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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하나님의 계획(요1;29)140501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4. 5. 23. 08:22


2014-05-02 01:36:45조회 : 181         
하나님의 계획 140501이름 : 이근호 (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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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례 (IP:203.♡.42.222)14-05-22 15:57 
가락-요한복음 1장29(하나님의 계획)140501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 1장 2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예를 들면 작대기나 볼펜 같으면 인간들이 이렇게 있고 서양의 체스 판 있잖아요. 점잖은 사람들이 체스 판을 크게 해놓고 움직일 때는 작대기 같은 것으로 밀어서 움직이죠. 말을 움직이는 것이 세례요한은 주님이 세례요한을 말판(장기판)에다 움직이고 저쪽에서 누가 다가오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린양을 삼아서 다가왔을 때 모든 놓여 있는 그 위치가 이거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 위치는 인간이 거부할 수 있는 위치에요? 인간이 마음대로 절제할 수 있는 위치입니까? 안 되죠. 미니까. 큰 장기 판 같은 체스 판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미니까 ‘오, 안 돼.’ 이럴 수 없잖아요.
그냥 위치에 놓여 진 거죠. 

그 점을 좀 설명을 하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성경에서 관계성이라 하는데, 관계성 할 때 혼자 있으면 아무런 관계성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기(1) 말고 2.누가 등장하게 되면 갑자기 여기서 뭐가 생깁니까? 관계성이 성립되죠. 혼자 있을 때는 ‘나는 하나님께 지시받았다.’라고 한다면 ‘그런 소리 나도 하겠다. 이 미친 인간아.’이렇게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봐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나타나셨잖아.’ 이렇게 되면 단순히 관계 하나 추가적으로 +1이 아니라, ‘오, 그래’ 세상 죄를 지고 간다면 둘 만의 관계가 아니고 그러면 당신은 미친 자가 ’당신은 선지자가 아니야.‘라는 이쪽도 어떻게 됩니까? 이쪽도 오실 예수님에 의해서 재평가 돼야 되겠죠. 그리고 그걸 구경하고 있는 이 세상도 오실 분에 의해서 전부 다 재평가 돼야 되겠죠. 

그러면 혼자 있을 때마다 예수님이 함께 있으면 이 체제 자체가, 이 시스템 자체가 전폭적으로 전부 다 바뀌어져야 된다는 것을 여기서 이미 암시가 돼 있고 그걸 미리 알려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진도 팽목 항이란 이름도 처음 알았어요. 진도 팽목 항에 해군 있어서 일하고 있다. 그러면 조용하게 자원봉사해서 일하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떴다. 이러면 새로 정비가 되잖아요. 대통령이 와서 어떤 약속을 할지, 어떻게 대처를 할지 그분의 복안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바짝 어떤 새로운 기대에 잡히겠죠. 

바로 세례요한이 ‘나는 선지자다.’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그 봐, 내가 말한 오실분이 저기 오잖아.’라고 할 때는 이젠 예수님과 세례요한뿐만 아니고 그동안 여기 있던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부터 모든 것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부 다 재편성이 돼서 분위기가 다 전환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대통령은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이 대통령이죠. 조금 전까지 자기 상관한테 명령받는 것을 이제는 누구한테? 대통령한테 명령받아서 지시해야 되는 것처럼, 해군 빼고 해경만 하라든지 이렇게 지시하는 것처럼, 인양하는 것은 그만두고 어떻게 하라 하는 것처럼, ‘예수님, 어린양이 등장하면 세상은 예수님 중심으로 전부 다 바뀝니다.’라고 요한복음은 택한 자, 오직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전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거 보시고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믿으세요.’ 택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신 책이 아니고 이 요한복음은 성도인 사람 같으면 이 의미를! 어린양 중심으로 세상이 전부 다 재편성된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내가 아실 줄 알고 어린양 중심으로 이제부터 내가 쓰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사도요한까지 집어넣어서.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죠. 

그렇다면 우리가 요한복음 보는 태도가 뭡니까? 누굴 빼야 돼요? 바로 우리 자신을 빼야 돼요. 어떻게 뺍니까? ‘나 뭐 해야 구원받을까요?’ 그걸 빼야 된다니까요. 이야기가 쉬운 말이지만 상당히 어렵죠. 예수님 중심 같으면 ‘그래, 나 예수님 용서를 인정해.’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그거 인정해서 뭐할 거요? 자기 구원받으려 하잖아요. 그 욕심을 빼란 말이죠. 내가 구원 받으나 안 받으나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린양 중심이지 내 중심, 내 구원중심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요한복음 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요. 보면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야, 어린양이 왔대, 세상 죄를 졌대. 어린양 믿으면 구원 받겠다.’ 꼭 자기중심을 턱하니 자리 잡아 놓고 그 다음에 자기가 주인공 된 장기판에다 예수님도 끌어당기고 가만있자 세례요한은 이 위치에 있겠다. 그 다음에 베드로는 여기 있고 자기가 이 말을 조정해요. 자기도 하나의 말로 움직여진다는 걸 모르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말을 움직여 버리면 도대체 요한복음의 주인공이 누굽니까? 예수님을 언급하는 것 같지만 결국 그걸 읽고 있는 본인이 ‘난 여전히 주인 됨을 포기 못하겠습니다.’ 라는 고집이 있어요. 그렇게 읽게 되면 요한복음 자체가 해석이 안 됩니다. 해석 될 수가 없어요. 

