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죽방과 멸치(방종과 성도의 자유)이준061009

아빠와 함께 2013. 3. 2. 09:38

죽방과 멸치('방종'과 '성도의 자유') 
이준   2006-10-09 23:52:36, 조회 : 167, 추천 : 4

                                                                                      죽방(죽방렴)과 멸치
                                                                              - 부제 : ‘방종’과 ‘성도의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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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제 부족하고도(!), 장황한 글을 끝까지 읽으시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굳이 말씀드리지만, ‘설득’을 목적으로 한 글은 아닙니다. 설령, 설득을 목적으로 했더라도 설득되지 않는 이들이 있음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판하려는 목적도 아니며, 불 붙은 곳 - 이 글을 쓴 때는 김인철씨의 글을 손무성 목사님께서 게시판에 옮겨놓으신 날이었지만, 그 이후에 다듬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론 게시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에 몇몇 형제님들께서 이미 이의를 제기하신 것을 보면서 - 에 기름 끼얹으려는 의도에서도 아닙니다.
아울러, 제목을 ‘그녀를 쏴야했던 이유’라고 했다가 다시금 위와 같이 정정하였습니다. 제목‘들’과 관련된 사연들은 글을 읽어 가시다가 자연스레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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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종’이라 함은 ‘방종’에 따른 책임도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글의 부제를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방종과 자유’가 아니고, ‘방종과 성도의 자유’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성도는 자유하는 사람이지, 방종과는 거리가 먼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즉 성도가 방종하는 존재라면 자기의 방종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지는 걸까요? 이러한 의문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원론으로 늘 되돌아가야함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과정이나 결과에 대하여 뭔가 복잡해짐을 느낄 때 다시금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보곤 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다시 수사는 원점으로...”)

구원이란, 이전에는 갖고 있지 않았던 ‘성도’라는 신분을 획득하는 순간만을 두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특정 신분이 있다면 그 신분에 걸맞는 삶의 과정이 수반되기 마련인데, 구원이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지요. 성도라 함은 신분과 그 신분에 따른 삶을 모두 포괄하는 바, 주님의 구원의 대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덮혀진 -은혜로 구원받은 - ‘성도’는 그 신분만이 아니라 그 신분에 따른 삶의 전 영역이 은혜로 포괄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성도가 성도를’이 아니라 ‘은혜가 성도를’ 포괄할진대, 더 이상 은혜 외에 성도를 포괄하거나 규정하는 결정적 주체는 없습니다.

(소위 ‘상급균등론’이라는 것도 은혜 안에 놓여있는 성도가 더 이상 자기 삶에 책임질 부분이 없기 때문에 성립되는 논리입니다. 마르크스도 공산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이 균등론과 전천년주의자들의 비성경적인 천년왕국론 등에서 일부 받았지요.)

