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문제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인간은 땅에 속해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도 가난을 이해 못 해요. 가난이라는 개념은 하늘나라에서는 반대 개념입니다. 그런데 진짜 개념, 예수님께서 유일한 가난한 자로 오셨어요.
가난한 자로 오셔서,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난한 자들 있잖아요, 그 가난한 자들도 부자 편에 속한다는 것을 까발리시는 거예요. 집에 돈 한 푼 없어도 이미 심령은 부자예요. 천국 못갑니다. 마음가짐 자체가 그것은 하늘나라에서 요구하는 가난이 아니에요. ‘가난해도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살면 주께서 채워주실 거야.’ 그 심보가 하늘나라에서는 더러운 심보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나귀 타고 가실 때 무리가 찬송하니까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 19:39) 할 때 주님은 반대로 갑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눅 19:40).
‘누가 반대해도 돌들이 외칠 것이다.’ 여기서 ‘돌’은 물체에요. 사람이 아니에요. 주께서 인간을 ‘돌’로 만들고 그 ‘돌’에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으면 그 돌이 ‘말씀을 외치는 돌’로 변하는 거예요. 이게 심령이 가난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신 8:3, 마 4:4) 한 그 취지를 중도에 한 번도 취소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도 아닌 게 인간인 척하고 있네.’ 이걸 가지고 ‘카게무샤(그림자 무사)’라고 하는데 이게 대역이에요. 김정은 돌아다닐 때 자기인 것처럼 뚱뚱한 사람 뽑아서 대역이 돌아다니잖아요. 우리 인간은요, 한 번도 ‘나’였던 적이 없어요. 악마의 대역이든지 아니면 성령 받아서 예수님의 카게무샤, 예수님의 대역, 그냥 달성 공원의 키다리 아저씨.
굳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악마가 집어넣은 수치심에 몸 둘 바를 모릅니다. 항상 자살 대기자들이에요.
주님의 뜻은 이겁니다. “네가 사는 것 자체가 죄다.” 네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에요. 유기농법 한다고요? 유기농법으로 농사지으면 죄 안 지어요?
농토는 저주를 뿜어내게 되어 있고, 그 저주를 인간이 땀 흘려서 노동으로 극복하려고 하니까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어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죄 덩어리로, 죄의 덩치로 존재하는 거예요. 누구 앞에서 내가 의롭다고 정당화할 이유는, 알고리즘 해서 찾아보면 모조리 나 때문에 피해 본 사람만 계속해서 발굴되게 되어 있습니다.
나 참 착하게 살았다고요? 성실하게 살았다고요? 세상에 착하고 성실한 인간은 없습니다. 남한테 피해주지 않고 사는 사람 우리 가정에 우리 자신 포함해서 한 사람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것은 간단합니다. “네가 지금 그 사고방식 가지고는 천국에 불합격이다. 네 사고방식은 안 받는다.”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그것은 마귀가 그런 짓 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상, 우리의 가치관을 한계에 이르게 합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한계에 이르는 것, 그것이 십자가라고요. 십자가로 인하여 이 세상에 부자 편에 서는 사람, 그중에는 가난한 사람도 포함이 돼요, 월급 20만 원 받는 사람도 포함이 됩니다, 전부다 부자를 희망 사항으로 삼고 부자 되려고 애쓰는 그쪽을 부끄럽게 하려면, 십자가를 알게 된 사람은 도대체 뭘 돌파하고 뭘 통과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십자가를 뚫고, 십자가 안에 사는 사람에 한해서 이 세상이 전부다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에요. 그걸 가볍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네가 십자가를 알아?” ‘네가 게 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네가 십자가를 알아?”
인간에게는 없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죠.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지옥이 저희 것’이에요. 마태복음 5장 3절 다시 써야 해요.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는 지옥이 너희 것임이라.” 같은 뜻이잖아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지금 하시고자 하는 것이 뭐냐?
가난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창출하는 겁니다. 가난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만드느냐? 뭐 가난한 자가 이 세상에 없으니까, 가난한 자도 부자 되려고 환장했으니까요. 권력이 없는 자도 자기 자식은 공부시켜서 권력자 반열에 들어가게 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것 때문에 악착같이 교회 와서 기도하고 금식도 하고 이렇게 하는데, 그것은 컷이죠. 하늘나라에서는 “난 너 모른다.” 하고 컷시키는 거예요.
어떻게 가난의 공간을 새로 만드는가? 그 가난이라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바로 히브리서 5장 9-11절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주님께서 천하의 가난한 자로 이 땅에 왔습니다. 가난하게 오심으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그 효시, 그 첫 번째 걸음을 뗐어요. 문제는 예수님만 가난한 자가 아니라 이제는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도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해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죠. 세상적인 가난은 심지어 한 달에 월급을 20만 원 받아도 그 사람은 남을 가해하는 가해자에요. 돈 번다는 것은 남을 가해해야 벌어요.
