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강-렘 25장12-14(복역의 70년)-jer101124-(이 근호목사)
2010-11-26 14:00:02 녹취 : 오용익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25장 12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90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25:12-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여러 나라와 큰 왕들이 그들로 자기 역군을 삼으리라 내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에 행한 대로 보응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일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파악하게 될까요? 사람 손에 의해서 변화하는 것, 사람 손으로 뭔가 만져서 나오는 것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움직여서 변화가 되었다는 그것의 무게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구분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일로서 된 것이고 이것은 사람의 일로서 된 것이라는 것을 무슨 기준에 의해서 그렇게 결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교회에서는 알아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약속대로 된다.’ 이 말, 약속대로 된다는 말을 사람들이 오해해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계신데 약속대로 된다는 것은 두 종류의 인간으로 구분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양과 염소, 오른 편에 설 사람과 왼편에 설사람,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사람, 사랑받고 사는 사람과 저주받고 사는 사람,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들을 둘로 쪼개는 분류작업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일을 그렇게 하시는데 보이는 인간들은 사람을 볼 때 둘로 쪼개서 보지를 않아요.
‘저 사람이 나한테 어떤 이득을 줄까, 저 사람은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미리 가졌구나, 부러워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하나님이 세상을 둘로 쪼갠다는 생각을 전혀 못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일한다는 말은 ‘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겠지.’라고 내 팽개칠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파악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파악을 하느냐, ‘아, 저 사람은 천국 갈 사람이고 저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구나.’ 그것을 파악하는 가운데 또렷하게 하나님의 일이, ‘아, 하나님이 지금도 열심히 일하시는구나.’ 하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겁니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 결재 올려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인간들의 일이지요. 인간의 행함으로 얻어진 실적, 업적 같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뭐냐, 업적과 실적을 올리는 것이 아니고 ‘저 인간은 뭘 해도 자기 공로, 자기노력 덕분이라고 여기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라.’ 뭘 해도 그렇게 된 것은 주께서 그 사람을 그런 식으로 지옥 가도록 인도하고 있는 열심 있는 하나님의 작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너는 좁은 길로 가거라. 찾는 이가 적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세상을 둘로 쪼갰습니다. 소수지만 좁은 길로 가는 사람 따로 있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이걸 목사가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생활하면서도, 직장에서 컴퓨터로 서류작업을 하고 있으면서도 김 과장은 넓은 길, 최 과장은 좁은 길, 이렇게 눈에 띈다는 것은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을 그렇게 한다는 말이지요.
교회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하나님께서 왜 안 도와주시는가, 하나님께서 왜 내 기도에 응답을 안 해주시는가.’ 하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고 있어요. 부지런히 하신다고요. 우리가 자기이익을 우선하니까 그 하나님의 일이 눈에 안 띄는 겁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일을 하십니다.
뭐냐, ‘내가 이스라엘을 70년 동안 가둬놓은 바벨론 족속들을 그 70년이 끝나면 괴로운 세월을 보내게 할 것이다. 땅을 황폐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했습니다. 본문을 그대로 21세기의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면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아 지금 이 세상 사람들이 벌을 받고 있구나. 벌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대들고 원망하는 식으로 저주받고 있구나. 아, 이 사람들은 예레미야 25장 12절 말씀도 모르는구나.’ 하고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적용시킬 수가 있는 겁니다.
‘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5장 12-14절까지 정확하게 일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걸 모르고 맨 날 골방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언제 응답받습니까? 왜 내 소원대로 응답 안 해줍니까?’라고 자기 이익중심의 기도를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엉뚱한 것인데 자기 욕심만 채우고 있으니 그러한 관점이 하나님한테 저주받을 사람들이 평소에 하는 짓거리가 되는 거예요.
갓 바위가 저 산위에 있다고 해서 갓 바위가 아니라 밑에 내려와도 갓 바위에요.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어디 간다고 안 샙니까? 집에 있을 때부터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 바깥에 놓여 있지요. 그러면 구원과 관계없는 겁니다. 제가 월요일에 강의하면서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천국은 언약대로 되는 약속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약속과 언약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를 가요? 천국을 가요? 그것은 용납이 안 되는 이야기지요. 천국은 가보면 알겠지, 그게 아닙니다. 천국은 이 땅에서부터 약속과 언약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가게 되어 있는데 이 땅에서 약속과 언약을 소개해줘도 당최 관심이 없고 ‘죽어봐야 알겠지.’ 그런 식으로 사는 사람이 어디를 간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교회가 몸집을 키운다고 교회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몸집을 줄여서라도 새 언약과 십자가피, 지금 하나님의 일이 그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감사하는, 그 가치를 내 재산보다 고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두 세 사람 모여도 주님이 함께 있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이 교회 자체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구원돼요. 우리교회 주보 표어가 뭡니까? ‘복음으로 구원’입니다. 모일 때마다 구호 외칠까요? 교회로 구원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그렇다면 70년 이야기를 주님께서 왜 했는가, 그것을 설명할 텐데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먼저 쉬운 이야기를 할게요.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남들은 많이 가졌는데 그동안 나는 뭐했나, 이렇게 낙담하고 절망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끝에 가서 누가 승리자냐?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은 늘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아요. 복음 외치니까 따라오는 사람도 없고, 동행하는 사람도 없고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아요.
