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방주 밖 세상(창8;13-19) 1606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6. 30. 07:17
2016-06-29 20:43:02조회 : 22         
   방주 밖 세상 160629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방주 밖 세상(창세기 8: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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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6-06-29 21:38 

방주 밖 세상

2016년 6월 29일                          본문 말씀: 창세기 8:13-19

(8:13) 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8:14)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8: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8: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8: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8: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8: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드디어 노아 식구는 방주와 분리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물에 덮여 있었던 그 땅을 밟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28에 나오는 축복과 같은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충만하게 하신 그 피조물을 친히 멸절시켰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물이 빠트려 멸절 시켰다면 노아 가족으로 살아남으로 모든 창조는 마감과 완료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생육하고 번성하리라’는 축복을 또 해버리십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딛은 그 땅 자체가 영원한 세상이어야 합니다. ‘물 심판’이 퍼부어져 정화가 완료된 그런 완벽한 세상인처럼 간주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3:5-7에 보면,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딛었던 그 세상은 완벽한 이상적인 세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땅 위에서 번창하고 생육한 모든 짐승들은 하나 예외 없이 모두 불로 심판받게 됩니다. 따라서 ‘노아의 물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창조의 취지를 모두 다 실시하신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 땅에다가 ‘생육하고 번창하라’고 하셨던가요? 어차피 그들이 중 대부분이 물에 빠져 멸망이 될 운명일 뿐인데 말입니다. ‘생육하고 번창하라’라는 복이 무색해져 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심이 결코 인간 위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는 겁니다.

인간들은 무슨 생각을 상호 끄집어내어도 자신들만큼은 멸망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전제로 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천지 창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하셨다”고 말들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무(無)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창조되었다면 그냥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창조 전에는, ‘창조 후에 것이 없는’ 상태일 뿐이지 결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흔히 ‘무(無)’라는 무엇이 있었는가를 드러내어 주십니다. 즉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사하면서 도로 무(無)로 돌아가면서 숨겨진 창조의 핵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주 안’이라는 알갱이입니다. 즉 모든 이는 다 죽었지만 ‘방주’만은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방주’가 살아남았다고 해서 ‘방주 안’의 존재들이 살아남을 만한 완전히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단독으로 의롭다면 하나님의 물 심판은 노아를 비켜가셔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노아는 ‘방주 안’에서 들어가서 구원받았습니다. 이는 방주 자체에 하나님의 심판을 극복할 수 있는 요소가 담겨있다고 봐야 합니다.

물에 대해서 방주는 역청을 받아서 물이 스며들지 않게 했습니다. 이는 물과 방주의 관계가, 방주와 노아의 관계보다 우선된다는 겁니다. 방주는 노아를 의식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외곽을 덮을 물 심판과 관련지어 제작되어집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노아가 그 방주와 헤어집니다.

마치 날계란에서 내용물이 외부로 거침없이 흘러내리듯이, 방주 안에 있는 내용물들이 방주 밖으로 쏟아져나옵니다. 하지만 심판이 마무리 된 게 아닙니다. 도리어 본격적으로 노아 심판은 그 새 땅을 배경으로 해서 그 구체성을 확장시켜 나가게 됩니다. 즉 도대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왜 물 심판 받아 마땅한 죄가 되는지를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구체성을 띠게 됩니다.

그 환경은 바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입니다. 이론적으로 알던 심판의 이유를 본격적으로 땅의 역사를 통해서 분명해집니다. 인간들이 죄를 지었기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가 되기에 심판받는 겁니다. 죄 짓는 주체로서 인간들의 역사를 번창하게 만들어서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시는 것이 바로 창조의 숨은 원리입니다.

방주란 일종의 쓰레기비닐입니다. 비닐의 내용물이 쏟아지면 땅은 이제 불심판으로 영원히 멸망 받은 무대가 됩니다. 땅은 한시적 공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들의 욕망은 확장됩니다. 신약에 와서 땅은 ‘탈대지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13:36-37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영원한 땅에는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처소가 마련되지 않아기 때문입니다. 그 영원한 땅은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성령 안에서는 예수님과 아버지가 함께 계십니다. 바로 그곳에 성도들이 참여 하게 됩니다. “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이로서 그동안 죄를 넘치게 한 이 땅이라는 무대는 불과 더불어 파멸됩니다. 그 과정에서 이 땅에서 용서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피만이 구원의 의로움이 드러납니다.

