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복음을 깨달았더라면(정판옥님)이란 글과 관련한 이준님의 의견

아빠와 함께 2013. 1. 28. 10:25

복음을 깨달았더라면.... 
정판옥  (Homepage)  2006-02-08 15:13:41, 조회 : 253, 추천 : 11


               -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 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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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복음을 깨달았더라면.... 
이근호   2006-02-09 13:38:10, 조회 : 206, 추천 : 11

현실에 저항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자기 내부의 이질성을 밖으로 보여주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이질성이란 ‘하나님의 화목’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 놓여있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일종의 두려움입니다.

이로서 어두운 세계의 내부는 두려움와 두려움이 교차하고 주고받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말이 됩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두려움’입니다.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의 화목을 모르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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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복음 아닌) 현실 저항적인 내부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글 한 편... 
이준   2006-02-09 17:36:20, 조회 : 194, 추천 : 15

                                                                          교회

                                                                                                                                                글    김규항

출처 : 김규항, 김정란, 홍세화, 진중권(2000).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서울 : 아웃사이더.

술자리에서 내가 기독교인임을 밝히면 사람들은 당황한다. 그런 자리에서 그런 얘길 꺼내는 일이 웃기는 데다 나라는 인간이 도무지 교회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구석이 없기 때문일 거다. 사람들 짐작대로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기독교인이다. 아이가 경기라도 하면 나는 며칠 사이 지은 죄를 떠올린다. 나는 예수에 의지한다. 내가 가진 단출한 지식과 사상을 통틀어 예수의 삶만큼 나를 지배하는 건 없다. 나는 진정으로 사회주의를 소망하고 내 나머지 삶을 연관시키려 하지만 사회주의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인간의 영혼을 따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며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가 처음 교회에 나간 건 중학 2학년 때였다. 교회는 나더러 믿으면 축복 받는다고 약속했는데 그 믿음의 세기와 축복의 양은 정비례한다고 했다. 믿음이란 교회에 열심하는 것이고 축복이란 돈이나 명예, 건강 따위의 것들이었다. 교회는 욕망으로 물든 담장 밖을 말했지만 실은 담장 밖의 욕망에 찌들어 있었다. 교회는 언제나 영혼을 말했지만 영혼을 얻는 일이 돈을 잃는 일이라면 그마저도 없었을 거였다. 머리가 커가면서 나는 교회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제 새끼만 챙기는, 내 아버지보다 더 이기적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가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적어져 갔다. 교회에 다님으로써 일어나는 삶의 변화란 교회에 다니는 일 외엔 없었다.

내가 한신에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나는 그곳이 문익환이나 장준하 같은 거인을 배출한 곳이라는 것, 인권운동의 젖줄이자 민중신학의 본산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쳤을 때 내 관심은 오토바이와 음악, 그리고 여자에만 있었다. 내일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태워가던 건달이 그래도 대학을 다니라는 권고를 받아들였을 때 나는 한신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머리통이 뒤집어지는 충격을 받았다. 교회의 사회 참여, 정의의 하나님, 비천한 자들의 예수, 한 소년의 삶에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던 교회가 세상의 한 가운데서 세상의 바닥을 갈아엎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기독교인임을 사랑하게 되었다.

보수 교회의 건물에 진보 교회를 칠하는 일은 무리였다. 경악한 목사와 장로들은 내게서 청년부 회보를 만드는 권한을 빼앗았고 나는 교회를 나왔다. 아버지가 눈물을 보였지만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친구 소개로 찾아간 교회는 작았다. 목사는 알려진 소설가였고 50명 남짓한 신도는 지식인들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새로운 교회의 진보적이고 지적인 분위기는 잠시 나를 편안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 교회를 의심하게 되었다. 광주항쟁 3주기가 되는 예배시간. 목사는 감동적으로 설교했다. 목사가 눈물을 흘리자 신도들도 울기 시작했다. 예배가 끝나도 흐느낌은 그치지 않았다. 땡. 교단의 종이 울리고 목사는 웃으며 야유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이제 야유회에 맞는 얼굴이 되었다. 장소에다 회비까지 정해지고 드디어 신도들은 개운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갔다. 교회는 한줌의 양식과 사회의식을 마스터베이션하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나는 교회 문 앞까지 왔다가 되돌아가기를 거듭했다. 나는 청년부 총무였고 두달 만에 교회를 나갔을 때 회원들은 해명을 요구했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모두 내 눈길을 피했다.

교회에는 예수 대신 맞춤식 예수상(像)들만 모셔져 있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 이제 십년이 더 흘러 나는 며칠 후면 서른 여덟이다. 나는 이제 나보다 다섯 살이 적어진 예수라는 청년의 삶을 담은 마가복음을 읽는다. 내가 일 년에 한 번쯤 마음이라도 편해 보자고 청년의 손을 잡고 교회를 찾을 때 청년은 교회 입구에 다다라 내 손을 슬그머니 놓는다. 내가 신도들에 파묻혀 한 시간 가량의 공허에 내 영혼을 내맡기고 나오면 그 청년은 교회 담장 밑에 고단한 새처럼 앉아 있다.

**십자가마을의 입장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레 옮겨 봅니다.
**아래 유시민 관련 기사에 대한 나눔을 보면서 생각이 나서...
**글쓴이의 좌파 노선에 동조해서가 아니라...그저...그저...윗글 말미에 표현된 "새처럼 고단한 예수님의 모습"만을 톡 따와서...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나 자신 때문이라는 현실이 내 마음을 찡하게 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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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복음 아닌) 현실 저항적인 내부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글 한 편... 
이근호   2006-02-09 18:07:09, 조회 : 200, 추천 : 7


감상적인 사람에게는 동정심이 걸림돌이 되고

현실적으로 냉정한 사람에게는 타인의 성공담이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에게나

예수님에게 나아가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걸림돌이 됩니다.

동정하는 자아,
냉정한 자아
신과 내세와 천국에 대한 인간들의 호기심, 

이 모든 것으로부터

주님은 따로 계십니다.

자신이 애초부터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임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처지에 있음을 알 때

비로소, 예수님의 형제라 할 수 있습니다. (히 2:12)

예수님 안이 곧 천국이요 영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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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복음 아닌) 현실 저항적인 내부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글 한 편... 
이준   2006-02-09 20:15:11, 조회 : 193, 추천 : 8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 마음 속에 피어오르는 온갖 상념들과 정념들 - 목사님 말씀 가운데 "감상적인 마음"과 "동정심" 등 - 도

그저 십자가에 이미 못박힌 것들임을 목사님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무관한...아니, 오히려...처음부터 못박혀야 할 것들일 뿐이었습니다.

그 모든 정념들이 의도적으로든, 비의도적으로든

곧 '나'라는 중심성에서 쉴새 없이 솟아나는 것임을 왜 끊임 없이 잊는, 잊으려는 것일까요?

이렇듯...

근본적으로...그저 주님의 손에 이끌리고, 주님 품에 알게 모르게 안기워 갈 뿐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음...입니다.

오늘도 그렇게 이끌리는 과정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목사님의 글을 통해 반향되어 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미처 의식의 표면으로 감지하지 못한 자신의 속내를

날선 검처럼 파고드는 말씀을 통해서 그제서야 '나'라는 존재는 깨닫게 됩니다.

그저 늘 말씀 앞에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자신만을 발견할 따름입니다.

