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내부 순환
2026년 4월 5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1:19-21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사람들이 화를 낸다는 것은 자신에게 화낼 만한 자격이나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화를 내고 분노하는 것은 그 근원이 악마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 12:12)
악마의 분노가 악마의 졸개인 인간들의 내부로 파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이성을 품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등장하면서 주변 나라나 관계되는 국가들의 내부에서 악마의 분노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모세가 애굽 나라를 방문하면서 바로왕은 참고 있는 분노가 터져나오게 됩니다.
완악하고 강퍅하는 마음으로 모세를 통해서 니타나는 하나님의 일에 대응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모세가 가로되 왕의 말씀이 옳으니이다 내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출 10:27-29)
바로왕이 분노하는 이유는, 분리에 있습니다. 애굽 나라의 통치와 지배에서 애굽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따로 분리해 나가는 것에 대해서 격분하고 있습니다. 바로왕은 여호와를 믿는 백성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백성들과 다를 바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다른 신의 이름으로 기존의 애굽의 신을 부정하고 나오니까 그들은 그 거절당함에 화를 내고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격분은 야곱의 형 에서가 야곱에게 격분해서 죽이려고 시도한 것과 같습니다. “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 27:41) 이러한 미움과 성냄을 일반화 시키면 오늘 본문이 말해주시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20) 즉 성냄의 원천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에 대한 도전이요 훼방이요 거절의 표현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2-4)
즉 사단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받는 대상이 있고 그 사단편에 속한 모든 인간도 같은 취급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 대 인간 사이에서 차별을 두십니다. 그 목표는 최종적이고 최상위적 질서 완성을 위함입니다. 최상위적 질서을 위한 작업은 생명나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선악과 나무 존재의 취지는 생명나무와 짝을 이루는 가운데 완성을 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음’이 있습니다. 이 ‘정녕 죽음’이 품고 있는 뜻은 생명나무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이 ‘정녕 죽음’의 세계에서 찾아들 때 성사됩니다. 인간이 아무리 여러번 죽고 많은 사람이 다량 죽어도 거기에 ‘정녕 죽음’은 없습니다.
인간들은 죽어도 죽는 것이 뭔지를 모르기에 애초부터 죽음에 대해서 아는 바없습니다. 그런데 차별되어서 천국가게 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만이 생명 나무가 받아들인 선악과의 죽음‘인 것을 압니다. 예수님의 죽음만이 진정 아버지와의 관계 끊음을 보인 죽으심입니다.(마 27:39, “아버지를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정녕 죽으리라‘가 품은 참 뜻을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시킴으로서 이제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한 부활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십니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십자가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부활의 장field에서 시작합니다. 부활의 장은 성령님이 활동하시는 영역이고 그 기능의 일환으로 성도에게 찾아들면 성도는 십자가 안이 영원히 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전에는 성도도 아담의 몸의 일부였습니다. 아담의 온통 저주받은 토지로 내려와 살면서 흙이 되기 전에 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성도의 예수님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는 선악과 취지를 듬뿍 머금고 완성된 생명나무의 과실의 혜택을 입기 위해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빨아먹게 됩니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신약에 와서 성령받은 시므온은 자신의 고백을 아기 예수님 안고 이렇게 합니다. “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 2:29) 하나님의 피 흘리심은 친히 이 대자연을 만들어 놓으시고 친히 그것을 상실하시는 하나님의 거대 상실성을 보여주십니다. 이 상실에 참여되는 자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가 가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25:1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혼인 잔치는 밤에 이루어집니다. 이 밤의 밤됨을 밝힌 것은 개인적인 인품이나 자질이 아닙니다. 오로지 ’기름‘ 뿐입니다. 기름을 밤 중에 내세우는 것은 누구를 만나기 위함입니다.
누구를 만날까요? 인생 상담? 자신의 행복? 아닙니다. 아예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하여 바쳐야 될 분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는 ’1:다수‘ 형식을 띱니다.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공기와 비내리심에 인간이 가진 의(義)로서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냥 주님에게 압류당하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진리의 덮침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이제부터는 성도는 허세 떨지말고 겉으로는 늘 우리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즉 무능력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부적으로 자기 절망을 즐기는 자유를 만끽해야 합니다. 더는 자신에게 ‘자기를 위한 질문을 할 필요 없는 대상’임을 확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피의 배수구를 가로막는 오물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말을 해도 죄용서를 머금은 채 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8강-야고보서 1장 19-21절(피의 내부 순환) 260405-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19-21절입니다.
