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은혜와 행위(김재국)에 관한 이준님의 견해

아빠와 함께 2013. 1. 28. 10:28

은혜와 행위 
김재국   2004-01-30 09:19:01, 조회 : 144, 추천 : 21

권정희님의 글을 통하여 이근호목사의 오류 중의 하나가 하이퍼칼빈이즘임을 알았다.
이목사는 그동안 은혜를 근거로 행위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다.그러나
은혜,즉 십자가는 인간의 행동을 처단하는 무기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거룩하게 하는 무기인 것이다.

나는 행위론자가 아니다. 오직은혜,오직믿음,오직예수,오직성경을 신봉한다.
그런데,그렇지 못한
한국교회를 개혁을 하자는 취지를 피력하자 이곳 십자가마을과 김형희씨로부터
행위론자로 규정되고 이단이라 불리게되었다.
잘못된 것을 고치자는 데 이단이라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개혁에 대해서 몇번 글이 오가면
결론은 무엇인가.
십자가마을에서 주장하는 교회는 완전한교회이다.즉 천국의 교회이다.그러니 그것을 비판하고
개혁하자는 것은 예수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한다.
지구에 있는 현실교회의 개혁을 하자는 주장을
애당초 예수님이 만든 완전한 교회를 개혁하자는 것은 이단이라고 몰아붙이니 허망한 노릇이다.

행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목사의 행위무시론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자기공로를 세우기 위한 행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순종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행위라는 글자만 나오면
자기의를 세우는 이단아라면서 예수님만 증거하라고 한다.
사실 에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말로만 되는 것인가? 증거하는 행위가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몇번 논재이 벌어지면
믿음=행위  로서 결말이 난다.
그리고 나서 또 인간의 행위는 진리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목사는 몇일 전에 물리학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없다고 선포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행위는 진리가 아니니 평생 회개하고 지내라고 권유한다,
이러한 행위무시론이 이목사가 고쳐야 할 점이다.
물리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
자연과 우주의 오묘한 창조질서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물리학을 하는 행위를 무시하는 것이 이근호신학의 맹점이다.

인간의 모든행위는 하님님에 대한 순종하는 행위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지
말로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근호목사는 현재 초대교회로부터 현대의 바르트,틸리히까지 50 여명의 유명한 신학자를
조사하는 중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노라운 발견을 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신학자들이 모두 복음을 모르는 것,즉 구원의 방법을 모르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는 것이다. 그 중 1명 토마스 아켐피스 정도가 좀 아는 것 같다는 견해이다.
그래서 이 신학자들을 모두 조사해서 손좀 봐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목사의 작업이 성공적으로 열매맺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의 작업은 하나님께 영광이되는가?
분명 이목사의 그런 작업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행해지면 영광이 된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행위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물리학도 마찬가지로 가치있는 행위이고
모든 학문,직업, 봉사,사소한 질서지키기 의 행위는 말씀에 순종하는 한도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이근호신학은 하이퍼칼빈이즘과 유사한 극단적인 은혜론에 입각한
행위에 대한 무차별적 심판(관심봉) 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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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은혜와 행위 
조부상  (Homepage)  2004-01-30 16:02:09, 조회 : 116, 추천 : 14

하나님께서는
이 근호 목사님의 잘못된 신학을 깨우치시기 위해
강온 양면으로 여러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약하고 부드럽게, 혹은 강하고 집요하게 각 사람들이
이근호 목사님의 잘못되고 치우친 신학을 경계해 드렸습니다만...

목사님은 끝까지 자신의 신학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것이 파기되면 자신이 파기되기라고 할 것 같은 두려움마져
보이시며 신경질적인 자세나 고압적인 자세, 내지는 권위주의적인 자세
목사님 자신이 스스로 절대진리의 잣대나 되는 듯이 정죄를 일삼으셨습니다.

문제는 이근호 목사님 자신 하나만 잘못된다면
진리중에 하나를 빼고 가르치는 자가 되어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고
말일입니다만...그에게 영향을 받은 양병구님이나 김형희님 같은 분은
이미 인터넷상에서 아무도 고칠수 없는 독선주의자로 비난받게 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옳바른 신학, 성경전체와 균형잡힌 신앙이라면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고
또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 말할 수 있겠지만 이건 전혀 아닙니다.

정작 한국교회을 이단이라고 하시지만, 한국교회가 걸어간 오직믿음만능주의에
이 목사님께서 더욱 깊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계실뿐입니다.
스스로가 절대자이시라면 님의 주장을 믿어드리지요만...
이근호목사님의 주장은 여기저기서 들어나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정 반대로 달려가고 계십니다. 그러니  깊은 기도와 겸허함을 회복하셔서
신중하게 자신을 되돌아 보심이  좋으실 것입니다.

믿음안에서도 교만한 자는 넘어져가며,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지만..교만한자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십니다.
암튼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한번 더 쓴 소리를 하게되어 가슴이 아픕니다.
입에 쓴 약이 몸에는 보약이 됩니다. 목사님 자신과 영혼들을 위해서입니다.
어차피 우리 네티즌 들이야....예수님의 그 유명한 말씀처럼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쫓으라"신 말씀에 순종하면 그뿐입니다만..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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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조부상님께 여쭙니다!(제겐 중요한 거라서...-_-;) 
이준   2004-01-30 23:31:27, 조회 : 100, 추천 : 17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고, 궁금해서 여쭙니다. 님께서 남기신 글(2004.1.26 "믿음과 행함은 뗄수 없는 관계다."라는 글) 중에 이런 구절들이 있더군요.

-------------------님의 글 인용----------------------
(지면상 글이 너무 길어질까봐 앞부분은 생략했습니다.)
정확히 이해한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도덕적 율법을 지키는 삶과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중략)...
믿음과 순종/믿음과 행함의 결합이야 말로 21세기에 들어서는 교회의 중대과제이다.
(편의상 뒷부분도 생략했습니다.)