복음 이야기하면 다 떨어져 나가요. 나중에 무지 외롭고 쓸쓸하지요. 오늘 10시 반경에 전화가 왔어요. ‘우리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입니다.’ ‘사이트에 글 올린 것 지워주세요.’ ‘어떤 글을 말입니까? 인격을 모독했다거나 하면 지워야지요. 그런데 어떤 글을 지울까요?’ 하니까 ‘2008년도 10월 27일 날 질문 답변코너에 있던 글을 지워주세요.’ ‘2년 전이네요.’ 하고 찾아봤어요.
찾아보니까 조 ○성이라는 복○중앙교회의 목사입니다. 그 당시에 어떤 분이 우리 교회에 질문을 했어요. ‘이런 설교를 하는 사람인데 목사님이 평을 좀 해주세요.’라고 한 거예요. 그 설교의 주장이 뭐냐,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일단 교회 왔으면 그 다음에 살을 먹어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으라고 했는데 피만 먹으면 모자라고 살은 조금만 먹으면 안 되고 갈수록 많이 먹어야 하늘나라 상급을 많이 얻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거예요. 제가 2년 전에 글을 써놓은 것을 보니까 ‘예수님의 살점을 몇 킬로그램을 먹어야 되는지’라고 답변을 했어요. 그랬는데 그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막 대들면서 ‘당신의 글이 지금 온 인터넷에 퍼져서 자기교회를 우세시킨다.’고 한 거예요. 그래서 그걸 지워달라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 제 설교를 인터넷에 올려놓고 욕을 하면 굉장히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이고 뭐고 간에 다 주님께서 보고 계신다면 사람이 무서울 것이 없겠지요. 우리가 혹 바른 복음 전하는데 욕을 하면 복음을 복음대로 전하다가 욕을 얻어먹으니까 성령이 함께 있는 것이고 혹시 그걸 보고 욕을 하면서도 은혜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오히려 그렇게 욕을 하는 과정이 복음이 유포되는 과정이 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니까 내버려두세요. 하나님이 세우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겠지요.’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교회 운영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지요.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30분간 다투었어요. 나중에 고발한다고 협박을 하는데 고발당할 건더기도 없어요. ‘그런 것으로 협박하시는데 애초부터 우리는 다 망했다고 여기고 시작합니다. 그런 것은 안 통합니다.’ 하고 끝냈는데 도대체 뭐가 두렵냐는 말이지요.
마지막 끝에 가서 진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뭐냐, 그래서 그 끝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예레미야를 통해서 한 거예요. ‘유다백성들아, 너희들은 끝까지 가봐야 안다고 하지? 나는 주님의 계시를 받아서 끝을 알거든. 끝을 소개할게.’라고 제시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만 아니고 성경전체 부분이 항상 끝에 가면 이렇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내하라, 견뎌라, 환란 중에 기뻐하라. 끝에 가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흰 옷 입은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 이 끝 지점에 섰다고 생각하고 뒤돌아서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의 경쟁에서 일시적으로 이겼다, 졌다 하는 것은 아무의미가 없는 겁니다.
늘 끝자락에 서서 살아가야 되지요. 그런데 이 끝을 고맙게도 누구한테 경험케 했느냐 하면 유다백성에게 경험케 했었어요. 끝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대목에 왔습니다. ‘얘야, 이게 끝이야. 이게 좁은 길이야.’라는 식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십자가마을 칼럼에 두 사람의 실명을 거론 했습니다.
제가 잘 실명을 안 쓰는데 이준성도님과 박 윤진 성도님의 글을 거론하면서 왜 이 사람들의 글이 탁월한가, 칭찬의 제목을 걸고 썼어요. 이게 칭찬인지 욕인지를 듣는 두 분 당사자들이 판단할 것이지만 저는 일단 칭찬으로 여기면서 쓴 이유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으로 성경을 보기에 모가지만 내놓아요.
