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설교

어렵지만 기쁨을 주는 설교-싸우시는 하나님(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2. 5. 21:08

제목 : 싸우시는 하나님
본문 : 예레미야 25장30-31절
듣기 : 음성 ,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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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0-12-08 21:56 
싸우시는 하나님



2010년 12월 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25:30-31

 (렘 25:30, 개역)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부르시며 그 거룩한 처소에서 소리를 발하시며 그 양의 우리를 향하여 크게 부르시며 세상 모든 거민을 대하여 포도 밟는 자 같이 외치시리니』

(렘 25:31, 개역) 『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과 ‘하나님은 이러한 분이었으면 좋겠다’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아무리 자기를 부인해도 자신을 진정으로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자기에게만은 희망을 안겨주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즉 절대적 절망 상태를 인간은 스스로 조성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궁극적으로 자신이 몸부림치고 애쓴만큼의 의미를 놓고자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만 가짜 하나님만을 양산해 내게 됩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는 직접 하나님을 만나고 다음과 같이 토해냅니다. “화로나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러한 고백을 인간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 상태에서 꾸며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 딴에 절대적 절망을 유발하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미미하나마 가느다란 희망과 기대는 쥐고 있는 법입니다. 바로 이처럼 자기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그런 하나님만을 사람들은 진정 하나님답다고 여깁니다.

참되게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인간들이 지어내는 희망의 하나님이 결코 참 하나님을 아님을 압니다. 예를 들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나게 거룩하고 두려운 하나님을 뵙지만 문제는 이방민족에게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아무리 소개해봤자 그들은 그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려 들지 아니합니다.

기껏 다음과 소리만 내뱉습니다. “어떻게 너희 민족만이 섬기는 하나님만 참 하나님이라고 독단적으로 우기느냐?”라는 핀잔만 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배척받기 일 수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성도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하셔서 예수님 때문에 받는 미움인 줄 알리려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미움받더라도 너무 서러워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은 세상이 예수님을 한창 미워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영광스럽게도 그 예수님 미움의 자리에 동참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미움을 사방에서 받게 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미움에 밀려서 한데 모아져보면 그 안에 자연적으로 사랑이 싹트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발생시킨 ‘새계명’ 곧 ‘사랑의 계명’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인간들이 억지로 사랑하려고 해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미움이 외부에서 작용해야 합니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새계명입니다.

사실 인간은 미움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속한 자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미움에 함께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미움을 발생되는 원인은 바로 참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인간도 인정받을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이 세상의 단 하나의 인간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는 말을 안하고 버틸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다 참 하나님 앞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를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점이 바로 가짜 하나님과 참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가짜 하나님은 인간 당사자의 열외를 눈 감아 주는 하나님입니다. 즉 ‘세상은 모든 이는 다 망해도 너만은 면제다’를 허락하는 하나님이기를 사람들은 요청하고 있고 만들어 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든 육체’를 상대로 해서 심판을 해버립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육체’입니다. 로마서 3:4에 보면,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거짓되다’는 명제를 놓고서 과연 그것이 참되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로 승리케 하시려는 겁니다. 성경 전체는 이런 관점에서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오직 한 몸 ‘예수님의 몸’만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한 예가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얍복강 사건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주시면서 다음과 같은 축복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28절) 그런데 이런 축복을 하시면서 하나님은 먼저 야곱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29절에 보면,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을 수 있으나, 야곱은 축복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물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내포되어 있는 그 모든 작업과 기능은 야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기 전의 이름인 야곱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 성취에 부정적인 바탕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즉 야곱이 요청하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래 생각해놓으신 축복, 곧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그 상황의 결과물로서 야곱은 새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져주므로서 하나님도 이기도 인간도 이긴 새로운 존재물을 생산해냅니다. 그 대상은 야곱은 아닙니다. 오직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야곱이라는 인간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인간에게 늘 패배 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이라는 하나님의 작업의 결과물이 생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은 실제적인 야곱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요한복음 1:51에 보면,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천사의 오르락 내리락은 창세기 28:12에 나오는 야곱의 꿈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야곱의 꿈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꿈이 되고 그 이스라엘의 꿈은 예수님의 꿈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도 이기도 인간도 이긴’ 유일한 분으로서 예수님을 앞장 세울 수가 있게 됩니다.

