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버림받은 자의 특징은 뭔가 내놓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버림받았다’는 의식이 사라지면 하나님의 약속도 같이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안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유일하게 인간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마땅하며 지옥으로 버려주시는 하나님의 조치는 정당하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귀신이 들어간 상태에서 인간은 태어나기에 그 모든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믿음을 갖고 태어납니다. 귀신의 신앙으로 무장된 채 말입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이미 하나님께 버림받은 처지에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즉 오늘날 고아와 과부는 자신의 행함도 노력으로 율법을 지키려는 자가 아니라 율법이 온전하게 된 그 복음을 내어놓는 자들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신약에서는, ‘율법은 율법대로 살아 있지만 온전한 율법체로 살아 있으면서 그 온전한 율법체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거예요.
자유가 뭘까? 온전한 율법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은, 바로 율법 앞에서 우리 모두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라는 것, 죽을 자라는 결론을 율법이 미리 챙겨서 우리에게 나타난 거예요. “율법 줄게 제발 죽어줘!” 이 말이에요. “이 성경 말씀을 줄 테니까 말씀 앞에서 좀 죽어. 좀 죽으란 말이야. 자꾸 율법 지키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죽어버려!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죽음에 갇혀 있는 너를 죽음에서 빼내 주겠다는, 자유를 주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것,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 거죠. 그런데 그냥 율법은 ‘너는 죽어야 된다.’ 이거잖아요. 온전한 율법, 다시 말해서 복음은 ‘죽어야 마땅하다’로 멈추는 게 아니에요.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로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신약에 와서의 이 온전한 율법은
‘지옥 가야 마땅하다’로 의미가 확장돼요. 그러면 이것을 소급해서 다시 모세의 율법에 넣어버리면, 모세의 율법은 단순히 늙어 죽는 데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너는 율법을 위반한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함’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온전한 율법, 복음, 신약 성경의 말씀, 곧 구약의 율법과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어요, 할 말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귀신이 있어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믿음이 있는데 어떤 믿음이냐? ‘내 속에 귀신 없다.’ 이걸 믿어요. ‘나는 내가 행한 대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걸 믿고 태어난다고요. 인간은 믿음 없는 인간이 없어요. 다 믿어요. ‘나는 내가 아는 내 믿음으로 이 성경 말씀을 지킬 수 있다’라는 그 믿음은, 귀신이 준 믿음이에요. 귀신이 준 믿음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이상한 공통점을 보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편 못 들어서 아주 환장을 했어요. 자꾸 인간이 인간 편을 들어요. 사람 편을 든다고요. ‘왜 전쟁하면서 사람을 학살하느냐?’ 이 발언은 뭐예요? 왜 사람이 사람 편을 들어요? 왜 사람이 사람 편을 듭니까? 그게 세속에 물든 경건이에요. 왜 사람이 사람 편을 드느냐 하면, 내 안에 마귀가 들어 있으니까 자꾸 내 편을 들어요. 내가 내 편을 드는 거예요.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버리운 자입니다. 버림을 당한 자예요. 우리는 버림받은 자의 동기 동창들이에요.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편드는 거예요. ‘전쟁할 때 살살 봐주면서 하자.’ 봐주면서 하는 전쟁이 어디 있어요? 인권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인간의 권리는 이게 귀신의 권리예요.
저는 경건이라고 딱 생각하면, 바로 귀신이 믿는 하나님 있잖아요, 하나님 한 분 계시다고 믿으면서 벌벌 떠는 그 믿음, 그 귀신의 믿음으로 경건 생활하는 사람이 딱 떠올라요. 1962년에 태어나서 2010년에 대장암으로 죽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 그 사제. 그 사람에 관한 영화 <울지 마 톤즈>(Don't Cry for Me Sudan, 2010), 2시간 가까이 되는데 참고, 꾹 참고 다 봤어요.
복음이 이겁니다. 복음은, 사람이 죽는 이유는 예수님이 먼저 죽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십자가에서?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그러면, 그러면 왜 우리가 복음을 알게 되었고, 왜 우리가 성도 되었는가? 자기 죄를, 아담의 죄를 알기 위해서 성도가 된 거예요.
