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 자기 치료
2026년 4월 15일 본문 말씀: 열왕기하 5:1-3
(5:1)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5:2)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5:3)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북이스라엘은 우상으로 범벅이 된 상태에 있을 때에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기 편하게 생각하는 신을 골라잡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자기 일’에 매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게 하등의 이상한 일로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일에 몰입하는 것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와의 차이점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편한 대로 삽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방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에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의 뜻이 집결된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나라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틀어진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만 하시지 않습니다. 기어이 하나님의 뜻으로 변경시키고 맙니다.
문제는 어떤 상태가 된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지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체적으로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본질을 외부에서 끌어오십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나라에서 일을 일으키십니다.
이람나라는 그당시 이스라엘에 대해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여러 사람을 포로로 잡아와서 자기 나라에 일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해서 끌려온 어린 여자 중의 한 사람이 아람나라의 군대장관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대장관 나아만은 본국에 공을 세워서 아람나라의 자랑거리가 되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그가 개인적으로 문둥병에 결렸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자신의 국가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문둥병 뒤편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병이 문둥병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돌이킬 수 없듯이 문둥병도 역시 치료될 수 없는 병입니다. 아람나라이든 이스라엘이든 죽을 병 걸리면 그냥 죽으면 됩니다.
살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처지에 있는 개인에게 이스라엘이 연결됩니다. 문둥병도 고칠 수 있다는 식으로 엘리사를 선지자를 소개합니다. 아람왕도 적극 이 소식을 반기며 나아만 장군을 이스라엘로 보내게 됩니다. 그 편지 내용은 이러합니다. “우리 아람나라의 존귀한 자가 가니 반드시 살려내라”
이 편지를 받은 여호람 왕은 기차 차고 절망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100% 못 고칠 병이며, 따라 병을 못고쳤다는 것을 빌미로 아람나라가 또 쳐들어오면 나라가 황폐해질 수 길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엘리사 선지자가 나섭니다. 자기에게도 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엘리사 본인은 병 치료 현장에 나타나지 않고 사신을 대신 보냅니다.
이로서 국가 대 국가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문제로 축소되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나아만 장군을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 요단강을 하나님의 일을 만나야했던 집단은 원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두 번의 ‘물 건넘’으로서 완성됩니다.
첫 번째 물 건넘은 홍해 건넘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권력에서 벗어나는 물 건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내부적으로 권력이 여전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 때문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자기 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일이 개인적 외부에 머물러 있고 마음 까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조건부로 치료해 주신다고 합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 15:26)
치료는 딴 게 아니라 내 속에 ‘나의 일’이 ‘하나님의 일’에 바뀌는 것입니다. 나에게 벌어지는 안 좋은 일을 사고(事故)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위한 사건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바뀔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인간들은 마귀가 덮어쒸어준 돈과 기억과 세상 부귀 영화에 현혹된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아만 장군이 그런 사람입니다. 장군은 요단강 물이 자기 나라 아람나라의 강물보더 더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실망합니다. 그래서 도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에게 있어 요단강 건넘은 광야 생활을 끝내고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길목이었습니다.
이 순간은 이스라엘은 마음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3-24)
홍해를 통과하면서도 유일하게 요단을 건너간 사람인 갈렙과 여호수아는 ‘마음이 달랐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함께 했습니다. 언약궤에는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줄곧 실어나르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즉 인간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하나님의 고통에 경험(참여)해야 하는 겁니다.
곧 자기 일에 하나님의 일로 바뀐다는 것은 기존에 자기 일에 종사하는 마음 자체가 사라져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한 이유도, 그리고 자신의 병을 고쳐준 선지자에게 막대한 예물을 미리 준비한 것도 기존의 자기로 돌아가겠다는 취지입니다. 선지자에게 예물을 드리는 것은 자신의 상실한 것을 채워준 것에 대한 보상책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기존의 자기 마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 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의 예물을 받지 않으므로서 이방인의 요단강 치료는 실은 이스라엘 내의 요단강 자체에 대한 의의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일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누구든지 요단강에 들어가서 치료되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의 입성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다운 사실을 새삼스럽게 부각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료 효과의 완성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세상 권력에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에 시작해서 자기 내부 권력으로부터도 떨어져 나가서 전에 내가 있는 그 자리에 오직 ‘하나님의 일’만 자리잡게 됩니다. 나아만 장군의 아름다운 고백이 그것입니다. “제가 림몬 신전에 있더라도 저는 여호와의 땅에 있는 겁니다.”(왕하 5:1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일로 인해 날마다 우리 자신의 일을 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강-열왕기하 5장 1-3절(요단강 자기치료) 260415-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5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열왕기하 5:1-3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 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아람 나라는 지금의 시리아죠.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이니까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되는 사람이 오늘 본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아람은 이방 나라죠. 여호와를 모르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대적하는 원수의 나라인 아람의 군대 장관이 하나님의 일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말은, 그만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과 직접 관계 지을 정도로 그렇게 돈독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죠.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어야 하고, 이스라엘에만 좋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 당시나 지금 인간들의 상식이거든요.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적의 하나님으로서 굳이 활동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만큼 소위 하나님 편에 서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과 일을 할 수 있는 정도로 신앙적이지 않다’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일을 하고 싶어도 자기 백성은 신앙이 완전히 죽어버렸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중지될 수는 없고, 하나님의 언약대로 일은 하시는데 이방 민족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충고하고 싶고, 또 하나님 자신이 누구라 하는 것을 새삼 알리고 싶은 그 일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이 아람 나라에 속한 이방인, 전혀 여호와를 모르는 자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동화사 주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 사람이 문둥병자입니다. 문둥병 걸렸으니 죽을 수밖에 있죠. 문둥병 걸렸다. “그러면 죽으세요.” 이렇게 끝나면 돼요. 아무 문제 없어요. 사람이 병 걸려서 죽는 것, 특별히 내가 혜택받아서 살아야 한다는 그런 권리 주장은 우리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병 걸리면 죽어야죠.