------------------------------------------------------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인데, 위의 문구들이 포함된 글 전체는 분명히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유사한 취지의 글들도 제법 읽어 보았고요.
그런데, "믿음과 도덕적 율법 지키는 삶은 불가분 관계이다 =  믿음과 행함의 결합..."이라고 이해함에 있어서, 야고보서 2장을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데요. 제가 궁금한 점은 믿음이냐, 행위냐, 믿음과 행함의 결합이냐...이런 게 궁금한 게 아니고요.
야고보서 2장에서 야고보 사도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는 구절이 믿음과 행함의 결합, 즉 믿음과 도덕적 율법을 지키는 삶과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보는 취지에 합당한 건가요? 님의 글을 보면 "도덕적" 율법이 곧 믿음과 결합되는 행함을 가리키는 말인데...
제 생각엔,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려했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믿음이 있느냐의 여부를 알아보려하신 취지에서, 그리고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이 있음을 입증한 행위라는 점은 알겠는데요.
제가 궁금한 건 님께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도덕법"을 그대로 지켜려 했던 것이었느냐 하는 점이랍니다. 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지요.

-----------------------님의 글 인용----------------------

"그러기 위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이 의도하신 도덕법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말씀이다.
이것 역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훨씬 "넘어 서는"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대해 말은 많았지만 지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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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는 그 당시와 오늘날 사이에 아무리 문화적, 관습적 격차가 있다 하더라도, 어쨌든 자기 아들을 인신 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은 제3자 입장에서 누가 봐도 "살인미수"였던 걸로 여겨지는데요. 제3자는 왜 들먹이느냐 하며는...하나님의 도덕법이라는 말은 그만큼 누가 봐도 지켜야한다는 당위성과 객관성, 보편성을 품고 있어야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살인미수"도 "도덕적 율법을 지키기"로 간주될 수 있는 건 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의 도덕적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가 될 수 있는 건 지도 궁금합니다.
2.하나님의 도덕법 또는 도덕적 율법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법과 많이 다른 것 인지 궁금한데 여기에 대해서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도 궁금하고요.
3.혹시 별 차이가 없다면 님께서 사용하신 "도덕"이라는 말의 의미가 어떤 취지에서 사용된 것인 지 궁금하고요.
4.만약 아브라함 당시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도덕법에는 "살인미수"가 포함되었지만, 그 이후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난 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면, 왜 포함되지 않는 지도 궁금합니다.

여러 모로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님의 견해에 대해 빠른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다른 분들의 답변은 일체 사절합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조부상님의 견해가 궁금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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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조부상님께 여쭙니다!(제겐 중요한 거라서...-_-;) 
조부상  (Homepage)  2004-01-31 00:48:07, 조회 : 99, 추천 :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던 사건은 아브라함에게 국한된 것입니다.

님에게 님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던 때입니다.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율법이 없었던 시대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표징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의롭다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율법은 모세이후에 세워진 법입니다.
율법은 행위만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고치거나 제지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드러난 장막. 성전, 제사,육적인 할례가 모두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순종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으로 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혜의 법은 주 예수께서 이루신 법입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은혜아래 있을 수록 더욱 죄를 멀리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심입니다.
제가 취급하고 있는 도덕법은 죄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제사법이나 의식법은 이미 폐지되었으며 아무도 이것을 준수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도덕법은 더 강화되었습니다.
모세율법은 살인하지 않는 것으로 족했지만... 은혜의 법은
마음에 미워하는 것마져 살인죄의 범주에 넣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보혜사 성령께서 직접 인도, 역사 보호하심때문에
개인이 성령충만을 유지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연약함을 핑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주예수님의 가지라고 선포하셨기때문입니다.

우리 육체가 장막이 되고 성전이 되었으며,
육적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로
외형적인 율법의 준수가 내면의 은혜의 법 가운데 치리되도록 바뀐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일반화해서 그것으로 믿음과 행함의 척도를
삼으려는 시도는 잘못입니다. 율법이전에서 ▶율법시대▶ 은혜시대로의
변화에 대한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안목이 있을때야만 비로소
믿음과 행함이라는
진정한 실체가 왜곡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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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마을의 이근호목사님 구득영목사님 답변좀부탁합니다 
조현국   2004-01-30 13:12:31, 조회 : 151, 추천 : 18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으로 알게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복음으로) 구속함을 받아 새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죄로 죽었던 인간을 살리는것이 하나님에 모든 뜻 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자가 그리스도 안에있는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보거나 듣고서 자신의 죄인됨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 순간입니까?
아니면 그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죽었던 자가 새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되는 겁니까?
그러므로 생명이있고 볼수있는 눈이 생기게되어 자신의 죄인됨과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수 있게 되는 것 아님니까?
얼버무리지말고 정확한 답변부탁 드립니다,,,,


2.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예수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능력) 로 순간적으로 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보고 신학을 공부함으로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얻게됨으로 되는 것인지 답해주세요.


3.이근호 목사님과 구득영목사님은 언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처음 예수를 믿을때 입니까?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던때 입니까?
아니면 그때는아니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삶과의 괴리로 고민하고 고통 받다가 어느날 깊은 깨달음이 왔던 그순간이 었습니가? 확실한 답변부탁 드립니다.


4.성경의 롬7장 후반부에 나타나고 있는 이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육신에 선한 것이 없고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 내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나는 곤고한자다는 것을 깨닫는 지금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인지요
     답변 주세요...


5.그리고 롬8장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4절에서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라 12~13에서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신을 좇지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것이 구체적으로 어떤것인지 답변해주세요..


6.그리고 이목사님과 구목사님도 주일이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하고 혹 이웃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외면하지 않고 돌아볼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렇지않습니까? 그런 행함은 자기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 은혜 만을 얘기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겟죠? 왜 이목사님과 구목사님은 다른사람들이 하는 행위는 자기의를 세우기위한 방편으로만 보이고 자신들이 하는 일은 모두 행위= 믿음이 되는 것인지 참우습습니다..

