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옛것과 새것

아빠와 함께 2025. 10. 15. 09:16

20251013a 부산강의 : [시편]80(64:1)-옛것과 새것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64편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1절) 이렇게 돼 있지요. 성경 전체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내용인데요. 그 일하시는 내용의 결과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건져내는 내용이겠지요. 우리가 구원받고자하는 그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거는 거부하시고 하나님이 자기가 구원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은 안 받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구원하고 싶어서 천국에 데려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싶은 자들이 있어요. 간단히 이야기하면 이거죠. 우리 일, 인간의 일이죠. 인간의 일은 거부입니다. 거부당함, 하나님이 거부합니다. 거부하시면서 하나님 쪽에서 구원이란 것을 실시해요. 인간 쪽의 구원은 거부당하고.

이게 무슨 일이냐 하면, 주의 일입니다. 주의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자를 뽑는 게 주의 일이고, 우리의 일은 내가 천국 가는 게 우리의 일이에요. 이 두 개를 구분하면서 여기서 등장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 칸막이 속에서.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였다는 사실을, 적어볼게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원수 된 자에 대해서 여기에 누가 포함이 돼 있느냐 하면 사울이란 사람이 포함돼 있지요. 구약 말고 신약의 사울. 나중에 사울이 뭐로 바뀝니까? 바울로 바뀌어요. 바울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 된 자에 이미 포함이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믿는 자를 핍박했기 때문에, 아주 공개적으로 노골적으로 대놓고 자랑스러워하면서 핍박을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핍박했던 이 사울의 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우리 인간의 일이 거부당하고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는 구원이라 하는 이 두 가지 경우가 사울이 구원받는 그 경로를 통해서 둘 다 나타나요. 그러면 사울이 구원받는 게 표준이 되겠지요. 구원은 어디서부터 해서 어디로 가는 것이 표준이 되겠지요. 그러면 사울에서의 출발점은 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 하는 것이 그게 은밀한 게 아니고 노골적이다. 대놓고 핍박했기 때문에.

그러면 여러분 아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을 때 드디어 사울은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는 백성의 경로, 코스로 사울이 들어옵니다. 왜냐?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찾아갔으니까. 찾아가서 만약에 여러분이 주님이라면 자기를 핍박하는 그를 천국 백성 만들기 위해서 어떤 멘트를 던지겠는가? 어떤 단어를 던지겠는가? ‘예수 믿으세요’ 이런 멘트를 던지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세요’ 이런 멘트를 던지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런 것 하겠습니까?

방금 제가 객관식처럼 문항을 했잖아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으십니까?’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인 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전부 다 안 했지요. 그런 이야기하지 않았지요. 뭐라고 했느냐면 이건 빨간 글씨로 하겠어요.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핍박’이란 단어를 사용했어요. “너는 왜 나를 못 살게 괴롭히느냐?”

오늘 시편 64편 1절에,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느낌이 뭡니까? 불편하지요. 다윗이 굉장히 불편해요. 다윗을 불편하게 한 자가 이미 개념상 규정돼 있습니다.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원수’에요. 원수라는 말, 원수가 지금 다윗을 불편하게 만들고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편 64편 1절에 나오는 그러한 정황, 그러한 상황, 그리고 사울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정황에서 똑같은 멘트가 나왔다고 할 수 있지요. 똑같은 단어, 사도행전 9장 4절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돼 있지요. 지금 핍박이란 것을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질 때 개시할 때 나오는 멘트지요.

개시한다 할 때 보통 휴대폰가게 개시할 때, 식당 개시할 때 내레이션 모델 등장해서 춤추고 풍선은 지마음대로 흔들고, 그것 생각하시면 돼요. 개업했다 이 말 아닙니까. 지나가는 사람에게 선물 하나씩 주고. 여기 정육점 개업했으니까 우리 고기 사먹으라고, 직영으로 중간 마진 다 빼고 싸게 판다고, 이렇게 개시할 때 주님이 자기 백성을 개시할 때 날리는 멘트, 멘트가 뭐라고요?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니까 교회 오십 년, 육십 년 다니고 사 대째 신앙이라고 해도 무슨 멘트가 내 인생에 끼어들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지금 교회 노닥거리고 온 거예요. 취미생활하고 있었던 거예요. 본인이 상상한 예수, 본인이 상상한 하나님하고 장난쳤던 겁니다. 전혀 주님이 찾아온 적이 없었던 사람이에요.

열심히 신학 공부하고 열심히 복음 연구하고 성경공부 참석해도 무슨 요소가 빠지면 안 돼요? 핍박. 개시할 때 날린 멘트가 핍박이고, 시편 64편 첫 번째가 핍박하는 거예요. 다윗 안에는 누가 들어 있느냐? 다윗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어요. 다윗이 불편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영이 불편하다는 말입니다. 괴로움을 당하는 거예요.

그러니 핍박이란 말을 하니까 여기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다 나자빠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핍박한 적이 없고 그런 기억조차 없습니다. 그저 자기 목숨 하나 바쳐서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그런 일념과 열정밖에 없어요. 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 누굽니까? 사울이잖아요, 사울.

사울을 주께서 구원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의 개시점으로 사용한다는 말은, 인간들이 그냥 놀지 않고 열심을 다하여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과 관계 맺기를 쉬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 거예요. 열심을 다하여.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 의를 포기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오직 자기 의에 열심 내는 자들이었지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

율법을 줘봐야 소용없어요. 우리가 지금 시편 64편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시편 제1편 기억나지요. ‘복 있는 자는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지요. 딱 보면 우리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지 않습니까? 인간 속에는 성선설, 인간 속에는 분명히 우리의 잘못이 있고 우리 인간은 한계가 있고 문제점이 있지만, 있지만 영어로 but, 있지만 우리에게는 근원적으로 신이 주신 선한 그러한 자질과 성품이 남아있다고 보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선한 성품 타고났다 이 말입니다.

그것 누가 이야기한 거죠? 성선설 주장은 맹자가 이야기한 것이고, 자기도 모르면서 반대한다고 성악설 주장한 사람이 있어요, 중국에. 이름이 뭐냐? 아주 순해요. 순자입니다. 순한 순자는 성악설 이야기하고, 맹자는 자기 엄마가 교육시킨다고 세 번씩이나 강남으로 이사 갔다는(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맹자는 성선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인간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적어볼게요. 인간의 결핍, 다른 말로 하면 상실, 상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윤복희의 <여러분>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빰빰빠 한 템포 쉬고, 여러분. 그래서 대상 받았잖아요. 누가 나를 위로해줘요? 남이 나를 위로해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작년 12월인가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실험을 했어요. 목회자를 안 보여주고 설교를 틀어줬어요. 설교를 몇 개월 동안 틀어주니까 교인들이 설교 너무 좋다고 은혜 받았어요. 그리고 짠짠짜 하고 커튼을 여니까 AI가 나왔다는. 그걸 보고 충격을 받은 어느 소년이 물었어요. AI는 형태만 있고 목소리만 나오는데, “AI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니까 AI가 하는 말이,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라고 했어요.

그걸 여러분들의 상당히 충격적으로 이상하게 여기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 이야기는 충격적인 게 아니고 이미 현대철학에서 나왔던 겁니다. 뭐냐 하면 인간 속에는 언어가 있고, 인간은 보통 말을 한다 하잖아요. 현대철학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말이 자기의 주장을 펼친다, 이 말입니다. 주체가 말이 돼요. 그 언어는 어디서 나오는가? 기존의 기성세대에서 통용되는 의미들이었어요. 인간은 나면서부터 기존에 통용되는 의미들을 주워 담는 겁니다. 열심히 주워 담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던 안 믿던 간에 사 대째 기독교 가정은 수시로 멘트 속에 기독교 단어가 자꾸 섞이게 마련입니다. 살아온 환경이 그렇기 때문에. 그걸 믿는다고 할 순 없어요. 그걸 누가 했느냐?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 이후에 이미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가고 또 바벨론보다 더 많은 숫자는 이집트로 갔고, 이집트 말고 퍼졌지요. 디아스포라.

