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원수관(觀)' . 1. 참 신앙이라면 꼭 들어 있어야 될 '하나님 원수관(觀)' 누구와 원수지간이 되었다는 것은 상방간에 피곤하다. 아예 원수 관계가 소멸되는 그런 신앙이고 싶어한다. 하지만 신앙의 원천자는 따로 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어떤 신앙을 형성시키기를 원하시는가가 관건이어야 한다. 하나님에게는 분명 저주하고 싶은 하나님의 원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 원수는 성도의 원수로 이어지게 된다.
성도의 마음속에서도 하나님과 동일하게 저주하고픈 대상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원수를 향해 불타는 적개심은 성도의 신앙 속에서 같이 적개심이 피어나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예외가 아니었고 이삭이나 야곱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 신앙의 족장들은 결코 자기 편한대로 신앙 체계로 임의로 만들 수 없는 입장에 놓인 자들이었다. 자신들이 다지고 만들어 낸 신앙이 아니었다. 신약 성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믿음이란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결과요 반응이다. 의도적으로 '원수 개념'을 삭제하려고 애써서는 아니된다. 물론 원수에 대한 인식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일런지는 모른다.
이웃과 마찰 없이 사이좋게만 지내다가 조용하게 세상을 하직하려는 심성은 얼른 보면 퍽 겸손하게도 보이고 가난한 마음처럼 비칠 것이다. 어쩌면 성숙된 신앙인의 표본처럼 간주될 법도 하다. 우리 자신에게 '원수'가 존재한다는 말은, 한시라도,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라도 그 원수를 의식하기를 요구받는 셈이 된다. 마치 사냥감이 어디로 어떻게 출몰하는가를 집중 주의를 기울이는 사냥꾼의 심정과 같다. 비신앙인의 상식으로 봐서는 이런 '원수'에 대한 집중적 대응은 도리어 사서 고생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적개감을 풀고 열린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고매한 신앙 인격에 부합되는 모습처럼 여겨질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원수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더불어 교제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욱 충실한 것이 신앙인의 본분처럼 받아 드려지고 있다. "네 할 일이나 잘하라. 자신의 일에 소홀한 자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정력을 엉뚱한데가 소비하지."라는 충고나 아니면 "나를 봐라. 나는 누구하고도 잘 지내잖아. 자신의 주위에서 할 수만 있다면 적을 만들지 말라. 그것처럼 편하고 행복한 삶이 또 없을 것이다. 위협 느끼지 않고 사는 것보다 더 편한 것이 있을까!"라는 의견이 제대로 된 신앙인의 마음가짐으로 간주되는 세상이다. "좋은 게 결국 좋은 것이요 그저 그저 은혜롭게만 살자. 어디 가도 모나지 말고 둥글게 둥글게 사는 지혜를 습득하는 것이 교회에 충실히 다닌 반대급부요, 하나님이 주신 정신적 축복이 아니겠는가. 어떤 미움의 대상, 싸워야 될 원수를 설정해 놓고 집요하게 의식한다는 것 자체가 피곤한 인생을 자청하는 우매한 짓이 된다"라는 말이 신앙의 성공 사례처럼 받아 드려지고 있다.
그렇다.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라면 원수를 아예 제거하는 것이 요령 있는 신앙 지혜일 것이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이라는 성경 말씀이 이런 주장의 편을 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로마서 12:17과 19를 더불어 읽어보면, 자기 몸 하나 편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평화롭게 지내라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심판과 원수를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의식하고 그로 인해 신음하고 고통에 놓여 있는 자이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7,19) 한 마디로 말해서 꾹 참아라 는 말이다.