문둥병 걸렸다는 말은, 이게 저주받은 병인데요. 왜냐하면 문둥병 바로 뒤편이 죽음이에요. 다른 질병이라면, 어지간하면 살릴 수 있다든지, 또 약 먹으면 된다든지, 이러한 기대나 희망을 가질 수도 있는데 문둥병 이것은 신의 저주로 인한 병이라서 사람은 손댈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격리 조치밖에 없어요. ‘저주받은 자는 저리가, 저리가! 오지 마, 오지 마! 여기에 섞이지 마. 우리도 같이 저주 옮겠다. 너나 죽어라.’ 이게 문둥병이죠.
그 모습도 흉측하고,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단지 시체인 것을 가장 근접하게 보여주는 병, 인간 내부의 죽음을 가장 가깝게 보여주는 병, 그게 문둥병이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치료할 재주가 없기에. 그래서 ‘죽을병 들었으니까 죽으면 끝!’ 이러면 이제 이야기가 쉽게 돼요. ‘하나님은 못된 자, 여호와를 믿지 않는 자를 저주해서 죽이는구나. 야~, 하나님이 참 일 잘하신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인데 여기에 누가 있느냐?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라고 열왕기하 5장 2절에 나와요.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요소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저주받아 마땅한 이방 나라의 군대 장관, 국방부 장관과 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성경에서 펼쳐지고 있어요.
“병 걸리면 죽어야지.” 이렇게 이야기가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말입니다…” 하고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죽어 마땅한데 말입니다, 고칠 병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스라엘 요소가 가미되었습니다.” 이야기가 그렇게 될 때 ‘이스라엘이 뭐? 이스라엘이 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자기 민족이나 살려. 이방인까지 챙길 거 뭐가 있어, 자기 민족이나 살리지.’
이스라엘 민족 중에 문둥병 걸렸다가 낳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레위기 13장, 14장을 쭉 보게 되면 문둥병에 관한 사항들이 나온다는 말은, 문둥병 걸리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고, ‘이것은 사람이 손 못 댄다. 이제 끝났어’라고 했는데 끝난다고 했는데, 따로 손 쓰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서 그 저주에 하나님의 자비가 첨가되고 연결되니까 ‘저주의 병이 없어지네? 희한한 일도 다 했다. 이것은 신의 축복이고 긍휼이고 자비다.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로부터 건지는구나’라는 표시로서 하나님께서 문둥병 환자들이 이스라엘 속에 생기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 문제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방 나라에서 문둥병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이방 나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지 이방 나라의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한 계집아이가, 주인 나리가 문둥병에 걸려서 안 됐다고, 자기가 섬기는 그 국방부 장관 아내에게 “우리나라에 용한 선지자 있는데 그 앞에 가면 나을 건데요?” 이렇게 살짝 언질을 준 거예요.
오늘 본문 열왕기하 5장 1절에 보면,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이렇게 해놓고 그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라고 되어 있어요. 왜 크고 존귀하냐?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나아만은 국가 단위로 따져볼 때 큰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국방부 장관 자리까지 올라갔죠.
이 장관이 아람 나라를 구원했다. 그러니까 이 군대 장관, 국방부 장관은 단순히 개인이 아닙니다. 현재 아람 나라가 굳건하게 존립할 수 있는 그 나라의 대표자 격이에요. 국가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나아만 장군입니다. 그런데 그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림으로써 국가 단위에서 개인 단위로 자기 이야기가 이제는 축소돼야 해요.
‘거대한 국가를 대표하면서 움직이고 거기에 종사하는 대단히 크고 존귀한 자’라는 인식에서, “그래, 그렇게 대단해?”
“대단해”
“그런데 너의 건강 상태는, 건강 상태는 어떻지?”
“나 지금 문둥병 걸렸어.” 이렇게 되죠.
