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관련

언약에 기초한 복음의 전모(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3. 1. 30. 17:00

언약에 기초한 복음의 전모


1. 언약의 특수성

인간들이 하나님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이 

도리어 참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언약을 비켜가서 신에게 도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언약의 특별성이 하나님 면전에 설치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설치된 인간으로서의 이해력으로서는 이해 불가적 요소로서 나타났다. 

오직 택한 자에게만 믿게 되는 사항이지 보편적 인간들이 너도 나도 따져서 이해될 내용이 언약이 아니다. 

죄에 대한 개념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모든 종교적 개념들은 이 특별한 언약 앞에서 다 부질없는 인간들의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에 주어졌을 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났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이스라엘 언약의 실체는 이방민족과의 전쟁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외부적으로 봐서 다같은 인간의 힘의 대결로 보이지만, 

아니, 오히려 이스라엘이 더 작은 힘에 지나지 않는 것같으나 

실제로서 강한 이방민족을 쳐부수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인간들끼리의 힘의 싸움이 아니라 언약이 중간에 개입되었기에 일어나는 사태이다. 


초기 광야 전쟁 때부터

모세의 지팡이의 높낮이 따라 산 밑에서 벌어지는 아말렉과의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은 참으로 희안한 일이다.(출 17장)

이러한 언약은

그 배후에 하나님에 의해서만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선택행위의 사랑이 지상으로 돌출되기 때문이다.

언약을 받아 들인다는 것이 인간으로 불가능한 것은

룻처럼 이방여인에게나 다윗처럼 유대민족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이라고해서 왜 인간적인 힘을 의존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언약 성취성 안에 그들이 놓이게 되면 그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

이 이야기는 소년 다윗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소년 다윗이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차이점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

소년 다윗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 17:26)

이 본문에 보면, '할례없다'는 표현이 나온다.

즉 소년 다윗은 말하기를,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은 할례 있음과 없음의 차이인데

하나님의 동행이나 도우심은 어디까지나 할례 없는 민족 편이 아니라 할례 있는 민족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에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할례를 무시한다면

그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할례언약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에게는 일어나는 희안한 고백이다. 

자기 혈통이 이스라엘이라고 굳게 믿은 그 당시 사울쪽 어른 들의 겉치레 언약관과는 다르게 말이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왜 할례를 실시케 하셨는가? 

창세기 17:9-14에 보면,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히브리인든지 이방인든지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결국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약속이다. 

왜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내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어떤 인간이 자기 위상이나 자기 처지나 자기 살아온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변명을 늘어놓던지 어떤 핑계를 되던지 상관없이 

구원이 결정되는 것은 언약이지 그 외의 것은 못된다. 


예를 들면,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가 절에 나가서 교회에 나갈 성장 환경이 못되었다든지 아니면 내가 살던 시대는 아직 한국 땅에 복음이 전파되지 않아서 하나님 믿고 싶어도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다든지 아니면 젊을 때 교회 잘 다녔는데 담임 목사가 엉터리 설교를 해서 그것이 전부 줄 알고 언약을 몰랐다든지 하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언약 중심의 구원 사상은 신명기 8:19-20에도 나온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정녕히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 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 이니라" 즉 이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 하리니'라는 구절을 되풀이해서 봐서도 이스라엘의 구원 여부는 언약 준수에 달려 있지 결코 이스라엘 혈통이라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아니다. 자기 민족이라고해서 어떤 특혜나 기득권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언약 중심의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을 격려하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낙담케 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삿 2:1-4) 이들이 왜 우나? 도리어 기뻐해야 하는게 상식이 아닌가? 

그것은 그들이 나름대로 행했던 모든 행위에서 여호와의 언약에 기초하지 않고 무관한 생활을 한 것이 죄로 규정받게된 점에 겁이 나서 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그들이 취한 태도는 다시 여호와를 찾는 일이었다. 구세주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처럼 언약의 절대우위성은 신구약을 통털어서도 결국 양보못할 요소이다

바로 이 언약 가지고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쳐부수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맺어진 할례 언약이 무엇을 겨냥하는가?

그 내막이 출애굽기 12:48절 유월절 절기 규정에 나온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이 본문에 의할 것 같으면, 할례 받지 못하는 자는 유월절에 참여할 수가 없다.

