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마이너스 세계

아빠와 함께 2026. 4. 9. 08:28

마이너스 세계 

2026년 4월 8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4:42-44

(4:42) 한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43)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 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4)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

누가 떡을 엘리사에서 가져왔습니다. 20개와 채소 한 자루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사환에서 그 현장에서 무리에게 나누어주어라고 했습니다. 사환은 선지자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 의심해서 지시에 대해 다시 묻습니다. 그때에 엘리사 선지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거론합니다.

즉 인간들이 인간을 향한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인간을 향한 방향을 지닌 지시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인간들의 견해와 하나님의 견해가 서로 다른 것은, 벌써 인간들의 상황 판단의 한계를 들추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본인들이 ‘하면 되는 일’과 ‘해도 안되는 일’을 나름대로 구분 짓기 때문입니다.

이 방향이 중요한 것은 무한이 무한으로 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유한이 유한으로 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한은 무한으로, 무한은 유한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이 무한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 밑에 또 다른 무한의 세계가 있어 그것이 존재를 밀어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무한의 세계의 활동을 의식 안 합니다.

인간 존재 지반의 세계는 무한 쪽에서 누군가 유한의 모습으로 오셔서 알려지게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지시하신 내용은 장차 하나님의 뜻이 최종적으로 함축되는 그 유한한 분이 하실 일을 미리 엘리사 선지자에 나타낸 겁니다. 엘리사의 지시를 받은 사환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100명=떡 20개’

하지만 엘리사가 생각한 것은 100+x=20입니다. 곧 ‘넉넉함’에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는 x가 포함되는 내용이 떡 20개 안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x=20-100입니다. 즉 x=-80입니다. 떡 20개나 사람 100명이나 엘리사와 더불어 있다면 곧 무한의 영향력은 그 현장에서 받고 있게 된 겁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의식은 자기 존재가 정당하고 마땅하게 기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무한 쪽에서 무한이 되신 분은 인간들의 눈에는 무슨 넉넉함을 인간에게 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인간 근원의 어두운 무한성을 밝혀주신 겁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 기적’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5000명을 넉넉하게 먹이시고 12광주리를 남기게 된 것을 예수님은 모세의 만나를 연결시켜서 설명하십니다. 즉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 6:49)으로 운을 던지십니다.

출애굽기 16:18-20에 보면,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무한으로 만나를 주셨는데 땅에 있는 인간들은 그 만나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내면의 욕심이 가동됩니다. 이는 인간 존재 바닥에서 올라오는 무한한 어두운 세력이 있었던 겁니다. 즉 만나는 어두운 바닥을 가진 인간에게는 그 무한성이 죽어버립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16:33-4에 보면, 만나가 언약궤 안에서는 썩지 않습니다.

이는 하늘의 무한은 비록 땅에서는 유한으로 응축되지만 궁극적 완성은 다시 무한으로 귀착됩니다. 요한복음 6:66에 보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자들은 모두 다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간 존재 기반을 차지하는 무한한 어두움 세계까지 내려가신다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의 활동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막 32-34) 예수님의 육으로 응축된 무한의 활동으로 인해 인간 존재를 떠받드는 어둠의 무한이 정체를 드러납니다.

육의 세계에 머물고 존재의 바닥으로 내려가지 못한 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고 그 앞에서 도망치고 맙니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 반면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아예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을 본 백부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 15:39) 마치 만나가 언약궤에 안치되므로서 만나 본연의 본질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처럼 하늘의 영원한 분이 영원한 저주의 세계를 다녀오심으로서 주님께서 함유한 영생의 세계에 백성들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무한에서 유한을 거쳐 결국에는 무한 안에서 완성이 되는 그 절차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가 되는 언약궤 상자의 취지가 유한 안에 담긴 무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대자연에서도 해당됩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십자가 복음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일단 해와 달과 별을 통해 하나님의 인자, 곧 사랑과 성실하심을 발견해야 합니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8-9) 그런데 이런 별이나 달도 신약에 와서 주님의 십자가 지심, 곧 저주받으심을 거치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 왜 결국에서 하늘에서 떨어질 해와 달과 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취지에서 붙들고 계시는 걸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성실의 영원함 때문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시 89:1-2) 길 가에 자라나는 들풀에서는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30) 어두움의 풍부함을 능가하는 죄사함의 능가함을 넉넉하게 증거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로부터 하늘을 보지 않고 이미 우리 안에 하늘의 요소가 당도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0강-열왕기하 4장 42-44절(마이너스 세계) 260408-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4장 42절에서 44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4:42-44