야고보서 1:19-2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여기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언급한 것은, 지금 계속해서 야고보서 1장 1절에 나오는 것처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 해당되는 형제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은, 구약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은 형태, 구조, 체제 그것이 신약에 와서 여전히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형태나 구조를 설정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되게 하는 그 원칙이 그 안에 온전하게 살아있는 그것이 신약에 와서 완성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라고 이야기하는데 당부하는 그 내용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천국의 백성 된 이스라엘 형제들에게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 말은 뭐냐? 남들하고 이야기할 때 꼭 할 이야기가 뭐 있어야 합니까? 남에 대해 이야기할 게 있어야 돼요?
왜 이 질문을 던지느냐 하면, 인간은 각자 자기를 위해 살잖아요.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자기 위해 사는 그 본성에 부합되지 않게 남에게 말을 건넨다? 그게 상당히 신기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위해 살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경우는 거의 백 프로 사기꾼들이 하는 짓이에요. “좋은 물건 들어왔습니다.” 이런 거요. 남이 필요 없는데 왜 말을 건네죠? 남한테 말을 건네지 않는 게 제일 편하게 사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여기서 ‘형제들아’ 곧 ‘구원받은 제대로 된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들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반드시 사명감을 품고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이야기할 게 있을 때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방송에 나와서 장 건강에 대해서 늘 이야기 하는 교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입이 근질근질해서 안하고는 못 배깁니다.
인간의 모든 면역력은 장 건강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걸 꼭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 사람은 마이크만 주면 거침없이 장 건강에 대해서, 좋은 세균에 대해 언급하고 식생활을 개선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나름 자기의 사명감이죠. 자기 딸이 암 걸려서 죽었으니까, 그게 애타서 사명감으로 식생활 잘하라고 당부하는 사명감입니다.
그렇다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은 말을 할 때는 뭔가 사명감을 갖고 이야기를 하라는 겁니다. 그중에 시범을 보이는 것이 야고보 본인이에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본인이 사명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할 만한 가치가 있을 말만 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건 전부다 보이스 피싱 사기꾼, 타인에게 사기를 치는 사기꾼이 되는 거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가, 말을 할 때 둘로 나누고 있어요. 하나는 그냥 말을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뭐냐? 성을 내는 경우입니다. 성냄인데 화를 마음 내부에 품지 못하고 언어를 통해 자기 내부의 성을 바깥으로 폭발시킬 때 사람들이 말을 한다는 거예요. 자기 내부의 화남과 성남을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화풀이, 분풀이하듯이 하는 말, 그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와 백성되지 않은 자를 구분하겠다는 겁니다.
성내는 말이 왜 문제냐 하면, 야고보서 1장 20절에 보면,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의 의가 꽂혀있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의가 꽂혀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는 그 자체적으로 살아서 그게 사명감이 되어 “여러분 장 건강 중요합니다. 식생활 주의하세요.” 하는 어떤 교수의 사명감처럼, ‘자신의 의로는 천국 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로만 갑니다’라는 그 사명감을 품고 말을 건네는 거죠.
그렇게 말을 건네는 그 외의 모든 말은 어떤 말이다? 자기 속의 분노와 화를, 화딱지를 내부적으로 통제할 수 없어서, 참지 못해서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분합니까, 여러분? 그렇게 분해요? 그렇게 매사가 분하십니까? 도대체 어느 대목에서 분하죠? 하나님이 햇빛 줬죠? 공기 주셨지요? 때마다 단비 주셔서 새싹 돋게 했죠?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값 치렀습니까? 햇빛과 공기와 단비가 없으면 우리 목숨도 부지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친히 기르시잖아요. 친히 길러주는 게 그렇게 분해요, 그게? 그 분함을 자기가 잠재울 수 없어서 그게 말로 나오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면 기아 타이거즈가 “개막전부터 벌써 7게임을 했는데 꼴찌가 뭐야?”
이게 무슨 소리예요? “홍명보 감독 바꿔야 해.”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지금? “홍명보 감독 바꿔야 해. 이래서는 월드컵 희망이 없어.” 자, 여기서 물 거저 줬죠. 햇빛 거져 줬죠. 공기 주셨죠. 거기에 대한 감사가 나옵니까? 지금 뭐가 그렇게 분해요, 인생 살면서? 성경은 답변도 없어요. 왜 분한지 답변도 없어요.