따라서, 근본적으로 ‘성도’란 ‘방종’과 ‘방종에 따른 책임’이라는 말들과는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방종’은 흔히 ‘자유의 남용’내지는 ‘자유의 유사품’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가 율법에 대하여 자유하는 존재라고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자유’ 아닌 ‘방종’은 ‘성도’와 상관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만일 형제라 여겨지는 자가 이러저러하거든 더 이상 그를 형제 취급하지 말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고전 5:11 및 유사 구절 참조).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가 아니라 ‘죽은 자로 여기라’고 하시면서(롬 6:11) 심지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까지도 거론합니다(요일 5:17). 저의 이러한 논리는 ‘방종’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출구를 찾고자 함이 아니라, ‘자유’와 ‘방종’에 대한 제대로 구분된 이해에 보다 다가서고자 함입니다.
이러한 저의 논지에 대하여, “‘방종’이 성도와 관련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성도의 삶에 대하여 경고성어린 권면들이 신약에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그런 소릴하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반응은 성도의 ‘자유’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서 비롯됩니다.
‘자유’라는 말은 ‘성도’의 삶의 실제의 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하여 ‘방종’을 염두에 둔 분들의 생각과 공통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실제와 관련된 불완전성 - 성도 쪽의 불완전성 - 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원을 보장해내는 은혜의 완전성을 담지한 말이 ‘자유’라는 말입니다. 은혜의 출처는 구원의 주체자가 누구인가 라는 사안과 늘 결부되어 있습니다. ‘은혜’는 어디까지나 ‘구원자(구원의 주체이신 분)’으로부터만 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유’를 보장하는 분은 은혜를 주시는 구원자이시지, 자유 안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당사자 자신 - 성도를 가리킴 - 보장해내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자유의 원천이신 분과 그 자유를 향유하는 자는 서로 다름을 우리는 재확인 합니다. 자유의 향유자는 자신이 누리는 자유의 원천자에 대하여 그 자유를 발생시킨데 대한 그 어떤 공로도 공유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보존하고 유지해나감에 있어서도 어떤 추가적인 사항을 제시할 입장에 놓여있지 못합니다.
‘자유’의 원천과 유지에 있어 성도는 일방적인 수혜자에 불과합니다. 이는 자유로써 성도를 지배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로써 감싸는 분은 자유의 우리(울, 울타리) 안에 자신이 가두어둔 양무리인 성도들을 책임져야 할 책무를 지닙니다. 따라서, ‘자유’와 관련된 ‘책임’ - 자유를 수호하고 보존할 책무 - 의 소지는 울 안에 있는 양(자유의 향유자)이 아니라 목자에게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자유’에 대한 책임은 향유자가 아니라 원천자(자유의 원천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화국 - 곧 아담의 세계의 존립 방편 - 이 자신의 갖가지 법령으로 규정해 놓고 있는 ‘자유’ 개념과 사뭇 다른 까닭입니다. 아담의 세계에서는 곧잘 ‘힘없는 평화’는 존립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힘 - 경제력, 군사력, 정치적 패권 등 - 을 보다 많이 확보해 두고자 각축을 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 논리로서 ‘책임 없는 자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상호의존성을 담지하고 있는 아담세계의 생리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현상입니다. 아담의 정부들(공화국)은 개인으로부터 각종 의무의 이행을 요청함과 더불어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몇몇 권한을 제시합니다. 그러한 의무와 권리의 균형상태의 조건 및 지향점이 되는 규범체계의 근간을 자유와 평등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파악되는 공화국의 ‘자유’란 순전히 그 자유의 원천과 향유, 그리고 보존의 책임이 인간 당사자 - 개별자내지는 집단적 상호작용으로 결속되는 사회적 관계 구조 - 에게 있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자유와 그 어떤 공유점을 지니고나 있는 것일까요?