                                     제 질문에 구채적이고 확실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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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감히 답변을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 
구득영   2004-01-30 16:33:16, 조회 : 154, 추천 : 18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으로 알게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가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복음으로) 구속함을 받아 새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죄로 죽었던 인간을 살리는것이 하나님에 모든 뜻 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
>여기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
>1.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자가 그리스도 안에있는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보거나 듣고서 자신의 죄인됨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 순간입니까?
>아니면 그 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죽었던 자가 새 생명을 얻고 살아나게 되는 겁니까?
>그러므로 생명이있고 볼수있는 눈이 생기게되어 자신의 죄인됨과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수 있게 되는 것 아님니까?
>얼버무리지말고 정확한 답변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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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 4절에 있듯이 '창세전'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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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예수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의 능력) 로 순간적으로 되는 것인지? 아니면 성경을보고 신학을 공부함으로 인간의 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얻게됨으로 되는 것인지 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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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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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이근호 목사님과 구득영목사님은 언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처음 예수를 믿을때 입니까?
>신학대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던때 입니까?
>아니면 그때는아니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삶과의 괴리로 고민하고 고통 받다가 어느날 깊은 깨달음이 왔던 그순간이 었습니가? 확실한 답변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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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구원받았다면 분명히 창세전입니다. 그리고 전 개인적인 짜릿한(?) 체험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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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성경의 롬7장 후반부에 나타나고 있는 이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육신에 선한 것이 없고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 내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나는 곤고한자다는 것을 깨닫는 지금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인지요
>     답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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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구원받은 자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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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그리고 롬8장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4절에서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라 12~13에서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육신을 좇지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것이 구체적으로 어떤것인지 답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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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님만 믿고 사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너무 개인적이라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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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그리고 이목사님과 구목사님도 주일이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하고 혹 이웃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외면하지 않고 돌아볼 거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그렇지않습니까? 그런 행함은 자기의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 은혜 만을 얘기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겟죠? 왜 이목사님과 구목사님은 다른사람들이 하는 행위는 자기의를 세우기위한 방편으로만 보이고 자신들이 하는 일은 모두 행위= 믿음이 되는 것인지 참우습습니다..
>제 질문에 구채적이고 확실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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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좀 마음에 들지 않는데요, 저는 다른 사람의 행위는 자기 의를 세우는 방편으로 보고 제 행위는 믿음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비겁한 짓을 하다니요. 인간의 행위는 다 정죄받아 마땅합니다. 날마다 회개하는 가운데 주께서 일을 시키는 줄 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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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상님께 다시 여쭙니다. 
이준   2004-01-31 12:22:28, 조회 : 300, 추천 : 31

글이 조금 길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 표시 바로 위에 있는 것이 님의 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던 사건은 아브라함에게 국한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국한 된 것이라는 말씀은 제가 질문했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회피하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제가 드렸던 질문을 다시금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우선, 님께서 직접 작성하신 글이 아니라 달라스 윌라드님의 글을 인용하셨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윌라드님의 글을 가지고 님의 생각을 대변한 것을 알고서 그 글을 대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글의 표현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도덕적 율법 지키는 삶은 불가분 관계이다 = 믿음과 행함의 결합" 이라는 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궁금하게 여긴 것은 이삭을 바치려했던 “살인미수”가 님처럼 “도덕”법을 상정한 상황에서 “도덕”적이라고 볼 수 있느냐 라는 점입니다(만약, 님께서 “도덕법 준수”라는 말을 상정하지 않고, “믿음=순종/믿음=행함”이라고만 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렸던 세 번째 질문에서는 굳이 “-법”이라는 말을 떼어버리고 아래와 같이 질문했던 것입니다.

“...님께서 사용하신 "도덕"이라는 말의 의미가 어떤 취지에서 사용된 것인 지 궁금하고요.”

님의 회피성(!) 답변(?)에 비해, 차라리 다음과 같은 언급들이 솔직하면서도, “믿음=행함=그리스도를 믿는 믿음≠하나님의 도덕법(도덕적 율법) 준수하기”에 보다 근접한 게 아닐까요?(제가 굳이 ≠를 사용한 것은, 믿음에 따른 행위가 도덕적 차원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용어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반대”가 아닌 “초월” 내지는 “색다름”이지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김대중씨도 대북송금 사건을 두고 “불법적”이라는 용어 대신 “초법적”이라는 용어를 구사하지 않던가요. ^^;;).

“...다른 한편으로 보면, 언제나 희생제물의 선택과 제물로 바쳐지는 운명적 과정은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인 매우 역설적 양면성을 지닌 것입니다. 100세에 얻는 독자 아들을 다시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말이 안되고, 종교적 성실성으로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은 바치지 않을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주저함 없이 결행을 합니다...”
- 출처 : 김경재(1995). 번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경동교회설교.

“...14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는 인간의 정과 도덕적 생각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는 믿음의 결단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결단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하갈도 그들에 맞게 친히 돌봐주셨습니다...”
-출처 :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한양센터 홈페이지.

“...하나님이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신 의미는 무엇인가? ‘의’란 말은 히브리어로 ‘쩨다카’인데, ‘관계 개념’이다. 도덕적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관계)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론의 기초가 있다. (Sola fide)...(중략)...‘내 앞에서 행하라’, ‘완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무슨 의미인가? ‘내 앞에서 행한다’라는 말은 신하가 왕에 대하여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을 일컫는 전문 용어이다. ‘완전하라’는 히브리어 ‘타임’은 ‘흠 없는 제물’을 뜻하는 말이다. 도덕적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하라’는 의미이다...”
-출처 : 기독교대한감리회 예수마을교회 홈페이지.


님에게 님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까?
->님의 말씀처럼 이삭을 바치려던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국한된 것이었다면, 저한테 “님의 자녀를 제물과 바치라는 명령이 있었느냐”고 반문하시면 안 되고, “님에겐 님에게만 국한된 그 어떤 독특한 명령이라도 있었나요?”라고 물으시는 게 맞을 겁니다.