왜 사위가 분해서 장모를 때려죽여서 캐리어에 넣고 하천에 버려서 대구 신천동까지 떠내려가게 했는지 그 사위는 이유를 몰라요, 왜 그렇게 분한지? 그 분한 게 폭력으로 나오거든요. 행동으로 나오고 말로 나오고요. 인간들이 주고받는 모든 대화는 뭡니까? 자기 분노에 대한 폭발이에요. 그렇게 분한 이유도 모르면서 왜 분을 품고 발산하는지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상실이 되지 않아서 그래요. 이스라엘 백성들 형태, 구조는 뭐냐?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자신의 터전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막힌 바다 홍해를 통과할 때는 자기의 목숨마저 그 바다 앞에서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광야를 통과할 때도 그들은 자기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모든 아이디어와 방법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상실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상실하지 않으면 약속의 땅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40년 동안 홍해 건너온 사람 다 죽였어요. 자기의 상실을 인정하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다 죽었습니다. 이 땅에 인간이 태어난 것에 대해서 성경의 근본은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 안에서 출생했습니다.’ 이겁니다.
모든 인간은 저주 안에서 출생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화를 내는 것은 저주의 티를 팍팍 내면서 평생, 백 세 동안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안 믿는다? 교회도 안 나온다? 왜? 화가 나서. 분노가 되는 거예요. 햇빛과 공기, 은혜 주신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있어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면 내가 하나님 믿을게.” 그래서 교회 안 나오는 거예요. 지금 땡깡 부리고 시위하고 있는 거예요. 반발하고 있는 겁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 국가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이유가 땅에 알려집니다. 이스라엘 국가로 말미암아 최초로 분노하는 이유를 알게 된 민족이 있었으니 그 민족이 애굽 나라고, 그 왕이 바로 왕이예요. 출애굽기 8장 초반부터 히브리인들이 애굽 땅에서 나갈 때까지 계속 화를 내고 분노를 품고 있었던 자가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 바로 왕이 성격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성격이 나쁜 사람이 아닌데, 왜 그렇게 분노하는지? 그것은 모세가 등장했기 때문에 그래요. 모세가 등장했으면 한 거지 왜 화를 내는가?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왔기 때문에 그래요. 모세는 자기 마음대로 못 하고 지팡이가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데, 그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를 지시하고 인도하는 하나님의 실존을 지팡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낸 거예요.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나요. 만나서 하는 말이 “히브리인들을 내보내라”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때부터 점잖은 바로 왕은 성질이 나게 되었습니다. 국가 발전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력 제공의 일부를 히브리인들이 담당했잖아요. 이것은 공장에서 기계 빼라는 거랑 똑같은 소리예요. 일하는 원동력인 노예를 빼라고 하니까 화가 나서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에게 일감을 더 줘라. 짚 없이 벽돌을 만들라고 해라.” 그렇게 했습니다. 화가 단단히 났어요.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릴 것이다.” 바로 왕은 “재앙 내려라, 내려!” 그게 열 가지 재앙이었는데 출애굽기 8장 31-3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사 파리를 바로와 그 신하와 그 백성에게서 몰수히 떠나게 하시니라 그러나 바로가 이때에도 마음을 완강케 하여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파리는 fly, 날파리죠.
그런데 바로 왕이 또 성질이 나서 백성을 보내지 않았어요. 출애굽기 7장 22절도 그렇고요, 8장 19절, 9장 12절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열 가지 재앙이 끝난 지점에서 바로가 질린 거예요. 질려서 하는 말이 출애굽기 10장 27-28절에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들을 보내기를 즐겨 아니하고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이렇게도 화가 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바로 왕이 화가 난 것은 모세가 출현했기 때문이고, 모세가 출현한 이유는 배후에 하나님께서 지상에 찾아와서 일하기 때문에 그래요. 출애굽기 10장 29절에 “모세가 가로되 왕의 말씀이 옳으니이다 내가 다시는 왕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 얼굴 보지 맙시다.’ 이거에요. 얼굴을 보지 않으니까 그 다음부터 대화를 할 필요가 없어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협상? 협상 없어요. 이제 말할 필요도 없어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애굽에 모세를 보낸 이유인 차별화 때문에 그렇고요, 모든 인간이 성내는 이유, 평소에 화내는 이유, 심지어는 화나는 일이 생길까 봐서 불안한 마음까지도, 그 모든 원인은 바로 인간을 둘로 차별화시키기 때문에 생깁니다.