그럼 해석 어떻게 합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장기 판 안에 세례요한 본인도, 모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서 어떤 판을 만드는데 그것이 뭐냐 구원 판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구원 판을 스스로 만드는데 우리는 거기에 그냥 들러리로 본의 아니게 거기에 같이 움직임을 보여준 사람이 된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렇게 되려면 나의 구원은 없애 버리고 이 세상의 구원은 오직 주님의 구원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내 구원은 거기 끼어들지 마세요. 내 구원은 없어요. 처음부터 주님이 구원하는 주님의 구원의 장기판에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너도 그만 한판 할래?’ 하고 졸로 우리는 그 구원 판에 참여된 자체 상태를 가지고 구원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구원을 소지하는 게 아니고 그건 구원파고, ‘몇 일 날 구원받았어요? 언제 성령 받았어요?’ 그건 구원파고, 구원을 소지하는 것이고, 그건 기존 교회고,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구원의 시스템에 염치없이 그냥 끼어들어서 물 떠주는 것이나 하나 역할을 하나 맡아서 그러면 이미 구원에 끼어든 상태에서 구원받은 게 된다니까요. 

구원을 내가 장기판에서 내 것 갖고 오는 게 아니고 내가 거기에 끼어들었죠.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건 뭐냐, 그 관계밖에 없어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저 뭐해야 됩니까?’ 이런 관계밖에 없어요. 저는 주를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됩니까? 그런 관계만 있어요. 그래서 어제 수요일도 기도할 때 그런 기도했는데 성도는 사명감 없는 성도는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사명감이 있는데 그 사명감 때문에 성도는 사는 재미를 느낀다 했어요. 내가 뭐할 거냐가 아니라 ‘주님은 이런 일 시켰다.’ 하는 그런 감이 올 때 우리는 그 하는 일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무의미하지가 않죠. ‘아이쿠, 내 주제에 감히 이런 의미 있는 구원의 일에 내가 한 파트를 맡아서 하다니, 아이쿠, 이거 고맙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끈끈한 관계망이죠. 

제가 아까 수원강의 하면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아주 투박스럽게 이런 예를 들었어요. 구원이 뭐냐고 내가 설명을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껌을 좋아해서 질겅질겅 껌을 많이 씹는데 한두 개가 아니고 수천 통을 씹는 거예요. 씹어놓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장난 끼가 심해서 어떤 아주머니가 방금 머리 하고 오니까 머리에 껌을 발라 놓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꼬마한테는 엉덩이에 껌 발라놓고 어느 아저씨한테는 어깨에 껌을 발라놓는 거예요. 껌을 발라 놨는데 그 껌이 얼마나 질긴지 끊어지지 않아요. 그 껌을 줄줄 잡아당기면 구원 이예요. 주님이 씹던 껌을, 그러니까 우리가 씹던 껌이 아니고 우리가 말씀을 실천에 옮긴 게 아니고 주님이 실천했던 그 주님의 법이 껌처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달라붙으면 달라붙은 게 떨어지지 않고 이걸 잡아당기면 당겨서 집결한 그곳이 바로 천국 이예요. 

주님의 장난치기, 껌 가지고 장난치기, 여자 분들에게 머리에 껌 붙으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니까 따라가서 그렇게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언약 때문에 구원받는데 그 언약은 주님이 질겅질겅 씹던 껌처럼 주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시는 그 껌이 돼요. 내가 껌 떼서 내가 씹는 게 아니고 주님의 씹던 껌이 들어오게 되면 그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제 관계 설명이 됐습니다. 

관계 설명 됐으니까 그 다음 어려운 문제로 나갈 수 있겠죠. 자, 관계가 뭐냐 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사이의 관계에요. 요게 껌 이예요. 이 껌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요 성부 성자 성령 있던 관계가 그대로 우리의 몸에 입혀지면 우리는 장기판에서 하나의 역할을 받게 되는 겁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하셨던 그 관계가 이어져서 그것이 우리도 그 관계에 포함이 되면서 그 관계를 보여주고 증거 하는 그러한 작은 역할들을 맡은 거예요. 어떤 애는 물에 빠져 죽으면서 그 역할을 했을 것이고 물에서 기어 나오면서 그 역할을 했을 거예요. 물에서 나오면서 다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번에 176명 살았습니까? 비율이 3:1 이거든요. ‘살고 보니까 엄마 우리가 일시적으로 살았는데 영원히 사는 것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어. 나는 이번에 살아나오면서 그걸 알았어.’ 그러면 그 학생의 역할은 뭡니까? 물에 빠졌다가 나오는 그런 역할을 한 거예요. 그 역할이 성부로 인하여 성자가 이미 그 역할을 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무슨 역할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를 죽였는데 옆 수풀에 있는 양 때문에 살아났죠. 이거는 장차 오실 분이 죽었다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도로 살아나는 역할을 하나의 장기판의 마나 상처럼 졸처럼, 포처럼 아브라함이 미리 당겨서 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이란 말은 믿음의 조상도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것처럼 그 믿음의 노선에 속한 모든 사람들도 이미 성부와 성자 사이에 있는 관계를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관계에 참여하도록 호출당해서 그 역할을 하게 되는 거예요. 