온 인류가 다 참되지 못하고 거짓되기에 당연히 하나님이 심판을 담요처럼 덮게 됩니다. 이 어두운 담요를 뚫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 계십니다. 이 저주스러운 심판에 대해서 의로서 당당히 이기신 그 분의 몸만이 축복이 됩니다. 이 축복된 몸에 합류하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하는데, 성령이 임해야지만 ‘예수의 증인’이 됩니다.(행 1:8) 이 몸만이 오직 구원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지저분한 몸을 쳐서 예수님의 몸으로 전환시킨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교회 10-12-09 11:41 
강-렘 25장30-31(싸우시는 하나님)-jer10120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5장 30절에서 3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91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5:30-31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높은데서 부르시며 그 거룩한 처소에서 소리를 발하시며 그 양의 우리를 향하여 크게 부르시며 세상 모든 거민을 대하여 포도 밟는 자 같이 외치시리니 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에서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듬어주고 우리를 귀엽게 보시려고 찾아오시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나에게 유리한, 나에게 잘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하나님이 아니면 그 밖에 다른 하나님을 애초에 생각하지를 않아요. 오직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고 항상 생각하는 이유가 좋으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보고 외친 사람들이 물론 모세도 있고 이스라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관하고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하는 겁니다.

선지자들이 거부를 당한다는 말은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입 떼지 마라.’ 하는 식으로 제외시키는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만나고 바르게 증거 해도 이렇게 제외시킨다는 그 점에 있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것은 있으나 마나한 일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시내 산에서 만났지 않습니까?’라고 이야기 할 거예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소수입니다. 또 이스라엘이라는 이 민족이 존재했다고 해서 다른 이방민족이 ‘이스라엘, 네 민족은 진짜 하나님을 만났어.’라고 동의할 맘이 애초부터 없어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고 해도 그것을, 진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이해할 바탕이나 근거가 이방민족 에게는 없거든요.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것은 네 생각이고, 착각한 것이고, 너에게만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도 하나님이 있어.’라고 그 말만 하면 끝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가지고 전해보면 상대방이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네가 일방적으로 한 네 생각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해.’ 그 한마디로 그만 묵살되지요.


그럴 때 우리는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형편이 발생된다는 것을 이미 다 아십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듯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가 미운 것이 아니고 나 예수가 미워지기 때문에 예수 믿는 너희를 미워하게 되어 있다.’ 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을 줄여보면 ‘내가 사랑하는 너희는 어떤 자리에까지 동참해야 되느냐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일에 동참을 해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세상사람 으로부터 우리가 무시당하고 미움 받는 것은 세상이 널 보고 무시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이 예수, 날 보고 미워하는 것이니까 네가 그렇게 길길이 뛸 필요는 없다.’ 하는 겁니다.


이것을 또 다시 줄여서 이야기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당하는 그 미움에 필히 동참하게 하시는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게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이 미움이라는 것이 이야기가 되어버리면 미움을 받은 사람들끼리는 자동적으로 뭐가 형성되느냐하면 ‘미움 받은 너희들끼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가 형성됩니다.


저쪽에서도 미움, 이쪽에서도 미움, 서쪽에서도 미워하고 동쪽에서도 미워하고, 북쪽에서도 예수 전하다가 미움 받아서 이쪽으로 온 사람, 서쪽에서도 예수 전하다가 이쪽으로 온 사람, 그러니 그 사람들이 한데 모이면 그들 속에는 뭐가 있느냐, 비로소 사랑이라 하는 것이 움틉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새 계명이라고 합니다.


미움이 강하게 일어나서 미움이 몰리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생겨난 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걸 모르고 주님께서 ‘새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라.’ 하니까 서로 사랑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만들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은 또 하나의 윤리요 그것은 다 헛짓입니다. 그것은 자기자랑입니다. 미움이 먼저 있고 어떻게 해서 그 미움의 대상이 되다 보니까 그들 사이는 주님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미움을 받은 겁니다.


사랑받았습니까? 그러면 미움 받게 되어 있어요. 미움 받았습니까? 그러면 사랑받은 사람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움을 통해서 우리를 훌쳐내느냐? 그것은 성도라 할 찌라도 자발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성도라 할 찌라도 이유 없이 미움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선뜻 좋아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방금 이야기한 이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 내용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상당히 어려운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서 예외가 없다.’입니다. 자기백성 빼놓고 저쪽 백성을 친다, 이런 것이 없고 모조리 다 칩니다.