‘국가’라는 큰 단위 말고 갑자기 ‘개인’으로 들어와요. 개인으로 들어오면서 국가적으로서는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지만…, 적대적 관계 정도가 아니고 아람 나라에 이스라엘이 아예 복속돼 있는 형편이 있지요. 여호와를 모르는 나라 밑에서 여호와를 아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주눅 들어 있는 그런 관계, 국가로서는 이스라엘이 맥도 못 추는 거예요. 아람 나라에 비해서 이스라엘 국가는 맥도 못 춥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소녀가 사로잡혔죠.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배해서 그 소녀가 포로가 되어서 종으로, 노예로 팔려서 아람 나라 장군의 하녀로 일하고 있죠. 위상의 관계가, 그 높낮이가 완전히 달라요. 국가적으로 봤을 때는 그래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뭐냐? 그 대단한 나아만 장군은 지금 문둥병에 걸려 있고, 그 이스라엘 소녀는 단순히 문둥병에 안 걸린 자가 아니라, 몸이 건강한 자 정도가 아니라 ‘몸이 건강해질 수 있는 정보, 소스를 갖고 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라의 큰일을 하시는 분이 포로로 잡혀 온 그 여자 노예, 그것도 꼬마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겠어요? 그러나 개인으로 내려왔을 때는, 지금 내가 얼마나 국가적으로 대단한 존재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몸 아프면 말짱 소용없다는 절박함을 알고, ‘그래? 그렇다면 그 선지자 한번 만나보도록 주선을 하자.’ 그래서 그 나아만 장군이 아람 왕한테 그 이야기를 했어요.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왕하 5:4). 아람 왕이 나아만 장군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 만나러 가도록 휴가를 허락했습니다. 허락하면서 아람 나라 왕이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보내요. “아람 왕이 가로되 갈찌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왕하 5:5).
‘내 대단한 신하,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하가 당신 나라에 선지자 만나러 갑니다. 당신은 우리의 국방부 장관이 병 낫는 일에 모든 필요한 절차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역량과 협조를 부탁합니다.’ 그 정도로 한 게 아니고 아예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6절에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그다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이건 단순히 협조를 부탁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병을 고쳐 달라는 거예요. 안 고쳐주면 그다음부터는 호르무즈 폭격이에요. 안 고쳐주면 나라를 석기 시대로 만들어버려요. 약소국가니까요, 지배당하고 있으니까요. 이 편지를 보고 이스라엘 여호람 왕이 자기 옷을 찢으며 하는 말이 이래요.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왕하 5:7).
문둥병은 곧 죽을 병이에요. 문둥병자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바로 뒤편에, 곧 가장 가까운 접촉이 뭐냐? 뒤만 돌아보면 곧 죽음이에요. ‘그 죽은 자를 나한테 보내놓고 이 사람을 살려서 보내라고 편지 보내는 것은, 만약에 안 살려 보내면 내가 가만두지 않는다는 협박조의 글’로 나타나는 거예요.
한 예를 들어봅시다. 북한의 김일성 씨가 죽어가고 있을 때 평소에 보좌했던 의사한테 “내 병 못 고치면 너희들 다 죽었어.” 뭐 겁나서 의사하겠습니까? 만약에 의사가 직언해서 “이것은 못 고칠 병입니다”라고 하면, 당장 아오지탄광에 끌고 가서 죽여버리죠.
아람 나라의 국가적 인물이 문둥병 걸린 것 때문에 그 화근이 이스라엘 왕에게 임했고, 왕에게 화근이 임했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국운에 영향을 주는, 멸망 당할 수 있다는 국가적 재난이 오게 된 그런 시점에 와 있으니까, 왕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괴로움에 어쩔 줄 모르겠죠. 못 고칩니다. 문둥병은 못 고치게 돼 있어요. 인간이 할 수 있으면 하죠. 하지만 못 고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건’과 ‘사고’를 한번 구분해 봅시다. 보통 어떤 예상 못 한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는 이것을 ‘사건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사건이라고 할 때는 나하고 별로 상관없을 때 사건이라고 하죠. 그런데 나에게 일이 터져버리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고 뭐냐? 사고 난 거예요. 나의 일과 결부될 때는 ‘사고’ 난 거고, 성경에서 주님의 일과 결부될 때 이것은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께서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모든 인간은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사고 난 걸로 이해해요. 왜 그러냐 하면, 평소에 모든 인간이 자기 생각, 자기 일에만 빠져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등장인물인 아람 왕이 그렇지요, 나아만 장군에게도 이것은 사고가 났죠. 병 들었으니까요. 또 이스라엘 왕 여호람에게도 이것은 사고 난 거예요.
과연 이 사고를 사건으로 이해할 사람 누가 있느냐?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습니다. 전부 다 지줌지줌 자기 일만 챙기려고 신경 쓰기 때문에, ‘나한테 이익이 되느냐, 손해냐?’ 그것만 따지는 일상에서 예상밖에 뭔가 일이 터지면, 내가 손댈 수 없는 일이 터지면 이것은 나한테 사고 난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사고를 뭐로 바꾸었나? 사건으로 바꿔요. 사건으로 바뀌는 조건은 뭐냐? 이게 너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아, 이것은 내가 책임지거나 내가 감당한다든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구나.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아다리, 딱 이 일을 마주치도록 일을 벌이셨구나.’
그렇다면 내 일에 몰두하다가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그 본질,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해서 이번 일을 통해서 아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이번 사고를 통해서 이제는 더 이상 내 일에만 파묻히지 말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아는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이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거예요.