성도에게 자유주신 분께서는 그 자유의 보존과 유지에 따른 책임과 보장성을 아울러 지니고 계십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멸치(성도)에게 자유라는 테두리로 명명된 ‘죽방’이라는 구조물만 덩그러니 마련해주고서, 그 속에서 들어온 멸치에게 “네가 각양 천적들이 도사린 저 넓은 바다의 위험으로부터 피하여 들어와 있는 그 죽방 - 성경이 언급한 바, ‘그리스도 안’이라 명명된 자유의 영역 - 속에서의 자유를 늘 만끽하려면 네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보장해 주는 죽방(의 견고함)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책무까지 멸치인 네가 떠맡아야 돼”라고 하신 걸까요?
책무의 당사자가 성도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겉으로 보여지는 성도의 불완전한 삶의 실제까지도 그 책무로서 덮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란 이런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유’라는 말은 성도의 삶의 실제를 두고서 '진정 자유스런 것이로군'이라 단정지을 정도로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의 실제적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덮혀진 은혜야말로 완전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의미를 띤다는 점에서 '자유'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두고서, “그렇다면 자유라는 말 자체가 방종이라는 개념을 필수적인 자기 구성 요소로 파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라는 생뚱맞은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성도는 ‘자유’와 관련된 존재이지 ‘방종’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성도의 삶의 실제의 불완전한 부분을 염두에 두고서 ‘방종’과 관련짓는 것은 주님의 책무에 대하여, 또한 성도의 ‘자유’라는 개념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로 비쳐집니다. 자유케 하신 주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이며, 자칫 신성모독죄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 삶의 행실에 대한 ‘권면’을 ‘자유’ 안에서 종용 받습니다. 결코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담지한 율법 조목들이 성령의 주도적 능력 안에서 그 권면들을 흔쾌히 지지하지요(그래서 율법은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거룩성과 십자가 구속의 절대성을 일깨워주는 또다른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 과정에서 성도는 자신의 불완전성으로 치닫는 성향에 대하여 그 자유를 제공하시고 보장하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따라서, ‘방종’이라는 말이 함유하는 바,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된 ‘자유’를 ‘자신의 삶의 실제’를 통하여 실천, 유지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이러한 논지는 마음대로,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의 논지는 마치, ‘온갖 행함이 있으니 믿음 있노라고 장담할 수 없듯, 믿음 있으니 제멋대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님’의 논리를 지지하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율법에 대해 ‘자유하는’ 존재로서의 성도는, 겉으로 보기에 온전한 삶을 보유한 자가 아닙니다.
(‘자체적으로’ 늘 - 중생 이전, 이후를 막론하고 - 자유함을 확보하고, 향유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원천적으로 ‘자유’를 거론할 - 자유로워져야 할 -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도가 자유한다고 장담할 수 있는 근거는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의 실제’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명해 주는 증거물인 ‘믿음’때문입니다(히 11:1).
인간의 눈에 비춰지는 ‘실제’로서의 ‘현상’들 - 혹은 성도의 삶의 불완전한 실제들 - 은 성도가 과연 율법에 대하여 자유하는 존재인가, 아울러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각종 규범들 - 사도들의 권면들 - 에 대한 책무를 제대로 이행해가는 것일까라는 점을 두고서 끊임없는 의혹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한편,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실제로서의 ‘믿음’을 이 시점에서 거론하는 것을 두고서 방종을 부추기는 또 다른 여지를 개입시키는 게 아닌가 라고 여겨질 수도 있음도 저는 간과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의 외부에서 날아온’ - 믿음이라는 것을 음미해 - 성령의 능력으로 - 보면 우리의 눈에 여지껏 ‘실제’로 비쳐지던 현상들에 대한 이해는 사뭇 달라지게 됩니다. 당연한 책무의 이행이라 일컬어지던 온갖 것들 - 이를테면 헌금, 예배출석, 봉사, 선교, 구제, 교육, 각종 프로그램 등등 - 을 두고서, 그 모든 것들과 믿음의 진위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고후 13:5, 마 7:15,21-23). 그런 생각을 하는 당사자가 진정으로 성령 임하신 자라면 말입니다.

