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5년 1월 29일 오전 09:43 (주님의 표현형임을 고백하는 것이 성도)

아빠와 함께 2015. 1. 29. 10:45

아브라함에서 복은 없는 자식이 구원된다는 거죠.

이삭에게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야곱에서는 요셉의 희생 덕분에 다른 사람이 살지요. 본인은 고생하고 남이 사는 원칙,

이 세 가지 원칙이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전부 합체가 돼요. 독수리 오형제처럼. 원리가 합체가 돼요.

 

없는 자식이 구원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없는 분이죠. 하늘에서 오신 분이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선언 받았지요. 죄인으로 받은 분이 오히려 의인이고, 죄인으로 규정한 그들이 도리어 죄인 되고.

한 사람의 희생으로 남이 산다.누가 잘났나, 못 났나가 아니고 다같이 못난 입장에서 나 혼자 희생해서 내 덕을 봐라. 내 덕분에 네가 구원되라

 

이런 세 가지 원리를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으로 주십니다만

이 말씀을 주실 때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나중에는 깨닫게 하시지요.

왜냐하면, 이런 것은 인간이 준수할 일이 아니고 지킬 일이 아니고 말씀 주신 당사자가 이 땅에서 현실화시키시기 때문이죠.

다시 할게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말씀을 주신 본인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나감으로써 혜택을 우리에게 공짜로 주시는 거예요. 그냥 덤으로 참여시키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이 아신다 치고 여러분에게 문제를 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십계명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제사법, 뭘 하지 말라는 민수기에 나오는 법령은 지켜야 됩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의 권면 같은 것, 술 취하지 말고 분 내도 해지도록 품지 말라는 것,용서하라, 선을 행하라...,

그런 이야기를 지켜야 된다는 겁니까, 지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하나님의 예언대로 성취하기위한 만들어놓은 지평이라고 했지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예언대로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놓는 만들어놓는 판때기에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멸망했다는 말은,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이 전부 다 에서고 전부 다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고,한결같이 모든 인간이 이런 판에 있다는 겁니다.
 

주의 말씀과는 꼭 반대로 살아가는 요소가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들어있어서 뛰기만 해도 출렁출렁해요. 돈을 사랑해야지, 돈을 사랑해야지. 이게 막 나온다니까.

날 미워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이게 막 나와요.

남을 욕하는 것은 살인죄라 하지요. 나한테 걸리기만 해봐. 가만두는가 봐.

모든 사람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똑같아요.그러니까 내가 착하다, 안 착하다는 사실은 삭제돼야 돼요.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위한 율법인데 잠복돼있는 죄가 율법을 지킨 내가 얼마나 위대하고 잘난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재료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덥석 집은 거예요.  그것이 잠복돼있던 죄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그래. 너 잘났구나. 너, 가인해라. 네가 알아서 제사 드리고 다 해라. 반복된 제사가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잠복된 자기의 죄가 노출된 것이고 다른 민족은 아직 잠복돼있는 것이고 그들은 노골적으로 먼저 노출된 거예요.
노출된 가장 극한의 지점이 메시아를 죽여 버린 사건이지요.

 

이런 판에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노선을 새롭게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거예요.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활용하느냐? 가 있을 따름이죠.욕쟁이 같으면 욕으로 활용하면 할 수 없어요.

어떻게 활용하더라도 표현형이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그런 고백이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성도인 겁니다.

머리굴려 하는 고백이 아니라 평생에 나그네 길을 살면서 완전히 진득하니 사골 우려내듯이 한평생 우려나면서

"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형이여, 걱정하지 마소서. 형이 날 미워한 게 아니고 형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총리대신이 되게 하신 것이니까

날 팔아먹었다고 형한테 절대로 조금도 감정 없습니다.” 이게 점잖은 멘트로 하는 것이 아니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나오지요.

왜 그렇습니까? 타인이 날 조지는 게 아니고 남이 모르는 주님이 개인적으로 나를 짓밟아놨어요.

“앞으로 네가 남한테 복된 일하더라도 네 공로로 하면 안 돼.” “알겠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앞으로 힘들 일 시킬 텐데 그때 니 자랑할 거야?” “어데예, 언제예. 그럴 리 있습니까. 나는 죄인인데요.” “그래야지, 그래.” 완전히 조져놨어요.

“베드로야, 너 날 부인했지?” “죄송합니다. 자꾸 미안한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네가 나중에 앉은뱅이를 낫게 할 거야. 네 자랑할 거야?” “어데예. 내 자랑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으면 예수의 증인되는 겁니다. 

나를 다루시는 주께서 지금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앉은뱅이나 나나 다 주님께 소속돼있다는 그 표현형만 드러낼 뿐입니다.

 

그냥 사세요. 아~ 정말. 그냥 살던 대로 사세요.

때가 되면 교회 가게 하시고 때가 되면 기부금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고 낸 것 도로 달라고 할 수도 있고.

모든 어떤 머리카락과 발걸음도 주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어떤 마음으로 뭘 해도 죄라고 각오하시고 살면 돼요.

점잖은 티낸다고 점잖은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점잖은 체하는 그 자체가 고단수 죄가 되는 거예요.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