30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부르시며 그 거룩한 처소에서 소리를 발하시며 그 양의 우리를 향하여 크게 부르시며 세상 모든 거민을 대하여 포도 밟는 자같이 외치시리니 요란한 소리가 땅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 보면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설교 처음에 한 방식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성도에게 나타나시면 성도는 진짜 하나님을 어떤 인상으로 받느냐하면, ‘심판주가 나타나셨구나.’라는 인상입니다. 구원주가 아니라 심판주로 오셨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죠. ‘화로다, 내가 하나님을 봤는데 나는 망하게 되었다.’ 이사야 같은 경우에 얼마나 착실하고 바르게 살려고 애썼습니까? 그러나 직접 하나님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열심히 착실하게 살면 하나님께 귀염 받는다고 여겼습니다. 내가 평소에 나를 볼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는 느낌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은 그냥 건성으로 혹은 일종의 겸손 티를 내면서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사실 그대로 현실로서 ‘나는 망할 수밖에 없다.’라고 내뱉는 것은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 되기 전의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강도의 경우입니다. 어느 강도이든 다 핑계가 있게 마련이거든요. 애가 아팠다든지 집안이 가난했다든지 남들처럼 교육의 혜택을 못 받아서 그렇다는 식의 핑계가 있기 마련인데 그 강도가 주님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은 자기의 힘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님께 그냥 모든 것을 일임하지요.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해주세요.’ 당신 없이는 못살겠다, 그 말입니다. 그게 뭐냐,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나의 것이라는 것은 일체 조그마한 가치도 남겨두지 않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든 육체를 심판하신다.’는 말에서 우리가 따로 빠져나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육체를 다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다 생활에 바쁘다 보니 드라마를 볼 시간이 없을 것이고 저도 그런데 어쩌다 보게 되면 반드시 끝 부분에 선한 사람이 등장해요. 물론 악인도 이미 등장했는데 그 악인은 그렇게 애먹이다가 결국 미쳐버리거나 높은데서 뛰어내리거나 망하지요. 선한 사람은 꼭 잘되고 좋은 집 짓고 괜찮은 사람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식으로 결말이 나게 되지요.


그것을 보면 사람들은 희망을 가집니다. 아무리 사회가 악해도 선하게 살면 나는 선한 존재 편에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잖아요. 그게 뭐냐, 세상을 허투루 보고 있고 대충 봤다는 뜻이고 세상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알든 모르든 세상에서 그랬으면 좋겠지요. 세상의 악한 사람이 다 망하기를 바라는데 단 조건이 있어요.


나만큼은 선한 편에 서서 세상이 망하는 것을 목도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아마 그것을 희망삼고 보람삼아 교회 나온 사람들도 숱하게 많을 겁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진짜 하나님 만나면 선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나 모든 인간은 다 거짓되다.’ 한 사람도 없어요.


그 뒤에 보면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너는 빼주겠다. 너는 열외로 해주겠다.’라는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말 성도가 맞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는 망했다.’ 우리는 망했어, 우리는 완전히 망했어! 사람들에게는 절망이라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본인 자체는 절망이 안 되는 존재에요.


절망가운데서도 여전히 희망을 가지는데 그 희망의 주인공으로서 자기를 중심에 놓고 희망을 시도하는 버릇이 있어서 내가 내 인생을 맡겨놓으면 궁극적으로 절망에 이르지 못하기에 우리는 궁극적으로 지옥갈 수밖에 없어요. 주께서 원하는 절망에 우리가 도달 못하기 때문이고, 나만큼은 희망에 발을 하나 척 걸쳐놓고 있기 때문인데 그 걸쳐놓은 발마저 걷어치우는 재주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제대로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전체가 모든 인간에 대해서 심판을 해버리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심판자체로 이루어지는가, 구원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구원은 그리스도의 몸에만 해당되는 구원입니다.


우리의 몸은 심판받아야 되고 오직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리스도 몸에 붙어 있다는 것, 그 안에 합세되는 조건 하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될 때 우리도 같이 부활되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6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경전체를 통해서 왜 예수그리스도의 몸에만 구원이 주어지고 왜 우리에게는 심판만 줄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32장 29절을 말씀드리고 싶은데 이 이야기가 뭐냐,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장면입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밤중에 어떤 사람이 거기에 나타났습니다. 밤새도록 야곱은 그 낯선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해가 뜰 때에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 뼈를 쳐버렸습니다. 그때 야곱의 뼈가 위골되어 버렸어요. 그 사람이 날이 새어 ‘나로 가게 하라.’라고 했을 때 야곱이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당신으로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방금 제가 열거한 이 이야기 속에서 야곱의 변화를 봅시다. 야곱은 처음에 보통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여기기에 상대방이 만만해 보이면서 이정도면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되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당신의 공격을 저지해야 되겠다.’ 하고 상대방의 정체를 모르니까 그를 꺾기 위해서 야곱은 밤새도록 심하게 붙들고 달려들었지요.


