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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강의2a-사도행전140403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5. 20:00

수원140403a-(사도행전)2강 - 이 근호 목사

 

진도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늘 반복하는 게 좋아요. 지난시간에 한 게 2주전이기 때문에 사람의 기억력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난시간에 뭘 했지? 할 수가 있거든요. 지난시간에 이거 했어요. 뭘 했느냐 하면,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있다면 요런 경우가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이렇게 해서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있고 그 다음에 여기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열어준 거죠. 그래서 이것은 이방나라인 방면에 이것은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에서는 반드시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믿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예레미야 11장 3절의 말씀에 의하면 언약을 모르는 자는 그 다음에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시죠.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면 이 원칙에 의해서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했으니까 이 원칙에 의하면 이방나라는 뭐냐 하면, 저주받을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존심 세우려고 한 것이 아니고 성경의 예레미야11장 3절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잘났고 너희는 못났고 그런 차원이 아니고요, 우리는 똑똑하고 너희는 어리석고 그런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언약이 없으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약이 없으면.

 

요즘 교회에서 언약이야기 안하잖아요. 그냥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셨습니까?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런 식이지 언약이란 말은 잘 안 듣게 돼요. 이 교회 말고 기존교회에서는. 그러나 성경의 예레미야11장 3절에 보니까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모르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그들 자신은 언약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그게 제 질문입니다. 언약을 모르면 저주를 받는다고 예레미야11장3절에 나와 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한 본인들은 언약대로 살았을까요? 못 살았을까요? 못 살았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겁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요, 같은 편끼리는 봐주기가 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에 사실상 가장 기본적인 것이 뭐냐 하면,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봐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봐주기가 없어요. ‘대충 넘어가기’ 이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속이지 않고 전하는 설교자 같은 경우에는 사실은 욕 얻어먹을 각오를 해야 돼요. 봐주기가 없거든요. 저분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그분들을 속일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주의 말씀을 변경시켜서 그 사람 마음에 맞추어주는 권리는 설교자한테는 없어요. 그러면 안돼요. 속이지 말기! 사태가 어떻게 되던 화산이 나고 지진이 나더라도 속이지 말기! 주의 말씀은 그대로 전해서 실제로 그들이 싫어한다 할지라도 나를 싫어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감수하고 감내해야 됩니다.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고 복음 아는 성령 받은 성도한테도 똑같은 운명입니다. 운명이고 팔자고 그래요. 친구 떨어지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원래 사도들은 외로웠습니다. 좁은 길은 찾는 사람이 적은법이니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 살며 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지가 딱 꽂혀버리면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 언약 안에서 꽂혀버리면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이미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지난시간에 한 것을 간추려보면, 이방나라는 뭐가 없습니까? 언약이 없이 했고,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어서 언약의 하나님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이스라엘마저 망하게 된 거죠. 자, 여기서 질문하나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망해버렸어요. 그런데 망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실패했다는 것으로 의미할까요? 아니면 그 자체가 실패가 아니라 성사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까요? 이스라엘 멸망한 것이. 성사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본인의 힘으로 언약을 이룰 수 없는 그 실패를 오늘날 우리들의 실패로 그대로 인수인계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가 실패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돼요. 자기 분수를 알게 되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무능하고 실패한 것을 안 동시에 세상의 수고한 무거운 짐도 다 사라지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난 뒤에 예쁘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자식을 잘 키워야 된다는 책임도 같이 부여되지요. 이것이 엄마, 아빠한테는 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럼 자식 낳고 기쁘지만 또 하나의 엄청난 큰 짐을 지게 될 때, 그것은 이 세상을 불행스럽게 슬프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치고 자식을 맘대로 제대로 키웠다고 자부할 수 있는 부모는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원래 자식은 부모 말 안 듣게 되는 식으로 하나님이 자식을 붙여준 겁니다. 기존의 윤리 도덕에서는요, 자식들아 부모 말에 순종하라, 이리 하잖아요. 성경에서는 뭐라 하는가 하면, 앞에 뭘 집어넣어요. 자식들아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 이리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할 자식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어떤 능력도 그것은 실패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식이 부모 섬기는 것 실패하고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되 주 안에서 양육하라, 했거든요. 이것도 실패합니다. 전부 다 실패자로 만들기 위해서 부모, 자식이 만난 거예요. 그런데 그 실패가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에 반복이라는 점을 생각해 주셔야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신명기에 보면 자식이 부모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자식을 죽이되 가만히 죽이지 말고 공개석상, 마을 공터에 가서 온 마을 사람 다 불러놓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부모도 아닌 자로 하여금 내 자식을 죽이도록 그렇게 조치하라, 라는 법이 신명기에 나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이삭을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모습이죠. 그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실천에 옮겼을까요? 안 옮겼을까요? 아무도 안하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민수기에 나오지요. 안식일 날 나무하러 간 사람을 보거든 일하는 사람을 보거든 잡아다가 돌로 쳐 죽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안식일 날 나무한 사람이 내 아내고 내 가족이고 내 자식이고 내 부모라면 돌로 쳐 죽일 수 있겠습니까? 안되지요. 인간은 자신의 혈육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혈육과 가족과 친구정도는 몰라도 자기 혈육의 가족을 감싸게 마련이지 거기다가 자기 가족에다가 주의 법을 적용시키는 그런 매정스러운 인간은 없어요. 팔이 바깥으로 굽는 거 없잖아요. 팔이 안으로 굽잖아요. 팔이 자연스럽다는 말은 내 새끼를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이 나를 건드리는 것이다. 이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 자연스러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니 자식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할 때 우리 같으면 돈으로 계산해서 바칠 수 있지만, 자식을 그것도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능가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식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자신을 죽이는 거예요.

