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 (겔39;25)
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니(26)
곧 내가 그들을 만민 중에서 돌아오게 하고 적국 중에서 모아내어 열국 목전에서 그들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라(27) ”
출애굽의 원칙은 ”대신 희생으로 구원”이요 ”죄 속에서 구원”입니다.
즉 그 누구도 사적인 거룩과 기도와 노력으로 세상 죄를 떨쳐버리고 구원받겠다는 나선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출애굽 방식과 일치되지를 않습니다.
진정한 출애굽적인 구원방식은 인간의 그 어떤 시도조차도 죄의 위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임을 분명히 해두는 가운데 진행됩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비유의 내용과 같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는 맏이는 아버지에 의한 동생의 과도한 환영식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즉 이런 식의 구원방식을 자신은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겁니다.
늘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를 잘 받드는 것이 옳은 구원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 맏이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탕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 과정이라는 겁니다.
죄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불평하는 맏이처럼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잡혀서 자신의 힘으로 다시 탈출하는 방법은 전무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부끄러워하며 죄를 뉘우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죄를 뉘우침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 근거해서 주어지는 겁니까? 25절에 보면, ‘긍휼’이라고 되어 있고 27절에서는 그것을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거룩은 우리가 착한 것이 거룩이 아니고 긍휼을 유지하는 것이 거룩이에요.
마리아가 향수병을 깨뜨리면서 주님 발 앞에서 울 때 그게 거룩이에요. 일체 자신의 거룩을 담지 않는 게 거룩입니다.
“나는 해체 되어야 되고 내 인생 깨져도 괜찮아요. 내 인생 이렇게 망가져도 괜찮아요.
내 인생 망가졌지만 그것마저도 긍휼이라는 것을 제가 압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위에서 왔기에 거룩한 겁니다.
야고보서 말씀대로 위에서 온 것은 다 거룩한 은사에요. 온전한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왔기에 택한 백성은 완벽하게 다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이란 우상숭배의 죄성을 동반해서 드러내면서,
오로지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고 알고 있는 ‘주의 이름’의 방식으로만 제 2의 출애굽을 성사시키십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의도적으로 적(애굽)이 발생되어야 하고
이스라엘은 거기에 처박혀야 하고, 그리고 그 험한 세월이 제대로 된 우상숭배 죄를 아는 기회가 되게 됩니다.
도저히 예상못한 거룩한 긍휼에 의해서 건져내시기에 성도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세상 어떤 일들도 사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을. 가장 중요한 것을 담는 보물의 그릇으로서의 여유이지요.
-우리교회 주일오후설교 ”적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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