이걸 사고에서 사건으로 파악한 분이 누구냐 하면, 엘리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왕하 5:8).
왕이 걱정하니까 엘리사가 가로되 “왕이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 쪽으로 보내세요”라고 한 거예요. 여호람은 괜히 마음을 졸인 거예요. 혼자 큰일 났다고 쪼그라들었다가 엘리사가 이야기했어요. “나한테 넘기세요.”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옵니다. 그런데 와도 당장은 엘리사를 만나지는 못해요.
왜냐하면 그 순서가 처음에는 아람 왕이잖아요. 나아만 장군은 국가적으로 존귀한 자죠. 국가의 대표, 아람 나라의 대표자 격으로 아람 왕의 편지를 갖고 이스라엘 나라를 방문했습니다. 국빈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습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을 깔보기 때문에 직접 이스라엘에 안 나타났어요. 편지만 전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너희는 우리 아람이라는 대국하고 이야기할 잽이 돼? 편지만 보낼 테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람 나라 입장에서 이스라엘 나라는 같이 상대할 수 있는 국가 단위가 아니고 그냥 개인 단위로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구도를 엘리사가 바꿔버려요. ‘아람 나라 장군? 나한테 보내라. 하지만 나는 저를 만나지 않는다. 왜? 인간의 일에서 노는 수준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아는 선지자 수준과 견줄 수 있겠느냐?’
견주면 안 되죠. 지금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에 걸렸어요. 바로 죽음 직전입니다. 거의 죽었다고 볼 수 있죠.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자기 일을 껴안고 죽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는 말은, 그동안 평생 살아왔던 나의 일이 여기서 몽땅 사라지는 겁니다. 없어지는 거죠, 제거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를 통해서 알듯이 하늘나라와 연결된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어디로 갔습니까? 승천했어요. 하늘로 불 수레 타고 올라갔잖아요. 이렇게 하늘나라와 연결된 사람이에요. 이 말은, 엘리야가 승천하든, 엘리사가 죽든, 어떤 활동을 하든지 그 엘리사 안에는 인간의 일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같은 레벨로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사고만 나도 깜짝 놀라죠. 그러나 선지자에게는 사고가 아니고, 모든 것이 주의 일이고 사건이에요.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렇게 이해할 용의가 돼 있습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고, 그동안 나의 일에 몰두하다가 나의 일이 날아가는 것, 나의 일이 없어지고 안개처럼 그냥 사라지는 기쁜 순간 아니겠습니까? 나의 일은 없어지고 하나님 일 거기에 안기는 것, 그게 죽음이잖아요. 나아만 장군은 지금 걱정이 늘어졌어요, 자기 병 걸렸다고. 끝까지 그것은 자기 일입니다. 하나님 일 몰라요. 이방인이 뭘 알겠어요?
하나님께서는 나아만 장군을 요단강에다가 집어넣었습니다. 요단강에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나아만 장군 안에서 인간의 일이 하나님의 일로 바뀌었다는 것, 바뀌었다는 그 신호를 그 안에 집어넣은 거예요. 이것은, 원래 이스라엘이 이랬어야 해요. 이방인 말고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입니다. 언약이 함께 있어요.
그렇다면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에게는 어떤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난다면 오직 하나님의 사건만 일어나야 해요.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건에 의해서 없던 나라가 이스라엘 되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오해를 했느냐?
애굽에서 나오면서 ‘홍해 건너면 이스라엘 된다.’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 건너기는 한 번으로 족하다’고 본 거예요. 하나님의 출애굽 사건 전체는 물 건너는 것을 두 번으로 준비했습니다. 하나는 홍해 건너기, 다른 하나는 요단강 건너기에요. 그 요단강이 바로 본문의 이 요단강이에요.
홍해 건넌 사람들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는 안 죽었잖아요. 그 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까?’라고 생각하는데 그 점을 좀 어렵지만 설명해 드릴게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다른 사람하고 다른 점은 뭐냐 하면, 옷을 찢었어요. 민수기 14장 6절에 나옵니다.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민수기 13장에서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및 10명이 정탐을 했습니다. 정탐하고 난 뒤에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1-33)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과 싸우는 것은 메뚜기하고 거인하고 싸움하는 격이다’라고 했습니다. 맞죠. 신체 차이가 그만큼 나니까, 사이즈가 다르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성통곡했어요. 왜냐하면 홍해 건너온 것의 어떤 효과를 봐야 하는데 기껏 홍해는 건너와 놓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 하니까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땅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같이 울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다 울었습니다.
울었다는 말은 뭐냐? 분명히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 건너왔을 때 여전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일은 없고 자기 일만 자기 안에 가득 차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을 보고 ‘네피림 후손들이 장대 같다’ 하니까 자기가 계획한 자기 일이, 자기가 기대한 것이 무산되는 이것을 사고로 이해하는 거예요. ‘큰일 났다. 큰일 난 정도가 아니고 끝났어, 다 끝났어.’