작년인가 드라마 수상한 가정부라는 일본이 원작인데 여러분 안 보셨죠? 가정부가 굉장히 수상해요. 로버트 같아요. 가정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웃지도 않아요. ‘예, 그대로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가정부가 사근사근하고 정을 주고 이러지 않고 뭔가 한이 맺혔는지 그냥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시간이 되면 ‘퇴근시간입니다. 가겠습니다.’ 이래요. 아! 그걸 보면서 제가 느낀 점이 바로 천사가 저렇게 움직인다. 그럼 천사가 저렇게 움직이는데 천사는 누구의 명을 받느냐 하면 성자의 명을 받아요. 그러면 성자의 명을 받는데 천사가 왜 기계처럼 움직이느냐 하면 인간은 천사처럼 일을 못해요. 왜 못하느냐 그놈의 정 때문에 왜 정이 많고 사정이 많고 따지는 것도 많은지. 그런데 천사는 기계 같아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그대로 인정사정도 없이 그렇게 해요. 

‘문설주에 피가 없으면 너는 다 죽여라.‘ ’예‘ 그냥 인정사정없이 그야말로 애굽의 애들, 애굽의 맏이들을 다 죽인 거예요. 마치 안산의 애들을 다 큰 아들 다 죽인 것처럼, 유월절처럼 아무 감정도 없이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럼 천사는 그냥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이 묵시 때, 마지막 때는 모든 일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천사가 허드렛일을 다 하고 우리는 수고하지도 않는데 참여하는 얻어 챙기고 얻어 주워 먹는 작은 역할을 우리가 맡아서 ‘다 주님의 공로입니다.’ 이거 하라고 성도한테 일을 맡겨줬어요. 여러분들이 성도기 때문에 주워 먹으라는 거예요. ‘그것도 못하냐. 이 바보야.‘ 주워 먹는 것도 못하느냐 말이죠. 감사하면서. 항상 감사함이 나올 때 그게 주의 일이고, 감사함이 안 나오면 안 주워 먹는 거예요. 늘 주워 먹어야 돼요. 

남편이 바람이 났다. ‘주여, 남편이 바람이 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가려면 가라,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 난 너하고 안 살래.’라는 것을 주워 먹어야 해요. 왜냐, 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보다 더 심한 수모를 당했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 사이는 하나는 고난 받고 고난주셨거든요. 그 고난주심에 우리가 참여되는데 우리보고 참여하면 구원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참여케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일도 다 주워 먹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 다섯 명 사귀다 헤어지고 여섯 명 사귀는 것도 사실은 자기가 해야 될 역할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그 사람은 강도 아니면 구원 못 받을 뻔 했습니다. 강도해야 돼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이 부도 맞고 말아먹고 강도질 했다. 그게 뒤돌아보면 전부 다 하나의 역할 이예요. 어떤 역할? 이미 구원받은 것을 주워 먹는 역할이다 말이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잖아요.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였죠? 복음전파가 아니고 빨리 죽여주세요. ‘아직 멀었어, 너는 저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 돼.’ 반대가 되었어요. 사도바울은 죽는 게 소원이고 사는 것은 괴롭고. 우리는 반대가 돼서 사는 것은 즐겁고 죽으면 우리는 애통을 하면서 어떻게 조치를 취하라. 횡포를 부리면서 이러고. 

사실은 유족들은 나라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자기 애 죽은데 누가 그렇게 신경 써주고 온 나라가 노란리본 달고 신경 써주면 고개를 못 들고 ‘이 부족한 천한 것들을 위해서.’ 이래야 될 텐데 이건 뭐…. 그렇게 나오면 안 돼요. 그걸 보면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긴 들죠. 건드려 보니까 인간이 얼마나 악마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아이쿠, 청와대에서 바쁘신데 여기까지 내려오십니까?’ 이렇게 돼야지, 대통령한테도 달려들려고 하니 눈에 뵈는 게 없어요. 

내가 주일 낮에 그런 설교 했잖아요. 사람이 죽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아예 아브라함보고 아버지가 멀쩡한 자기 아들을 칼 들고 죽이라고 시키는 그게 하나님이다 말이죠. ‘내 아들 왜 죽였습니까?’ 따지지 말고 진짜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데 죽이는 정도가 아니고 ‘네 손으로 네 아들 죽여라.‘고 지시하신 그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 이예요. 그거 순종할 수 있겠어요? 하나 죽여 보렵니까? 여러 명 되는 거야,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를 어떻게 죽입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요. 어떻게 그런 일을 시킵니까? 네가 뭔데? 사람은 ’주여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말할 자격조차 인간은 없어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인간은 미리 요구할 그러한 잽이 못 된다니까요. 주제 파악이 안 돼요. 