 

신앙이라는 것이 기존교회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것은 신앙 아닙니다. 신앙은 언약 속에 들어가야 신앙이 보여요. 어제 수요설교에서 우리교회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치는 몽둥이라면 오늘날 나에 대한 몽둥이는 내 자신이 나를 치는 몽둥이로서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한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들어서 나를 치는 몽둥이에요. 그것은 평소에 내 것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애착과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또 누가 압니까?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거든요. “주님을 믿어? 주님을 사랑해?”이건 다 빈말이다 말이죠. 뭘 주님을 사랑해? 나를 사랑하지요. 왜 자꾸 그런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늘어놔요. 내 자식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내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했는데.

 

신앙이라 하는 것은 그냥 남들 보기에 근사하게 신앙, 교회 다니는 척하는 그것은 사람은 속여요. 절대로 하나님은 못 속입니다.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 삽비라를 알지요? 자기 부부끼리“여보, 드릴 거 반만 드리자.” 자기들끼리만 아는 비밀입니다. 속닥, 속닥 쥐도 몰랐고 참새도 몰랐어요. 그랬는데 설마 교회에 성령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교회에 사도만 있고, 교회에 장로만 있고, 교회에 집사들 있는 건 눈에 보이는데 교회에 성령이 있는 게 눈에 보입니까? 그러니까 그 부부가 사람만 속이면 모든 속임은 다 완전범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드렸지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당신이 지금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고 성령을 속였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배후에 누가 있는가, 사탄이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베드로의 눈에는 지금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지금 그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사탄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오랜 친국에요. 한두 해 친구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어요. 항상 우리 위주로 우리 좋은 쪽으로 이익 되는 쪽으로 우리가 출세하고 성공하는 쪽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실패와 성공은 사실은 은닉된 거예요. 숨겨진 거예요. 지금 나타난 실패와 성공 배후에는 그것은 바로 숨겨진 진짜 성공과 실패를 감추기 위한 이 세상의 어지러움입니다. 혼란스러움이에요. 거기에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선지자가 하는 말이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선지자를 잘 안 해요. 선지자의 모든 이야기가 비판하는 것이고 부정적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선지자를 자꾸 본문으로 끄집어내어버리면 교회가 긍정적 교회가 안 되어가지고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교회로 가버려요. 성경에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 옛날 언약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특징이 뭐냐 하면 망해버려라, 그게 사는 길이다. 그 긴긴 내용이 간단해요. 망하는 자여, 기뻐하라. 그래야 산다는 겁니다. 망하는 코스를 밟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다. 이사야에도 나오지요. 이사야53장의 본문의 내용으로 그걸 지금 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서론부분을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망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 너희들이 지금 좋다고 살고 있는 이 현실, 이 세상 자체가 너희들이 문제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예전에 그런 걸 눈치 챈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의 정체가 노골화되고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만약에 우리 마음에 찾아오지 않으면 이 세상은 너무 좋은 세상이에요. 그러나 어느 날 그리스도의 영이 내 마음에 찾아왔을 때는 ‘뭐야? 떠나야 될 세상이네. 내가 나그네잖아. 어디 여기에다가 정주고 붙이고 여기다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산다는 거 이것은 신앙의 선배들 같은 그 길이 아닌 것 같은데.’라는 감이 오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효과에요. 이것은 사람의 인력으로 되지를 않아요.

