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과 그 실체
1992년 8월 10일 이 근 호 목사, 성경신학의 실제적용 3 (p 122)
언약이란 [하나님의 동행]을 말한다.
출애굽기 6: 2- 9에 보면 여호와란 언약의 하나님이 등장하여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을 빼내어 조상에게 약속한 땅으로 데려가겠다고 나선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인도한다]는 말이 나온다. 언약에 따라 인도하시는 그 인도형식이 어떤 형식인가? 그 인도형식이 바로 모세언약이다.
출애굽기 6장에서 여호와의 나타남과 애굽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사태들이 결코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을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다. 순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인 계획에 의해 일이 추진된다. 이 일방적인 계획을 언약이라는 형식으로서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홍해의 갈라짐과 약속의 땅으로의 입성도 언약성취의 과정 중의 하나로 봐야 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일을 추진하는데 꼭 [언약]을 동원하시는가? 언약이 동원 안 되면 일을 못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약이 있을 경우에는 맨 나중에 생겨난 국가는 언약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국가가 된다. 곧 이 말은 언약이 아니었으면 이 우주에 생겨나지 않았을 국가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선택된 사람들 사이에서만 성립된 언약의 국가 말고 세계의 모든 국가는 언약 없이 생겨난 국가들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는 아예 언약이 필요 없는 국가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이 필요 없이 생겨난 국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義에 합당한 수준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에서 밝혀졌듯이 애굽이라는 비언약적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징벌의 상대로만 남는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한계이다. 다만 조상의 언약과 연계되어 있는 국가인 이스라엘만이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 이점을 봐서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사역은, 이 우주에 참된 국가는 아예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처음 등장된 나라가 아니면 나라 같은 나라가 어디에도 없다는 의지천명이 언약국가의 탄생취지이다. 왜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만 일하셔야 하는가? 언약 없이도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나라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등장은 세상부정을 보여준다. 오직 언약 나라 안에서만 하나님이 거하신다 (출 15:17-18).
자 이렇게 되고 보니 언약이란 하나님 편에서 인간들 중에서 골라낸 자들을 정말 자기백성으로 삼고자하시는 의도에서 나온 저돌적인 행위의 표현방식이다. 따라서 언약 속에는 다음의 두 가지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1. 이 세상 그 누구도 나의 백성으로서 무가치하다.
2. 다만 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적 행위 안에 존재하는 자들만 나의 백성이다.
이 2가지 내용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은 부단히 버림과 제거와 탈락 작용을 멈출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는 자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버림 속에 남김] 이라는 하나님의 행위를 충분히 이해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을 향한 언약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래 제시한 의와 거룩의 기준에 의해서 [버려짐의 행위]와 [다시 찾음의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 이 [버려짐의 행위]와 [다시 찾음의 행위]를 보여 주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이 두 행위를 압축시켜 그들의 운명과 접목시켜야 한다. 그들 운명 속에서 계속되는 작용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요소는, (1) 거룩한 기준 (2) 버림의 사역의 반복 (3) 다시 찾음 사역의 반복이다. 자, 어떻게 개입시킬 것인가?
언약이 백성들 속에 남게 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언약발생에 깊숙이 관여한바가 있어야 한다.
백성과 무관한 일방적 언약통보는, 언약이 지니고 있는 동일 운명체의 발생을 막는다.
동일운명체가 되려면 백성들에 의해 사건이 저질러져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언약의 세 가지 요건이 무사히 성사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모세의 언약판 만들기이다.
그는 이 언약판을 만들기 위해 세 차례 시내산을 오르락내리락하게 된다.
모세가 10계명을 받기 위해 처음 시내산을 올라가서 내려올 때,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즉 돌판이 없었다. 그는 그냥 십계명을 외워서 내려온 것이다. 그 시내산에서 모세는 [거룩]을 체험했다. 그 [거룩]에 기준 되어 무엇이 죄이며 무엇이 義인줄을 알았다. 출애굽기 19: 5에서 말하는 소위 [거룩한 백성]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내려와서 자기가 들은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했다. 모세가 첫 번 계명을 받으려 올라갈 때에 모세 의외에 그 누구도 시내산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제사를 드리면서 그것을 지상에서 반복한다. 말씀을 선포하고 그리고 희생의 제물을 잡아 드림으로 하나님이 함께함을 성사시키려는 것이다. 거룩한 분과 백성들 사이에서 정결한 희생제사가 그 충돌을 해소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 행위로 모든 것이 완결된 것이 아닐까? 이미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거룩한 분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복의 대상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그러면 됐지 또 뭐가 필요한가?
백성들에게 무엇 때문에 돌판이라는 구체적 물질이 또한 필요하다 말인가? 그 이유가 출애굽기 24:12에 나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이 새삼 중요하다. 즉 구체적 형체로 된 10계명이 적힌 돌판이 있어야지만 특별히 가르침이 성립되는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다. 이 가르침이 무엇인가? 좀 더 진행된 사건을 보자.
