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5년 1월 24일 오전 07:23 (라헬의 고통)

아빠와 함께 2015. 1. 24. 07:50

라헬의 고통을 맛보지 아니하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교회 주일오후설교 ”규례와 법도”증의 말씀입니다.

  라헬의 고통을 좀 더 명확히 설명해 주신 2002년도의 설교를 찾아 보았습니다.

”아기들의 수난”  
2002년 9월 22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2:13-18
2: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2: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2: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2: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성경은 전체가 비밀입니다. 물론 문자를 아는 자들은 누구나 들여다 보면서 그 내용을 탐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밀로서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그냥 밖에서 관람하는 사람과 성경 속에 놓여 있게 되는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보면서 참 훌륭한 장군이라고 찬사를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시대로 돌아가서 졸병으로 복무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극구 사양할 것입니다. 

왜군하고 싸우는 그 고생을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훌륭하고 참 좋은 일을 인류에게 남기신 분이라고 극구 칭찬해 준다고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습니다. 

바깥에서 관람하는 식으로 성경을 보는 자들은 예수님이 당했던 수모과 고난과 무관한 자로서 버림받은 채 살아가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참으로 무섭고 겁나는 광경이 벌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그당시 집권자들에 의해 한 동리에 있던 두 살 아래의 남자 아기가 학살을 당하는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태가 우리에게 들이닥치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얼른 페이지 넘기기로 마음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도 역시 '성경 밖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겁니다. 왜 사람들은 성경 안에 인물과 공유하기를 싫어할까요? 

그것은 성경에서 아무리 훌륭하다고 치하해도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코 그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 사회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기준과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성공이란 '소유의 증가'입니다. '재물의 축적과 확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성공, 즉 복은 어떤 개념일까요? 

시편 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복이란 소유와 상관있는 것이 아니라 죄와 관련있습니다.

이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현대 사회에서의 소유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속에서 얻어지는 겁니다. 

복이란 타인과 얼마나 원만한 관계 아래서 잘 사귀어놓는가와 연관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복은, 자신의 죄 문제를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가와 관련 있습니다.
아무리 소유가 넉넉해도 소용없습니다. 죄의 길에 그대로 들어서 있다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니 이것보다 더 심각한 실패가 또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 안의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신을 찾는 사람들 마음 속에는 은연 중에 신을 싫어하고 도리어 신에게 불만과 원통함을 지닌채 다가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왜 이 세상을 내 중심으로 돌아기지 않게 하느냐?"에 나온 불만같은 겁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픈 자존심이 계속 발작하기 때문에 신도 자신의 이러한 소원을 들어줄 의무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성경 안의 세계는 인간 중심의 세계가 아닙니다. 예수님 중심 세계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면 죄문제나 장래의 심판 앞에서 큰 낭패를 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의로서 심판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의로만 심판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 안에서 인간 중심이 될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 중심이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성경 안의 세계에서는 참혹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겁을 집어 먹게 됩니다. 

"하나님 행여 같은 성도라는 이유 때문에 이들이 헤롯 왕에게 당했던 참혹한 학살을 우리에게 퍼붓지 말아주십시요"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가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지녔는지, 

실제로 이런 참혹한 사태가 우리에게 닥쳐도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망하는 자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 밖의 세상적인 성공관으로 봐서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이들의 부모들은 인생에 있어 큰 실패를 당한 사람들로 보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관점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큰 실패이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애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러분들이 '애굽'이라고 할 때 늘 생각나는게 있지요. 그것은 다름아닌, '반드시 탈출되어야 될 세계'라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니 예수님은 무사히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애굽'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선 지리적으로 봐서는 예수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도리어 애굽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애굽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여기 15절에서, '내 아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예수님을 배척케 한 그 모든 세력이 오늘날 다 '애굽'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참된 주의 자녀들은 이 애굽에서 필히 탈출되지 않으면 구원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 과연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세력에서 자진해서 빠져나오려고 할까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도 애굽에서 자진해서 빠져 나올 생각은 안했습니다. 

