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고전 1장 1-3(참된 교회)1407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장 1절에서 3절까지 입니다. 신약성경 261페이지입니다.
고린도전서 1:1-3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여기 교회라는 말이 나와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교회가 일치되는 교회인지를 우리가 판단할 수도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되겠지요. 그런데 여기 성경에 분명히 교회라고 나와 있는 걸로 봐서 성경에 나와 있는 교회와 세상에 나와 있는 교회, 그 중에 우리 교회도 포함시켜서, 반드시 우리교회도 포함시켜서 이것이 과연 교회인지를 파악하고 제대로 된 교회인지 관심을 갖는 그 사람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자기가 소속된 것을 정당하다가 일방적으로 우기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것이 그 전에 믿던 유대교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유대인들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이것은 유대교에요. 이것은 일반인들이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가 들어가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라는 분이 이 땅에 와서 하셨던 모든 일에 견주어 볼 때 진짜 하나님이냐 아니냐가 판정이 난다는 기준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리스도 예수님이.
그리고 그 그리스도 예수님이 기존에 있던 하나님 믿는다는 모든 것들을 전부 다 거짓것으로 드러냈거든요. 그들이 일부러 거짓말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기껏 생각해 낸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보내신 그 예수님하고 비교를 해 보니까 이것이 거짓인 것이 판정이 난 거예요. 그들이 성질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일부러 예수님을 나쁘게 해서가 아니라 로마서 3장에 의하게 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모두 죄인이거든요.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잘못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죄인인 줄 모르고 죄인이면서 의인행세를 한 그것이 가장 큰 오류였습니다.
죄인이면서도 의인행세를 하면서 의인이기에 받아야 되는 모든 혜택을 받아야 되겠다고 항상 그런 쪽으로 하나님을 대했던 겁니다. “하나님, 이만하면 복 받겠습니까? 이만하면 구원받겠습니까? 제가 이 정도 드리면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해 주시겠습니까? 이 정도 기도 열심히 하고 통성기도 하고 중보기도 하면 저의 액운을 제거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자꾸 자기를 의인 편에 놓으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뭘 달라고 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있단 말인가, 이렇게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그런 소리 하는 너나 죽어라.” 하고 없애버린 거예요. 없애버렸다고 손 털고 일이 끝난 줄 알았지요. 무덤 열고 사흘 만에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눌러도 튀어나온 거예요.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르고 있습니다. 누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죄인이면서도 죄인이 아니고 의인으로 행세하면서 의인이 받아야 될 혜택과 장래에 대한 모든 보상은 자기가 챙기겠다는 그 의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주 근본적으로 죄인 되게 하는 십자가를 외면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떻게 헌신하면 의인되겠습니까?” 그런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 쪽으로 나간 사람들이 모여서 뭘 만들어놓고는, 성경에 나오는 용어인 교회라는 용어를 간판으로 붙여버린 겁니다. 고린도전서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그게 진짜인 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서가 왜 있습니까?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모든 것을 혼돈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중심으로 정리정돈하기 위해서입니다. 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정리정돈 하는데 그 정돈되어야 할 대상중 하나가 바로 우리의 영혼까지 확장이 돼요.
괜찮은 교회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괜찮은 교회에 등록해 봤자 내 영혼이 안 괜찮으면 미꾸라지 하나 들어와서 온 훼방질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 교회 짧은 역사지만 얼마나 많았습니까? 본인이 미꾸라지라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도 미꾸라지고.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미꾸라지라는 것을 아니까 괜찮은데 자기가 미꾸라지 아니라고 하니까 문제가 더 커지는 거예요. 우리가 미꾸라지고 남들을 힘들게 하고 피해 입히는 존재에 불과함을 알기에 다 같이 그리스도 십자가만 바라보면 끝, 문제가 없는데 이상적인 교회를 찾아 나온다면 애초부터 그것은 본인이 이상적인 교회를 찾을만한 권리나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는 셈이 되는데 그것은 복음에 자기를 비춰보지 않아서 그래요.