“온갖 권면들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성도 - 혹은 ‘믿음 있음’ - 인가? 반대로, 성도라고 해서 반드시 온갖 것들을 제대로 실천해 나가던가?”

위와 같은 안목 - ‘복음 안에서의 의혹’ - 이 궁극적으로 도달되는 곳은, 현상에 대한 구구절절한 비판 - 혹여, 방종하지 말라는 식으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글을 가지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일삼는 것도 포함됨 - 의 자리가 아니라, 과연 ‘성도’라 함은 본질적으로 과연 은혜로써만 구원되는구나 라는 원론적인 진리를 늘 재발견하고 그로 인해 다시금 끊임없이 감격, 감사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무를 강조하고 방종에 대하여 단속코자하는 이유는,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수호하고자는 충정에서가 아니라, ‘속이 허해서’ 빚어지는 현상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경각심은, 근본적으로 성도는 ‘은혜’로만 만족하고 복음 안에서 자유를 향유하는 존재라는 말을 하기 이전에, 성도라는 인간 실존의 근본이 처음에 이 아담의 진흙탕 속에서 어떤 ‘질’을 타고 난 존재인지 깊은 숙고함이 부족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울러, ‘십자가의 복음이 인간을 죄인이라 규정하고 오직 은혜만으로 구원시키는 것이다’라는 장엄한 명제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인 수준에 그쳤기 때문이며, 십자가의 복음을 두고서 ‘아는 것’의 성질로만 취급함과 더불어, 복음과 관련하여 ‘앎’이라는 영역 이외에 별도로 존재하는 ‘실제’- ‘실천’이라는 말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 라는 영역 - 그 속에 각종 책무와 실천들이 내포되어 있음 - 을 따로 장만해 두려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을 대할 때마다 저는 성도로 하여금 그(녀)의 삶의 실제와 관련하여 ‘방종’이 아닌 ‘자유’를 실감하도록 하기 위해,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적인 글들이나 질문답변 글들보다는 오히려 일주일 단위로 올라오는 ‘설교문’들을 읽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저는 습관적으로, 이근호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 보다는 주로 설교문을 ‘읽습니다’. ‘읽으면서’ 얻게 되는 것이 제 개인적으로는 더 많기 때문입니다. 설교문에 줄을 긋습니다.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메모해 둡니다. 물론, 저와는 달리, 들으시면서 은혜 받으시는 분들에게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습관을 강요하려는 의도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음성 파일을 틀어놓을 경우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어나 다른 일들이 종종 끼어들곤 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듣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로 설교문을 읽는 편입니다.
어쨌든, 이근호 목사님의 설교문은 복음을 변증하는 신학적인 글들에 비해 십자가의 복음을 보다 현장감, 현실감 있는 실제로서 접근하는데 상대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앞서 드린 말씀 중에서 성도라는 실존이 어떤 ‘질’을 띠는지에 관해 좀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 성도라는 존재도 예외가 아닌데 - 기본적으로 ‘진화론적 존재’입니다. 굳이 진화론적 아이디어가 담긴 용어를 끌어온 이유는, 진화론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진화론적 인간상이라는, 이른 바 자체적으로 분명한 모순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쉽사리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상이야말로 이 글의 논지 전개에 따른 성도의 질을 표현하는데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지점부터 제가 사용하는 ‘진화론적 존재로서의 인간’라는 표현은 ‘자체적인 모순을 담지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쉽사리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로, ‘진화론적 인간의 질을 띤 성도’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뜻을 자각하고 그 지향하는 바를 추구한다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삶의 온갖 불완전한 실제들을 유발하는 존재’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진화론의 기본적 아이디어를 생활 주변의 사례와 관련지어 쉽게 비유한 데 따르면, 마치 “시발 자동차→피아트→르망→소나타”라는 단계적 상승 곡선의 흐름으로 발전, 진보되어 온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김학현(2005). 다윈이 들려주는 진화론 이야기. 서울 : 자음과모음. pp.71-74.)
(생물학적 진화론의 기본아이디어가 인문사회 전반 분야로 파급된 복잡다단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합니다.)
어쨌든 이러한 상승 곡선으로 그려지는 발전적 흐름을 기본 입장으로 삼는 진화론 내지는 발전론은 진화의 주축으로 내세워진 개체들의 집단인 ‘개체군’ 자체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었지, 그  단위의 진화과정에서 소모되는 닫힌 체계에 대한 파장 - 오염과 무질서의 증가 - 은 전혀 무시하고 있습니다. 즉, 심각한 자체적 모순을 안고 있지요. 그런데 이러한 자체적인 모순을 띤 진화론적 아이디어를 성도라는 실존의 ‘질’과 관련짓는 이유는, 성도라는 실존을 개체 수준 및 교회라는 집단의 수준에서 그 진화론적 인간상으로서의 자체적 모순성을 각각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교회의 ‘역사성’에는 인간들 - 제 개인적으로는 아담들 내지는 가인들이라 명명하고 싶습니다 - 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행위(실천) 관련 프로그램들을 탄탄한 구색거리들로서 갖추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정도입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 2-3)

위와 같이 에베소 교회로 대표되는 교회의 책무성 실천 사례는 지상의 모든 교회 간판 달린 곳들의 귀감이 될 정도입니다.