(약 5:7) 피눈물 흘리면서 심지어 목숨까지 빼앗겨 가면서도 참으라는 말이다.(계6:10/12:11) 원수가 이제 사라져서 참을 만하다는 것도 아니요 인격이 성화 되어 원수가 원수처럼 느껴지지 않고 형제처럼 간주된다 가 아니라 주께서 필히, 정말이지 필히 심판하실 줄로 확신하므로 자기 손으로 심판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참 하나님의 원수를 발견하게 되는 경우란 성도가 하나님의 원수를 자진해서 요청하는 경우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일부로 원수를 만들 생각을 누가 할 수 있단 말인가? 있던 원수도 형제가 되는데서 행복이 되는 것이지 형제마저 원수로 만들어서 구태여 행복한 삶을 꾸려 가겠다는 그런 바보 같은 자가 과연 있겠는가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원수는 성도의 요청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 신앙이 선물로 주어질 때 필연적으로 함께 주어지는 내용성이다. 절대 피해 갈 수 없이 등장하는 '하나님 원수'의 존재에 주목해야 한다.
마치 다윗에게 있어 골리앗의 존재가 이와 같다. 사울 왕이나 여타의 이스라엘 장정들은 아예 골리앗의 존재를 잊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 신앙이 형성되는 상황이 아니다. 가상에서 조작되는 거짓 신앙일 뿐이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친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하나님 원수의 앞잡이들이었다. 욥을 넘어뜨리기 위한 사단의 하수인 구실을 하기 위해 주위에 빈틈없이 포진된 적들이었다. 재산이 날아가도 자녀들이 모두 죽어도 나타나지 않는 사단이 결국 친구의 얼굴로, 아내의 얼굴로, 가족과 일가 친척의 이름으로, 동료와 동기생이라는 입장으로 욥 앞에 출몰한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경우를 만났고 사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와의 관계 유지는 모든 성도에게 예외 없이 주어지는 보편적 운명 체계이다. 성도들은 '원수의 흔적'을 지닌다. 고난과 고통의 흔적이다. 그러나 현재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되지 않는다.(롬 8:18) 성도가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자기 의와 합리화를 위하여 모든 신앙 체제를 임의로 해석하는 일이다. 즉 "나는 드디어 행복한 삶을 얻어내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힘들어 싸울 원수같은 이웃이 발생되지 않을 정도로 나는 성숙한 인격체로 성화 되었다. 선으로 악을 이겼다. 온유함으로 과격함을 이겼다. 이것이 아마 하나님의 형성을 본받아라 는 최고 수준의 신앙인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와 일치되는 마음가짐이다.
'하나님의 원수'가 그 정체를 최종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개입하시는 경우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원수'란 인간으로서 도저히 예상치도 못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을 통해 너무나도 우리네의 본심과 동일한 모습의 존재자로서 나타나는 자이다. 이러한 경우를 창세기 22장에서 만날 수 있다.
2. 창세기 22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원수'
거기에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만남이 있었고 그리고 구체적 행위가 주어졌고 그 행위에 결부된 하나님의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드디어 '적'에 대한 언급이 아브라함의 씨에게 내려진 축복과 병행해서 제시된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5-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소개할 필요성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조성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원수'와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원수'는 아브라함 자손이 중다하게 등장하는데 유일한 방해물로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방해하며 하나님 왜 그 방해를 극복하면서까지 구태여 아브라함 자손을 많이 생산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원수에게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토록 '하나님 원수'편에서 볼 때 거부하고 싶은 결과를 도리어 아브라함 통해서 남기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 원수' 끼리만 알고 있는 쟁투의 대상이 들어 있을 것이다.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29) 이 본문의 말씀은 귀신들린 자가 귀신의 마음으로 예수님에게 한 말이다. 이미 창세 전부터 비밀스러운 내막들이 인간 역사 속에 갈등적 상황을 유발하면서 실려 내려오고 있었고 인간들만이 그 비밀에 어두웠던 것이 분명하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혈통의 양적인 보존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하늘의 비밀이 담겨져 있는 아브라함 자손이 되어야 함이 암시된다. 현재 아브라함에게 있어 자손이란 이삭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입장에서 볼 때 이삭은 '하나님의 원수'를 소개할 유일하고도 충분한 소재가 된다. 원수란 적개심의 대상이다. 미워해야 될 상대이다. 미움에 대한 반대 성향은 아마 사랑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재료로 삼아 그 사랑을 근거로 해서 진정한 미움과 적개심의 대상을 찾아지도록 조치하시는 아브라함을 찾아온 하나님의 의도이다. 인간들에게 있어 왜 이런 방법 이외에는 '하나님 원수'에 접근하는 다른 방식이 없느냐 하는 것은 이미 인간 자체가 '하나님 원수' 안에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원수가 추구하는 성향을 스스로 거부할 자질이나 능력이 전혀 불가능함이 확실하게 들추어내기 위함이요 이러한 인간의 근원성 발췌 또한 언약의 필수적 요건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재삼 알리고 싶은 사항은, 하늘의 비밀에 접근하는 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그 어떤 품성으로도 가능치 않음을 분명히 하고 싶으신 것이다. 그래서 언약의 성취나 축복의 근거가 인간 쪽에서 도출되지 않음을 확실히 인식시키고자 하신다. 