즉 '거룩한 희생의 피'의 효과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할례가 피와 관련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 세상에 자기 아들을 만드는데 있어 필수적인 언약 조건이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출 4:22-26)


이 본문에서 십보라가 자기 남편을 보고 '피 남편'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자기 아들에게 행한 할례 때문이다. 

즉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 할례를 행하니까 죽어가던 모세가 되살아났다. 

그런데 그렇게해서 되살아난 남편을 보고 '피 남편'이라고 불렀고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자기 아들을 어떻게 삼으시는지 그 내막이 공개된 것이다. 


할례와 연관된 피 없이는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살아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이건 순전히 '거룩한 피' 때문일 것이고 

이렇게 '거룩한 피'로 인해 되살아난 아들이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가족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된다


출애굽기 12:48을 조금 지나면 나오는 본문인 출애굽기 13:1-2에 보면 이 주장이 정당화 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서 분명히 언급하시기를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라'라고 하셨다. 할례 언약이 거룩한 언약이 되고 할례 받는 자가 거룩한 하나님 소유의 아들이 되는 이유는, 그 할례 언약의 중심에 피 사건, 즉 어린 양이 그 거룩한 자기 피를 흘리는 사건이 발생되었기 때문이요 정기적으로 그 언약 사건을 유월절로 재현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코 할례를 행치 않는 자는 이 유월절에 참예하지 못한다. 그 예가 여호수아 5:2-10에 나온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이 본문에 나와 있듯이 '애굽의 수치' 즉 '애굽 시절에 가졌던 비거룩성'은 할례를 하면서 회복되어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 유월절에 참여 할 수 있다. 유월절은 거룩한 피에 의해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나라가 된다는 증표이다. 실제로 난지 8일 만에 할례한 최초의 인물인 이삭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버지 손에 의해서 희생제물이 되는 경우가 일어난다. 


할례의 핵심은, 약속된 인물의 희생 속에 피로서 참여하는 언약인 것이다. 


하나님이 이 거룩, 즉 이 언약을 준수하기 위해 그동안 전쟁을 벌리고 오신 것이다.

언약 싸움이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민 10:35-36)

이 궤가 전쟁의 모토이다.

이 궤를 가지고 언약궤라고 한다.(수 3:6) 


소년 다윗의 눈에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의 신장이나 힘이나 방패나 그의 많은 수의 군대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 전쟁의 관건이 아니었다. 

단지 주목한 것은 그 많은 수의 군대가 할례를 행하지 않는 비거룩 집단이라는 것이다. 

거룩이냐 아니냐 라는 것은 각 집단의 내부 방침이나 주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만 의존하는 집단이냐 하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 이스라엘이 남과 북의 나라로 갈라지는 것도 다 언약 준수와 관련되어서 일어난 일이다. "아비야가 에브라임산 중 스마라임산 위에 서서 가로되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무리들아 다 들으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또 다윗 자손의 손으로 다스리는 여호와의 나라를 대적하려 하는도다 너희는 큰 무리요 또 여로보암이 너희를 위하여 신으로 만든 금송아지가 너희와 함께 있도다"(대하 13:4-5,8) 이 대목은 남쪽 유다가 북쪽 이스라엘을 쳐야만 하는 정당성에 관한 아비야 왕의 설교이다. 이번 전쟁의 정당성을 언약에 두고 있다. 즉 언약 국가가 비언약 국가를 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싸울 때에나 이스라엘 내부의 싸움에 있어서나 공히 언약에 근거한 거룩성에 좌우된다. 


비언약은 곧 비거룩이다.

 아무리 이방민족들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이스라엘보다 우위에 있다 할지라도 언약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 


신명기 9:4-6에 보면, 다음과 같은 전쟁 원리의 대전제가 나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이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성품이 목이 곧고 의롭지 않다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그 배경 안에서 전쟁에 승리한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맹세, 곧 언약 때문이라고 하신다. 

유대교에서도 이방 민족에 대해서는 그 비언약으로 인해 아예 근본적으로 죄인으로 분류시켜 놓고 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갈 2:15) 

이것이 언약백성이 가지는 특권인데 이러한 언약의 근본 취지를 놓치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초래한다는 것이다.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호렙산에서 너희가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진노 하사 너희를 멸하려 하셨느니라"(신 9:7-8) 


결국 이방민족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편드는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의 편이 아니요 거기에 예속되지도 않으시며

오로지 하나님은 자기 편이다. 