 

그렇다면 만나야 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 주님을.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본다는 그런 이야기를 고린도전서에서 했거든요. 지난시간의 성경을 이야기해보니까 결국 언약이었고 그리고 언약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이 왜 멸망되어야 되는가, 하지만 그 멸망 그것이 진짜 이스라엘 만드는 하나의 과정 속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기 자리가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비로소 그동안 몰랐던 성공이 실패의 자리에서 새싹이 피듯이 실패한 내 자리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에스겔31장에 보면 바로 하나님이 에스겔을 해골로 데려가지요. 해골로 데려가서 묻습니다. 이 해골이 살겠느냐? 에스겔이 하는 말이 자기는 모르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말씀이 임하니까 그 해골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방식대로 하나님이 해내겠다는 거예요. 다시 그 방식대로 적용되려면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에 예쁘장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짝 마른 해골로 본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수긍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고맙게 여겨야 돼요. 머리 잘나왔네. 그것까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아 요거 사고 난 뒤에는 유행에 떨어진 거 때문에 몇 날 몇일을 후회하고 그러지 마시고 해골인데 오늘도 먹을 것을 주시고 단비주시고 항상 이렇게 은혜 받고 산다는 것을 우리가 늘 아시고 그 은혜라 하는 것은 우리가 부족한데서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그저 우리는 나를 볼 때 그저 부족하고 참 믿음 없는 행동하고 하는 그것만 찾으면 되는 거예요. 부담 없이 삽시다. 사람이 몇 년 살지 모르는데 부담 없이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아무도 여러분들을 성령 받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북한의 김정은? 허수아비입니다. 미국은 큰 몽둥이에요. 이사야 10장 5절, 앗수르? 그거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거 몽둥이에요. 몽둥이. 때리면 맞으면 돼요. 왜냐? 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감사히 맞으면 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를 길들이기 위한 몽둥이인데 세상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보복하려고 “이씨, 한 번 두고 보자.” 이런 식으로 상대할 가치도 없는 허수아비를 붙들고 상대한다는 게 얼마나 사이코 한 겁니까?

 

들판에 가서 허수아비 만나면 멱살 쥐고 합니까? “허수아비야, 옷을 왜 그런 식으로 입었어?” 하고 허수아비 목 들고 하면, 이건 바보잖아요. 그동안 우리는 허수아비에 너무 주눅 들고 살았어요. 허수아비를 너무 부러워해요. 허수아비들이 모여 있는 그런 교회에 대해서 그걸 자랑질해요. 그만한 교인이 없어서 기죽었고, 어쩌면 우리가 그 허수아비와 동일한 허수아비처럼 못 되어서 환장한 그러한 모자람을 노출시키고 말았지요.

 

오늘 두 번째 시간에 지난번에는 예레미야11장3절, 이 언약의 말을 쫓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분명히 제가 언급했습니다. 다음 시간되면 또 복습할 거예요. 또 잊으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사도행전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8장32~33절,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이사야53장 7절,8절의 말씀이거든요.

 

자, 오늘 이 시간에 이 대목을 제가 택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대목이 빌립이란 집사하고 그리고 이디오피아라는 그 당시에는 큰 나라였거든요. 큰 나라의 고관대작이에요. 직접 임금을 아뢰는 높은 지위에 있는 귀족이지요. 그 높은 내시라 할 수 있는데 그 높은 고관과 아주 하찮은 빌립집사,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찮지만, 성경에 등장한 것도 대단하지만 이 빌립집사는 어떤 재산을 가진 것도 아니고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성령 받았다는 그것밖에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이 이디오피아의 내시라는 고관대작과 만났을 때에,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사람과 사람 만날 때 어떻게 만납니까? 이 생명수 교회의 교인들은 전부 다 말씀으로 만나지요. 보통은 그리 안 만나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반드시 돈이 매개가 됩니다. 돈이 중개가 되고 매개가 되는 거예요. 편의점에 가서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이리 하지 않잖아요. “이거, 얼마에요?” 묻잖아요. 돈을 매개로 해서 하는 겁니다. 부동산 중개소를 만나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 살아가면서 가족 말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돈 관계로 만나요. 그게 육적인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걸 유식한 말로 ‘자본주의’라고 해요. 자본주의.