아, 여러분, 이것은 살아보면 알잖아요, 살아보면 안다고요. 남을 학대 안 하고 무슨 돈을 벌어요? 그래 놓고 뭐 가난한 자를 도와주라? 차라리 범죄자를 도와주라고 해요.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해요, 사고방식이! 사고방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가난한 분이 이 땅에 오시는데 예수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뭐냐? ‘인자’가 돼요. 인간은 저렴한 인간인데 복된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하고 노력하지만 결국 인간은 죽으면 흙이 되고 돌멩이 같은 물체가 돼요. 저렴한 인간은 인간인 것처럼 대역을 하지만 결국엔 한 줌의 흙으로 전환돼요. 아담이니까,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라.’ 주께서 그렇게 하시고 그다음 처리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해버려요. 인간이 아니니까 “나 이것 행했습니다, 저것 행했습니다….” 그 입을 다물어야 해요. 돌멩이가 뭘 행해요?
돌멩이가 어떤 힘에 의해서 던짐을 당할 때는 가는 에너지의 흐름대로 날아갈 뿐이지 ‘나 지금 날고 있구나. 아, 신난다.’ 돌멩이가 이 생각을 왜 굳이 해야 해요? 할 필요 없어요. 힘에 이끌려서 우리는 살아갈 뿐이고, 인생이란 떠밀려서 사는 거예요. 물체니까요. 물리학자가 이걸 먼저 알았죠.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안 받아줍니다. ‘인자’를 받아줍니다, 인자. 예수님께서는 “너희들 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한 그 인자. 인자라고 하시는 분이 하시는 일은 시편 8편에 미리 하나님께서 계시했어요. 시편 8편 5-9절에 보면,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하겠다’라는 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물을 말하는 거예요. 이게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나오는데, 선교 단체에서 다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는데 인간이 세상을 다스리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뀐 자로 하여금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왕이 되려면 적어도 호랑이 한 마리는 잡아야 왕이 돼요. 강원도 영월에 그런 사람이 있었답니다. 단종(왕과 사는 남자, 2026)이 호랑이 잡았대요. 마귀를 잡아야, 마귀 정도는 잡아야 왕이잖아요, 마귀 정도는! 권력을 우습게 여기고 돈을 우습게 여길 수 있어야 정말 왕 중의 왕이라는 주님의 마음으로 교체됐다고 할 수 있고, 그 사람만이 하늘나라에서 받아주는 겁니다.
인자의 마음, 하늘나라에서 인자의 마음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있어야 하는가? 그 인자를 어떻게 했느냐?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인자가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가요, 낮은 자리로. 지금 가난이라는 공간은 없어요. 없는데 인자가 가장 저렴한 자리로 갑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생활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어요. 8장 19절에,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참, 말을 너무 쉽게 해요. 어떤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 ‘주님을 야무지게, 가열차게 열심히 따라가는 것 그것 저 잘합니다. 우리 선생님 가는 곳에 따라가겠습니다.’
아직도 자기 주제 파악을 못 해요. 주께서 가는 곳에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중에 전부 다 떨어져 나가요. 요한복음 6장에 나오듯이, 주께서 말씀하게 되면 주님 따라가기를 중도에 포기하고 다 떨어져 나갑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인간’이 아니고 ‘인자’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아주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려면, 여러분 집에 비누 쪼가리 있죠, 감사했습니까? 수건을 건조기에서 말리지 말고 햇빛 좋은 날 옥상에 널어서 말리면 뽀송뽀송하죠. 뽀송뽀송한 그 햇빛 냄새, 그걸 맡으면서 뺨에 한번 대 본 적 있습니까? 그거 보면요, ‘주여, 더는 소원이 없습니다.’ 이렇게 돼야 해요. 그 뽀송뽀송함, 그 햇빛 냄새요. 집에 바짝 마른 수건 있지, 때 씻는 비누 있지 뭘 더 원합니까? 뭘 더 원해요?
주기도문에 의하면 가난한 자의 특징이 뭐냐? 하루만 먹고 하루만 사는 사람이에요. 하루만 먹고 하루만 사는 사람이라는 말은 뭐냐? 매일 같이 심판 날이에요. ‘오늘,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날마다, 날마다 심판받는 거예요. 뽀송뽀송한 수건을 뺨에 대고 감사하면서 심판받고, 오늘 하루 비누 가지고 얼굴 씻으면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심판받고요. 여러분, 이게 어렵습니까? 이게 어려워요?