지금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아브라함이 너무 너무 사랑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점을 토대를 삼으시고 일을 시작하신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이삭을 아끼는지 분명하게 아시고 일부러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끼어 들어오신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단순한 혈육적 사랑으로 이어지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다른 관계로 이어지기를 원하셨다. 그 다른 관계라는 것이 어떤 관계를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원수' 사이에서 하늘의 비밀을 놓고 그 실현 여부를 결정 짓는 전쟁의 상태를 가지고 새로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의 관계를 맺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 가문이라는 한 사적인 가정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축복이라는 차원에서 축복을 해석해서는 아니된다. 참으로 한 가정의 번창이 축복의 내용이라면 구태여 새삼스럽게 '대적'에 대한 언급을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접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차라리 현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가정의 다복함을 깨고 들어오는 도리어 하나님 그 자신이 아니신가. 그렇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혈육의 정을 끊고 싶은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원수'가 벌리는 전쟁의 그 현장 중심부에 이미 아브라함의 가정은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혈육의 정과 사랑으로 이삭을 보는 것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가정에 이삭을 남긴 진정한 취지가 상충되어서는 아브라함을 통한 원수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래서 자식 사랑 안에서 '하나님 원수'에 대한 미움까지 창출하려는 것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의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령했다. "나의(하나님) 아들 이삭을 나에게 도로 바쳐라"라는 식으로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이다.(창 22:2) 이미 이삭은 아브라함 소유의 아들, 즉 아브라함과 혈육적 관계에 서 생각되는 귀한 독자로 간주하시고 하시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혈육적인 선에서 너무나도 자기 아들 이삭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번제, 즉 아브라함 언약의 외부적 형식을 가득 채워 줄 진정한 재료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삭은 분명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의해서 생산 된 자식이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혈육에 속한 아브라함 소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기초로 해서 언약의 내막까지 아브라함을 이끌고 가시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제를 요구하시는 것은 창세기 15장에서 체결된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재현이요 반복이다. 문제는, 번제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그 요구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잃어버림이 과연 모순되는 상황이다 는 점이다. 즉 하나님은 혈육적 입장에 놓인 자들이 필연적으로 모순이라고 판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을 유도하신다. 모순 관계에 있어서는 한쪽이 자신의 절대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문제 해결은 되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 소유의 아들인 이삭을 가운데 두고 아브라함을 향하여 네 아들과 연계해서 사랑의 포기, 즉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이삭을 향해 품어 왔던 그 모든 인간적이고도 혈육적인 관계의 전면적인 부정을 촉구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필히 이삭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죽음과 더불어 언약 안에서 아브라함 자신의 역할이 이제는 종식되어야 될 처지에 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 동안 아브라함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몰고 다녀셨다. 원치 않는 상황을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창출해 오신 것이다. 언약 체결은 결코 아브라함의 아이디어가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 아니다. 적을 이기고 싶어 안달이 난 자도 아니요 아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기 생명까지 바칠 위인이 아니다. 그는 자기 안전과 잇속을 위해 아내까지 서슴없이 권력에 넘겨 버린 자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련의 사건 전개 안에서 언약 상대자인 아브라함이 결코 언약 성취자가 아닌 자로서 언약 안에 깊이 관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 본인이 알고 있는가를 묻고 계신 것이다. 이제 그 관여된 관계가 보다 명확하게 그 구조성이 드러날 시점이 되었다고 하나님은 보고 계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혈육적 관계선상에서 너무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그 점이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 원수'가 자리잡은 근본 터를 충분히 보여주는 환경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비로소 언약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 원수'에 대한 결정적인 비책이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 육의 무능성이요 불가능성이다. 