제가 광주에서 강의하면서 성경은 전신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거울은 거울인데 전신거울이다. 전신거울을 갖고 다니는 사람은 없잖아요. 늘 비춰보는 겁니다. 작은 거울은 갖고 다니면서 이렇게 부분적으로 비춰보지만 큰 거울은 갖고 다니지 못하잖아요. 늘 비춰봐야 돼요. 성경말씀은 우리가 외면할 수가 없어요. 자신을 늘 비춰봐야 됩니다. 내 영혼이 정돈되었는지 엉만진창인지. 죄인이면서도 반드시 이 정도의 복은 받아 챙길 자격자가 된다고 우쭐대는지, 늘 생각해 줘야 돼요.
어떤 목사가 개척교회 하는데 처음에 교인 열 명 나왔다 이 말이지요. 날이면 갈수록 줄어서 나중에 자기식구만 남을 때 그래도 한결같은 마음이 생길까요? “주여,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실까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의 어떤 목사는 낙도에 가서 주의 말씀대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복음 전한다고, 남들이 돌보지 않는 소외된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그것이 주의 정신이라고 거기서 고구마 농사도 짓고 남에게 나눠줘 가면서 헌신적으로 했어요. 여상 졸업하고 서울에 취직한 딸이 오랜만에 아버지 만나러 왔다가 바다에 나갔다가 빠져 죽어버렸단 말이지요.
그 목사가 딸애가 신었던 장화를 제단에 집어던지면서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나보고 뭘 어쩌라고! 더 이상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하나밖에 없는 내 딸을 죽입니까? 이렇게 헌신 했으면 주께서 도시로 빼주든지 하지 나보고 더 이상 어찌하란 말입니까?” 그 목사는 성경의 기본을 몰랐어요. 내가 죄인 되었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추가적인 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비게이션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항상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요.
“속도를 줄이세요. 속도를 줄이세요.”
잔소리가 얼마나 심한지 항상 처음이에요.
새 차를 타도 내비게이션은 한결같아요.
“속도를 줄이세요. 속도를 줄이세요.”
그리고 노선에서 이탈하면 화도 안내요. 그게 더 미워.
“유턴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자기 코스를 이탈하지 않는 것이 내비게이션의 특징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나서 얼마나 뛰어나게 되고 발전하고 영적으로 얼마나 대단한지 자부심을 느끼지만 주님께서는 일체 보지 않습니다. 항상 주님의 자리는 따로 있어요. 죄인의 자리에 있을 경우에만 전신거울안의 십자가만 보이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복음 좀 안다고, 교회 괜찮은 교회라고 갑자기 우쭐대면 다시 십자가 내비게이션이 작동합니다. “속도를 줄이세요. 속도를 줄이세요. 그 노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생 가는 길 아닙니다. 그것은 지옥 가는 길입니다. 이쪽으로 돌리세요.”
화도 내지 않고 냉정하게 말씀은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고린도전서를 보세요. 고린도전서를 보게 되면 교회상이 전신거울처럼 보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어째서? 고린도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것이 교회의 견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고린도교회가 사도한테 그야말로 내비게이션 이상의 잔소리로 굉장히 얻어맞게 됩니다. 사도가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이거예요. 현실 배후에서 작용하는 영적인 힘을 너는 왜 보여주지 못하느냐, 그걸 가지고 지적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래서 교회다. 여기에 왜 멈추느냐 그 말입니다. 사람들이 몇 명 모였다. 그것이 교회다. 거기에 멈추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네들 모임 중심인 것을 배후에 있는 십자가 영적인 힘이 부각하고 돌출되도록 미는 힘, 그 미는 힘에 대해서 목소리를 줄여버리고 그걸 외치지 않으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닌 거지요.
보자기 하나 걸쳐놓을 때 남들이 보면 그냥 편편한 보자기로 보이지요.
보자기 뒤에서 주먹질을 해서밀어내면 보자기가 주먹의 모양새를 하면서 툭 튀어나올 때
그 보자기가 다가온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 갖잖아요.
배후에 어떤 사람의 주먹이 있다는 것을 감 잡는 것처럼
교회라 하는 것은 얇은 판막이에요.