그동안 인간들이 생각하던, ‘돈 있는 자는 부자고, 먹을 것 없는 자는 가난하다’라는 그 개념의 틀에다가 주님께서 뭘 집어넣는가 하면, 죄를 집어넣어요. 그렇게 해서 사형수가, 사람 열댓 명 죽인 사형수가 교도소에 있는 비누 하나 보고도 하나님께 찬양한다면 그 사람이 10명을 죽였어도 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에요. 교도소라도 수건 안 주겠어요? 뽀송뽀송한 수건 준 것만 해도 감사하다면, 그 사람은 그날 치가 주님 만나는 구원의 날이에요, 구원의 날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 여러 명 죽이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주께서는 그런 거 보지도 않습니다.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됩니까?” 7번까지 용서하면 참 어지간히 주위에서 인간성 좋다는 소리 듣는데 마태복음 18장에서 주께서 하신 답변이 나옵니다. 2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그러고 난 뒤에 나온 이야기가, 어떤 임금이 회계하는데 ‘만 달란트 빚진 자와 갚을 것이 없는 자의 대립’이 나와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은 주도면밀합니까? 다 스토리가 있어요. 악마가 심어준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의 가치관 그걸 분명히 지적하고, 그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 천국 가는 유일한 자, 천국을 만드신 분인 주님을 대비시키고 대조시키는 그러한 구조, 틀을 가지고 성경을 짠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뺍시다. 그냥 하나의 죽을 수밖에 없는 사물로 봅시다. 그동안 인간도 아닌 게 인간인 척하는 이것은 악마가 심어준 거예요. 악마가 심어준 그 가치관을 우리 힘으로 못 빼요. 뺄 수가 없어요. 기껏 아는 가치관이 그게 자기한테 전부인데 이거 빼버리면 자기는 그냥 멍하잖아요.
그래서 주께서는 자기를 잃게 만든 자만이 감사가 되도록 일을 진행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말은, 자기를 잃어버렸으니까 자기가 지은 죄도 어떻게 돼요? 날아갔죠. 월급 20만 원 받고 폐수 방류하는 그 자기를 잃어버렸죠. 이것을 위해서 주님 혼자만이 아는 외침이지만, 그 외침이, 그 말씀이 오늘날 성도의 마음에까지 파고들도록 성령께서 역사하는 그 말씀이 있어요.
요한복음 19장 30절입니다. 제가 이야기할게요.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입니다. ‘뭘 다 이뤄? 뭔 혼자 말을 저렇게 해?’ “다 이루었다!” 너를 나와 함께 십자가에 넘겨 죽게 함으로써 네 기억 속에 있는 모든 죄, 네가 하는 모든 행동…, 죄라 하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죄니까요, 그 모든 죄를 같이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주님의 가치관과 주님의 마음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게 돼 있어요.
실제로 그렇게 들어왔던 사람이 보여줬던 행동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 행동이 나와요. 거기에 마리아가 나와요. 오빠 나사로가 있고 남매인 동생들이 있는데 그게 마르다와 마리아예요. ‘마리아’가 자기 언니 ‘마르다’ 하고 대조가 됐어요.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고 인간적으로 대접을 잘 해줬지요. 그런데 마리아는…, 그게 싸가지가 없는 거죠. 딱 예수님 턱 밑에 앉아서 ‘말씀만이 나를 살린다’ 생각해서 듣기만 하고 있었어요.
물론 들어도 소용없지만 하여튼 듣고 있었어요. 나중에 오빠 죽었을 때 둘 다 마찬가지였어요. 주님 멱살 쥐려고 달려들었으니까. 그랬던 마리아가 죽었던 오빠가 다시 살아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바뀌었느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그런데 그때 가룟 유다가 뭐라고 하느냐?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요 12:4-8).
여기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라의 임금도 가난은 해결 못 해요. 어떤 정치 구조,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에서도 가난한 자는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주께서 일으키니까요. 주께서 가난한 자를 일으킴으로써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의 가난한 자를 구제할 것이냐, ‘내가 죽었다’라는 사실을 네 안에 품고 너의 수치가 하나도 없이 된 것으로 살 것이냐?”를 묻는 거예요. “어느 쪽이 천국에서 합격이고, 어느 쪽이 불합격이냐?”
남 걱정하지 마세요. 네 걱정이나 하세요, 네 걱정이나! 여러분 걱정이나 하세요. 로마서 8장에도 나오지만, 주님의 사랑이 전부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얼마나 가난합니까? 사도 바울이 의도적으로 가난의 리스트를 짜서 거기다 집어넣었어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어떻게 일어나는 일이라도,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할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귀야, 봤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마귀의 문지기, 달성 공원 문지기죠. “마귀야, 잘 봤어? 너는 이런 혜택 없지?”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부끄럽게하기 위해서, 사물인데 주께서 성도로 구성을 한 거예요.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로 구성하고, 부자는 부자대로 구성하신 하나님, 이 마지막 때에 가난하든 부자든, 월수입이 2억이 되든 관계없이 성도로 친히 우리를 ‘구상’하시고, ‘구성’을 해 주신 우리 주님께 부끄러움 없는 넉넉함으로, 뻔뻔함으로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그동안 무슨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었는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곧 닥칠 자기 미래도 생각 못 하고, 남들 보기에 ‘나 어때? 나 어떠냐고?’ 그걸 인생관이라고 장착해 놓고 살아가는 한심스러운 우리의 모습, 이제는 그 한심스러운 모습까지 넉넉하게 즐길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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