하나님 사람과 하나님 사람이 아닌 자를 하나님 쪽에서 구별해 내기 때문에 그 작업 때문에 발생된 것이 화냄이고 분노에요. 그래서 그 열 가지 재앙 가운데 여러 특징 중 하나가 출애굽기 8장 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으로 나옵니다.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네 번째 재앙부터 열 가지 재앙까지는 계속해서 히브리인들이 살고 있던 고센 땅과 애굽 사람들이 사는 땅과 차별화시켰던 겁니다. 이런 차별의 이유도 히브리인들도 모르고 바로 왕도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이 성내는 근원은 인간 수준에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 수준을 넘어선 최상위 수준에서 성낸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계시가 점점 더 확장되면서 알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바로, 하나님이 하는 일에 근원적으로 성내는 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사탄이었습니다. 스가랴 3장 1-5절에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시기로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어요. 사람이 천사 앞에 서 있단 말이죠. 그러면 이 구조가 뭐냐? 여호와 계시고 그쪽에 하나님의 천사 있고, 그 천사 쪽에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있고, 그 맞은편에, 같은 편이 아니고 차별되어서, 구별되어서, 공간이 나뉘어져서 그 맞은편에 누가 있느냐?
사탄이 거기 있어서 여호수아가 더럽다고 손가락질하고 있는 거예요. 사탄이 그렇게 하니까 하나님께서 “더러워? 맞아 더러워.”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사보고 “야! 여호수아의 그 옷 벗겨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라. 자, 이래도 더러워?” 옷을 바꿔 입히고 그렇게 된 여호수아가 깨끗하게 된 것은 누구의 조치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조치에요.
여호수아 본인의 조치가 아니고, 인간의 조치가 아니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조치란 말이죠. 하나님이 그런 조치를 하는 것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인간과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택하신 자, 죄 사함을 받는 인간과 이 땅을 통해 벌써 구별하기 위해 한 것이고, 그 구별에 의해서 그 구별을 모르는 바로 왕은 씩씩 성을 내고 있는 거예요.
“내 백성이고 내 소유인데, 노동력 기계인데 네가 뭔데 히브리인들을 빼라느니 마라느니, 뭐 데려간다 어쩐다, 하느냐?” 이 말입니다. 성낸다는 것은 책망 때문에 그래요. 스가랴 3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쪽을 선택했으면 내가 선택한 것인데 네가 이쪽이 더럽니 어떠니, 넌 그런 말을 잽이 못 된다. 내가 너를 책망한다.’ 이 책망 당함에 대한 분노는,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사탄의 마음이 들어와서 이유도 모르는 채 분노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뭔데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인생대로 되게끔 하지 않게 하십니까? 하나님 지가 뭔데? 나는 내 인생에 충실하고 내 인생을 바르게 사람답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하나님이 뭔데 내 일을 훼방 놓습니까? 교회 안 나갑니다. 난 하나님 안 믿을 거예요. 부활절이고 뭐고 난 몰라.”
주님은 말합니다. “난 너를 책망하노라.” “책망하든 말든 나는 나를 상실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붙들고 지옥 가도 나는 나를 내 것으로 간주하고 지옥 가겠습니다.” 이게 인간의 고집이 아니고 그 사람 속 마귀의 고집이에요, 마귀의 고집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스스로 상실해 버려요.
어떻게 상실하느냐?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이 대자연, 이 현실 자체를 자기 손으로 허물어 버리십니다. 하늘과 땅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릴 때…,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 만든 거거든요, 자기 의미를 줘서 만든 걸 스스로 뭉개버리죠. 그 하나님의 자기 상실에 동참하는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참, 이게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죠.
“교회 왜 못 나오십니까?” “내 일이 바빠서.” 상실이 안 되어 있어요. 상실이 안 되어 있다고요. 이 뜻을 실제로 현장에 보여준 사건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양쪽에 두 개의 십자가가 서로 대치되는 방향으로 서 있어서 세 개의 십자가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중에 구원받은 강도는요, 자기를 기꺼이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지옥 간 강도는 끝까지 자기 자신을 상실하지 못했어요. 자기 의를 자기가 버리지를 못했습니다. “예수여, 이 시간 나를 구원하면 그때 당신을 믿을게”(마 27:42).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지옥 가는 자들의 고백이 교회에 가득 차 있어요. ‘반듯하게 살고 말씀대로 다 살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다 믿고, 십자가 믿고 복음 믿고 피 믿고 삼위일체 믿고 다 믿을 테니까 제발 내 인생은 끝까지 내겁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내 인생은 내가 끝까지 쥐고 가겠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말씀, 율법의 요구에, 그 채무에 시달리는 신세가 됩니다. 최선을 다했잖아요. 맨날 교회에서 하는 게 그거예요.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요. “더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 현장에서! 금식까지 했죠, 부활절 지켰죠, 크리스마스 지키고요. 부활절, 맥추절, 크리스마스는 뭐냐? 돈 내라는 날 아닙니까! 목돈 내라는 거지요.
