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성전이 멸망당하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가십니다.
거기서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그 성전이 사람에 의해서 지어지나싶었지만 천사가 측량하는 게 보였습니다.
이로서 미래의 성전은 비-실체적인 성전입니다. 하지만 치수로 측량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 세계의 실체적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하늘의 세계와 땅의 양면성을 다 보여줄 인물이 바로 인자(人子)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새성전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오실 메시야의 지상 생활에 대한 내용입니다.
천사가 척량한 그성전은 곧 주님의 공생애입니다.
하늘에서 오셨지만 사람들 보기에 일반 사람과 조금도 차이남이 없습니다.
양으로는 일개 한 사람이지만 질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성전 양식으로 기능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원래 성전이 전쟁의 기념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역대상22;7-10)
다윗은 전쟁에 승리하지만 마무리는 못되어 평화의 시기는 아들 솔로몬왕 때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성전이란 ‘평정’, 혹은 더 이상 전쟁 치를 적이 없을 경우, 모든 사태가 ‘마무리’ 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실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을 갖고 있던 이스라엘마저 에스겔 때에 와서 멸망하고 말았고 성전도 불태 버렸습니다.
즉 하나님의 적의 속성이 그만큼 깊어진 것입니다.
국가 대 국가로 아군과 적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지 아니 사는지를 결판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도대체 인자 시대에 있어 하나님의 적으로 간주되는 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멸망당한 성전의 실체성에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로부터 빠져나가 하늘로 올라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겔10;18절)
이것은 곧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더 이상 하나님께서 합류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들이 지은 성전에는 에스겔 47장처럼 생명수가 계속해서 주변을 차고 넘치도록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어느 실체있는 성전에서 예배 드려야 하느냐를 묻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나 아니면 사마리아 민족들처럼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이냐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실체적 성전을 거부하십니다.
예수님의 피가 쏟아질 때 비로소 그 몸에서 생수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 비-실체적 성전이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이 될 때 생명수는 차고 넘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인간들의 실체적 성전이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율법 이해에 있어 자기네들의 행함으로 완전함과 온전함을 소유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어릴적부터 10계명을 지켜서 온전함과 선함을 쌓아왔다고 자부했습니다.
물론 그 결과로 부자가 되었고 말입니다.예수님께서 그 돈부터 지적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팔고 빈털터리로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부자청년은 근심하다가 자신의 온전함을 지키기 위해 평소에 죄를 피하듯이 예수님을 피하고 말았습니다.
즉 자기 온전함을 유지하려는 그것이 예수님이 싸우려고 했던 적이 됩니다.
천사가 새성전의 치수를 재고 측량하는 것은
모든 성전 부속 건물의 규격됨이 철저하게 이 성전으로 율법을 완수한 한 분에 통일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통일은 곧 이 성전으로 혜택입을 모든 자들이 하나같이 동일한 질로 통일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치수는 새성전의 성도의 양적 숫자가 아니라 질적 합치를 말합니다.
오직 한 분과의 연결이 완벽하게 구축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통일이 신약에 인자로 오신 예수님의 이 땅의 삶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 생애의 결정되는 시점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속성이 드러납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여기서 예수님의 뜻이란 자신의 완벽한 의로움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뜻은 그 의로움을 죄로 넘긴다는 것입니다.
누명씨워서 억을함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야지만 이 실체적 성전을 신봉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결별하고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시고 그 기념으로 하늘에 성전을 완수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억울해도 괜찮아.” 라는 영역을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성전인 이유는 개인의 몸이 아니라 성도에게 작용하는 새성전의 질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계6;10)
성도가 이 땅에서 합당한 분을 섬기지만 세상은 성도를 가만두지 않고 죄인으로 몰아붙일 겁니다.
스데반집사에게 했듯이 말입니다.성도된 자는 이 억울함과 분통을 예수님의 세계로 넘길 기회를 가진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심하게 당하셨다는 십자가고난에의 동참입니다.그것이 성도의 기도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온전함을 포기하고 빠져나간 자리에 예수님의 은혜로 채워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마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서 복음으로 인한 수모는 하나님의 구원된 자에게 주신 축복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수요설교 "측량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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