즉 예수님의 주되심이 바로 창조의 영원한 핵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몸이 자기 소유라고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다 주님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5강-창 8장 13-19절(방주 밖 세상)1606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8장 13-19절입니다. 구약성경 9페이지입니다.


창 8:13-19


“육백 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이월 이십칠일에 땅이 말랐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물이 감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노아가 성질 급하게 방주의 뚜껑을 확 열고 어디에 땅이 있는가, 이렇게 살피지 않고 57일 동안 방주 안에서 그대로 숨을 죽이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정월 1일에 물이 걷히고 2월 27일에 땅이 말랐습니다. 홍수 난지 1년 10일째 되는 그 날에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행위를 하시는가를 생각해봐야 됩니다. 노아를 방주에 실어서 살리는 그게 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과 부합되어야 되는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운영하시고 이끌어 가시는데 노아홍수가 왜 필요하며, 심판하려면 다 심판하지 왜 노아가족만큼은 방주에 실어서 끄집어내야 되는지, 노아방주가 없이는 도대체 하나님 쪽에서 무엇을 표현할 수 없는가, 그 말입니다.



노아방주가 없다면, 이런 일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이 어떤 점에서 막히고, 어떤 점에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지 그걸 생각해 봐야 돼요. 그 말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아이고, 큰일 날 뻔 했다. 노아라도 있었으니 천만다행이지.’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무엇이 감춰지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노아 빼놓고 나머지는 다 죽이는 그 심판하시는 행위의 의미를 도통 모르게 돼요.


오늘 본문에서 어차피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땅에서 생육하고 번창할 것 같으면, 다 죽이고 노아만 달랑 뽑아내서 번창시키지 마시고 처음부터 번창 하게 하시면 되잖아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충만하게 하시면 되잖아요. 그리고 그 가운데서 번창함과 충만함에 방해되는 일이 안 일어나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다가 그걸 다 죽여 버렸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뜻이 진정 번성하고 충만해지는 것이 것이라면 이미 번성하고 충만한 그것들이 아깝지 않아요? 그 아까운 것들을 중간에 물로서 싹쓸이해서 죽이시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말씀하기 위해서, 무엇을 알리기 위해서? 창조하신 그 내막과, 원리와의 어떤 연관성 때문에 필히 노아홍수는 일어나야만 했는가, 그 말입니다. ‘노아는 이제 살았어. 번성하기만 하면 되겠다.’라고 인간들이 자기 좋은 쪽으로, 자기 이익 되는 쪽으로 생각을 해버리면 그런 하나님의 숨겨진 일이 전부 다 커트가 되고 모르게 돼요. 예를 들면, 직장에 다녀왔더니 아내가 화를 내더라. 밥 좀 차려 달라 하니 “네가 밥해라.” 하고 방에 들어가 버렸다는 말이지요. 평소에 그런 일이 없었는데 그 날 만큼은 아내가 삐져서 밥도 안 해주고 방에 들어가 버린 거예요.


세상에 어느 남편이 ‘그래도 내가 끼니는 때웠지! 그렇게 끝내는 남편은 없어요. ‘라면이나 끓여먹으면 그만이지 뭐.’ 이렇게 끝내지 않습니다. “여보! 오늘 속상한 일 있었어요?” 이렇게 물어보잖아요. 그런데 자기 밥만 생각하는 남편은 아내가 무엇 때문에 밥을 안 해주는지도 모르고 라면 끓여서 밥 말아 먹고 자기 배만 채우면 그걸로 아무 일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오늘날 노아홍수를 생각하면서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꼭 그런 식입니다.


