야 자신이 진정 자기답다는 겁니다. 이러한 확고히 다지는 자아중심성으로 인해 세상 현실은 각자 자신 중심성으로 구성됩니다. 

그 통합되고 공통적인 의식이 종교로서 발현됩니다. “신이시여 날 기쁘게 하고 날 즐겁게 해주소”고 요구를 하게 됩니다. 종교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육신적으로 해결 못한 것을 정신적인 자기 집중성을 통해서 달성하려 합니다. 그러나 역사가 이런 종교성은 역사의 평지에서 쉴새없이 벌어지는 실제 전쟁을 통해서 그 성격들이 얼마나 일방적인 자기 주장인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평지가 항상 동일한 성격으로 하나님에게 대들었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메시야께서 오실 때까지 적용시킵니다. 민족과 민족의 전쟁에서도 영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류의 역사란 아무리 앞으로 발달해도 고정된 엎어진 바벨탑입니다. 각 민족들은 자신들이 보여줄 저항선을 지킵니다. 

저항선이란 인간들이 진정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양보할 타협점을 말해줍니다. 즉 아무리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전부를 가져갈 권리는 없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이것을 종교제도로 구체화 시켜놓았습니다. 열심히 체계 있는 종교활동을 통해서, 이 자체를 신께서 받아주시기를 원하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뜻은 확고하십니다. 모든 종교적 요구를 거절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이름은 스스로 자신됨을 지키려고 하면서 그 성격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지킬 것은 인간에게 아무 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괴물인 것을 모릅니다. 

자기 중심으로 이해한 현실막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단호하게 찢어져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실은 지키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모두 죄인입니다. 죄인이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전적 죄인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저항과 반발을 보이는 태도입니다. 

사랑이란 간격이 없고 거리가 없고 하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한 용도로 괴물같은 인간이 하나가 됩니다. 인간은 십자가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위하여 구원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괴물됨을 모르는 소경으로 살아온 것을 자백하게 하옵소서. 더 이상 지킬 것이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09-29 14:21 
55강-창 11장 1-5절(바벨탑)1609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1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13페이지입니다. 

  

창 11:1-5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가운데서 인간들이 하는 일들이 어떤 식으로 삐져나오는지, 인간들에게서 삐져나오는 그 행위와,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결국 만들어지는 것은 천국, 주의 나라라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주의 나라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기 때문에 그냥 펑, 하는 식으로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요술쟁이가 천국 만들듯이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인간의 범죄가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하고, 범죄를 유발하면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그것은 빛이라 하는 것은 어두움을 수반하게 되어 있고 어두움을 함께 드러내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 인간들이 바벨탑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그것을 만들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하기 전부터 그런 탑을 만들자는 생각을 안 나게 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세, 본성, 저질적인 성질, 그것을 그대로 노출시켜 놓고 그리고 노출시킨 그것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하나님 자기 자신의 실재를 드러내시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사전에 무슨 조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갖고 있던 범죄를 기다리고 있어요. 마음껏 발휘해라. 네 속성을 드러내라. 네 속성을 드러내고 거기에 마주치도록 다가서면서 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상상도 못했던 새로운 나라, 천국, 영생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는 것은 영생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구원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닿게 하는 것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본성, 속성을 말해주는 겁니다. 저 하늘에 천국에 있다고 그들은 오해한 겁니다. 잘못 생각한 겁니다. 저 하늘에, 하나님에게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천국이라는 것은 죄있는 인간들과의 마주침 속에서 없던 곳에서 새롭게 마주침이라는 사태가 일어나야 비로소 발견되는 그곳,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과는 전혀 다른 천국을 하나님께서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벨탑 이야기가 11장에 나와 있는 것은 근본적인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언급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1절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말, 언어가 하나라는 말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로 뭉쳐서 설치고 행동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 대해서 말할 때는 하나로 이야기하면 인간 전부를 말할 수 있다고 되는 겁니다. 인간전체를 하나로 퉁쳐서 말하면 무엇이 되겠느냐,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하나라는 말은, 인간이 서로 소통된다, 언어로 서로 통한다는 뜻이고, 통한다는 것은 마음이 통한다는 뜻이지요. 마음이 통하니까 인간의 숫자가 아무리 늘어나고 팽창해도 그 마음가짐은 둘이 아니고 셋도 아니고 여전히 하나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통합하면 한 마음으로 뭉쳐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자들이 인간집단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개별적인 구원이 아니라 인간을 통째로 상대해서 하나님의 천국은 만들어지는데, 그 통째로 상대한 인간과 하나님의 마주침을 통해서 천국이 만들어집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중요한 결론이 있습니다. 개개인마다 따로따로 행위를 가지고 너 천국가라, 혹은 지옥가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머리 좋은 사람은 벌써 탁 감이 오지요. 어떤 인간의 마음이라도 동일한 마음이라면 새삼스럽게 “너 와 천국 가. 너 와 지옥 가.” 일일이 심사할 필요가 없어요. 전부 다 하나로, 통으로 지옥가면 그것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판결에는 하자가 없어요. 저 인간이나 이 인간이나, 이 민족이나 저 민족이나, 필리핀이나 아프리카나 어느 민족이든 간에 똑같은 마음으로 뭉쳐 있고 다져져 있는 민족이기에 나라가 둘이 되든지 셋이 되든지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의 제국이 되지만, 나라가 이백 몇 개가 되든지 어떻게 되든지, 그 중에 표본으로 하나를 끄집어내서 “어? 이거 지옥가야 되네.”라고 이야기한다면 나머지는 보나마나 다 지옥가야 되는 민족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아주 일처리를 편리하게 하십니다. 전체를 다 검사할 필요가 없어요. 일부를 검사하면 전부의 속성이 거기에 담겨 나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개인이 열심히 해서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에 누가 천국 간다면 그것은 인류전체를 통합해서 갖고 있는 그 마음가짐과 다른 마음가짐을 가진 자만이 천국 갑니다. 인류전체를 통합해서. 모든 인류는 동일한 마음이니까. 