꼭 사채업자한테 시달리는 것 같아요. 내부적인 자기 의에 꽂혀서, 자기 의를 간수하는데 쫓기는 신세입니다. 바보 같아요, 바보. ‘이 정도로 완벽하고, 이 정도로 착하고, 이 정도로 자식 잘 키우고, 이 정도로 직장에 충실하고, 대외 관계 나쁘지 않으면 됐지 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여러분, 주가 주신 은혜를 못 갚으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대로 못 갚으면 감옥에 가야 돼요. 영원한 지옥에 가야 됩니다. 맨날 최선을 다했대요. 값을 치를 수 없으면요, 압류당하세요. 그러면 되잖아요. “네 장기 내가 가져간다.” “아, 가져가요, 가져가!” 하늘의 별도 다 무너지는 마당에 내가 나를 지탱할 이유가 없잖아요. 주님 앞에 채무자인데 주께서 가져가면 기꺼이 드려야죠.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천국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소개하는데 그 첫 대목이 이래요. “그때에 천국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천국은 네가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이미 이 땅에 왔어요. 이스라엘에 개입한 모세의 지팡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개입했어요.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처럼 천국이 이 땅에 개입할 때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는 열 처녀와 같다.’ 이렇게 시작해요.
천국을 설명할 때 열 처녀로 설명하는 이유가, 세 가지 때문이에요. 첫 번째는 밤이에요. 신랑이 밤에 와요. 밤의 특징은 뭐냐? 자신의 인품이나 인격 같은 건 어두워서 일체 고려 대상이 못 된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착실하게 자식 잘 키우고 이 나이까지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런 것은 어둠의 세계에서, 밤의 세계에서 일체 안쳐줍니다. 밤에 필요한 것은 등불밖에 없어요, 깜깜하니까. 신랑이 올 때 등불 보고 파악하는 거예요.
첫 번째는 밤, 두 번째 요소가 기름만 들고 만나요. 딴 거 필요 없어요. 기름이에요. 어둡다는 것을 표시하는 기름 말입니다. ‘내가 태어난 출생지 자체가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저주 세계 속에 태어났습니다.’ 그걸 고백하는 기름 말이에요, 그 기름. 세 번째가, 신랑을 만나는 이유가 내 몸을 남편에게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인생 상담, 자기 문제 해결하라고 남편 만나는 게 아니고, 아예 이참에 내 모든 것을 남편에게 줘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남편의 숫자와 신부의 숫자가 1 대 다수예요. 남편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 대 1로 독점하는 게 아니고, 하나 앞에 여럿이 다 낙화암의 궁녀들처럼…, 3 천명의 궁녀들? 나는 역사학자들 안 믿어요.
하여튼 풍덩풍덩 몸을 던지듯이, 압류당하기 위해서 그냥 줘버리는 거예요. 남편한테 신부로서 줘버리면 더 이상 나에게는 상실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내 것이 있을 때는 상실이 되는데 상실 자체가 안 된다고요. 그렇게 줘버리면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그동안 우리는 아담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에 저주받은 이 땅에서 악착같이 살기 위해 아담의 빨판을 갖고 있었어요.
그 빨판 가지고 흙에서 나오는 저주를 빨아 당기면서 그냥 살다가 나중에 흙으로 돌아가는 그 신세, 문어나 낙지의 그 빨판이 이제는 생명나무에 가 있어서 생명을 쭉쭉 빨아먹고 사는 거예요. 왜? 한 몸이니까.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특이성을 이야기해 줬습니다. 특이성을 심어놨어요.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과 상대해서 모든 일을 끝낸다는 것, 이게 특이성이에요. 뭐가 특이성인가? 인간은 빠져요. 인간은 빠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과 함께 다닙니다. 이스라엘 속에 있으면서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 사이에서 처리하는 그 특이성, 그 특이성이 동원되는데 그 특이성의 이유가 뭐냐?
선악과나무가 훼손되었잖아요. 선악과의 가치가 상실되었다고요. 생명나무는 선악과와 함께 있을 때 온전함이 되고 완료함이 되기 때문에, 생명나무에서 나오는 피가 선악과의 ‘정녕 죽으리라’의 그 가치를 온전하게 성취를 시켜요. 생명나무 대신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선악과의 훼손으로 인하여 발생된 그 ‘정녕 죽으리라’의 진짜 취지를, 곧 십자가에서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자기의 생명을 버림으로써, 선악과가 지니고 있는 죽음의 수준이 인간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거예요.