얇은 판막이고 교회에서 불쑥 불쑥 튀어 나오는 것은 영적인 전쟁, 영적인 싸움,
사람이 자기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피 중심으로 하는 그 영적인 전쟁의 모양새가
교회라는 얇은 보자기 같은 판막이를 통해서 늘 그 현상과 변화를 보여줄 때
그게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사기 당해도 고소하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차리라 속고 사는 것이 낫다고요. 정말 이런 말씀은 어려워요. 예수님도 어려운 말씀을 했잖아요. 누가 돈을 꾸고자 하거든 그냥 주라고? 이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돈을 빌리거든 이자 받지 말고 그냥 주라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살겠어요? 장사 하겠어요? 말이 안 되지요.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나올 수 없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은 전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거든요. 자기가 의인행세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보내셔서 대표자들이 유대인이니까 유대인에게 보내셔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 하거든요. 그리고 죄인인 이유가 결국 예수님 자신이 당했던 희생적인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궁극적으로 밀어붙인 겁니다. “이래도 죄인이 아니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죄와 의와 구분되는 그 절개지, 절개 면을 내비게이션화 시켜서 그걸 시작점으로 보는 거예요. “거 봐. 네가 이런 행동을 하니까 너는 죄인이고 그러니까 네가 내 흘린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받아서 의인되는 거야. 의인되는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그 절개지에서 계속해서 영적인 요소가 나와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고린도교회는 보통 인간들이 내 놓을 수 있는 모든 죄는 다 내놔야 돼요. 전부 다 내놔야 된다고요. 문제는 그 절개지 만으로 구원이 되는가의 그 문제에 도달되게 되지요. <나니아연대기>라는 소설도 있고 영화도 나왔는데 2차 대전 때 친척집에 놀러갔던 아이들이 놀던 중에 옷장 안에 들어갔던 모양이지요. 옷장에 들어갔는데 그 장소가 바로 육적인 세계에서 신비의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공간이 된 겁니다. 나니아연대기 영화에 보면 초반부에 그 장면이 나와요. 애들이 그 영화보고 난 뒤에 촌에 있는 외가 집에 놀러가서 맨 날 옷장에 들어가는 거예요.
교회가 뭐냐 하면, 유일하게 옷장 같은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아무도 못 빠져 나오는 육의 세계에서 영적으로 통하는 그 장소가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대해서 이미 마귀가 알고 있기 때문에 마귀들이 진짜 통하는 교회 말고 유사한 가짜 교회를, 바로 성경말씀을 총동원해서 유사하게 모방을 시도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가짜 교회를 모방하는 그 정도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에요. 우리가 가짜교회를 안 만들면 되지요. 안만들 재주가 없다니까요? 모든 교회는 가짜교회입니다. 왜냐, 가짜교회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역량을 다해서 이웃을 구제하고 선교하고 교인 수많으면 예산 쪼개서 무려 교회 예산의 80퍼센트를 선교비로 내고 밥 퍼주고 온갖 것 다 해도 가짜교회에요. 목사가 퇴직금도 포기하고 월급도 안 받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는 그런 교회, 그런 교회가 있어요.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그런 교회가 있어요. 부산 해운대에 가면 “진리로 자유 하는 교회”라고 있습니다. 이름이 너무 길기 때문에 진자교회라고. 진짜교회라고 있는데 그 교회는 시도 때도 없이 교인들 불러다가 턱을 내는데 보통 턱이 아니지요. 같은 음식만 먹으면 질릴까 싶어서 메뉴 바꿔가면서 회 사줘, 피자 사줘, 목사님이 교인들 점심대접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워낙 잘 버니까. 누가? 목사님 사모님이. 물론 목사님도 잘 벌고. 그러면 그 교회 진짜 교회입니까? 아니에요. 진짜 교회는 터널을 저쪽에서 뚫어줘야 돼요. 영 쪽에서 터널을 뚫어줘야 되지 이쪽에서 뚫어서는 항상 주님이 친히 만드시는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 이쪽의 터널을 수시로 막아 버립니다. 인간 쪽에서 행해서 인간의 지혜를 끄집어내서 만드는 교회를 의도적으로 가짜 교회 만들어서 ‘아하, 우리가 다니는 교회가 가짜구나.’라고 알게 하는 그 순간, 그 사건 속에서 터진, 창호지 찢어지는 것처럼 찢어지는 그 창호지를 통해서 비로소 진짜 교회가 바람이 솔솔 불듯이 나오는 거지요.