돌아가기도 뭐하고요. 홍해를 다시 건너갈까요? 돌아가면 홍해가 “어서 옵쇼!” 하고 또 이쪽 문 열어줍니까? 다 빠져 죽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지요. 그러니까 이게 이스라엘에서는 뭐냐 하면, 이것은 너무나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뭐가 된다? 현실인 거예요.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난관 속에 그들은 빠져 있었던 겁니다. 인간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미 출애굽기 4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및 사람들의 본체, 그 본질이 뭔가를 모세의 기적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그래서 넣었어요. 멀쩡한 손이 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빼보라!” 빼보니까 문둥병 걸렸어요.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문둥병자라고 규정했고, 문둥병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옆에 죽음에 붙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의 죽음이! 하나님의 저주로 죽은 자라고 일단 간주 해놓고, 그 저주받은 자를 어떤 식으로 하나님이 계신다는 축복의 나라로 돌파해서 들어갈 수 있는가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주님께서 테스트하시는 거예요. 그 시료로 사용하는 거예요, 모델로 사용하는 겁니다.
‘우리가 다 인간 속에 있는데,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게 다 나의 일인데, 그 나의 일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일로 바뀌는 기적을 어떤 식으로 우리가 획득할 것인가?’ 그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위해서 주께서는 건너야 할 물을 두 개 마련했어요. 홍해는 강이 아니고 바다지요. 건너야 될 물을, 건너야 하는 두 개의 경우를 준비한 거예요.
하나는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떼 내시는 거예요. 국가 권력입니다. 애굽이라는 국가 권력에서 떼 내서 ‘너희는 더 이상 국가의 힘이 너에게 적용되지 않는 그런 세계, 그러한 새로운 국가로 만든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갔을 때 뒤따라오던 국가 단위의, 국가적 군인들이 홍해 바다에, 자기가 건너온 바다에 다 빠져 죽었습니다.
‘나는 건너왔는데 저들은 다 빠져 죽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해요. 왜? 빠져 죽어야지요! 왜? 사람이 바다를 건너면 죽지요. 그건 뻔한 이야기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그걸 통해서 ‘그 뻔한 것,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면 빠져 죽는다는, 누구도 인정하는 그 뻔한 일에서 왜 면제되었는가?’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죽어야 되는 우리가 왜 안 죽죠? 그것도 물에 빠져서요. 우리가 아가미 달렸고 지느러미 달렸습니까? 아니잖아요. 똑같은 인간인데 어떤 인간은 물에 빠져 죽고, 그것은 당연한 거고, 왜 우리는 예외로 해서 홍해 바다에 안 빠지게 했는가? 그걸 그들은 두 번째로 건너는 강, 요단강에 갈 때까지 체험을 통해서 알았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국가 단위로부터의 제거지만, 두 번째 단계는 뭐냐? 마음 단위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내 중심의 마음이 바뀌어야 해요. 백성들이 다 통곡하니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걸 보고 민수기 14장 6절에 이랬다고요.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옷을 찢어버렸습니다. 옷을 찢었다는 말은, ‘너희들이 하는 행세는 하나님이 새롭게 이끄시는 그 인간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옷을 찢는다는 것은,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할 입장에 있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너희들은 왜 모르느냐? 네 인생을 네가 자꾸 챙겨서 네 미래와 운명을 네가 확정 지으려고 하느냐? 그것은 애굽 나라 사람하고 차이가 안 난다. 똑같은 거잖아.”
중간에 있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홍해의 갈라짐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똑같은 인간이 된다면 그게 무슨 효과가 있습니까? 주께서 주의 일을 삽입시키는 효과가 없잖아요.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어린 양의 피와 홍해를 집어넣은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늘에서 천사가 와서 너희를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니까.’ 여기서 ‘치료하는 하나님’이라고 해요.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너희들도 치료받아야 해. 치료돼야 해. 죽어 마땅한 것은 너희들이야. 하지만 내가 동행하는 이유는, 너희들 힘으로 치료될 수 없는 것을 내가 치료해 줄게. 그래서 나는 동행하는 거야’라는 그 취지를 알아야 하죠.
민수기 14장 23-2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얘기합니다.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마음가짐이, 그 마음이 그들과 다른 거예요. 마음이 다른 거예요! 신장이 달라졌다, 몸무게가 줄었다, 아랫배가 빠졌다, 혈색이 달라졌다, 근육질이 되었다, 이게 다른 게 아니고 마음 자체가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이 국가적 단위에서 떨어지게 하는 것, 그것을 하나의 출발점으로 했다면 마지막 최종점은 뭐냐?
이제는 내부의 힘, 내부의 우리 마음을 무섭고 두렵고 떨리게 만드는 그 내부의 요소인 마음을 찢어버리고 다른 마음으로 바꾸는데 그 다른 마음이 뭐냐? ‘내 일은 나의 일’이라는 인식을 뭐로 바꾼다? ‘하나님의 일이 내 안을 접수했고, 점령했습니다’라고 바꾸는 이 작업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작업을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우상 섬긴다고 요단강의 효과를 완전히 지금 잃어버렸어요. 잃어버리니까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처음 나올 때 문둥병자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방 민족의 대표자인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걸리게 해서 나아만 장군으로 하여금 이제는 국가 단위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 현재 이스라엘은 개인의 마음 문제이기 때문에 - 개인적 마음을 가진 자로서 요단강에 접근하게 만듭니다.
