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4차원 인생

아빠와 함께 2026. 4. 25. 19:38

사울은 보세요. 죽은 스데반 집사에서 미안한 기색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울은 예수 만나고 난 뒤에 인간적인 것이 날라가 버렸어요. 사과할 수 있는 주체가 없어요. 이제는 착하게 살아야지 이게 없다니까, 이게 없어요. 사울에게는 이게 없어요. 사울에게는 이제 도리어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가 없고, 남은 것은 자기한테 할 일이 생겼다는 겁니다. 주님께 부여받은 것은 사명이었습니다. 너 내 시킨 대로 해라. 달랑 그것뿐이에요.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 자체, 세상 자체를 주님께 그냥 반납했다. 할까? 그게 날라가 버린 거예요. 저는 이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차원 돌파 

4차원에서 3차원 보면 3차원에 어디 있든지 간에 뚜껑이 날라간 거예요. 뚜껑이 날아갔기 때문에 3차원 안에서 통하던 그 의미, 그 가치, 그 자기의 이것은 4차원에서는 이거는 갖다 버릴 것이지. 아무 소용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들끼리 인간 대 인간이 만나서 교류했던 그 의미는 천국에서는 안 받아줍니다. 인정을 안 해줘요. 인정을. 일체 인정을 안 해줘요.  주께서 사울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렸죠. 사울의 인생, 특히 사울의 추억, 사울의 기억, 인생관 세계관 다 빼앗았습니다. 이게 차원 돌파 차원 뚫기.
이 차원이 왜 이게 뚫어야 되느냐 하면 구약 때부터 내려오지만, 이 3차원, 이 세계의 공간, 이 세상은 지배자가 있어요. 누구냐 하면 악마라는 지배자가 있어요. "철두 철미" 마귀가 바보가 아니에요. 뱀은 지혜로워요. 인간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에 인간으로 하여금 이 세계를 뚫고 생활하는 건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자동적으로 인간의 신앙생활은 짐승과 마귀와 협상한 조건 하에서 개인적인 취미생활에 해당돼요. 모든 교회가 취미생활이고, 

 

사울에게 찾아왔던 주님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파괴시켰어요. 나의 세계, 나의 세계, 내가 속한 이 세상이 파괴되면서 어디로 이동했는가? 말씀의 세계로 옮겨줬습니다. 나의 세계가 파괴되고 말씀의 세계로 옮겨줬습니다. 그거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차원을 넘어섰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저보고 살았다. 하지 마세요. 제 안에 주님이 살아있지.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라고 고백한 거예요. 시 공간이 섞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안에 들어온 거예요. 기존의 시간과 공간이 섞이지 않는 이 시간과 공간이 섞이지 않는다는 말은 미래 과거 현재가 없이 모든 게 확정되었다. 운명이 확정된 거예요. 그래서 이 인간의 운명은 뭐냐 하면 그 차원, 현재 우리가 사는 차원을 돌파했느냐 돌파하지 않느냐로 이미 인간은 두 종류로 확정이 되어 버렸어요. 돌파하려고 애 쓰는 건 소용없어요. 돌파 안됩니다. 내가 성경을 보고 이해하는 모든 의미는 돌파하지 않는 이 세상에 짐승의 인간들의 다른 인간들이 사용하는 그 의미 밖을 못 벗어나서 그걸 사용하기 때문에 내가 이렇다고 나를 규정하는 의미 자체가 마귀가 용납해주는 의미들이에요. 

주님은 새로운 차원으로 사울에게 찾아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그 다음이 뭡니까? 핍박하느냐? 주님의 십자가 지신 상처 안이 4차원 세계였던 겁니다. 그 4차원 세계가 주님의 상처로 사울을 삼켰어요. 삼키는 동시에 사울은 자기가 잘했다. 못했다가 다 날아갔어요. 이제는 타인의 평가, 시선, 비판. 이것은 자기한테 해당사항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조건이에요. 구원의 조건.
3차원 천국 차원의 차이점이 모르겠습니까? 뚜껑이 없어요. 귀를 만드신 자가 듣지 못하랴. 눈을 만드신 분이 보지 못하랴. 자기들끼리는 전부 다 이렇게 있지만 위에서 보면 뚜껑이 없어진다고요. 말씀의 세계. 그래서 인간의 세계에서 사울은 이제 말씀의 세계로 갔는데, 그리되면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계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7년이라는 간격 틈 예수님 죽은 것이 십자가가 AD 30년, 서기 30년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난 것이 37년. 이게 뭐냐? 왜 그러냐면 그 당시에 사건별로 역사도 나와요. 37년, 분명히 7년 간격이 있는데,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2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같이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산다. 나는 뭐냐 그리스도의 껍데기다. 주님의 껍데기다.