철딱서니 없는 남편과 똑같아요. 무엇 때문에 심판했는지는 모르고 ‘땅에서 번창했으면 되었잖아.’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전에 아내가 밥은 왜 해줬는데? 밥을 죽 해오다가 밥도 안 할 정도로 삐졌으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인데, ‘내가 해먹으면 되지 뭐. 성질내든 말든 나는 관계없다.’ 이런 식으로 해 버리면 부부간에 틈이 갈라지지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이 내용이 여러분이 알다시피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창세기 8장이에요.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고 명령하신 겁니다. 이 명령은 축복이라고요. 이 축복은 지시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축복입니다.


야곱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관계없이 야곱은 복 받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 거짓말을 했든지, 형을 속였든지 관계없습니다. 에서가 아무리 착실하고 조용하게 살아도 저주받게 되어 있어요. 저주받을 짓을 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의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은 본인은 그것을 판정할 수가 없고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랑받아야 될 사람이 그 곁에 있게 되면 그 차이를 통해서 형 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저주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라는 것은, 죄용서 받는 사람 옆에서 비로소 죄가 드러나는 겁니다. 용서자체가 의가 되고 용서가 없는 것은 죄가 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설교한 것은 뭐냐 하면, 제 3의 요소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냥 노아홍수에서 살아 나와서,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현재 2016년 75억의 인구가 살았으면 되었지, 라고 해 버리면 그것은 제 3의 요소를 빠트린 것이 돼요. 그 제 3의 요소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의 이유와 목적과 원리와 원칙과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창조의 원리와 원칙과 목적과 끊어진 채 우리가 있어버리면 우리는 살아도 산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해놓고 생육한 사람들을 물에 다 잠기게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래요?’ 라고 뭔가 의아해해야 되고, 거기서 노아만 달랑 끄집어내서 노아만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또 노아부터 다시 역사가 시작돼요. 생육하고 번성하라. 창세기 1장의 그 축복을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족들에게 또 해줘버립니다.


처음의 축복은 효과가 없었던가요? 처음축복과 나중축복의 차이점이 뭐냐? 그 차이점 사이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된 진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숨겨진 진리를 찾아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노아 홍수전의 세계와 홍수 이후,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던 그 세계의 차이점이 뭐냐? 그 차이점을 알면 되겠는데요. 그 차이점을 알기 위해서는, 처음에 어떻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창세기 1장을 보면서 말합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무에서 유로 창조했다. ‘ברא(바라, 창조하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창조했다, 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3장 5절에 보면 그게 아니에요.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땅이 물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땅의 창조가 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에서 유의 창조가 아니에요. 물에서부터 창조된 거예요. 이것은 오늘 본문에 노아방주로부터 물이 다시 거두어지고 새 땅이 나온 것, 그걸 두고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홍수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천지창조와 관련된 말씀을 베드로후서 3장 5절에서 하고 있는 겁니다. 이야기를 쉽게 해 봅시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셨다. 그게 하나님의 주특기요 솜씨요, 그것은 사람이 못하고 하나님만이 하신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되어버리면, 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있는 것을 하나님이 심판해버리면 도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없는 곳으로 돌아가게 돼요. 없는데서 있었으니까 있는 것을 없애버리면 없는 것으로 되돌아가게 되어있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게 되면, 있는 것도 없이 되어버려요.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 같아요.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다. 지옥도 없고 사람은 죽으면 공중 분해되고 그냥 없다는 거예요. 사는 동안 빡세게 살고 죽으면 자살해서 죽으나, 얼어 죽으나, 예수 안 믿고 죽으나, 절에 가서 죽으나 다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있는 것을 심판하고, 이런 과정에서는 무엇이 안 나오는가 하면, 창조한 이유와 취지와 목적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실없는 행동을 하신 것이 아니에요. 있다, 없다, 없다, 있다, 거기서 뭐가 새로운 것이 나오겠습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있는 것을 심판하셔서 없게 만드신다면, 그 사이에 처음에 없는 것을 있게 하셨을 때에 알 수 없던 것이 있는 것을 심판하면서, 없애면서 비로소 처음에는 없었는데 어떤 새로운 것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야 되고, 여기서 나타난 것이 숨겨진 창조의 원리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심심해서, “없다, 있다, 있는데 없다” 이거 하시는 것이 아니거든요. 물에서 나와서 물로 성립되었다 했습니다. 자, 그 물, 그 물이 어떻게 해서 창조의 숨겨진 원리와 관련되어 있는가? 그걸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노아식구, 생육하고 번성해야 될 그 사람들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면, 방주 안에 있어요. 날계란 깨보면 그 안에서 내용물이 흘러나오지요. 날계란을 방주로 보시고 그 안에 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와 모든 짐승들을 날계란의 내용물로 봅시다. 그러면 분리가 되면서 바깥으로 쏟아져 나와요.