 

자본으로 말미암아 자본 안에 인간들이 각각 자기 위치를 갖고 있어요. 그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하거든요. 그럼 이 자본주의를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실이라고 해요. 현실, 실제. 병원에서 뭔가 의료사고나면 돈으로 때우면 그만이고요. 보험도 마찬가지고 돈으로 때우면 되고. 애가 만약에 눈이 덮여 무너졌다. 그럼 돈으로 보상해 주면 그만이고요. 모든 마지막 해결은 돈으로 해결될 때, 돈이 매개가 될 때 그게 자본주의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자본주의를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현실이라고 했지요. 이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없는데 여기 사도행전8장에 나와요. 생판 모르는 사람이에요. 빌립집사를 언제 봤다고. 모르는 사람이에요. 빌립집사와 이디오피아 내시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그들의 만남은 바로 돈이 아니었고 뭐였습니까? 말씀이었어요. 말씀이라는 것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이걸 이렇게 봅시다. 예언으로 맞는다. 예언으로.

 

여러분, 예언이라면 상당히 이해하기 쉽잖아요. 예언이라 하는 것은 현재 있으면서 미래에 일을 앞당겨서 현재 말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리고 예언의 특징은 뭐냐 하면, 말했던 것이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고 시나리오대로 스케줄대로 그대로 미래가 진행되기 때문에 예언 안에서 미래가 고정되었다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예언 안에서 미래가 고정되었다.

 

이것을 저는 다른 강의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동결’상태라 합니다. 동결이라 하는 것은 어름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게 물이 아니고 얼음입니다. 얼음인데 얼음에 나뭇가지가 한 들어갔어요. 나뭇가지가 이렇게 들어가고 요쪽에는 끝부분에 팥알이 들어갔습니다. 물 같으면 흔들면 서로 만날 회가 되지만, 어름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쨍쨍하게 얼었기 때문에 만나겠습니까? 못 만나겠습니까? 얼은 체 그대로 있지요. 이게 바로 인간의 위치라는 겁니다.

 

예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이렇게 각자 자기 역할 할 뿐이지 서로 관계성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 안에서 예언된 대로 얼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노래도 있지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란 노래도 있지요. 만약에 어떤 남자가 이렇게 같이 붙어산다면 이건 주의 뜻이 되는 겁니다. 같이 동결돼요. 하나님이 동결시킨 것을 누가 그걸 녹이리오. 안되잖아요. 연탄불 가지고 녹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모든 가족도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은 동결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에 이렇게 동결된 예언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 말씀가지고 만났을 때에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예언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여러분들이 안 듣던 용어를 써서 미안합니다만, 이게 적당한 용어가 돼서 그래요. 이 예언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매개’ 또는 ‘매개체’ 다른 말로 하면 ‘중재’ 더 쉽게 하면 ‘중매쟁이’ 이게 제일 쉬운 말이죠.

 

세상에서는 “나 이런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에서는 안 통합니다. 왜냐 하면, 매개가 없기 때문에. “저는 말씀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면 저쪽에서도 “나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할 때 형제가 되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의 매개, 언약의 매개, 새 언약의 매개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해야 예수님과 제자가 두 번 다시 헤어지지 않고 하나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누가 와야 된다고요? 성령이 그냥 오면 안돼요. 성령이 매개가 되어야 돼요. 제가 방금 성령이 매개가 되어야 된다고 했지요. 성령을 소유하면 안돼요. 그것이 내 것이 되어버리면 안돼요. 성령님이 매개가 되어야 돼요. 매개가. “주여, 제가 저 사람한테 이야기할 때,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매개로 해 달라.”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니까요.

 

나 성령 받아서 잘났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니까요. 흔히 성령을 부르짖는 순복음 많은 교회에서 성령을 받아버리면 이게 소유가 되잖아요. 그럼 성령을 내놓는 게 아니고 성령 받는 자기를 내놓으면 결국 자기 과시, 자기 자랑질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저쪽에서도 지지 않고 “니만 받았나? 나도 받았다.” 하고 자랑질해대면 온통 교회가 자랑하는 인간의 욕망을 자랑하는 자기 자랑하는 그런 난장판이 되어버립니다.