여러분들이 세르반테스라는 작가가 지은 <돈키호테>라는 소설을 들어본 적이 있지요. 읽어보셨느냐고 묻지는 않습니다. 그 책에 보면 풍차가 적인지 알고 늙어빠진 기사가 기사무장을 하고 풍차를 향해 돌진합니다. 풍차를 이길 수가 있습니까? 왜 인간은 풍차를 못 이길까요? 풍차는 바람에 의해서 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풍차만 그런 것 같아요? 아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돈키호테 행세하면 안 됩니다. 성령께서 바람같이 유지시켜 주는 교회를 인간이 제직회 한다고 바른 교회 되는 것 아닙니다.
한 달 전에 제 1회 복음 컨퍼런스를 분당에 있는 장안교회라는 데서 한다고 강사로 초청을 했어요. 하루 만에 <복음과 역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써서 보냈어요. 차표 예매까지 다 해놓았는데 그쪽 교회가 교사들 중심으로 운영한다는 이상형교회를 주장하는 모양이라. 목사는 가르치기만 하고 여러분이 알아서 하세요, 라는 식으로 해서 커진 모양입니다. 그 교사들이 십자가마을 사이트에 들어와서 그 교회 담임인 박 용기 목사의 주장에 대해서 이 근호 목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글이 있는데 그걸 다 조사를 한 모양이에요.
질문 답변 굉장히 많거든요. 너무 많아서 나도 보기 짜증나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부지런하기도 하여라. 박용기 목사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을 저들이 다 조사해 보고 그걸 복사해서 박용기 목사에게 알려주면서 “이런 강사를 어떻게 초빙할 수 있습니까?”라고 고해바친 모양이에요. 그걸 주선했던 김성환 목사님이 그럴 줄을 미리 알고 “이번 모임은 복음만 이야기합시다. 다른 것 하지 말고, 어느 교회가 이익이니 손해니 그런 계산도 하지 말고 진짜 복음이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그것만 생각합시다.” 했어요. 그랬더니 그 쪽에서 하는 말이 “그렇다면 우리하고 취지가 똑같네요. 진리만 생각하고 복음만 생각합니다.”라고 했는데 뒷조사 다 해놓고 박용기 목사에 대해서 비판했다고 해서 “이것은 집회 마치고 난 뒤에 우리 교회에 좋지 않은 기류가 흐를 수 있다.” 해서 취소가 되고 말았어요. 그 소리 듣고 제 아내는 너무 좋아가지고 막 얼굴이 펴졌어요. 저도 그럴 줄 알았거든요.
광주의 어떤 집사님이 말하기를 이 근호 목사를 강사로 모신다는 것은 자해행위와 같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보세요. 박용기 목사가 뭐냐 하면, 죄인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거예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바람이 그 사람 안에 통하는 겁니다. 확 통하는 거예요. 자기의 영혼이 찢어지면서 엉망진창인 영혼이 피 중심, 십자가중심의 하늘나라 질서가 그 찢어진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안정이 돼요. ‘아, 내가 죄인인데 자꾸 의인이 받아야 될 혜택을 받으려고 했구나.’ 이게 기본이잖아요. 그리고 그들도 그걸 안다고 우겼던 자들입니다.
그러데 그 아는 것은 지식으로 알고 역사적으로 알지요. 실제로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 말씀, 이 복음이 사태를 일으키고 사건을 일으킨다는 사실, 그것도 나를 향해서, 우리교회를 향하여 일으킨다는 사실을 그들은 깜빡 한 거예요. ‘설마 그럴 리 없다. 우리는 완벽한 교회니까.’ 입장을 바꿔서, 역지사지라 하지요, 입장을 바꿔서 우리 교회에 어떤 모임이 있는데 집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 이근호 목사를 못 잡아 죽여서 안달난 인간이 있는데 한 번 보셔서 강의를 들읍시다, 하면 오케이에요. 왜, 저는 죄인이니까.
단 조건이 있어요. 그렇게 해놓고 자기 말만 하지 말고 거기에 대해서 조목조목 말씀에 대해서 맞는지를 자기도 들어줘야 돼요. 그러면 그 순간은 너 잘났다, 나 잘났다, 우리교회 잘났다, 너희 교회 잘났다, 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다시 한 번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순간적 사건의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 사건의 현장을 하나님께서는 풍차 도는 바람처럼 늘 상 매일 같이 집어넣는 거예요. 왜 그래야 하는가? 그게 내비게이션의 역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시작이에요. 항상 시작의 반복입니다.
