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쉬어 가는 코너(이준)

아빠와 함께 2013. 1. 28. 10:32

[쉬어 가는 코너] 바다이야기(?) 
이준   2006-09-15 08:22:18, 조회 : 111, 추천 : 1

[쉬어 가는 코너]
제목 : 바다이야기(?)
부제 : 꿈, 그리고 교회에 대한 재해석(!)

불과 며칠 전 작은 실화...

어느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일단의 동료들이 업무차(?) 남해에 다녀왔다.

눈 앞에 펼쳐진 남해 앞바다의 장관을 바라 보면서 하는 말 중에,

A: "야, 정말 멋진 풍경이네요. 애들이 이런 곳에서 자라면서 '꿈'을 키웠겠네"
B: "ㅋ 꿈? 무슨 꿈? 어부가 되는 꿈?"
A: "에이~말을 꼭 그렇게 해야...ㅡㅡ^"
c: "음...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이 있죠..."
A: "아 참...그렇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 도로를 달리다 뒷좌석에 탄 그들이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하는 말,

A : "야~교회다"
D: "(왠지 다급한 목소리로) (교회가 아니고) 예배당! 예배당!"

**등장인물 약력(?)**
A: 40대 초반의 "제법 큰" 교회의 어느 여집사
B: 어느 시골 벽지에서 나서 자랐지만 언젠가 바로 남해 그 곳에서 다년간 젊은 시절을 보냈던 40대 초반의 한 남성
c: 이 글을 쓴 사람
D: 무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교를 미션스쿨에 다녔던 40대 후반의 어느 남자 분
그외...예수님께서 만드신 바닷가에서 무공해 바람을 들이마셨으면서도 내뱉은 건 사소한 잡담 뿐인 나머지 인물들은 어둠 저편으로 모두 생략...

**등장인물 분석(1)**
A: 강력한 애살과 자기 일의 전문성, 열정, 실천적 봉사 등으로 중무장한(!) 여자.
B: 승진이 보장된 미래 속에서, 자라온 험난한 성장과정을 통해 터득한 요령과 끼, 여유로움과 전체를 볼 줄 아는 사고력을 바탕으로 삶을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남자.
c: 그냥 평범해 보이는 한 젊은 남자.
D: 곧 승진을 앞둔, 매사에 온건하면서도 신중한 사고력를 소유한 남성.

**등장인물 분석(2)**
1)A와 c의 공통점 : 육안으로 보면, 기존 한국 교회에 다닌다는 점.
2)B와 D의 공통점 : 예수 없이 평생을 살아오고 있지만, 대인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바, 평소 예수에게 이렇다 할 유감은 없어 보이는 듯함(예수가 자신의 생에 이렇다할 이익도 불이익도 주지 않았기 때문인 듯).
3)A와 c의 차이점 : 예수 안에서 그야말로 꿈과 비전, 발전과 성장에 미쳐 있는 여자 vs 인간이란 존재는 '가능성'이 아니라 '십자가' 앞으로 늘 회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남자

**꿈에 대한 이해**
1)A : 평소, 성경 본문에 언급된 '꿈'을 '꿈'으로 해석하지 않고 '비전(야망 내지는 야욕이 미화된 개념)'으로 왜곡하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냄. 그녀가 왜 그랬을까. 기존 한국 교회를 통해 그렇게 배웠고, 또 처음부터 본성 속에 그렇게 믿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2)B: 그가 나고 자라고 살아오는 과정에서 겪은 삶의 각박했던 현실이 그로 하여금 어린 아담들이 꾸는 꿈은 아담들의 각박한 현실 세계와는 너무나 다를 수있다는 흔하디 흔한 아담 세계의 진리를 새삼스레 되짚어줌. 이 점에서 그의 내뱉듯이 날린 멘트는 A로 하여금 아주 잠시 감정을 상하게 한 듯. 그러나, 그에게 그 자리에서 되받아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의기소침해질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라는 기관차'는 지금도 계속 어디론가 돌진 중이다.
3)c : 왜 그런 말이 자동으로(?) 튀어 나왔는 지 본인은 정작 그 당시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음. 이제서야 조금은...

**교회에 대한 이해**
1)A : (아무리 통상적으로 그런 식으로 통용된다 하더라도) 물리적 공간을 여전히 '교회'라 일컬으며, 그런 교회를 구약 시대의 '제단' 또는 '성전'으로 묘사하는 정신 상태를 그대로 드러냄. 이것은 '죄'라는 거대한 유조선의 기름 유출로 인해 발생한 '아담의 세계'라는 욕망의 바다의 오염으로 인해 그 바다에서 '자아','욕망','가능성'이라는 더러운 기름 성분에 찌들려 살아가도록 운명지워진 '어느 기성 교인'이라는 한 마리 갈매기의 슬픈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2)D: 이 글 쓴 이가 이 분께 해 주고픈 말..."(당신의 운명은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그때 그 한마디만큼은) 아주 잘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그 옛날 "이 곳이 성전이라, 이 곳이 성전이라"는 말만 믿고서 결국 바벨론에 유린당했던 유태인들에게 하셔야했던 말씀처럼...

