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과 재림
1992년 8월 12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3 (p 128)
재림 이론은 메시아가 두 번 지상을 방문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한번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메시아의 두 번 방문이론은 유대교가 아니라 기독교에 있는 독특한 이론이다. 같은 구약을 바탕으로 하고, 같은 메시아 방문의 맥 속에 있는 두 종교가 서로 상이한 메시아 강림 횟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 둘 중의 어느 이론이 맞는가?
옳다 그르다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중심사상에 어느 이론이 더 근접하고 있느냐가 정해져야 한다. 즉 구약 자체가 메시아가 한번 오는 것으로 모든 하나님의 사역이 맺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반드시 두 번 와야 모든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주장이 그야말로 [구약의 완성]이 되는 사역을 하신 메시아임이 확인될 것이다. 구약에서 거론되지 않는 내용을 신약에서 거론 할 수 없다. 구약과 무관한 신약성경이 있을 수 있을까? 재림이라는 것이 신약에서 무시 못 할 주제라면 구약에도 반드시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신약시대에 돌입하기 이전부터 메시아 두 번 방문의 내용이 담겨있어야 한다. 메시아 두 번 방문사실이 예수님 입에서 처음 나와서는 아니 된다.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다시 오심]에 대한 소식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어야 된다. 그러면 구약 어디에서 메시아의 두 번 방문의 근거를 찾을 것인가?
그것은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의 고유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연적 수순으로 [두 번 방문]이 이루어짐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메시아의 고유사역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
구약에서 메시아가 해야 될 일은 이스라엘의 통수권자로서 제 구실을 다 해야 하는데 있다. 세상의 나라에서의 왕이란 정치, 군사, 외교적 수완을 다 부려 자국민을 보호하고 국가의 힘을 확대시킴으로 발전시키는 책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달라야 한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계약 상태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위 [거룩]의 법칙에서 벗어나서는 참된 이스라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시아 즉 이스라엘 왕이 수행해야할 일은 언약이 이스라엘 전 영역에 흐르고 넘쳐나도록 유지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과 [메시아 두 번 방문]과 무관 상관이 있단 말인가?
구약 선지자들에 의하면 참된 메시아를 고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현재 이스라엘에 메시아가 부재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메시아가 없으니 그 비워있는 자리를 메꾸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그 당시에 있는 이스라엘 왕은 무엇인가? 이 왕들은 참된 메시아로서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 두 번 오심]의 이론은 현재 있는 왕 말고 장차 나타나게 될 왕 그분이 두 번씩이나 지상을 방문해야 모든 일이 마무리 된다는 이론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왕의 임무를 다시 한 번 정돈하자. 이스라엘 왕은 언약을 지상에 펼치고 완성시키는데 있다. 그렇다면 참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지상에 있는 왕들의 미흡한 점을 먼저 탐구를 해보면 참된 메시아가 오기 전에 지상에 있는 왕들의 미흡한 점을 먼저 탐구를 해보면 참된 왕이 과연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가 비교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상에 왕 중에서 처음 등장한 이스라엘 왕은누구인가? 누가 모델케이스로서 작용하고 있는가?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사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다윗이다. 하나님은 사울 왕과 다윗 왕과 서로 연관을 갖는 사이로 배치시킴으로써 진정한 이스라엘 왕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하신다.
그 전에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역에 모세언약을 요구했었다. 모세를 매개체로 해서 맺어진 그 언약정신이 구현되기를 몹시도 바랬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은 여지없이 그 약속을 폐기하곤 했었다. 그들의 이러한 약속 폐기정신은 곧 여호와의 왕 됨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무시하는 행위는 결국 [왕을 세우신 식]의 정치구조를 요구하는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이스라엘 왕을 요구한다는 것은 언약국가됨을 포기하고 세상국가로 전환하자는 취지와 통한다. 모세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완성체로서 지상의 그 어떤 왕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정신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왕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지배를 받기 보다는 인간의 지배를 받는 쪽을 원한다는 것이다. 세상 국가에서는 자기를 구원한 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보편화 되어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 이다.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건져내고 또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적들로부터 건져내어 준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거늘 그들은 마치 사사 라는 그 인간이 자신들을 건져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사사기 8:22 에 보면 백성들이 기드온 사사가 마치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처럼 말하면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물론 기드온은 강하게 반발한다. 그러나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백성들에 편에 서서 스스로 왕으로 행세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볼 때, 그 당시 상황에서의 구원이란 타락한 이스라엘 속에서 참으로 언약적 이스라엘만을 골라 건져내어 유지시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무엘 사사가 늙었을 때에 백성들은 또 다시 왕을 찾는다. 하나님은 그들 위에 왕 세우는 것을 허락하는데 단 조건이 붙는다. 즉 실제적으로 그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구원의 능력은 왕의 고유의 자질이 아니라 그 왕과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언약관계에서만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럴 때 그 백성들은 그 왕의 운명과 같이 한다. 만약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언약대로 움직이면 백성들도 덩달아 복을 누리게 되지만 만약 왕이 범죄를 저지르면 그 영향이 백성들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 나와 있는 모세언약대로이다 (사무엘상 12:25).
