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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

아빠와 함께 2026. 5. 4. 18:19

경기도에 의왕이라고 살기 좋은 아파트촌이 있어요. 몇 번 거기를 지나갔는데 그 의왕의 아파트에 사는 어떤 사람 집이 경매에 넘어갔어요. 낙찰이 되었으니까 집을 비워주어야 하는데 집을 비워주기로 정한 그 전날에 부부가 생활고로 자살했습니다. 가스통 폭발시켜서 자살했죠. 이것은 뭐냐 하면요, 인간의 개념은, 돈이 없어 가난이 아니고 내가 속해있는 이 사회에서 내가 저렴한 자가 됐다는 것, 저렴한 가치밖에 안 된다는 그 수치심이 돈 없음보다 평생토록 그 사람의 정신을 압박해 왔던 겁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니고 남들 앞에 수치스러운 인간은 내가 못 보여주겠다. 차라리 내가 그냥 가스통 터트려 죽는 게 낫다’ 하고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는 뛰어내려서 죽고 그랬죠. 이게 남의 일이 아니에요. 자꾸 돈 벌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저렴한 인간이 안 되겠다는 거예요. 누가 저렴하다고 하느냐? 남들이. ‘나는 남은 몰라. 나 혼자 산다’고 해놓고는 실제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남의 시선과 의식이 나를 지배하고 있고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런 식이 되면 교회 나와서 성경 알아도 그것은 하늘의 것이 아니고 ‘나’라는 본인 자체가 땅에서 규정 받은 개념이에요. 그래서는 천국이고 뭐고 간에 거기 신경을 안 쓰죠.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남한테 더 이상 어떤 평가 받을 어떤 수치스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예요. 누구 앞에서도 안 수치스러워요. 돈이 없어도 수치스럽지 않아요.

왜냐하면 새로운 타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서 그 지독한 수치심을, 하늘나라 기준에서 봐서 그것을 없애버렸거든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그 복음, 그 복음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남들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그 ‘저렴하다, 수치스럽다. 아, 난 너하고 안 놀련다’라는 그런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내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이유가, 내 안이 교체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마음으로 교체된 거예요.

이 점을 위해서 주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저렴한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와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언뜻 보면 우리보고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 같죠.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이 코스대로 밟아나갔다는 거예요.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이 땅에 아무도 없으니까요. 왜 없느냐? 마귀에 물들어있는데, 수치에 벌벌 떨면서 살아가는데 그게 무슨 심령이 가난한 거예요?

전부 다 땅의 개념, 평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들어온 것들 모든 것이 다 땅의 개념이잖아요. 직장 생활하면서, 주위 가족들과 대화하면서 전부 다 수치스러울까 벌벌 떨면서 나온 개념들 아닙니까? 그런 단어들이잖아요. 대화 자체가 그렇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기뻐하면 안 됩니까?

그게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주님께서는 기가 찬 거예요. 하늘나라 심판대 앞에서 ‘누가’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누가’ 진짜 자랑스러워해야 하는지, 이 세상에서는 그 하늘의 뜻과는 정반대로 뒤집어놓은 거예요, 반대로! 하늘의 개념을 모르니까 바들바들 한시도 안 떠는 경우가 없어요.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가요.

경매에 낙찰된 사람은 4억 5천 주고 은행에서 대출받아서 집 하나 샀다고 생각했는데, 불에 탄 집을 받게 되었어요. 인간들이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이 가치들, 이거 뭐 어떻게 조치해야 하지 않습니까? 목숨 끊어지기 전에, 숨 끊어지기 전에 이 세상의 것과 바뀌어져야 하거든요.

그래서 야고보서를 보거나 로마서도 그렇고 고린도전서 1장을 보게 되면, 사람들이 자기의 가치관이나 세상관, 그 바탕과 구조 자체가 뜯겨나가야 하는데 그게 안 뜯겨나간 상태에서 성경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그래. 가난하게 살자. 가난하게 살면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이다. 성경에 나왔잖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따라서 내 마음을 가난하게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내가 가난하게 살면 된다.’ 이런 되지도 않는 결론에 이릅니다.

교회도 많이 구제하고, 개인적으로도 아프리카 우물 파기에도 돈 꼬박꼬박 보내고. 아프리카 우물 파기에 돈 보내봐야 중간에서 다 가져가요. 우물은 몇 개 파지도 않아요. 그것은 그냥 폼이나 내는 것이고 중간에서 커미션 다 뜯어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진 것들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 그러니까 이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겠는가?’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모든 걸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날 따르라’라고 할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파는 거예요. 하지만 주님은 못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 이야기 뒤에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해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그렇게 하니까 제자들의 사고방식에서 금방 ‘내가 행한 것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자기의 기본 전제가 숨겨지지 않고 톡 튀어나왔어요.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참 절망적입니다’라는 뜻이에요. ‘주님, 그것은 우리가 못합니다.’ 자기 인생관 가치관 자체를 뜯어서 바뀔 생각은 안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할 때 주님께서는 “사람은 아예 못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마 19:36).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요, 사람을 한계에, 절망에 끝까지 밀어붙임으로써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뭘 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 그 경계선을 넘어서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이 ‘가난’이라는 말은, 저렴한 사람에서 어디로 바뀌느냐? ‘저렴한 사람’에서 ‘저렴한 것’으로 바뀌어요.
가난한 것은 사람 취급을 안 하니까, 물건 취급을 하니까요. ‘저렴한 자’에서 ‘저렴한 것’으로 바뀌는 그 경계선상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그 가난한 사람을 위치해 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구원 받는 일은 없습니다. 천국 가는 일은 없어요. ‘저렴한 자’에서 ‘저렴한 것’으로 바뀌어야 해요. 나는 인간이 아니고 돌멩이 같다는 것을 인식하는 그것을 체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