  

그 동일한 마음과 같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더 구체적으로 그 동일한 마음 쪽에서 핍박을 받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면 그 분이 바로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천국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 속에 섞이는 겁니다. 인간에게 섞이면서도 전체 인간과 전혀 차이나는 본성을 드러내지요. 이 본성을 드러내면서 전체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야 된다는 원칙을 벌써 창세기 11장부터 우리 하나님은 실시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성경을 이렇게 보면 아주 깔끔하게, 군더더기 없이, 상쾌하게, 투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과 그 외 전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더 이상 군더더기를 말할 필요도 없어요. “바벨탑을 보라. 그들은 한 마음이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라마다 성격이 다르고 민족마다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바벨탑을 위해서 뭉개버리면 이게 뭐가 되는가? 역사의 평지가 돼버려요. 

  

바벨탑의 의미는 인간을 영적으로 다뤘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았구나. 수고가 많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뭐로 보는가 하면, 인간의 이름이 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바가 바로 바벨탑이고 그 바벨탑에는 언어가 하나기에 정신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 통합된 정신과 하나님의 정신과 마주쳤던, 접촉했던 체험을 바벨탑사건으로 담아서 이것, 하나님의 접촉했던 그 기억과 체험으로 역사라는 평지를 만들어버렸어요. 

  

인간의 역사가 퍼져나가는데 퍼져나가는 모든 계기들이 “우리는 하나님과 만난 적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접촉했었어. 하나님께 우리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었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좋지 않는 존재로서 이미 평가 났었어.”라는 체험들의 확대가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게 문화가 되고 문명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역사라는 것은 뭐냐? 이미 영적의미를 함유하고 있습니다. 포함하고 있어요. 역사를 역사로만 보지 말고 역사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췌해야 될 안목이 필요합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과 땀과 슬기와 그리고 집결력, 단결력에 의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렸다.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역사는 그 안에 영적인 요소가 담겨 있어요. 그 영적인 요소는 이미 결론이 나 있습니다. 

  

까불다가 깨졌다. 이런 영적인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시도와 노력과 우리의 통합된 의견을 인정치 아니하더라, 라는 체험들을 가슴에 품고 이 지구 끝까지 온전히 다 덮습니다. 후라이팬에 계란을 까 넣고 흔들면 프라이팬 전체에 계란이 쫙 퍼지지요. 그걸 볶음밥 위에 올려놓고 케첩 뿌려서 맛있게 먹지요. 