자신이 내뱉은 맹세와 언약을 이루는 것으로 

공의라고 규정하며 

정의라고 규정하며 

사랑이라고 규정하며 

전도라고 규정하며 

교회라고 규정하며 

목회라고 규정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태여 이방민족과 붙게 하시면서 

이방민족이 이 약한 이스라엘 앞에 철저하게 초토화 되도록 하시는 것도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구현하시려는 자신의 언약 성취 때문이다. 

이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하시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언약 안에서 창세 전에 예정하신 자에게 거저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진행을 막아서면서 원래부터 우리가 살던 우리 땅이라고 정당한 주장을 하는 이방민족을 

외부에서 들어온 이스라엘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 

불쌍히 여겨야 하나? 

아니다.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바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19-20) 


이 본문에 보면,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라는 무서운 말씀이 나온다. 

즉 그들이 저주받아 진멸당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전에 모세에 내려준 말씀에 준해서 필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선택된 민족에서 향한 강퍅한 마음이 필히 생기도록 하나님께서 다 조정하시는 것이다. 

애굽의 바로왕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일부로 강퍅케 하시므로 시작해서 끝까지 그 강퍅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게 늘 발생시키시면서 자기 언약을 완성하셨다. (출 4: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출 7:3/8:19/10:20,27/11:10/14:4,8,17/롬 9:18 참조)


그러니 

불신자의 강퍅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 언약 성취의 필수적인 여건이 된다. 

이런 과정을 겪어거 언약이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이것이 사랑이요 이것이 인자하심이요 이것이 공의이다. 

그러니까 비언약 안에서 사는 이방민족의 눈으로 봐서는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긍휼이요, 불공평한 사랑이요, 말도 안되는 인자하심이요, 독선적이고 주관적이고 공의관이 된다


다음에 나오는 성경 구절을 이방인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해석을 내리면 뭐라고 하겠는가?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산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7-20)


이와같은 경우는 소위 같은 여호와를 섬기고 같은 아브라함의 형제라고 여겼던 자들 사이에도 일어난다.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대하 10:16) 유다와 베냐민 지파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예언해 놓으셨다. 물론 창세전부터의 정해져 있었던 내용이다.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시 79:67-68)

요셉 지파의 입장에서 볼 때 섭섭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선택하시고 한쪽은 택하지 아니했다는데 어느 인간이 감히 토기장기의 계획에 도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냉혹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세상 속에서 날이 갈수록 그 선택된 내용대로만 차질없이 펼쳐져 갈 뿐이다. 

정말이지 결코 유다 지파가 북쪽 여타의 지파보다 착해서도 아니요 더 경건해서도 아니다. 

단지 선택되었다는 그 원인에 준해서 펼쳐진 결과로만 현실은 조성된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사랑, 전도, 봉사, 예배, 공의, 기도, 구제, 경건, 신앙, 천국, 율법, 온전함, 거룩 등)은 

하나님의 언약, 즉 예정론에 준해서만 이해되어야 하며 

그렇게 해서 결국 언약 성취자로서 예정되신 성취자 주님에게로만 찬양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 옳은 해석이다.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0-11)
구약에서의 언약이란 이처럼 저주받을 이방민족에게는 필히 저주가 돌아가야 언약 완성이 된다. 

여리고성에서 살던 기생 라합이나 모압여인 룻 같은 사람은 자기를 저주하려 오신 여호와 앞에서 강퍅치 않아서 구원받았다. 

결코 이들은 

자신을 마땅히 구원해주어야 참된 하나님으로 알았던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해야 마땅하다는 그런 분으로 인정했다. 

이런 모습이 강퍅치 않는 모습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마 15:26-27)


여기서 '옳소이다'라는 고백이 과연 인간적인 양심에 준해서 고백일까? 

또 이런 고백을 했다고해서 금방돌아서서 자신의 믿음이 워낙 좋기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나를 구원해 주어야 그래야 좋으신 하나님 자격있다고 선전하고 돌아다니겠는가? 

이 여인에게 여전히 참된 하나님으로 자리잡은 증거가 되려면 

여전히 이 여인은 자체적으로 자신은 개에 해당되는 위치에 있음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가 선택된 언약백성에게는 하나님에게 필히 요구했던 자세였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출 22:21) 

이것이 선택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는 신앙 자체이다.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고해서 주위에 있는 노예와 나그네를 학대할 자격이 생긴 것이 아니다. 그래도 만약 학대하면 어떻게 되나?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 22:23-24)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즉 하나님은 결코 이미 구원받은 자의 편이 아니라 언약편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더이상 요구하지 않는 자는 비록 자신이 이미 구원받았다고 간주해도 가차없이 하나님은 언약대로 저주해 버리신다.