그런데 야곱이 날이 샐 때 한 방 얻어맞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느냐하면,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낸 천사, 혹은 하나님이다.’라고 여기고 그 사람을 꺾어보려고 애썼던 그 애씀을 그대로 뒤집어서 이번에는 살려달라고, 당신이 축복해주지 않으면 축복이 안 된다고, 알든 모르든 간에 달려들어서 하나님과 한판 붙었던 죄에 대해서 용서해주시고 축복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지요.


그럴 때 그분이 축복을 해주는데, 여기부터가 어렵습니다. 여기부터 어려운 것은, 왜 하나님은 심판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을 다 심판해버리고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하느냐, 하는 대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2장 27절에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어요. 그러니까 야곱이 “……야곱이니이다.”라고 하지요.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29절에 보면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라고 할 때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네 이름이 뭐냐.’라고 할 때 ‘저는 야곱입니다.’라고 야곱은 대답을 해줬어요. 야곱입장에서는 자기이름은 하나님께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야곱이 축복을 받고 난 뒤에 ‘그러면 저에게 축복한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할 때는 ‘안 가르쳐줘.’라고 이야기해요.


왜 그랬을까? ‘내가 여호와니라.’ 하면 되는데 왜 안 가르쳐줬을까? ‘어떻게 내 이름을 함부로 묻느냐.’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야곱이 받은 그 축복의 상태라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 이름을 물을 수 없는 입장으로 바뀐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더 이상 내 힘, 야곱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는 중심자리에서 더 이상 야곱은 살 이유도 필요도 없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굉장히 이야기가 어렵지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길가는 신사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선생님, 한 푼만 도와주세요.’라고 했어요. 그 사람이 안주머니에서 소설책 하나를 꺼내서 툭 던집니다. 그러니까 거지가 소설책을 받고 난 뒤에 ‘실례지만 제게 이 소설을 던진 분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신사가 하는 말이 ‘너는 몰라도 돼.’라고 한 겁니다.


야곱이 달라는 그 축복을 야곱이 달라고 한다고 해서 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인간이 달라고 요구하는 축복은 성경의 성취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줘요. 소설책 한권을 거지에게 던져준다는 말은 ‘앞으로 너는 이 소설책의 주인공처럼 필히 그렇게 되어야 될 사람이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받은 사람은 거지 그대로 되면 안 되지요. 야곱 그대로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소설책의 주인공은 소설책의 주인공의 이름으로 살아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여기 이 근호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 근호라는 이름은 그리스도 앞에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 근호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 근호가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봐야 소용 없어요.


그리스도인이 가는 길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만들어내야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축복의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축복이란 그 자체가 결과물이에요. 우리가 축복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받아 챙기는 것을 복이라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치 않은 인간으로 살아가야 되는 그 결과가 주님께서 나를 다루고 있는 그 작업의 결과가 우리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이 결과가 뭐냐, 28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은 그 전에 뭘 했느냐, 에서와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어요. 하나님을 붙들고 축복 달라고 했고 또 끝까지 밤새도록 안 지려고 했어요. 그래서 야곱으로 하여금 이긴 자로 만들어주고 하나님은 스스로 야곱에게 진자가 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신 거예요.