이제부터 잠시 동안 제가 겪었던 실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 남자가 배고픈 1970~80년대 어느 시골의 작은 교회를 떠맡았습니다. 낙타무릎까진 아니었지만 새벽마다, 깊은 밤도 마다하지 않고 식을 줄 모르는 그의 열정적인 부르짖음은 결국 1990년대 초엽에 들어서야 결실(?)을 맺게 되어 수천 명의 교인들이 운집하는 도농 복합적 대형교회로 성장(?)하는 부흥(?)을 일구어 내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배고팠던 시절, 몇 안 되는 모든 교인들이 이렇다 할 양념도 없는 그의 설교를 중심으로 하여, 볼 것이라고는 성경책 외에는 없이, 점심때에는 모두가 한마음으로 옹기종기 모여앉아 양푼이에 끓여 먹었던 소면국수가 그 당시를 회상하는 이들에게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중소도시형 대교회를 일궈놓은 그 남성은 어느새 적절하게 머리가 벗겨지고 그간의 인생 역정, 젊은 날에 대한 고진감래의 상징인듯한 볼록한 배를 지닌 채, 급기야 자기 교회가 속한 교단의 총회장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퇴임을 1년여 남겨 놓고 호적나이가 1년 어리다는 이유를 비롯, 갖가지 크고 작은 잡음들이 섞여 후임 청빙 과정에서 그 교회는 수년 동안 내부적 분란의 진통을 겪고서는 이제, 젊은 피로 수혈된 21세기를 주도해 가는 미래형 교회로 다시금 발돋움해 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 ‘젊은 피’ 목사는 지난날 배고팠던 시절 그의 선배들이 신학적 자존심을 지켜가며 거부했던 바, 물 건너가도 벌써 건너간 로버트 슐러씨의 적극적 사고방식과 조용기씨의 축복론까지 끌어들여 강단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수년 전, 제임스왕 성경에 미친 어떤 사람이 “완벽한 교회는 없는가?”라는 자기 책에서 자기 논리대로 외쳤건만 이 한국 땅에, 이 지구 곳곳에 그간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실행하고자’ 애쓴다고 자부해온 많은 교회들이 있어 왔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방금 언급한 어느 시골 교회의 변화과정을 몸소 지켜봐옴과 동시에, 교리를 달리하고, 신학을 달리하고, 교회제도를 달리하는 - 제도가 다르다는 것은 수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 제도에 몸담고 있는 개체로서의 교인이 지니는 책무도 눈에 보이는 현실에 따라 사뭇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을 포함함 - 여러 교회들을 제법(!) 경험해 봤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책자를 통해서, 또 그들의 일시적 집회들과 그들의 일상적 교회 생활에 참여해 봄으로써 말입니다.
경상도 어르신들의 의미심장한 경구들 가운데 하나가 “통시 - ‘화장실’을 뜻하는 경상도 남부 사투리 - 다른데 없더래이”인데요. 이 경구는 참으로, 얼마 되지 않는 나이에 위와 같은 경험들을 거쳐 본 제가 깨닫게 된 결론의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었습니다. 지난날의 모든 경험을 뒤로 한 채, 다시금 저를 맞이해 준 것이 고향의 품과도 같았던, 앞서 언급한 그 시골 교회였고, 또 활기는 없고 명맥만 남았지만 그나마 가장 중도적이고, 건전하며 성경에 근접했다는 칼빈주의 신학과 교리였지요.
제가 살고 있는 고장의 시내를 가로 지르는 큰 개천이 하나 있는데 간혹 그 곁을 지날 때면 고여 있거나 잔잔히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대기로 휘저으며 장난을 치는 몇몇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건드리지 않을 때 그저 자기 갈 길을 따라 맑게 흘러가는 듯 보이던 그 물은 막대기를 쑤셔넣어 휘젓자마자 어느새 바닥에 쌓여있던 시궁창의 그것과도 같은 찌꺼기가 솟아오르며 순식간에 더러운 물로 변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수년전 어느 기독교계 엘리트 여성이 비어 있는 총리 자리를 두고서 국회 청문회 조사과정을 거치며 은닉해 두었던 부동산과 자녀 병역회피 의혹 등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차라리 흘러가게 놔두지...왜 막대기로 쑤시고 그래...”라며 혼잣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현상이 수년전 제가 다니는 그 시골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 재단 운영 비리 문제로 인해 똑같이 일어나더군요.
타교단으로부터 지난날 율법주의적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을 정도로 가장 보수적이라고 이름난 교단도 막대기로 쑤셔서 휘저어 보니 별수 없던 것입니다. 가장 성경적이며(?) 건전하고, 합리적이고, 이상적이며 민주적인 제도를 고안하여 제네바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하고 추방하는 살벌한 - 완곡하게 표현해서 ‘엄격한’ - 실험과정을 거쳐 수백 년 동안  시행해 봤지만, 개혁은 웃기는 소리고, ‘“통시 다른 데 없더래이”라는 시골 어른들의 일상적인 경구가 역시 맞구나’라고 다시금 탄식하게 만들어준 이유는, 그 개혁주의자들의 아이디어나 제도 자체에 중대한 결함이 있어 보여서가 아니라, 그 세련되고 정교화된 제도의 구성원이 다름 아닌 ‘진화론적 인간상의 질을 띤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적 아이디어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즉,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책무 규정, 제도 등과 관련하여 최적의 아이디어를 고안해 낼 수는 있지만 정작 참여하는 인간 자체에 결함이 있음을 간과한다는 원초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라고 말이지요.

