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강-창 10장 21-25절(샘의 족속)16083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0장 21-25절입니다. 구약성경 12페이지입니다.
창 10:21-25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성경에서 족보가 이렇게 나옵니다. 한국 사람들이 살면서 족보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거론할 때는 제사할 때지요. 촌의 고택에 보면 같은 씨족에 해당되는 사람들, 문중의 어른들이 다 모여서 집단으로 제사하는 날이 되면 족보 순으로 줄서는 때, 그 때는 족보라는 것이 있어야 되고 평소에는 족보라는 것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족보라는 것은 하나의 틀이고, 하나의 구조의식인데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갈 때는 구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으로 살아가요. 날씨가 선선하다, 덥다, 또는 기분 좋다, 기분 나쁘다, 감정대로 그 때 그 때 살아가지요. 그런데 그 감정을 유발하는 범위가 절대로 자기의 가족을 넘지 않습니다. 인간은 감정대로 살고 그 감정에 영향을 끼치는 범주가, 같이 모여서 한 하우스에 살고 있는 그 식구의 범위를 안 넘어가요.
그런 감정적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참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예를 들어서 “귀하의 족보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우리 집 제삿날 아직 멀었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끝나는 거예요. 평소에 족보에 무슨 관심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성경은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족보를 이야기합니다.
족보를 이야기한다는 말은, 뭔가 가족단위에 폐쇄된 채 살아가는 그것이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감정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현실이 뭐냐 할 때 그 현실이라는 말조차도 너무나 추상된 개념으로 몰아붙이고 지금 내 기분이 좋으냐, 내 기분이 나쁘냐 하는 그것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지요. 그것을 이 전 설교에서 몸의 컨디션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몸의 컨디션, 기분 좋으면 헤헤거리고, 애 성적 좋게 나오면 기분이 좋고. 그래서 가족단위의 그 범위 안에서 인간의 감정이 나오고 그 감정에 울고불고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평생 살아갈 뿐입니다. 거기서는 족보는 물론 관심 없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관심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셈의 족보를 언급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족보를 앞장세워서 다가온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제가 아까 한 말대로, 인간은 가족단위 안에 폐쇄되어 있어서 족보까지는 신경을 못 쓰고 있는데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셈의 족보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고, 우리의 일상은 내 가족끼리 그냥 살면 그만인 거예요. 인간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에요. 1. 살아보자. 2. 잘 살아보자. 3.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이 세 가지 빼면 없는 겁니다. 1, 2, 3 다 잊어버렸지요. 1. 살아보자. 2. 잘 살아보자. 돈 문제지요. 돈 벌어서 잘 살아보자. 3. 돈 잘 버는 정도가 아니라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우리끼리.
사람들은 이미 가족단위기 때문에 누굴 만나더라도 우리 가족에게 이익이 될까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폐쇄적이라는 말이지요. 자기가족에서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자기가족에게 이익이 된다면 잠시 창문정도는 열겠지만 그 외에는 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셈의 족보를 가지고 다가오니까, 족보를 가지고 다가오는 하나님과 가족밖에 모르는, 자기 행복밖에 모르는 인간과 어떻게 만남이 성사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만남이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그 산책길에 신숭겸 유적지가 있어요. 그 유적지의 정원은 열어놓지만 안쪽의 제실은 커다란 자물쇠로 늘 잠가놔요.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그 문이 열렸어요. 왜 열렸나 보니 수리한다고, 수리할 때는 일군들이 들락거려야 되니까 열어놔야 되거든요.
가족의 내막은 언제 아느냐 하면, 그 가족을 수리할 때 어쩔 수 없이 그 내부를 드러내야 돼요. 좀 배우고 점잖은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의 사적인, 개인적인 몸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 몸을 드러내느냐 하면 병원에 가서 수술할 때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몸을 내놔야 됩니다. 청진기 댈 때 가슴을 풀어놔야 된다는 말이지요. 주사 맞을 때는 엉덩이를 내놔야 되거든요.