  

프라이팬이 지구라면 그 전체를 뭐로 덮느냐 하면, 엎어진 바벨탑으로 도배를 시키는 겁니다. 무너진 벽돌 조각조각들이 온 지구를 덮는 그날, 인간들은 원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닿게 하자. 하나님은 말합니다. “그래, 너희 소원대로 닿게 할게.” 닿게 하는데 곧추세워서 하늘에 닿는 것이 아니고 인류의 역사가 온천지에 퍼지고 또 퍼지고 계속 퍼져서 마지막 때에는 누굴 만나는가? 이 땅을 직접 방문한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나는 지점이 비극이에요. 십자가죽음이라는 비극의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인류의 역사는 방향이 있어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과 하나님을 적대적 관계로서 만나게 하는 조치로서 인간이 바벨탑 쌓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전략입니다. 인간을 죄졌다고 해서 그냥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아니고 충실하게 그 쓰레기의 속성을 그대로 활용해서 이 지상에 하나님의 천국을 이루는 밑거름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주님 보시기에는 그 전부가 어느 지점이든 보글보글, 영국에서나, 남아프리카에서나, 알래스카에서나, 보글보글 올라오는 그 모든 속성들은, “우리는 기어이 우리 이름을 하늘에까지 닿게 해야 해. 비록 저지해도 우리는 계속 닿게 해야 돼.” 라는 종교적인 욕구로서 들끓고 있는 평지가 역사라는 평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역사를 알려면 역사 속에서 번져나가는, 들불의 불꽃처럼 퍼져나가는 그 종교적인 열망을 의심해 봐야 돼요. 종교에 대해서 의심해 봐야 됩니다. 이 지구상에 퍼져 있는 모든 종교에 대해서 전부 다 의심해 봐야 되는데 그걸 딱 떼어서 십자가라는 시료에 담아서 검사해 봐야 됩니다. 

  

그것들은 뭐냐? 전부 다 자기 이름을 하늘에 닿기 위해서 하는 수작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종교는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정신에서 나왔어요. 그러면 인간의 정신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걷잡을 수 없는 육신의 욕망에서 나온 겁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과학기술이 발달했습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갑자기 허무에 빠졌습니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니까 인간은 외로워서 미치는 거예요.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그 모든 것은 인간이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설치 기준에 맞도록 그들의 동선 하나하나가 재단되고 규격화 되었습니다. 기계가 있음으로 인간마저 이제는 기계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일하는 작업 장소, 순서와 동작들, 테일러 시스템이라 해서 어떤 인간이 들어가든 그 동작만을 해줄 때 임금을 받는 산업구조가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판국에서 이제 과학이나 기술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이 뭘 연구했느냐 하면, 인간의 고귀한 인간성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찾느냐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는 기계화되어야 한다면 그 기계는 일할 때만 기계입니까? 밤에 잠을 잘 때도 기계처럼 자야 되는데? 아침에 잠을 깨면 하나의 노동자로서 산업 장으로 달려가야 됩니다. 

  

도대체 인간의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어디서도 찾을 데가 없어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라고 하면서 서울 법대 들어가서 검사가 되고 나니 검사의 책상에는 밤 11시까지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잔뜩 쌓여 있습니다. 도대체 죄인에게 형량을 부여하는 기계가 되고 말았어요. 그 똑똑한 검사가 이건 사람이 아니므니다. 기계가 되고 만 겁니다. 

  

모든 각자의 분야에서 인간은 인간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완전히 기계입니다. 보다 기계답지 않으면 그 자리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서 언제든지 퇴출당합니다. 보다 기계답게.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기계, 더욱더 기계답게. 인간의 인간성이나 도덕이나 양심이라는 것은 전혀 챙기지 말 것을 작업장에서 요구받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고유한 정신을 찾을 길이 없어요. 도대체 인간의 정신은 기계 밑에 함몰되고 말았어요. <모던타임즈>라는 찰리채플린의 영화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톱니바퀴에 끼어서 기계의 일부가 되고 말았어요. 기계의 부속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사회에 나왔다. 사회에 나오면 “이 기계 속으로 들어와. 부속품으로 이 기계에 들어와.” 