모세가 두 번째 시내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은 첫 번째 올랐을 때 안 가르쳐 주었던 내용을 가르쳐 주고 계시다. 그게 무엇인고 하면 성소를 지어라는 것이다. 성소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된 지상의 장소이다. 그러면 그 성소 제일 깊숙한 곳에 누가 들어가야 하느냐 하며는 하나님이 들어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눈에는 무엇이 안치되는고 하니 [증거궤]가 안치되고 그 위에서(뚜껑)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만나겠다는 것이다 (25:22). 제사장은 보초꾼으로 세워져야 하고 성막도 성소를 보호하기 위해 지워져야 한다. 모든 것이 지금 증거궤를 겨냥해서 제조된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는 만났지만 그 이외에 이스라엘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 비거룩으로 죽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과 자주 만나 모든 일을 처리하면 될 터인데 새삼스럽게 모든 백성들 속에 하나님이 친히 나타나시겠다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시내산 위에서이다. 그런데 이제는 시내산 위가 아니라 이 평지이다. 모세가 두 번째 시내산을 올라갔을 때 하나님의 방침이 달라진 것이다. 모세만 만나는 게 아니라 모두와도 만나겠으니 만날 조치를 사전에 지상에서 해야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거룩과 비거룩의 한 덩어리가 되어 지상에서 움직일 수 있는가? 여기에서 [언약백성]의 특수성이 나타난다. 증거궤 위해서는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증거궤가 무엇이길래? 이것을 알므로 언약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두 번째 모세를 불러 친히 [돌판]을 만들라고 하신 것이다.
출애굽기 31:18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돌판을 만들어 주고 모세가 산을 내려온다. 산위에서 만든 돌판의 내려옴은 곧 하나님의 방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 하나님은 이 돌판 위에서만 만나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친히 만든 방석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32장에 보면 백성들이 언약을 깨고 있다. 뭔고 하니 십계명 1계명에서 3계명까지를 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소위 [여호와를 위한 축제]를 벌리고 있는데 보니 비언약적이고 애굽적인 방식으로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들고 있는 돌판을 황급히 깨뜨리고 만다. 모세 제일 먼저 [황급히] 들고 있던 돌판을 깨뜨린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귀한 것을 왜 깨뜨리는가? 오히려 반대로 금송아지를 황급히 깨뜨려야 옳은 행동이 아닌가? 아니다. 그 이유가 신명기 9:15-19에 나온다. 모세는 돌판을 깨뜨림으로 인해서 백성들을 모조리 죽는 것을 사전에 방비하고자 했다. 금송아지를 깬 것은 하나님께서 아론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취한 태도였다 (신명기 9:20-21). 모세의 이와 같은 행위는 모세가 두 번째 시내산에서 보고 왔던 소위 성소의 취지를 알고한 행위였다. 돌판을 서둘러 없앰으로 인해 전의 상태로 되돌려서 백성들을 전의 상태에 입각해서 살려내고자 했던 것이다.
금송아지 사건이 대충 처리되고 난 뒤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계약이 깨어진 것에 대해서 탄식하며 용서를 구한다. 이것은 조금 전에 깨어진 돌판으로 인해 이스라엘과의 단절이 발생된 것이다. 물론 전의 계약 상태에 놓였기 때문에 지금 남아있는 통로란 자기 자신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모세는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하여 계약회복을 요청한다. 즉 백성의 모든 죄를 자신이 대신 책임질 테니, 백성의 죄를 짊어진 자신과 하나님과 단독으로 재계약이 성사될 수 있도록 탄원한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받아주되 조건이 붙는다. 모세가 깨진 돌판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이다. 이점은 앞으로의 언약이 하나님과 모세와의 언약으로 좁혀졌기 때문에 누구든지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은 광야길 에서 탈락이 된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출애굽기 34: 9).
버림받았던 백성들이 모세로 인해, 즉 돌판을 다시 만든 사람으로 인해 되찾음이 발생된다. 세 번째 시내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에 모세는 영광의 사람으로 변해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지상에서 성소와 성막을 만든다. 그리고 그 중심 되는 법궤 안에는 깨어진 이후에 다시 만든 돌판이 들어있다. 이 깨어졌다가 다시 회복된 돌판에 의한 새언약체제로 이스라엘은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 뚜껑인 속죄소에서 피가 대제사장에 의해서 뿌려진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만나고 또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 위에 솟아 올라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미 백성들이 십계명을 다 알고 있는 마당에 구태여 [돌판]이라는 깨어질 수 있는 구체적 물질을 만들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모세 언약의 진정한 실체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거룩한 분의 깨어짐]과 [되찾음]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언약의 공동체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분의 취지를 알고 있는 모세가 들고 있는 돌판을 깨뜨리게 되었고
지상에서 새로운 언약의 책임자인 모세가 직접 그 돌판을 다시 만들게 되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모세예속의 공동체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봐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신다.
모세는 또 아론에게 안수함으로 제사장 제도도 모세 예속 하에 둔다.
이로서 거룩한 분의 희생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계속 이 지상에서 유일한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죄악된 백성들에 의해서 깨져버린 돌판이었지만 그 돌판은 모세의 희생이 첨가된 형식으로 백성들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성소 깊숙이 하나님과 만나는 발판구실을 하는 게 무엇이라는 것은 백성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자기 죄로 인해 돌판이 한번 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거궤 속에 회복된 언약판이 들어있는 것이다.
자기를 치게 한 그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감싸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바로 언약의 내용이 되며 이러한 희생은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들과 동행하려고 강림함으로 야기된 사건이다.
하나님이 지금이라도 우리 곁에 내려온다면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대우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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