주시는 말씀에 늘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새해에도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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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학의 도전 
김대식   2006-02-15 01:24:10, 조회 : 157, 추천 : 0

이 글은 성경신학과 실제적용 2권 책에 15번 글 내용입니다 수정할 것 살펴보시고 올려주시길

여성신학의 도전

                                                                                                                                   1991년 10월  8일

                                                                                                                                       이 근 호 목사


Ⅰ. 서 론

여성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된 논쟁점들이 성경과 기독교의 어떤 측면을 불합리적인 면으로 인식하고 시작하느냐 하는 점을 파악함으로 신학에 있어 보다 폭넓은 시각을 지닐 수 있는 계기로 삼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신학의 위기는 성경연구에 있어 한계를 느낄 때이다. 한계란 사실은 계시의 한계보다 진리를 찾고자하는 자의 안목의 한계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보다 다양하고, 보다 융통성 있는 신학을 추구해야만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대할 때, 적절하게 그들의 진리의 갈증을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여성신학의 주장을 맹종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신학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새로운 신학적 분위기에 일방적인 추종에서 오는 진리의 불균형에 대하여 이해성을 갖고 다가서기 위함이다.

그래서 본론에서는 우선 여성신학에서 제기하는 문제점을 먼저 나열하고 거기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은 독자들이 나름대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Ⅱ. 본 론

1. 팔레스틴의 예수 운동이 이스라엘 안에서의 한 대안적 예언자적 갱신 운동이었던 것에 반해서, 크리스찬 운동은 한 대안적 종교적 비젼을 설교하는 그리고 한 반문화적-공동체적 삶의 스타일을 실천하는 바 그리이스-로마 세계 안에서의 한 종교적 선교 운동이었다. 이 양자의 운동들은 지배-문화적 에토스(관습)에 대해서 긴장과 갈등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그 당시 로마 헬라주의 지배적-가부장적, 문화-종교적 에토스(관습)에로 침입하면서 예수님의 운동이나 한 종교적 선교 운동이나 처음에는 신실한 유대인들, 남성들, 그리고 여성들에 의해서 창시되고 수행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귀하의 견해는?

2. 바울의 회심 이전에 창시된 선교 운동의 켄텍스트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의 선교 운동도 바울 주도형이 아니라 바울의 회심 이전의 선교 운동의 영향을 받았기에 바울 근처의 여성들이 단순히 바울의 조력자가 아니라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그런 식으로 선교하도록 유도한 창시자, 또는 여성 지도자라고 보는데 귀하의 견해는?

3. 복음서들이 예수의 삶-프락시스에 집중하며 다만 부수적으로 여성에 관해서 기술해 놓은 것에서 말씀드리겠는데, 복음서들은 원래 파라다임적 회상들인데,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와 개인들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예수의 의의가 무엇이었던가를 말하려고 시도한 공동체들과 개인들의 표현들이다. 초기 크리스찬 신학(마찬가지로 그 이후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해석학적 회상의 과정이다. 이 과정은 동시에 크리스찬 공동체에서 구전 혹은 문서의 형태로 유포되고 있는 예수에 관한 기억들과 이야기들의 한 비판적 이해라고 보는데 그러므로 여성 훼미니스트(여성중심의 사고를 주창하는 사람들) 크리스찬 신학은 크리스찬 역사를 통해서 내내 예수에 의해서 창시된 평등한 자들의 제자직에로 들어왔던 사람들의, 또 그들 자신의 역사-사회적 상황과 문제들의 컨텍스트에서 예수의 추종자들로 자신들을 칭했던 사람들의 모든 회상들을 반드시 비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견해는?

4. 예수에 의해서 일깨워진 평등한 자들의 제자직에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를 혹은 신약성서 시기의 크리스찬들을 모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것은 결코 한 단순한 반복이나 모방이 아니라, 초기 크리스찬 신앙에 대한 전망들에의 관여이다. 이 초기 크리스찬의 신앙 내지는 신학에서 만약 여성 중심의 신학이나 제자직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사라진다면 당신은 이러한 초기 크리스찬 제자직의 신학을 수용할 의사가 있는가?


5.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와 그의 사역에 관한 복음 전승들은 팔레스틴에서의 예수에 관한 최초의 크리스찬 회상들과 예수 운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前)-바울, 바울, 후기-바울 문서들에서 발견되는 예수의 부활과 죽음에 관한 매우 초기의 선포들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고 있음을 귀하는 인정하는가? 예수의 실제적인 삶과 말씀에 거의 관심은 없이 우선적으로, 또는 배타적으로, 부활한 주로서의 그의 영광된 신분에 또 신화적 차원의 우주적 드라마안에서 한 점적인 사건(the punctural event)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의미에 관심한다. 이 크리스찬 공동체들 안에서, 새 창조의 여명으로서의 영과 부활의 경험이 오히려 나사렛 예수에 관한 회상보다는 결정적이다. 그래서 팔레스틴의 예수 운동의 핵심-상징적 해석이 하나님의 나라인데 반해서 그리이스-로마 도시들에서의 크리스찬 운동의 그 상징은 새 창조의 나라이다. 그러나 이 양자가 합일하는 것은 이 두 상징들에 의해서 표시된 현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평등한 자들의 제자직 안에서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경험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귀하는 인정하는가?


* 공관복음서 내에 나타난 여성신학 정신

6. 유대교에 대립한 기독교의 그러한 역사적 재건들은 크리스찬적 반-유대주의를 지속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재건들은 크리스찬 기원들을 기독교 분리의 역사적 사실의 빛에서 그 유대적 뿌리들과 유산의 거부의 관점에서부터 또 부분적 거부로서 인지되고, 특히 유대교가 갖고 있는 가부장적 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거부반응을 갖는다고 여기는데 귀하의 생각은?

7. 우리는 왜 유대 여성들이 예수의 비젼과 운동에로 들어갔는가를 알기 위해서 유대교의 가부장적 구조를 또한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크리스찬적이 아닌 유대적 훼미니스트 사상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의 사상과 훼미니스트로서의 예수의 사상이 과연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데 귀하의 의견은?

8. 유대교의 지배적 에토스는 거룩한 사제들의 왕국이라는 취지에서 성전 강화로부터 출발되는데 이러한 우주의 중심 왕국은 지독한 토라준수에 의한 정결을 유지하는데 급선무였다. 이것이 또한 계약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를 갱신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토라의 권위적 계시성을 어떻게 오늘날에 바로 준수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여기에는 몇가지 혁신의 스타일이 있는데 하나는, 제의적 사제전승을 따르는 것이요, 또 하나는 예언자적 권위를 중요시하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지혜의 가르침과 묵시적 전망을 통합하여 대망의 나라를 고대하는 형태가 있다. 그러나 위의 세가지 어느 견해와 상관없이 공통적으로 시행되는 것은 어린이들과 여자들과 세리들과 창녀들과 죄인들을 철저하게 봉쇄해야지만 거룩이 거룩답게 쉽게 달성된다고 믿었다. 결혼하지 않는 금욕적인 독신주의가 에센파에서는 우대되었다. 사물의 모든 것은 오직 남성에 의해서만 성화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큰 대세의 한 모퉁이에서 여성의 가치를 논하는 저술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유딧서]이다. 이 유딧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비천자들의 하나님, 억눌린자들을 돕는 하나님, 버림받은 자들의 보호자, 희망없는 자들의 구원자이다는 출애굽 정신을 반영한다. 이런 취지에서 유딧이라는 한 여성의 모험, 지혜, 용기에 의해 영웅적인 승리를 갖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유딧서]의 존재가 바로 유대교의 참된 전통을 고수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예수는 무작정 반-유대적 입장에 선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갱신의 대안으로서 이런 참된 유대교의 맥을 잇고자 했다고 보여지는데 귀하의 견해는?