그러면 방주는 무슨 역할을 하는가? 하나님의 심판을 가로막은, 심판을 면제해준 막의 역할이 방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방주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요, 하나님께서 이런 취지에서 심판한다, 와 결부된 막이 들어 있어요. 왜냐하면, 심판에서 벗어나려면 심판에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구원의 막에 있어야 돼요. 구원의 막이 심판을 견딜 수 없으면 구원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방주 자체가 심판의 속성을 담고 있는 방주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방주는 무슨 용도냐 하면, 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이 새지 않도록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역청으로 틈새를 메운 것은 물이 새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물은, 베드로후서 3장에 보니까 천지 창조의 기본바탕이 되는 그것이 물이었습니다. 물로부터 천지가 창조되었으니까요.


이것은 이렇게 봅니다. 천지창조는 어디서 만들어졌는가? 없는데서 만들어졌다. 없는데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닌데 내용이 빈약하기 짝이 없어요. 그 없다는 것, 무, 없다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서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있는 것이 없는 곳이 무에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곳, 창조 이전의 것을 무라고 보면 돼요. 그것을 노아심판을 통해서 물로 표현한 겁니다. 물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것, 생육하고 번성한 것을 전부 다 창조이전으로 되돌린 겁니다.


창조 이전으로 되돌아가면서 하나 건진 것이 있어요. 노아식구는 ‘방주 안에서’ 심판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방주 안에서 살아남았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는 어디에 있는가? 심판 중에서 살아남은 그 알갱이, 숨겨진 창조의 원리가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노아의 식구에요. 그리고 같이 살아남은 동기생들인 짐승이 되는 겁니다.


방주를 날계란으로 보고 그게 깨지면서 거기서 우르르 안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그 쏟아져 나온 그것들이, 착함으로 심판을 이겨내지를 않은 거예요. 반드시 방주라는 것이 있어야 돼요. 인간과 하나님의 심판사이에 현재 창조된 인간이 아닌 것이 막아주지 아니하면 현재 창조된 인간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이 인간끼리 아무리 말을 주고받고, 지혜를 끄집어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연구하고 토론해도 거기서는 진리가 안 나오고 구원의 방식이 안 나오는 이유는, 그들 입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어떻게 되었고, 창조주는 누구고, 창조의 원리는 뭐냐,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자꾸 물음을 던지고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창조의 원리를 찾고자 하기에 그런 겁니다. 진리라 하는 것은 인간이 궁금하다고 해서 진리가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끼리 의논하고, 머리 맞대고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연구한다고, 우리가 사는 목적, 사람이 태어난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했고, 성경책은 어떤 내용인지를 묻는다 할지라도 그 묻고 있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방주 같은 구원의 장치가 없는 한 인간은 심판의 대상일 뿐이에요. 그러면 계란에서 내용물이 쏟아졌다는 말이 뭐냐? 사람들은 이 본문 보면서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노아홍수는 이제 끝났다고 보잖아요. 끝난 것이 아니에요.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심판이 마무리 된 것이 아니에요. “이제 방주의 내용물을 통해서 심판받는 이유를 본격적으로 알려줘? 인간들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려줘?” 이렇게 실습에 나서는 겁니다.