인간은 하나의 장기 알에 불과하고 바둑알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어떤 관계?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세상은 재편성 되는데 고맙게도 우리가 그 관계를 보여주는 주워 먹는 식으로 관계를 보여주는 그런 증인 된 것, 이것만 해도 우리는 ‘정말 황공무지로소이다. 전하.‘ 하고 엎드려서 ’감축 드립니다.‘ 이렇게 하면 돼요. 

다시 봅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자 보라 했죠? 저쪽에서는 하나님이 장기 알을 어린양을 찾아오고 이쪽에는 하나님이 세례요한 장기 알을 위치에 놓고 그 위치와 어린양의 위치 두 지점이 만납니다. 만나면서 그동안 몰랐던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가 지금 여기 지상에 세례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주어집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저분은 장차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입니다.’라고 그 뒤에 나오죠.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오니까 도대체 이 세상이 하늘나라 세상인지 지상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누가 주도권을 쥡니까? 성부 성자 성령이 온전히 이 세상을 접수했죠. 이 사실을 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지 성령 받지 아니하면 이 사실을 몰라요. 이 세상은 미국이 주도하고 있고 중국이 다투고 있으며 북한의 핵문제, 이런 관계가 아니고 이 세상은 성부에 의해서 성자가 오셨고 성령 주셔서 성령세례 받으면 구원받고 나머지는 어두움이라고 저주받게 된다는 그런 현실관을, 현실 정치관을 그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어느 나라도 선교가 돼요. 나이지리아를 가든지 알래스카를 가든지 그 정신으로 가야 돼요. 알래스카 가면 환영받을까?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속에 있어야 돼요. 있으면 어디 가도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울릉도 가도 살 수 있고 독도 가도 살 수 있고 어디 가도 살 수 있어요. 저보고 세월 호 타라 하면 타고 갈 겁니다. 

제 아내가 이런 이야기해요. 버스 탈 때 제일 앞자리에 타지 말라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어디서 소리 들었는데 고속도로 달리다가 갑자기 앞의 트럭에서 뭔가 못이 날라 와서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서 사람이 다칠 뻔했다는 거예요. 당신은 반드시 운전석 뒷자리에 앉든지 하라는 거예요. 안 죽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니고 사나 죽으나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세례요한이고 사도요한이고 성도인 겁니다. 이 판을 내 장기판으로 삼지 마시고 내 바둑판으로 삼지 마시고 우리 식구끼리 유용한 그런 세상으로 전환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벌려 놓은 판입니다. 시장판 이예요. 그걸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은 성령 아니면 우리가 그게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 29절에 보면 “보라” 그 다음에 뭐를 지고 갑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죠? 자,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졌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졌으면 그러면 지옥 갈사람 아무도 없겠네요? 답변해 보세요. 세상 죄를 다 졌다면서요? 그러면 지옥 갈사람 없네요. 주님이 몽땅 다 쓰레기처분 했으니까.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야기하면 앞뒤 맞춰보면 세상 죄는 세상의 죄가 아니고 세상 죄에서 있는 자기 택한 백성의 죄를 짊어졌다고 그렇게 설명이 되거든요. 이 설명은 맞기는 맞는데 너무 구원론 적이고 사적 구원론 적인 감이 강해요. 그래서 이것은 다시 설명돼야 됩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할 때 이렇게 설명하면 쉬워요. 뭐냐 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갔음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게 정답입니다. 지금 우리는 틈만 있으면 내 구원 받으려고 시도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잘라버리세요. 내 구원은 성령이 와야 돼요. 아까 강의 다시 할까요?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서 예수님과 성령의 관계에서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세례 줘!’라고 할 경우에만 성령께서 움직이시거든요. 그러면 그거는 예수님과 성령 관계잖아요. 그 관계를 우리가 달라고 요구할 입장이 못 된다니까요. ‘뭐하십니까? 지금 기다리는데 몇 시간째야. 성령 안 오고.’ 이렇게 짜증내고 투정 낼 그런 입장이 못 돼요. 돈 받을 거 있어요? 왜 그렇게 나옵니까? 