9. 바리새인들과 예수와의 차이점에서,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식탁의 제의적 정결을 주의깊게 준수함에 의해서 또 그들의 식사를 사제들처럼 먹음으로써 사제들의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소명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반해서, 예수와 그의 운동은 이러한 정결 규례들을 준수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식사를 죄인들과 더불어 나눔으로서 제의적 맥락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인 혼인 잔치의 축제적 식탁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다고 보아지는데 귀하의 견해는?

10.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의 자리로서 하나님 나라를 예수가 제시했을 때, 이는 유대교적 에토스를 그 운동의 배경으로 끌어당기지 아니하면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군이 종말적 선택의 한 현상으로 불구자들, 불결한 자들, 죄인들, 여성들, 아이들 까지 포함되어 있고 반면에 부자가 천국가기 힘들며 스스로 의인인체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그 나라에서 추방되는데 이러한 종말론적 역전이 유대교의 가부장적 제도의 탈피에도 영향으로 미친다고 보지 않는가?

예를들면 마리아 찬가를 들 수 있다.

하나님은 권세있는 자들을 그들의 권좌에서 내리치셨고
그리고 낮은 자리의 사람들을 높이셨다
하나님은 배고픈 자들을 좋은 것들로 채우셨으며
그리고 부유한 자들을 빈 손으로 돌려 보내셨다. (눅 1: 52 f)


이와같은 찬가가 비천한 여성인 마리아에 의해서 성령의 충동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예수의 새로운 하늘 나라의 성격을 말해준다고 보는데 귀하의 견해는?

11. 열두해 동안 혈루병을 앓았던 한 여인은 자신만 불결한 존재일 뿐 아니라 그녀와 접촉한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까지도 더럽힌 여자이다(레위기 15:19-31). 12년 동안 이 여인은 [거룩한 모임]에서도 제외된 존재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녀를 보고 이스라엘의 딸이라고 부르면서 편안히 가라고 했을 때, 여기에 분명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되는 거룩이 개입된 것이 분명하다. 또 야이로의 12살 먹은 딸이 죽었을 때에 예수는 서슴없이 이미 죽어서 불결하게 된 딸의 시체에 접촉한다. 그리고 죽음에서 회복시켜 준다. 그리고 다른 날이 아니라 안식일날 고쳐주므로서 기존의 토라를 능가하면서 기존의 토라 해석을 무시하고 있다. 또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로 들어간다는(마 21:31) 도발적인 발언은 그당시 유대교의 이미지에 먹칠하면서 반대로 예수처럼 그들을 대하지 아니하는 현 종교지도자를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결과를 갖는데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곧 죄인에 대한 규정일 뿐 아니라 나아가 속죄의 대상을 결정하는데도 영향을 준다고 보는데 귀하의 견해는? 따라서 예수의 속죄의 희생 개념이 유대교적 제의적 의미로부터 오히려 폭력을 당한 결과임을 생각해 볼 때 속죄개념을 밑둥치로부터 새로이 정립해야 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귀하의 견해는? 즉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계층을 극복하고 골고루 차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로의 회복시키는 차원으로 말이다.

12. 모든이를 포괄하는 사랑을 예수는 구약의 지혜사상에서 연결점을 찾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개념으로 도입했다고 여겨지는데, 예를들면 의로운 자나 죄인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행위에서 참된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비로소 구현된다고 보았는데(마 5:45) 귀하는 여기에 대해서 동의하시는지?

13. 최초의 예수 전승에서 신적(神的) 소피아(지혜)로서의 한 여인의 형태에서 이러한 은혜로운 선하심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눅 7:35 지혜는 그녀의 모든 자녀들에 의해서 옳다함을 얻는다.) 즉 예수의 소피아-하나님은 그녀에(소피아는 여성 명사임) 의해 식탁에 초대된 모든 자녀들에게 옳다함(의로움, 또는 거룩함)에 참여될 수 있는 은혜가 베풀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와 소피아를 동일시 하고 있고 예수 안에 신적 소피아가 살아 역사하고 있기에 바로 이것으로 인하여 예수의 사역을 규제한다고 보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적 신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창조의 동일성을 강조하고 남성으로서의 신(神)의 속성만 남겨놓았고 더나아가서 그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목박아 놓음으로서 유대교의 가부장적 이해를 부추기고 있는 반면에 구약의 지혜사상은 여신에 대한 과격한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설명하기 위해 여신(女神)-언어의 요소들을 사용한다. 이러한 여신의 신명(神名)은 모든 민족에게 두루 친숙한 용어이다. 뿐만아니라 이스라엘에게서도 소피아는 아내,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 교사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또한 사랑의 영으로서 그녀의 수납자에게 휴식과, 삶의 생동력과, 지식과 구원을 제공하고 있다. 지혜는 원래 인간 가운데서 살기를 원했건만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해 천상으로 물러나 천사들 가운데 거하면서 하나님의 여신의 이미지로서 또는 창조의 중간매체로서 존재했다. 이러한 천상과 우주와 묵시적 지혜가 팔레스틴의 예수 운동에 영향을 최초로 미쳤으며, 최초의 크리스찬 신학은 소피아론이다.(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너라.!) 그런데 이러한 소피아론이 어디와 연결되는가 하며는 예수의 제자직과 연결된다. 그래서 용서 될 수 없는 자를 제자삼고 또 자기를 따르도록 불러내었다는 것은 지혜사상 이외의 어떤 사상으로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데 귀하의 견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관복음에 있어 이러한 흔적이 많지 않는 것은 의도적으로 초대 공동체의 풍토에 기인된 결과이다.

14. 속죄에 있어서도 세례요한의 예언자적 하나님 나라의 견해와는 달리 미래를 향해 은혜의 창을 열어놓는 계기로 예수는 삼고 있다. 예수의 소피아-하나님은 속죄나 희생들을 필요치 않는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되지 않고 소피아의 예언자로서의 그의 포괄적인 프락시스의 결과이다. [세례요한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폭행을 당하며 폭행자들에 의해 침해됩니다.(마 11:12)].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요구되지 않고,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선하심과 이스라엘의 있는 모든 소피아의 자녀들의 평등성과 선택을 외치다가 여기에 반대하는 폭력자들의 횡포에 의한 결과이다. 따라서 누구에게나 속죄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속죄의 대상에 대해 소피아의 자비로 죄를 무마하게 위한 대상선정에 예수는 주력한다고 여겨지는데 귀하의 견해는?

15. 예수의 운동이 유대교의 가부장적 체제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과 자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이 보이고 있는 점에 대하여 귀하는 동의하는가? 그 당시 유대교의 성법전과 법규들이 남성들의 삶보다는 여성들의 삶을 통제하는데 유용했으며 예수는 그런 여성들에게 하나님께 접근하도록 개방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같이 동의할 수 있는가?