아브라함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던 때입니다. 특수한 상황이었습니다. 율법이 없었던 시대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표징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율법 이후의 시대에 대하여 한 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열왕기상 18장입니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는 상황에서 엘리야의 요구는 도덕법에 따른 것이었으며, 사르밧 과부의 순종은 도덕법에 따른 것이었나요?
당장에 먹을 것이 부족한 절박한 처지에서 내 먹을 것부터 내어놓으라는 요구가 율법이 주어진 이후 도덕법에 따른 것이었느냐는 말이지요. 엘리야 뒤에 하나님이라는 실체가 계셨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도덕법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너무나 도덕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듯한 요구를 하고 계시지 않느냐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그 사건도 율법이 제시된 이후 시대에 발생하긴 했지만, 그저 사르밧 과부와 관련된 특수한 상황이라고 넘기시려나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의롭다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율법은 모세이후에 세워진 법입니다.
->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제가 질문한 취지에 비추어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인신 제물로 바치려 시도했던 “살인미수”가 하나님의 “도덕법(도덕적 율법)”에 따른 것이냐, 즉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 것이 “도덕”적이었느냐 라고 물은 것은, 율법이 제시되기 이전 시대에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던 하나님과 율법 시대에 굶어죽을 판인 어느 과부에게 양식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는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이 동일한 분이냐 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떤 순종/행함을 요구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취지가 율법 전과, 율법 이후에 일관성 있게 적용되고 있느냐와 관련된 것입니다.
사실, 이것말고도 질문하려면 끝도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더러 벗은 몸으로 거리를 활보하게 하셨던 사건(사 20장 참조)도 그렇고요(이름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어떤 분은 도저히 이걸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서 설마 그랬겠느냐는 식으로 해석하더군요). 그렇잖습니까? 제단에 다가설 때 하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긴 옷 입으라고 모세 율법에 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더러 벗은 몸으로 행하라니요. 어떤 번역은 민망해서 그런 지 내복은 입혀 놓았더군요...^^;;

(레 6:10) 『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고의로 하체를 가리우고 단 위에서 탄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단 곁에 두고』

(사 20: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개역한글판
(사 20: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개역개정판
(사 20:3) 『그 해에, 주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를 시켜서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허리에 두른 베 옷을 벗고,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사야는, 말씀대로, 옷을 벗고 맨발로 다녔다.』-표준새번역
(사 20:2) 『바로 그 때, 야훼께서는 아모쓰의 아들 이사야를 시켜 말씀하셨다. 야훼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굵은 베옷을 벗고 발에서 신을 벗어라." 이사야는 그 말씀대로 옷을 벗고 맨발로 다녔다.』-공동번역
(사 20:2)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네 삼베 옷과 신발을 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는 순종하여 벌거벗고 맨발로 다녔다.』-현대인의 성경
(사 20:2) 『하마터면 유다도 그렇게 될 뻔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미리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를 보내어 이렇게 경고해 주셨다. `너는 가서 허리에 동인 베옷을 벗고 발에 신은 가죽신을 벗어라!' 이사야가 그대로 하여 ㄱ)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돌아다녔다. (ㄱ. `겉옷을 벗고 내복만 입고서)』-현대어성경
(사 20:2) 『그 때에 주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를 통하여 일러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허리에서 베옷을 풀고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시니, 그가 그대로 하여 맨몸과 맨발로 걸으니라.』-한글킹제임스성경
(사 20:2) 『At the same time spake the LORD by Isaiah the son of Amoz, saying, Go and loose the sackcloth from off thy loins, and put off thy shoe from thy foot. And he did so, walking naked and barefoot.』-KJV
(사 20:2) 『at the same time the LORD spoke by Isaiah the son of Amoz, saying, "Go, and remove the sackcloth from your body, and take your sandals off your feet." And he did so, walking naked and barefoot.』NKJV
(사 20:2) 『at that time the LORD spoke through Isaiah son of Amoz. He said to him, "Take off the sackcloth from your body and the sandals from your feet." And he did so, going around stripped and barefoot.』-NIV
(사 20:2) 『at that time the LORD had spoken to Isaiah son of Amoz, saying, "Go, and loose the sackcloth from your loins and take your sandals off your feet," and he had done so, walking naked and barefoot.』-NRSV


아브라함의 경우를 일반화해서 그것으로 믿음과 행함의 척도를 삼으려는 시도는 잘못입니다.
->제 글을 다시금 읽어봐 주시겠습니까? 과연 아브라함의 경우를 일반화하자는 취지에서 쓴 것인지 말입니다. 저는 님께서 “하나님의 도덕법 준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행함”이라고 상정하신 가운데에서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취지가 “도덕적”인 차원에서 율법 제시 이전뿐만 아니라, 율법 제시 이후에도 일관성 있게 작용하고 있느냐는 점에서 보편성, 일반성, 객관성이라는 용어들을 언급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는데요.

“...율법은 행위만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으로 족하지 않으셨습니다...은혜의 법은 주 예수께서 이루신 법입니다...제가 취급하고 있는 도덕법은 죄와 관련된 것들입니다...제사법이나 의식법은 이미 폐지되었으며 아무도 이것을 준수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도덕법은 더 강화되었습니다...육적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로 외형적인 율법의 준수가 내면의 은혜의 법 가운데 치리되도록 바뀐 것입니다...”