“한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 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

어떤 사람이 ‘처음 익은 보리떡 20개와 채소 자루’를 엘리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사람에게’ 보리떡 20개와 채소 자루를 준 거예요. 그런데 엘리사는, 채소 자루와 보리떡 20개를 단지 사람이 사람에게 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금 시행하는 어떤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줬다’고 보는 거예요.

‘저 사람이 나에게 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 보리떡 스무 개와 채소 자루를 주었다.’ 이렇게 엘리사는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방향이 사람 쪽에서 오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이런 상황을 주셨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사가 몇 명을 부르냐 하면, 100명을 불러요. 아마 그 현장에 한 100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사환이 엘리사에게 “이걸 이 사람들에게 나눠주라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짓입니다.” 보리떡 20개, 보리떡 20개 같으면요, 쯔양같이 많이 먹는 그런 여자는 혼자서 다 먹어요. 채소 한 자루 혼자서 다 먹는다고요.보리떡 스무 개와 채소 한 자루를 100명에게 주라고 하니까 사환이 어처구니가 없는 거예요. “어떻게 이걸로 백 명을 먹입니까?”라고 한 거예요. 엘리사의 지시를 받는 그 사람도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엘리사라는 사람이 역시 100명이라는 사람에게 주는 그것이 보리떡 20개와 채소 자루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대번에 이렇게 된 거예요. “이걸로 어떻게 100명을 먹이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람 대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해서 되는 일과, 해도 안 되는 일’을 인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 대 인간’에서는 해서 되는 일에 충실하고 그것으로 계속 나아갑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거쳐버리니까, 엘리사와 함께 있는 사람은 해도 안 되는 일을 지시받은 거예요. 해도 안 되는 일입니다.

엘리사는 왜 인간으로서는 해도 안 되는 일을 지시했는가? 엘리사 뒤에 하나님이 계시거든요.여기서 방향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인간이 보리떡 20개와 채소 자루를 가져왔다. 누구에게? 인간이 인간에게. 그 방향이 ‘인간이 인간에게’죠. 그런데 엘리사 입장은, 하나님이 엘리사에게 줬고, 엘리사가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왜 그런가? 열왕기하 4장 43절에 보면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인간 대 인간’ 쪽에서는 이것은 ‘해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죠.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다음에 나온 말씀이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뭐냐 하면,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까발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해서 되는 일과 섞이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섞일 수가 없는 거예요. ‘안 됩니다’라는 것은 인간 쪽에서의 반응인데, 그 반응을 하나님이 충분히 아시고, 인간들이 해도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일이 인간의 일과 얼마나 차이 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걸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열왕기하 4장 44절에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수학 들어갑니다. 100명이 떡 20개를 먹은 게 아니에요. 100명 더하기(+) 미지의 x, ‘100+x=20’ 여기서 하나님의 일이 뭐냐? 하나님이 미지의 x거든요.

x를 풀려면 100을 반대편 항으로 이항해요. 그러면 20-100=x 하면, x=-80이 나옵니다. 수학 에 소질 없는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모를 거예요. 마이너스(-) 80이에요. 왜? 남았으니까. 남아 있는 것이 80이라고 보면 돼요. 앞에 마이너스(-)가 붙어요. 인간들끼리 노닥거리는 이 이 세상에 대해서 인간은 엄두도 안 나요. 인간 세계에 너도 있고 나도 있잖아요. 수학으로 표현하면 플러스(+)예요.

