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같이 되었도다(고전4;9-13)"
사도의 자리 내부에는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자리가 됩니다.
그 자리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이 생명 앞에서 인간들의 모든 엄살과 불평과 하소연은 자신의 무가치성을 제대로 모르는 소치가 됩니다.
즉 인간이 처해 있는 그 삶의 자리를 쳐다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투과해서 도달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세계는 온통 예수님의 죽으심을 유발한 활동들의 천지가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덤벼드는 인간들의 마지막 발악들이 하나님의 귀하신 아드님을 살해하는 동기들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렇게 되어서 성사된, 인간 세계를 근원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자리를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루어진 자리를 세상 속에 새겨 넣으시므로서
인간이 미처 감당하거나 담당하지 못한 이질적인 영역이 인간 세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그동안 인간을 통제했던 악마마저 손쓸 수가 없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9에서 이 자리의 활동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즉 인간들이 감히 저지하지 못할 요소들이 인간 세계에서 꿈틀거리게 된 것입니다.
이 꿈틀거림의 자리의 성격이 곧 사도가 사도로서 활동할 수 있는 성격입니다.
타인을 위해서 아낌없이 쓰레기 되어도 좋다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움직이는 성도를 가지고 히브리서 11:37에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인간 세계에서 해석이 가능치 않는 행동들을 보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활동은 그동안 인간 세계를 숨어서 지배한 악령의 활동과는 정반대입니다.
악령의 활동은 인간의 가치를 우대하는 식으로 조종해왔습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가 있다”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즐겨 세상의 쓰레기 되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입니다.
-십자가마을 "복음의 메아리"란의 "사도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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