그렇다고해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에서 두둔하시는 것도 아니다.(출 23: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오직 하나님은 자신을 여전히 자비없이는 구원될 수 없다고 여기는 그런 자의 편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언약이 만들어내는 현실이다.

결코 이미 구원받은 자라고해서 언약적으로 우대를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데 있어 신앙의 선배라고 어떤 특혜나 특권이 부여되는게 없다.

할례에서 나오는 거룩이란 인간의 행함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윤리적 평가로서의 거룩이 아니라

오직 희생 제물의 거룩한 피의 대속에 근거한 언약적 자비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룩의 육체적 증표가 할례라면 신약에 와서는 무엇인가?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1-15)


옛 할례가 인간 신체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면 오늘날몸에 아무런 흔적이 없이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과 관련있다.

이것을 세례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이외에 반복적인 행위를 세례의 증거라고 내 세운다면

하나님의 역사 이외에 인간의 행함의 역사를 첨부하는 것이 된다.

육적 몸을 벗는 것을 손으로 하겠다는 것은 큰 오산이다.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라는 말은 손 이외에 손 뿐만아니라 인간의 그 어떤 육적 노력도 역시 불필요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자구노력으로 그리스도와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살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 덕분이다.

여기에서 구원, 그 이후라는 개념이 성립이 안된다.

왜냐하면 몸의 부활의 지속되는 상태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힘은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구원해 주시는 것까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요청되고

일단 '구원, 그 이후'에는 인간이 작용한다면야 '구원, 그 이후'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

하지만 부활의 몸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의 힘만이 홀로 작용하셔야만 한다면

'구원, 그 이전'과 '구원'으로 충분한 것이지

여기에다 '구원, 이전' '구원된 순간' '구원, 그 이후'라고 구분지울 타당성은 상실된다.
성경은 '구원, 그 이전'과 '구원', 이렇게 둘로 나누고 있다.

그렇다면 '구원'과 '구원, 그 이 전'의 상태는 어떤 대비가 가능한가?

2. 언약의 특수성과 관련된 구원의 특수성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4-17)
이 본문에서 보면,

 

구원 전에는 십자가의 능력이 적용되지 않은 상태이며

구원되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적용되는 상태로 구분지울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가?

위의 본문에 보면, '승리'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렇다면 구원 전에는 승리라는 상태를 쓸 수가 없었던 도리어 승리라는 표현보다는 패배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패배라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떤 힘으로 탈출 불가능함을 뜻한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탈출이 불가능한가?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로부터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그 예가 역시 본문 안에 나온다.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먹고 마시는 것과 월삭 안식일 같은 것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시간만 어서 흘러가기를 측정하라고 있는 날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준해서

인간들의 모든 종교적 행위가 집대성되어 집중 투입되고 열과 성의를 다하여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충심을 표하던 날이었다.

그 날에는 다른 날과는 정말 달라져야 한다고 믿었고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집중적으로 뭔가 했던 날이다.

제사하고 예배를 한다.

숱한 제례 규칙과 제자장들의 활동이 여기에 집약하였고 다른 백성들도 같이 동참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렇게해야만 죄도 용서받고 복도 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날이다.

다른 날은 안되는 것이다.

지정된 그 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이 이제 십자가로 인하여 도말되어 없어져버린 것이다.

과연 날만 날라가 것인가?

아니다

인간쪽에서 행할 수 있는 모든 종교적 행위도 그 구심점을 상실했다.

지정된 공간인 성전으로서의 존재적 가치성,

제사장으로서 존재적 가치성,

그리고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거두었던 십일조 헌물과 헌금 규정,

또 거룩한 제물이 갖는 고귀한 신성함,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날라가 버린 것이다.

 

로마서 10:2-3에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 본문에서 인간들이 얼마든지 하나님께 종교적으로 열심을 낼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의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열심에서 비롯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선물로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신약의 성도의 모든 행위에서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의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20-23)

이 본문에서 보면,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사도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신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 2:19)

 즉 머리를 붙들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왜 그러면 머리를 의지하지 안했을까?