플러스(+)의 세계에서 인간들은 ‘남았더라’ 하니까 ‘더 많이 줬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방향이에요.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식으로 하면 ‘더 주셨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출발이 하나님 쪽에서 인간 쪽으로 와버리면 인간들이 어디에 무지한가? 뭘 모르느냐 하면, 인간 있음의 세계 바닥에 있는 마이너스(-) 세계를 인간이 모르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지금 현장에 인간들이 다 있고 배불리 먹었으니까 ‘유한한 우리 인간에게 무한하신 하나님의 무한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렇게 생각하죠. ‘유한’, 인간입니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가잖아요. 그러나 그 해석은 인간들의 해석이에요. 인간들이 흔히 ‘기적’ 운운할 때 ‘자기는 일단 멀쩡하고 거기에 뭘 더 보태서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방향을 인간 쪽에서 하지 말고 하나님 쪽에서 출발합시다. 하나님의 쪽에서 출발할 때는, 하나님은 무한이니까 ‘무한 쪽에서 유한 쪽으로’ 와버려요. 무한인 하나님 쪽에서 유한 쪽으로 와버리면 유한한 것…, 백 명도 그렇고 떡 스무 개도 유한하잖아요. 사람도 그렇고 떡도 유한하죠. ‘놀랍게도 유한한 것에 무한이 들어 있다’가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요, ‘무한한 세계의 메시아가 자기한테 오게 되면 자기는 무한한 메시아의 능력으로 무한한 나라 천국에 간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는 그 생각을 뒤집어요. 반대로 합니다. 하나님이신데 유한한 인간이 되신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까?

빌립보서 2장에 있잖아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인간의 있음은 그 있음이 인간의 다가 아니라, 그 바닥에 없음의 세계, 어두운 세계인 마이너스(-) 세계가 인간의 있음을 받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이걸 몰라요. ‘하나님 저는 멀쩡합니다. 이 멀쩡한 내가, 정상적인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테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소서. 구약 때 엘리야와 엘리사가 먹고도 남았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먹고 남도록 멀쩡한 나를 더욱더 풍성하게 해주세요.’

이게 인간들이 하나님께 은근히 기대하는 기적이잖아요. 하나님이 그걸 뒤집어서 “네가 그걸 요구한다는 것은, 현재 네가 멀쩡하다고 여기는 그것이 멀쩡한 것이 아니고 밑에 그 무저갱이 있다. 무한한 어두움, 그 기반 위에 네가 있음도 모르고, 무한한 죄 위에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희의 출발점은 ‘난 여기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습니다, 있습니다’ 하는, 인간들끼리 있습니다, 하고 대화하면서 이 세상을 꾸려나가고 있다”라는 거예요. 자기 바닥이 어두움으로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우리 바닥, 존재의 바닥이 어둡다는 것은요, 무한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응축되어서 유한으로 오셔서 유한으로 오신 그 무한하신 주님이 어떤 일을 벌이게 되면, 인간들이 그 ‘있다’라는 선입감 때문에 몰랐던 인간 존재의 바닥이 얼마나 죄로 가득 차고, 죄로 풍부한지를, 저주가 있다는 사실을 인간에게 알려주시려는 거예요. 그게 표적이라는 겁니다. 기적이 아니고 표적이에요.

잊을만하면 터지는 사고가 있어요. 삼립빵 공장 노동자가 자주 죽어요. 왜 죽느냐? 믹서기에 빨려 들어가서 죽습니다. 여러분도 기억나죠. 하도 자주 일어나니까요. 거대한 믹서기에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그 사고를 보면서 제가 상상하는 거예요. 그 믹서기 앞에서 노동자가 보면 거기에 그게 열린 게 아니고 닫혀 있어요. 믹서기니까 닫혀 있잖아요. ‘닫혀 있고 막혀 있구나’ 생각하고 평소에 무심코 졸거나 안 그러면 다른 일 하다 자기도 모르게 빠져버리면 닫혔던 그 믹서기가 아래로 열려서 빨려 들어가서 사고 나는 거예요. 참 얼마나 아프겠어요.

하나님 쪽에서 오는 기적이, 무한에서 오는 기적이 우리가 미처 생각 못 하는 우리의 바닥, 무시무시한 저주의 바닥이 열려 있다는 것, - 이걸 성경에서는 무저갱이라고 하는데요(눅 8:31), 바닥이 없는 우물이죠 – 곧 어두운 쪽으로 향하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식으로 주께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데, 우리는 ‘나 여기 있으니까 더 보태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철야기도라는 것도 그렇고, 평소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든 것도 다 마찬가지고요.