나 자체에 문제가 있을 때는 자기가 아무리 폐쇄적이고 내 가족 밖에 몰라도 일단 그걸 보류하고 중지해야 될 시점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게 되면, 나중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오지만, 육이 족보를 앞장세워서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접촉할 때에 육에다가 하나님께서 증표를 남깁니다.
그 증표가 할례라는 겁니다. 할례를 행했을 때 사람들은 생각해요. 할례라는 종교적인 증표, 거룩한 증표를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겠지, 라고 하는데 할례라는 그것은 증표, 상징에 불과하거든요. 그러면 그 상징은 실체와 만나서 의미를 획득해야 되는데 그 증표를 남기면서 하나님께서 지시를 해놓고 그 할례의 실체는 창세기 22장에 나옵니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나오지만 실제로 할례의 실체는 뭐냐?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 이삭을 바치는 그것이 실체가 돼요. 육의 폐쇄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살고 싶다, 육이지요. 잘 살고 싶다는 것도 역시 육이지요. 행복하게 살고 싶다, 육이라는 말이지요. 육은 육이고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어요. 교회가 할 일이 그거예요.
육은 육인데 이 육과 영을 어떻게 매치하느냐,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면 육을 해부해야 되고 육을 제켜야 되고 육을 난도질을 해야 돼요. 육에 무슨 문제가 있고, 육을 수리하든지, 고장 난 것을 빼내든지, 건전지를 갈아치우든지, 육의 내부를 해체해야 되는 겁니다. 육의 내부를 해체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창세기 10장 25절에 보면,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에벨이라는 사람이 어디서 튀어나왔느냐 하면, 에벨은 21절에 보면,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에벨은 셈의 아들이 아닙니다.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24절에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셀라의 아들이 에벨이에요. 셈에서 아르박삿이 나오고 아르박삿에서 셀라가 나오고 셀라에서 에벨이 나와요. 에벨은 셈의 4대자손입니다. 4대자손인데 21절에는,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해서 셈 자손의 특징적인 것, 셈 족보를 보고 싶으냐, 셈 족보를 하나님께서 갖다 대면서 거기에 중요한 것을 심었다는 거예요.
중요한 그것은 셈의 아들인 엘람도 아니고, 아르박삿도 아니고, 앗수르도 아니고, 룻이나 아람도 아니에요. 4대 자손인 에벨이 셈의 자손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로서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뭐가 핵심적인가? 25절에,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세상에 무슨 지진이 일어났습니까?
갑자기 왜 세상이 두 쪽으로 나눠지지요? 이것은 역대기 1장 19절에도 그렇게 나와 있는데 세상이 나뉘었다. 그런데 역대기 1장 19절에서는 세상이 나뉘었다고 하지 않고 땅이 나뉘었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고 에벨은 두 아들을 낳아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 때에 땅이 나뉘었음이요.”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족보를 앞장세웠다. 그런데 평소에 인간은 족보에 관심이 없어요. 인간의 관심사는 자기가족의 범위를 넘어가지 않으니까. 우리 식구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족보까지 왜 신경 씁니까? 고택에서 제사지낼 일 있습니까? 아파트에서 우리 끼리나 잘살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 관심 없는 족보에 하나님께서 어떤 특이성을 싫어서 다가옵니다. 그 특이성은 뭐냐? 에벨이고 그 에벨에 주목했다는 것은 에벨과 셈과 직접연관을 시켰다는 겁니다. 21절에 나오듯이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에벨의 아버지는 있거든요. 셀라입니다. 그런데 셀라가 아버지가 아니고 셈이 아버지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육적 아버지는 셀라지요.