퍼져서 그들은 나름대로 그들끼리 유대민족이란 이름으로 공동체생활을 한 겁니다. 언젠가는 이스라엘로 돌아간다. 그러면서 율법공부를 그들은 게을리 하지 않았지요. 그 율법을 누가 가르칩니까? 가정에서 부모가 가르쳤지요. 이거는 사 대째, 아니 십 대째 유대교 집안이에요. 지금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 국민들 대다수가 지마음대로 살지만 막상 쑤셔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래 나옵니다. 사실은 안 믿지만. 배운 교육이 그런 거예요. 그걸 AI로 대체, 구체화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 소녀가 AI보고 놀랄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보고 놀래야 돼요. ‘똑같네, 흉내 내고 있네.’ 본인도 기성세대, 부모가 가르쳤던 그 기독교 의미를 그냥 지적으로 수용한 거예요.

그럼 어쩌나? 앞으로 AI를 인간 로봇에 탑재를 해버려요. AI가 탑재된 인공로봇은 교회 뒤 자석에 앉을 수가 있어요. 눈물 막 흘리면서, ‘다 내 탓이요’ 이럴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숫자가 늘어나면 앞에 인간 한 세 명, 뒤에는 AI 교인, 로봇 250명 앉을 수가 있어요. 그 로봇 교회나 지금 교회나 다를 게 뭐가 있어요? 똑같은 기성 의미로 지식으로 받아들여서 그냥 예배라는 쇼를 벌이는 하나의 관람객으로 있는데 차이점이 뭡니까?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래 하면, ‘앞으로 우짜노’ 이러거든요. 우짜기도 뭘 우째요? 단어 하나 집어넣으면 되지요. 뭡니까? 두자 ‘핍박’이죠. 인간은 남을 핍박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왜? 자기는 선하기 때문에. 자기 가치가 아주 뭉개지는 것을 인간은 아주 싫어합니다. 심지어 전과 10범이라도 자기 가치가 그냥 무너지는 것은 아주 목숨을 다하여 그걸 저지합니다. 반항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정리해봅시다. 원수란 하나님을 또 타인을 핍박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핍박이 없으면 어린양의 의미가 무가치해져요. 그러니까 어린양의 희생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나는 언제 어디서나 착하진 않지만 착하게 살려고 애를 쓰고, 바르진 않지만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쓸 뿐이지요.

바르게 살려고 애는 쓰는데 남이 와서 혹시 묻잖아요. ‘바르게 살아야 되는데 너 왜 똑바로 못 살아’ 하면, ‘밥 먹고 살다보니 그렇다’는 거예요. 핑계 댈 것이 항상 자투리로 연결돼 있어요. ‘세상 살다보니 그렇지 나도 소싯적에 얼마나 착했는데.’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윤시내, 1974)란 노래 가사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나는 화장도 할 줄 몰라요” <별들의 고향>(이장호 감독) 주제곡이거든요. 제목이 열아홉 살이거든요. 이장희 작곡.

나는 화장도 할 줄 몰라요, 얼마나 순박합니까? 본인은 다 순박해요. 핍박이란 단어는 전혀 나랑 상관없다고 여기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가 원하는 백성을 천국에 넣기 위해서 주께서 나오는 작업은 뭐냐? ‘나는 핍박을 모릅니다’ 하는 자에게 핍박을 유도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면 되겠지요. 거기에 끼어들게 된 거기에 참여하게 된 택한 인물이 누굽니까? 오늘 본문의 다윗이죠. 죽어났어, 죽어났어.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그 다윗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있지요.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데 개시점은 뭐냐? ‘너, 나 핍박하고 있다.’ 그 상황부터 출발합니다. ‘제가 언제 핍박했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나오지요. 그때부터 핍박한 이유를 소개하면서 사울은 뭐로 바뀝니까? 사울은 바울로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사울은 옛날,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자기 의에 충만한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그 모습이죠.

사울의 모습은 인간 속에 내재돼 있는 신성, 신의 성품이죠. 인간 속에 내재돼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그 신성을 인간들은 그걸 장려하고 키워내요. 그걸 뽑아내고 그걸 장려하고 그것을 발달시킵니다. 인간 내부에는 신성이 있다. 신의 성품이 있다, 이것을 발달시키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믿을만한 내용이 된다. 따라서 나는 그걸 믿습니다가 돼요. 교회에서는 이걸 믿음이라고 통용시켜버려요.

중간에 뭐가 빠졌습니까? 나는 계속해서 핍박할 수밖에 없다는 핍박 요소가 빠져있는 상태, 내용이 없는 그걸 인간은 믿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의 잘남과 내 잘남이 같이 섞일 수 있는 내용을 인간은 덥석 무는 겁니다. ‘주여, 믿습니다.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믿습니다.’ 자, 간절한 기도가 믿기 좋습니까, 아니면 나는 주님을 핍박했습니다가 믿기 좋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간절한 기도지요.

‘교회 참석하려고 애는 쓰는데 내가 바쁘다보니까 못 옵니다. 참석 못했습니다.’ 그걸 한 마디로 말하면, 나는 나의 간절함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는데 생활에 쫓기다보니까 참석 못합니다.’ 이게 뭔 뜻이에요? 나의 고유의 가치와 그 선한 자질에 대해서 나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기 고집이죠. 이 내용을 구체화해보겠습니다.

인간 속에는 신성이 있다. 착한 게 있다. 이 착한 것은 하나님께서 착하기 때문에 착한 성품이 나한테 주어졌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전봇대 있잖아요. 전봇대는 전선으로 연결돼 있지요. 어떤 사람이 이 동네에 태어나서 0살부터 한 살, 나중에 구십까지 살면서 이 전선만 바라보고 삽니까? 우리 동네엔 높은 전봇대가 있고 전선이 있다. 그것만 쳐다보고 삽니까? 아니지요.

그 사람이 학교도 가야 되고 직장도 가게 되고 결혼도 하지요. 이건 뭡니까? 전선은 전선대로 남겨놓고 전선 밑에 세상일에 종사하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전선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 나와 하나님 관계는 아무 이상이 없고 근데 여기에 충성을 해야 되는데 살다보니 바쁘다. 아무리 바쁘지만 가끔은 이 전선이 있으니까 나의 신앙전선 이상 없음, 이래 되는 거예요. 나의 구원받음은 지장 없음, 이래 된다 이 말이죠.

맨날 이것만 쳐다보고 사는 것 아니잖아요. 그것 하려면 목사하지. 목사도 이것 안 쳐다봐요. 목사는 주일만 하고 딴 데 쳐다보잖아요. 안 쳐다본다고. 설교 준비한다고 바쁘고 그다음 끝나면 어휴. 이걸 왜 든든히 인정하느냐 하면 믿을만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럼 이 믿음 출발은 뭡니까? 핍박에서 나온 게 아니고 나는 뭐하다? 나는 선한 구석이 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니까,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여차하면 이런 걸 끄집어내면 되잖아요.

평소에 이 땅에 살면서 되게 바쁘긴 바쁘겠지만 언제 죽을 때 되면 그때는 하나님께 바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를 여기다가 집어넣읍시다. 이미 본인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는 정상적이라 보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 살면서 마음에 고통이 오고 어려움이 올 때는 누가 위로해준다 합니까? 여러분, 사람이죠. 다시 써볼까요? 나의 상실은 사람들의 위로죠.