 

여기서, 하나의 공식을 적어보겠습니다. 나의 의가 뚫리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의가 뚫리지 아니함이지. 나의 의가 없어지면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 잘남이 안 없어져요. 뚫린다는 말은 구멍난 흔적을 갖고 있으면 돼요. 지 잘난 체 하다가 뻥 하고 뚫린 거예요. 예수 잘 믿어 이렇게 잘 됐다. 자기 자랑한다고요.

 

자 그럼  주께서 조치하는 그 환경은 어떤 환경이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그 환경을 그걸 그대로 재현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래 보면 돼요. 사도바울은 이제 사도바울이죠. 사도바울은 무엇을? 주님의 상처를 이동시키고, 짊어지며 가는 그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게 했던 그 상황들이 다시 재현되는 현상이 일어나요.  

주님께서는 주님이 속해 있던 환경, 아버지의 영을 받아서 활동했잖아요. 그 세계 속에서 예수님께서 활동했던 그 환경 속에 집어넣었을 때 오늘날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하면,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기도밖에 없어요. 이 기도가 응답이 되겠어요? 응답이 안 되겠어요. 성도가 기도하면 하나님께 들어줍니까? 안 들어줍니까? 자신있게, 자신있게 들어준다. 안 들어준다?

인간의 모든 기도는 안 들어줘요. 안 들어줍니다. 기도는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답답하니까 ,답답하면 기도한다고 해서 들어주지 않습니다. 모든 응답은 모든 응답되지 않는 게 기도의 응답이에요.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기도한 이유는 그만큼 아주 사정이 급하다, 다급하다. 사는 이유는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님이 주님의 이유 외에는 나머지는 다 없애버려요. 주님이 널 택했다는 이유 빼놓고, 어떤 이유도 우리한테 있으면 안 돼요답답해서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밖에 없어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주께서는 그럴 때 택도 없다. 택도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뭐가 나오냐 하면 히 7장 25절이 빼꼼히 나옵니다.
( 히 7장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 어떤 말씀이 있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도를 응답한다 이랬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무사한 기도해봤자 소용 없던 걸 알 때 그동안 우리가 여기서 버틸 수 있는 것은 다른 계획이 있었는데, 그 계획은 우리는 몰랐는데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압니까? 모르는데 미래까지 다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알아서 의도적으로 그 상황을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뭐를 주시는가? 내 주님이 너를 위해서 뭐하고 있다? 기도하고, 있대요. 주님이 항상 살아계셔서 늘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네가 그걸 인정을 안 하니까 자꾸 내 기도 응답됐냐 안 됐냐 이래 하는데 그거는 이게 네가 아직도 너의 세계에 있다고 착각하는데, 지금 여기는 무슨 세계냐? 말씀의 세계예요. 삼차원 뚜껑이 날라가버린 초월적인 세계예요.

주님이 살아 있어서 주님이 자신이 하는 일을 시키시는 그 세계 속에서 우리의 몸은 여전히 어디에 속합니까? 우리의 몸은 육신은 어디에 속합니까? 기존에 있던 3차원 세계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얼굴 새파래 지어가면서 하나님 믿어도 소용없네. 나 끝났어 끝났어 끝났어 죽었어 있잖아. 나 이제 예수 안 믿을 거야. 이걸 하루에도 열 몇 번씩 하면서 살아가게 바들바들 떨며 살아가는 그 그러한 것을 모습을 보면서 주께서 이끌어 가시는 거예요
주께서는 네 마음대로 해라. 어떤 벌벌 떨든 그 벌벌 떠는 것조차도 누가 그렇게 의도했어요? 주님의 기도가 너에게 어떤 경우라도 먹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상황을 주시는 겁니다. 자기의 옷 매무새를 이렇게 단정하게 할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개판같이 살 이유도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개판같이 사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양심이 있어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남보다 더 착하도록 완벽하지 않지만 노력은 해야 돼 라는 식으로 살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문제는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고 이렇게 바르게 살도록 애썼는데 하나님 내 돈 안 줍니다. 사는 꼬라지, 이 꼬라지 이게 사는 것도 아니고, 거지지 이게 뭡니까? 이래 가지고 빛과 소금에 예수님이 있는 어떤 보람이 들겠습니다. 이런 게 나온다니깐요. 이런 게. 그게 뭐냐 아주 어묵이 뜨거운 맛을 먹고 더 집어 넣고 거기에다가 간장까지 찍어가지고 잡숬잖아요.