돌아서면 엉망진창, 다시 복음 들으면 주제파악. 주제파악 했다고 구원받았다고 외치는 그 순간에 엉망진창. 바람은 한 번 불으면 안 되잖아요. 늘 불어야 되잖아요. 늘 불어서 교회는 주님이 주인이고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주님이 만든 교회는 따로 있지 우리가 챙긴 교회를 교회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는 것, 도리어 우리가 챙긴 교회는 늘 살아계신 주님의 교회에서 지적 질을 당해야 되고 지적을 받는 가운데서 교회 아닌 것을 통해서 교회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통로고 현장이 된다는 사실을 오히려 감사해야 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보자기가 여기 있는데 그 보자기는 얇은 보자기에요. 이게 고린도교회고 오늘날 우리교회입니다. 이걸 교회라 하면 안돼요. 그것은 얇은 판막이고 뒤에서 피 중심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주님의 안목이 이걸 치게 되면 잘났던 우리가 죄인으로 돌변하고 교인들끼리 돈 거래하다가 사기당해서 “이 교회는 사기꾼만 있나.” 하고 삐져서 나갈 때 그게 바로 평소에 복음듣기 위해서 온 게 아니고 자기 잘난 맛에 살기 위해서 온 것임이 들통 나면서 자존심이 깨지는 순간을 다 같이 경험하고 체험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 좀 나오세요. 집에 있으나 여기 오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집에 있으면 자칫하면 잘난 존재가 되어버려요. 여기 우리교회 오셔서 아무도 왔다 소리도 안하고 관심도 안 가져주고 점심 먹으라는 소리도 하나도 없을 때 그런 서러움을 한 번 당해봐야 돼요. 이야기가 이상하게 되어 갑니다만. 나야말로 괜찮은 인간인데 우리교회 와서 인간취급 못 받는다는 그런 경험을 당해봐야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20절, 이걸 제가 마지막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마지막까지 못가겠어요. 논리가 힘들어서 먼저 해야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0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사람은 죄인입니다. 정리합시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주님만 의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안할래, 가 아니라 죄인인 것 맞는데 죄인을 불러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통로, 파이프로 사용되는 그 대상을 가지고 진짜 교회라고 해요. 그래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할 때 그 주님이 보낸 자가 잘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여튼 복음, 복음 해서 잘 가다가 끝에 가서 다 가짜로 드러나는 이유가 복음을 안다고 해서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복음을 안다고 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수입과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로 잔소리를 많이 듣고 지적질을 많이 당해야 돼요. 왜냐하면 지적질을 많이 당할수록 그 입에서는 오직 예수님만 토해지고 고백되어지기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능이 더 중요한 거예요. 말씀의 기능. 나를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한 것이 되려면 얼마나 우리가 평소에 얇아야 되겠어요? 습자지보다 더 얇아야 돼요.
옛날에 나오던 카라멜에 덮였던 먹는 습자지 있잖아요. 그것보다 더 얇아야 돼요. 햇빛에 비추면 다 비출 정도에요. 있어도 없는 존재가 돼야 돼요. 사도가 늘 이야기했던 겁니다. 나는 있어도 없는 존재라고. 얇아지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다다미돌 위에 놓고 쳐야 되거든요. 옛날에 어머니하고 할머니하고 두 분이 살림 도맡아서 했어요. 일하시는 할머니도 있었지요. 세분이 이불 홑청 풀 먹인 것 두드립니다. 처음에는 각자 두드리지만 공명현상에 의해서 가락이 맞아요. 그게 얇게 뜨인다고요. 음식도 두드려서 요리하는 게 있잖아요. 하얀 뿌리 종류, 그게 두드려서 다 갈기갈기 찢어져야 되는 겁니다.