온전한 율법은 우리를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버림받은 자로 보는 겁니다. 그 구약 이스라엘 틀 안에서, 구조 안에서 - 항상 야고보서는 흩어진 12 지파의 연속성이니까 – 야고보서가 이스라엘 구조 안에서 언급하는 것은 뭐냐?
“진정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란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가 뭐냐 하면, 버려진 존재예요, 버려진 존재. 인간은 처음부터 버려진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에 고아와 과부 및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도록,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그게 나오도록 조치하신 겁니다. 그게 신명기 15장 11절에 보면 나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줄 때 그 대상자가 마땅히 지옥 갈 자에게 율법을 준 거요. 마땅히 지옥 갈 자에게! 이게 이스라엘에게 준 혜택이에요. 왜냐하면 다른 이방 민족은 인간이 있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걸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있어도 없는 존재예요. 그리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고 말씀이 있고 언약이 있는 너를 건드리면 하나님께서 그게 누구든지 어떤 민족이든 저주를 내린다.”
제가 이태석 신부를 거론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은 이태석 신부가 한 것과 정반대로 하면 돼요. 다시 말해서 ‘도대체 내 죄가 내가 하고자 하는 행위 속에서 어떻게 깊이 박혀 있는가?’예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의도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발생시켰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왜? 뭐가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간에 어차피 버리운 자니까, 어차피 버림받은 자니까요. 우리 자신들 모두가 그러합니다. 나중에 온전한 율법이 될 때 예수님은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왜 버림받아야 마땅한 자냐’ 하는 그것을 야고보 입장에서 흩어진 12지파 – 성도죠 - 오직 흩어진 이스라엘만 알고 다른 사람은 일체 모르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과하는 그러한 은혜가 왔을 때나 비로소 아는 내용이에요. 내가 버림을 받은 자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이 사실을 말입니다. 손 쓸 수가 없어요. 이 버림받은 나를, 지옥 가는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행함을 하고, 어떤 경험을 해도 이 지옥 가는 것이 중지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이 이야기했죠.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로 갈 자가 없다.”
“너 그 정체성 바꿀래, 안 바꿀래? 너희가 고아와 과부가 될래, 안 될래?” 고아와 과부의 특징은 버림받은 자예요. “너희가 버림받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버림받은 자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가치가 살 게 아니냐?” 이 말이죠.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버려진 자를 활용하겠다는 거예요, 버려진 자를 활용하겠다. 고아와 과부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내놓을 게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 외에는. 그게 이스라엘 아닙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내놓을 게 없어요. 자랑거리도 없고요
이태석 신부 신부가 남수단에 갔다면 그리고 그가 복음을 안다면 버려진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건지면 안 되죠. 더욱더 어떻게 해야 해요? 더욱더 버려진 자로 만들어야지요. 문둥병자가 왔을 때 고쳐주지 말고,
“너는 문둥병 된 게 마땅해! 알았어?”
“예”
“그러면 넌 구원받은 거야.”
그동안 여러분이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오늘 본문 야고보서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복음을 행여나 반대로 알고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복음 알아서 착한 사람 돼서 바르게 살자.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면서 바르게 착한 일을 하자.’ 그게 이태석 신부잖아요. 그게 이단에 속한 사람들 특징 아닙니까?
우리는 구제도 할 수 없고요, 우리는 헌금도 못 해요. 왜냐하면 돈이 있어야 뭐라도 하지요. 동의하십니까? 왜 우리가 돈이 한 푼도 없느냐 하면, 내 돈이 한 푼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누구 돈이냐 하면, 주님 돈이에요. 주님 돈인데 왜 내가 씁니까?
예수님 관점에서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 점에 대해서 마태복음 6장 3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돈 몇 푼 낸다고 헌금이고, 돈 몇 푼 낸다고 구제 아니죠? 주께서 그걸 묻지 않습니다. “네가 구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가 십일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귀신이 하는 거야. 너는 못해. 안 돼! 왜? 너는 철저하게 제발 버려져야 하니까.”
뭘 해도 버림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드러나야 하기에 구제하라, 뭘 해라, 뭘 해라, 뭘 해라…, 어떤 말씀도 우리는 하나도 해낼 재주가 없습니다.