나아만 장군이 그냥 빈손으로 온 게 아니고 “고쳐만 주신다면 예물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하고 성의를 표시하면서 요단강에 딱 왔습니다. 아람이 옛날 같으면 조선시대의 중국 아닙니까? 청나라쯤 되는 나라. 그래서 엘리사가 “대국의 군대 장관이 여기까지 왔으니 기꺼이 모시겠습니다” 하고 “여기 앉으세요. 이제 침 맞을까요?” 이렇게 해야 하는데, ‘안 보여!’ 보이질 않아요.
인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레벨이 같겠어요? “왕이 편지 보냈다고? 그러면 당신도 내 말만 듣고 시키는 대로 해요. 나 당신 앞에 안 나타난다. 나 안 나타난다고. 대국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개인적으로 너는 대국 아니야. 대국의 사람이 아니라 너는 그냥 환자야.” 그래서 엘리사가 사자를 보내서 하는 말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 5:10) 하고 엘리사 본인은 그 전갈만 보내고 자기는 그 현장에 없었어요.
여기서 그 나아만 장군이 얼마나 합리적이에요? 저도 요단강물 봤어요. 동영상으로 봤는데 흙탕물이에요. 깨끗하지를 않습니다. 거기에 무기물이 많다든지 그런 거 없어요. 나아만이 그걸 딱 보고 하는 말이 “이 물이 우리나라 강물보다 안 깨끗한데? 진짜 더러운데!”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나아만 장군의 머릿속, 자기 일 속에는 ‘깨끗한 것이 오게 되면 병도 없어지고 깨끗하게 원상 복귀된다.’ 이런 인식이 있었던 겁니다. ‘더러운 것이 더러운 것을 씻는다’라는 이것은 인간의 생각에는 터무니없는 거예요. 나아만 장군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거예요.
나아만 장군은 ‘이 강물이 과연 내 병을 치료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열왕기하’를 보는 모든 사람들도 ‘나아만 장군의 병은 요단강물에 들어가서 치료가 되었다’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정답은, 나아만 장군을 치료한 것이 아니고, ‘요단강 자체’를 치료했어요. 요단강 자체를!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요단강 자체가 우상을 섬김으로 말미암아 엉망이 된 나라인 이스라엘을, 곧 요단강이 갖고 있던 하나님의 치료의 효과를 새삼스럽게 이방 민족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강으로 바뀌게 했습니다. 치료 당한 나아만 장군이 아니라 치료 당한 요단강물이에요.
요단강물을 건널 때,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 요단강물이다! 물이 줄었네. 들어가자, 통과하자. 야, 길 나왔네. 통과하자.” 이래서 건너간 요단강이 아니에요. 그 안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처음 출애굽 때 어린 양의 피, 어린 양의 피가 언약궤라는 상자에 담길 수 있도록 그 언약궤의 설계 도면이 시내산에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만들고 유월절에 있었던 그 어린 양의 피를, 그 제물의 피를 언약궤에 담기도록 조치해서 그걸 이동한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나님의 고통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요단강물은 언약궤를 보고 멈춘 겁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들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 것은 뭐냐? 자기 일에 몰두하다 보니까 자기 고통만 생각하지, 자기 일밖에 모르는 이 지옥 갈 인간을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하나님의 고통이 거기 자기들과 함께 있었음을 그들은 잊어버린 겁니다.
자기 일에 미쳐서 자기변명 하기 바쁘고, 자기 인생 설계해서 계획 잡고, 그런 일 하느라 주께서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나타내는가에 대해서는 교회에 나와도 관심이 없어요. 설교 시간은 그때뿐이고, 교회 문 열고 나가면 관심이 없어요. ‘전쟁이 계속되면 기름값을 얼마나 아낄까?’ 뭐 그런 것만 생각하죠.
나아만 장군이 시건방 떱니다. 왜 시건방 떠느냐 하면, 마태복음 4장에서 악마가 인간 전체를 돈 문제와 기적 문제와 부귀영화 문제로 둘둘 감아 놨어요. 자기 일로 둘둘 감아놓아서 인간은 거기에 푹 빠져 있습니다(마 4:1-10). 나아만 장군 자기가 존귀한 자잖아요. 많은 예물을 들고 왔잖아요. 이만하면 부귀영화잖아요.
지금 약간의 문제가 뭐냐 하면 – 물론 중요한 문제지만 - 자기가 문둥병에 걸렸다는 그 문제다 이 말이죠. 나아만 장군은 오로지 병 낫고, 다시 회복되었을 그때에도 평소에 해왔던 나의 일이, 내 마음이 안 사라진 채로 그대로 있고, 다만 몸만 고쳤을 뿐이고 괜찮은 사람이 되어서 돌아갈 요량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병 고쳐주면 각종 예물을 바치겠다’라는 것은, 바로 ‘내가 이 병 고치러 오기 전의 그 마음, 그 기대감을 유지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라는 뜻이에요. 나중에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고 병 고치고 난 뒤에야 엘리사를 만났어요. 만나서 예물 드리니까 엘리사가 예물 안 받았습니다.