하지만 에벨을 에벨답게 만드는 그 특이성, 하나님의 약속의 계시에 부합된 특수성은 육의 아버지인 셀라는 아무 의미 없고 4대 할아버지인 셈과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셈은 어디에 관련되는가? 셈은 노아라는 언약을 받은 분의 가족범위 안에 등장하는 겁니다. 셈과 함과 야벳과 가나안과 노아, 이 다섯 명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 하나님의 그 당시의 계시형성구조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지상에 남기는데 하나님의 택한 인물들이 있어요. 노아, 셈, 함, 야벳, 다 인물들입니다. 그 인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머리 없이 그냥 태어난 거예요. 보통은 아버지 안에 자식이 되는데 육의 아버지가 육의 자식을 낳는다는 육적 논리를 잠시 접어두고, 우리 아버지가 그냥 아버지가 아니고 영적으로 관련된 아버지의 자식이 된다면 육에서 육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영에서 영으로 흘러가는 고리가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육이라는 형태지만 그 의미는 영에서 영으로 흘러가는 하나님의 계시, 약속, 언약이죠, 언약의 고리가 거기에 잠복되어 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땅이 나뉘었다는, 혹은 세상이 나뉘었다는 특이한 결과를 필히 셈의 자손 속에 남기기 마련입니다. 약간 복잡하지요. 머리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방금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AD 2세기경에 프랑스에 최초의 순교자가 등장합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 이전이에요. 그래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생 드니라는 성자가 많은 사람을 전도했다는 겁니다.
로마당국에서 그것이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를 죽여 버렸어요. 목을 치니까 목이 데구루루, 앞에 떨어졌잖아요. 목을 쳤지만 아직 팔다리는 남아 있잖아요. 생 드니가 떨어진 목을 팔로 감싸 안았다는 거예요. 전설에. 그 때 병사가 놀라서 도망해버렸고 그 정도로 생 드니가 성스러운 사람이었다고 사람들이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후대에 철학하는 사람들이나 심리학 하는 사람들에게 골치 아픈 문제를 야기했어요. 머리가 떨어져서 몸과 분리되었을 때 팔을 움직여서 자기 앞에 떨어진 머리를 주울 때, 그 때 머리 없는 이 몸에서 주체는 어디에 자리 잡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돼요. 인간의 과학에서는 모든 주체는 두뇌에 있는데 두뇌가 뚝 떨어졌다는 말이지요.
머리에서 신경세포를 통해서 팔한테 명령을 해야 되는데 머리가 떨어져 나갔는데 그 머리를 주우라는 명령을 어디서 하겠어요? 그런데 생 드니는 남은 신체를 가지고 머리를 주웠다는 거예요. 이것은 현대에 무엇과 관련되느냐 하면, 심장도 남의 심장, 팔다리도 다 따오고, 두뇌도 남의 두뇌를 가져왔을 때 어느 것을 나의 주체로 삼는가 하는 철학적주체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목이 떨어지는 방식으로 주님께서 새로운 머리를, 육의 목을 쳐버리고 영의 머리를 그 위에다 심어서 그 육을 영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에벨의 아버지는 셈이 아닙니다. 하지만 셈과 관련을 시키는 이 본문의 의도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바로 땅이 나뉘어졌다는 거지요.
땅이 나뉘어졌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우리끼리 행복하게 잘 살 자라는 의도 때문에 땅이 나눠진 것이 아니고, 땅이 나눠짐은 가정의 범위를 넘어서, 족보의 범위를 넘어서 함과 셈과 야벳이라는 그 세 족보를 만드신 그 윗선에서 결정된 사항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필히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땅으로 나뉘어져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감정적으로 우리가정 행복하면 돼, 잘 살면 돼, 그것은 육이니까 그 육에서 벗어나서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난다는 그 영적인 원리와 원칙을 파악할 때 우리는 복음을 이해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파악은 우리 육적인 아버지하고 관련된 것이 아니고 제대로 우리 자신의 목을 주께서 쳐줘야 돼요.
내가 누구의 자식이고 우리 조상이 누구라는 이러한 육적관계를 쳐버리면, 우리는 ‘나의 조상은 누구지? 나의 근원은 뭐지? 나의 바탕(아르케)은 뭐지?’ 이 말을 다른 말로 ‘나는 진정 누구지?’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 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사람 목수의 아들이야.” 목수의 아들 맞지요. 목수의 아들이라고 단정 짓는 그들은 그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식으로 자기존재자체를 그렇게 규정한 거예요.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에요. 인자거든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언약을 완성한다는 언약이 개입되어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이 땅에 등장한 인물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우리를 성도라고 하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들이라고 할 때는 우리 구성성분이 육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 십자가에 다 이루었음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재창조된, 다른 말로는 재계약된, 재창조된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셈과 직접 에벨은 연결되는 거예요. 에벨의 바탕에서 나온 단어가 히브리인이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합비루’라고 해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근거가 없고요 에벨에서 근거한 것이 맞아요.