무엇을 못믿기 때문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라를 것을 못믿어서 그러하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것을 못믿을 때는 반드시 자기 노력을 경주해서 자기를 자라게 하는 방법밖에 없지 아니한가.

그래서 시도하는 것이 바로 소위 지킬만한 여러 가지 규칙들을 제정해 놓고 그것을 의지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자는 방식이다.

즉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에도 열심히 그것을 행하기만 하면 실체가 주는 똑같은 구원의 효력을 지닌다는 발상을 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 본문에 나오는 현상만 유발할 뿐이다.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골 2:18 하반절)

그리고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라는 평가가 그를 기다릴 뿐이다.
신약에 와서 할례든 사랑이든 기도든 영광이든 모든 것이 새언약에 기초해서 그것만을 증거한다는 것은

이미 구원에 관한한 인간의 자체적인 공적은 무관하다는 말이다.

단지

이미 구원받은 자가 보여줄 바가 무엇이느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행함에 의한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 하나님께 영광',

 '믿음에 의해 하나님께 영광'으로 달라지게 된다.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 특별히 영광돌릴 행함의 조항이 따로 마련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아니 더나아가서 한평생 전체가 하나님께 영광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이러한 태도는

옛언약에서 월삭과 안식일에 행해야 하는 항목에 주의해야 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율법의 완성은 곧 사랑인데(롬 13:10)

 

그 사랑의 핵심은

'이제 나는 내것이 아니라'는 의식에 있다.

 

그러면 내가 내 것이 아니하면 내 것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

즉 은혜의 지배하에 놓여 거기에 따라 사는 예속된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은혜의 속한 자가 되었으면 이제부터 예정된 은혜의 경륜에 따라 미끌어져가는 인생이 된다.

이것은 결코 구원받은 자의 행함에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1:9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다.

구원을 처음받는 그 순간까지만 은혜가 지배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 전체 대해서 부르심의 은혜는 기 이후로 그 주도권을 성도의 행위에게 양도하지 않으신다.

끝까지 하나님 자신만이 성도를 붙드신다.

일관성있게 통솔하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은혜의 다스림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와같은 사랑의 지배를 받는 자되게 한다.

 

사랑의 핵심은 하늘의 용서이다.

서로 사랑하는 말씀은 서로 용서받은 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라는 뜻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에도 나오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12)

에베소서에서는 성도의 새삶을 소개하는 그 출발지점을 독점하고 있다.

"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5:1-2)


이처럼 그동안 죄인을 지배하는 모든 율법은 성도에게는 용서의 사랑 계명안으로 녹아들고 행함의 조항으로서 폐지된다.

예수님의 화목제물 안으로 다 사라진 것이다.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히 10:8-9)

이 본문이 말씀하듯이,

둘째 것을 세우려면 필히 첫째 것을 폐지시킬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병행할 하등의 이유와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용서받아야 될 이유와 용서하시는 근거가 함께 들어가 있다는 이것이 곧 사랑이요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이 곧 율법의 완성이요

그 율법의 완성체 안에 놓여 있는 자는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더 이상 자기의 미흡함을 보충하기 위해 자신의 윤리적 재주와 능력 발휘를 위하여 남겨두어야 조항이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헐었던 것을 자신이 다시 세울 수는 없다고 한다.

다시 세우면 자신이 범법자가 된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7-18)
이 본문에서 사도는 주장하기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마치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식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한다면

결국 죄인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만드는 분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는 율법 지키는 식으로 규정받는 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엇이 죄인가?

 

바로 행함으로 새로이 의롭다 되고자 하는 그것이 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용서의 상대자로서 있지

의를 놓고 예수님과 경쟁관계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성도의 모든 행위는 용서이 대상이라는 점과 실제로 용서받고 있다는 그 삶 전체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지배 아래 있다는 유일한 사랑의 증거가 된다.

그래서 사랑이란

인간의 행함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만 주어지게 된다.

이것이 사랑이다.(고린도전서 13장)

날이 갈수록 너무나도 자기 죄를 깊이 깊이 알기에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사랑의 은사를 개별적인 것으로 전환하고자 한다면

(예를 들면, 내 노력에 따라 비로소 내가 챙기게 된 나만의 독보적 은사라는 생각같은 것)

용서라는 보편적 지배에서 이탈되는 사태를 이르킨다.