‘나아만 장군, 당신의 문둥병 낳는 것을 두고 자기 속에 있는 나의 일에서 어떤 흠집 제거, 위신 제거, 또는 멀쩡한 몸, 다시 괜찮은 나로 회복되기를 기대하면서 그 상실한 것에 대한 보상책으로 이 예물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나는 이 예물을 받지 않겠다. 당신은 국가적인 인물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문제성이 있는 인물, 그다음에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게 뭐냐? 마음 자체가 이제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내가 본국에 가든 어디에 가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내부가 교체돼야 해요. 나아만 장군이 그걸 알았어요! 알아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열왕기하 5장 17-18절에 보면 아주 감동스러운 고백을 합니다, 감동스러운 고백!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아만 자기 왕의 국가적인 신이 림몬이거든요. 다시 말해서 ‘내가 동화사 대웅전에 가서 절 한다 할지라도, 이것이 주의 일인 것을 제가 인정하니까 하나님께서도 그걸 받아주시옵소서.’ 세상에 이게 자유 아닙니까! ‘내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가 사라졌음, 내가 사라졌다는 이 사건, 어떤 일도 내 일이 없다는 사건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으킨 현장인 걸로 제가 고백하겠나이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게 이스라엘의 본질이어야 되는 거예요. 이 본질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이라는 하나님의 자체적인 내부의 변화를 거쳐요. 요단강 스스로 이방인을 고치는 그런 희생을 통해서, 요단강을 갱신하고 쇄신하는 그걸 통해서,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다 이룰 때까지 자기 백성 치료하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멈추지 않았던 겁니다.
그게 ‘말라기서’ 마지막에 나옵니다. 말라기 4장 2절에 보면,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빛을 발하는 광선을 보내는데 그것이 치료하는 광선이다.’ 성령을 보내면 내 일은 없고, ‘이미 다 이루었다, 다 용서했다’라는 주의 그 능력이, ‘요단강의 그 변화’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나의 일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벌써부터 주의 일을 하는 천국 백성의 삶을 이미 시작한 셈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믿는다’ 하지만 사실은 관심도 없는 저희들. 그런 저희들에게,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다시 주님의 은혜에 이끌려서 요단강과 같은 효과를 지니는 십자가를 생각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체험하면서, 나의 일이 주의 일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희생을 했던가를 깨달을 수 있는, 그걸 담고 살아가는, 주의 일을 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수요설교(260415) 요약 열왕기하 5장 1-3절(요단강 자기치료)
a-어제 수요말씀은 너무 도발적이어서 내가 지금 엉터리로 설교하고 있는 게 아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이 본문을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 들어가서 병 고쳤단 얘기로 들어요. 초점을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친 것으로 한다면, 나아만 장군이 이방인이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하나님이 이방인의 하나님밖에 안돼요.
그러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처음의 계획하고 틀어져요. 그러면 안 되거든요.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관련되어야 되고, 이스라엘에 포함된 숨어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는 포기한 적이 없다는 거죠. 발람 선지자가‘이스라엘 속엔 한 별이 있고, 왕이 있다.(민24:17)’고 한 그 일관성을 하나님이 중간에 포기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껍데기 이스라엘은 바알 섬기고, 아세라 섬기고 난리도 아니었죠. 에스라 시대 때에요. 전 국민이 우상 섬기는 데에 바빴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보고 기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이방인, 오히려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이방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 문둥병에 걸린 거예요. 그 사람은 존귀한 자죠.
개인적으로 봤을 때 이건 사고가 난건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어디까지 땡겨오느냐 하면, 요단강까지 땡겨와요. 요단강과 홍해는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 아니고, 사건이 있는 곳입니다. 갭(gap)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 건널 수 없는 것,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의 한계를 들추어내는 그러한 단절된 곳이에요.
‘천국 못 온다. 약속의 땅에 못 간다.’를 분명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요단강까지 왔다는 말은, 왜 인간의 마음이 안 바뀌면 천국에 못 가느냐를 제대로 보여주는, 그러한 장치가 있는 곳이 요단강이에요. 요단강에는 언약궤가 있었고, 언약궤의 취지를 모르는 자는 거길 건너갈 수가 없지요.
언약궤의 취지란, 유월절의 희생이 계속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서는 안 받아준다는 겁니다. ‘너 잘났어?’를 묻는 게 아니고, ‘너같이 못난 인간을 위해서 누가 희생했느냐?’를 묻는 것이 요단강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건너는 것이 두 가지죠. 하나는, 홍해를 건널 때는 추적자가 있었어요. 국가 단위의 권세, 그 국가 단위의 권세는 뭐냐? ‘너 잡히면 죽는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겁냈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두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국가 권세에 의해서 죽는 죽음은 하나님이 죽이는 죽음에 비하면 그건 죽음도 아니에요. 그것은 진정 무서워할 게 아니라고요. 진짜 무서워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희생의 의미를 모르르는 것, 그 어린양의 죽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세상이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죽음과 합류하면서 광야생활 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먹을 게 없다.’는 그런 생존의 죽음보다 더 센 죽음이 그들을 광야에서 생존케 했어요.