‘진화론적 인간상’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앞서 진화론의 기본 아이디어를 언급했는데, 그것을 이 글의 논지의 주된 요소 중의 하나인 ‘성도’라는 실존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성도는 개혁을 정당하게(?) 꿈꾸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사도들의 권면에 부응하는 입장에서 실천해나가며, 복음적으로 건전한 교회를 일구어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성경적이라고 판단되지만, 그 와중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한마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이 성도 자신이 영위해 오던 신앙 생활의 실제가 아니라 거품이요 허상일 뿐이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에베소교회는 칭찬과 꾸중이 함께 주어졌다고 봅니다만, 실상은 그게 아니라 그 꾸중 한 마디로 인해 앞서 언급된 칭찬(?)으로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무색해 진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글에서 사용하는 ‘진화론적 인간상의 질을 띤 성도’라는 실존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자기모순적 현상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성도가 낙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유컨대, 성도는 마치 가공될 때부터 치명적인 버그(결함)을 안고 있던 퍼스널 컴퓨터와도 같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컴퓨터가 자체적으로 결함을 지니고 있어도 자신의 브랜드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브랜드는 최고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체로서의 자신은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행실이라는 불완전한 실제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온전한 신분이라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관계가 그리스도 안, 곧 ‘십자가’라는 자유의 영역 안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신비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개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실천하고 나아가 합심 단결하여 성경에 언급된 바,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각종 권면들을 구현시켜 나가기만 하면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책무를 개별, 집단 수준에서 성취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유태교의 실천의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답습하는데 불과합니다.
십자가 안의 자유와 생명의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온 사도의 권면들은 인간들의 실천의식과 만남으로써 어느새 ‘의문(율법조항)’으로 작용하게 되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권면들 그 자체에 문제성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들의 의식에 결함이 있다는 앞서 언급한 내용을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의 복음을 접했다는 사람들에게서 ‘방종’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언급은 다음 세 가지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첫째, 그러한 ‘방종을 발견한 자’로서는 발견자 자신의 의식을 기준으로 믿음 있음, 없음을 판별해내고자 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그 발견자의 눈에 비쳐진 바, ‘방종’을 일삼는 그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앞서 언급한 고전 5:11 및 유사 구절들 참조).
셋째, 여지껏 이 글이 중요하게 다루어 온 논지에 따르면, 애초부터 ‘방종’과 ‘성도의 자유’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자 이유인지, 아니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인지 우리는 단정 짓기가 까다롭습니다. 아예 감별하려는 우리 내면의 시도부터가 교만이고,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지요.