즉 개별적인 어떤 행위가 용서를 필히 유발하거나 용서를 받아내는 조건으로 간주되는 의로운 행위로 간주된다면

이것이 바로 자기만의 행위가 타인과의 행위와 비교해서 독보적 가치를 따로 갖게 되는 죄악된 현상이다.

이처럼 사랑의 차원에서 봐야만 비로소 죄악의 바닥도 공개된다.

 

행함의 차원에서는

'인간은 자기 행동 여하에 따라 새삼스럽게 죄를 더 지울 수도 있고 혹은 더 거룩해 질 수도 있다'고 보는 반면에

용서의 차원에서는

 '전에는 의라고 여겼기에 용서의 항목에서 제외시켰던 바도 새삼스럽게 죄가 되는 것으로 드러나 용서의 대상이 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나아가면

결국 최종적인 죄의 심판이란,

용서의 완전함과 긍휼의 완전함을 믿지 못하고

자기 고유의 가치를 끝까지 고집하면서 자기 신뢰속에 머무는 자들에게 대한 저주이다.

마지막 주께서 실시하는 심판의 기준은

죄사함의 주체자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지

결코 행함의 많고 적음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즉 주를 사랑하는 것과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를 가지고 구분짓기에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공적과 행적은 여기에 낄 수 없다.

 

구원되는 근거가 이처럼 인간에게서 떠나 있다는 말은

달리 말해서 심판을 받는 자는 여전히 구원의 근거를 자기 행위에 두고 있는 셈이다.

바로 이 둘 사이의 간격이 천국과 지옥불 사이이다.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계 20:12-15)


이 본문에 보면,

두 권의 책이 따로 준비되어 있다.

그리고 그 두 책은 한 권으로 통합될 성질의 책이 아니다.

한 쪽이 그동안의 인간 행적에 관한 책이라면

다른 한 책은 행위와는 전혀 무관한 다른 관계성이 이미 사전에 형성되어 있음을 알리는 책이다.

그 책이 바로 생명책이다.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자만이 천국에 간다.

그렇지 않는 모든 자는 지옥불에 들어간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3:8)

인간이 아무리 발바둥치면서 의롭게 살고 선하고싶어도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지옥에 가야한다.

그리고 이렇게 된 자체가 결코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요 공의로우심이요 사랑이다.

사전에 언약하신대로 지옥 갈 자를 필히 지옥보내시는 하나님을 찬양 할 줄 알아야 신자이다.

그들이 성도보다 나쁜 행위를 더 많이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용서함을 못받을 뿐이다.


언약적 관점에서는 인간의 행함를 각각 개별적으로 구분된다고 보지 않는다.

즉 특정 개인의 죄가 그 개인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윗은 이점을 알고 있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자신의 죄를 모친과 더불어 이해하고자 한다.

이사야도 알고 있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즉 백성 전체의 죄 아래에 자신이 놓여 있은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인류의 비밀 전체를 알고 있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 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2-14)

죄가 인류에 있어 보편적으로 지배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

구원이라든지 용서라든지 하는 것은

내가 얻을 수 있는 권리로 인해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줄 자의 임의성으로 인해 그냥 왔기에

용서받은 자끼리는 타인과 차별나는 용서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되면 상급에서 차등이 없을뿐더러 의로움에도 그리고 거룩이라는 신분에서도 차등이 없다.

그리고 죄의 보편성 입장에서 볼 때,

행함이라는 것도 역시 보편적인 평가를 다같이 받는다.

나의 행함의 가치보다 너의 행함의 가치가 질이 더 떨어진다든지

아니면 나의 행함이 너의 행함보다 더 훌륭하다는지 하는 차등화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보편적 죄성 위에다 행함을 놓고 그 질을 분석해 보면,

'행함'이라는 의미라는 것이 인간의 생물적 몸체가 움직이는 모든 외형적 움직거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를 성취하고자 하는 인간 나름대로의 고유한 성향 자체를 의미한다.

'나'라는 개인적 가치가 얼마나 절대적 가치를 지녔느냐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성향을 의미한다.

즉 죄인이면서도 죄인 아닌 존재로 버티기 하면서

끝까지 자기 가치만큼은 독보적으로 사수하려는 성향으로서 믿음과는 극히 대비된다.

본인의 능력에 가치를 두고 사느냐

아니면 자신의 고유 능력에 가치를 안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행함'과 '믿음'으로 갈라서는 것이다.