단지 애굽에 눌러 살면서 좀 더 덜 고통스럽게만 되지 않기를 바래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을 뿐입니다.
오늘날의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만한 세상이라면 종교적으로도 건전하고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인데 뭘 문제 삼을 것을 것이 있단 말인가?"하고 의아해 할 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출현했던 그 당시 유대인들은 마음 속에 다음과 같은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택한 민족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이다. 

우리 같이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또 있겠는가? 

설마 우리가 애굽이라는 하는 것은 참으로 가당치도 않는 생각이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땅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니까 진정한 유대인의 본성이 발작을 하면서 강한 거부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물론 일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권층과 아기 예수와의 문제이지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것이다"하고 태평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구원하는데 있어 세상의 모든 세력을 다 이용하십니다. 

아기 예수를 잡겠다고 난데없이 베들레헴 동리 근처의 두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은 몰살을 시키게 됩니다. 


이 때 아기의 부모들은 이 세상의 근원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에 대해서 민감하고 극도로 반감을 지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에 의하면 바로 이 세상이 애굽, 그 자체라는 겁니다. 

뿐만아니라 그 세상에서 탈출되지 않는 자라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15:1의 말씀, 즉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을 성취시키기 위해 아기 예수님의 가족에게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성취하겠다는 뜻에서 난데없이 아기 예수로 인해 피해를 보는 가정이 생기게 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서 이 세상에 예수님을 극도로 미워하는 속성으로 가득찬 애굽이며 

그곳에 탈출하지 아니하면 옛날 출애굽과 같은 그런 구원의 차원에 속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자기 아기들을 예수님 때문에 잃어버린 자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그 어떤 미련과 희망을 갖지 않는 계기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즉 지금까지 자신이 처해왔고 살아왔던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겁니다. "과연 우리가 살만한 세상인가?"하고 말입니다.
이들의 출현에 대한 예언은 예레미야 31:15에 나와있고 그 본문에 오늘 본문 18절에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예레미야 당시 라마라는 지역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이라는 나라로 포로 잡혀 갈 때 집결된 장소입니다. 

그당시 유대나라는 집권자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애매하고 억울하고 많은 백성들이 남의 나라로 잡혀가고 가족들도 해체되었습니다. 

젊은 이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면 이제 살아 생전은 못보는 겁니다. 생죽음이요 생이별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부모들은 너무 너무 억울해서 라마에서 통곡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 통곡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에서 '라헬'이라고 합니다. 라헬이라는 것은 야곱의 본처입니다. 

야곱은 두 자매와 결혼했는데 언니는, 그냥 덤으로 끼어들어 야곱과 혼인한 처지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진정 자신의 아내처럼 사랑했던 사람은 라헬이라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나중에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따라서 라헬이 통곡했다는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이스라엘이 통곡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기 어머니들의 통곡은 마치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이 누군가를 분명히 밝혀줄 통곡이라는 겁니다.

아기 예수가 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배척받는 그 아픔에 이들은 동참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들만큼은 세상의 실체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세상적으로 보이는 소망을 소망으로 간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수를 기대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신 그 하나님에 의한 다음 조치에 의해서 제발 이 애굽의 세계가 심판받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견해를 안고 사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기 예수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매일같이 이런 아픔이 주어집니다. 

물론 실제로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교인들 집마다 아기가 경찰에 의해 난도질 당하는 경우는 생겨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중심으로 된 자기 백성들을 건지기 위해서 각가의 형편에 맞게 세상에 대해서 실망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애굽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물론 세상적인 성공을 노리고 교회에 찾아든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요. 

이들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보고 연구해도 세상적인 성공욕이 늘 근본 인생관이기 때문에 성경 안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자신들은 요령껏 신앙생활 한다고 자부하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히 실패한 인생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쁨은 세상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로만 기뻐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심판을 견뎌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행여 성경 속의 세계를 더 겁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이런 자세가 애굽이 두려워서 구원되지도 못한 인간상임을 우리가 똑똑히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