위와 같은 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율법 이전 시대에 일어난 특수한 상황일 뿐이며, 율법 이전시대가 율법 시대를 거쳐 신약 시대까지 이르게 되면서 도덕법이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왔다면, 굳이 야보고 사도가 도덕법이 더욱 강화되기는커녕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발생했던 사건(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반성도 없고 그저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했을 뿐인 사건), 그것도 도덕법이 강화되어가는 방향성과는 정반대되는 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도덕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행위를 왜 “믿음=행함”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야고보서 2장에다 상정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도 님의 견해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만 더 추가하면, 역시 야고보서 2장에 언급된 바, 라합에게 믿음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근거적 행위로서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한 그녀의 행동을 상정하고 있는데요. 넓게 보면,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한 그녀의 행동에는 정탐꾼들을 숨겨주기 위한 그녀의 거짓말도 포함되어 있을 줄 압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리하는 차원에서 질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님께서 도덕법, 도덕적 율법, 행함...등을 상정하신 가운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가 율법 "이전에" 있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런 요구를 하신 하나님께서 율법으로서의 도덕법을 제시하신 바로 그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면 하나님의 그러한 요구가 지니는 도덕적 일관성 여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점이고,
2.님의 말씀처럼 율법 시대 이후로 도덕“법” 시작의 시점을 상정한다면 사르밧 과부에 대한 요구나 이사야의 벗은 몸 퍼포먼스(?) 등은 도덕“법”이 지니는 “도덕”적 속성과 관련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며,
3.님의 말씀과 같이, 율법 이전 시대->율법 시대->신약 시대로 나아오면서 도덕법(물론 님께서는 율법 이전시대에는 율법으로서의 도덕법이 제시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는 거 압니다)이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왔다면, 굳이 야고보 사도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도덕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행위를, 그것도 도덕법이 강화되어 가는 방향으로가 아니라 역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님께서 표현하시기로는 율법시대 이전의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했을 뿐인 사건을 야고보 사도가 “믿음=행함”이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면서 그 근거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인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4.라합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물론,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 생활을 하지 않았기에 모세 율법을 조목조목 알지는 못했겠지만, 율법 이전 시대, 율법 시대 등등을 언급하면서 도덕법 등장의 “시점”을 논하신 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의 등장 시점은 분명히 율법이 주어진 이후였다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조목조목 성실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역시, 참고로 드리는 말씀인데, 다른 분들의 답변은 일체 사절합니다. 저는 현재로선 조부상님만의 견해가 궁금하니까요(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지 않겠어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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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조부상님께 다시 여쭙니다. 
조부상  (Homepage)  2004-02-01 11:20:20, 조회 : 99, 추천 : 12

..  처음에는 슬쩍 속독으로 읽어본 후
올무놓기식 질문으로 파악했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독 한 후에 질문에 귀하고 감사하다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꾸벅~(-.-)(_ _)(-.-)(^.^)

님의 논지는 성경적 행함은 도덕법이라기 보다는
도덕을 초월한 법이 아니겠는가?
혹은 도덕법 준수로써의 행함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관계성에서의 순종이 아니겠느냐? 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믿음과 행함이 다른 것처럼 가르쳐지는 십자가 마을의
신학적 논지에 대한 반대에 초점을 두다보니
얼렁 뚱당 대충 넘어가려던 행함에 관한 문제였습니다만...
님의 문제 제기로 인해 행함을 세분화하여 살펴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님께서는 혹시 도덕법 준수와 행함의 상관관계성을
부인하고 싶으신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체적인 특별한 상황은
적용면에서 일반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음과 행함이라는 측면에서만 고려해 볼때
"나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거나
혹은 하나님 편으로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구체적인 정황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행위들이
살인미수나 거짓말 등의 초법적인 형태로 나타남을 인정합니다.
이사야의 경우는 미치광이처럼 보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살펴보면 순종이라는 것이.. 생명과 연관이 되어있고
그러기에 흔히 하는 말처럼 쉽거나,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수평적인 측면에서의 행함..
즉 구체적인 지시가 없는 평상적이고 일반적인 삶속에서는
도덕법 준수로써의 행함이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
혹은 구체적인 상황에서와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행함에 대한 고찰이 같을 수는 없겠지요.
이것을 통해 성경 전체의 핵심의 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고
실천의 열매로써 맺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다른 분들은 답글은 굳이 사양하시고
제 답글만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금하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필시 대충 넘어갔을텐데
행함을 다시 고찰해 볼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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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조부상님 보세요. 
이준   2004-02-01 17:47:46, 조회 : 98, 추천 : 20

역시, "->"표시 바로 위에 있는 글이 님의 글입니다.


..  처음에는 슬쩍 속독으로 읽어본 후 올무놓기식 질문으로 파악했었습니다. 다시 한번 정독 한 후에 질문에 귀하고 감사하다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꾸벅~(-.-)(_ _)(-.-)(^.^)
->안녕하세요? 한동안 답변이 없어서 나름대로 숙고하고 계시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제가 드린 질문 네 가지 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도 답변을 하지 않으셨군요.


님의 논지는 성경적 행함은 도덕법이라기 보다는 도덕을 초월한 법이 아니겠는가? 혹은 도덕법 준수로써의 행함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관계성에서의 순종이 아니겠느냐? 이신 것 같습니다.
->님, 저의 논지는 제 질문들 속에 들어 있습니다. “...관계성의 순종...”☜ 이 표현은 저의 취지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마을교회의 어느 분이 사용하신 표현이고요. 제 글을 순서대로 읽어나가시면서 댓글을 달아나가시려는 건 지는 모르겠지만, 제 글을 다시금 읽어보시면서, 특히 제가 드린 질문 네 가지에 부디 “직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관계성의 순종...”을 부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 이전 시대에(님의 표현처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던 사건 및 율법 시대에(님의 표현처럼) 발생한 다른 사건들에 관여하신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시라면 그 모든 사건들에 내포된 도덕성 내지는 도덕적 일관성과 관련된 하나님의 취지를 논하는 차원의 질문을 위해 그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가 어떤 글을 인용할 때 그렇게 인용하는 행위에 담긴 취지조차 파악이 안 되셨나 보군요.