16. 가부장적 결혼에 대하여 예수는 이혼과 부활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쟁을 받아 주고 있다. 한 남자가 그의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는 어떻게 답변하고 있는가? 이혼은 남자의 완악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모세의 이혼 증서는 남성들의 가부장적 정신 구조로 인해 발생되기에 이 정신이 수호되면 이혼은 필연적이고 보고 있다. 사실에 있어 예수는 하나님이 가부장제를 창조하지도 의도하지도 남성적 또 여성적 인간들로서의 인격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의 집과 가계를 계승하기 위해서 남성 세력에 주어진 여성이 아니라, 그것은 그 자신의 가부장적인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할 남성이며 또 둘이 한 육체가 되어야 할 남성이다. 한 육체란 성의 차이를 전제로 하는게 아니라 어떤 성이든지 공평한 인간적 삶과 사회적 특권과 관계를 갖도록 한다. 그러므로 평등한 파트너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을 인간이 감히 나누어 그 둘 사이에 계급을 조장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부활 주제에서도 가부장적 피폐가 나타나는데 사두개인들은 부활의 신념이 수혼(嫂婚)의 계명과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부활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하늘 나라에 가서도 근친상간의 추행이 존속할 것이라고 한다. 사두개인들에게는 수혼법이 가부장적 가족제를 지속시키는데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제도이다. 일단 시집온 여성은 그 집안의 남성을 위해 죽을 때까지 봉사해야 하는 법으로 그들은 이해했다. 가문의 보호를 위해 과부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보장하는 대신 온갖 고초를 다 겪도록 했다. 예수의 응답은 그들이 부당하다고 단적으로 진술한다.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세계에서 가부장적 결혼은 남성을 위해서도 혹은 여성들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성서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지상의 수혼법은 가부장제도의 존속을 위해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그 가문에 계속적인 생명을 보장하는 방책으로 주신 것이다. 이로서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과 성실성이 보장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님을 또한 확인하는 것이다. 자 이렇듯 예수에게 책망만 받는 가부장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

17. 예수의 제자직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11: 27-28에 보면 혈통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종말론적 새로운 부름의 관계로 형성되는데, 예수가 설교할 때 군중 속의 한 여인이 말하기를 [당신을 잉태한 태와 당신을 먹인 가슴이 복됩니다]고 했을 때 예수는 수정해서 답변하기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자가 행복하오] 라고 했다. 이는 신실한 제자직은, 생물학적인 어머니됨이 아니라, 여성들의 종말론적 소명이다.

이렇듯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평등한 제자직의 공동체를 대조시키는 것은 하늘나라의 참된 가족의 새로움을 현 체제하에서의 가족과 대비해서 설명할려는 시도가 아닐까하는데 귀하의 의견은?

18. 참된 제자직은 예수와의 연대성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방법은 종말론적 역전의 형태를 띤다.(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섬기는 자가 높임 받는 것) 아래의 것이 위로 올라가고 위의 것이 아래로 내려가는 천국의 원리는 이 지상의 원칙의 폐기를 뜻한다. 뿐만 아니라 지상에 있는 그 누구에게도 아비라고 부르는 것을 금지한 것은 하늘나라의 속성이 이미 가부장적 제도로부터 떠나있음을 말하는게 아닐까? 한 분 아버지가 계심으로서 모든 이를 그분에게 종속시켜 나가는 과정이 하나님의 나라의 과정이 아닐까?

바로 이와같은 그 약속된 나라의 실체는 유대교식의 가부장제도에서 찾을 수 있는게 아니라 예수에게 기름을 부은 이름 모를 여성 예언자에 의해 예수의 메시야성이 부각되는 식으로, 예수는 보잘것없고 천시받고 가치없어 보이는 미미한 하류민을 통해 새로운 연대성을 맺음으로 이루어져 나간다면, 비롯 예수가 남성들로 12제자군을 이루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발견되지 않는 진정한 제자직을 그 배후에 남겨두고 있는게 아닐까? 특히 이와같은 사실은 십자가 수난의 마지막까지 동참했던 자들이 여성이며 예수의 부활을 처음 보았고, 또 그것을 11제자에게 전했던 자도 그들인 것을 감안해 볼 때 확연해지는 사실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귀하의 견해는?


* 바울서신에 나타난 여성신학 정신

19. 예수의 부활이후 최초의 크리스찬 선교의 본거지가 여성의 집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사도행전 12:12-17에서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베드로는 보호를 받게 된다. 그런데 골로새서 4: 10에 의할 것 같으면 요한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다. 그런데 이 바나바는 최초의 이방선교의 근거가 되는 안디옥교회의 탁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뿐만아니라 바울의 로마서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의 교회를 결코 자기가 선교하지 않았고 그전의 선교정책에 의해 세워진 것이 로마교회인데 유대-크리스찬 위-클레멘트 저술에 의하면 로마교회는 바나바가 세웠다고 되어 있다. 바나바는 바울을 안디옥교회로 데려온 자이기도 하다.(행 11:25) 그뿐만아니라 초대교회의 또 하나의 선교지인 예루살렘으로 사울에서 바울로 막 변신한 자를 데리고 가서 사도들에게 소개한 것도 바나바이다.(갈 1: 18 / 행 9: 27) 그렇다면 바울도 바나바의 선교를 거점으로 하여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고 또 그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이미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마가다락방에서 초대 사도들과의 교제가 있었다고 볼 때, 여성들도 선교에 이미 관여하고 있다고 보아지는데 귀하의 견해는?

20. 유럽 최초의 개종자는 루디아라는 여성이다.(행 16: 14) 그리고 이러한 여성 개종자들을 통해 초기 선교는 성공시 되었는데 이러한 여성의 활발한 활동은 그리이스-로마 가정의 가부장적 구조가 종교적인 면에서는 호혜적인 후원체제로 등장하여 여성들이 종교적 지도권을 소유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그래서 여행하는 선교사들을 도왔다. 그러나 그 여성들은 단순히 사도의 조력자 역할을 한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는 동역자 중 5명의 남성만이 진정 바울의 조력자이다.(에라스도, 마가, 디모데, 디도, 두기고) 그러나 여성들은 보통 바울과 동등하면서도 경쟁자적인 입장에서 일했다. 그들은 자기 나름대로 여성 선교사였다(브리스가, 압피아, 뵈뵈, 유니아, 유오디아, 신디게 : 빌립보서 4: 2- 3). 또 로마서 16: 6에서는 [주안에서 많이 수고 했다]는 것에 대하여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를 칭찬하고 있다.

2세기 작품은 [바울과 테클라의 행전]이라는 책에서 바울에 의해서 개종된 여성 사도인 테클라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선교지에서 혁혁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많은 여신도들이 테클라를 후원해 주고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을 참작해 볼 때, 초기의 모든 선교가 오직 사도 바울에 의해서나 혹은 그의 지시에 따르는 남성 동역자들에게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고 독자적인 선교를 담당한 수많은 여성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귀하의 견해는?

21. 초대교회는 가정교회가 보편된 유형으로 등장된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교회의 특징은 여성들과 및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공동체로서 평등한 권한이 부여주어 졌다. 신앙의 가정은 더 이상 기존의 행위와 관습에 의해 살아가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서 고유의 은사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유지되던 교회였다. 특히 모이는 장소가 가정이다. 가정은 원래부터 여성 고유의 영역으로 이해되어 왔기에 거기서 여성의 활동이 배제될 수가 없었다. 로마-그리이스 사회에서는 남성은 가정 밖의 일에 신경을 썼고 여성들은 가정의 일을 전담했다. 그런데 교회가 가정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공적인 일이 집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의 집]이라고 표현에서(골 4: 15) 안주인은 자기 집 안에 들어온 공동체에 대하여 많은 책임을 가졌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기독교에 국한되는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그 당시 로마에 유포된 다른 밀의종교의 형태에서도 여성이 주도권을 갖고 있음이 여러모로 그 증거가 드러난다.

새로 기독교로 개종한 부유한 사람들 중에서는 부유한 여성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으로 그들이 자연 교회재정에 많은 후원을 할 수 있었다(행 17: 4, 12 참조. 자주장수 루디아는 개종 이후에 자기 집을 크리스찬 선교를 위해 제공했다(행 16: 15). 또 부부 선교사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중에서 아내인 브리스가를 먼저 부르는 것은 더 중요한 사람임을 나타낸다(롬 16: 3 / 딤후 4: 19). 이 부부는 바울과 같이 천막제조업자로서 자신의 노동으로서 선교활동을 뒷받침했다. 이 부부는 에베소에서 또 다른 선교사인 아볼로를 받아 들인다. 이처럼 이 부부는 한 선교사에게 매여 있는 자들이 아니다.