제목과는 달리, 재미없으셨다면 죄송합니다...;;

##############################################################################################

[옮겨온 글]영혼의 말단 
이준   2006-09-15 20:53:44, 조회 : 118, 추천 : 1

2006.09.04 Mon

영혼의 말단

한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 적어도 다니기 전보다 좀 더 좋은 인간이 될 법한데 애석하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이 된다. 대개의 교회는 분명히 이기심과 탐욕을 강화하는 데가 있다. 물론 이기심과 탐욕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 이기심과 탐욕이 무한정 뻗어나가지 않을 수 있는 건 인간 내면의 다른 한편에 그걸 견제하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그걸 양심이라고 부른다. 제 아무리 이기심과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인간도 이기심과 탐욕을 대놓고 자랑하진 않는 이유도 양심 때문이다. 심지어 양심을 팽개친 지 오래인 인간에게도 양심의 기억은 남아 조용히 작동한다. 그 기억을 완전히 지워주는 곳이 교회다. 교회는 남보다 잘 되고 남보다 많이 갖는 걸 그 과정이나 방법은 눈감은 채 '하나님의 축복'으로 공인해줌으로써 견제되던 이기심과 탐욕에 날개를 달아준다.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양심(혹은 양심의 기억) 때문에 조금은 마음에 걸렸을 일도 교회에 다니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된다. 교회는 인간 영혼의 말단까지 앗아간다. 이 교회를 어찌할 것인가.

Posted by gyuhang at 10:34PM | 트랙백 (1)

출처 : 김규항의 블로그

##############################################################################################
수퍼 자이언트 바퀴벌레 
박윤진   2006-09-16 22:31:29, 조회 : 151, 추천 : 2

지금의 내 생각으로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 없는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믿음없다는 것을 입증할 뿐입니다.

믿음없음과 믿음 있음을 구별하시는 분은
믿음 주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머리되신 예수님께 모든 판단을 부탁드려야지
지금 내 경험, 지식, 환경하에서
내 선악관으로
믿음있음과 믿음 없음을 구별하고
그 결과 믿음 없음에서 탈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우리를 신뢰한 것일까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앞에서
열심히 살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고 있는
바퀴벌레같은 존재, 그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바퀴벌레가 뛰면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방향을 선택했다는 것이
그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됩니까?

사람이 보기에는
이리저리 도망하는 바퀴벌레 일뿐이지
그 바퀴벌레가 자기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지
자기가 싫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지가
참고사항이 됩니까?

그냥 바퀴벌레니까 죽일 뿐입니다.
바퀴벌레에게 묻지 않습니다.
바퀴벌레의 입장은 추호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는 이미 예수 십자가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은혜아닐까요?

바퀴벌레인 주제에 자신을 사랑해 주신
그 분의 품 안에 들어와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더러운 하수구 같은 세상에서
수퍼 자이언트 바퀴벌레가 되길 바랍니까?

크고 빠르고 튼튼한 바퀴벌레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번 더 밟아 죽이고 싶지 않습니까?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했다는 것으로
스스로 자기 의를 쌓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했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세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인간이 바퀴벌레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듯이
하나님도 죄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지

나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다고 해서
나의 경제상태가 양호하다고 해서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바라는 것은
수퍼 자이언트 바퀴벌레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더 밟힐 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줄기차게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덤으로 사랑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써(여전히 바퀴벌레로써)
예수님께서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내가 찾아 예수 안으로 침노하여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마음으로 침노하여 들어오신 것입니다.

바퀴벌레가 찾아 들어간 곳이라면
하수구나 어두운 곳이지
감히 하나님의 품안이라니요....

그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과연 육체를 입고 있는 자 중에서
누가 천국을 침노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다면
그가 아무리 자기가 싫은 것을 하고
자기 육체를 학대하고
설령 불 가운데로 자신을 내어주더라도

자기 자신의 목소리만을 주장하는
울리는 괭과리와 같습니다.

우리의 어떤 결정도 구원을 방해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떤 결정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알아서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 와중에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 뿐입니다.

은혜 받은 후에도
은혜 받은 사람의 티를 내려고 하는 자는
아직 은혜가 무엇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은혜가 은혜되도록 그냥 내버려두길 바랍니다.
은혜를 내 자격증으로 삼지 않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평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은혜를 증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잡다한 문제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만 간섭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게 되었다면 그것만 자랑해야 하지 않나요?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자신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민할 권리조차 주님께 빼앗긴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