계속 살아났잖아요. 이것은 그 외부의 힘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힘이 있어요. 그것은 내부의 힘이에요. 그 내부의 힘이 바뀌기 위해서 요단강이 준비되어 있었고, 요단강에 들어간 언약궤를 위해서 광야에서 그들은 시내산 밑에서 율법을 받았고, 율법을 받은 그것과 요단강 건너가야 약속의 땅에 도달하는 것과 매치가, 연결이 되어 있단 말이죠.
그냥 요단강 건넌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요단강 가면서 요단강 한 가운데서 그들은 다시 한 번 언약궤라는 것이 왜 만들어져야 되고, 언약궤가 어떻게 우리를 살려내는지, 광야에서 살려내는지 그 이유를 요단강 한가운데 물이 끊어지면서, 다시 말하면 홍수를 통과해서 목숨을 건지면서 이 목숨이 다른 것을 증거 하기 위한 용도로써 새로운 생명이 이어지고 있을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요단강에 들어가는데, 요단강에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 유월절 어린양 때문에 살았다는 것이 약속의 땅에 사는 백성들이 유지해야 될 내용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나가리 되었어요. 우상 섬기기 바빠서 뭐 여호와고 율법이고 다 잊어버렸어요.
잊어버린 것을 어떻게 회복하느냐? 이방 민족의 나아만 장군을 요단강까지 유인해요. 유인할 때 나아만 장군은 물을 보고 더럽다고 하죠. “이 정도 깨끗함으로 더러운 죄를 씻는다고? 우리나라에 이것보다 더 깨끗한 강이 많다.”는 거예요.
아직도 나아만 장군 마음은 빨리 문둥병이 치료된, 괜찮은, 근사한 본인을 기대했던 그 시절에서 못 벗어났어요. 막대한 예물을 가지고 병 고치면, 룰루랄라 하면서 ‘나는 복 받았어.’하고 예전의 나, 내가 기대하고 원했던 나로 되돌아오면서 나는 다시 존귀에 합당한 인간으로 살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겁니다.
누가? 이방 나라의 사고방식은 거기까지가 한계예요. 신을 믿고, 여러 가지의 예물을 드리고, 신을 다룰 때 괜찮고 건전한 나, 남한테 내세울만한 가치 있는 나로 굳히기에 들어가겠다는 기존의 자기 마음을 붙드는데, 거기서 계속 멈추고 있었던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가 그거였습니다. 내 마음이 문제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거기서 일곱 번 씻어라 할 때, 버티다가 ‘이왕 온 거, 속는 셈 치고 한 번 들어가 봅시다.’해서 들어갔다 나오니 깨끗하게 되었어요. 깨끗하게 되었을 때 자기는 지금까지 생각했던 국가적인 대단한 존재라는 것은 상실하고, 이것은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는 국가란 것은 떼버리고 개인으로 나서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개인으로 나서야 된다는 것을 알고, 예물 들고 그 때서야 선지자 만나서 ‘제 병을 낫게 해주시다니, 여호와가 이렇게 위대한 줄 몰랐습니다.’하고 본인이 아람나라에서 온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 떼버리고 그냥 병자로서, 고침 받은 개인으로서 나설 때에 예물을 안 받습니다.
예물을 안 받는 이유는, 이것을 받아버리면 ‘내가 예물을 가져왔다.’는 병 고침 받기 전의 나의 행위가 내 병 고침에 도움이 됐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전의 내 마음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거, 성의표시는 할 정도로 약간의 선함은 있었다는 것이 티가 날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예 안 받습니다.
아예 안 받음으로 말미암아 근원적으로 ‘병들었던 나는 뭐고, 고침 받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나 자신의 가치를 다시 내 것으로 가질 수 없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철저히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요단강의 의미를 가지고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걸 알고 난 뒤에 “그렇다면, 예물을 안 받겠다면, 제가 부탁드립니다. 제가 흙을 가져가겠습니다. ”흙을 가져감으로써 자기는 아람 나라에 살면서도 무슨 나라에 사는 사람이 돼요? 여호와의 은혜로 작동했던 그 땅의 거주민의 하나로서 자기는 새롭게 새로운 마음이 된 거예요.
마음 안에 여호와가 일했던, 요단강에 있던 흙이 들어갔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흙이 자기 마음을 대체했어요. 대체하면서 여기서 자유가 터집니다. 제가 그 대목에서 감격했잖아요. 무슨 자유냐? “내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하나님 생각해서 한, 주께서 시작해서 주께로 돌아가는 일에 제가 연루되어있다는 이 마음은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b-제목은 이렇습니다. <요단강의 자기 치료> 남을 치료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자신이 아들을 보내서 죄를 짊어진 자기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가 치료하는 그 여파로 그 혜택을 공짜로 입은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그 원칙이 나아만 장군을 통해서 미리 주어졌죠. 하나님이 자기의 변동, 자기의 스케줄에 대한 변화, 그것이 하나님의 일관성, 성실함의 일관성이고,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드러나죠. 여기까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