그렇습니까?
->여전히 아직도 제가 드린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한 가지도 제대로 답변하지 않으셨으면서, 저한테 뭔가를 되물으실 입장이 아니실텐데요. 님께서는 “(위 글에서와 같이) 죄송하다, (저 아래 글에서와 같이)감사하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도, 아직도 제가 드린 질문에 대해 답변차원에서 조목조목 님의 견해를 피력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도, 여전히 님의 이 글 아랫부분으로 가보면 “그리스도를 믿음=행함=도덕법 준수”라는 등식의 구조를  반복하고 계실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굳이 자유주의신학자이신 김경래님에서부터 보수적인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 형제님들의 자료, 그리고 복음주의인 감리교 형제님들의 글, 이렇게  세 가지 자료를 제시했다고 해서 그 자료들에 담긴 논지가 제 입장을 “온전히” 대변하는 것은 아닙니다(제가 질문 드리려는 차원에서 일부 필요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제가 인용한 것 일뿐). 왜냐하면, 그 자료들이 인용된만큼의 부분들이 “믿음=행함=도덕법 준수”와 관련된 모든 논거 요소들을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글쓰기 방식에 있어서도, 님처럼 앞뒷말 없이(자기 논지에 대한 이런 반구도 없이) 달라스 윌라드 님의 글만 뚝딱 발췌해 놓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 세 가지 자료들을 인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함이 다른 것처럼 가르쳐지는 십자가 마을의 신학적 논지에 대한 반대에 초점을 두다보니 얼렁 뚱당 대충 넘어가려던 행함에 관한 문제였습니다만...
님의 문제 제기로 인해 행함을 세분화하여 살펴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게 문제이겠지요. 님께서는 십자가 마을을 두고서 믿음과 행함이 다른 것처럼 가르친다고 일갈하고 계시지만,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님께서는 하나님의 도덕적 일관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신 처지인데다, (물론 그 당연한 귀결로서) 다음과 같은 매우 문제성 어린 도식을 게시판 방문자들에게 제시하셨습니다. 그것도 님 개인 차원의 그 어떠한 논지도 언급하지 않으시고서 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더러 “안타깝습니다”라고 충고하시기 이전에 자신의 처지부터 돌아보시기 바랍니다(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근호 목사님 편들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도덕적 율법 지키는 삶은 불가분 관계이다 =  믿음과 순종/믿음과 행함의 결합...”

그리고,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려” 하셨다고요...저는 님의 카페(실제로 님께서 운영자 내지는 주인장이라고 생각하며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를 방문하고서 어제 제가 방문했던 시각 현재 회원수가 24791명 중에 24790명(끝에 1명은 님이라고 보고 제외하고서)인 것을 보고서 그 수많은 영혼들을 카페를 통해 관리운영 내지는 그들과 접촉하시는 님 정도라면 자신이 직접 글을 쓰든 남의 글을 인용하든 “얼렁뚱땅 대충” 넘어가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는데요.


님께서는 혹시 도덕법 준수와 행함의 상관관계성을 부인하고 싶으신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정말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말 표현을 여전히 고수하시면서 정작 제가 드린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은 회피하시며, 자신의 생각을 무슨 진지 사수하듯 하시는 심정으로 은근 슬쩍 저한테 되받아 치시는 것은 공개적인 공간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끼리의 입장에서 누가 봐도 “고약한” 또는 "치사스런" 처사라고 생각지는 않으시는 지 궁금합니다. 나름대로 정성스레 질문들을 정연하게 정리하여 올렸으면 예의상으로라도 최소한 조목조목(분량에 관계없이) 답변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그리고, 그게 까다롭다면 동의나 반대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 자신의 견해를 최소한이라도 피력해야 하지 않을까요?(과거 다른 필명으로 다른 사이트들에서 글을 주고받으며 님처럼 은근 쓸쩍 발을 빼면서 동시에 되받아치는 분들께는 이젠 참으로 이력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구체적인 특별한 상황의 성급한 일반화는 적용면에서 일반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데 대하여 제가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님께서는 제 질문의 취지조차 이해 못하고 계시는 듯합니다. 저는 님께 분명히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도대체 “누가 특별한 상황을 일반화하느냐(님의 표현을 빌리면)”고 말입니다.

“제 글을 다시금 읽어봐 주시겠습니까? 과연 아브라함의 경우를 일반화하자는 취지에서 쓴 것인지 말입니다. 저는 님께서 “하나님의 도덕법 준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행함”이라고 상정하신 가운데에서 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취지가 “도덕적”인 차원에서 율법 제시 이전뿐만 아니라, 율법 제시 이후에도 일관성 있게 작용하고 있느냐는 점에서 보편성, 일반성, 객관성이라는 용어들을 언급한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만 봐도 님은 저의 두 번째 질문을 정독하셨다고 말씀하셨건만 오히려 정독하셨다는 말씀부터가 신뢰가 안 갑니다.

둘째, 님의 위와 같은 언급은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 자체가 가진 일반성이 각 개인들의 독특성 내지는 개별성, 각 개인들이 처한 상황의 특수성 등과 어떤 관련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바꿔 말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개별성, 그리고 그들 각자와 관련된 개별적이고 특수하며, 특별한 상황들을 보건대, 통시적 및 공시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개별적이고도 특수하며,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듣기에 거북하실지 모르겠지만, 님의 성경 읽기 방식 또는 성경 본문 인식에 따른다면 처음에는 모든 삶들에 대하여 도덕법이 적용되며, 또 도덕법을 준수하도록 하자면서 도덕법과 삶을 결합하려는 쪽으로 나아갔다가, 결국 나중에는 성경은 성경대로, 개인 및 개인의 삶은 개인대로, 도덕적 율법은 도덕적 율법대로, 인간들이 처한 상황이나 처지는 처지대로...라는 식으로 분열되어 되돌아 올 소지가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도덕법 준수 운운해 봤자, 결국 하나님의 도덕법이 지닌 일반성과 개인의 삶 및 개인이 처한 상황은 사뭇 동떨어진 것으로 보여질 우려가 있지 않을까요?
좀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예컨대, 사르밧 과부의 사건이 발생한 시점이 율법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서도 결국 님처럼 특수한 상황, 개별적인 상황이었을 뿐이어서 적용면에서 일반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시대를 초월하여, 환경을 초월하여 다른 모든 이들 및 그들이 처한 모든 상황에는 하나님의 도덕법을 과연 들이댈 근거가 있단 말입니까? 이 점에 대해서도 답변 해주시기 바랍니다.