오늘 예배 전에 양 장로님에게 어떤 문자가 왔어요. 문자 보낸 그 사람은 교회도 안 나오는 사람인데 자칭 교양이 있고 양식 있고 배운 사람이에요. “오늘은 세상적으로 기쁜 한식의 날. 조상의 무덤을 기리는 날.” 그리고 장로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은 기독교의 부활절, 교회나 세상이나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그것을 기념하는 날, 그 의미를 높이는 날”이라고 아부성 메시지를 보냈어요. 뭐 할 말이 있습니까? 왜 말을 하죠?
이게 기존 교회와 똑같아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거예요. 성경에 그런 게 없습니다. 인간은 죽을 줄도 모르고,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어요. 유일하게 예수님이 죽음을 알고요,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졌으니까.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하시면 거기에 부활 필드 field가 생겨요. 부활 장(場)이 되는 거예요. 물리학적으로 전기장이 생기듯이 필드가 생기면 그 부활 장에서 성령이 나와서 그 성령을 받은 자만이 십자가에 영원히 안착하게 됩니다.
‘부활에서 십자가’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십자가 안에 영원히 들어와 있다는 거예요. 이걸 요한계시록으로 설명하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보좌 안에 영원히 있다(계 22:1-3)는 거예요. 따라서 ‘부활이 먼저고 십자가가 나중’이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만! 죽고 난 뒤에 부활되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국한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피를 보내요. 생명나무에서 피를 짜내요. 피를 짜내서 선악과 따먹은 현장을 찾아간다고요. 그게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나오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께로 가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아버지 계신 곳에 계셨던 분이 먼저 끈을 들고 이 생명이 없고 진리가 없고 길이 없는 이곳에, 선악과를 따먹은 저주만 있는 이 어둠의 세계에 끈을 들고 레펠 타듯이 이 땅에 오셨어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너희들의 하나님은 마귀가 심어준 거짓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무슨 말을 더 할 필요가 있어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진리가 너희 속에 없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없으니까 이 세상에는 어둡고 거짓된 것만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도 차별화가 되죠?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상실하러 오신 예수님의 상실 안에서, 그 진리 안에서 진리에 압류당한 사람, 내가 뭘 잃어버린 게 아니고 잃어버림이 나를 덮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느끼는 거예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니까요. 내가 자유를 원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자유를 원하니까 주님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잃을 것이 없는, 바로 그 진리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만끽하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편한 생활이고, 얼마나 복이고, 얼마나 감사한지!
누가복음 2장 29절에서 시므온이 우리보다 먼저 고백한 것에 대해서 저는 굉장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이에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아기 예수를 안고 이런 말을 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여기서 ‘평안……히’, ‘안’의 뒤를 길게 좀 빼세요,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곧 ‘더 이상 내가 해결할 문제, 대상이 없군요.’ 훌륭한 나? 아니죠. 행복한 나? 아니죠. 더 이상 나라고 나에게 질문할 대상 자체가 없어진 나, 질문을 해도 주님이 하고, 말을 해도 주님께서 말을 하는 그런 나. 더 이상 압류당한 상태에서 내 계획은 없어요, 주님의 계획만 남아 있는 나.
책망은 사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탄과 그 똘마니들에게 집중되어 있어요. 생명나무에서 피가 내려오는데, 그 피가 십자가에서 선악으로 저주받은 세상에 왔다가 그 피의 효과가 새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계약이 끝났어요, 완료가 됐어요. 다 이루었습니다. 그 피는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피의 내부 순환구조입니다. 우리는 그 피의 내부 순환구조에 걸려들었어요.
오늘 아침에 운동하는데요, 얼마 전에 비가 왔잖아요. 비가 오면 거리 청소부의 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워져요. 왜냐하면 배수구가 낙엽으로 막혀서 물이 넘쳐버리면 책임이 전부 청소부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비가 오면 배수구의 오물을 옆으로 다 걷어내요.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뭐냐? 피가 주께로 돌아가는 피의 배수구에요.