즉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 인간이 무능하고 불가능함을 분명히 하자는 것은 '하나님 원수'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를 통째로 장악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하고는 무관한 것이 '하나님 원수'가 지닌 허점임을 궁극적으로 폭로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외부적으로 드러난 그 동안 아브라함을 괴롭혀 온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니다. 그런 자들은 그저 하나님 전쟁에 있어 배경적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되레 아브라함의 밥이다. 그런데 왜 막강한 힘을 가진 애굽의 바로 왕이라든지 가나안 10족속이 미약한 외지인에 불과한 아브라함에게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지 그 근본적 언약 구조를 하나님은 하나 둘 씩 벗겨 오고 계신 것이다. 아브라함의 기도 여부에 따라 아비말렉 추장 가문의 존속이 결정되고 조카 롯도 소돔과 고모라라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창 19:29)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갈등 구조가 아브라함이 지고 가는 언약적 특수성에 기인된 상황이라면 이제는 그 언약적 구조를 본격적으로 폭로되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하나님은 생각하신 것이다. 참으로 아브라함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데서 아브라함은 자기 자식에 대한 자신의 사랑마저 죽음으로서 종결지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의 진척 과정으로 이어져야 그 끝에 '하나님 원수'의 진정한 정체가 드러나고 동시에 하나님의 축복의 진정한 성취력이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달성됨이 확연해 질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와중에서 아브라함이 언약의 상대자로서 보여질 수 있는 바는, '하나님의 원수'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을 통제의 치명적인 허점으로 작용하는 비혈육적 속성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순전히 하나님에 의해서만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의 능력은 철저히 배제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앙 태도야말로 '하나님 원수'로 하여금 아브라함 씨에게 패배 당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유일한 육적 상황이다. 곧 언약에 준해서 아브라함 자신은 자신의 혈육적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롬 4:17-22) 언약의 성취는 언약의 본질이 역사 안에서 앞으로 전개시키면서 점차 드러내실 또 다른 인물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분은 '네 씨'라고 소개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분의 속성에 대해 '여호와 이레'라는 신앙 고백을 털어놓는다. '나 말고 나의 씨'가 되시는 그분에 의해 원수의 성문이 열려져야 하고 그 분에 의해서 약속은 성취의 면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린 것이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니요 없는 자손을 있게 하신 것이 아브라함의 솜씨가 아니라면 아브라함은 언약을 위해 죽은 자의 역할을 끝까지 수행해야 하고, 없는 자는 자리를 자기 자리로서 계속 간직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이점을 숙지하고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그래야 믿음의 조상답고 언약의 상대자다운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미련 없이 죽이는 것은 이삭은 언약이 구체화 된 인물이기에 그 안에 아브라함 자신의 육이 함유된 채 드러난 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이삭의 죽음은 아브라함 자기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육을 죽이시려고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기존의 혈육을 유지하고 고수하는 식으로 활동하기로 작정했고 또한 인간들은 사단의 조정에 의해 자기 육과 몸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언급하시는 근원적 죄성을 가리고 죄를 포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는 인간들의 자기 육 사랑을 철저하게 고수하게 만들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네 몸, 네 육, 네 핏줄을 놓치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고 악마는 인간들을 위협해 왔었다. 욥에게도 이런 식으로 위협을 한 것이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하나님은 '하나님 원수'가 은폐된 채 흘러 퍼지는 그곳을 적개심으로 폭파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원수'의 진정한 아지트가 어디인가를 드러내려고 하신다. 악마가 자생하는 곳, 악마가 상주하면서 인간 세계를 배후 조정하는 그 중심지, 그곳에 중심으로 벌어지는 하늘의 전쟁의 현장을 하나님은 아브라함 앞에서 또다시 확인시키시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이 사랑은 '하나님의 원수'의 대한 적개심을 내용물을 다지고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도 높은 사랑의 질투심이 심판이라는 폭력으로 실천에 옮겨지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사랑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0-15) 적어도 언약 상대자 아브라함만큼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되어야 했다.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악마의 정체를 들추어내어 거룩을 유지하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 안에 놓여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향하여 할례를 명하셨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9-14) 할례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대상자의 피를 받아 내는데 있다.