  

그 많은 돈을 주는 기계 되기는 경쟁도 세요. 대기업은 아예 입사시험이 고시처럼 되어서 비율이 백 대 일, 오백 대 일이 넘어요. 공무원도 마찬가지고요. 서로 못 들어가서 난리에요. “보다 제가 더욱더 기계답습니다.” 서로 손 들판이에요. 토플 하는 기계, 컴퓨터 만지는 기계, 인간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어요. 

  

농경시대, 농사짓던 시대에는 적어도 하늘을 쳐다보면서 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신을 찾았지요. 이제는 신을 찾을 여력 하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먼 미래까지 걱정할 기운조차 없어요. 지금 당장 내일도 업무를 처리해야 되고 또 당장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해야 돼요. 어떤 대기업에 근무하는 어떤 사원은 아침 8시에 출근을 해서 컴퓨터 켜고 메일을 열게 되면 지시 메일이 백 개가 넘는 것들이 죽 올라와 있답니다. 

  

당장 해야 될 지시메일이 죽 올라와 있어요. 아침부터 해야 될 업무가 메일로 주어져요. 은행에만 가보세요. 뽑고 줄서고 또 뽑고 줄서고, 그러면 거기 있는 행원들이 기계처럼 움직여요. 그래서 연구했습니다. 정신은 어디에 있느냐? 20세기 초반에 정신을 찾기 위해서 인간의 육체를 연구했습니다. 육체를 연구해 보니까 육체를 인간의 정신으로 통제한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정신으로 통제되지 않는 육신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두자로 욕망이라 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감당되지 못한 육체는 정신 속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정신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모든 힘든 것과 고생스러운 것들로부터 탈출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질주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그것이 현실에 대한 도피, 기피이고 그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그 종교가 여전히 바벨탑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갑니다. 평소에는 기계처럼 살아서 돈을 벌고 쉬는 날이면 기도하고 신을 찾아서, 하루 빨리 덜 고생스러운 직장으로 옮기게 해주시고, 더 많은 돈이 있어서 이제는 일하지 않더라도 여유를 즐기면서 행복하게 몸은 안락을 위해서 살도록 행운을 부어달라고 기도하는 기도의 처소와 예배의 처소를 인간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마련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바벨탑을 왜 이렇게 인간은 만들고자 하느냐? 인간이 이 땅을 사는 것이 그렇게 수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사는 것이 힘든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어떻게 하면 좋아?” 서로가 서로에게 묻는 겁니다. 왜 묻습니까? 서로의 의견을 통합해서 서로가 잘 살고 편안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 묻는 겁니다. 

  

이러한 시도, 타인이 의견이 그만큼 궁금하다는 것은 홀로 살기에 이 세상 자체가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어디로 도망을 치든지 뭘 해야 돼요. 지리산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기도원에 들어가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자살을 하든지. 그 힘든 상황을 어떻게 할까? 하늘에 올라가면 땅의 저주로부터 벗어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늘까지 올라가는데 무엇을 지키기 위함인가 하면, 내가 내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한테는 궁극적으로 지킬만한 것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우리 육신이 그걸 요구한다는 거예요. 자동적으로. 

  