위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여성 선교사들의 그 당시 종교적 풍토와 마찬가지고 적극적이며 지도적 입장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또는 다른 선교사를 도왔다고 여겨지는데 귀하의 견해는?

22. 선교운동의 동기가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성령인데 성령의 능력의 경험에도 성 차별이 있다고 믿어지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소피아로서 헬라인에게 선포되었다(고전 1: 24). 구약성경 요엘의 예언에 의하면, 성령의 강림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상관없이 어떤 평등성을 갖고 있다. 고린도후서 5: 17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들은 새로운 피조물로 여겨지는데, 새로운 피조물이란 성령안에서의 새로움이기 때문에 차등이 있다면 성령을 받지 못한 자와의 차이이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똑같은 성령의 피조물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새사람되기 이전의 옛사람 시절 때의 갈등과 불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십자가에서의 벗어난 부활의 영역에서는 이미 이러한 갈등과 불화가 극복된 형태로 보여져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다면 새것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지 아니한가?

23. 크리스찬 선교 운동의 신학은 부활한 주를 하나님의 영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피아와 동일시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현존(영광)의 방식이다(히브리어 아람어에서 이 말은 상호교환하여 사용된다). 사도행전에서 지혜란 바로 영과 관련해서만 사용된다. 따라서 바울-이전의 크리스찬 선교 운동이 소피아-영의 의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고린도전서에 있어서 명백하게 드러나며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의 주제가 된다. 하나님의 소피아와 그리스도의 결합은 우주적 화해를 통한 통일이 주제가 된다. 이 화해를 통해 공동체 안은 평등을 맛본다. 이 모든 변화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되어 있다. 사랑이 공동체 내에서 구체화되면서 하나님이 쉴만한 성전개념이 토라로만 이야기 되는 것이 이제는 소피아의 차원이 결합되면서 제대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공동체가 성전으로 될려면 필히 모든 인종과 계층이 더불어 하나가 되어야하고 그것이 새로운 사제직과 거룩한 백성으로 승화된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딸들도 하나님의 성전의 완전한 맴버이다. 이 성전은 바로 종말론적 성전으로서 죽음의 옛 세계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주님이 차별없이 수납한 새로운 백성들이 인간들이 차별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가?

남성과 여성은 더 이상 새로운 공동체의 요건이나 구성 요소가 아니다. 그들 사이의 신체적인 차이나 구별과 상관없이 문제는 그들의 제자직과 성령의 능력의 소유에 있다. 여성이라고 해서 적은 성령의 능력만이 소용되는 것이 아니요, 남성이라고 해서 큰 성령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성징의 차이가 있는 그들이 이제는 하나가 되었다는데 있다.

사도바울이 당부한 여성들에 대한 규약도 사실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강화하고 그 구별을 지속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 차이를 매꾸어 줄려는 배려에서 비롯된 요구 사항이다. 여성의 머리에 무엇을 쓴다든지, 여성으로 하여금 잠잠케 하는 것은 여성을 일방적으로 무시해서 남성보다 하위에 둘려는 시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품위유지와 공동체 내의 새로운 질서가 외부의 전통적 관습과 충돌하여 발생되는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한 조치였다(딛 2:5). 이 새로운 공동체의 성숙을 위해 여성에게 큰 봉사를 요구한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함부로 접촉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면 외부에서 볼 때, 남녀 평등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 우위라는 오해를 산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며 남자는 여자의 머리로서 서로 균등되고, 남자에게서 여자가 난 것같이 또 여자에게서 남자가 남으로 서로 균형을 맞춘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다. 동등하지만 일치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가정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을 해야 하지만 남성을 여성에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 사도 바울은 처음 창조질서의 차원에서도 남성에 의한 여성 학대가 어떤 이유로도 성립되지 않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교회 역사를 통해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고자 하기도 전에 가부장제도라는 비영적이요 비공동체적인 세속적 관습에 젖어 이 제도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마치 성경에서 보이는 창조질서를 고수하는 것으로 받아 드렸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성령이 주는 어떤 화해나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지배와 숨막히는 순응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부름받은 제자가 남성사회를 따르는 제자직으로 변모되었다면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누가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를 제한하러 드는가? 세계를 구원하러 보낸 여성 제자를 누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시하려 들 수 있겠는가? 복음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한 공동체로 들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을 가부장제도에서 파악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 사역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하자! 거기에 어떤 억압도 허용되어서는 아니된다.

이상이 신약에서의 참된 공동체의 이상형이라고 믿어지는데 귀하의 견해는?


Ⅲ. 결 론

여성신학이 사회전반에 걸쳐있는 여성에 대한 천시사상으로부터 여성을 구출하기 위한 여성해방 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상한 참된 공동체에 한발자국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받아드려져야 한다. 비록 그 동기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시 되는 풍토에서 일어나 그 나름대로의 접근 방법이 독특하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교회들이 바른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갖추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남성이기에 그냥 모르고 스쳐 지나칠 수 있는 연약한 여성의 신음소리에 교회는 마땅히 발길을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마치 예수님이 불쌍한 여인을 돌아봤듯이 말이다.

뿐만아니라 여성신학은, 타성에 젖은 종교행각으로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는 조직교회가 마치 하늘 나라라도 된 냥 거기에 안주하여 자신들의 영혼을 피폐시키는 현대 교회에게 다시 한번 자신을 정신차리게 하는 계기도 제공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신학에도 모호한 면이 몇가지 있다.

첫째. 신앙의 적이 불분명하다. 공격과 싸움의 대상을 너무 가시적인 것에 촛점을 맞추어서 마치 가부장제도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원수가 된듯한 느낌이 든다. 공중 권세잡은 악한 영들이라는 실제하는 적에서 우리 교회는 표적을 옮길 수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보이는 것은 우리가 불쌍히 여겨, 사랑과 선으로 대해 악을 이겨야 할 것이다.

둘째. 성경해석상 거의 받아드리기 어려운 이론들을 많이 차용했다는 점이다. 소위 사회학적 해석 방법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 이론들은 많은 한계성이 있고 거의 대다수가 증빙되지도 않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가설에 불과하고, 더욱더 중요한 점은 혹시나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계시하고는 상관없는 그냥 역사적 사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런 단순함을 전부 계시와 연관을 시키는 것은 진리개념의 혼선을 야기시킬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단순히 역사적 진실을 의미하지 않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유용하다고 여기는 것만 계시가 되며, 유용과 무용의 가치 결정도 오직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그분의 고유 권한이다. 저자는 바울서신 전반에 걸쳐 가부장적 초대교회의 풍토를 받았다는 이유로 내용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고 해석하려하고 있다.

셋째. 제목 자체가 여성신학이라고 한 것은 신학 전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신학이란 반드시 어떤 특정 단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그냥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학문이다. 거기에다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붙일 수가 없다. 신학은 그냥 신학이다. 물론 신학의 방법에 따라 조직신학, 성경 신학으로 나눌 수 있지만 흑인신학이라든지 여성신학이라든지, 어린이신학, 노동자의 신학 같은 것은 개념상 성립해서는 아니된다.