믿음과 행함이라는 측면에서만 고려해 볼때
->님께서 발췌해서 올리신 처음 글에 따르면, 이렇게 “말 잘라내기” 하셔선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님의 처음 표현처럼 “그리스도를 믿음 =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 지키기 = 믿음/순종 = 믿음/행함"이라는 관계를 전제로 하여 답변하셔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거나 혹은 하나님 편으로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이렇게 이렇게 시키셔서” 라는 것보다 “사람 쪽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이렇게 순종해드린다”는 생각이 더 비중 있게 자리 잡고 있지요? 제 말 맞지요?


그런 구체적인 정황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행위들이 살인미수나 거짓말 등의 초법적인 형태로 나타남을 인정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아직 정리가 안 되신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님, 생각해 보세요. 이삭을 바치려했던 살인미수나 라합의 거짓말 등의 초법적인 형태의 중심은 그런 사람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께 있습니다. 이 점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요구”하신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감이 안 잡히십니까?
그래서, 제가 드린 질문 가운데 첫 번째 질문이 율법 이전, 율법 이후...를 막론하여 도덕, 도덕적 율법, 도덕법...등을 상정한 가운데 하나님 취지의 일관성을 어떻게 보시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님께서는 제가 예로 들었던 사건들에서 볼 수 있는 초법적 형태의 행동들의 중심이 사람에서 발단된 데 있는 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데에 실려 있는 지 분간조차 못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라합의 경우는 라합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거짓말 한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시켜서 한 게 아니지 않느랴 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거짓말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고 눈감아 주셨다(마땅한 표현이 생각 안 나네요)는 점을 부각시킨다면, 도덕적 일관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취지에 대해 과연 님께서는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으신지요?


이사야의 경우는 미치광이처럼 보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살펴보면 순종이라는 것이.. 생명과 연관이 되어있고 그러기에 흔히 하는 말처럼 쉽거나,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요...순종에 대해서만큼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시는 님의 모습이 보이는듯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순종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지요. 저는 지난날 언젠가 정말 감명 깊게 읽었던 에릭 리들 형제님의 생애가 떠오릅니다. 박광희씨라는 분께서 영국에 계실 때 애써 자료 조사까지 하셔서 나름대로 공들여 쓰신 “불의 마차”라는 책인데요(이언 찰슨이 주연한 영화 이름은 “불의 전차”이지요). 개인적으로 한 권 소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책은 저로서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존경하는 리들 형제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이 한 마디였습니다. “온전한 순종...”
우리 삶이, 그리고 우리 삶 속에 요구하시는 바가 어찌 보면 그리 만만한 게 아니지요. 저도 이 점에 대해서 정말 그러하다고 고백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부르시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 있고, 또 그것을 향유하는 삶이 있답니다. 생명이신 주님께로부터 온 자유(!) 말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느라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온전하지 못함을 압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총동원해서 실제로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하나님 앞에서 멋지게 살아드린다고 해도(성령님의 능력까지 동원해서) 우리가 받은 구원에 조금도 우리가 추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애초부터 구원은 은혜로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신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성전 밖을 나간 사람도 언젠가는 제단 앞에 제물을 가지고 다시 나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숨질 때까지 그 제사는 반복되었지요. 그가 성전 밖을 나가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도덕법을 준수하며 죄 안 지으려고 발버둥 안쳤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다시금 제물을 가지고 성전 제단 앞에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지요. 그게 인간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덕 기준에 미칠 수 없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최근에 “자유”라는 제목의 이근호 목사님 동영상 설교를 통해 주님께서 홀로 이루신 구속의 공로에서 온 그 자유의 의미와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을 대하시는 다른 분들께도 선입관을 배제한 채 시청해 보실 것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수평적인 측면에서의 행함.. 즉 구체적인 지시가 없는 평상적이고 일반적인 삶속에서는 도덕법 준수로써의 행함이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님은 저의 질문의 초점을 회피하고 계십니다. 왜 계속해서 제가 드린 질문에 담겨있는 논지의 초점을 피해가십니까?
제가 드린 질문들 가운데 첫 번째 질문은 “율법 이전 시대에(님의 말씀처럼)” 성경의 인물들에게 제시하신 구체적인 순종, 그것도 도덕율에 반(反)하는 행동적 요구(저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을 예로 들었었지요)를 통해 목격된 하나님과, 모세 율법을 통해 도덕율(도덕법)을 제시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도덕적 율법이 제시되고 난 후 그 도덕적 율법이 포괄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기간에 발생한 사건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하나님들(?)이 같은 한분 하나님(!)이시라면, 이러한 모든 것들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도덕적 일관성,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내포되어 있는 도덕적 일관성에 대하여 어떻게 보시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께서는 왜 굳이 이런 사건들을 그저 특수한 이들에게 특수하게 발생한 것인양 일반성이 배제된 것처럼 말씀하시는지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약 5:17 부분 인용)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와 관련된 사건, 그것도 율법 시대에(님의 말씀처럼) 발생한 사건이 특수한 상황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제 질문을 비켜갈 수 있는 여지가 담긴 걸로 치부해버릴 수 있다고 보십니까? 혹시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은 같지만, 그가 처한 상황이 우리와는 다르고, 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요구나 섭리로 그저 특수성을 띠었을 뿐, 우리와는 달리 일반성을 적용할 수 없고...라는 식으로 생각하시는지요? 과연 그러십니까? 도대체 님께서 특수한 상황일뿐이라고 치부하시는 바로 그 특수성은 어떤 것이며, 일반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일반성은 무슨 의미를 띠고 있는 것입니까?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와 똑같은 처지, 똑같은 속성을 가지고  똑같은 하나님 앞에 우리와 함께 놓여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엘리야와 관련된 행적처럼 우리네 인생 살이도 성경 본문에 등록되어야 한다는 취지는 결코 아니고요).