장기를 못 두시니까 말하기가 뭐한데 장기에서 말을 움직일 때가 있고 상을 움직일 때가 있고 졸을 움직일 때가 있어요. 저쪽에서 공격해오는데 졸 하나 이거 움직이다가는  맥없이 지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이 때가 상을 움직일 때인지 안 그러면 천사를 움직일 때인지 이건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결정하고 예수님과 주님 사이에서 결정할 문제거든요. 이 장기판을 자꾸 내 구원되는 중심, 내 중심의 장기판으로 잡아당기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숟가락만 얹을 뿐이고 젓가락만 얹을 뿐이지, 백날 얹어 봐도 숟가락 젓가락 안 되면 기다려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사람만 구원받고 나머지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은 누구밖에 없어요? 예수님만 구원받아요.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이 우리 구원해주려고 나왔다고 너무 성급하게 마시고 이것이 바로 율법에 부합되는 이야깁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것은 바로 구약에서 모세 율법에서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한 어린양의 제사의 희생에 대한 의미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유월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애굽에서 나올 때 죽음의 천사가 오잖아요. 그러면 피를 바르지 말고 양을 한 마리 바깥에 세워놓으면 어떻겠어요? 제 아이디어인데, 물론 도망가면 안 되니까 묶어서 ‘양아 네가 알아서 죽어라.’ 하고 내놓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양은 잡고 그 가정에 있는 맏아들은 살려줄까요? 아니죠. 왜 아니냐 하면 내가 죽이나, 하나님이 죽이나, 양 죽으면 되잖아, 하는데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어린양만 구원하지, 문 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 안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어린양 때문에 누가 살았습니까? 맏아들 살았죠. 맏아들 살았으면 맏아들이 여전히 그 집안의 아들이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그 맏아들이 유월절 죽음의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그 집의 맏아들 이예요? 아니면 누구의 소유로 등기됩니까? 하나님의 아들로 등기되는 거예요. 잘 기억 나시는가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따지고 보면 참 골치 아픈 이야기가 많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누구 것이다? “내 것이니라” 이게 뭐냐 12장에서 유월절 하고 난 뒤에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네 아들 귀하지?’ ‘귀합니다.’ ‘살려줄게.’ 이런 차원이 아니고 애굽 사람은 진짜 죽었고 히브리인들도 아들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다만 어디 안에 살아있다? 아들이 그냥 있으면 죽었는데 누구 손에 있기 때문에 살았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살은 거예요. 그러니까 맏이가 주님의 것이라는 말은 다른 형제들도 같이 그 온 집안이 주님의 것이 돼 버립니다. 맏아들이니까. 맏아들이란 것은 십일조를 이야기하거든요. 맏물, 처음 것을 가져가게 되면 나머지는 덩달아 오게 돼 있어요. 신약에서 머리싸움이 몸체 싸움이 되거든요. 머리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교회 머리잖아요. 머리싸움이 그 다음에 무슨 싸움? 몸체 싸움이 지체 싸움. 머리가 승리했으면 우리는 저절로 뭐가 돼요? 이미 구원을 받은 게 돼요. 원리가 유월절 원리라니까요. 

맏아들이 우리 집에 아들이 있으면 안 돼요. 구원이 안 된다니까. 그러면 우리는 그 맏아들을 보내야 돼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너는 떠나거라. 이놈아.‘ 하고 보내야 맏아들이 살면 같이 사는 거예요. 맏아들을 죽여야 돼요. 천사가 죽이기 전에 먼저 그 집안에서 ’나는 이제부터 너는 내 맏아들 아니야. 너는 하나님 꺼야.‘하고 떠나보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집안 식구가 맏아들을 죽여 버려야 돼요. 그 죽이는 대신 누굴 죽인다? 같이 일 년 동안 살았던 어린양을 맏아들로 여기고 대신 죽이고 피를 바르고 ’우리 집은 벌써 맏아들 죽여 놨어요.‘ 하고 피를 바르는 거예요. ’우리 집은 우리 아들 이미 내 손으로 잡아 죽였습니다.‘ 없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할례라는 겁니다. 신약을 통해서 유월절을 우리가 다시 받아야 돼요. 할례라 하는 것은 끊는 거예요. 그리고 그 끊어지고 없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 것으로 채우는 겁니다. 그걸 아까 껌이라 했죠. 껌! 나의 전부를 죽이고 비어있는 그 공백의 자리에 주님의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주님을 증거 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내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날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 주님입니다.’라는 이러한 접합돼 있는 관계, 그 관계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우리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부 다 우상으로 만들어지고 주님의 구원은 이스라엘로 만들어 내요. 가는 길이 달라요. 대통령 죽이려는 범인들이 ‘대통령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경호원이 엉뚱한 데를 가르쳐주잖아요. 3 days, 그러니까 이게 핀트가 안 맞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으려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가는 길은 마귀가 기다리는 길이예요. 바리새인 사도개인들이 저희 애비가 마귀잖아요. 그들은 하나님 이용해서 자기구원만 챙기면 끝난다고 생각한 거예요. ‘봐라, 너희는 여호와 없지? 우리는 여호와 때문에 구원받았다.’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들은 천국에서 쫓겨나고 백부장이 그 자리를 채우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을 만들되 이스라엘은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는 물리치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대로 만들어진 사람, 언약대로 어린양 죽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 그 어린양이 지금 신약에 나타났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그때 실패한 그 이스라엘 대신 나는 이스라엘 만들고자 왔다 하는 말과 같은 이야기에요. 

이걸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이스라엘 자체를 만드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저는 이렇게 합니다. 베니아판, 오랜만에 들어봤죠? 합판 종류인데 질 나쁜 목재 쓰레기로 본드 붙이면 베니아판 되잖아요. 베니아판 대면 옆의 소리 다 들리고, 전혀 방음이 안 되는 베니아판. 

이 베니아판이 이렇게 오게 되면 전에 TV 예능에서 쟁반놀이 하는 것 있었죠? 틀리면 위에서 쟁반이 떨어지는 쟁반 놀이방. 이 베니아판이 ‘구원해 주세요. 옆에 얘보다 내가 착하니까 구원받습니다.’ 하다가 베니아판이 뚝 떨어지게 되면 전부 다 얻어터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베니아판에 담겨서 오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겠다고 하는데 주께서 호응하지 않습니다. 너 구원받고자 하는 자체가 죄니까. 그러면서도 주님은 언약대로 계획에 차질 없이 착착 진행돼서 덮쳐버리듯이 성부 성자고 그 뒤에 성부 성자 업적을 우리에게 세례를 주게 되면 그게 무슨 세례? 성령 세례가 되는 겁니다. 