 

내가 잘나야 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으로 인간은 버티고 살았던 겁니다.
그런 사울에게 누가 찾아왔어요? 주님께서 십자가의 상처를 안고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교회생활 50년, 60년 다니는 게 아무 소용 없죠. 그건 취미생활 한거죠. 진짜는 뭐냐? 진리는 외부에서 나한테 나 인생 자체를 박살내면서 파악하면서 다가와야 돼. 전부 다 내가 어떤 소박한 거, 욕심이 없는 거 어떤 거 해도 그런 것은 네가 소설 쓰고 있는 거야. 그거는. 기존의 2천년 교회의 역사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조작해 온 거예요. 내가 한번 적어볼게요. 괜찮아 괜찮아 하는 이런 격려와 위로가 진리를 보는 기회를 박탈하는 잔인한 짓이다. 잔인한 짓이에요. 잘 될 거야.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이것은 주님이 진리잖아요. 진리하고 바꿔야 되는데 그냥 안 바꾸는 거예요. 주님이 후시딘 연고입니까? 그냥 바르고 던져 놓으면 그만이에요? 내가 스스로 치료될 가능성도 없고 나는 존재 자체가 이 자체로서는 구원이고 천국이고 영생이고 해당 없어요. 해당 없습니다. 못 들어가요. 그런데 그 절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자꾸 괜찮대요. 7번 넘어지면 8번 일어서면 된다는 거예요. 자꾸 격려를 해주라고 격려를.

 

세상과 주님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인식 변화, 아까 차원이라고 하는데 차원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 져야 됩니다. 바뀌는 방법이 바로 이 세상을 어둠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눈물 나게 만드는 거예요. 그 신앙이라는 그 손꼽놀이 고만하지 뭐. 신앙생활 좀 그만둘 때 안 됐어? 교회 출석해가 예배 듣고 하는 그런 거 니가 생각해도 그거 니 장난치는 거 맞잖아.
다른 사람 다 속아 넘어가는데 주님은 안 속아 넘어가. 그거 오락이잖아. 왜 그래? 그러니까 재밌다고 돈 내고 응원하고 이게 오락이잖아. 그래서 지금까지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죽음을 딛고 다시 돌아온 자에게 이 세상의 모든 정치, 민주당, 국민의힘 모든 정치는 무슨 놀이? 애들 소꿉놀이 소꿉놀이죠. 입시, 취직, 결혼 뭡니까? 소꿉놀이 하는 거요. 인형 들고 애업고 하는 게 소꿉놀이잖아요.

저기 줄을 여기 줄을 그었다고 봅시다. 이게 죽음입니다. 내가 살았던 거예요. 죽음을 만나고 십자가 지신 죽으신 주님을 만나고 다시 돌아서서 세상에 오게 되면 세상에 사는 모든 것은 뚜껑 열린 삼차원 세계 소꿉놀이에요. 그러니까 소꿉놀이 특징은 뭐냐? 나이 어른이 되서, 소꿉놀이 애 소꿉놀이에 그 화를 낼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화. 손꼽놀이인데 그걸 화를 왜 냅니까? 막 분노할 이유가 있어요? 소꿉놀이인데. 중학생 애가 교사를 떠밀고 밀쳐가지고 뇌진탕 걸렸다는 거예요. 왜? 게임 못하게 한다고. 걔는 게임이 소꿉놀이가 아니고 뭡니까? 진심이죠. 그런데, 인간의 진심은 항상 부서져. 혼자 심각해.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는데 왜 세상은 멀쩡하냐. 왜 해는 비추느냐. 그러면 그 소리 듣고 해가 어떻게 이해합니까? 내가 널 위해서 울어줘? 이러니까 해가 지금 뭐 미친 거지? 나는 주님 지시받아. 니도 빨리 주님 지시받아. 어디서 니 중심의 소꿉놀이를 한다고. 생각해보면 화낼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끝까지 알려줍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어두움부터 시작해서 빛이 있죠. 어두움의 빛이 창세기 일장입니다. 그 다음에 빛이 빛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이 생겨요. 어두움이 생기면서 그 다음에 어떡합니까? 이 어두움은 영원한 어두움과 영원한 빛의 세계로 나누어지는 것. 이게 성경의 전부입니다.