어떤 식이냐? 집에서 뽑아 쓰는 티슈 있죠. 열왕기상 17장에 나오는 엘리야의 기적이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사의 기적을 보면서 어떤 걸 생각하는가 하면, 티슈 곽에서 휴지를 하나씩 빼내는 식으로 보는 겁니다. 티슈 곽에서 빼내고, 또 빼내고 무한대로 빼내도 또 나오는 그런 티슈 어디서 팝니까? 다이소에서 팔아요? 그런 티슈 곽 같은 것이 있으면 얼마나 기분 좋겠습니까? 뽑아도 뽑아도 계속 뽑혀 나오니까, ‘도대체 뭐야 이게?’ 사람들은 그걸 되게 기분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게 바로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죠. 먹어도 먹어도 계속 나오니까 ‘이분 놓치면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다이소다. 잡아야 한다. 잡아서 우리의 임금 삼으면 모든 경제 문제는 해결된다.’ 기름을 파내도 파내도 계속 나오고, 그런 나라가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그런데 그랬던 사람들이 요한복음 6장 66절에 보면, 다 떠났어요.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다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왜 그런가? 무한하신 주님이 유한으로 응축되어서 사람의 모습으로 왔잖아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요. 이 응축된 주님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니고 저주, 제대로 지옥 가는 자들이 받아야 할 저주의 경로로 빠지니까, 예수님을 따라 그 경로로 빠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원하는 그 방향과 다른, ‘나는 이 땅에 저주받으러 왔다’는 그 방향,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으러 왔다는 그 방향성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방향성을 이야기하면서 요한복음 6장에서 주께서 거론한 게 뭐냐? 만나였습니다, 만나. 광야에서 먹을 게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는데, 이 만나는 무한정으로 주시는 것 같아요.

왜? 아무 노동한 것도 없이 매일 주시니까 무한이에요. 무한인데 사람들은 이 무한을 어떻게 이용했느냐 하면, 이 무한을 내 소유로 이용했어요. ‘야, 공짜다! 끌어모으자.’ 완전히 백화점 오픈런하는 것도 아니고요, 허겁지겁 정신 나가서 ‘야, 무슨 이런 횡재가 있어? 끌어모으자’라고 소유를 생각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왔으니까 무한이죠. 하늘에서 눈발 날리듯이 만나가 왔으니까, 새벽에 눈 내리듯 왔는데 그것이 다 먹을거리가 되니 그걸 내 소유로 삼은 거예요.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나옵니다. 16장 17-18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그런데 분명히 모세가 당부했어요.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출 16:19). 남겨두지 말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소유가 뭐냐? 인간의 소유라고 하는 것은 이 존재의 밑으로 열려 있는, 저주받을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게 인간의 욕망이거든요.

자기 욕망이 무한대예요. 이 무한의 욕망, 여러분들도 한 50억 정도는 벌어봤잖아요. 만족이 되던가요? 50억 벌었어도 성에 안 차지요. 100억은 벌어야 되잖아요. 어디서 스톱할 거예요? 스톱이 안 돼요. 인간의 욕망은 무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 바닥에 무한이 입 벌리고 있으니까요.

마음을 낮춘다고요? 욕심을 비운다고요? 인간이 죽기 전까지는 욕심은 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나의 존재의 범위를, 장소를 확장시켰어요. ‘나의 이 욕심이, 나의 이 소유성이 어디서 나왔지?’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무한에서 오신 그분이 말씀으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돼요.

만나를 신명기 8장에서는 말씀이라고 했어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너희들이 떡을 먹은 게 아니고 말씀을 먹었다. 말씀을 먹게 한 이유는, 방향을 높은 곳이 아니고 낮은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만나를 줬다는 뜻이 그 뜻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했는데 백성들이 모세 말을 안 듣죠. 말 안 듣고 만나를 끌어모으니까 아침까지 두었는데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지요.

만나라는 것은 먹고 치워야지 남기면 어떻게 된다? 썩는다고 되어 있어요. 남기면 썩는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예요. 떡 20개를 100명에게 주었으면 ‘100명 = 20’이에요. ‘그 100명은 하나님의 무한의 혜택을 입었다. 끝.’ 그런데 100명이 먹는 것으로 끝이 아니고 ‘100명+x’예요.100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거예요. 그 남은 것을 x로 줬을 때, 그 남았다는 것이 그 떡을 먹은 자를 어디로 인도하느냐 그 말이죠. 그것은 바로 마이너스(-) 세계로 인도하는 거예요. 마이너스(-) 80, 떡 하나에 한 사람이라고 치고요. 혼자서 많이 먹는 사람은 마이너스(-)가 더 깊어지겠지요.