네 번째. 교회에서 여성을 위하고 주님이 여성을 위한다고 해서 여성중심으로 교회가 움직여질 수는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여 창조하실 때는 각각의 구별된 고유의 기능이나 역할을 있는 줄 안다. 남성이 여성을 학대하는 것이 물론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여성도 남성의 역할에 시기해서는 안된다. 만약 여성신학의 외침이 교회로 하여금 참된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 여성의 위치를 재정립한다면 정말 옳은 주장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혹시 여성신학이 취지가 사회적이고 경제적 신분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됨으로 교회가 교회답게 된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성경에 대한 오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억눌린 자를 사회적으로 해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불쌍히 여김의 가치를 현세적 가치로 평가해서 너무 현세적 후속조치를 기대하는 것은 옳지 않는 것이며, 종말론적 공동체의 이미지를 속화 시킬 우려도 있다. 그리스도에게 죄 용서 받았다면, 비록 공동체가 사회적·경제적 제도가 완벽한 평등제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언약민은 이미 그런 것을 초월하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종으로 부름받아도 이미 그는 자유인이다(고전 7: 24).


참고도서 : [크리스찬 기원의 여성신학적 재건]
           E. S Fiorenza  / 번역 : 김애경 (1986:서울) 종로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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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14년 4개월 후의 코멘트 
이근호   2006-02-15 12:25:00, 조회 : 124, 추천 : 9

거의 14년도 훌쩍 넘은  글이군요.

여성의 문제는 사실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의 문제'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사람은 상대방을 지배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 그 시대에서는

사회 자체가

남자이라는 이 이유 하나만으로 여성이 대해서 항상 지배권이 합당하다고 용인시켜주던 그 '집단의식'이 문제되었던 것입니다.

즉 여자가 여자를 만나도 상대를 지배하고 싶어하고

남자가 남자를 만나도 서로 상대를 지배하고 싶어하는데

문제는 남자가 여자를 만날 때, 남자는 당연히 지배자 되는 것이 옳은 일이요,

여성은 당연히 지배받아야 될 자리에 가 있는 것이 옳다고 사회 집단 인식에 있었습니다.

그것이

교회 존립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본적 근거로서

교회 전통 안에 계속 자리잡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전통 안에는

인간이 인간을 감히 지배할 권리가 있는 '지배자의 자리의 출현'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교회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희생,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최종 지배자는 어떤 인간이며 출신  학교는 어떻게 되느냐를 궁금해합니다.

바로 여기서

교회 내에 '남성 집단' 에 의한 '여성 그룹'에 대한 집단적 지배의 합법화 문제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목사 세습' 이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분위기도 조성된다는 겁니다. 

아버지 목사나 그 부인이  아들 목사보고 하는 말이

"예야. 그동안 내가 이 교회 지배해 왔는데 있는데 이제 네가 내 대신 이 교회를 지배해 보련?"하는 식으로 목사직을 권유하게 된다는  겁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애야,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고 기도하고 교인들을 섬기면 너도 나처럼 '교회 지배자'가 될 수 있어"라는 취지를 자식에게 전달하는 겁니다.

악마가 교회를 만들어서 그 만들어진 교회 부흥을 통해서 복음을 무산시키려는 시도도  다 이런 '지배자' 의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지배자가 없이 봉사자만 있다면

봉사의 질이 떨어지면 자연 그 자리를 내놓아야 당연합니다.

남자가 남자 구실을 못하면 여자의 조언을 듣는 것이 당연하고

여자도 여자 구실 못하면 남자의 조언을 듣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 제대로 주님에게 봉사 못하냐" 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봉사하는데 있는 남자의 지배권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온통 악마만 만든 교회만

'교회사'라는 이름으로 자기 정통성을 짊어지고 오늘날까지 '천국 센터'라고 우기도 있으니

사람들은 서열과 계급만 따져서

이런 '여성 해방신학'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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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식 목사님의 글과 어떤 분의 질의와 답변 
이근호   2006-02-23 09:00:34, 조회 : 113, 추천 : 7

묵시와 현실』

【성경해석1】

현대인들에게 아니 현실교회에게 과연 "사단 또는 마귀"의 실체가 인생을 걸만큼 중요한 문제일까? 아니면 그냥 내 아이 동화가 동화책 보면서 잠시 접촉하는 환상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신학자의 고백처럼 현대인들의 세계관과는 무관한 신화이기에 폐기처분하고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맞춤형 복음을 만들어내야 하나?

사단의 무관심으로 점철하는 현실세계를 가로지르는 복음세계에선 우리의 무관심과는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눅10:18)고 했다. 무슨 뜻일까? 문맥을 보면 여기서 예수님은 귀신들이 제자들에게 항복한 이유를 설명하신다. 모든 악한 세력을 잡고 있는 사단의 힘이 이미 꺾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석연치 않는 구석이 있다. 추적해보려고 한다. 예수님이 사단을 처음 만난 곳은 광야이다. 성령은 예수님에게 마귀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왜 그랬을까? 성령께서는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을 사단으로 본 것이다. 그것도 광야에서! 광야란 이스라엘의 정체가 가시화된 공간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실패를 앞에 놓고 예수님은 그 원인규명에 나서고 계신 것이다. 마치 어떤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기 위해서 현장검증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사단은 용의자인가? 그렇다. 유력한 용의자이다. 사단에 의해서 조작된 메시야 상을 실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수사하고 계신다.

사단에 의해서 조작된 메시야 상은 내 식으로 말하자면 욕망의 극대화이며 실현이다. 이미 그가 조작해 놓은 흐름에 맞는 이 땅의 원리에 맞춘 욕망의 실현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증거를 잡은 셈이다. 예수님은 사단과 헤어진 후 본격적으로 증거수집에 나선다.

이스라엘 내부를 헤집고 다니시지만 조작된 이스라엘의 표지만 나부낀다. 이스라엘 외부에서 예수님과 사단의 본격적인 무력화 투쟁이 벌어진다. 예수님의 싸움이다. 구약 이스라엘 내부에서 벌리시던 하나님의 전쟁이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외부에서 일어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세계의 실체를 드러내신다.

그냥 아담세계가 아니었다. 사단에 의해서 조작된 세계였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소외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농락된 세계였다. 다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자 귀신들이 항복한다. 기쁨으로 가득 차서 예수님에게 돌아온다. "주의 이름이 귀신들도 항복시켰습니다.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이다.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여기까지 보면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 같다. 하지만 뭔가 낌새가 심상치 않다. 마치 부풀어있는 풍선의 바람이 새는 분위기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님의 발걸음이 본격적으로 십자가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예수님의 주장은 이제 사단과 벌어지는 언약싸움(창3:15)을 염두 해 두고 계신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본문은 "사단은 이제 끝장났다!"가 아니라 "사단과 한판 벌인 혈전이 다가왔구나!"로 읽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십자가 사건은 중심으로 자리잡는다. 사단 쪽에서는 "이제 끝났구나, 내 세상이구나!"로 읽었지만 예수님 편에서는 현장검증에서부터 용의자를 검거하는 실증자료로써 "사단은 끝장내기에 마땅합니다!"로 읽어낸 것이다.


어떤 분의 질문:
그렇다면 처음부터 십자가는 인간을 상대로 하지 않았고 이 사단과 예수님의 혈전 사건으로 본다면 인간이란 이 싸움이전에는 사단의 전리품이었고 십자가 이후에는 주님의 전리품으로 만 의미있게 살아있는 존재로 이해해도 되나요?