성령 받은 베드로가 다윗의 시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29절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즉 ‘다윗의 육신은 다윗의 무덤 속에 그대로 있다.’ 왜? 육신은 하나님의 일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그대로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적용되게 되면, ‘예수님의 시신은 이 땅에 없다’ 입니다. ‘따라서 다윗 언약, 다윗에게 준 약속, 예언, 다윗 언약은 다윗이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과, 그리고 지키지 못한 그 육신을 대신해서 예수님이 그 말씀을 자기가 가져와서 자기가 그걸 다 이루었다.’ 그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주님의 말씀의 해상도입니다. 헌금, 구제, 기도, 봉사, 선교…, 다윗 본인도 못했는데 왜 우리가 할 수 있죠? 못해요. 안 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이태석 신부는 하겠다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게 죄인 데. 버림받은 자가 백날 해봐야 버림받은 자의 티만 날 뿐이에요. 사람이 살려고 노력해 봤자 결국은 죽어서 지옥 갑니다.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상관없어요, 이것은! 말씀 들으나 안 들으나 상관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이 베드로의 이 시편 말씀, 오늘날 사도행전을 왜 우리에게 주시는가? 우리를 시신 없는 무덤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죽는데 나 말고, 죽어가는 나에 맞지 않는 다른 분의 빈 무덤을 내가 짊어지고 가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던 겁니다. 이처럼 중심이 없는, 내세울 게 없는 고아와 과부들이 오늘날의, 이 시대의 성도들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움직이는 무덤으로 살게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풀이하면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요, 내가 곧 생명이다.’ 이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그 진리에 대해서 이렇게 돼 있어요.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했어요.
신명기에 고아와 과부에 대한 율법이 굉장히 많아요.
이스라엘 백성이 버림받은 인간이니까, 일단은 버림받은 그 인간을 옴팍 어디에다가 가두었냐 하면, 율법안에 가두어 버려요. 인간을 율법에 가둬 놓고 율법 자체적으로, 그 안에서 저주에서 영생으로 나아가는 길을 예수님께서 참여해서 이루어버려요. “나는 길이고, 나는 진리고, 나는 생명”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예수님이 율법안에 집어넣고 율법안에서 조성된 그 노선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길과 진리와 영생을 받게 돼 있어요. 요한복음 1장에서 사도 요한이 이 사실을 알았고, 이걸 고백하는 대목이 요한복음 1장 17절에 나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했어요.
모세로 말미암아 율법이 주어져서 다 죽이는데, 그다음에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이 온전하게 되면 ‘은혜와 진리, 거저 주심, 값없이 주심,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렇게 되죠.
찾아가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걸 납치해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어디로 가느냐? 천국으로, 영생의 나라로 데려가는 원칙입니다. 이게 자유 가운데 관심 두는, 바로 경건이에요. 고아와 과부 같은 신세에 대해서 온전한 율법이 하는 것은 이겁니다.
“자유 줄게.” “먹을 것을 다오, 돈도 다오!” “아니, 자유를 줄게.” “나, 그 자유 같은 거 필요 없고 그냥 부자 되게 해주세요.”그거 안 줍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런 것을 이미 예언 했어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여기 과부 이야기가 나오는데 25-26절에 나와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잘 들어보세요. “…이스라엘 중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선택된 과부, 선택된 고아, 이게 오늘날 선택된 성도예요.
왜? 그들만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즐겨 감사하고 기뻐하기 때문에. 내가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자기가 누구인가를 이제 알았기 때문에. 그전에는 버림받은 것도 모르고 ‘나는 의사 돼서 봉사하고, 사제 돼서 봉사하겠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복음, 주께서 아무에게도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고, 선택된 자에게만 성령이 임하니까 ‘내가 바로 버림받은 자 중에 하나로 버림받았구나’, 그리고 ‘인간을 버린 하나님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요지부동, 달라질 게 하나도 없다’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누가 찾아가야 해요. 성령님이 친히 찾아가게 되면, 버림받았음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 그걸 안다는 감사가 있죠. 우는소리를 하면서 즐기라고 했죠. 절망을 즐기라고 했잖아요. 즐겁게 징징거리세요. 왜? 버림받았으니까. 이미 맛이 갔으니까, 버림받은 자니까, 버려졌으니까….