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출 4:25) 피는 곧 생명이다. 상대자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심판의 차원에서 취하겠다는 것이다. 유월절을 무사히 통과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가 결코 이스라엘 소유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출 13:2) 거룩 되지 못한 자의 생명은 거룩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언약이란, 거룩치 못한 자를 거룩한 세계에 입성시키기 위한 장치이며 조치이다. 하나님께서 이 할례 언약을 명하기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창세기 15장) 할례 언약이야말로 그 언약의 구체적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남은 것은 이 언약이 지향하는 그 궁극적 구체성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점이다. 할례 언약을 난지 8일만 받았던 최초의 인물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이삭이다. 그러니까 이삭이라는 아들은 할례언약의 취지를 궁극적으로 보여주어야 된 사명을 지녔다. 할례는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이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이 본문에 볼 것 같으면, 할례의 궁극성은 육의 몸을 벗겨 내는 것이다. 그러자 육적 몸밖에 없는 자들에게는 할례는 삶이 아니라 곧 죽음이요 철저한 심판을 뜻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할례만이 지니고 있는 대신 죽으심의 의의가 드러난다. 바로 이러한 십자가 사건의 취지가 창세기 22장에서도 미리 주어진 것이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이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13절) 여기에 보면 '아들을 대신하여'라는 구절이 나온다. 수풀에 뿔이 갇혀 꼼짝 못하는 그 수양의 모습은, 언약이 주는 운명의 사람으로서 꼼짝달싹 못하게 묶여 있는 아들의 모습과 동일하다. 아들 이삭의 모습과 꼼짝없이 수풀에 붙들려 있는 수양의 모습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인간의 혈육성이 야기시킨 결과들을 본다. 내 소유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은 아브라함 자신의 육의 몸을 벗기 위해 대신 죽어 가는 언약적 사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의 주체나 축복의 씨앗은 더 이상 아브라함 자신이 아니다. 언약의 중심축이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씨로 미끄러진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8) 자신의 씨가 할례의 취지를 구현하면서도 동시에 아비인 자신의 육적인 몸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과정이 전부 언약의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바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땅의 이름을 통해서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준비해 두심"에 방식에 의해서만 언약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예수님 보시기에는 아브라함에 예수님 자신을 보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이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라는 개념이 왜 이런 과정에서 꼭 거론되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를 이길 수 있는 바탕에는 인간의 모든 육적인 요소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은 이미 악마 활동의 중심 사역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힘이 이미 인간의 육체 속에서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음부의 권세를 이긴 육만이 하나님의 원수를 이길 수 있다. 골로새서 2:12를 다시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신앙과 동일한 신앙을 읽을 수 있다. 즉 자손이 없는데서 하늘의 별같이 많아지는 것과 죽은 자식이 되살아나는 모든 능력의 배후에는, 메시야에 의해 대적의 문을 장악한 그 승리의 결과로 대신 죽으심의 효과가 얻어진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육은 하나님의 원수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메시야와 함께 같이 할례 받는(세례 받는) 언약 백성에 한해서만 하나님의 원수도 어찌할 수 없다. 이미 육의 몸이 멸해졌기 때문이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아브라함이 자기의 혈육에 속한 사랑하는 자기 소유의 자식을 죽음에 넘기는 이유는, 진정 누가 언약의 성취자이며 그분의 어떠한 작용으로 말미암아 가능했던가를 확실히 나타내기 위함이다. 죽음에 넘기워도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면 더 이상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육이 된다.(마 16:18) 그 육 덕분에 아브라함도 모든 신앙의 계열의 사람들도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의 원수고 이기는 것이다. 축복의 근원은 다름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 원수의 성문'을 함락시키는 힘을 지녔느냐에 있다. 창세기 24:60에서 라반은 장차 이삭의 부인될 리브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축복을 한다. "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여기에 보면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하나님의 원수를 염두에 두고 그와의 전쟁을 고려한 씨만이 언약 속에 씨라고 할 수 있다. 