앞서 언급했던바, 성도의 ‘질’을 거론하면서 차용한 ‘진화론적 인간상’이란, 발전 일로를 치닫는 듯 보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결함과 근원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인간상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상의 아이디어를 성도와 연관시켜 이해해 볼 수 있다고 한 것이 저의 논지의 일부였습니다.
성도는 권면으로서 주어진 각종 규범들에 대하여, 개인적 수준, 또는 교회적(집단적) 수준에서 나름대로 책무를 다함으로써 계 2:2-3(의 칭찬)에 근접해 가는 듯 보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오히려 복음에서 멀어지는 모순을 안고 있을 가능성(계 2:4의 꾸중과 경고)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감히 “어디까지나 나는 빌라델비아 교인이고, 우리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혹은 “나는 어디까지나 빌라델비아 교인이 되고 싶은 것이고, 우리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도 같은 위상을 추구해 가고 싶을 따름인데 왜 불만이야!”라고 반발한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다”라는 말 자체가 주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에 불만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수년 간 이곳 십자가마을과 더불어 개혁노회에 속한 여러 교회들을 둘러봐왔지만, 한 번도 위와 같은 단정어린 말투를 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분은 어디까지나 ‘회개’라는 것은 에베소 교회의 회개 제목과 같은 사안이 발생할 때에만 국한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중에 그 어느 누구도 ‘늘 에베소 교회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늘 빌라델비아 교회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본 입장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은혜 아래에서 자유하는 인간’이라면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말인데, ‘감사’라는 것은 자기가 잘 나고 떳떳함이 있다면, 굳이 상대적으로 표현하자면 회개할 것보다 회개하지 않음이 더 많다고 느껴진다면 나올 리가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자유’를 누림보다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방종을 일삼아선 안됨’에 마음이 더 이끌리시거든 차라리 앞서 언급한 ‘교회의 역사성’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셔서 온갖 ‘방종 금지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는 기성교회 속에 파묻혀 맘 편히 그 속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게 가장 손쉽고, 잡다한 고민들을 일소시킬 수 있는 최적의 선택입니다.
그 기성 교회들에는 진정한(?) 헌신을 목적으로 한 헌금, 예배, 봉사, 선교, 구제, 좋은 부모되기 훈련과정, 요즘 각광받는 어린이 영어예배, 전투경찰대 위문 등을 통한 지역 사회 섬기기 코스, 경로대학, 제자 훈련, 청지기 훈련, 성전 건축 또는 리모델링, 보다 큰 비전성취를 위한 각종 투자창구 등 온갖 구색거리들이 갖춰져 있으니까요. 그러한 다양한 흐름 속에 자신을 내맡기고 투자한 만큼 봉사와 헌신의 희열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굳이 십자가가 올려다 보이는 개혁노회 주변에서 얼쩡거리다가 인생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낮은데서 봉사하기 시작했다가 ‘시간의 흐름’ - 아담세계의 기본적인 원리로서 인간은 그 시간 의식 속에서 자기 노동에 가치를 부여한다 - 속에서 보다 큰 책무, 이른 바 갈수록 중직자로서의 경험과 경륜 쌓기 차원에서 보다 큰 봉사 실적도 쌓아 올림으로써 - 예컨대, 장로가 되기 위해서 1인당 1000여 만원씩 기부해서 10명의 신참 장로들이 1억 2천여 만원짜리 파이프 오르간을 봉헌한다든가 - 그럴 능력 안 될 정도로 사업 안 되면 장로 후보로 나서지 말 것을 10대들도 듣는 마당에 오전 예배 설교 후 광고 시간을 통해 버젓이 알린다든가 -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희생(?)의 더 큰 희열을 맛보아 나가게 될테니까요. 교회 리모델링에 기본 500만원 작정 헌금해야만 안수집사, 권사될 수 있다는 말을 두고서, 권사, 안수집사 되었으니 500만원 작정헌금 하세요 라고 바꾸어 말할 줄 아는 ‘센스’가 마치 실정법의 강제성 그 이상으로 작용하는 그런 곳에서 말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기성 교회의 치부를 드러낸다고 나무라진 마십시오. 현실을 알아야 제대로 된(?) 봉사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겠습니까. 자기 자리 모르고 파고드는 것은 주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어리석음이 아니겠습니까. 주님도 좋고 나도 보람을 느끼는 그런 헌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저는 지금 반어법으로써 현실에 대하여 응수하고 있답니다).