그래서 미국의 어떤 교회가 실험을 해봤어요. 설교를 잘하는 AI를 6개월 동안 틀어줬어요. 그리고 약간 어설픈 목사, 맨날 본문 틀리는 목사가 6개월 동안 해서 어느 것이 여러분에게 감동되고 은혜가 되었습니까, 하니까 그때는 인간이에요. 왜 인간이냐? 인간은 그 목사는 직접 피부를 맞닿으면서 위로를 해주거든요. AI는 정확하고 정답을 이야기하지만 어설픈 인간 목사는 그래도 찾아가고 위로해주니까 역시 인간이 채울 수 있는 것은 같은 인간밖에 없다. 이게 그 실험이 내린 결론입니다.

이 주장에 대한 반대 본문이 뭐냐? 고린도전서 2장 4절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 10절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면 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문제를 먼저 던져요. 같이 동참시키기 위해서 내가 사람들을 좋게 하겠어요, 하나님을 좋게 하겠어요? 이런 문제를 던진다는 말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뭐가 빠져있단 말입니까? ‘사람을 위로하고 좋게 하는 내용은 일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걸 기정사실화해서 그걸 받아들이세요, 하고 먼저 운을 뗀 거예요.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전선 부분의 하나님이 지금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전선 부분에 걸쳐있는 게 아니고 이게 어디 내려왔다?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이 세상 속에 주님이 찾아왔다는 거예요. 전선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인간이 상상해서 내 선함을 인정하는 그 세계는 뭐냐? 이건 망상입니다. 종교란 이름의 망상이에요.

현실 속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가를 파악하는 그것이 주의 뜻이에요. 원래 우리는 핍박할 수밖에 없는 요소를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주께서 개시하겠다는 멘트, ‘너는 나를 핍박한다’ 할 때 그 핍박의 뭘 찾으면 돼요? 원인을 찾으면 되겠지요. 그 원인자가 누굽니까? 나, 여러분 다 포함되잖아요. 그러니까 내 존재가 나의 구원을 방해하는 거예요. 이 점은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윗도 역시 구약사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아니거든요. 구약에 속한 선지자에 속하기 때문에 다윗이 지금 불평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께.

인간세계 상식에서 구원이란 뭐냐? 인간세계에서 구원은 내 존재가 천국 가는 게 구원이에요. 왜? 자기의 선한 것은 선한 티를 내고 그 선한 것을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내가 지지리도 못난 존재로 태어나서 평생 고생해도 내 마음 하나는 하나님께서 알아주겠지. 이거는 교회 다니나 성당이나 절에 다니나 관계없어요. 모든 인간은 똑같은 생각입니다.

나름대로 짐승이 아니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분투노력했는지 최선을 다해 살았다, 이러한 평가가 무시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느끼는 거예요, 인간들은. 내 존재가 천국 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되어 천국 가면 무슨 존재가 부각돼요? 내 존재가 부각되는 겁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갈 위인은 존재가 아니고 구원하기 위한 소품이 필요한 거예요. 이 소품은 어디까지나 주체가 아니에요. 그냥 소품이에요.

천국에서 오신 분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완성된 분이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그러면 천국의 구원은 누구냐 하면 구원받을 이름은 딱 한 분의 이름밖에 없어요. 한 분밖에 없다는 그 말 하면 좀 이상하지만 ‘한 분의 이름’하니까 확 오지요. 한 분의 이름밖에 없어요. 자기 존재 이름 포기하고 주의 이름, 주의 존재에 합류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 합류되는 걸 ‘세례’라고 해요.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세례. 너는 나와 함께 죽고 내가 살 때 내가 산다는 그 주체 안에서 네가 보조적으로 살지 아니하면 소품으로 살지 아니하면 너에게 구원이 없다. 이 긴 말을 한 마디로 말하면 ‘구원은 없다’가 되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은 없습니다. 왜냐? 우리의 구원은 내 존재와 연관 지어서 구원을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이름도 진자교회도 좋은 이름이지만 교회 이름을 ‘구원은 없다’교회로. 아무리 생각해도 좀 멋있는 것 같아. 밑의 절은 문 닫았다 했지요? 문 닫았는지 모르겠지만 절 이름을 ‘◯◯선원’ 그렇게 하지 말고 ‘저주법당’ 이런 것.

구원이 없는데 내 존재는 구원을 하고자 억지를 부리니까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핍박이 일어나는 거죠.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을 왜 핍박했는가? 사울이 예수님을 그냥 핍박했을까요? 예수 믿는 자를 보니까 사울 존재의 구원을 우습게보고 나는 분명히 여호와 믿기 때문에 열심히 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데 내 구원은 구원 같지도 않는 시답지 않는 걸로 구원 못 받는 걸로 간주할 때 우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거죠.

그 분노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쏟아질 때 예수님은 찾아와서 네가 나를 핍박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존재 중에는 반드시 핍박 요소가 나온다, 방출되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러면 예수 믿고 난 뒤에 핍박 요소가 나옵니까? 당연히 나오지요. 어떻게 나옵니까? 본격적으로 나오지요. 그걸 구원의 수준이라.

구원의 수준을 제가 여러 항목으로 이야기할 테니까 여러분이 돌려서 찍든지 한 번 찍어보세요. 구원이 뭔지를. ①아픈 육신으로부터의 구원, ②살던 거주지로부터의 구원, ③국가로부터의 구원, ④자기로부터의 구원. 구원의 수준이 다 달라요. 구원의 수준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구원의 수준을 ①에서부터 ④번으로 이동시키면서 주께서는 복음이 방출되게 하는 겁니다.

첫 번째, 아픈 육신으로부터의 구원. 사람이 나이 들게 되면 어린아이가 된다 했지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지 몸에 대해서 민감하다는 거예요. 조금만 아프면 그다음부터 모든 관심사는 쇼핑 채널 돌려가면서 그다음에 뭘 먹어야 관절에 좋냐, 안 그러면 골다공증에 어떻게, 고혈압에 좋냐“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아픈 육신으로부터 건강한 육신으로의 탈피죠.

제가 십 대 때 과거 생각을 가끔 해보게 되면 인생의 완성형이 오십 대의 아주머니들처럼 그려졌었어요. 그때는 교회도 안 다녔고 그래 봤어요. 생각도 우아하고 옷차림도 우아하고 말씨도 우아하고 그리고 흔들림이 없는 이 세상에서 굉장히 안정된 모습을 보여줘요. 자신만만하게 보였는데. 문제는 오십 대잖아요. 육십 대 넘어가면 할머니가 되잖아요. 아 보기 싫어요. 오십 대가 한계였습니다.

그럼 할머니가 되면 어디가 탈이 나느냐 하면 육신이 탈이 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본인이 할머니면서도 어디로 귀환하고 싶냐 하면 인생의 완성형을 보여줬던 정신적으로도 되고 육신으로도 다 되는 그 오십 대를 다시 그것을 유지하거나 되돌아가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하는 겁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약값으로 다 집어넣어요. 전에는 오십 대에 운동하면 부끄럽다 하는데 이제는 노골적으로 레깅스 입고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고. 지금 체면 문제가 아니고 빨리 오십 대 육신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전봇대 있잖아요. 전봇대 하나 선한 것 있으니까 착한 나를 천당 가겠지, 이건 확립돼 있고 전봇대 밑에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원하는 것은 뭐냐? 내 아픈 육신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거예요. 수준이. 몸만 편하게 해준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다 해드리겠습니다. 이 구원의 중심에 뭐가 있느냐? 성경에선 마음이라 돼 있어요. 마음, 또는 마음의 소망, 마음의 소원이라 돼 있어요.

