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 정리

2014년 11월 23일 오전 09:11 (윤리와 선행에 대한 질문)

아빠와 함께 2014. 11. 23. 09:56

질문;

성경의 윤리나 선행에 대한 가르침들은 어떻게 해석해야하나요?

 

답변;

기도나 선함이나 국가법에 순종하라는 모든 말씀은

일단 인간의 몸 자체가 다른 힘과 다른 귄세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행복이나 안녕을 위하여 이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되심과 그의 나라의 운영을 위하여 개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즉 인간들의 기도나 선함이나 국가법 순종에서는

사적인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도 방치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사태나 상황을 유발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의 움직임이 개인적인 기대치에 합치되는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을 수시로 깨달아야 합니다.

1. 기도
인간의 예상 못 할 상황에서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 이후의 결과와 자신이 한 기도 내용이 합치되는지 여부를 파악해서

자신의 신앙 유무와 자신의 기도 응답의 가능성을 측정해볼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속사정을 수정하고 지적받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가십니다.

예를 들면, 어느 교회 목회자가 어느 시점을 통해서 갑자가 교인들이 출석하지 않고 빠져나가게 되면

그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이 마지막 때가 될수록 하나님 나라가 쇠퇴하고 있고 교인들이 세속에 물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이 빈 자리가 차고 넘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본인이 보기에도 말씀에 합당한 기도했다고 여기지만

실은,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는다는 요한복음 6:39의 말씀에 도전하는 생각을 반영한 겁니다.

즉 자신이 운영하는 교회가 번듯하게 지속하므로서 자신이 참으로 참된 주의 종인 것을 확인받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불신앙을 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도를 유발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신 겁니다.

2. 윤리
성경에서 착한 일에 대한 장려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을 위하여 착한 일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밝혀주기 위함입니다.

즉 주님의 나라를 빙자해서 자신의 미래가 복으로 채워지기 위해 선한 일에 매진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착한 일에 매진은 필히

그 착한 일의 주체자라고 나선 본인이 기대한 결과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등장하는 지를 확인하는 가운데

자신이 진정 참된 신앙인임을 단정지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자신을 부인하는 가운데 선한 일을 하지 못함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기 위해 착한 일을 하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부분적으로 자신이 실시 가능한 착한 일이라고 덤벼서

나름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사적 욕심없이 착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테레사 수녀처럼)

마태복음 5:29-30의 실천은 계속 유보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혹은 자신의 자선과 동정과 구제가 믿음에 준해서 이루어진다고 자부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시험은 보류하고 유보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태복음 17:20)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작은 믿음이 있다고 자부한다면

집 가까이 있는 산에게 명령해봐야만 옳습니다. 혹시 바다에 빠지는지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행사하는 선행은

이미 사적인 이익이나 따로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 자꾸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혼담이나 취직을 앞두고 집중적으로 교회 봉사나 사회 구제에 열중인 것과, 마음과 행동에 조심스러워 지는 것도 이 한 예입니다.

행여 악한 일을 통해서 정작 갖고 싶은 상황에 액운이 끼어 일이 틀어지는 것을 사전 방비하고 싶은 겁니다.)

선행 실천을 통해 얼마나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지를 주님은 실습시키시는 겁니다.

3. 세상법 준수
인간들의 행위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나 지율성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보이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권세자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몸에 익숙해진 원리 원칙들을 준해서 사는 것이 몸에 자연스럽게 되어 있습니다.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못하고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서 살겠다”고 모세에게 대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한 순간은 세상 권세없이 홀로 초연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에베소서 2:1-3에서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권세에서 벗어나 사적인 의지와 결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경우가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새로운 권세로 성도로 이동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즉 성도는 그동안 자신의 자유 결단과 선택력에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어두운 권세에서 못 빠져나와서 그 권세의 협박과 위협에 쫓기듯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권세 자체를 이제는 예수님이 이용하고 계셨음을 알려줍니다.

교회 덩치가 아무리 큰소리쳐도 국가의 움직임에 종노릇하게 되어 있고,

교인 개인이 아무리 교회의 불의함과 개인 신앙의 자유를 교회에서 외쳐도

교회에서 왕따 시키고 교회법을 의식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본인 스스로 궁리하면서 그 법에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권세의 존재 이유는

성도는 성도 본인의 몸체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 아직도 이 어두움 권세 아래서 복종케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이래나 저래나 성도는 개인을 위한 삶은 더 이상 허용될 수 없습니다.

성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이 세상 살면서 지옥 체험을 톡톡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적은 바로 하나님의 원수적인 성질을 함유한 본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교회 "질문/답변"란의 "윤리와 선행에 대한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