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와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해요. 모든 성경을 예수님이 가져가서 예수님이 해석하는 것과, 성경 말씀을 보면서 내가 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의 그 차이를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그 차이를!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준 이유는 이거에요. “네가 천국 갈 때 이런 걸 준비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제는 아담이 쌍둥이가 아니라 새로운 아담인 예수님이 쌍둥이가 되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바로 야곱과 에서의 관계입니다.
롯은 천사인 줄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천사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자, 우리 일상을 한 번 돌아봅시다. 참, 이것은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여러분 참을성 있게 한 번 들어보세요. ‘있다’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것에 대해서 ‘내가 있다’를 해석하는 게 있어요. 뭘 보고 아느냐? 거울 보고 움직이잖아요. 저게 누구예요? 내가 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여기 있잖아요. 거울에 움직이는 거 보니까 분명히 있잖아요. 그러면 이게 거짓이 아니고 참된 현상이라고 간주하죠.
그다음에 두 번째, 그냥 있는 것 정도가 아니고 살아있어요. ‘있다’도 내가 해석하고,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도 누가 해석하느냐? 내가 살아있어요. 그 해석도 내가 내려요. 나이 많아서 몸이 아프다 죽어요. 우리 주변에 죽는 사람 많잖아요. 죽는 사람 봤으니까 ‘아, 저것은 죽은 것이다’라고 누가 해석하느냐? 내가 해석을 해버려요.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마귀의 생각이고 그게 거짓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도(道)를 밀어버리고 생계형 인간으로 사는 인간에게는 그게 누구에게도 파악이 안 돼요. 그러니까 도(道)를 아는 사람은, 주님의 재해석이 있는 사람은 대구에 살든, 울산에 살든, 서울에 살든 이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있다’에 대한 주님의 해석은 어떻게 되느냐? 주님이 있는 게 ‘있다’에요. 제가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미안해서 웃는데요, 왜 그러냐? 인간의 해석에서는 ‘없다’가 해석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없을 때에 대해서 자기가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태어났기 때문에 ‘있다’에서 시작이 되잖아요.
그 ‘없다’를 인간은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생각은 ‘여기 있다’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과학이든 철학이든 뭐든, 경제학이든 그리고 이란과 미국의 전쟁이든, 이스라엘의 전쟁이든 그 모든 시작이 ‘있다’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벌써 마귀의 생각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거예요. 모든 내 생각은 다 마귀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왜?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옳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있다가 늙어 죽으면 되지.’ 죽는 것도 ‘내가 있음’에서 나온 잘못된 해석이 죽음인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님이 어떻게 해석하느냐? ‘있다’는 ‘없다’에서 출발해야 그게 제대로 된 해석이라는 거예요. 이걸 이해하시겠어요?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거짓말 좀 하지 마. 너는 지금 ‘있다’는 말을 하면 안 돼. 어디서 마귀 주장을 나한테 하고 있어?”
“여기 있는데요. 지금 몇 번지에 살고 있어요. 주민 등록 깔까요? 저 여기 있습니다.”
“없어. 넌 없는 거야.”
“주님, 제가 늙어 죽습니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넌 산 적이 없어. 살아본 적이 없어.”
주님이 살아있는 게 ‘살아 있다’의 주님 재해석이에요.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살아 있다’에 해당이 안 됩니다.
자꾸 해석을 내가 하기 때문에 암 걸렸다고 무서워하고 두려워 떠는 거예요. 내 본래 존재의 의미는 ‘예수님이 누군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는가,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는가?’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없는 데서 태어났는데 마귀가 그걸 뭐로 싹 바꿨냐 하면, 생계형 인간형으로 다 바꿔 놓은 거예요, 생계형 인간형으로!
‘나만 행복하면 되고 나만 자식 잘 키우고 살면 되지.’ 모든 생각하는 것이 거기에 집중돼 있어요. 교회도 그냥 나와주는 것이고요. 안 나와도 되는데 너무 인간성이 좋아서 나와주는 거예요. 죽음의 주체가 나한테 있는 게 아니고 따로 있다는 걸 아는 것, 바로 우리의 부활의 주체도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십자가, 곧 제대로 재해석된 죽음 안에 들어갈 때만 비로소 부활이 주어지지, 그 외에는 영생의 부활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외에는 지옥에 관한 부활만 있을 뿐이에요.
‘우리가 죄인입니다.’ 그걸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 너의 죄를 이 예수님이 어떻게 활용하는가?’를 네가 발산하라는 것, 그걸 고백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빛으로서 ‘나는 너하고 똑같이 생계형 인간이었는데 예수님 찾아오셔서 이제는 내 안에 예수님이 있다. 내 안에 중보자가 계시다’라는 이 중보자 스토리, 중보자 이야기를 펼치면 되잖아요.
십자가에서 그 도가 새롭게 우리를 다시 해석하게 되면,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하는 해석으로서 ‘내가 훌륭하다’가 아니라, ‘잘났다’가 아니라, ‘내 해석은 이렇고 주님의 십자가 해석은 이렇다’라는 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이미 구원받은 성도의 해야 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나 편한 대로 살았는지 내 것만 멀쩡하고 내 것만 안정되면 만사 오케이라 여기는 이 안일한 생각,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서는 죽을까 싶어서 벌벌 떠는 마귀의 앞잡이. 주여, 이런 내 모습을 재삼 밝혀주고 들추어주는 성령의 역사를 또 한 번 범사에 감사하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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