안에는 심판 받아야 되고,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중간에 방주가 있어서 심판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주가 깨어지면서 방주안의 내용물이 그대로 쏟아졌습니다. 쏟아졌다는 것은 쓰레기봉투가 찢어져서 내용물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으르르 쏟아졌다고 보면 돼요. 그 쏟아진 인간들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해놓고도 심판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후손들을 통해서 셰프에 의해 본격적으로 요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제 살피는 거예요. 살피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이 있어요. 인간의 욕망을 확장시키는 겁니다. 뭘 통해서? 주의 법을 통해서. “율법이 더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함이라.” 하나님이 욕망을 증강시킵니다. 계속 확장시켜 나갑니다. 창세기 9장에서 함과 가나안이 아버지 벌거벗은 것에 대해서 탓하면서, 벌써 여기서 분리가 일어나지요. 아버지가 일어나서, 자기가 술 취해서 하체를 노출한 것은 생각 안하고, “누가 아버지를 보고 놀리나?” 끄집어내서 “너는 영원히 저주받아라.” “누가 뒷걸음질해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담요로 덮어줬느냐? 너는 영원토록 축복받아라.” 이렇게 돼버려요.


노아방주를 통해서 방주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자동적으로 백퍼센트 구원받는 사람 아니었어요? 그들 다 천국 가지 않습니까? 왜 함과 가나안은 저주받아요? 그렇게 저주받을 것 같으면 함 빼놓고 아들 둘만 방주에 넣어줘야지요. 함은 진즉에 물에 빠져죽도록 했어야지 왜 함까지 방주에 집어넣어서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새삼스럽게 저주를 해버립니까? 이런 사고방식이 전부 다 뭐냐? 나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나로부터 시작해서 이런 오류, 잘못된 질문이 성립되는 거예요. 성경해석 전부 다시 해야 돼요. 창세기부터 새로 봐야 됩니다. 전부 다 엉터리에요. “하나님이여, 나 여기 있습니다. 절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사랑을 베풀 겁니까?”라는 질문자체가 욕망이고 그게 죄의 확장입니다. 그게 쓰레기 같은 심보에요. 그게 더러운 심보에요. 방주에서 나왔다고 해서 노아심판이 멈춘 것이 아니고 이제는 그걸 더 심층적으로 이 땅의 역사와 더불어서 구체화시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도대체 뭐가 나쁜지를, 이제는 십자가까지 계속 더 확장시켜 나가는 거예요. 자,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는데 베드로후서 3장 5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노아심판으로 모든 일을 마감하시고 방주 안에 있던 노아 가족은 영원토록 천국 가서, 깔끔하게 ‘노아 심판했음’ 그것으로 마감이 되어야 하는데, 왜 마감이 안 되고 본격적인 마지막 불의 심판까지 질질 끄시는 이유가 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 목적과 창조하신 근거가 있어요. 그 근거가 노아가 아니고 노아 식구도 아니에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천지를 창조했기에 십자가까지 계속 끌고 가야 되는 겁니다.


이런 말이에요. 우리가 보통 이야기할 때 “저 자식은 내 자식이다.” 혹은 “내 남편, 내 아내다.” 이렇게 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그게 창조의 원리에 어긋난다는 겁니다. 내 자식이 아니고 주님의 자식이에요. 우리는 주님을 넣을 줄을 몰라요. 저 아들이 내 아들이 아니고 주님의 아들이라고 진정 있게 하려면, 먼저 내가 주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줘야 비로소 내 아들도 내 아들, 내 소유가 아니고 주님의 소유라고 인정하는 겁니다.


내 자신이 내 소유가 아니고 주님이 소유임을 알아야 돼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죄 그 자체를 만들어놓고 그 죄를 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와 우리 자신을 우리 속에서 분리를 시키는 작업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내 것에서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고 분리를 해야 돼요. 홍수 이전에 만들어진 그것, 홍수 이전에 번성하고 충만했던 그 세계와, 홍수 이후의 세계의 충만한 그 세계의 차이점이 뭐냐?


홍수 이후에는 구체적인 심판의 이유를 밝히기 위해서 계속해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멸망이 유보되는 세계에요. 심판의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서 계속 이끌어가야 될 세계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베드로후서에서는, 불로 심판받기 위해서 계속 대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노아홍수 앞에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간은 죄만 지었을 뿐이지 구원과 연결이 안 된 상태에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이것은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거예요.