출애굽기 16장 33-34절에 보면,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그 상자 안에는 먹고 바로 치우지 않으면 그냥 썩어버리는 그 만나, 이 세상 땅 위에서는 반드시 썩게 되어 있는 만나가 같은 땅 위에 있는데 언약궤라는 상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언약궤 안에서는 이게 썩지를 않네요. 무한에서 내려와서 땅 위에 있는 인간들의 썩음, 썩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다 까발려주고 - 땅이 그만큼 문제가 있죠 - 그 남아 있는 만나는 언약궤라는 무한, 언약궤 속에 들어가니까 그 만나가 썩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무한이 유한이 되면 이게 함축된 거예요. 압축되고 집중된 거잖아요. 모든 사물, 사람, 떡 이것은 물질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응집된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보게 되면 응집됐다는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무한에서 오셔서 유한으로 응집돼 있다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은 하늘의 무한만 있는 게 아니라 인간 바닥 자체가 무한에 있고,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저 하늘나라의 무한과 악마, 귀신의 무한 그 틈 사이에서 뾰루지처럼 볼록 튀어나온 것이 순간적으로 응축된 모습이 인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마가복음 1장에 나옵니다. 마가복음 1장 32-34절에 보면,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앞에 모였더라…” 지금 예수님께서 야근하시는 중입니다. 밤에 쉬지도 못해요.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무한이 유한으로 응축된 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인간 눈으로는 파악이 안 되고 알 수도 없는 귀신이라는 어두움에 속한 존재가 예수님의 응축된 무한의 작용으로 세상에서 나간다는 그 사실을, 인간들은 그냥 병 낳은 걸로 보죠. ‘예수님은 용한 의사가 되어서 사람들이 멀쩡하게 되어가네.’ 인간이 멀쩡하게 되어간다고 자꾸 생각하지, 그 가운데서 귀신이 나갔다는 것은 귀신만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왜냐하면 귀신은 영이니까요. 어두운 영의 세계가 있었던 거예요. 그 가운데 주님께서 지금 일을 하시는 겁니다. 마이너스(-) 세계예요.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들은 무엇에 마음 정리가 되어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내가 행복하고 이 땅에서 편하게 살다가 저 높은 천국에 가겠다’라는 생각이 말씀의 생각이 아니고, 그 세계 가려면 먼저 ‘나라는 인간이 저 밑바닥에 있는 어두움의 세계와 어떻게 결탁되어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감 잡을 거예요.

위로 올라갈 생각하지 말고, 밑으로 내려가야 해요. 스팀 청소기 보면 중간에 물을 꽂는 게 있어요. 이게 오래되면 잘 안 빠져요. 까만 단추가 있는데 그걸 뽑으면 되겠지, 해서 뽑으려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어서 눌러봤어요. 누르니까 튀어나오더라니까요. 이것은 스팀 청소기로 청소를 해 본 사람만 알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천국으로 뽑아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으로 가라’ 할 때 그 경험에 참여한 자가 천국 가는 거예요. 스팀 청소기는 특수한 경우라서 보편적 경우의 문제를 하나 던지겠습니다. 요새 벚꽃이 폈잖아요. 벚꽃을 보면서 그 안에서 십자가를 발견하는 방법, 십자가는 어떻게 벚꽃 피는 데서 뽑아낼 수 있는가 하는 거예요.