32절에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지금 예수님의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원은 뭘 보여준다?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관계를 보여줘야 구원이라 했죠? 이 베니아판을 보여줘야 성부 성자를 보여줘야 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한테 먼저 떨어졌잖아요. 성령이 오신 거예요. 그러면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만 오시겠어요? 나중에 구원받을 사람에게 오게 돼 있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에게 오게 돼 있는 겁니다. 

자, 여기 중요한 것을 해봅시다. 세례요한이 뭘 주느냐 하면 물세례 준다고 했잖아요. 물세례 줄 때 물세례라는 것은 이게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나오고 그리고 이사야에 보면 물로 깨끗하게 씻는다는 대목이 나와요. 그리고 그 물이 성전에서 흘러온 물로 정결하게 하는 거예요. 불로 태운다는 대목도 나오고 물로 씻어준다는 대목도 이사야, 에스겔에도 죽 나오거든요. 

그래서 구약 적 입장에서 보면 세례요한의 물은 이건 선지자가 마지막 때 회개하라고 주는 물이라고 보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의 물세례는 그게 아니고 성령께서 세례 주는 그것을 폼을 내기 위한 표식으로 앞당겨서 물세례를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메시야가 아니죠. ‘나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세례요한이 와야 됐어요. ‘메시야로 보이지?’ ‘아니거든’ 라는 관계에서 ‘~~가 아니요’라고 먼저 깔아놓기 위해서 왔듯이 물세례 주면서 ‘요걸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라고 하면서 물세례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로 세례 주는 것은 진짜를 보여주기 위한 예비동작이 그게 물세례라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애들을 꿀밤 주면서 그냥 때리는 게 아니고 ‘공부하란 말이야’ 하면서 손 제스처로 예비동작으로 겁을 주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때리든지 말든지 하지, 그게 물세례에요. 때리는 게 성령세례고. 

성령세례와 물세례 특징이 뭐냐 하면 모두다 그 본인을 없애버린다는 거예요. 자아를 없애버려요. 여기서 자아 이야기를 해보겠어요. 아직까지 정신 말짱하니까 어려운 거 해야 돼요. 원래 자아라 하는 것은 없어요. 그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자아에 실체가 없다고 철학에서 이야기하는데 자아는 없어요. 그럼 뭐가 있느냐 하면 몸이 있고 육신이 있는 겁니다. 몸이고 육신이 있는데 사람들은 육신이라 할 때 나는 육신, 몸만 있다. 하지 않고 뭣이 뒤집어 씌워졌느냐 하면 정신이 뒤집어 씌었거든요. 

그러나 주님께서 데려갈 때는 정신을 데려가는 게 아니고 발가벗긴 육신만 달랑 손잡고 데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육신은 뭐냐 하면 육신은 인간이 죄지었던 결과물이 육신입니다. 늙죠, 죽죠. 이마에 땀 흘리죠. 여자가 해산한다는 것은 옷을 원피스 입었느냐, 투피스 입었느냐에 관계없이 해산되잖아요. 보세요. 원피스, 투피스는 패션이라는 정신문화에 속한다 말이죠. 하지만 원피스 입었다고 애 잘 낳고 투피스 입었다고 애 못 낳고 그런 건 아니거든요. 이거는 애 낳는 육신, 몸, 육체와 관련돼 있지, 걸치고 있는 옷이라든지 문화라든지 정신과 관계없다 말이죠. 

우리는 대통령이 박 근혜 대통령 때문에 애 잘 낳는다. 이런 건 아니다 말이죠. 육신은 본다고요. 몸을 보는데 이 몸이 모든 사람이 동일해요. 신장이고 혈압이고 동일해요. 왜 그러느냐 하면 혈압이 달라도 동일한 건 같은 아담의 몸에서 DNA로 새끼 치듯이 새끼를 깠기 때문에 인간이란 생물체는 고만고만한 전부 다 똑같은 몸 이예요. 그야말로 생물학적으로 수정이 가능한 걸 같은 종, 같은 종류에 속한다. 돼지는 돼지로 인간은 인간으로 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이 몸을 어떤 몸으로 보느냐 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음의 흔적을 보여주는 몸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내 몸이 왜 죽었어? 살아있지.’ 그런데 물이 덮쳐버리면 물에 빠져서 못 살아나잖아요. 11도에서는 3시간을 못산다 하니까. 물세례가 뭐냐 하면 이 몸을 죽은 몸으로 확정짓는 표식이 물세례입니다. 그런데 아까 물세례는 성령세례에 대해서 폼 재는 거죠. 그럼 성령세례는 뭡니까? 몸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고 죽음의 개념이 확장돼요. 뭐냐 하면 저주 때문에 죽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물세례 같으면 ‘꼬륵, 꼬륵, 숨 못 쉬겠네. 죽자.’ 이러면 죽기는 죽는데 왜 죽어야 될 이유가 밝혀지지 않잖아요? 