그러나 그 이후에는 주님에 의해서 먹었고, 주님에 의해서 장가갔고, 주님에 의해서 시집갔고, 주님에 의해서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진 상황이 되려면 계속 예수님이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죄악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세계 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 전에는 그냥 먹고 마셨어요. 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노아 심판은 창조의 원형입니다. 왜? 물로 창조했다는 것을 노아심판을 통해서 보여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 봐! 네가 살아 있으니까 어 때?” “살만 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습니다.” “물이 오니까 어때?” “물이 오니 완전히 창조이전으로 다 돌아갔습니다.” “언제 뭘 창조했지? 물밖에 없는데?” 이것은 돌아간 거예요. 물에서 방주만 동동 떠 있다는 말은, 거기서 하나님께서 건진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창조의 원리가 이 방주 안에 담겨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담겨 있는가? 이 안에 있는 인간들이 죄인이에요. 죄인인데 그 죄인과 동승하는 깨끗한 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그 피로 말미암아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피로 말미암아 살려주는 그 관계가 이 천지를 창조할 때 애초부터 바탕이 되는 원리였던 겁니다.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를 통하여, 주를 위하여 만들었다는 골로새서 1장 18절의 말씀을 제가 적용시키는 겁니다.


창세기 9장 4절에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그리고 6절에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땅에서는 피에 관련된 것에 핵심을 주고 있습니다. 노아가 나와서 생육하고 번성하는데 항상 피를 중심으로, 피와 관련되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거예요.


이 피와 하늘의 무지개가 관련되어 있어요. 무지개가 떴다는 말은, 지금 물이, 심판이 거두어져도 여전히 물속에 놓여 있는 입장입니다. 일단 심판 속에 놓여 있고, 사는 것은 그 심판 속에 피 흘릴 분이 참여하게 되면 그것이 천지창조를 하신 목적과 결부되어 있는 거예요. 노아홍수 후에 위에는 무지개가 떠 있고, 아래쪽에는 피에 대한 언약이 주어지고, 피와 무지개가 관련되면서 이 거룩한 피가 너희들을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사고팔게 만드는 은혜가 되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계절마다 단비를 주시는 그 모든 것은 이 땅에 누군가 오셔서 피 흘릴 그 분과 관련되어 있는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어떤 창조를 하셔도 창조의 원리를 항상 거기서 품도록 하신 거예요. 거기에 다 담겨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모르면 그것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과 관련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노아방주에서 나왔을 때 이것을 ‘탈대지화(脫大地化)’라고 하겠습니다. 이 땅이 임시적 땅입니다. 죄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임시로 마련된 하나님의 무대에요.

이 무대는 나중에 불로 타버립니다. 그렇기에 구원을 받으려면 이 대지, 땅의 사람 되지 않고 땅에서 떨어지는, 벗어날 수 있는 탈대지화, 땅에서 벗어나는 변화가 주어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땅과 함께 지옥 불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종의 비행기가 뜨는 활주로 역할, 비행기는 택한 사람 건져서 떠버리면 더 이상 활주로는 불로서 싸질러버립니다. 이제는 할 것 다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노아방주에서 물이 걷히게 하고 그 땅을 그대로 두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방주 안에 들어 있는 그 쓰레기가 구체적으로 인간과 주님이 만날 때 어떻게 죄로 구체화 되는가, 이 역사 속에서 얼마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죄가 형성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탈대지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이 땅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까? 중력의 법칙에 어긋나는데요? 사과가 떨어지면 땅으로 떨어지잖아요. 안 되잖아요. 우리가 살아도 땅밖에 없습니다. 땅에서 농사짓고, 아무리 산업이 발달해도 가뭄 들고 태풍 와버리면, 쌀이 없고 밀이 없는데 어떻게 삽니까? 땅에서 나는 것 먹고 살아요. 이게 기본이에요. 인공지능 알파고가 아무리 많아도 땅 없이는 못삽니다. 땅이 전부에요.