어두움에서 빛. 빛으로 와서 어두움. 어두움에서 어두움에서 빛 어둠 속에서 창조예요. 창조에 뭐가 포함되냐? 이스라엘 창조예요. 이스라엘 속에 뭐가 녹아있어요? 빛된 분이 있죠. 이스라엘이 어떻게 됩니까?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이스라엘은 잘 되었습니까 멸망했습니까? 이스라엘마저 어디 퐁당 빠졌어요? 이방민족이 믿던 신에 빠졌죠! 이름은 여호와인데 마음은 어디가 있다?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포부, 차이성이 없어요. 어두움에 갔어요. 이게 요한복음에 빛이 어두움에 왔을 때 어두움의 특징이 뭡니까?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도 이 어두움을 두 조각 내요. 한쪽은 지옥, 한쪽은 천국이 나옵니다. 이 일을 누가 하느냐? 빛이. 빛이 이 작업을 해요. 그래서 어두움은 어두움이란 뭐가 만드느냐, 빛이 빛을 만나서 어둠이 돼요.
빛이 없는 곳이 어둠이 아니고 빛이 빛을 만나서 어두움을 만들어내요. 빛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와야 돼요. 이 땅에 와서 그 빛이 어둠에 함몰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남으로써 어둠을 경유한, 빛이 어두움을 경유함으로써 빛을 빛되기 위해서 뭐냐 하면 어두움 관계가 어두움이 관계로서 반드시 둘 다가 성립이 돼야 돼요. 둘 다가. 천국만을 목적이 아니고 지옥이 지옥으로 지독히 어두우려면 빛이 어두움을 경유해야 지옥과 지옥이 진짜 어둡고 궁극적으로 어둡고 빛은 천국은 궁극적으로 빛의 세계가 되는 겁니다.  어두움,즉 그림자는 왜 생깁니까? 그림자는 왜 생깁니까? 그림자가 예 어떻게 생깁니까? 이 말 질문이 아니고 그림자가 생기는 것은 빛이 있으면 벽을 통과 못해서 그렇게 생기잖아요. 이건 어떻게 해요? 왜 생깁니까? 그림자가 왜 생기죠? 빛 때문에 빛과 빛에다가 빛을 보태니까 그림자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물리학에서는 이게 파동의 간섭현상이에요. 간섭현상. 파동의 간섭현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봉우리하고 골짜기하고 파도가 칠 때 간섭 현상을 해서 같이 어떤 때 중력이 되는 이게 상쇄가 되면 편안하지만 이게 합쳐져 버리면 그냥 보통 깊이가 아니고 가장 깊은 가장 깊이 들어가 버려요. 가장 깊이 빛을 빛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으로 뭐가 반드시 등장해야 되는가? 어두움이 반드시 등장해 줘야 돼요. 물리학에서 이렇게 하지만 이건 성경적으로 보면 창세기 2장의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바로 그겁니다. 선악과는 죽음을 나타나죠. 생명나무가 생명을 나타내잖아요.
이제는 나무 차원이 아니고 그걸 세상 전체의 원리로 다 적용해버리면 이게 죽음이 그냥 숨 끊어진 죽음이 돼서는 안 되고 생명을 삼키고 죽여버린 그 죽음이야말로 제대로 된 저주받을 만한 진짜배기의 어둠이 저주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담은 죽고 난 뒤에 선악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고 해놓고는 어떻게 안 죽죠? 아까 유튜브 할 때 했죠? 안 죽죠? 실컷 고생하다가 흙이 되잖아요. 그거는 지금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해야 될 진짜 어둠과 빛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서론격이에요. 서론격. 예고편격이에요. 철저하게 이 세상은 어둠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은 반드시 예수님을 살해해야 됩니다. 살해해야 돼요. 그래서 어줍잖게 어둠에 속했으면서 태어나기를 어둠에 속했으면서 자기의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지킴으로써 빛의 세계로 가겠다는 그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인간들은 모조리 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그 상처와 죽음은 바로 내가 착하게 살아서 구원받게 하고 착한 사람으로 천국가겠다고 하는 이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을 죽이게 한 이유가 된다는 것을 발견해야 되죠. 예수님 빼놓고는 하나님의 의의를 논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돈은요. 하나님 주님이 우리 보고 준 거예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우리의 어떤 노동의 대가 없이 준 거예요. 노동의 대가 없이 그냥 준 거예요.