수직적인 관계와 수평적인 관계, 혹은 구체적인 상황에서와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행함에 대한 고찰이 같을 수는 없겠지요. 이것을 통해 성경 전체의 핵심의 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고 실천의 열매로써 맺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님! 님께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점 한 가지는 “일반적”이라는 말은 “무심코” 사용하시는 게 아닙니다(제가 “외람되게” 훈계조로 말씀드리는 것처럼 들으셔도 저로선 어쩔 도리가 없군요. 부디 아량으로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무심코”라는 말을 상정한 것은, “일반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동생한테 그냥, ‘라면 하나 사온나’라고 편하게 말하는 상황과는 사뭇 다른 성격, 대상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학문을 했다는 저로서도 일반성이나 절대성이라는 말을 흔쾌히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사용할 상황이 되면 저도 모르게 사뭇 조심스러워지지요.
님께서는 무엇이 일반적이고, 무엇이 구체적이라는 의미인지 알고 사용하시는지요? 님께서는 분명히 “구체적 상황”이라는 말과 “일반적 상황”이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이라는 말 대신 “개별적”(이라는 의미로서의) “특수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보다 적절하다고 사료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저마다 독특함을 지닌 개인의 다양한 처지나 형편과 관련된 “상황”이라는 말 앞에 붙어있는 수식어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님께서는 “일반적 상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일반적 상황이란 (구체적인 상황 말고) 일반성을 띠는 상황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모든 인간들이 처한 저마다의 상황이나 처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도덕율이 일반성을 띠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한 것, 사르밧 과부에게 떡을 바치라고 한 것...등은 구체적(?)인 상황이고, 이것들 말고 일반적인 상황이 따로 있다는 말씀인지요? 이 점에 대하여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린 적이 있을텐데요.

“님에게 님의 자녀를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까?
->님의 말씀처럼 이삭을 바치려던 사건이 아브라함에게 국한된 것이었다면, 저한테 “님의 자녀를 제물과 바치라는 명령이 있었느냐”고 반문하시면 안 되고, “님에겐 님에게만 국한된 그 어떤 독특한 명령이라도 있었나요?”라고 물으시는 게 맞을 겁니다.”

상황이 일반적이다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요? 아니면 도덕율이 일반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인간들 각자의 저마다 특수하고 개별적인 상황들을 포괄적으로 다룬다 라고 말해야 보다 타당한 말일까요? 님께서는 일반성을 띠는 것이 상황인지, 아니면 도덕율(도덕법)인지부터 갈피를 못 잡고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 대하여 다른 어떤 상황(또는 상황들)이 일반적이라고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 사람마다 얼굴 다르듯이 제각기 처한 상황도 다릅니다. 예컨대, A라는 사람이 이혼을 했고, B라는 사람도 이혼을 했다고 해서, 두 사람의 이혼들을 한데 묶어서 “이혼”을 일반적인 속성을 띤 것으로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도덕율도 모든 상황들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차원에서 적용되던 가요? 실로, 저마다 사람들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엄정한 도덕률을 가지고 도매금으로 만사를 처리하실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일반적”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기계적”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구체적인 상황들 가운데 비슷한 것들만 한데 모아 정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일반성을 띠는 것은 아닙니다. 학문에서 다루는 수많은 변인들이나 개념들도 일반성이나 절대성을 띠는 것이 있다고 쉽사리 말할 수 없기에 그걸 두고 “간주관적”이라고 일컫습니다.
님께서는 일반성(내지는 보편성, 객관성)을 띠고서 다른 대상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편이 “상황”인지 “도덕법”인지부터 정리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른 분들은 답글은 굳이 사양하시고 제 답글만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궁금하네요.
->첫째는, 님께서 말씀하신 것(남의 글을 인용했다 하더라도)에 대하여 최소한 당사자인 님께서 책임감을 느끼셔야 하지 않을까요? 이곳 게시판에 올려진 글들은 그 누구로부터도 질문과 답변의 자료가 될 수 있음을 익히 아실텐데요. 그렇다면, 저같은 사람의 경우 님께서 올려놓으신 글과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글을 올려놓으신 님의 생각의 깊이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둘째, 님의 말씀대로 님께서 애초에 그렇게 “얼렁뚱땅” 식으로(제 나름대로 표현하자면 “믿음의 도리에 대한 설명 내지는 도식이 매우 엉성한”) 글을(그것도 결함이 심각한) 올려놓으셨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받은 데다, 님께서 올려놓으신 그 글을 훑어보건대, 구원관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실제에 대한 님의 이해에 있어서 저로서는 신뢰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의 확신이 옳았다는 것이 이 시점에서 어느 정도 확인되었고요.
셋째, 저는 분명히 이렇게 말씀드렸었습니다.

“저는 “현재로선” 조부상님만의 견해가 궁금하니까요”

“현재로선”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님께서 그 글을 올리신 의도나 취지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질문을 올리던 시점을 전후로 합니다. 그렇기에, 님으로부터 제대로 된 답변을 들었다면, 님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의 견해도 듣고자 하면서 보다 논의의 폭을 넓혀나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저의 기대도 무위로 돌아오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두 번씩이나 질문을 드렸지만, 제대로 된 답변은 찾아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필시 대충 넘어갔을텐데 행함을 다시 고찰해 볼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보기엔, 님은 고찰이 모자란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잘못된 도식을 가지고 믿음이라는 걸 다루는 데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고찰을 멈추시고, 도식의 전환에 대하여 고민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즉, 아래와 같은 님의 글 속에 제시된 도식을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도덕적 율법 지키는 삶은 불가분 관계이다 =  믿음과 순종/믿음과 행함의 결합...”

그래서, 저는 계속에서 도덕...이라는 것들을 가지고 질문을 드린 것이고요. 하지만, 지금 저로선 결국 제 예상대로 저의 공들인 질문은 계속 허공 속에 맴돌다 메아리처럼 되돌아오고 마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제가 참으로 님께서 견지하시는 그런 “행함 의식”을 사수하시는 차원에서 되돌아보시라고 그런 질문들을 드렸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공개적 공간에 글을 올리는 사람들 사이에 최소한의 성의 표시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드린 질문 네 가지에 답변을 올려주시든지, 아니면 가부간에 언급이라도 하시든지요. 그렇게 하시면 제가 또 뭔가 꼬투리(?)를 물고 늘어지겠지요? 답변하기 싫으시면 님과의 대화를 여기쯤에서 마무리할까 합니다. 무례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