이 언약의 운명을 지니고 나온 자들은 반드시 육의 죽음과 생명에로의 회생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하므로 장차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실제적 언약 성취자의 운명에 미리 함께 참여되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와 신약의 사도들도 한결같이 고백하는 바가 곧 이것이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벧전 1:10-11)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원수'를 알고 그 원수가 무엇을 근거지로 하여 하나님과 싸우는 것인가도 안다. 그것은 기존의 혈육적으로 물려받고 있는 아담의 몸이다. 이 몸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복을 성취하려고 행위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대신 죽으심을 원치 않는다. 단지 대신 모범자만 원할 뿐이다. 자신들이 지닌 육적 능력을 믿고 거기에서 자신의 의를 도출해 내어 그것으로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결코 자신을 죽음에 넘겨우지 않으려 한다.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서 예수님은 주저 없이 질타하신다. 상대가 누구든 상환치 않으시고.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이 본문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사람의 일= 사단의 일'이다. 이는 곧 '베드로=사단'이며 '사람의 일≠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이며 더나아가 '나의 일 = 사단의 일≠ 하나님의 일'이다는 공식이 틀이 성립된다는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누가 하시는가?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8-29)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보낼 자를 따로 하나님의 보내시겠다는 의향과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인간들의 의향를 임의로 분리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 홀로 다 하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며 그 외의 인물의 일은 단호히 아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분이다. 다른 자는 결코 아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8-39)
3. '하나님의 원수' 앞에서의 신앙인의 자세 '하나님 원수'에 대한 저주심이 누락된 신앙이라면 하나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종교 심성을 지닌 채 살아가는 자이다. 참된 신앙이냐 아니냐의 유일한 기준은 예수님이 지니신 신앙에 국한된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신앙은 구약에서 언급된 신앙의 완성형으로 나타났기에 오늘날 자기 신앙을 점검하고자 하는 성도에게 있어 구약의 신앙 구조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가 곧 예수님에게도 원수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참된 성도에게도 동일한 상대일 것이 분명하고 또한 여기에 대한 명확한 감각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 성도의 정신은 착오 없이 목표점을 겨냥하게 된다. 모호하거나 잊혀질 대상이 아니다. 어느 자리에서든지, 어느 때이든지 항상 또렷하게 파악되는 표적지이다. 여기에 실수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그 어떤 현장이든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조성된 언약의 현장인 것을 잊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성도 자신의 체험이나 경험이나 성경 지식의 조합으로 하나님의 원수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그 정체는 항상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게 된다. 기껏 시행착오의 반복 속에서 어렴풋이 알아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밖에 늘어놓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원수'는 그 어떤 경우라는 인간의 인식의 능력과 느낌이나 이성의 능력으로 파악되는 그런 상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야 비로소 그 정체를 털어놓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 파악에 나서는 그 시도자를 가만두지 않고 정신적으로 배후 조정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이 아니면 '하나님의 원수'가 밝혀지지 아니한다. 이단들이 이단을 논하고 사단의 종들이 사단을 물리쳤다고 간증하는 것을 보면 자신들이 내세우는 이단과 사단의 기준이 순전히 인간들의 사상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의 속해 있는 거대 교단이나 거기서 배워 온 정통 교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원수'를 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원수'가 삼위일체 교리나 예정론을 겁을 낼까? 더나아가 '하나님의 원수'가 개신교의 개혁주의 신앙을 내세우지 못할 줄 아는가? 악마들이 모여서 영성 훈련을 하지 못할 줄 아는가? 사단이 십자가를 논하지 못할 줄로 아는가? 유구한 교회 역사가 사단에게 무슨 위협이 되겠는가. 참으로 사단이 싫어하는 것은 회개하는 심령뿐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시 51:16-18) 이 본문에 보면,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라는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시온성, 즉 천국은 오직 주의 은택으로만 세워진다. 인간의 그 어떤 공로로 개입될 수 없다. 이럴 위하여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바는 '상한 심령'이다. '상한 심령'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제사이다. 그런데 이 상한 심령은 열정적 종교성의 산물이 아니다. 종교 훈련을 통해 개발 가능한 기술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신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0-11) '상한 심령'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는 성령은 성령이 아니라 악령이다. 