몸통은 감추고 모가지만 내놓고 믿는 척들을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또 모가지를 쏙 집어넣어요. 꼭 거북이 같아요. 교회 와서 믿는 척들을 하다가 바깥에 나가면 ‘휴, 몸통을 들킬 뻔 했구나.’ 하고 모가지 쏙 집어넣는 식이에요. 그런데 이 준 씨와 박 윤진 씨의 글을 보면 모가지만이 아니고 자기를 둘러싼 몸통부분을 스스로 해체하는 거예요.
“또 다시 내가 나를 믿을까 싶어서.” 그러니까 주님을 믿는다 하다가 여차하면 발 끊으면서 자기가 그동안 살아왔던 자기영역에 쏙 기어들어가서 굴속에 들어가는 식으로 모가지만 빼는 식으로 할까봐서 아예 자기가 돌아갈 루트를 폭파시켜 버리는 거예요.
‘나는 이제 주님 아니면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글 쓰다가 남에게 우세당하고 쪼다가 다 되어서 돌아갈 곳도 없고 내 자존심 챙길 것도 더 이상 없습니다.’ 하는 식으로 자기 사람의 구조, 제가 움 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자기의 거처할 초막집을 부수기 위해서 그 구조를 설명하는데 그 구조가 사실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몰래 숨기고 있는 자기 자리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그들을 보면 우리가 평소에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고 규명해내지 못한, ‘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 거야.’라는 것을 아주 잘 표현을 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의 천국 갈 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죽을 때, 십자가 앞에 설 때, 우리의 자존심을 유지하게 위해서 지었던 그 딱딱한 움막 틀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게 허위고 위선인데, 그걸 탁 깨버리자 그 말이지요. 그걸 두 사람의 평신도가 해주니까 더욱더 고맙지요. 왜? 목사는 지식 팔아서 생계유지하려고 하니까 진짜 자기 모습은 교회에 쏙 숨겨놓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그 목사를 보고 하는 말이 ‘교회를 깨라.’는 말이지요. 교회를 깨지를 못해요. 왜 교회는 자기 움집이니까, 교회를 부정해버리면 더 이상 자기는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청춘을 여기에 다 바쳤는데.
그래서 제가 일부러 두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글을 쓸 때는, 예수님께서 자기부인을 하라고 했으니까 자기부인을 하는 식으로 깨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 움집이 뭐냐, 유다나라에서 성전이었고 그 성전보다 더 중요한 자기가 딛고 사는 땅이었습니다.
그 땅과 그 성전을 깨뜨리고, 요새말로 하면 교회 부수고 자기집구석 부도나게 만들고, 사업 부도나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주께서 하는 말이 ‘어때? 네가 마지막을 그토록 경험하고 싶었지? 최후의 설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궁금했지? 이 자리야!’라고 주님께서 말씀으로만 지식으로만 ‘끝에 가면 하나님만 바라봐야 돼. 끝에 가서는 하나님만 믿어야 돼.’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상황으로 그 나라 그 가정 그 가족들을 해체시켜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역사한 거예요. 그러면 왜 하필 70년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제가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는데 다니엘 9장에 보면 그 70년이 70이레로 달라집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 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70년이라 하는 것은 역사를 영원히 질적으로 70이레로 정리되기 위해서, 정리하는데 필요한 자료로서 유다나라가 동원되었고 유다가 70년 동안 이방민족에게 억압받고 그렇게 한 이방민족도 70년 동안 억압받게 됩니다.
그 70년이라는 것이 역사의 하나의 그림자거든요. 진짜 실체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70이레에 묶어놓기 위함이 실체입니다. 그것이 실체인데 그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70년 동안 포로 잡혀 간 겁니다. 더 상세한 것은 겨울수련회 때에 하겠습니다. 다니엘의 70이레라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전체를 설명하는 겁니다.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냥 70이레라고 하면 되는데 그걸 세 토막을 내요. 왜 세 토막을 내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70이레로 끝난다고 하면 될 것을 이상하게도 7이레, 62이레, 1이레로 세 토막을 냅니다. 이것은 전 인류의 역사가 세층, 사실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두층이 이 세상을 진두지휘하면서 이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 두 가지 층이란 아래쪽은 7이레로 위쪽은 1이레인데 중간의 62이레라는 것은 간격을 주기 위해서 주어져 있습니다. 밑에 있는 7이레와 위에 있는 1이레를 가지고 시루떡이 층층이 색깔이 다르듯이 층의 색깔이 다르게 해요. 그렇게 70이레를 세 토막 내었다는 것이 중요한 아이디어가 돼요. 그래서 1이레에 역사의 주인공이 나타나는데 그 분이 인자입니다.