피가 주께로 돌아가는 피의 배수구인데 우리는 늘 막혀 있잖아요. 막혀 있으니까 우리 속에 무엇이 피를 막고 있는 그것을 상실시키면서 다 끄집어내서 옆에 무더기로 모아둬요. 모아두는 그 내용이 뭐냐? 마태복음 4장에, 그동안 악마가 자기 똘마니들을 자기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늘 유혹을 해온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돈 문제, 경제문제에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는 요행 문제입니다. 행운 문제, 나 행복하게 해달라는 요행 문제. 세 번째가 뭐냐? 먹고 마시는 그것으로는 사람들이 성이 안 차지요? 세상 부귀영화. 그것으로 혈관이 막히면 안 되잖아요. 피가 막히면 안 됩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배수구 뚫어내느라 맨날 우리의 남은 인생을 통해서 배설물이 나옵니다.
인기 있는 것, 남한테 인정받는 것도 상실되어야 하고, ‘이것은 내 돈이다’라는 그것도 상실되어야 하고, 우리 자식 잘 키워서 의사 되고 판사 되었다는 것, 요새 판사도 시시하지만, 자식 출세하고 대기업 회장이 되는 그런 것도 다 파내서 옆으로 제껴놓고 “이게 바로 더러운 거야.”
이게 바로 그동안 피라는 것을 막아 놓았던 오물들이고, 이 오물들이 우리를 매일 같이 잠복적인 분노와 화를 돋우게 했어요. 우리 안에 이런 더러움이 가득 찬 것은 모르고, 하나님 앞에 삿대질하기 바빠요. ‘교회 나오라 해서 교회 나왔어. 헌금하라 해서 헌금했어. 기도하라 해서 기도도 했어. 하나님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 있나? 내 인생 조져놨어.’ 희망도 없어요. 절망이에요. 대책 내놓으라는 거예요. 호르무즈 해협마저 닫혀서 기름값까지 오르고 있어요. 고마우신 대통령께서 십만 원씩 준다니 그것은 감사하다만.
주님께서 피의 순환구조를 통해서 그 여파로 천국과 지옥이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가 뭐냐? 지옥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 피까지 상실한 그 비용 처리가 지옥이에요. 주께서는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합니다. 꼭 트럼프 같아요. 전쟁 비용 아랍 국가들한테 다 물린다는 거잖아요.
아들의 피를 낸 그 생명, 그 값을 어디서 찾는가? 지옥의 저주 불로 다 찾아내요, 지옥의 저주 불로. 그 내용이 마태복음 10장에 한가득 들어 있는데요, 우선 10장 17-20절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흩어진 열두 지파, 옛날 이스라엘과 같은 구조가 유지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당했던 수난을 똑같이 당해요.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 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러고 난 뒤에 하시는 말씀이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계산 잘해라, 그 말이지요, 계산 잘해라. 주께서 자기 십자가 비용을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물어내게 만든다는 그 말이지요, 저주로써. 피가 내부순환구조로 이 땅을 다녀갔으니까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6-38). “값 물어내. 내가 죽은 그 값 물어내. 내 아들 죽인 그 값 물어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아무 준비성 없이 일하지 않거든요.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그래서 6절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가면서 이삭이 입 다물고 조용히 가면 되는데 이렇게 물어요.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 22:7).
가슴 아픈 질문을 해요. 쉽게 말해서 이삭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일을 할 때 아무 준비성이 없이 일하십니까?” “지옥 갈 네가 있잖아. 내가 왜 준비를 안 했겠어? 지옥 갈 네가 있어.” 그것 때문에 알려주지 않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피 흘린 거예요.
이 세상에 복음은 피밖에 없어요. 피의 내부순환구조, 그게 피입니다. 새사람 아담의 몸에 속하지 않고 이제 그리스도 몸에 속한 사람은 피가 들어 있는, 피에서 흐르는 그 생명을 빨판으로 빨면서 살아가요. 시므온은 그게 만족스러워요. 그게 특이성이에요. 사람의 능력을 초과하는 능력이에요. 시므온 같은 사람은 그래요. 왜? 성령 받았으니까.
여러분도 성령 받았습니까? 여러분이 성령 받았으면 여러분이 가져야 할 평소의 마음 자세나 고백을 시편 131편을 통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쉽게 말하면 주께서 힘쓰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마음이 어떠냐 하는 그 말입니다.