이제부터 각자가 하나님 앞에 책임을 져야 될 계약관계가 한 왕이 모두 일괄해서 책임을 지기 때문에 백성들의 운명은 왕 개인의 운명에 철저히 예속되는 언약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본격적인 왕 체제로 들어서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이 대를 이어 왕의 자리에 이르지 못한다. 즉 그 사울의 혈통을 계약적인 왕 혈통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초대 왕이 다윗왕의 독특한 활동상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왕이란 진정한 계약적인 왕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사이비한 왕을 척결하는 과정을 제공하신다. 하나의 언약이 지상에 세워지기 위해서는 비언약에 대한 척결작업이 선행되어 이루어진다. 이것이 언약의 원칙이다.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창세기 6:18 에서도 홍수심판을 전제로 한 언약이었다) 그래서 언약의 원칙은 대략적으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1) 현재 죄악에 대한 심판 (심판의 기준은 전번 언약에 준함)
(2) 심판을 수행한 그 당사자에 예속되어 새 시대가 전개됨.
이렇게 보면 사울이라는 거짓 왕을 척결하기 위해 진짜 왕이 일차적으로 지상에 등장해야 되고 그 다음 그 비언약요소를 다 심판한 그 당사자가 본격적으로 왕노릇하는 그런 제대로의 위치에서의 왕으로 재등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동시에 상반되는 두 왕을 이스라엘 배치해 놓고 한쪽이 한쪽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셨다. 이 모든 경로는 사실상 언약실현을 위한 경과이다. 언약의 시작과 언약의 마무리는 그 가운데 있는 활동이 기존의 비언약에 대한 공격과 심판으로 이루어진다.
아까 언급했듯이 이스라엘 왕이란 하나님과 계약체제에 의해서 비로소 지상에 등장된 계약왕이다. 그렇다면 그 왕이 해야 될 사명은 언약성취가 전부이다. 여기서 언약을(심판을) 시작한 왕과 마지막 최종적으로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을 드러낼 그 당사자가 동일 인물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찾아낼 수 있다. 또 한 가지 원칙은 그 당사자가 마지막 심판이 마무리 될 때까지 한시도 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해서 일한다는 원칙을 찾아 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그 동일인물의 역사 속의 모습은 각기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가? 같은 영광된 모습인가 아니면 전혀 대조적인 모습인가?
사울 왕과 다윗왕의 모습에서 그 정형을 찾을 수 있다. 시편 22장에 잘 나와 있듯이 참된 계약왕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오직 기도와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의존사상 뿐이다. 하늘의 하나님으로 하여금 문제를 해결케 하고 그분의 승리로서 최후가 장식 되도록 자신은 계속해서 고난 속에 내팽개친다. 이러한 믿음만이 모세언약의 진수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시편 40:6에서 다윗은 말한다.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 하나님이 모세언약을 통해서 요구한 것은 [상한 심령], [통회하는 심령]인 점을 알게 된다 (시편 51:17). 거룩이란 인간이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동시에 거룩한 국가도 결코 인간의 힘 외곽에 놓여있다. 참된 거룩한 나라를 소원한다면 제대로 된 왕이 백성의 죄를 홀로 지고 참회하는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메시아이며 이런 메시아에 의해서 비언약적인 국가는 심판되고 지상에서 소멸된다. 다윗은 왕으로 등극하고 난 귀에 이 사실을 알고 최초의 왕계약을 준한 선지자가 된다 (사무엘하 22장 / 시편 110편). 즉 진정한 메시아여 어서 강림하소서!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 오시는 메시아만이 진정한 메시아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다윗의 이러한 내다봄은 자신에게 발생된 왕계약의 표준으로 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다윗의 예언을 따라 그 뒤의 모든 예언자들은 메시아를 소개하면서 진정한 [다윗의 후손]을 거론하게 된다. [다윗의 후손] 즉 다윗이 제대로 발견한 [신적 메시아]를 뜻한다. 그리고 그 메시아의 역할은 둘로 나뉘게 된다. 즉 지상에서의 고난과 (백성의 죄악을 대리하는 행위와 비언약세력 으로부터의 공격으로 유발된 고난) 둘째로 최종의 마무리 심판과 함께 영광스러움이 동반된 참된 모습의 메시아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두 번째 등장은 첫 번째 고난 받는 인물과 동일인물이라는 점이다. 언약의 속성상 언약 속의 인물은 서로 상반된 두 모습으로 지상에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코 두 번 오신다고 해서 그 가운데 있는 시간이 공백 기간이라는 말은 아니다. 계속해서 지상에 대해서 관여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떠난다] 라는 말에 잘 안 맞는다. 떠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방식으로 [주] 노릇을 한다는 말이 된다. 예수님 제자들도 이것 때문에 근심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떠남]과 [다시 오심]에 대한 실상을 요한복음 16: 5-33 까지 소상히 설명해 주고 계신다. 간단히 말해서 아주 떠나가는 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타난다]는 표현 대신에 [다시 온다]는 표현을 쓰시는 것은 [아버지께로 간다]는 표현과 잘 어울리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즉 본래 예수님의 출처를 분명히 살릴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에서 메시아 두 번 방문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는 메시아의 방문시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그분이 이 지상에서 무엇을 하시게 되는가에 초점이 모아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때 와서 예수님의 메시아 됨이 분명해진 이상 히브리서 9:27-28 의 말씀에 완전하게 동의를 해야 될 것 같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모세언약 원칙에 따라 첫 번 강림의 목적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두 번째 오심의 목적이 언약의 일반원칙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물론 유대교인들 중에서도 메시아의 고난을 인정하는 측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거의 일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기고 아직 고난의 때도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견의 차이 때문에 유대교는 메시아 첫 번 오심을 거부하는 것이다.
끝으로 부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는 결코 재림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림의 연속선상에서 재림이 거론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초림의 그리스도를 실패한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전천년주의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이나 유대주의자들은 명백한 이단이며 그들에게 구원해 주지도 않을 예수를 오늘도 열렬하게 신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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