인자가 1이레 되는 때에 오셔서 그냥 왔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일을 하십니다. 그 일이 뭐냐, 다니엘 9장 24절에 보니까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영원히 속죄됨)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그 때가 70이레로 마감될 것이라는 거예요. 1이레에 오시는 인자되시는 분이 어떤 일을 하느냐, 죄 있는 이 세상을 가지고 이 죄 많은 땅에서 천국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에요. 우리는 하늘나라가 그대로 내려오면 천국인줄 알잖아요. 아닙니다. 하늘나라가 그대로 내려오면 하나님이 주인공이에요. 예수님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이 지상에 있는 죄를 가지고 천국을 만들어야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시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필히 지옥도 오직 예수님의 심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에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가운데 ‘인간중심’이 없지요? 세상은 인간중심이 아닙니다. 세상은 언약중심이고 약속중심이지 인간중심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이익밖에 몰라요. 지금 유다나라는 주님께서 다루시는 장치에 불과합니다. ‘70년 동안 고생해라.’ ‘왜요?’ ‘죄지었잖아.’ ‘죄지었으면 멸망해야지 왜 70년 입니까?’
죄인이면서도 70년을 보여줘야 되는 이유가 70년이 끝나면 너의 죄가 어떻게 용서되는가, 누가 나와서 용서해주는가,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스크린, 도화지로서 사용하는 것이 유다나라가 되는 겁니다. 아울러 오늘날 성도가 그러합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세상은 끝이 있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라고.
주님만 의지하라는 것이 언제 우리에게 느껴집니까? ‘주님만 의지해야 돼.’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진짜 끝, 거지 나사로 같이 재산 다 날아가고 가족은 이혼하고 죽고 다 헤어져서 진짜 끝에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느냐, 오직 주님만 의지하지요. 또 다른 예로 우리가 강도가 되었을 때, 체포되어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우리는 누구만 의지합니까? 주님만 의지하지요.
그렇다면 그 끝에 선 기분으로 지금 살게 되면 되어가는 모든 것, 자식이고 남편이고 전부 다 복덩어리입니다. ‘아, 내 새끼 복덩어리가 시험 쳐서 또 꼴찌 했구나. 복덩어리야. 또 떨어졌구나. 복덩어리야.’ 우리가 끝에 서지 않고 자꾸 중간지점에 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하지만 끝에 서서 다시 보게 되면 모든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강 장로님 부부는 감기 때문에 교회 못 오셨다 하는데 참 안타깝지만 매주 감기 걸리는 것은 아니거든요. 참 오랜만에 걸렸습니다. 우리가 감기 걸리면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매일 걸리지 않고 매주 걸리지 않고 매달 걸리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건강할 때 감사했습니까? 턱도 없는 소리지요.
건강할 때는 자기가 건강관리 잘해서 건강하다고 했지 언제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까? 건강하면 또 다른 욕심을 채우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모르고 우리는 아쉬운 것이 없을 때는 항상 나를 위해서 움직이는 나였습니다.
내 자존심을 위해서, 내 명예를 위해서, 내가 잘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오직 나만을 위하여 살아왔는데 예상 밖으로 몸이 아프다든지 재산이 날아간다든지 뭔가가 내 뜻대로 안 될 때는 그 순간 다시 한 번 ‘이러다 망할지 싶다. 망하면 어떻게 하지? 망해도 주님만 믿어야지.’ 끝 지점을 삽입시키는 약속이 개입되는 겁니다.
참, 우리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는데 우리가 언제 그것을 생각하겠습니까? 평생토록 우리가 철이 들 일이 없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이끌어 주셔야 되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 70년 동안 벌 받는 것, 유다백성들로 하여금 세상 모든 역사는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용서받을 자와 용서받지 못할 자를 70년 복역이 끝나는 1이레에 오셔서 세상심판을 하시는데 그 기준이 희한해요.
십자가입니다. 심판의 기준이 십자가에요. 숨겨져 있는 십자가비밀을 믿는 사람은 용서받은 복 받은 사람이고 십자가 피만이(피와 살점이 아닙니다), 그 언약의 피,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끝에 서더라도 천국에 갈 사람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이레 밑의 7이레라는 것은 그들의 성전도 무너지고 땅도 없고 유리하고, 유대인들은 아직도 돌아다니잖아요, 그렇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죄, 그것은 바로 원래 인간이 처음부터 그랬어도 상관없는 족속인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빈틈없이 잘 되고 있는데 우리는 하나님 쳐다보면서 일이 잘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얼마나 따지고 들었습니까? 주제파악도 못하고 남하고 비교하면서 쓸데없는 중간점검에 나섰는데 그야말로 좁은 길, 끝에 섰다고 생각해보니까 마지막 웃는 자, 마지막 승리자는 예수님의 피만 감사하는 그들임을 이제 알게 되었사오니 이 은혜가 지속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