 

기도해도 경쟁적으로 큰소리치고요, 오래하고 누구한테 안 지려고 하고, 그것은 그걸 가지고 육의 열매라 해서 갈라디아에 시기와 질투와 탐욕과 이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반대의 육신의 열매라 했거든요. 성령을 빙자해서 육신의 열매가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해결책이 뭐냐 하면, 내가 성령을 소유하지 말고 성령님으로 하여금 나를 소유케 해서 내가 등장할 때는 성령님을 소개하는 거예요.

 

성령님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누가 주신 거예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신 겁니다. 성령이 그냥 예수님이 주셨다 하면 되는데 왜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셨다는 말을 왜 집어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십자가지지 아니하면 성령이 우리한테 오시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지요. 제가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한테 복잡하게 교육받았어요. 굉장히 복잡해요. 요한복음1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말을 듣는데 제자들이 복잡하게 들었어요. 지금은 오지 못한다. 나중에 가서 처소를 마련하면 갈게. 주여 처소가 뭡니까? 처소는 나중에 성령이 처소다. 그러면 언제 오십니까? 내가 가야 오는데 가려면 내가 십자가에 지고 가야 돼. 왜 그리 복잡해요?

 

지난시간 다시 해봅시다. 지난시간에 뭐냐, 신이 있고, 인간 있고 성의를 다해 섬기면 간단했어요. 간단했잖아요. 그런데 지난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신이 있고, 인간이 있고 섬기면 된다. 이게 아니고 이건 가인의 제사고 진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나님 계시고 여기 인간이 있다면 여기에 뭐가 있다고요? 언약이 있는 거예요. 언약이 있다는 것은 언약 자체 내에서 우리 보고 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고 언약이 완성되면 언약의 신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주님 곁으로 데려가는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 채택하신 거예요.

 

이렇게 복잡하니까 이런 교회는 교회가 잘 안돼요. 그런데 “신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 알지요? 정성을 다해 섬기시면 복 받습니다.” 이런 교회는 너무 너무 잘돼요. 이게 왜냐 하면, 무속신앙의 연장이기 때문에 너무 잘되는 거예요. 편하고 성경 볼 필요도 없어요. 그저 뭐만 하면 돼요? 기도만 하면 되는 거예요. 기도해놓고 응답은 지 맘대로 편집하고. 지가 역사를 만들고.

 

그런데 이쪽은 점검받아야 돼요. 언약에 합당하느냐, 합당하지 않는가, 십자가의 정신에 위배되는가, 아니면 부합되는가, 그걸 점검해야 되니까 사람들은 이쪽이 어렵다고 해가지고 고개를 설레, 설레 져버리지요. 왜 그리 복잡하게 돼서 이상하다. 잘 모르겠다 해가지고 알기 쉬운데 가자, 이리 가버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아까 인간의 신을 할 때, 기도만 한다 했지요. 어떤 단체는 성경공부만 해서 가는 사람이 있어요. 헌금해서 가는 사람이 있는데, 헌금, 선금, 예배참석 뭘 해도 안돼요. 반드시 언약이 주어져야 된다니까요. 언약이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약속이 완성된 것이 새 언약이고, 새 언약은 바로 십자가로 주어지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아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반드시 마귀가 지금 계속 작용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귀는 십자가를 제일 싫어하니까. 어쨌든 사도행전8장에서 빌립과 내시 사이에 말씀을 통해서 만납니다. 만나는데 그렇게 된 것은 성령께서 빌립을 그렇게 성령께서 하신 거예요. 가까이 하게 되면 거기에 말씀을 읽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빌립도 마찬가지고 내시도 마찬가지고 말씀을 매개로서 만납니다.

 

오늘 이 강의할 때, 제가 준비한 취지가 뭐냐 하면 이 성경이 이렇게 두껍지 않습니까? 두꺼운데 이거 성경을 다 외워야 합니까? 다 외우면 구원받습니까? 지금 다시 물어봅시다. 빌립과 이디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다 외웠습니까? 안 외웠습니까? 안 외웠지요. 그러니까 뒤척이면서 보니까 이 대목이 안 풀리는 거예요. 그 말은 우리에게 뭘 시사합니까? 성경 전체를 풀 수 없는 대목이 있다는 거예요. 누가? 성령께서.