누가 로마서 10장 9절을 읽어보세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마음이 나오지요. 입은 시인하면 돼요. 근데 중요한 것은 그 입과 마음은 진심에서 나와야 되잖아요. 마음은 뭐냐? 예수를 죽은 데서 살리는 것을 네 마음이 믿으면 그다음에 뭡니까? 네가 뭘 얻으리라?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지금 공략하는 것이, 육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뭡니까? 마음이 중요하죠. 그런데 이 마음이 어디 빼앗겼습니까? 몸이 아픈데 빨리 건강해진다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겠다고 돼 있지요. 이 육신 때문에 마음이 온전하게 예수님한테 주께 몰빵 되는 게 아니고 아픈 육신이 내 마음을 훔쳐가고 분탕질하고 있는 거예요. 점령하고 접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잠언에 보면 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용사가 성을 빼앗는 것보다 더 어렵다 했어요.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이 마음이 뭐로 바뀌느냐? ②번으로 바뀝니다. 앞에 뭐 빠졌어요. ‘현재’ 살던 거주지에서 내가 벗어나기를 구원하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어린아이가 좀 크면 청소년 되면 자기 집구석에서 가출하고 싶은 거예요. 아빠, 엄마 맨날 싸우고 돈 있으면 서울로 가고 싶어요. 부산 말고 서울로, 대구 말고 서울로, 광주 말고 서울로. 거주지를 옮기면 뭔가 새로운 내 인생이 펼쳐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거주지가 희망이 없기 때문에. 밥도 거의 못 먹고 사는데, 옛날 1960년대 이야기입니다. 서울에 먼저 간 친구들한테 공중전화로 전화해보니까 ‘서울 가서 네가 일만 하면 월급 준데’ 그 이야기가 ‘나는 밥 먹고 살 수 있다’ 그래서 서울역에 내리면 벌써 봉고차들이……. 살던 거주지에서 바뀌는 것, 이걸 삶의 환경의 환기, 환경을 바꾸는 것. 그러면 이 안에 뭐가 포함돼 있습니까? 삶의 거주지에서 포함되는 것은 가출도 있지만 이혼, 이런 것도 포함되겠지요.

내 삶의 환경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는 쇄신, 바꿔보자. 남자를 바꾸든지 여자를 바꾸든지. 바꿔서 지긋지긋하고 평생토록 갇혀있는 나를 더 좋은 나로 남은 인생을 내 뜻대로 한 번 인간사는 것처럼 살아보자. 이걸 사람들은 뭐라 합니까? 구원이라고 여기고 그게 어디에 포함되지요? 마음에 그게 장착이 돼요.

벌써 구원의 수준이, ①번이 뭡니까? 몸 하나 멀쩡하다 이 말이죠. 지금 몸 멀쩡하지 않으면 가출이 안 된다니까요. 누가 옆에서 나를 시중들어줬으면 좋겠다, 이럴 경우에도 ②번이 안 돼요. 지금 ①번이 되니까 ②번 들어가는 거예요. 난 이제 혼자 살고 싶다. 미치겠다, 정말. 졸혼을 하든지 날 좀 놔둬. 하루 세끼, 양심도 없지 해도 너무 하다.

남편도 돈 다 벌어주니까 지 행복을 위해서 다 전환시켜놓고 돈 못 버니까 이제 와서 날 내치냐, 이래 되겠지요. 난리도 아니죠, 하여튼. 어쨌든 간에 누가 옳은지, 그른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마음속에 뭐가 들어있어요?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구원이 내 마음속에 꽉 차있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현재 이십 대, 삼십 대 초반, 국가로부터 탈출이에요. 한국이 답답하다는 거예요. 배낭 매고 서유럽에 가든지 북유럽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동화 속의 건물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면 집에서 뭐라 합니까? “나이 이십 대에 돈 좀 벌어놓고 빨리 결혼해서 애 낳을 생각이나 해야지 언제 할 거냐?” “안 해.” 배낭 매고 유럽여행 다녀요. 일본에선 이미 유행한 거예요.

이거 뭡니까? 기존의 모든 국가, 사회, 가정 모든 간섭으로부터 만세, 해방되는 겁니다. 그동안 돈 대주고 키워줬다는 부모의 권세는 그만하시고 이제 내 인생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습니다. 법도 몰라요. 난 돈 벌려 캄보디아 갈 거야. 캄보디아 가서 내가 얼마나 자립심이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보여주는데 보이스피싱으로 보여주는.

젊은 사람 마음 생각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①번 되고 ②번 받쳐주니까 실패하면 집으로 가면 되니까. ②번 되니까 그다음 나오는 건 뭡니까? ③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것을 주위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자기는 구원을 원하는 거예요. 유명한 바로 방탄소년단이라든지 연예인 해서 춤 하나만 잘 춰도 호강시켜준다는 그 마음이 이 마음속에 꽉 들어있어요.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기는 시인하죠. 사 대째 기독교 가정이니까. 하지만 마음을 뭡니까? 자기 구원으로 가득 찬 거예요.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전체 이야기는 뭡니까?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상황을 제가 설명하는 겁니다. 핍박이 어떻게 성립하느냐? 자기한테 미쳐서 핍박이 되는 거죠.

세 번째까지는 인간이 가능해요. 이것 때문에 인간이 열심히 공부하고 스펙 쌓고 노력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내 가치와 의미가 어디까지 내가 만개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자기가 자기한테 테스트하고 싶은 것, 이게 모든 인간이 가는 길이거든요.

근데 네 번째는 뭡니까? 이거는 자기로부터의 구원이거든요. ①번, ②번, ③번 이 전체가 어떤 경우여야 구원되느냐?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핍박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경우에만 자기로부터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④ 말고 ④′ ④와 같진 않은데 유사한 게 뭐냐 하면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언질과 주님의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로부터 구원하는 이것이 뭐냐 하면 허무에요, 허무. 허무로 빠진다고요. 허무로 빠져서 종교의 교주가 되든지 어디 성당이나 절에 가든지 교회 가든지 허무에 빠진 거예요.

‘인생 살아보니 아무것도 아니더라.’ 그게 무슨 자기로부터의 구원이에요? 뭐가 빠졌어요? 이 빠진 것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누구에 대해서 핍박했다는 요소가 허무에선 없어요. 이건 도가고 불교입니다. 철학입니다. 내가 깨달아보니, 맨날 깨달아보니. 그래서 이들이 어디 가느냐? 자연인. 자연인도 밑천 많이 들어요. 돈 많이 든다고요. 자연인해서 말아먹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자기로부터 구원되기 위해서 자연인 됐는데 그것도 돈 많이 든다니까요.

어디로 가느냐? ②번으로 가지요. ②번 가면 발로 차는데요. 그럼 서울 탑골공원에 앉아 장기나 두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①번도 어렵고. 돈이 있어야 뭘 먹든지 하지. 개소주라도, 흑염소라도 먹지. ④′에서 마감되고, ④번은 인간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게 뭐냐? 이것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이 마음속에 뭐냐? 마음속에 말씀이 들어와야 돼요. 말씀이 들어와서 말씀이 ①번, ②번, ③번, ④′를 아주 혼을 내고 그걸 완전히 박살내버리죠. 너 지금 누구 걱정하고 있느냐? 지금 네 걱정한다고 평생을 다 보내고. 그야말로 쓰레기 같은 인간아, 이렇게 되지요. 그 쓰레기는 10분 쉬고 계속 이야기하겠습니다.