왜 이렇게 폐쇄적으로 하십니까? 왜 못 들어오게 합니까? 버림받은 자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버림받은 자 중에서 귀신이 떠나고 보니까, 진짜 나를 지옥 보내고 버리신 주님의 조치가 얼마나 합당하고 옳은 행위인지를 기쁨과 감격 속에서 받은 사람만이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진리로 자유케 된 사람이고, 길을 알고 영생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버림받은 고아와 과부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신랑이겠죠. 신랑이 계셨는데 빼앗겼다. 신랑이 계실 때 기쁘고, 빼앗길 때 슬픈 사람은 어떤 조건에 놓여있는 사람이냐 하면, ‘나는, 신랑 없으면 나도 없다’라는 것을 자기의 버림받은 상태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파악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있는 것은 버림받은 자로서 있는 것뿐이지, 나는 나한테 아무 짝도 소용없어요. 미래 설계하지 마세요. 미래에 희망 품지 마세요.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천국의 특징은 고아와 과부가 없다는 데 있어요. 왜? 신랑이 먼저 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옥의 특징은, 부자들만 가요. 돈 있는 부자도 가고요, 돈 없어서 돈에 환장한 부자도 가요. 그게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16장 초반에서는, 인간 세계에서 귀신 들린 인간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그 해석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게 누가복음 16장 8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런 말씀을 해요. 주인 돈을 횡령했던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아요. 누구한테? 주님한테 칭찬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자신의 본질을 알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내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가 구제를 하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가 기도를 하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가 금식을 하겠습니까? 불의한 청지기가 하는 모든 짓은 다 불의한, 나쁜 짓이에요. 나쁜 짓만 나온다는 그 사실을 불의한 청지기 본인이 알고 있다는 이것이 바로 불의한 청지기의 독보적인 지혜입니다. ‘나한테서는 나쁜 짓만 나온다.’ 50년 살았으니까 나쁜 짓만 50년 내뱉었어요. 70년 사셨습니까? 이제 거의 80줄에 들어서셨습니까? 70, 80년 동안 나쁜 짓만 했어요. 버림받아 마땅한 짓만 했습니다.
끝으로 제가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께서 이야기할 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라고 하셨는데,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신랑 없이는 계속 버림받은 자라는 것을 명시할 때 예수님께 그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여러 명 되는데 한 사람은 사도바울이고, 한 사람은 요한이고, 또 한 사람은 야고보, 또 베드로도 있어요.
그중에서 사도바울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제가 아까 로마서 8장 7절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는 사도바울이 어떻게 이해했는가? 갈라디아서를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여러분이 이 말씀을 좀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세계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너, 끝났어.” 이 뜻이에요. “너, 끝났어!” 그 뜻이에요! 하세요, 뭘 하세요! 헌금이든 구제든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세요. 그걸 죄를 드러내는 계기로서 하세요. 내가 버림받았다는 티를 팍팍 내시면서 하세요.
갈라디아서 2장과 3장에, 특히 2장 같은 데 보면, 사도바울이 아주 작심하고, 작심하고 외칩니다. 2장 18절,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그리고 21절 끝에,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주께서 죽었다는 것이 뭐냐는 거예요. 신랑이 왜 죽어요? 귀신 들려서, 자기가 무슨 의미 있는 줄로 아는 자를 충분하게 제대로 버리는 거예요. 제대로 버림받는 겁니다. 그렇게 제대로 버려놓고, 버림받은 자를 이제 친히 예수님 자신의 공과, 성과를 위해서 활용해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찾아오신 거예요.
“네가 고아와 과부다. 내가 너를 돌봤다.” 이 관계, ‘예수 안에서 주님은 나를 고아와 과부로 돌보시고, 나는 주님 때문에 아무 내세울 것도 행함도 없이 하늘나라의 기업을 얻었다…’ 신명기 말씀처럼 ‘…기업을 얻었다’라는 이 관계, 관계입니다, 존재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이 관계를 증거하시면서, 찡찡거리면서, 즐겁고 기쁘게, 감격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태 파악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눈 뜨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귀신이 나가면서 비로소 ‘내가 버림받은 자요, 죄인 되었다’라는 사실을 아는 감격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저희들을 활용하기 위해서 찾아오신 이 은혜를, 어떤 식으로도 어떤 행함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또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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