 

창세기부터 외운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시편 다 외운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 시편 외우는 사람도 있어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암기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였다 이 말이죠. 성경을 외운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성경 백날 시험 쳐도 구원받는 게 아니다 말이죠. 대학교 선교단체 성경 공부하는 거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닌데 그걸 성경 구절 많이 아는 걸로 해서 그걸 우쭐대면 안돼요. 여호와 증인도 마찬가지고. 신천지에서도 성경 많이 가르쳐요.

 

성경에는 핵심이 있는 거예요. 이 근호 제가 핵심이라 했습니까? 성경의 성령께서 생판 모르는 사람 만났을 때, 35절 봅시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이리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출발점이 뭐냐 하면, 이사야 53장 그 대목을 시작해서 성경 전체를 다 훑어버리는 겁니다. 제가 이 방식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지요. 제가 이 방식을 사용하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강의에서 이 구절을 한 거예요. 생명수가 나오는 구멍이 있는데 왜 그 구멍을 팔 생각을 안 하고 엉뚱한 이런 걸 팔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성령께서 시키는 일인데. 이디오피아 내시가 죽을 때 이 성경 다 외우고 죽는 게 아니에요. 몇 년 살다가 죽을 수 있고, 몇일 살다가 죽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내시는 구원받았습니다.

 

아, 성경을 다 몰랐는데도 구원받아요? 특정을 통해서 안의 내부로 들어가는 거예요. 특정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내부로 휘저은 거예요. 성령과 더불어서. 성령 받은 빌립과 더불어서 휘저은 겁니다. 보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 한 분의 이야기가 돼요.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 책이라는 사실을 성령께서 두 사람에게 다 알려주게 된 겁니다. 그걸 지금 저와 여러분이 같이 공유되기를 바랍니다.

 

그 때 그 시절로 같이 그 현장에 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현장에. 우리는 여기서 경청했으면 좋겠어요. 경청. 빌립이 이사야 책 펴고 할 때, 우리도 여기서 녹음기 들고 이렇게 경청했으면 좋겠어요. 성경 다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33절 끝에 나와요.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다고 되어있지요. 보통 사람들이 교회 올 때 빼앗기려고 교회 옵니까? 더 얻으려고 옵니까? 얻으려고 오지요.

 

그런데 정작 구원받게 하는 그 본문 말씀은 빼앗긴 사람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사람은 구원이 되는 거예요. 어디에서 빼앗겼느냐, 이 세대에서. 우리가 말하는 현실 속에서. 현실에서 얻어 챙긴 것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빼앗기러 오신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 분이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32절 보면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날에서 저도 같은 방식으로 이사야53장을 통해서 성경전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같이 알고 오늘밤에 낙원에 같이 갈 수 있다면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이걸 알고.

 

그러면 사도행전8장33절 말씀을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복잡해서 한도가 없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딱 2가지인데, 제가 방금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이 세대’거든요. 이 세대 나오고 그 세대입니다. 그 다음 한 가지는 뭐냐 하면, 빼앗김. 가정문제나 사회문제나 직장문제 해결하려고 교회 온 사람들이 이런 것들이 보이지를 않아요.

 