그런데 성령세례는 죽이기는 죽이되 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죽인다는 그 죽음의 깊이와 그 범위가 확정적으로 완료가 된 상태에서 죽여 버리면 물세례 받으면 구원 받겠어요? 안 받겠습니까? ‘그야 죽으면 죽지.’ 이거는 아직 주제를 파악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로부터 온 성령을 세례 받으면 ‘그래, 맞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아담의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 사람만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런 사람만 구원받는다 말이죠. 그러니까 물세례 받아서는 구원이 안 돼요. 그럼 뭘 받아야 돼요? 성령세례를 받아야 자기 주제 파악이 최종적으로 확정이 돼요. ‘그래,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될 때 구원받아요. 왜 죽어 마땅하느냐 하면 성령세례가 십자가에서 나왔거든요.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는 것은 사실 예수님이 죽어야 될 자리가 아니고 누가 죽어야 될 자리에요? 우리가 죽어서 우리가 버림받아야 될 자리다 말이죠. 

그 우리의 본모습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때 그 모습을 성령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확인될 때 ‘맞습니다. 버림받아도 내가 버림받아야 될 건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주님께 달려들고 이런 인간이 죽어 마땅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제 그 관계를 통해서 예수님을 즐겁게 하고 하나님의 관계가 하나 됨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차질 없는 자기 프로젝트를 우리를 통해서 계속 장기 게임을 밀어붙이고 나가는 거예요. 어렵지 않잖아요. 지금 이것이 하나도 안 어려운 것은 중간에 뭘 뺏기 때문에? 나의 구원을 애초에 잘라버리고 빼니까 성경이 그렇게 쉬운데 언제 어려워지느냐 하면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해요. ‘나는 뭐하면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이제부터는 일곱 귀신 다 달려들어요. 뭐 구원 파, 온갖 이단들 다 달려들어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받는다.’ 고 무슨, 인간 구원자체가 없는데 뭘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받아요? 인간 구원자체가 없는데. 인간은 아예 구원 안 되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만 구원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만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수행했기 때문에. 참 내가 말하면서도 담아있는 말을 하는데, 예수님이 어린양을 졌기 때문에 구원받은 게 아니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뜻에 순종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구원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계획했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면 그 자체가 구원상태에요. 

그럼 우리는 아버지 뜻을 모르잖아요. 왜 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럼 애초부터 구원대상도 아니고 구원받을 자격도 안 된다니까요. 우리가 자꾸 구원을 언급하는 것은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살기가 힘들고 늙고 아프고, 죽어서는 호강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죽으면 천국 있겠지. 이거는 마귀가 그렇게 만들어준 거예요. 종교란 이름인데. 종교거든요. ‘행복하십니까?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도를 아십니까?’ 이 짓이 무슨 짓인가 하면 아버지 뜻도 모르는 인간이 구원을 왜 언급해요? 진짜 못 쉬어도 좋은데 속 탑니다. 자꾸 생각을 하나님 쪽에서 생각을 해야 돼요. 하나님은 자기 뜻을 온전하게 모르면 구원 안 시킵니다. 괴롭다고 고생한다고 구원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는 아버지 뜻밖에 몰라요. 우리가 힘들든 말든 그건 당연한 것이고.

아버지 뜻을 아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뜻만 아실뿐 아니라 세상 죄를 지라는 뜻에 순종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서 구원이 완성이 된 거예요. 그 다음에 구원이 오고하는 것은 그건 성령이 안 오면 안 되는 거죠. 뭐. 그런데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준다면 이건 이미 완성된 구원에 우리를 하나로 참여시켜서 노력하지도 않고 수고하지도 않은 것을 거저 얻어먹는 그 역할을 하라고 우리보고 성령을 준 거예요. 

성령 받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이제는 공짜로 구원받았구나.’를 자랑하라고 한 거예요. 누구 공로다? ]예수님만이 그렇게 순종했고 우리는 구원이 뭔지도 몰랐는데 주께서는 자기공로를 우리에게 혜택을 입혀줘서 가만히 앉아서 구원받아버렸네.‘ 요거 자랑하라고. 수고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참여되었다고. 주일날 요한복음 4장에.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구원을 넣지만 않으면 굉장히 문제가 쉬운데. 그러면 그거 알면 구원받습니까? 또 이렇게 끼어들면 그 다음부터 복잡해지거든요. 성령이 안 오면 어떻게 됩니까? 도대체 피조물이! 보세요. 자식이 부모보고 ‘부모님’ ‘왜’ ‘왜 저를 이렇게 만들어놨습니까?’ 그게 할 소리입니까? 그게 할 소리 아니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식이 부모한테 왜 그렇게 따지느냐 하면 부모 세례에 들어갈 생각 안 하고 자기 세례 따로 만들어 놓고 거기다가 부모를 강제로 집어넣으려 하니까 이게 안 되니까 부모가 잘못해서 내 일이 안 된다 이러는 거예요. 