이것은 강도사 시험에 내야 됩니다. 문제를 달리해 보겠습니다. 하늘에 달이 떠 있는데 그 달에서 십자가를 어떻게 뽑아내느냐? 달이 존재한다. 어떻게 거기서 십자가 사건, 십자가의 복음을 어떤 식으로 뽑아내느냐는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 참석한 여러분에게만 알려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9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던 멀쩡한 달과 별이 갑자기 왜 지구 쪽으로 떨어지는가? 시편 136편 7-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큰 빛들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기에 밤의 별, 달, 그리고 해가 나오는데 여기에 두 가지가 포함돼 있는 거예요.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인 인자하심과, 그리고 그의 속성이 영원하다는 거예요. ‘인자하심’과 ‘영원’한 거예요. 밤에 달 뜨면 그 달을 통해서 뭘 발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인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24장 29절에서는 그 해와 달이 자기의 임무가 이제 끝났다는 겁니다. 위성이 지구 궤도를 돌다가 자기 임무 끝나면 지구로 떨어지잖아요. 추락하는 그 시점이 됐다는 거예요. 추락하는 시점에 대해서, 상당히 어렵죠, 그 시점에 대해서 마태복음 15장 39절에서 백부장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는 그 현장에 있던 백부장이에요. 아마 주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거기 책임자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잘 들어보세요. ‘이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과거형입니다. ‘이제 아들이다’가 아니라 ‘전부터 아들이었도다.’ 그런데 ‘이 사람’, 동일 신체를 두고, 동일한 육신을 두고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그다음에 뭡니까?

하늘에서 오신 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뜻이에요, 하늘에 계시다가 메시아가 땅에 오니까 이분은 ‘하늘에, 하나님께 속한 분이다’라는 것, 백부장은 동일 육체에다가 둘 다를 포함시킨 거예요. 이 백부장은 신앙인이죠. 그런데 마가복음 16장 1절에 보면, 거기에 여인 3명이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그 3명의 여인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셨던 무덤을 찾아갔는데, 8절에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이렇게 나와요. ‘무서워하더라’라고 하고 마가복음 어떤 사본에 보면 이걸로 끝이 돼 있어요.

그래서 보통 개역 성경에는 괄호 안에 마지막 부분을 따로 넣은 사본도 있는데 하여튼 ‘무서워하더라’, 왜 무서워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백부장은 과거와 현재 주님과의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어요. 백부장이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지금 부활이 아니에요. 그냥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겁니다. 그냥 어떤 사형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백부장은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는데, 여인 3명은 식겁해서 무서워하고 놀랐어요.

왜냐하면 그 존재의 마이너스(-) 세계로 나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떡 20개밖에 안 되는데 100명이나 먹었더라, 그걸로 할 것 같으면 무섭거나 놀랄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죠. 그러나 ‘100명이 먹고 또 남았더라? 왜 남았지? 그러면 150명 데려와야 해? 왜 남았지?’ 오병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 14:19-20).

5천 명을 먹이고도 그다음에 “남았더라”, 그 ‘남았더라’의 의미를 모르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왔어요. 그런데 그들은 다 떠났어요. 그 ‘만나’, 만나가 생명의 떡인데 그 만나가 다시 무한과, 곧 언약궤와 다시 만나서 무한이 이 땅에서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려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가능한 육체, 임마누엘,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있다는 그 임마누엘을 완성하는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 달려야 됩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은 저주받은 거예요.

그러면 아까 해와 달은 뭐냐? 인자하심이죠. 인자하심에 대해서 시편 89편 1-2절에 보면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이게 짝이 되어 나와요.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2절에도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돼 있어요. 이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 잘 아시는 마태복음 6장 30절과 한번 연결시켜 볼게요. 연결시키면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오늘 있다’, 이 말이죠. 오늘 있는데 내일은 어떻게 돼요? 아궁이에 들어가서 없어지죠. 풀이라고 되어 있는 이것은 눈에 보이는 유한이죠. 응축된 ‘유한’이 내일 되면 없어져요. 내일이 되면 없어지는데 이 유한한 들풀이 오늘은 무엇을 함유하고 있는가? ‘무한’을 함유하고 있어요. 그 무한이 뭐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에요. 들풀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때까지, 오늘은 주께서 성실하게 ‘오늘을’ 살게 하십니다.

그 들풀에다가 저와 여러분들을 대입시켜 보세요. 인자의 풍성함, 성실함의 넉넉함. 우리가, 들풀 같은 우리가 여기에 지금 합류하고 있어요. 내일 우리가 어떻게 죽든지, 그것은 주님의 성실하심의 일환이고 주님의 인자하심의 마무리예요, 완성입니다! ‘오늘까지 산다고 수고했다. 이제 편히 쉬어라’ 해서 내일 돌아가시게 하는 거예요.