정말 말씀을 매개로 해서, 반복합니다. 돈을 매개로 해서 평소의 생활은 돈을 매개로 해서 아침에 눈만 뜨면 “여보, 요번 달 월급 얼마인데?” 돈을 매개로 해서 “야, 공부 잘해. 공부를 잘해야 이 땅에서 월급 많이 타고 하는 거야.” 모든 자식들이나 남편이나 또는 가족끼리라도 돈을 매개로 해서 “아이고, 형님은 또, 또 돈 빌려달라고 왔어.” 모든 게 사람 만남이 돈을 매개로 만나는데 여기서는 그 세대에서 빼앗겨버린 어떤 한 분을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출구가 아주 작은 구멍이지만,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구멍이지만, 구멍이 비로소 나와 있다는 거예요. 분명히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성령이 빌립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이 세대가 빼앗기니까 이 세대는 공격이고, 공격자가 되고 이쪽에서는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결국 공격하는 쪽과 그로 인하여 피해 받는 쪽의 결합에 의해서 이 세상이 실제로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이 예언입니다. 예언. 아까 제가 예언이란 말을 했지요. 예언의 특징은 동결되어 있다. 모든 구조는 이미 완결되었어요. 시나리오는 이미 굳어져버렸어요. 그 내용 구조는 뭐냐, 공격자와 피해자의 대립되는 두 요소로서 짜여져 있습니다. 공격자와 피해자로.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빌립보서나 그 뒤에 있는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으니 그와 함께 고난 받는 것도 당연하다는 이야기 나오고요. 로마서8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성령을 받게 되면 빌립보서1장도 같은 말이지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했잖아요. 제가 갑자기 고난 이야기하는 이유는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난이라고 평소에 알고 있던 사람은 테레사수녀, 주 기철 목사, 손 양원 목사, 한 경직 목사,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있는 선교사들, 이런 사람들을 고난의 대명사로 이렇게 간주하잖아요. 그것이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걷는 고난은 그렇게 티내어지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어떤 면에 좀 과격한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아주머니들이 마사지 받는 그것도 고난이라고 제가 언급했거든요. 돈 깨나 있는 분들이 마사지 받을 때, “아이구, 시원하다!” 이것도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고난, 환란, 이 개념 하나 바꾸는 것도 정말 너무나 벽이 두꺼워요. 이게 자꾸 찡그리고 슬프게 사는 것을 자꾸 고난이라고 하는데 그건 위장이에요. 그것도 하나의 쾌락이고 즐거움입니다. 고난 받는데서 오는 즐거움. 자기가 천사가 되었다는 어떤 향락, 정신적인 심리적인 향락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수시로 이야기해요. 전도서를 좀 보셔야 돼요. 아내와 함께 즐겁게 맛있는 거 먹고 살아라. 그게 환란이다. 그게 환란이라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주를 빼놓고 환란 같으면 뭐냐 하면 불교에요. 완전히 스스로 자학하고 때리고 낮추고 부족하다, 부족하다, 유대인들이 고난주일에 매일 했던 게 있잖아요. 금식하면서 때리는 거, 그걸 환란이라고 하지만, 주가 들어가 버리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느냐, 얼마나 밑바닥 생활을 했느냐 놓고 환란이 정해지는 게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진짜 넉넉하게 누리는 경우에도 주님을 잊지 않았느냐, 그게 환란이에요.

 

마귀는 주님을 놓으라고 자꾸 부추기거든요. 안 믿는 사람들이 와가지고 돈10억 드릴 테니까 복음 이야기하지 마세요. 이것도 환란이에요. 이런 환란은 좀 괜찮은 환란이죠. 그런 환란 좀 받아봤으면 좋겠어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줄 테니까 다 이루었다! 하는 이것만 하지 말라는 것. 그러니까 세상에서 “니가 앞으로 뭘 해야 구원받지? 안하면 구원 못 받아.” 이런 게 환란이에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세상부귀영화 다 주겠다고 하잖아요. 그걸 주 안에 있는 사람도 동일하게 받아요. 세상의 부귀영화 누리라고. 누리세요. 누리면서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말이죠. 돈이 천억 있어도 괜찮아요. 왜? 누리세요. 하지만 어느 순간 천억 때문에 산다고 이리 돼버리면 지금 탈락한 사람이에요. 누림은 따로고 구원은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걸 잘못 생각하게 되면 인간의 사치와 향락을 조장하는 언사가 되어버려요. 자칫하면. 될 공산이 많지요. 성령을 받지도 않으면서 받은 척하는 사람한테는 아주 신나는 소리, 기쁜 소식일 거예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안 믿는 그 사람들이 그런 척하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정 내가 내 영혼이 자유로운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언제 자유로웠을까요? 언제? 성경의 환란, 고난 나올 때 우리는 자유를 느낍니까? “주여, 제가 환란을 받으려고 했는데 또 환란을 못 받았어요. 또 즐겼어요. 이래가지고는 내가 구원 못 받을까싶어요.” 이러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마귀가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연출하지 마세요. 오늘 수원에는 비 오는데 대구에는 비가 안 왔거든요. 수원에 비오라고 누가 기도한 적 있습니까? 기도한 사람이 있긴 있겠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이 기도했습니까?