하늘나라가 뭐냐 하면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나라에요. 따라서 우리나라 따로 만들 필요 없고 만들어진 하늘나라에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먼저고 하나님이 먼저고 우리는 하늘나라 넣어주기만 하면 어떤 자리에서도 강도가 되던, 창녀가 되든 넣어주기만 하면 ‘왜 저를 창녀로 만들었습니까? 강도로 만들었습니까?’라고 할 필요 없이 ‘감사합니다.’ 하고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자꾸 자기 세계를 따로 만들려 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내 애는 죽으면 안 되고 어떻게 공부도 잘해야 되고, 자꾸 자기 세계를 만들어버려요. 만약 만들게 되면 그런 사람 천국 못 갑니다. 왜 천국 가봐야 거기서 자기 부스 만들어서 거기서 부동산 중개할 사람 이예요. 부동산 장사할 사람 이예요. 

취업 박람회 보세요. 부스 만들어서 전부다 회사마다 사람들 있죠. 꼭 그 모습 보니까 천국 가도 그럴까 걱정돼요. 천국 가면 전부 다 부스 만들어서 여기는 세미원 가게 있고 전부 다 있어요. 이게 무슨 천국입니까? 자기나라지. 여기는 대성학교 출신 있고 서울대학 출신 있고 이게 무슨 천국 이예요? UFO 믿고 온 사람도 있고, 그래 가지고 무슨 천국 이예요? 싸그리 불도저 가지고 따 싸질러서 내 나라 아예 없는데, 왜냐 하면 내 구원자체가 주님 앞에 결제 받지 못했다. 주님 구원받았는데 덩달아 구원받았지, 내가 내 구원을 간절히 기다렸는데 주께서 과연 내 구원했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내가 장담할게요. 주님의 구원에 콩고물로 묻어 들어가는 것이지, 성령이 온 것은 너 착하니까 구원받아라, 가 아니라 주님 생각해서 너 구원한 게예요. 그래서 구원받았다면 누구만 생각하라? ‘나 구원받았다.’고 잘난 체 하지 말고 주님 덕분에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수요일 날 경상도 말로 썼죠. 저도 오랜만에 썼어요. 경상도 말 잊어버렸죠? 까부는 걸 경상도 말로 뭐라 합니까? 아찌라. 내 구원을 포기하면 아무 문제없이 주님만 감사할 뿐인데 꼭 자기 구원해서, 마귀가 그런 짓해요. 

요한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오는 걸 보고 ‘아하, 장기 게임이 벌써 시작됐구나.’ 우리는 몰랐는데 자기는 그걸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얼마나 두근두근! 본인은 엄청난 큰 프로젝트가 하늘로서 내려앉는데 이건 꿀밤 먹어도 지금 배부른데 지금 독가스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진도에 배 빠지는 것도 문제 되지도 않아요. 위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게 있는데 진도에 애 죽는 게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니까요. 이게 성령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 받은 상태가 되면 애가 시험에 떨어져도 전액 장학생 안 되도 아무 관계없어요. 그거 문제 안 됩니다. 강아지가 아파도 큰 문제 안 됩니다. 집 나가도 별 문제 아니에요. 세례요한은 이걸 보고 뭐라 하느냐 하면 ‘나는 쇠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인 카운트’라는 스필버그의 영화에 보면 거대한  UFO가 LA인가 뉴욕 하늘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자기 일상생활을 못했어요. 왜 예상도 못한 충격적인 쇼크를 받은 거예요. 세상에, 진짜 UFO가 있을 줄 몰랐다고.  UFO에서 외계인이 왔다 갔다 하면 기절초풍하죠. 드라마 V에 나오는 것처럼. 파충류 외계인이 나타나면 기절초풍하잖아요. 세례요한이 그 기분이라니까요.

역사에서 누가 이기고, 기황후가 왕후 되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기황후고 탈탈이고 대승상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위에서 온다니까요. 회사운영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위에서 UFO 던져보세요. 회사운영 아무것도 아니지, 수리하느라 귀찮긴 귀찮지만. 수리정도가 아니고 이건 마지막 때라니까요. 마지막 때! 

사도요한이 바로 밧모 섬에서 요한계시록을 볼 때 그 기분이었어요. 세상 짐승나라 망하도록 해라 해. 끝났도다. 끝났도다. 세 독수리 편대가 가면서 ‘끝났어. 끝났어. 천사가 다 조져버려.’ 그리고 미리 앞당겨서 마지막 심판을 봅니다. 행위 책과 생명책에 이미 다 알아버렸어요. 사도요한은 다 알아버렸어요. 천사가 지배하고 그야말로 UFO가 그냥 공중에 머리 박치기 하듯이 내려오고 있고 자기 일상의 일은 의미 없이 돼 버려요. 일상의 일이 누구 복권 당첨되고 이거 아무 의미가 없어요. 남북통일 되고 아무 의미 없어요. 위가 통일 되는 게 중요하지 지상 통일돼서 뭐합니까?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날 때 마찬가지였어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할 때 이건 완전히 외계인 만난 겁니다. ‘주여 살아계실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럼 죽은 줄 알았느냐?“ ‘이렇게 살았으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내 증인 되어라.“ 그래서 자기는 물이든 불이든 막 가려고 하잖아요. 이건 정신없이 가는 거죠. 그게 성령세례 받은 겁니다. 이제 이해되시겠죠? 아주 간단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