그러면 내가 지킬만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결국 신을 찾지만 신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원활하게 지킬 수 있도록, 이 욕망의 달성, 만족, 행복이죠, 그 내 욕구를 만족스럽게 달성할 수 있도록 신이 좀 도와달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이것만큼은, 내가 나 답기 위해서 이것만큼은 꼭 지키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발생되는 것이 뭐냐? 세자로 저항성이라는 겁니다. 저항성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신이든 누구든 간에 이 선을 넘어오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인간에게 꼭 있어요.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이것, 이 마지노선, 이 선 무너지게 되면 나는 못 참습니다. 나는 정말 모든 것에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 자기 이름을 지키고 싶은 거기에 모든 것을 집중했고 매진했습니다. 제가 이런 긴긴 말을 하는 이유가, 종교라는 것은 뭐냐? 종교라는 것은 신을 찾는 것인데 신을 찾는 이유가 뭐냐?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 있는 것을 더욱 단단하게, 확고하게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이 바로 종교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이름, 자기 명예와 위신과 체면과 관련되어 있어요. 자기존재의미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아까 했습니다. 모든 종교를 의심하라고요. 의심해보세요. 기독교를 의심하고, 천주교를 의심하고, 불교를 의심해보세요. “신이시여! 저에게 주는 것은 좋지만 이 마지노선만큼은 깨지 마세요.”라는 것이 있어요.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메시아에게 모든 것을 드리기 위해서 원한 것이 아니고 메시아가 오게 되면 내가 지킬만한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원한 겁니다. 유대나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나라를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자기가 지키고 싶은 그것을 중심에 놓고 그 다음에 바깥세상을 현실이라는 말로 한 거예요. 현실이라는 것은 그 중앙에 내가 지킬만한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현실이라는 개념을 설립한 거예요. 

  

제가 지금 무슨 취지로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자기 이름을 내자는 그걸 포기한 적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바벨탑에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는 그 심보를 우리는 어느 하나도 포기한 적이 없고 모두 각자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저항선을 둘러치고 이것까지는 들어오지 마, 여기는 내 영역이니 타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그것이 있어요. 

  

요한복음 9장 40-4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것은 뭐냐 하면, 현실을 찢어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 네가 너 자신을 잘못 응시하고 있다는 거예요. 잘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뭔가 지킬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은 지킬만한 것이 못돼요. 왜냐하면 정신이라 하는 것은 육신에서 나왔고 그 육신에서 나온 것은 정신이 감당을 못해요. 육신에서 나온 것을 그냥 봉양하고 섬기고 숭배해야 돼요. 내 육신의 욕망을 내 정신이 시다바리짓을 해야 된다니까요. 그게 우리 정신이고 그 정신에서 현실을 생각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현실은 뭐냐? 나 잘되기 위한 것. 나 잘되는 것이 뭐냐? 내 육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현실이 있다. 그것 외에 뭐 딴게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 나오는 이유가 그거 외에 다른 것이 있겠어요? 문제는 이 육신 덩어리, 우리가 정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정신보다 먼저 있는 것이 이 육신덩어리인데 이 육신덩어리는 정신으로 통제가 안돼요. 정신이 육신을 통제할 수 없어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심지어 자식과 부모사이라도, 엄마라고 해도 내 일기장은 보는 게 아니지요. 아빠라 할지라도 나한테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자식들이 그런 소리 하잖아요. “여보! 당신이 내 남편이지만 여기까지는 침범하면 안되지. 내가 가만 안 있어.” 혹은 “아무리 목사님이지만 이런 것 까지 묻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있다니까요? 뭔가 있어요. 

  

그 뭔가 있다는 그것은, 우리가 동일한 인간들을 보고 알게 된 거예요. 그것을 찢어버려야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에 의하면 파괴되어야 될 대상이지 사수하고 보호해야 될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그 선악적요소, 선악과 따먹고 “이거 넘어오면 안 됩니다.” 하는 그 저항선을 타 넘고 와요. 예수님의 말씀이 그걸 찌릅니다. 

  

완전히 우리를 파괴시켜 놓지요.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받는다. 그것은 마귀의 주장입니다. 십자가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위하여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우리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고, 삼위일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그것은 마귀의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우리가 바벨탑을 쌓게 되었고 우리는 죄짓는 사람 된 겁니다. 내가 나의 목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의 목적이라 하는 것은 육신을 장악한 다른 악마가 우리를 몰아가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신이라고 할지라도 네가 지키는 선 안쪽으로 넘어오도록 하지 마라.” 마귀는 매일같이 우리한테 독려하고 힘주고 격려합니다. 

  

“네가 중요하지 하나님이 안중요해. 하나님보다 네가 더 중요한 거야. 너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서 네가 있다면 너는 쪼다고 바보야.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너는 너만 살고 너만 행복하면 그만이야.” 그것은 우리의 정신으로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괴물입니다. 이 이야기하려고 이 설교를 시작한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괴물인 것을 몰라요. 왜? 소경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괴물 아닌 사람이 없어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너나 나나 똑같다고요. 괴물 아닌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괴물이야.”라는 그 말에 우리가 저항선, 철조망 치지 마세요. 허물어버리세요. 쳐들어오도록 허락하세요. 