땅을 떠난다는 말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인간이 갈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서 떨어져 나가서 살 수 있는 새로운 땅을 마련했습니다. 주께서 마련해 주신 겁니다.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걸고 그곳에 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떠난다.” 하니까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할 때 “따라 올 수가 없다.”고 하니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내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따라가겠습니다.” 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주께서 “네가 목숨을 바쳐도 못 오는 곳이다.” 해요. 하나님께서는 ‘탈대지화’, 대지를 떠나는 새로운 땅을 마련했습니다. 새로운 처소가 마련되게 되면 다시 주님 쪽에서 오신다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나 모든 인간들이 아무리 의논해도 그 의논된 것은 계시가 아니고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왜? 계시라 하는 것은 나도 심판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되는데 우리가 서로 맞대고 연구해 봐야, ‘연구하는 나는 반드시 구원될 거야.’라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이것은 계시가 아니에요. 그것은 쓰레기통에서 쓰레기들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밖에 안됩니다. 방주라는 심판을 이겨낼 수 있는 새로운 막이, 새로운 땅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주어져야 돼요.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그곳이 성령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처소’라고 되어 있어요.


내가 새로운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리라. 요한복음 14장 18절부터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것은 성령 안입니다. 예수님 안, 십자가 안, 그리스도 안, 성령 안, 다 같은 말입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불 심판을 받지 않아요.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요한이 무슨 뜻인지 알고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이 땅은 불로서 심판받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령의 세례가 먼저 주어지게 되면,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그 불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는 그 폼을 내기 위해서 세례요한은 물세례를 준 겁니다. 이처럼, 물이 너희를 덮는 것처럼 장차 성령이 너희를 덮어버리면 너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간다는 거지요. 이게 바로 방주라는 그 막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불 심판, 지옥심판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성령 안에 들어와야만 되고, 그 성령 안에 들어오게 되면 거기에 예수님의 어린양의 보좌가 있고 그 보좌는 우리의 죄를 대신 씻어주기 위해서 흘리신 어린양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다. 휘파람불면서 좋아 했을 거예요. 갑갑하던 차에 나왔으니까. 아닙니다. 이제는 제대로 죄라는 것이, 죄가 뭔지가 역사 끝 날까지 본격적으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을 통해서 마구 전 세계로 확장되고 퍼질 겁니다.


그렇게 하게 하실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법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법 앞에서 인간의 감추어진 욕망이 점점 더 커져요. “목사님, 성도의 신앙생활은 뭡니까?” 성도의 신앙생활은 딴 게 아니에요. 분리하는 거예요. 주께서 만든 나에서 기존에 내 위주로 생각했던 나가 빠져나오는 겁니다. 일본의 괴기영화에 보면 TV 화면에 나오던 귀신이 화면 밖으로 기어 나오는 장면이 있어요. 분명히 우리는 육체 안에서 이게 우리입니다. 이게 나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지체가 돼요.


머리 풀고 화면 밖으로 기어 나오는 그거, 세상에 2차원인 그 화면을 뚫고 3차원의 세계로 빠져나온다니까요. 분명히 우리는 내 육체의 힘으로 살아가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주의 힘으로,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도바울 본인의 말이고 제 3자가 보면 사도바울 본인이 설치고 다니는 거예요. 여기 저기 편지고 로마로 가고, 누가 봐도 본인이 해요.


보기는 보아도 알아먹지를 못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데 아무리 봐도 그 방주 만드는 이유를 다른 사람이 몰라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성령 받은 이야기를 못 알아듣습니다. 항상 출발점은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천지가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원리를 보여주기 위해서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 없이는 심판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서 이 땅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이지 포도원 농사지어서 사는 그 땅이 아님을, 포도농사를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고백하는 사람, 그게 축복받은 노아의 후손이고, 그렇지 않고 ‘아버지(노아) 꼴 보니 얼레리꼴레리, 아버지는 잘났나? 우리보다 더 못났네. 술 마시고 하체나 드러내고, 우리보다 더 못난 것 같은데?’ 하면서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힘으로 산다는 사람, 그 사람은 저주받는, 그렇게 분류되는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땅에서 내가 내 주인이라는 것에서, 내 몸이 내 소유라는 것에서 머리 풀고 빠져나가게 하여주옵소서. 내가 내 소유가 아닌데, 남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마치 내 것이 내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보니 이미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고, 이 사실가지고 그대로 외부로 증언하고, 자랑하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