찢어질 때 먹는 사람은 뭐라 합니까? “야 참 맛있다.” 하지요. 얼마나 찢어졌으면 자기의 겉 맛이 안 나오고 다 찢어져야 나오는 그 속맛이 나오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속에 자신의 십자가 피를 담아두시고 그 십자가 피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외부는 찢어져야 되는 겁니다. 마리아 마르다는 자기 오빠가 죽었어요. 열두 사도들과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보세요. 예수님 만나고 나서 가족이고 뭐고 다 찢어졌어요. 잠시 생각이 안 나네요. 그 하얀 거 뿌리로 하는 음식, 아 더덕이지요. 그걸 두드려야 진짜 맛이 제대로 나오잖아요.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가지고 팹니다. 늘 패는데 팰 때 “너는 너 때문에 사느냐? 아니면 너 말고 다른 분에 의해서 살아가느냐?”를 늘 확인시키거든요. 늘 두드려야 돼요. 우리는 얻어맞는 재미로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이게 옷장이 돼요. 나니아 연대기처럼 주님과 통하는 옷장이 된다고요. 나를 그냥 보내지 않고 두드려 패서 인생을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요. 요새는 청바지도 일부러 찢어서 입는 사람이 있던데 걸레같이 찢어서 세상에 보내서 “너를 영접하는 자는 곧 나를 영접함이라.” 그렇게 일치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그쪽으로 자신의 삶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된 통으로 늘 얻어맞으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숨겨져 있는 하나님 뜻이에요. 아까 그 장안교회 이야기 계속해 봅시다. 그 청년들이 십자가마을사이트에 있는 질문 답변 코너에 있는 이근호 목사의 글을 죽 보고 그들이 내린 평이 있어요. 김성환 목사가 전하는 말이 “이근호 목사의 문제점이 뭡니까?”라고 하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우상이라고 했다.” 그거였어요. 와 도사네.
바로 그거였던 거예요. 인간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바로 우상인 것을, 이방인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바로 우상인 것을, 바로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던 거예요. 모든 것은 그것부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사람한테 더덕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그 분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찢어진 그 인생, 걸레조각 같은 그런 인생은 싫고 멋있고 대단한, 너구리 라면처럼 통통하게 살쪄 있는 그런 괜찮은 인간이 되고 싶은 이유는 자기가 의인이기에 이만한 혜택을 품고 있다고 자랑 질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자체가 내면적으로 종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어요. 그렇게 잘 난체, 50대에 잘난 나, 60대에 잘난 나, 70대에도 역시 잘난 나, 70중반이 넘은 신성일이 사는 것 보세요. 얼마나 멋있고 복근 나옵니까? 70넘어서 70대 중반 넘어가는 유병언씨도 보세요. 집회 하면서 체조까지 하면서 이렇게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저희들 말로 하기수양회 하는데 그런 것 하면서 동영상 찍어대는 거예요. 저도 십자가마을 수련회 할 때 앉았다 벌떡 일어나는 것 해 볼까요? 그거 하다가 엎어지고 우세한번 당해 볼까요? 똥배 한 번 내 밀어 볼까요? 그렇게 70이 넘어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거예요. 80대 되었는데 자기 잘난 맛이 자기가 보기에도 좀 미안하거든요. 그 때는 입 다물고 있습니다. 90대 되었다?
얼마 전에 우리 어머니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 와 이래 되었노?” 야, 참 복음적이다. 내가 왜 이리 되었노? 정말 제가 할 소리를 먼저 하셨어요. 그 소리를 80이 되어서 하지 말고 60대에 하자는 말이지요.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제가 지난 주일에 설교한 것처럼 “이렇게 된 인간인데 저를 구원한다는 것은 저한테서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명단이 잘못된 것 아닙니까? 지금 다른 사람 명단을 착각한 것이 아닌지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구원을 받아요? 주여!” 이렇게 해야 돼요. 꼭 80넘어 90 되어서 그렇게 하지 말고.