문제는, 이런 교회도 처음에는, 그리고 지금도 겉으로는, 그런 더러운 울타리 속에 가두어진 교인들에게 성경을 펼치면 눈에 띄는 각양 그리스도인들의 순수한(?) 책무 이행을 강조하니까요. 그들이 실행하는 더러운 제도들의 울타리와 개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책무이행에의 촉구가 어색한 결합을 이루어내지 않으면 이 이상한 교회들은 즉시로 그 존재의 기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지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주님의 말씀과 더불어, 저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에이, 그대가 말한 그런 사례는 예로부터 비일비재했고, 이 지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성경적이고도 건전한 교회들이 있음에 대하여 그저 정로에서 벗어난 일부 사례일 뿐이야...”라면서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책무를 강조하고 실천해내는 제대로 된(?) 교회들을 찾아 헤매겠지만, 그러한 방랑이야말로 방종의 일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도소를 보면 교도소 밖의 인간들이 잠재적인 범죄자들이요, 병원에 가보면 병원 밖의 인간들이 잠재적인 환자들이요, 장례식장에 가보면 장례식장 밖의 인간들이 잠재적인 송장들이라는 것을 일시적, 간접적이지만, 새삼 절감하게 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순수한 분위기, 성경적인 동기, 소박한 일상의 모습으로 점철된 작은 교회들도 시작은 그러하였지만, 잠재적인 ‘도둑들의 소굴’ 내지는 ‘인간들의 종교 놀이마당’일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면 개혁노회에 속한 교회에 정작 너의 몸뚱이를 출석시키지 않는 너 - 이 글을 쓴 이 - 는 뭐하는 놈이냐고 물으신다면, 사보나롤라 - 자기 나름대로 소신을 갖고 자기 주변을 개혁한답시고 자기가 속한 교파를 박차고 나오지 않다가 결국은 그 속에서 화형당한 - 의 후예를 사칭 - 이 ‘사칭’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제 개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복음에 관심 있지, 개혁에 관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 하는 놈이라 보시면 됩니다. 또는, 이근호가 키운 개혁노회 아닌 다른 우리 - 기성 교회 - 속의 호랑이(?) - 마땅한 표현이 없어서... - 새끼로 보시면 됩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권면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책무의 당위성을 논하는 순진무구한 짓을 일삼고 있지만(!), 우리 속에는 꿈틀거리는 ‘진화론적 인간상 - 건전함, 변화, 개혁, 실천, 완성, 조화, 발전, 향상을 도모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고 자체적인 퇴보와 주변에 대한 폐해만 일삼는 아담적 인간상 - 의 질을 띤 근성’은 우리로 하여금 결코 현실적으로 개인 수준 또는 교회 수준에서의 그러한 이상적이고도, 성경적이며, 복음적인 책무를 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저의 이러한 논지가 틀렸다면, 인간은 온전한 존재라서 ‘은혜’가 비집고 들어올 틈새가 처음부터 없었을 뿐더러,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실 필요조차 없었겠지요.

십자가의 복음을 알게 된 이후로 방종을 일삼는 모습들을 많이 봐왔다고 말씀하시는 분께 정중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만약 개혁노회 소속교인이시라면 그 입 조용히 다무시고 기성 교회로 옮겨가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만약 기성 교인이시라면 이곳에서 더 이상 이러쿵 저러쿵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기서(소속된 기성 교회에서) 열심히 ‘방종하지 않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개혁 노회에 소속된 교회 성도분들이시면서 헌금, 출석 등에 인색하셨던 분들이 계신다면 마음 고쳐 드시고 앞으로는 열심히 헌금, 출석하실 것을 아울러 당부 드립니다. 즉, 여기서(개혁 노회 교회들에서) 마음껏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방금 한 저의 사뭇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은, 마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바, “유태인 수용소 건물 한 동의 기초가 부실하다”며 반 이상 올라간 그 건물의 기초부터 다시 지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여성 건축 감독을 그 자리에서 쏴죽이고 나서, 그 죽은 여인의 말대로 기초부터 다시 쌓으라고 지시하는 수용소장 ‘괴트’의 발언처럼 들릴 것입니다. 왜 제가 이런 의아스런 방식으로 말씀 드렸는지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종교인들이 온갖 구색 갖춰놓고 교회 행세하는 것이랑, 성도들이 교회에서 헌금, 예배, 구제, 봉사하는 것이랑 본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온갖 권면들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성도 - 혹은 ‘믿음 있음’ - 인가? 반대로, 성도라고 해서 반드시 온갖 것들을 제대로 실천해 나가던가?” 라는 논지와 같습니다.

앞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더러 감히 빌라델비아 교회만 되고, 에베소 교회 아니라고 말 못한다고 말해 놓고서, 지금에 와서는 정작 개혁노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인 것처럼 옹호하면서, 기성교회를 형편없이(에베소 교회처럼) 치부하는 저의 발언이 모순적이라고 나무라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이른바 ‘성도’라는 ‘진화론적 인간상’이 어른어리는 모순적 존재인가 봅니다. 내뱉는 소리의 한쪽 귀퉁이마저도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저 또한, 성경적인 것 - 사도들의 권면들이 지시하는 바 - 을 추구하지만, 온전히 행하지는 못하여 또 다른 성경적인 것 - 절대적 십자가 은혜 - 만을 사모하는 모순적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