  

주님께서 저항선을 타넘고 오는 것을 우리는 반깁시다. 환영합시다. “주여, 저라는 괴물을 제가 감당을 못하겠습니다. 눈만 뜨면 나밖에 모르는 이 괴물, 주께서 좀 조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말합니다. “이제야 네가 눈이 열렸구나. 네가 너를 보는구나. 내가 너를 보는 것처럼 너도 너 자신을 보는구나.” 

  

너라는 것, 너의 자존심, 가치라는 것, 그것은 네가 만든 것이 아니고 네 속의 괴물이 만들어서 너에게 입력시킨 거예요. “너는 영웅이야. 너는 경건해. 너는 착한 사람이야. 너는 훌륭한 사람이야.”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가짜로 계속 세뇌를 주고 있었던 겁니다. 끝까지 우리는 괴물로서 살아가고 있고 그 괴물을 주께서 팽개쳐도 괜찮은데 주께서 천국을 이루는데 필요하다고 끝까지 주님의 영, 성령께서 그 괴물과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지심의 취지와 자꾸 연계를 시켜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서 괴물 같은 우리를 지금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보면서,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주님이여! 날마다 지금도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도피하여서 저 하늘로, 천국으로 달아나고자 합니다.” “왜 그런데?” “그래야 제가 좀 숨을 쉬겠습니다.” “누가 숨을 쉰다고?” “제가요, 제가.”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 나만은 달라야 된다는 욕구를 갖고 있어요.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욕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 일괄해서 다들 똑같은 괴물이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지금도 부글부글 끓으면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지옥 아닌 곳이 없어요. 사람을 믿지 마세요. 물론 믿은 적도 없습니다만, 이용만 했지 믿은 적도 없습니다만 사람을 믿지 마세요. 사람을 의지하지 마세요. 사도바울도 의지하지 말고 사도베드로도 의지하지 마세요. 

  

의지하고자 하는 것은 괴물이 괴물이 아닌 척 하는 수작에 불과합니다. 아직도 괴물 아닌 것이 뭔가 있을 거라는 마지막 지키고 싶은 것, 이것만큼은 내가 꼭 사수하고 싶은 것, 착한 나, 선악과를 따먹어 놓고, 악은 버리되 아직도 선이 있을 거라는 그 선을, 마지막 마지노선으로 갖고 있는 그 선을 자신이라고 입력시켜서 그걸 쥐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모멸하고 그걸 헛수고로 만들고, 그걸 무의미하게 만들려하는 악마의 마지막 술책입니다. “너 자신을 지켜라. 너의 고귀함을 네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너를 지키겠는가? 너다움을 남에게 빼앗기지 말라.” 그래서 “주님, 이선까지는 와도 되지만 이 선을 넘어오는 것 까지는 제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바로 엎어져 있는 바벨탑입니다. 

  

하나하나가 바벨탑을 구성하는 벽돌처럼 오늘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자꾸 높아지려고, 올라가려고 하는 우리의 성향과 반대로 부딪히면서까지 우리를 찾아오시는, 어디까지 내려갔는가, 십자가에까지 낮아져서 십자가에서 우리보고 “이리 와! 십자가로 들어와”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괴물아!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 이게 본래의 네 자리야. 저 높은 곳 말고 제일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눈뜬 사람이 되어라.” 이것은 성령이 와야 우리의 자리가 저 천국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 우리를 기다리는 천국이 거기 있음을 우리가 마음껏 기뻐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는 주님과 우리의 거리가 좁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간격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랑이란 뭐냐? 간격이 없는 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한 덩어리가 되었기에 거리가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괴물 같은 우리와 주님의 십자가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굴러가는 바벨탑으로 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나올 것은 나만 잘되면 된다는 나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그 모습과 그것을 일부러 허락하시면서 십자가 안에 천국을 만드시고 용서를 만드시고 영생의 자리를 만드신 그 십자가의 거저주신 용서하심만 저희들이 자랑하고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