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에게 두 부인이 있었다. 하나는 하갈이고 하나는 사라인데
하갈은 종이고 이스마엘이란 자식이 있었다. 그런데 사라는 임신을 못해서 자식의 부재, 자식이 없어요.
그런데 있는 자식들은 지옥 가고 없는 자식은 천국 간다는 겁니다.
간단하게 해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계시가 우주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교회 다닌다든지 내가 예수 믿는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교회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예수 믿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현실이냐? 이걸로 끝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아는 내가 정리한 현실이 진짜 하나님이 생각한 현실과 동일한 현실이냐?
현실도 모르면서 현실 속에 산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소외당하고 지금 그야말로 어긋나게 누가 힘드냐? 본인이 힘들어요.
현실 속에 있으면서 현실 원리와 다른 원리로 우기고 저항하다 보니까 본인이 되게 힘든 거예요.
그러나 현실을 알아버리면 전혀 힘들게 없는 겁니다.
그럼 현실은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에게 내린 계시 안에 응축돼있는 겁니다.
세상 안에 예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지만 예수 안에 세상이 응축돼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전체가 큽니까, 부분이 커요? 어느 게 큽니까? 보통 우리의 상식은 부분보다 전체가 크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전체의 부분이 그 전체보다 더 큰 거예요.
세상에 속하다고 여긴 예수님이 오히려 세상을 창조한 분으로써 이 세상에 속했습니다.
어떤 특정 인물, 예수 안에 세상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을 이해하려면 뭘 이해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이해해야 참된 현실이 펼쳐지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 내가 밥 먹고 살고 자식 키우고 하는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현실에 속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빼앗아왔어요. 교회 가서 예수님 뵙고,
“월요일부터 이 일은 제 일입니다. 손대면 안 됩니다. 제가 밥벌이 하려고 하는 일인데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예수님이 생각한 현실이 아니고 자기가 따로 만든 현실이 돼버려요.
그래서 현실에서 걱정한다는 자체가 주님에 대한 모욕이에요. 모독입니다.
“욕심도 허락 맡아야 합니까?” 하는데 그래요 욕심도 허락 맡아야 돼요.
<미생>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거든요. 욕심도 허락 맡아야 된다니까.
더 나가서 화내는 것도 허락 맡아야 돼요.
“니가 왜 화내지? 어쩔라고. 화내는 이유가 뭔데?”
“제가 몸이 아파서 화냈습니다.”
“니 몸이가? 내가 아픈데 니가 왜 화나지? 이상하네.현실을 착각해도 보통 착각한 게 아니네. 네 현실 따로 있고 내 현실 따로 있나?”
“그건 아니고요.”
“그럼 합칠까, 우리?”
“합칩시다.”
합치는 대신 너는 니 현실 자체를 포기해야 돼요.
종교를 갖는 게 기독교 신자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의 오락이에요. 게임이라니까요. 취미활동이에요.
기독교 신자 아무 의미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의미 없어요.
우리가 생각한 현실 그 자체지 나를 죽이는 현실 그 자체지
따로 어떤 모임을 만든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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