일부러 져주신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야곱이 이겼다고 보지 않고 그것을 바꾸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도 이기고 사람도 이긴 것으로 쳐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을 거지같은 야곱 위에 소설책의 주인공을 가지고 덮쳐버린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 누구냐, 바로 언약을 이루신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사람을 다 이기기 위해서 장차 이스라엘 내부의 인물로서 메시야가 오서야 되는데 그 오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담긴 내용을 몽땅 다 완수, 완성을 해 줘야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 끝에 보면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나다나엘이 하는 말,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1장 5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는 분명히 우리가 알기로는 야곱의 꿈속에 나오는 꿈 내용입니다. 야곱이 꾼 꿈이에요. 그런데 야곱이 이스라엘로 전환되면 과거의 꿈까지 소급해서 야곱의 꿈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꾼 꿈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꾼 꿈은 개꿈이 아니고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임금 되시는,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꿈의 모든 내용을 완수해야 될 숙제 같은 내용으로서 미리 이스라엘을 통해서 꿈으로 꾸게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이라는 인간은 뭐냐, 야곱이나 이스라엘이나 같은 동일인물이지만 동일인물이면서도 야곱은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해야 되고 이스라엘은 야곱에게 이겨야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나는 예수님한테 져야 되고 예수님은 내 안에서 나를 이길 때 우리는 예수님덕분에 예수님과 더불어서 함께 이 육에서 이긴 자가 되고 영적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알려준 구원이 뭐냐, 심판은 모든 인류를 향한 심판이기에 어느 인간도 그 심판에서 면제될 사람은 없다. 그것이 먼저 쫙 깔려야 돼요. 눈 덮인 벌판처럼 쫙 깔려야 됩니다. 그 모든 인간은 심판받고 저주받아서 다 죽어야 되는데 그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 툭 튀어나왔다는 말은 죽음의 한계에 대한, 육의 한계에 대한 승리가 되는 겁니다.


그 승리자가 우리를 자신의 승리를 증거 하는 축복이라는 결과물로 소급해서 우리의 허접한 짧은 인생, 짧은 성도의 몸을 야곱이라 치고 우리에게 성령으로 축복을 해주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내 사람으로서 나의 증인이 되어라.’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오게 되면 나의 증인이 된다.’고 합니다.


성령이 왔다는 증거가 뭐냐,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았다는 것, 우리는 심판받아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한데 예수님 덕분에 구원되었다.’고 해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로 계심을 증거 하는 겁니다. 그 증거 하는 힘은 오직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그런 발상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 작업을 위하여 본문에서는 모든 육체, 한 명의 예외 없이, 심지어 예수님의 육체마저 주께서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마저 저주받고 죽어버렸어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모든 사람이 다 고요한 죽음의 바다에 덮이고 말았어요. 우리 힘으로 아무리 몸부림 쳐도 못 빠져 나옵니다. 그 어둠, 그 저주라는 담요 밑에서 재미삼아 한 번 살짝 들춰보지요.


담요 밑을 가만 들여다보니까 ‘예수 믿는데 제 인생이 왜 그리도 힘듭니까?’ 하고 자기 딴에 몸부림을 치고 있어요. ‘예수 믿는데 왜 이런 질병이 낫지를 않습니까?’ 가만 들어보면 무슨 개미소리 같은데 들춰보면 ‘예수 믿는 제 가정은 왜 피지를 않습니까? 왜 교회가 부흥이 안 됩니까?’라는 온갖 되도 않는 소리가 다 나오는 거예요.


덮어 버려라, 해서 다 덮어버리지요. 그래서 우리는 한 결 같이 그 야곱의 본성이 꾸물대면서 온갖 구더기가 다 설치지요. 그런 양상의 우리가 바로 위골된 인간입니다. 뭔가 망가져버린, 진즉 하나님 만났으면 망가진 것을 당연하고 감지덕지로 여겨야 될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야곱에게는 어퍼컷을 한 방 맞고 위골되었지만 십자가의 그 뾰족한 것을 가지고 아랫도리를 맞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에 얻어맞아서 멍이 퍼렇게 들면서도 돌아서면 원망이 또 튀어나오곤 하지요. 계속 망가진 인생을 질질 끌면서 다리 절룩거리면서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이 세계가 바로 어둠의 세계라는 겁니다. 날이 새매 야곱이 눈을 떠보니 천사는 축복만 남기고 천사는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브니엘이다.’ 하지요.


‘내가 하나님과 만났으나 내 목숨이 보존되다니 웬 떡이냐?’ 웬 떡이겠습니까? 우리 이름이 바뀌어서 그렇지요. 우리는 우리 이름 대신에 주신 이름이 있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의 것.’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새로운 축복의 결과물로 우리는 오늘도 이 허접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 자체가 축복의 결과물인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런 망가진 몸도 주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떳떳하게, 주님의 공로 힘입어 미움 받더라도 주님을 사랑하면서 증거 해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성경전체를 다시 보게 하여주옵소서. 우리가 복을 받아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축복의 결과물인 것을 아예 잊어버렸습니다. 진짜 하나님 만나면 당연히 심판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축복 주셔서 축복의 결과물로 사용해주시고 주님의 증거자가 되게 하시니 이 모든 영광을 주 앞에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