그냥 비 온 걸 누리세요. 200mm오면 떠내려가면서 누려야 되고. 이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조장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그냥 십자가의 은혜 주신 주님에 의해서 주어진 상황인 것을 받는 그것이 우리는 감사가 되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못 마땅 해하는 세대가 있을 거예요. 이 세대가 여러분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이 사람아, 비오는 것은 이게 저기압과 고기압의 전선 때문에 그런 거야. 비는 하나님이 보낸 게 아니야.” 이런 식으로 자꾸 핍박을 가한다니까요. 핍박한다고 망치 들고 때리는 게 아니고 말로서는 때로는 어떤 때는 실제로 폭력이 있을 수가 있지만, 어쨌든 그런 것들이 환란의 소리이니까 그 소리를 우리는 듣는 것도 주께서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 멱살 쥐고 흔들어봐야 허수아비로 흔들리니까 싸우지 마시고요, “그래, 니가 그럴수록 내가 옛날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왠 은혜인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이건 변함이 없어.” 내가 뭘 해서, 내가 환란 받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예요.

 

환란은 뭐냐 하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겁니다. 환란 받는 행위를 해야 구원받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오는데 그 환란을 조장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일부러 찡그리고 일부러 고생한다고 하고 일부러 돈 바쳐서 어디 기도회에 바치고 그런 짓하지 말라는 말이죠. 가만히 있어도 환란이에요. 설친다고 더 환란 되는 거 아니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성질나잖아요. 성질대로 사세요. 사시면 환란가운데서 내 성질이 더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모든 조치가 주님께서 협력해서 선을 이룬 조치인데 왜 그 현상을 반대합니까?

 

오늘 본문 보세요. 내시가 일부러 빌립집사를 요청한 것도 아니고 빌립이 내시를 만나려고 사전에 가서 미리 대기한 것도 아니었어요. 주님이 무엇 때문에 일하십니까? 주님은 살아계시거든요.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이루신 일인데 왜 자꾸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만 눈에 보이고 주님의 일은 왜 눈에 안 들어오느냐 말이죠. 세상 자체가 이 세대가 있는 이상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그 자체가 환란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도 환란이 되니까 일부러 환란을 조장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일부러 어렵게 살아서 “이게 환란 맞지? 그러니까 신자 맞지?” 이렇게 확인하려고 하지 마세요. 자기가 자기를 연출하게 되면 그건 위장술이 되어 버립니다. 고난 주일날 맛있게 잡수세요. 고난 주일은 인간이 만든 거예요. 부활절하는 것은요, 그건 죽은 사람 제사 드리는 거예요. 평소에도 살아계시는데 왜 부활절 드립니까? 평소에 안 살아있을 때는 부활절 제사 드리지.

 

교회에서 부활절, 맥추절하는 것은 목돈 더 얻어내기 위한 핑계에요. 돈 빼내기 위한 절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매개로 합니다. 목사도 전부다 올 때, 교인들을 돈을 매개로 오잖아요. 돈을 매개로 저 사람은 얼마짜리로 오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교회는 성령에 의한 교회가 아니에요. 성령께서는 바로 뭐냐,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을 매개로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이 세대에서 그 분은 땅에서 빼앗겼다는 거예요. 빼앗겼다.

 

그러면 그 다음에 봅시다. 지난번에 했던 것은 인간이 그냥 섬기는 것이다. 이건 가인의 제사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길 때, 언약을 통해서 했다, 했고.  지금 이 시간에 이야기하는 것은 언약이 둘인데, 하나는 공격자, 가해자와 그리고 피해자의 형식으로 언약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언약을 몰랐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약을 지킬 수가 없지요.

 

제사지내라, 하니까 제사지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종교적인 행함.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행함. 그런데 이 피해자에 가담하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이 언약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빌립과 내시를 이 안에 들어가게 하시지요. 들어갈 때는 출입구가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주 안에서 들어가야 돼요. 주 안에서. 주 안에서 언약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 하나님 아버지도 계시고 예수님도 계시고 성령님도 계시고 언약이 있고 우리는 거기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공격자와 피해자를 통해서 언약으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공격자가 누구고? 피해자가 누구고? 물음표가 두 개 나와요. 어떤 의미에서 지금부터 이 성경공부가 새롭게 제대로 출발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창세기3장15절이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3장15절은 뭐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이야기하거든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리고 여자의 후손을 이야기하고 난 뒤에 그 여자가 누구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여자 이름을 하와라고 지어버립니다. ‘하와’뜻이 뭐냐 하면, ‘생명’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곧 ‘생명의 자손’이에요. 생명으로부터 난 자손과 뱀 그러니까 생명이 없는 쪽과의 전쟁터. 그게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생명이냐, 아니면 저주냐, 그 싸움터의 군사로서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부름을 받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수원140403a-(사도행전)2강 - 이 근호 목사.hwp (33.5K), Dow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