그러나 원어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정의해주지 못합니다. 언어는 그냥 언어일 뿐이지 언어를 안다고 해서 천당 가거나 지옥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셈과 에벨을 직접 연결시킨다는 말은, 결국 중간에 있는 육은 셈에서 에벨을 연결시키게 한 육적인 고리에 불과하고 특수한 언약적, 계시적 의미는 없다고 보면 돼요.
언약적의미로 연결되었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뭔가 세상을 두 조각을 낸다는 의미를 가졌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25절에 근거해서. 세상이 둘로 나뉘었다. 땅이 둘로 나뉘었다 할 때,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하나님께 물을 수가 있어요. “처음부터 나누지 왜 에벨에 와서야 나누는 겁니까? 안나눌 것 같이 살게 하면서 왜 나누십니까?” 하거든요.
이미 셈의 후손에서 나눠졌다는 말은, 셈과 노아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를 통해서 되풀이된다고 보면 돼요. 노아가 자식 낳았다고 해서 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자식을 낳으면 그냥 육적인 셈이 되겠지요. 육적인 셈이 축복받는 셈이 되려면 노아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 사건이 술 먹고 아래쪽을 벌거벗은 채로 누워있는 사건입니다.
아까 말했듯이 신숭겸유적지가 내부수리를 위해서 문이 열리지요. 노아라는 가족이 그 가족이라는 폐쇄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서 온천하가 노아가족이 품고 있는 언약의 그 내용을 마치 댐 터지듯이 왈칵 쏟아져서 온 세계, 역사 끝날 때까지 전 세계에 퍼지려면, 그 언약이라는 영적인 의미가 이 세상에 그냥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고 둘로 나뉘어서 퍼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셋이 아니고 넷도 아니고 왜 하필 둘인가?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땅이 둘로 나뉘었다고 하니까 둘로 나뉘는 거예요. 노아에서 둘로 나뉘기 위해서는, 노아는 창세기 3장 15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거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나오지요. 이렇게 둘로 나뉘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둘 다 인간과 관련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로서의 어떤 통일성 있는 현실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린애가 두 살만 되어도 인간은 자의식과 더불어서 세상을 통일성 있게 봐요. 세상은 하나다. 물론 그 세상은 누구를 위한 세상이냐 하면, 본인 유리하도록 세상은 하나다, 그렇게 봅니다. 그 세상이 둘로 나뉜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오지를 않아요.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불신자는, 이렇게 인간은 살다가 죽으면 다 똑같은 데로 간다. 세상을 여기도 하나, 죽어서도 하나로 보는 것이 불신자인 반면에 신자는 뭐냐 하면, “네 눈에는 하나로 보이나 벌써 둘로 보이고 죽어서도 양과 염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지옥과 천국, 역시 둘로 나눠진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땅에서 둘로 나누면 되지.”
누구 맘대로 둘로 나눠요? 나한테 속한 세상 말고 있는 그거 하나, 네게 속한 세상 그거 둘, 그게 바로 잘못된 종교에요. 노아에게 일어난 일, 하나님의 작업으로 둘로 나눠야 되지 사람은 뭘 해도 자기 쪽은 진리라고 간주하고 시작하니까 이게 참 보통 낭패가 아니에요. 인간이 통일성을 갖게 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 하나, 그 외 하나, 이렇게 봐요.
그렇게 보니까 그 둘 사이에는 대립하고 충돌하는 것 같지만 사람이 사실은 남의 세계관을 배려하고 협상하고 타협하지 않으면 사람은 못살게 되어 있어요. 사람이 남을 배려하지 않고 살면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자성어가 있어요. 그게 뭐냐? ‘졸음운전’입니다. 졸음운전 한 번씩은 해봤지요. 졸음 운전할 때 그 사람에게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에요.