손 목사님이 답변:

[십자가의 해석]

본 글에서 요지는 아담세계의 현실 너머에 아담세계를 규정짓는 묵시세계의 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하고 지식으로 아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편에서 경험하는 현실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아담세계의 의사결정이 이 땅의 존재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묵시세계의 의사결정이 이 땅의 현실을 정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 묵시세계의 결정이 복음의 중심축으로 자리잡고 있기에 아담세계는 그 황당함을 묵시세계의 무효화로 처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현대인들이 사단이나 마귀의 정체를 공포영화나, 무속세계로 치부해 버리거나, 아니면 현대인들이 알아들을수 있도록 없던 걸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교회를 보아도 한 쪽은 사단을 잘 이야기 하지않고, 다른 한 쪽은 모든 일상사가 사단 때문인양 너무 사단을 팔아먹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해서 제가 쓴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중앙에 서서 이스라엘의 실패원인을 이스라엘 자체에서 찾고 있지 않고 사단에서 확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갔습니다. 즉, 십자가의 해석 문제입니다. 아담세계에서 십자가를 해석하는 입장을 넘어서서 묵시세계에 있는 편들은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두고 사단은 자신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계략으로 보았고, 반면에 예수님은 사단의 세계를 처분할 수 있는 증거자료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단이 하나님의 지혜에 속았다고 할 수 도 있겠지요.

그리고 물으신 질문인 십자가 사건을 '사단의 전리품에서 예수님의 전리품으로 이행"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사단의 전리품'이란 말을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아담세계의 처지와 같은 의미라면 똑같겠지요.

사실 제가 쓴 글에서 질문될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역사사건인데 왜 자꾸 역사와 무관한 비역사적인 세계(묵시세계)로 보는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와 무관한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십자가 사건이 사단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성도의 삶과는 무관한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저의 대답은 역사세계를 규정짓는 것이 역사세계가 아니라, 묵시세계임을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모든 것을 잠식하고 장악하고 있더라도, 이 땅을 손에 쥐고 있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에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으로 생겨난 성도의 정체는 십자가 이후에 새로운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십자가의 내용을 확인해가는 장(場)에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면 뭔가 다른 것 같다가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똑같은 딜레마에 빠져서 고민하다가, 또 설교를 듣고 확인 받고, 또 딜레마에 빠지고, 또 설교를 통해서 정리하는 것이 신앙인의 현실이라는 겁니다.

하여튼 십자가의 해석문제는 [묵시와 역사]81로 정리하려고 했는데 여기서 이야기가 된 것 같네요. 이것을 [묵시와 역사]81로 해야 겠습니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조금만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위르겐 몰트만 목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십자가의 해석문제를 이전에 "구원에 대한 논의"에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논의"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구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어떻게 갚아야 하지요. 열심히 열심히 주님만 자랑하며 살겠습니다."로부터 더 나아가서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과 아들의 슬픔과 성령의 마음을 다뤘습니다"

어떻습니까? "구원으로 인한 나의 기쁨"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되는 것으로 십자가를 다룬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이 상당히 진척된 부분입니다.
어떤 분의 계속되는 질문: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이 묵시세계의 현실을 직시하는 방법은 설교를 통해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것이고 또 십자가를 멸시하는 아담 세계의 현실을 사단을 처분하는 증거자료로 보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는 것이 겠네요^^.

어리석은 질문 하나 더, 묵시세계와 아담의 세계라는 두세계 구분은 신앙인의 성경 해석인가요, 하나님이 사단과 인류를 다루는 십자가의 역할 작용인가요?

ps, 늘 감사합니다. 좋은 글을 통해 많이 배웁니다. 어리석은 질문으로 피해가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손목사님의 연이은 답변:
 
[성도의 시각]

성도가 살아가는 공간은 아담공간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벗어나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이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고 배우면서 살게됩니다. 즉, 아담세계의 눈높이에 맞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아담세계 안에서도 모든 내용들이 똑같이 분출하지는 않습니다. 주류가 있고 비주류가 있습니다. 힘을 가진자가 있고, 힘 없는 편이 있습니다. 피라미드식 계층과 사상들이 아담세계를 거미줄처럼 가로질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세계안에서도 기존의 세력을 넘어서서 새로운 탈출구로 나아갈려는 노력들이 항상 일어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담세계의 사상계가 형성됩니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현대에서 기존의 힘의 구도로부터 탈주하려던 대표주자들이 바로 질 들뢰즈나 가타리, 미셀푸코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이들 사상의 중심에는 칼 마르크스나 프로이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사상은 어떤 논지든지 칼 마르크스나 프로이드를 넘어서려는 노력들입니다.

저는 이들의 사유를 열심이 공부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내 안에 잠재해 있고,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생산되는 사상들을 앞서서 개척해나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저들의 철학은 얼마 안있으면 교회안에서 일어날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있어서 저들에 대한 공부는 복음을 압박하는 형식과 내용의 변종을 연구하여서 밝히려는 작업입니다.

이런 저의 공부의 밑바탕에는 사단이 발악하고 있다는 예수님의 주장에 근거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찾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자, 인간은 아담세계에 삽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담세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넘어서 생명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처지라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성도가 생겼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예수님편에서 작업을 하셨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복음의 우발성이라고 부릅니다. 아담세계의 사전계획과 상관없이 주님편에서 일방적으로 활약하신 작업입니다.

이것을 다른식으로 표현하면 묵시세계가 역사세계를 침범해서 장악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아담입니다. 아담이란 역사적 인물이란 뜻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이 역사를 유토피아로 만들지 않고 심판하시기 때문에 묵시란 역사를 고발하고 심판하신다는 하늘세계의 의지천명을 담고있는 용어입니다.

질문하신 묵시세계와 역사세계의 구분은 예수님의 구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획하신 편에 성도가 자리잡고 있으므로 성도는 묵시세계의 눈으로 역사세계의 형편을 파악할 수 있는 장(場)에 있게 된것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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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 가시라고... 
정판옥  (Homepage)  2006-02-25 17:18:49, 조회 : 133, 추천 : 11


**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 (전3:1,18)

** 그러므로 세상이 요지경이라고 열받지 마시지요!

                                          
                                           한나라당, 하다하다 이젠 사학법 허무개그인가 

 

                                                                                              하재근 컬럼니스트(데일리 서프라이즈) 

  
드라마 신돈을 보며 탄식한다. 어쩌면 요즘 한국사회와 이다지도 비슷하단 말이냐! 듣자 하니 역사는 반복된다지? 만약 그렇다면, 신돈이 살았을 당시는 이 땅에 망조가 들었을 때인데 지금도 망조가 들고 있단 말인가? 이 나라는 정녕 망하고 있는 중인가?

그렇다 이 나라는 망하는 중이다.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기득권 집단이 제 것을 지키기 위해 삼척동자도 알아챌 협잡을 일삼고 있다. 사학 회계를 공공이 감시하는 것이 빨갱이들의 사유재산 접수 음모라니,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어 천애고아 신돈을 끌어올려 대권을 맡기는 공민왕. 기득권 패거리와 아무 인연이 없는 국외자 신돈이야말로 주권자를 대리해서 패거리들의 협잡을 감시, 혁파할 수 있으니까. 유일한 주권자인 공민왕을 능멸하는 부원배와 귀족 무리들. 그들은 공민왕이 신돈에게 대권을 위임하려 하자 주권자를 겁박하고, 그 대리인인 신돈에 암살위협을 가했다.

불교는 그 부원배 귀족들과 한 통속이 되어 백성을 수탈하는데 앞장섰다. 그래서 신돈은 새로운 개혁 주체세력을 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 성리학자들이다. 신진 사대부는 귀족을 증오하고, 불교를 증오했다. 그들이 나라에 망조가 들게 한 국적(國賊)이기 때문이다.