 

 

 

20251013b 부산강의 : [시편]80(64:1)-옛것과 새것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자아로부터, 자기로부터의 구원이 되려면 ①번, ②번, ③번이 다 헛수고라는 것을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자아로부터 구원을 해야 되는데 모델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너 저렇게 될래’라는 모델이 있어야 되는데 모델이 있으면 이미 자아가 형성돼버렸어요. 이게 불교의 한계입니다. 부처를 본받는데 부처를 본받기 위해서 부처도 있어야 되고 나도 있어야 되고. 자기 무아, 자기를 비울 수가 없어요. 되고 싶은, 자기가 돼야 될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그거는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자아로부터의 구원이 안 되는 이유가,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가 허상에 갇혀있기 때문에, 허상에서 백날 구원해봐야 허상으로 가는 거예요. 이 문장을 생각해보세요. ‘소돔에서 벗어나서 고모라로 가는 것’ 이게 뭐예요? 똑같지요. 거주지 이동해봐야 소용없고, 자아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모델을 찾는다는 것은, 예를 들면 ‘나는 멀쩡한데 저 사람은 이상해’ 우리가 평소에 그런 생각이 들잖아요. 근데 특정 인간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왜냐하면 다 이상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특정 인간은 이상해? 아니에요. 모두 다 정상이 아닙니다. 소돔에서 고모라, 또는 고모라에서 소돔, 그 동네가 그 동네 전부 다 똑같은 겁니다.

이렇게 타인에서 어떤 모델을 찾으려 하는 것은 나를 메울 수 있는 것은 인간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하게 되면 그 허상의 아픔이 뭐로 등장하느냐? 바로 열등감이에요. 열등감, 또는 열등의식. ‘나는 멀쩡한데 저 사람은 이상하다든지 저 사람은 참 대단해서 닮고 싶은데 나는 뭐지?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럴 때 서로 뭔가 특출한 존재가 따로 있다고 여길 때 생겨나는 게 뭐냐 하면 열등의식이죠. 열등감, 열등의식에서 생겨나는 게 범죄에요. 자기의 허점을 커버하기 위한 대응되는 조치가 범죄지요.

자기 열등의식, 그걸 제가 설교에서는 두려움을 대응하는 방식이라 했어요. 알 수 없는 어떤 두려움이 있단 말이죠. 내가 두렵다는 것은 두렵지 않는 상태를 미리 설정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는 설정할 수 있는 모델 자체가 다 이상해요. 너도 이상하고 나도 이상하고 다 이상한 거예요.

왜냐하면 전부 다 허상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상한데 그것도 모르고 전부 다 허상세계에서 보다 나은 괜찮은 것, 보다 못한 것, 이렇게 돼버리면 열등의식 때문에 범죄가 일어나고 범죄를 안 하게 되면 그 범죄를 하면 안 돼, 라고 그걸 억누르게 되면 나는 내 안에 내 사는 게 무거운 쇳덩어리가 계속 형성되고 만들어지고 키워지는 그런 힘든 인생을, 마음으로 불편한 인생을 사는 거죠.

그러면 결국 이 문제가 알 수 없는 허상이 주는 자기가 멀쩡하고 싶은데 모델을 찾지 못하는 이 모든 것을 우리의 감정으로 표현이면 딱 한 자로 표현하면 이겁니다. ‘두려움’이에요. 원인도 모르겠어요. 그냥 알 수 없는 두려움, 공포, 평안하지 않은 마음상태. 성경에서 이 두려움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있어요. 두려움은 누가 주는가? 마귀가 인간을 흔들어댔다.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하나님의 주신 구원의 방식입니다. 뭐냐 하면 ‘사랑’ 요한일서에 나오지요. 사랑 안에는 뭐가 없나니? 두려움이 없다. 딱 기다려. 내 사랑 줄게. 나, 너 사랑할게. 겁나? 두려워? 너는 정상이고 싶어 하는데 정상인 모델을 못 찾아? 내가 나다운 나를 발견하지 못해? 딱 기다려. 내 너 사랑할게. 사랑하는 대신 너를 삭제할 거야.

주님이 오셔서 나를 삭제할 때 방식이 뭐냐? 말씀이에요. 말씀으로 삭제하시는 작업이 주님의 사랑의 활동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어제 오후 설교 때 했잖아요. 손가락으로 누르니까 다 아픈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의사가, ‘당신 손가락이 아픈데?’ 우리 자신이 아프기 때문에 아플 때 나오는 게 남 탓해요. 남 탓. 이게 두려움 때문에 그래요.

그게 어제 오후 설교 때는 어디에 실린다? 언어에 실리죠. 말투, 톤, 어감 여기에 자기의 두려움을 실어서 언어로 그걸 안 들킨 척하고 있는 거예요. 추석에 며느리들 오면 예쁜 며느리면, 아이고 오나. 하고 박수를 치면서 반기죠. 별로 안 좋아하는 며느리면, 왔나…. 글자로 쓰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이고, 어머님. 우리가 생활이 어려워서 얼마 안 됩니다. 그냥 빈 봉투나 마찬가지입니다” 하고 주면, “괜찮아, 괜찮아” 이러고, 미운 며느리가 한 백만 원 넣어오면, “행세해? 너거 집 친정 잘 산다고” 시빗거리도 아닌데 자꾸 시비하는 것, 그게 언어에 실리죠. 감정, 듣는 사람은 그걸 느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의 두려움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방식이죠. ‘나는 살고 너는 내 독한 말에 죽어’ 이것.

그러니 참 인간이라고 타이틀 걸치고 살아가는 모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주님의 일을 이 사랑을 방해하고 핍박하는지요? 자기 사랑에 미쳐서 주님 주신 사랑을 계속 밟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조치는 뭐냐? 하나님의 조치는 바로 마태복음 13장에 나옵니다. 13장 보고 오늘 본문 들어가면 아귀가 맞게 돼 있어요.

마태복음 13장 47절에서 52절, 제가 읽겠습니다. 52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새것과 옛것을 어디서 끄집어낸다고요?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 누가요?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서기관의 역할은 뭐냐 하면 글을 쓰는 사람이에요. 말씀과 관련된 직업이 서기관들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옛것과 새것은 옛 말씀과 새로운 말씀을 마지막 때에 앞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주께서 분류하는 작업에 필수적인 것이 뭐냐? 옛날 말씀뿐만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말씀이 끄집어내줘야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최종적으로 분류작업이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새것과 옛것 할 때 마태복음 9장에 보면 뭐냐 하면 새로운 포도주는 옛날 부대에 담으면 그게 진가가 드러나지 않아요. 새로운 포도주는 새로운 부대에 담아서 그게 진가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럼 부대의 용도는 뭡니까? 부대 자체는 아무 의미 없어요. 새로운 말씀을 담기 위한 부대가 새로운 부대거든요.

그러면 새로운 말씀은 누가 만들어내요? 그거는 예수님이 지상 생애를 통해서 새로운 말씀을 계속 생산해내면 되겠지요. 그 말씀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자기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소품으로 우리가 거기에 도입되는 거예요. 거기에 끌려들어가는 겁니다.

우리 안에는 뭐가 들어있고? 율법? 아니죠. 율법 말고 뭐가 들어가고? 말씀, 복음이 들어가는 거죠, 우리 안에.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율법은 찢어버리고 폐기해버리고 이제는 복음으로 완성이 되니까. 이러한 작업을 이미 주께서는 준비해주셔서 시편 64편을 미리 다윗에게 예언을 한 겁니다. 자, 시편 64편 봅시다.

원칙입니다. 자기 구원에 빠진 인간을 주께서 주님이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바뀌는가? 말씀이 개입되면 돼요. 그런데 그 말씀 개입할 때 왜 유대인들은 실패했는가? 그들은 옛것이 없어요. 모세오경이 전부기 때문에 옛것을 없는데 옛것을 표현한다는 자체가 새것이 있음을 전제로 한 거고, 새것이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간은 주어진 모세오경이 전부입니다. 그 말씀 지키고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내 안에 율법이 들어오면 구원받는다. 또는 내가 죄인인데 하나님의 모세율법이 들어오면 구원받는다. 이런 생각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어요. 그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날마다 티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하면 금식했고 가슴을 쳤고 했는데 예수님 집단 보니까 금식일에 금식을 안 했잖아요.