졸 때 그 사이에 자기는 꿈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요. 달콤하지요, 졸음운전하면. 졸음운전을 한 3초했다. 그 3초 사이에는 시간이 10년 흐를 수도 있고 100년이 흐를 수도 있어요. 두 달이 갈 수도 있고요. 눈을 감았다. 3초 동안 졸음운전을 합니다. 그러면 여기가 차 안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멀리 피서지나 바닷가에서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듣거나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남태평양의 파라다이스 같은 곳에 가서 비치볼 하면서 놀고 있는 그 순간일 수도 있어요. 그 3초 동안에.
그게 자기만의 세계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3초 후에 눈 떠보면 자기 때문에 벌써 신혼부부는 죽어 있고 자기 차는 뒤집어져 있고. 그게 졸음운전이잖아요.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깨어라, 했겠습니까? 이것은 말이 약간 안 됩니다만. 정신 차려라. 이 세상은 네가 결정하는 사항이 아니에요. 사람의 자의식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자기의 결정과 선택을 할 때 인간의 자의식은 생깁니다.
3살이나 4살짜리 애들에게 자의식이 생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그 애를 대형마트에 데려가세요. 엄마가 “너 이거 가져라”가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것 골라봐.”라고 소비를 시킬 때 비로소 그 애는 자의식을 발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사에 의해서 소비할 때, 선택하고 결정할 때 자의식이 생기지요.
인생이라는 것이 뭡니까? 내 의사에 의해서 내가 결정해서 내가 꾸려가는 그것이 자의식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항상 졸음운전이 된다니까요. 남을 배려할 수가 없고 남의 사정은 몰라요. 오직 자기 것만 알고, 나만 잘살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이 말은 뭐냐? 내가 결정하고 내 인생이 자체적으로 통일성을 갖고 있다 하니까 무슨 통일성을 놓쳐버리는가 하면, 창세기 3장 15절의 약속,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구성되는 그 통일성을 너무 확고해서 내 통일성, 졸음운전을 하고 있으니까 둘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을 함이 보여줍니다. 10장 9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최고라 그 말이지요. 당대의 영걸이라고 합니다. 8절에,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세상의 첫 영웅이에요. 독자적입니다.
그런데 야벳을 봅시다. 창세기 9장 27절,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셈의 장막이 거한다는 것은 종속된다는 말이지요. 포함된다, 소속된다는 말입니다. 누가? 같은 형제지만 야벳이. 야벳의 형은 셈이에요. 셈의 동생은 야벳이고. 그것이 오늘 본문 21절에 나옵니다.
함은 뭐냐 하면, 당대의 영걸이에요. 그게 함의 특징이에요. 그러나 이 땅에서 누가 저주받고, 누가 복 받는가? 당대의 영웅, 그 고향이 바벨이거든요. 나중에 바벨탑이 나옵니다. 바벨탑때 땅이 둘로 갈라지니까. 셈과 야벳이 결탁되고 에벨이 등장하는 그 때에 세상이 둘로 나뉜다는 말은, 노아가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던 그것이 실효성 있게 역사를 장식한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개인적인 감정과 자기식구밖에 모르기에 세상 바깥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운영하고 꾸려나가는지, 마지막까지 어떻게 끌고 나가는지를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그게 육이에요. 바깥에는 영적인 활동이 대단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안에서 나만 행복하면 되고, 나만 잘살면 되고, 나만 하하하하 웃고 지내면 되지, 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하고 무슨 상관이 있으며, 창세기 3장의 선악과하고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저 인간은 감정적으로, 그저 육과 육이 모여서 그저 하하 웃으면 된다는 거예요. 하지만 거기에는 할례언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증표가 없어요. 자기들의 아버지가 자신의 머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셈과 에벨과 노아는 자기의 목 위가 없습니다. 육은 육인데 목 위가 없는, 머리 부분을 유보한, 이게 떨어져 나가버린, 할례언약으로 하면 생식기 자체가 끊어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육에서 자식을 낳고 낳는 것을 끊어버리는데 그 뒤의 영적인 자식은 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 이삭같이 약속에 의해서, 천사 셋이 와서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 그의 어머니는 바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옵니다.