고려는 결국 망했다. 나라가 망한 것이다. 그런데 망했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구체제가 종말을 고하고 주권자가 교체 됐다는 소리다. 지금 이 나라가 망하는 중이라 해도 내일 모레 한반도가 사라진다는 소리가 아니다. 구체제의 황혼녘에 마지막 발악이 진행 중이란 소리다. 물론 그들의 발악은 구체제의 몰락을 부채질한다. 공민왕의 ‘나눔’ 프로젝트에 동참하지 않는 귀족들과 불교의 탐욕이 결국 그들의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듯이 그들은 제 발목을 치는 것이다.

이제 주권자는 교체되기 힘들다. 옛날이야 왕 씨에서 이 씨로 바꾸면 그만이었지만 지금의 국민주권을 되물린다는 건 매우 난망한 일이다. 박정희나 전두환이 주권을 탈취했었으나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러니까 주권자의 교체는 없다. 이 점은 고려 말과 다르다.

그러나 과거의 나라는 망한다. 그 나라의 체제에서 기득권을 영원히 누리려던 집단의 대도 끊어진다. 나라가 망해도 나나, 당신, 우리는 산다. 아니 나라가 망해야 산다. 죽는 건 주권자 속이기, 갈취하기를 일삼는 기득권 무리들이다. 바로 ‘나눔’ 프로젝트에 결사 저항했던 부원배 귀족들, 부동산 블랙홀 불교 세력 말이다.

한나라당이 사학법 재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개방형 이사제 도입에 찬성한단다. 사학 재단 내부에 국외자인 ‘신돈’을 한 명씩 배치해도 좋다는 소리다. 그들식 표현으로 하면 재단을 접수할 빨갱이를 침투시켜도 된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 도입 여부를 각 사학재단의 자율에 맡긴단다. 이건 또 무슨 소리?

말하자면 성폭행 금지를 천명한 다음에 실제 성폭행을 할 건지 말 건지는 각 (잠재) 성폭행범들의 자율에 맡기겠다는 것 아닌가. 이재오 원내대표님 지금 장난하십니까? 기껏 국회로 다시 돌아오면서 내놓은 일성이 말장난?

분식회계를 하지 말자, 단 분식회계를 할지 말지는 각 회사의 자율에 맡기자? 세금 횡령을 하지 말자, 단 횡령여부는 각 공무원들 자율에 맡기자? 탈법선거하지 말자, 단 그 여부는 후보자들 자율에 맡기자?

또, 설령 재단이 ‘자율’적으로 개방형 이사제를 도입하더라도 선임되는 이사는 재단이 직접 인선하도록 한단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긴 설치하되 국외자인 신돈은 안 되고 귀족 중에 한 명을 골라 그 수장으로 삼자던 고려 귀족들처럼 짜고 치자고? 공민왕이나 지금 우리 국민이 바보인가?

게다가 사학재단 이사장 친인척도 교장에 임용될 수 있도록 한단다. 결국 재단이 다 해먹으라는 소리 아닌가. 나라 지원금 받아, 학생들 등록금에 온갖 잡비 받아, 거기에 학습보조용품 관련 온갖 이권하며, 마음껏 주무르겠다는 소리 아닌가. 자율적으로 말이다.

사학재단 이사장이 소왕국의 왕처럼 행세하는 판에, 마치 제 봉토 안에서 절대 권한을 행사하던 봉건 귀족들이 주권자를 우습게 여기듯이, 주권자가 그 안에 감시 이사 좀 배치하겠다는 요구조차 말장난으로 능멸한다? 이것이 망조가 아니고 무엇인가. 저들의 세상에 엄습하는 망조.

주권자인 공민왕을 기세 좋게 겁박할 때 그들이 얼마나 의기양양했을까? 자기들이 천년왕국 위에 서 있는 줄 알았겠지.

망조가 들 땐 언제나 이런 식이다. 부동산을 산더미처럼 차지하고서도 부처님 타령을 늘어놓던 고려 말 불교나, 사학재단 투명화에 하나님 타령을 늘어놓으며 결사반대하는 기독교나, 주권자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있는가. 백성을 얼마나 능멸하고 있는가. 정녕 기독교도 국적(國賊)이 되려는가. 증오의 표적이 되려는가.

대한민국 사학이 썩은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을 귀족들이 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말장난을 하며, 요설을 늘어놓으며 태연히 가릴 때 그들의 세상에 망조가 찾아온다.

한나라당이 내놓은 사학법 재개정안은 천인공노할 경국의 말장난이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했거니와 사학을 사유화하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천벌의 철퇴가 내릴 것이다. 우리나라 사학 썩은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니까. 행여나, 이를테면 개방형 이사제를 강제 도입하되 이사선임은 사학에 맡긴다든지 하는 식으로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과 타협한다면 우리당에도 망조가 찾아들 것이다. 천벌의 철퇴엔 눈이 없다.

사학법 재개정? 개방형 이사제 도입과 선임을 사학 자율에 맡기자? 웃기시네. 허무개그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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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영화 뭔헨을 보고서 
이근호   2006-02-25 21:37:56, 조회 : 142, 추천 : 12

원한, 원한의 세계

그 원한들이 집결하는 장(場), 그리고 공설 시장으로서의 세계.

이것이 오늘날의 인간 세상의 모습이다.

아무나 붙들고 자신의 원함을 쏟아내고, 분통을 쏟아내고,

그 공통된 원함을 가진 자들 끼리 모여서

복수를 통한 삶의 즐거움과 당당함을 동시에 얻고자 하는 무리들이 점 조직을 구성했다가

마음이 안맞는다고 뿔뿔히 흩어졌다가

다시 원한이 쌓이면 다시 모여드는 양상들이 인간 세계이다.

'검은 구월단'

이름부터 음침하다.

P.L.O 에 소속된 이 단체는 1972년 베를린 올림픽 선수촌에 난립하여,

이스라엘 선수와 임원 11명을 인질로 잡고,

이스라엘 교도소에 있는 동료 테러범 200명을 석방하라고 전 세계에 시비를 걸렀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인질 11명을 다 사살했다.

전 세계의 유대인들의 강력한 원함과 분노가 이스라엘 정보부인 모사비에 그대로 전달되어 작전에 돌입한다.

‘검은 구월단’의 배후 주모자들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 유럽을 샅샅히 뒤져서라도 전부 사살하라는 명령이 모사비에 떨어진다.

주인공은 출동한다.

주인공과 더불어 팀을 이룬 암살단은 무려 200만불의 돈을 쏟아 넣으면서 결국 1979년도까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살해한다. 

이로서 전 세계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처럼 신은 이 땅의 자기 백성들 속에 억울함과 울분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 원통함으로 인해 일치된 힘과 역량을 조성케하고, 그렇게 조성된 역량으로 정당한 복수에 나서게 하므로서 신은 여전히 정의의 얼굴을 하고 살아있음을 드러내신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다.

신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신의 억울함에 자신이 초청받는 것을 의미하며, 
신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신의 마무리 복수를 믿는다는 말이다.

뭔헨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욥기가 생각났다.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욥에게 알 수 없는 고난을 부여할 때,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되레 분노하므로서

신의 정의로움을 동원해서 되레 정의로운 하나님에게 고통을 안겨다 준다.
자기 의로움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에게 저주의 심판을 감행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의로움은 곧 악마의 자기 존재의 정당성이었다.

십자가 밖에서
정의를 찾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자기 마음 중앙에 십자가를 빼버리고 여전히 선악과를 심어놓은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 존재를 영원히 가져가려는 자들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욕하는 자는 용서하되 나를 욕하는 자는 용서못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