금식을 안 하니까 놀리는 거예요. 심지어 세례 요한도 금식하는데 지가 뭔데 왜 금식을 안 하느냐?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들 신랑 오라고 금식하지?” 그러나 이미 신랑이 왔는데 금식하면 누구에 대한 모욕입니까? 오는 신랑은 신랑 아니라고 욕 먹이잖아요. 그게 핍박이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원수잖아요. 왔는데 자기 구원에 미쳐서 지가 납득이 되고 지가 믿을만한 내용 없다고 핍박을 하게 되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 자신이 누구의 소품인 것을 생각 못하고 내가 원하는 구원, 내 구원을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 상황이 뭐냐? 율법 시대의 상황입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자는 날마다 율법을 묵상한다 했잖아요. 날마다 묵상하는 그 복이 마태복음 5장 3절에 보면 어떤 복이냐 하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잖아요. 도대체 뭐가, 구조 자체가 방식 자체가 틀, 프레임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말씀을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환경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내 것은 받지 않는 환경이 왔을 때 우린 비로소 내 출발점이 나는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고백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의 원수다’ 이게 어려워요? 이게 그렇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겁니까? 원수, 이게 굉장히 안 돼요? 안 되면 사도 바울이 지시한 대로 합시다. 우리는 뭐냐? 죄인의 배설물이다. 쓰레기다. ‘나는 쓰레기다’ 이것도 어려워요?

일본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어요. <공기인형>(고레에다 히로카즈, 2009)이라고. 배두나가 주연으로 나오는데 나는 보지는 않았어요. 그 감독이 쓰레기를 두 가지로 분류했어요. 소각되는 쓰레기, 또 하나는 재활용되는 쓰레기로 구분했습니다.

영화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어떤 남자가 여자 인형을 구입했어요. 그 여자 인형이 제 기능을 하려면 공기를 집어넣어야 돼요. 어느 날부터 배두나가 맡은 공기인형이 남자와 같이 한 집에 있으면서 어느 날 자의식이 생겼어요. 공기 빠졌을 때에 나를 구매한 남자가 나한테 공기를 집어넣으니까 다시 살더라,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남자가 시들시들하니까 남자의 배에다 구멍을 냈어요. 죽음이란 개념은 없어요. 그 구멍에다 지가 공기를 집어넣어도 이게 안 사네. 출발점이 인형이니까. 사람과의 차이점을 모르니까. 그래서 자기를 만든 공장에 갔습니다. 요새 힘이 빠진다 하니까 인간은 자기를 사온 구매자는 화장터에서 소각해서 재가 되어 없어져요. 하지만 공기인형은 언제든지 재활용되니까 네 쓰레기는 재활용쓰레기인 거예요.

감독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황금종려상 받은 감독이니까 철학적인 깊이가 있지요. 인간의 내부가 허망하다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 작품을 만든 거예요. 인간의 내부는 아무것도 없다, 허망하다. 그러니까 아까 했잖아요. 인간이 시도하는 구원은 결국 어디로 빠집니까? 인간은 허무하다로 빠져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종교도 아무것도 아니고.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 그것은 뭔가 의미 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불교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은 무다. 무라고 알고 있는 나는 이제는 신도 필요 없고 내가 신이고 내가 부처다. 왜? 깨달음이니까. 깨달아야 이게 부처가 될 수 있으니까, 불교에서는. 여러분, 깨달았습니까? 갓바위 한 번 올라가보려고요? 인간의 철학적인 감독은 이것밖에 안 돼요.

그런데 복음은 뭐냐 하면 뭘 추구하느냐? 시작을 인간부터 시작해서 소각된 쓰레기와, 그리고 인간이 만들었지만 진짜 만약에 인간 같은 인간이라면 그 인간은 진짜 인간이 몰랐던 요소까지 더 추가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러한 인형이 추가적으로 알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그런 걸 비추거든요.

이게 옛날 영화거든요. 벌써 감독은 뭘 생각하느냐? AI시대를 내다보고 있는 거예요. 인간보다 더 완벽한 인간이 우리가 구원하고자 하는 내 안에 들어있던 나의 구원의 이상적인 모델이 아닌가. 똑똑하긴 똑똑하고, 몸이 아프다하면 재활용하면 되지요. 여기서 정보를 빼내서 신체의 DNA를 새롭게 줄기세포로 새로 만들어서 내가 알고 있던 정보를 자아를 거기다가 대입시키면 나는 영원한 불변의 존재가 되겠지요. 죽고 난 뒤에 옷 갈아입듯이 고물은 가고 다시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으면 내가 천년이고 만년이 살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어떻습니까? 출발을 인간으로 출발하지 않지요. 출발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 주님의 형상을 통해서 여기 뭐냐 하면 원수, 다윗의 원수지요. 다윗의 상대자가 필요하다. 그 다윗의 상대자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5장부터 17장까지요. 15장 3절 여기에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아들 압살롬이 등장하지요. “압살롬이 저에게 이르기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공과 사를 구분한다면 공적으로 아버지는 누구냐? 임금이에요.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임금. 그 임금에 비해서 아무리 아들이라도 권세가 없는 한 이거는 임금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그 임금이 다윗입니다. 다윗인데 지금 누가 선을 넘었어요? 아들이 선을 넘은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이 나라에 억울한 사람의 송사를 들을 정도로 왕이 구실을 제대로 못합니다. 제가 그 왕 구실을 해드릴게요, 하는 그 대목이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시편 64편 2절에,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완전한 자 누굽니까? 본인이죠. 누가 숨었어요? 왕의 권세 아래서 자기 허락도 없이 왕 행세하는 자가 다윗을 모르게 아버지 모르게 했잖아요. 숨어있는 거죠.

그럼 압살롬이 원수냐? 반란을 일으키려면 혼자서, 계엄이라고 해서 계엄 되는 게 아니잖아요. 지와 지 마누라하고 계엄이라고 할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이죠. 한동훈이도 반대했는데 됩니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 전체, 지금 다윗은 자기가 왕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이 언약으로 지명된 왕이기 때문에 나의 왕 됨을 노리는 것은 무엇에 대한 공격으로 봅니까? 언약에 대한 공격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의 가치를 우습게 보는 모든 대다수의 사람이 하나님의 행악자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다윗을 외롭지요, 외로워요.

압살롬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 그게 15장 말고 사무엘하 16장 5절에서 13절 보니까 이런 말씀 나와요. 다윗이 마루턱을 넘어갑니다. 추방되는 가운데 있는데 여기에 5절에 보면,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시므이가 나오면서 누굴 저주합니까? 다윗을 저주하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윗은 개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상대자에요. 차라리 예수님을 욕해라 이 말이죠. 예수님 욕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 수준에서 다윗은 일개 인간이에요. 권세 있다가 권세 쏙 빠졌잖아요. 아들한테 완전히 빼앗겼잖아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욕하고 있는 거예요. 누구 집안인데? 사울 집안이거든요.

그러면 다윗을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 사울 집안이 왕이 될 것을 누가 빼앗아갔다? 유다 집안 다윗이 우리 왕가 집안을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리고 방향이 노선이 자기 집으로 대대로 왕의 가문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도저히 이것은 참을 수 없다. 우리 고유의 가치, 우리 집안의 가치를 저 다윗이 박살냈으니까 호시탐탐 노린 거예요. 노리다가 드디어 이렇게 되니까 저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는 거예요. 까불 때 알아봤어, 이런 식으로.

16장 6절에 보면 나와요. “또 다윗과 다윗왕의 모든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7절에,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잘 꺼져라, 이 말입니다. 너는 네 행위대로 보응을 받는 게 마땅하다, 이런 식이죠.