만약 아직도 자신의 고유 능력을 믿고 싶다면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행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나의 능력에서 나왔다고 여긴다면

이것 또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고 '행함'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려라' 하는 말씀이나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할 때의 믿음도

모두 자기 능력에서 나올 수 없는 능력을 주님은 그 사람에게서 찾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그러면 어떻게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그것은 외부에서 제공되어져야 한다.

다음과 같은 본문을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라고 되어 있다.

즉 성령의 역할은

하나님이 오직 택한신 성도에게만 돌아가도록(고전 2:7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조치하신 그 은혜를

오로지 은혜로만 주어지게 된 것들인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골로새서 2:13에 말씀처럼 범죄로 인해 죽은 육신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들에 대한 앎과 믿음을 제공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서는

세상 사람들처럼 '완전한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이냐 아니냐'라는 관점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은혜 인줄 아느냐 아니면 행함인 줄 아느냐'의 구분점을 갖고 있다.

 

이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성령께서 말씀을 어떻게 지키게 하시는가'에 관한 것이지

결코 '내가 어떻게 말씀을 잘 지키내는가 두고 봐라'라는 차원은 아니다.

은혜 아래에 놓인 자는,

성경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육체로 못하는 것을 이미 안다.

따라서 육체로 못하는 것을 자신의 육체로 통해서 하기에 여기에 용서가 산출된다.

이와반대로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은혜를 알지 못하기에

익히 아는 선악적 인식체계로 나름대로 선과 악을 끊임없이 분류하는 작업에 매달린다.

여기서 그들은 육체로 못해내면서도 육체로 해내는 것처럼

자기를 한없이 두둔하고 변명하고 위로하고 환경 탓으로 돌리면서 자신을 계속 격려해주는 강한 신념으로 점차 다져져 간다.

일종의 오기 싸움이다.

"나도 성령으로 거듭난 인간인데 그래 그정도 말씀 정도를 못지켜 낼까봐.

어떤 식이라도 내가 반드시 그 계명을 지켜낼테니까

하나님이여 너무 걱정마시고 저를 믿고 지켜나 보시고 힘이나 주시고 기도에 응답이나 제 때에 해주시기 바랍니다."하는 식이다.

 목회를 한다는 목회자에게는 이런 신념의 내용 안에다 교회 성장이나 부흥, 혹은 '참된 교회상 세우기'도 포함시킨다.

여기에 바로 강퍅과 교만이 산출된다.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희생은 참으로 거추장스러운 것이 된다.

하나님이 괜한 짓이 하는 셈이다.

하나님 자체가 이들에게 걸림돌 작용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주님의 희생 소식보다 주님이 제출하셨다고 믿는 율법적 과제물에 더 호감을 둔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행함 체제이기에 주님의 희생은 과도한 선한 행함이라고만 받아드린다.

즉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일 중 최고의 선행이기에 일종의 모범적 행동으로서 자신도 언젠가 그런 수준에 도달되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대신 죽은 대속 죽음의 의미로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대표자로서 시범적 행위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죽음이 있다고해서 자신의 현 율법적 태도가 달라질 필요가 없고

도리어 고매한 목표점이 수립되었으니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동기 유발만 자극했을 뿐이다.

"저는 주님처럼 순교할 수 있는 놈입니다.

주님 지켜봐 주소서.

그리고 잘했다고 칭찬할 만반의 준비를 하소서!"하는 식이다.

하지만 참된 성도에게 더 이상 율법체제가 싫다.

이들은 오직 독생자의 희생에만 온 몸과 생각을 바친다.

왜냐하면 그 희생의 능력만이 은혜가 되어 율법에서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이 외친 바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6-17)

모세와 더불어 그 어떤 인간도 은혜 제공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율법이 근간이 되는 행함 체제를 유지할 수 밖에는 노릇이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는데 이걸 어떻하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유는

독생자는 은혜 위의 은혜가 되시는 분이시고 또한 자신의 희생을 의의 근거로 삼아 성도를 은혜 체제로 전환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독생자가 몰고 오신 그 은혜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성도는 이제 그 사랑의 지배를 받는 피조물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4-15,17)
이러한 은혜 체제 안에 있지 않고 바깥 종교적 노력에 매달리는 자는

아직도 자신들의 선행과 능력과 공로로 앞으로의 자신의 구원을 밀고 나가보려고 한다.