내 심령은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나는 그냥 아이가 아니고, 착한 아이가 아니고 엄마의 푸근한 품 안에 있는 아이, 모든 것을 차압당하고 압류당한 아이, 생명이 끊임없이 무한대로 나오는 그 품의 아이,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이게 이스라엘입니다. 다른 이스라엘은 주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평생동안 강도질하고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렸던 그 강도는 주께서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나와 함께’, 함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차이를 만드십니다. 이 땅의 혼돈에서 벗어나서 완료된 질서, 바로 최고 등급의 마지막 질서를 위해서 이 땅에 극심한 차별을 만드는데 그 차별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맏이라는 열매입니다. 출애굽기 11장 5-7절에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숨을 곳이 없다는 말이거든요. “저는 미천한 자입니다. 저는 제끼세요.” 그런 것 없어요.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으리니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또 출애굽기 12장 29-30절에,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여기 보면 옥에 갇힌 죄수들의 맏이까지, 죄수는 교도소에 갇혀 있는데 집에 있는 맏이까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다 죽이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지옥을 잃어버리고 대신 천국을 얻은 자가 성도입니다. “이 세상이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빨리 떠날 생각 해야지! 하늘의 별? 그거 다 무너져. 그것은 하나님, 나의 상실이야. 같이 상실해.”
그걸 경상도 말로 하면 뭐라고요? 널짜뿐다. 같은 경상도 사람이 생각해도 아주 우스워요. 널짜뿐다. ‘떨어뜨리다’라는 말이지요. 널짜뿐다. 하나님은 경상도 분은 아니지만 ‘널짜뿐다’ 해주시는 것이 은혜고 복이에요. 자꾸 상실될 것이 남아 있지 않아요. 그러면 여러분이 이럴 거예요. “목사님, 그러면 저보고 뭐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일단, 값은 못 치러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값없이 먹으라(계 21:6, 21:17) 했어요. 값없는 생명수에요. 우리가 값을 치를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귀가 시기하는데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런 말을 합니다. 계속 우리를…, 우리가 바리새인을 이해하세요. 그리고 사도바울 되기 전의 사울을 이해하고요. 마귀를 이해해야 해요. 그들에게 자기 의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성도가 자기하고 차별되거든요.
로마서 8장 33-34절에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의 피를 보호하는 거예요. 피가 있는 자를 누가, 피로 거룩하게 된 자를 누가 송사하겠어요? 누가 고소하겠습니까? “쟤는 왜 나하고 다른데요?” 에서가 야곱을 시기해서 죽이려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창 27:41).
‘나는 저주받는데 너는 뭔데 복을 받는가?’ 복을 받을 이유는 없어요. 그냥 복 받았어요. 자기는 그냥 저주에요. 이게 뭐냐? 피 값이 어느 정도로 효과 있고 어떤 혜택이 주어지고, 어떤 저주가 주어지는가를 피 자체에서 나오는…, 피가 생명이니까 생명 자체에서 나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들은 거기에 동원된 것뿐입니다.
그게 세상이에요. 우리는 얻어걸린 거예요, 공짜로, 긍휼을. 그런데 살아가면서 마귀가 계속해서 돈 문제, 종교 문제, 권력 문제, 부귀영화 가지고 우리로 시달리게 만드는 거예요. ‘통장에 얼마 있는데?’ 계속해서 우리 내부에서 ‘통장에 돈 이것밖에 없는데?’ 하나님한테 삿대질하면서 ‘내 인생 왜 이렇게 망가뜨렸습니까? 나 어떻게 살라고? 더는 이런 식으로 나 못삽니다. 나 이제 하나님과 바이바이 할거야.’ 이런 식으로요.
여러분, 노아 홍수 때 다 물에 잠긴 것 아시지요. 왜 물에 다 잠겼겠습니까? 물에 잠길 만해서 다 잠긴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모두가 저주 속에서 이미 태어났어요. 출발을 거기서부터 해야 됩니다. 이제 우리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늘 우는소리 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늘 우는 소리.
외부적으로는 우는소리를 하시고요, 내부적으로는 그 절망을 즐기세요. 그 절망을 즐기면 돼요. 허세 떨면서 까불지 마시고요. “우리 집에 돈 많다. 우리 아버지 돈 많아.” 이런 식으로 까불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돈 빌려주는 것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까불지 말고요, 늘 우는 소리를 해요.
우리 애는 공부도 못하고, 돈도 지질이도 없고, 몸은 어디 안 아픈 데가 없고, 종합병원이고…, 라는 말을 즐겁게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세요. 이런 말이 주저 없이 나올 수 있는 것, 절망을 즐길 수 있는 자유, 주님 주신 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은혜, 혜택, 도대체 말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 주셨는데 이제 우리는 말을 끄집어낼 때마다 늘 우는소리 하면서 주님 거저 주신 긍휼을 찬미하는 말을 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