그 현장에 여러분들이 다윗 편에 서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 시므이를 원망하겠습니다, 아니면 자기 신세를 원망하겠어요, 어떻습니까? 우리 신세를 원망해요. ‘줄을 잘 서야 했는데, 아하 줄을 잘 서야 하는데. 이재명을 찍을 걸’ 이런 것. 인간은 어딜 찍어도 허상이에요. 인간에서 나오는 건 허상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원수의 노릇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시므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자질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권력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여자의 마음만 갈대 같이 흔들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권세 따라 흔들리는 것, 따라서 인간은 항상 두려움이 휩싸여 삽니다. 또 무슨 내가 갖고 있는 재산과 내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권세가 언제 헷가닥 바뀔지 알 수 없잖아요.

‘엄마, 너무 좋아서. 엄마 아프면 내가 케어 해드릴게요’ 하던 딸이 결혼하고 난 뒤에 바뀌어 지 자식밖에 모를 때 엄마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해먹고 엄마를 나 몰라라 내칠 수 있다는 거기에 대한 사전에 미리 예측하는 그 두려움. 우리가 감사한 것은 시편 64편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무엘하 15장, 16장이죠. 이것은 우리한테 오늘날 매일같이 경험하는 실감나는 말씀의 체험입니다.

아까 어떤 분이 이야기하면서 락토조이(LACTO Joy, 유산균 구미젤리)가 그렇게 맛있데요. 그것 안 먹으려하다가 ‘맛있다’는 말씀 있잖아요. 말씀을 체험을 한다고 이것 다 먹었어요. 역시 맛있데요. 말씀이 그냥 지켜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고맙게도 시편 64편, 사무엘하 15장, 16장, 17장을 오늘날 2025년도에 입각해서 우리에게 실습을 시키고 체험학습을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을 어디다가 일대일 대응해야 돼요? 말씀과 대응해야 됩니다. 마트에서 물건 구입할 때 그냥 물건 가져가면 안 되지요. 뭘 줘야 돼요? 돈 주고 이 물건 사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 주고 우리로 하여금, 진짜 점점 어려워진다. 할 수 없다. 중첩됐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대조되는 세계는 이게 성도에게만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했지만 마태복음 13장 52절에 나오지요. 옛것과 새것을 중첩시켰잖아요. 신약에 오늘날 우리들에게.
중첩을 시켜놨기 때문에 중첩된 체험을 우리가 겪도록 2025년 상황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중첩되었으니까. 따라서 마트에서 물건 사듯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주면서 옛것을 빼앗아가는 식으로 자꾸 일대일 대응해서 교체를 시키는 현장이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자꾸 말씀 지키려 하잖아요. 그건 옛 방식이죠.

말씀을 지키는 것은 옛 방식이고 말씀이 들어와서 완전히 우리를 분탕질하고 우리 자신이 설계했던 내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체험입니다. 시편 64편의 다윗이 지금 불편하잖아요. 원수가 와서 자기 자리가 있는데 그걸 엉망으로 만들어놨잖아요. 현재 성도의 자리는 뭡니까? 하나님 아들의 자리고 천국의 영생의 자리 아닙니까?

영생의 자리를 누가 이걸 비웃고 비아냥거리고 놀리고 조롱합니까? 마귀가 그렇게 하잖아요. 그런데 마귀는 안 보이고 실생활에서 누가 그렇게 하느냐?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게 말씀이다, 새것이다.

제가 최근에 설교 시간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몇 주 전에. 십계명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그건 잘 지키는 데 천하 자식이나 그걸 미워하라는 그건 못 지킨다고. 그걸 못 지키면서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어디서 흥정을. 마트에서 공짜로 구원을 주는 게 아니고 주께서 값을 우리라는 내 자아가 형성시킨 것이 뭐냐? 옛 율법, 법의 환경 속에서 자아가 살아온 그것을 돈을 빼앗아버리는 동시에 물건 주는 동시에 복음을 주는 동시에 옛것을 빼앗아버리는 그 작업을 주께서는 부지런히 하시는 거예요.

구원은 주님 혼자 하시는 게 구원입니다. 우리는 빼앗기면 되지요. 사울이 자기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내가 하나님에 열심히 있다는 그것, 빌립보서 3장에서 그걸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나의 의를 배설물로 그냥 아까지 않고 아낌없이 버려야 돼요. 그리고 그 버린 것에다가 공기인형처럼 주께서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를 죄인임에도 의인으로 재활용하는 거예요.

남들 보기에는 죄인인데 주님 보시기에는 의인, 남들 보기에는 미련한데 주님 보시기에는 지혜 있는 자. 중첩된 가치와 의미를 우리는 동시에 체험하고 있는 이 상태, 이게 바로 주님과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생명의 구조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들어왔다는 말은 선악과가 없어진 게 아니고 선악과가 남아있어야 주께서 빼앗아갈 게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나 착한데요.” “기다려. 내가 빼앗아갈게.” “저, 평생 동안 말씀 잘 지켰습니다.” “오 기다려. 내가 그걸 죄로 만들어줄게.”

그러니까 빼앗아갈 게 있다는 그 수준이 점점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의 공로만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아직 지금 목숨이 안 끊어졌으니까 아직까지 빼앗길 수 있는 우리의 잘남이 아주 많이 주께서 만들어낼 거예요. 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 과정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내 것을 빼앗아가는 건 사랑이고, 감사는 뭐냐? 빼앗기는 데서 오는 희열. 내 것, 또는 나라고 걸쳐있는 모든 것을 앗아가 주는 그 고마움과 감사지요.

하나 더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17장 1절에서 4절.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나로 하여금 사람 일만 이천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따라 저가 곤하고 약할 때에 엄습하여 저를 무섭게 한즉 저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아히도벨이 다윗은 이제는 겁나지 않아요. 반란군 입장에서. 다윗과 함께 있는 그 장군들이 맹장이라. 아히도벨이 보기에, 그래서 지금이 찬스라는 거예요. 지금 때 놓쳐버리면 나중에 다시 군사력을 키워서 정복하기 힘들다고 한 거예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히도벨이 전략가에요. 경험상 언제 치면 승리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게 복음적입니까? 복음적 아니지요. 그건 이렇습니다. 다윗 쪽에선 그들의 전력에 대비해서 이쪽에서 더 멋진 전략을 세우지요. 여기 누굽니까? 후새가 전략을 세우지요. 전략을 세워서 지연시키는 것,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바람직한 겁니까? 이것도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너도 죽고 이참에 나도 죽고 언약이 살자, 말씀이 살자는 거예요.

시편 64편 봅시다. 5절에,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라고 돼 있어요. 여기서 중첩된 겁니다.

어떻게 중첩됐는가? 이 말을 누가 하느냐? 다윗이 하지요. 또 이 말을 누가 하느냐? 장차오실 메시아께서 미리 다윗 속에 들어앉아서 2025년도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가 아니라 다윗시대에 메시아가 그 시대 상황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메시아는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체험을 하느냐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구약 해석입니다.

여기서 성령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성령이 뭐냐 하면 십자가의 영이에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자마자 십자가 안 지셨지요. 어릴 때 ‘십자가질래’ 하지 않았단 말이죠. 그럼 절차가 필요한 거예요. 절차에 대해서 두 가지의 견해가 있는데 여러분 어느 쪽이 맞는지 보세요. ①A라는 과정 → B라는 과정 → C라는 과정 → D라는 과정이 있다. 이런 과정을 우리가 겪어야 한다. ②번은 뭐냐 하면 빨리 지나가면 되잖아. A에서 뭘 내다본다? D만 쟁취하면 되잖아.

두 가지 타입이 있는데 ②번이 잘못된 건 뭡니까? 지금 성질이 급하지요. ②번 입장에서 A가 있는 이유는 뭐 때문에 있다? D라는 목적을 위해서 있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①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D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A에 내포돼 있는 내용이 B, C, D로 펼쳐질 뿐이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언약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②번이 되면 안 돼요. ①번이 돼야 돼요. ②번은 자기 구원에 너무 성급했어. 빨리빨리 치우면 된다는.