인간은 성경말씀대로 의인은 없나니 그냥 죄인입니다. 죄인은 그냥 말로만 아니고 우리 인생에다가 그것을 삽입시켜 놓았어요. 너는 종말을 이동시키고 전달하고 전달하는 종말의 매개체로서 하나님께서 이미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놓은 겁니다. 살아가면서 아무리 꾸미고 발라도 사람은 늙고 병듭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사도 아니고 우리가 의도한 바도 아닌데 판막이 같은 우리를 가지고 외부에 있는 영적인 전쟁의 여파가 우리에게 닥쳐서 지금 그걸 온 몸으로 받아서 표출해 내고 발산하고 있는 겁니다. 인생이란 그런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찾느냐 하면, “잘난 하나님이여, 이 잘난 나와 거래합시다.” 그것 때문에 교회 만들고 흥정하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증인 아니고 자기 잘남의 증인 돼요.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 보내셔서 아무도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고 돌아보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서 그런 가운데서도 못난 인간을 들어서 구원은 기본이고 그 구원받은 인간을 자기 증인으로 이 땅에 볍씨처럼 또 뿌린 겁니다. 그렇게 뿌리게 되면, “목사님, 그렇게 뿌리게 되면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을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믿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렇게 뿌리면 믿을 사람 없을 것이고 하늘나라는 텅텅 비고 지옥은 복잡하고, 그렇게 되면 하늘나라 만든 취지가 무색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요. 요한복음 12장 39절에 보니까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얼마나 주께서는 적극적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는 하나님입니까?
전도요? 사람을 데려오고 전도한다 그 말입니까?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해요. 오지 말라, 그게 도라는 거예요. 너희 힘으로 올 수 없는 곳이니 아예 올 생각 말라고 막는 그것이 도예요. 그 막는 것을 전하는 것을 전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가 뭐냐? 교회 오지 말라고 전하는 그것이 전도예요. 또 이상한 소리 나오네요. 예수님 중심으로 안 보고 자꾸 하나님 중심으로 보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유지해서 하나님한테 좋은 인상 줘서 죽을 때 하나님한테 스카웃 되기 위한 노림수를 갖고 있으니까 자꾸 하나님 중심이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속에 종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 일부러 종말을 집어넣어 놓은 거예요.
종말을 집어넣은 이유는 인간이 날 때부터 이미 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에서 태어난 것을 후차적인 인간의 행위로서 지울 길이 없어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술 취한 사람, 만취한 사람과 맨 정신인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 사람은 술에 취해서 정신이 나간 사람이고 맨 정신이란 이성적으로 정신이 똑바른 사람이지요. 차이점이 그거잖아요. 술 취했다는 것은 나쁜 의미고 맨 정신이라는 것은 정상이라는 의미지요. 바로 고린도교회가 지적받는 것은 이 부분을 지적받는 겁니다. 술을 안취하고 정상적으로 이성적으로 깨어있어서 정상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그 자체가 바로 죄가 된다는 겁니다.
어째서 그게 죄가 되는가 하면, 그들 가운데 잘못된 것과 잘못되지 않은 것을 스스로 구분지음으로 말미암아 ……, 쉽게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은 만취가 되어서 엉망이 되었지만 우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습니다.”라고 우기는 그러한 기준자체가 바로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이것이 여러분에게 어렵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쉽게 이해가 돼요.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 병든 자를 고쳐줬습니다. 그 대목을 보면서 ‘저 사람은 귀신이 들려서 간질에 걸리고 게거품 물고 비틀거리고 넘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정상이니 귀신 안 들렸구나.’ 귀신들린 자가 거품 물고 있으니까 맨 정신인 우리는 정상이라고 보는 것이 유대사회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정신 똑바로 차린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을 보고 하는 말이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귀신은 악마의 하수인들이에요. 그러니 누가 더 고질병이냐 하면, 정신을 똑바로 갖고 “저 병자는 자비가 임해야 해. 그래야 고칠 수 있어. 우리는 병이 아예 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진짜 구원받은 백성이 맞다.”라고 자기형편과 상황과 자기입장을 정당화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마귀가 마지막으로 내민 십자가로 가는 출구를 가로막는, 천국 가는 길을 가로막는 마지막 내민 카드가 그 카드에요.