두 개의 언약이라고 할 때 육으로 난 언약이 있고 약속에서 난 자식이 있다. 약속에서 난 자식은 천국가고 육에서 나온 자식은 지옥 가는데 이 세상에서는 육에서 나온 자식이 누굴 핍박하는가 하면, 육에 속한 자식들을 핍박하게 되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영이라 하는 것은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 영이 아니고 이 지상에 두 개의 통일성이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이고 하나는 육이에요. 그러면 우리의 관심사는, 영이 이 지상에 나타날 때 어떠한 증표, 어떤 실효성, 현실성을 남겨두는가? 그것은 10장 8. 9. 10절에 나오는 이 지상에서 특이한 영웅, 영걸, 모든 육적인 사람들이 흠모할 수밖에 없고 ‘나도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네. 내 자식이 저렇게 뛰어났으면 좋겠다.’고 사모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띨 때, 그 중심으로 모일 때 영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현실을 위배하는, 뱀의 후손, 진짜 영을 가리는 저주받은 자들이나 가질 수밖에 없는 관심사라고 하는 것을 이미 함의 자손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지금 함의 자손에게 포위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 떠서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나오는 것, 드라마나 음악, 대중가요, 어떤 것을 봐도, SNS나 유-튜브, 어떤 것을 봐도 함의 자손의 소망, 그 안에 우리는 포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 눈이 달린 모가지를 쳐버리는 겁니다. 생 드니 순교자처럼. 물론 내가 칠 수는 없지만 주께서 모가지를 치고 이 모가지가 빈 그 자리에다가 십자가를 꽂아놓으세요.
생각만 해도 그림이 괴상한 그림입니다. 십자가가 있는데 목까지만 되어 있고 그 밑은 남의 몸과 마찬가지고. 십자가는 빨대고 우리는 그냥 컵의 역할 같은 모습, 묘사를 해도 너무 참혹하게 한 듯합니다. 어쨌거나 우리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너희는 그 몸의 지체니라, 할 때에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고 이미 지상의 이 몸은 죽은 몸이에요.
죽은 몸을 주께서 매일 살려내는 것은, 언약을 증거하라고 살려내는 겁니다. 너로 인하여 세상이 둘로 나뉘어졌다는 사실, 그런 세상 보는 안목은 예수님이 세상에 왔을 때 보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이지요. 제가 2년 전에 미국에서 했던 설교를 우연히 봤어요. 뉴욕에서 사마리아여인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초반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창세후에 만들어진 존재인데 창세전, 우리가 없었던 시절의 하나님끼리 알고 있던 그 안목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창세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창세전에 내가 없던 시절의 하나님끼리만 아는 그 내용을 아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여인에게 찾아왔습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생수가 나올 것이라고.”
이 말은 우리가 생수를 안다, 소유한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생수가 나오는 샘물이 되도록 주님께서 새롭게 만들어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동안 육으로 살던 그 모든 이것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는 겁니다. 오늘 설교 이상하게 끝납니다.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육적인 모든 것도 전혀 버릴 것이 없어요. 왜? 샘의 자손들은 그냥 일상생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일상생활이에요.
화물차에 금을 싣는다고 해도 화물차는 금이 아니에요. 그냥 철이고 바퀴가 달렸어요. 석탄 실은 화물차와 겉모양은 똑같아요. 다만 내용물이 하나는 금이고 하나는 석탄일뿐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세상사람 고생할 때 똑같이 고생하고, 돈 벌기 힘든 것도 마찬가지고, 날마다 우리는 잘 살아보자, 행복해 보자, 매일같이 쉬지 않고 반복됩니다만, 그 와중 속에서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세상이 둘로 쪼개져 있다는 것을 알리는 증표로서, 우리 자체가 하나의 이삭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셈의 후손의 공통적이고 보편성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찾아오신 이유, 왜 우리가 관심두지 않는 족보를 앞장세워서 찾아왔는지, 그 족보가 저주와 축복의 족보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축복과 저주의 계열과 연관되어 있는 존재로서 항상 우리 자신의 행복만 생각하지 말고 주의 십자가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