하지만 B라는, C라는 과정이 생략될 수가 없어요. B, C 과정이 뭐냐?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억울하게 고난 받는 절차에요. 이걸 하나님의 아들의 원형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왜 이 땅에서 와서 십자가를 졌겠습니까? 십자가가 빠져있는 것은 아들이 아니지요.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유사품이죠. 십자가의 자국이 없으면 그거는 성도가 아니에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빨리 십자가의 고난을 받겠다는 거예요. 목적은 뭐냐? 십자가가 목적이 아니고 지 천당 가는 게 목적이 되어 십자가라는 매를 미리 맞겠다는 거예요. 십자가는 그게 아니에요. 그걸 누가 방지하느냐? 성령이 방지합니다. 성령은 십자가의 영으로 와버려요. 십자가의 영으로 왔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주님을 핍박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 중에 핍박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가룟 유다가 핍박한 게 아니고 열두 제자부터 해서 거기에 관여한 모든 인간이 핍박한 자에요. 인간에서 열두 명 뽑았고, 열두 명 중에서 뽑은 게 가룟 유다에요. 왜? 가룟 유다만이 사탄이라는 영적 존재로 접합돼 있기 때문에. 나머지는 영적 존재의 수하지요.

그러나 영적 존재와 직접 다이렉트로 접촉이 된 유일한 인물은 뭐냐? 가룟 유다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가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느냐? 왜냐? 그는 사탄이기 때문에. 사탄이 더럽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사탄이에요. 내가 악마를 선택해서 열두 제자 속에 포함을 시킨 이유가, 악마가 아무리 까불고 날뛰어도 악마의 활동조차도 주님 자신의 구원의 소품에 지나지 않는 거죠. 세팅된 무대장치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은 물론이고 마귀마저도.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랑이란 것은 뭐냐 하면 그냥 주께서 주도적으로 나를 다뤄주는 관계 자체가 주님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을 십자가의 영을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그걸 고맙게 여길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죠.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이 사랑은 어디 있느냐, 말해놓고 사랑은 성령 안에 있다.

그런데 성령은 눈에 안 보이죠. 눈에 안 보이는 것으로 사랑의 근거의 토대로 삼았으니까 사람들은 사랑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어떻게 해결해 보려고 백날 노력해도 어디에 막힙니까? 실제로 막히겠지요. 그게 왜냐하면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십자가에 참여를 못하기 때문에 막아놓은 거예요.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한 게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사랑 안 했잖아요. 이웃을 사랑 안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율법을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지킬 수가 없어요. 율법의 핵심부분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둘 다 막혀있어요. 막혀있으니까 우리는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그런 권리나 자격 자체가 없는 거예요. 요즘 교회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무 권한도 없으면서 모여 있다고요. 왜 모여 있지요? 같은 인간으로부터 위로받기 위해서 하는 거지요.

AI 실험하는 대목에서 AI보다 인간이 낫지요? 인간이 낫지요. 왜 낫습니까, 하니까 모여서 식사 같이하니까. 그게 너무 그리웠다는 거예요. 십자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십자가의 죄인으로 참여한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어요.

첫 번째는 여러분 다윗 될래요, 성도될래요? 어느 쪽입니까? 성도돼야지요. 다윗은 구약이니까 수준 차가 나잖아요. 그러면 두 번째, 새로 창조될래요, 성도될래요? 이건 창세기 1장입니다. 흙으로 아담될래요, 성도될래요? 성도돼야지요. 그러면 에덴동산 갈래요, 천국 갈래요? 어느 쪽입니까? 천국이죠. 그러면 마지막으로 잘 살래요, 예수 안에서 살겠습니까? (예수 안에서) 말은…. 말은 정답 안다고, 그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제일 마지막에 사랑을 사랑으로만 감사해야 되는데 사랑을 어떤 형체로 나한테 이익 되는 사랑으로 자꾸 변질하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 육신에 남아있어요. 사랑하면 그게 사랑인데 부자 되는 게 사랑이라고 자꾸 번역을 하려고 해요. 내가 사랑을 돈 주고 살려고 하는, 시몬과 똑같아요. 사도행전에(8:18,19). 성령을 얼마면 돼, 이러고 있다고. 무슨 사랑을 돈 주고 삽니까? 가거라. 돈이 그렇게 좋더냐?

그러니까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주께서 말씀으로 교체해야 될 죄가 육신이 있는 한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실 거예요. 그것마저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고맙게 여겨야 되지요. 우리를 소품으로 사용해준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심지어 천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부럽다, 야.” 천사는 때려죽여도 성도가 못 돼요. 그냥 천사일뿐이에요. 폼은 나요. 빛나고.

폼 나면 뭐합니까?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데.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잖아요. 그 아들의 영이 우리한테 왔으니까 아버지가 아들 사랑하는 사랑이 우리의 부대 안에 주님 사랑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그냥 죽어라. 그냥 살다 죽어.”

그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우리가 잘 아는 것, 옥석 가리기. 이게 옥인지 돌인지 그걸 가리는 역할을 누가 하느냐? 우리 주님께서 하십니다. 그래서 빨리 간다고 해서 그게 완주했다고 할 수 없어요. 우리는 결국 천국 간다고 성경에서 전개가 되더라도 그것을 밟아가는 체험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완전하게 정리했다. 정리해서 너무 기쁘다. 이게 복음이구나, 했는데 집에 오니까 강아지 죽었어요. 강아지가 내 자식 같이 딸 같이 키웠는데 그 딸이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슬퍼서, 그게 뉴스로 나왔어요. 부산출신 모델 있지요. 딸 죽었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개가 죽었어. 그러면 뭡니까? Why me? 하나님이여 왜 저한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이렇게 시작되지요.

그러면 그건 또 뭡니까? ‘딱 걸렸어. 옛것 또 나왔어. 잘 됐어. 내가 그것 복음과 바꿔줄게.’ 미리 예상 못한 기쁨, 미리 예측 못한 감사와 기쁨이 바로 개 죽을 때 다시 한 번 거기서 또 다시 새롭게 되지요. 그런 것이 바로 말씀의 그 작용이 지금 그중에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게 시편 64편입니다. 계속 봅시다.

7절에,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자,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하나님의 일을 다윗이 미리 알았습니까, 아니면 몰랐습니까? 몰랐지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 주관적으로 알면 되지 굳이 내가 알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일에 복속될 뿐이었지요. 자기는 그냥 체험할 뿐이에요. 락토조이젤리? 그냥 복숭아 맛? 그런 건 있는 줄도 몰랐지요. 진자교회 오니까 이걸 아는 거예요. 복숭아 맛을 보는 거예요. 앞으로 어떤 걸 체험할지는 우리 소관 아닙니다. 미리 댕겨서 고민하거나 준비하지 마세요. 또 무슨 사태와 사건이 주께서 복숭아 맛인지 안 그러면 사과 맛인지 또 뭐가 있을 거예요. 물론 맛있는 것도 있지만 쓴 것도 있을 거고.

어쨌든 간에 변하지 않는 것은, 10절입니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끝났네, 끝났어. 미리 또 즐거워하지 마세요. 인생 조지는 사건이 있어요. 그 사건 속에서 비로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이라고 불러주시는 그 의인의 신분, 변하지 않는 신분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마음의 정직은 바로 십자가 성령을 받아야 주님의 정직이 내 마음을 통해서 드러날 때 확고한 변하지 않는 주님의 약속을 정직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정직한 게 아니고 주의 약속은 십자가 안에서는 이미 완결됐다는 것, 확정됐다는 Pass 합격했음을 그 합격의 기쁨을 새로운 사건을 접할 때마다 깊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작동하고 활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인간이 애써도 자기가 자기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오히려 그 점이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는 소품인 것을 이제는 알고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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