정신 똑바로 차리면 구원받는다는 그 카드에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바르게 살고 그리고 우리가 역사적으로 성경에 해박한 우리의 전통적인 역사해석을 인정하게 되면, 시키는 대로 단계별로 양육 받고 교육 받으면, 제자훈련 받으면 구원 받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달달 외우고 그 의미를 공부하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정신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말해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속으로 자기의 죄 성을 숨겨버렸다는 겁니다.” 제가 또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인간이 만든 교회는 옳은 교회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풍차가 풍차 힘으로 돌지 않고 바람의 힘으로 돈다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바람 불어야 돼요. 교회는 어지러워야 되고 분산 떨어야 되고 말썽이 일어나야 되고 그래야 합니다. 왜? 고린도교회가 견본이기 때문에. 모델하우스거든요. 견본이라는 말이지요. 너 잘났다, 나 잘났다가 있어야 되고, 초빙된 목사가 교인 수 불려놓고 머리 숫자 계산해서 권리금 받고 도망쳐야 되고, 그것도 모르고 장로는 돈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음으로서 자기본색을 드러내야 되고,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돼야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래야 더 이상 자기 잘난 맛에 다시 기대하거나 의지하지 않지요. 그래야 평생 동안 자기 잘난 증인으로 살다가 한 순간만큼은 제발 주님의 증인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증인. 자기 교회 잘난 교회라는 자기교회 자랑질 하지 말고, 우리 목사 훌륭하다는 그런 자랑 질 하지 말고, 남이 어떻게 구원받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풀나풀, 그걸 시스룩이라고 하는데 하늘하늘한 원피스 입은 듯이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그냥 불려서 그 영적 무게가 영 그램이라 무게가 없어요.
너무나 가벼운 존재, 이 존재의 가벼움, 이것이 팔랑팔랑 날려야 돼요. 그래서 제가 막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제발 무게, 힘 빼고 살라고,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살라는 뜻이에요. 어떤 유명한 책의 제목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말이지요. 팔랑팔랑. 그것을 오늘 본문에 성도라고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 할 때 그리스도라는 용어는 구약용어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다룰 문제가 아니에요. 이방인들은 메시아 없습니다.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메시아가 하나의 파이프로서 역사적으로 전달된 그 메시아에요. 메시아의 기능은 이 땅에서 총체적 총괄적 제사를 드리는 기능입니다. 제사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죽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미리 죽으라, 그 말입니다. 미리 죽으면 산다는 거예요. 미리 죽으면 산다는 거예요.
미리 죽으면 살게 되는데 그렇게 살게 된 그 삶은 나로 인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으로 인하여 매일같이 살려지고 있는, 그래서 그러한 주님의 살려주심을 증거 하는 삶을 뭐라고 하느냐? 성도라고 하고 교회라고 합니다. 성도라는 것을 풀이하면 거룩한 사람이에요. 여러분이 성경 보세요. 성경에 여러분을 비춰보면 여러분이 거룩해 보입니까? 개코라 하세요. 개똥이라 개똥. 거울 보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잘난 나 밖에 안보이지요. 그런데 거울 뒤에서 십자가 피 묻은 주먹이 튀어나와서 거울을 깨게 되면 바로 평소에 얼마나 잘난 체 하고 있는지, 이걸 고치지 마시고 잘난 체를 마음껏 하세요, 마음껏 하시되 그것이 바로 내가 비로소 외칠 타이밍에 도달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마음껏 죄짓고 마음껏 잘난 체 하시되 마음껏 잘난 체 하고 마음껏 죄짓는 그 순간이 “나는 나로 인해서 영생 얻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외치는, 십자가 피만으로 용서받았다는 그 외칠 타이밍이 되는 거예요.
끝내려 하니 좋은 예화가 떠올라서 해야겠습니다. 어떤 드라마에 보면, 평소에 드라마 잘 안 보는데, 제가 드라마나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닌데, 드라마에 보게 되면 선팅이 짙게 되어 있는 차 있잖아요. 그 안에 사람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아가씨가 가다가 차창에 얼굴을 이리 저리 비춰보면서 뭐도 찍어 바르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눈치도 없는 차 주인이 유리창을 내려버려요. 죽 내리니까 짙은 선팅 유리가 반사가 되니까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는지 안보이고 몰랐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소에 타인 앞에서 어떻게 한다 하지만 그 타인 안에 십자가가 들어 있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요. 모르고 행동하세요. 나중에 들통 나세요. 그래서 증인 되세요. 늘 우리는 주님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욕심입니다. 늘 주님 잊어버리세요. 주님 잊어버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주님이 늘 챙겨주심을 매일같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믿으면서도 주님이 없는 삶을 살고 하나님 인정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우리 맘에 맞고 편하고, 그것이 우리 행복인 것처럼 느껴지고, 고쳐도 고칠 수 없는 육신을 주셨사오니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용서만 증거 하는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