그리고 늘 '그 상한 심령' 상태로 유지케 하시는 것도 진짜 성령의 기능이시다. 예수님도 이런 분위기 속을 사셨다. 그분의 눈으로 볼 때 무엇이 가짜인지 진짜인지가 동반해서 같이 파악될 수밖에 없는 현실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 예수님 뿐만아니라 사도 바울도 악마에 대한 경험을 가졌다. 즉 어떤 상황이 될 때 사단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었던 것이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즉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은 결코 사람들을 설득시키거나 납득시키거나 설복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 전파됨 자체가 악마의 눈과 성도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드러남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악마는 자기에게 예속된 자기 사람들에게 이 그리스도의 영광이 비취지 못하고 방해 공작하는데 그 구체화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기어이 자기 행위에 집착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기 신학교, 자기 교회, 자기 교단, 교회 안에서의 자기 신분, 자기 직업 그리고 기적적인 전도 실적과 철저한 회개를 했던 과거 경력과 교회에다 자기 생활비당 많은 비율의 기부금을 내는 일이라든지 또는 건강의 복과 많은 이적을 받았다는 체험과 자신만만한하게 행사하는 종교적 테크닉, 같은 것에 하나님의 일로서의 의미를 두는 현상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기 위해 강력하게 작렬되는 악마의 힘이다. 이들에게 있어 원수란 딴 게 아니라 자기가 그 동안 해 왔던 모든 긍정적 행위를 모독하는 것,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면 누구든 자신의 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원수'인 것처럼 마음 정리를 하고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이름과 자기 몸과 자기 인생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원수' 개념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아예 계시를 자기가 멋대로 생산해 내고 퍼뜨리고 있는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있으나마나 분이 되고 그 자리에 자기가 펼치고 있는 설교와 목회와 교회 경영 기술과 예배드리는 기술과 각가지 상담 기법들이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고 하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기술과 기법들을 하나님 계시를 대체하는 새로운 계시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기준에 의해서 이단을 논하고 이단을 공격하고 사단을 분별하려 드니 이 얼마나 왜곡된 '하나님 원수관' 인가. '하나님의 은택'은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그 빈자리에 인간들의 종교적 땀과 눈물이 대신 차지하고 있기를 소원하는 있으니 이것은 곧 악마의 소망한 바, 그 부흥된(?) 교회이다. 왜 신앙이 이런 식으로 변질되는가? 그것은 성경의 참 뜻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몸의 행복만을 최종 계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점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여기에 적절한 대처를 신앙고백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도리어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4. 결 론 육을 지닌 인간에게 있어 자기 육에 기초한 사랑이 자신의 죄를 교묘하게 가리며 살게 된다. 죄에서부터 출발시키는 것이 참된 하늘의 사랑이라면 예수님의 육만이 명확하게 나타지게 되어 있다. 십자가 지신 그 육만이 관심사가 될 뿐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하나님의 원수'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으며 그 대비책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전부를 십자가라는 그 한 곳에 집중하며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구원이란 이미 인간의 선택과 의지의 차원에서 이탈되어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5-27)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과 의지와 감성은 이미 악마의 손에 사로잡혀 있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8-29) 이렇듯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원치 않는 죄를 자꾸만 발생시킨다는데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8-20) 즉 '하나님의 원수= 나의 육체'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늘 성령에 의해 십자가 안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악마로부터 성도를 지켜 주는 것은 성도의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다. 성도가 자기 자신의 능력조차 믿지 않는다는 것이 남들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겠지만 실은 이점이 언약의 진수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18). 십자가 안에는 '여호와 이레'가 담겨 있다. 하나님의 원수를 성도의 힘으로 이기려고 해서는 아니된다. 성도가 아니라 성도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 십자가의 능력이 성도에게 발휘되어 하나님의 원수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는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6-17) 즉 하나님의 의가 성도에게 믿음조차 부여해서 성도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행함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원수이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미침이 되시니라"(롬 10:2-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