갑자기 삼척 출장 가신 분이 걱정되는데, 눈앞에 보여야 안심이 되는데요. 어쨌든 간에 인간 세계에서는 걱정이 되죠. 그러나 이 ‘무한을 합류시키자’ 이 말이죠. 내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부도가 나든 간에 오늘 우리가 증거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증거해야 되는 거예요. 이 증거의 기능의 풍성함, 넉넉함.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함이 얼마나 넉넉한지 주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3-45).

언제까지 말입니까? 십자가, 주께서 해와 달이 멈추지 않고 있을 때까지, 그래서 여기에 기한이 있어요. 악인은 뭣도 모르고 까불고 있어요. 지금 하나님이 그러한 은혜를 주시는데 그 은혜를 주시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 은혜와 무한한 우리 존재의 바닥, 삼립빵 믹서기 있잖아요, 그 존재의 바닥에 있는 저주, 저주와 은혜를 대립시켜서 양쪽을 다 바라보는 백부장처럼, 다 아는 그런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말씀이 이렇게 해서 해와 달과 별들을 주신 거예요.

아까 제가 문제 두 개 냈는데, 하나는 달과 별을 가지고 했죠. 달을 보고 십자가를 끄집어내라. 그다음에 벚꽃 피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끄집어내느냐? 지금 아직 팔공산 벚꽃이 피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벚꽃 피는 것과 연관해서는 이사야 40장 6-8절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벚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자, 이 말씀, 벚꽃 보면서 ‘저 벚꽃은 비 오면 다 시들게 돼 있다.’ 그런데 그렇게 벚꽃에만 한정시키면 십자가와 관련성이 없겠죠. 로마서 8장 20-21절에 보면, 그걸 종합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썩어지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는 말이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다. 벚꽃 탓도 아니고, 해와 달의 뜻도 아니고, 인간 뜻도 아니고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렇게 허무한데 굴복한다.’ 허무가 뭐냐? 21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 모든 것은 썩게 돼 있다. 썩게 돼 있는 이유는, 피조물 안에 ‘무한’의 요소가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연결된 무한이 최종적으로 정답을 제공하는 그 외의 피조물, 즉 ‘왜 벚꽃은 지는가, 달은 왜 떨어지는가?’의 그 이유와 관련돼 있고 연결돼 있는 그 최후의 사건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릴 때 해가 빛을 잃었어요. 해가 빛을 잃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때 무덤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서 예루살렘에 돌아다녔습니다. 한쪽은 죽고 한쪽은 살아나고, 이게 무한의 효과잖아요, 무한의 효과.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결국 결론은 뭐냐? 방향이 어느 쪽이냐, 방향이!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사 이전에 그의 스승 엘리야도 마찬가지예요. 엘리야 때에도 과부 집 통의 밀가루가 마르지 않았잖아요. 열왕기상 17장 1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엘리야가 그 가족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통의 밀가루가 마르지 않았어요. 물론 넉넉하게 있었겠죠. 엘리야 떠나도 금방 죽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엘리야 자신도 마찬가지예요. 엘리야가 그릿 시냇가에 있을 때 까마귀가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무한으로 제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나 엘리사나 상황이 뭐냐? 흉년이 든 거예요. 흉년 들었을 때입니다. 엘리사의 경우 열왕기하 8장 1절에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년 동안 임하리라” 했으니까요. 흉년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살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또 네가 뭐가 얼마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없음의 세계까지 주님께서 장악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없음의 세계를 장악한 그것도,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그대로 거기에도 작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시편 88편 11절에 보면 그게 나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저주의 세계에서도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빠져나왔듯이, 그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의 완성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왜? 그분은 무한이 유한으로 응축된, 언약궤처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하기 위한 그 기능이 십자가 피로 우리의 바닥에 있는 모든 죄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죄 사함 해주는, 양(量)이 아니라 오늘같이 양이 아니라 질(質)적으로, 무한한 질로, 우리의 무한한 죄를 질적으로, 하나님의 의로 바꿔주시는 그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원하는 기적 말고 하나님 쪽에서 계획해 놓은 기적이 이제는 우리의 기적과 맞바꿔지게 하옵소서. 내 존재 잘되라고, 행복하라고 준 기적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이끌려서 우리의 자리가 지옥의 자리였다는 것을 새삼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기적으로 늘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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