이 논리를 위해 이들은 '구원, 그 이후'라는 새로운 신자의 상황을 따로 마련해 두고 있다.

즉 성령이 내주하시고 임재하시는 이유는

의의 생산 주체로서 말씀을 완전하게 지켜나가는 자기네들의 행함의 위력을 후원해 주기 위해 있다는 점에 치중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성령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육체의 행함을 겨냥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4-5)

여기서 믿음이란

행함의 출처를 폭로하기 위해 대비되는 개념으로

성령쪽에서 제시하는 반응이다.

육체의 행함으로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반응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한 번 믿음 이후에는 그다음은 행함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믿음→믿음→믿음으로 이어져야 지속적인 성령에 준한 반응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믿음→행함이 되면 이는 곧 성령→육체가 되는 것과 동일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언약의 하나님의 언약의 결과만을 가지고 이 세상에 적용시킬 뿐이지

인간으로부터 새삼스럽게 뭘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도대체 얼마나 바쳐야 호흡과 생명을 가치를 자기 쪽으로 전환시켜 자기 의의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결과라고 우길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25)

이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은 분명 세상 모든 자를 지금도 자발적으로 살리고 계시는 주님이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도 결국 심판을 겨냥해서 제공되는 은혜였다.

이어나오는 성경귀절이 이를 증명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0-31)

지옥 갈 자를 필히 지옥하도록 하시고자 하는 은혜였던 것이다.

그래야 언약만이 최종 성취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구원받는 자의 천국행은 무슨 근거로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구약에 의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왕인 다윗의 후손과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해서

자기 택한 백성에게 거저 주어지게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1-3)


이 본문에 보면,

두 주님이 나오신다.

왜 주님이 두 분이나 등장하시는가?

상대할 만한 인간이 따로 있다면

무엇 때문에 주께서 또다른 주님에게만 언약 완성의 임무를 다 맡겼겠는가?

결국

사람을 상대해서 그 인간의 성취할 하나님의 언약은 아예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명명된 분을 통해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 것이다.

"찬양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
구약의 여호와 전쟁은

비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이름의 승리이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출15:3)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한 언약궤가(출 20:24)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이처럼 구약에서 주의 이름과 주의 언약에 대드는 자는 그 윤리성과 도덕성과 무관하게 저주받는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 …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렘 10:25/11:3)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을 성취해나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식으로 성취해 나가시는가?

비언약적인 것을 심판하시면서 성취해 나가신다.

무엇이 비언약적인 것인가?

주님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들이 비언약적이다.

왜 주님에게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가?

거룩과 의와 구원과 용서가 오직 주님에게만 나오기 때문이다.

결론

교회는 언약에 기초해서

비언약의 실정과 그 과정과 결말을 필히 증거해야한다.

이런 교회만이 '교회를 위한 교회'같은 사이비 교회가 이닌 것이다.

언약만 증거하는 '언약에 준한 교회'는 자기 교회조차 언약보다 앞세우지 아니한다.

언약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교회만이 살아남는 교회이다.
인류사의 모든 결론은 심판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하늘이 심판이 무슨 기준에 의해서를 알기만 하면 사실 모든 결론을 다 알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심판의 기준이 자신의 선행의 과다에 있지 않다.

이 시대의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이며 그 새언약의 기준이 되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은 새언약에 중심에 있지 않다.

중심을 차지하고 계시는 분이 다윗이 예언한 그 주님 오른편에 계신 주님이다.

소년 다윗이 앞장 세운 '만군의 하나님 이름'으로 오신 바로 그분이다.

'할례받지 못한 자를 용서치 않고 언약대로 저주하리라'라고 소년 다윗이 굳게 믿었던 바로 그분으로 오신 주님이시다.

바로 이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언약에 준해서 저주를 받는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의 성품에 서 나오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여기 있나니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그 받은 사랑만이 내놓으면서 이루어지는 사랑이어야 한다.

그것이 화목제물만을 앞장 세우는 사랑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즉 형제들 간의 사랑에서

자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화목제물 되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게 된다.

성령을 받은 자만이 이를 알게 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여기서

우리란 오직 화목제물만이 진정한 심판을 이기는 사랑인줄 아는 자들 끼리의 우리이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여기에 그 어떤 두려움도 있을 수 없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7-18)

심판을 이긴 자는 이 세상에서나 하늘 나라에서나 모든 두려움을 이긴자이다.

이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오직 택한 자에게만….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