그러니깐 누가 핍절하지 않고 누가 가난한 사람입니까?  우리 자신이 거지입니다.  이 말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절대로 우리 힘으로는 단 하루도 못 버티는 거지다 이 말이죠.  그게 뭐라고요? 소꿉놀이 결국은 뭐냐?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살고 싶은 사람. 살려주는 것. 이것이 위로와 격려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상처난 몸으로 왔을 때는 살게 해줄게가 아니라 살아야 되는 이유는 너에게서는 더 이상 없다는 거예요. 니가 살고 죽고 한 이유는 누가 제공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제공하니까 사울이 누구한테 미안해 안 하잖아요. 스데반 집사한테 미안해 하지 않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왜 죽었어요? 착해서 죽었다고요? 스데반 집사가 죽은 이유가 뭡니까? 아담의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몰랐어요? 그거 로마스에 나오는데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서 죽은 거예요. 스데반 집사님이 사람이 대단해 가지고 착하긴 했는데, 억울하게? 인간의 죽음에 억울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는 주님의 그 마땅함이 마땅함에 참여해야 돼요. 사도바울이 그걸 안 거예요. 뚜껑 열린 거예요. 이게 삼차원 뚜껑을 열어보니까 전부 다 사기예요. 마귀가 곁들은 사기에 전부 다 말려들어서 죽으면 안 돼. 그 모든 생각과 모든 행동이 나만 죽더라도 난 죽으면 안 돼. 지금 이걸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것만 하는 거에요. 인간은.

 

사울은 그냥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안에 움직이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 답답이죠. 자기 일거리에요. 사울은 사울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께서 사울에게 일을 자꾸 맡기는 거예요. 답답해도 주님이 답답하지 우리가 답답하지 않아요. 주께서 다 시키니까.  주님이 다녀갔던 증거가 뭐냐? 눈 갔다 봉사됐다. 새롭게 눈 떴다. 이 말하면 새로운 세상관. 이 세상이 소꿉놀이고 모든 인간은 죽어있다. 누가 호출하지 않는 한 그에게는 영생이 없다. 모든 인간은 사도바울의 그 편지처럼 모든 것은 마귀의 세계에서 흑암의 세계에 갇혀 있다. 그걸 사랑의 아들로 누가 옮겨줄 것인가?
아가서 8장 6절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됐어) 사랑은 뭐같이 강하고요? 투기는 음부보다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는 그 기세가 무슨 불? 여호와의 불이다. 사랑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불이 되어서 성령의 불이죠. 불이 되어서 우리가 음부 죽음에 있는 이 마귀의 저 지옥에 있는 우리를 질투심으로 우리를 끄집어 땡기게 돼요. 강한 질투심으로 내 사람인데 누가 내 사람을 건드려 하는 하나님의 강한 질투심, 그 마음을 품어라 이 말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데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하고 강하게 질투심으로, 강한 질투심으로 우리를 이 내 사람이다. 끄집어 내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만남은 주님이 주선하신 주님의 주선이에요. 모든 것은 인간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하지 말고 그 사이에 주님을 넣어서 설명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뚜껑 열린 거예요. 뚜껑 열었다고 화낸다. 뜻은 아니고 뚜껑을 열기 때문에 차에 화낸다는 내가 참 부끄럽지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마시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주님이 나에게 지금 이 현장에서 어떤 지시를 내리는가? 현장 탓 남 탓 하지 말고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너무 좁게 보지 않게 하옵소서, 넓게 보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예비된 대로 진행될 부분인데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왜 자꾸 하나님이 원망되는지 그러기에 십자가의 피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그때마다 새삼 새삼 문득문득 떠올라서 깊이 있게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