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속지 말라

아빠와 함께 2026. 3. 29. 18:08

속지 말라

2026년 3월 29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1:16-18

(1: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들은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하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산꼭대기에 제단을 쌓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만 주어진다는 그 은사가 확정된 채로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과연 사람들은 알아 볼 수 있을까요?

땅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과연 하늘의 것이 땅에서 일관성이 유지될까요? 하나님의 일이 지상에서도 성사되는 이유는, ‘있음’을 ‘없음’으로 전환시키고 ‘살았음’을 ‘죽었음’으로 바꾸어서 일을 개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을 일을 하시면서 개시점과 끝점을 형성하셨습니다.

시작점도 끝점도 하나님께서 달성하십니다. 이러한 일의 특수성이 구약 이스라엘 민족의 구조를 통해서 실시되었습니다. ‘말씀으로 만들어 진 첫 열매’는 출애굽기 4:22-23에 벌써 나옵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생각해두신 천국의 백성은 ‘아들’로서 호명받게 되는데 그 본질은 ‘언약 말씀 수용체’로서의 역할을 하는 집합체입니다. 이는 이미 세상 모든 민족이 악마 지시의 수용체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신 조치입니다. 악마는 이 땅의 세계에서 ‘속이는 영’입니다.

열왕기상 22:21-22에 보면,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미 사단은 모든 인간들의 마음 속에 각자 거짓말을 집어놓고 그 거짓을 기반으로 해서 생을 살도록 조치해 놓았습니다. 인간들의 반석은 악마가 깔아놓은 단단한 바위입니다. 그 바위에서 나오는 주장은 이러합니다. “나는 평소에 누구로부터 속임을 받거나 속이지 않는다. 나는 그저 내 뜻대로 나의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속지 말라”는 말은 평소에 우리 자신이 어떤 원칙으로 사느냐를 묻는 말이 됩니다. 인간들은 마귀가 집어진 마귀의 마음에 따라 자칭 예언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철학, 과학, 신학, 예술 등 모든 학문에 걸쳐 거짓의 영이 그 사람을 예언자로 행세하게 만듭니다.
자꾸만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미리 예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5:15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뒤바꿔지게 됩니다. “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사람들은 살인강도 바라바를 살려줌으로서 예수님을 이 땅의 세계에서 없애버리고 지워버리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세상 분위기에서 누가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4:28-31에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광경이 나옵니다. 부럽습니까?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보다 과연 우리다 더 부러워할까요? 베드로 본인부터도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편에 서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작 포인트와 끝 포인트에서 형성된 경로는 오로지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인간들이 악마로부터 들었고 듣고 있는 모든 거짓을 다 온 몸에 담게 되는 경로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제자들이 끝 포인트를 넘어서서 천국의 영인 성령 안에 있을 때에 비로소 인간들이 태어나는 몸담고 살았던 이 세상 전부가 거짓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들은 뒤늦게 맞이하는 마지막 포인트에서 기절하게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눅 21:26) 그동안 사람들이 얼마나 속아왔으면 기절할 지경입니까?

더는 악마에게 속지 않는 장자들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말씀, 곧 하나님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은 결국 다 소멸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여서 아버지와의 언약 관계가 끊어졌고, 아벨은 형에게 맞아 죽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개시점은 계속 살아 있습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4-25) 이 멈출 수가 없는 하나님의 일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게 하시는 ’원칙을 적용하십니다.

천국에 입성되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첫열매 뭉치입니다. 이 첫 열매는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실현되는 과정에서 새로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상속분이요 기업(基業)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율법 구조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상속분에 누락이 된 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상속이 여전히 주어지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그 예가 민수기 27:4-7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품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비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얻게 하되 그 아비의 기업으로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하나님의 율법(언약)대로 경로가 만들어지고 그 경로가 마감이 되면, 비로소 성도가 생겨납니다. 이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힘에 의해서 생겨난 자들입니다. 따라서 ‘속지 말라’의 반대말은 ‘안 속는다’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합니다’가 됩니다. 성도는 자기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세상 주장에 속고 있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낸 자가 됩니다.(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 안에 나오는 그 악마의 수용체가 언약의 완성된 결과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강-야고보서 1장 16-18절(속지 말라) 260329-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16-18절입니다.

야고보서 1:16-18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진리의 말씀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서 받아주지 않는 존재, 곧 인간으로 간주하지를 않습니다. 천국에 가려면 그냥 우리가 열심을 당긴다고 되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하고, 우리가 말씀을 낳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낳아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는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조건을 아주 단단히 붙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첫 열매가 된다, 아들이 된다’라는 그것은 이미 출애굽기 4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언급한 게 있습니다. 4장 22-23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출현은, 기존의 모든 인간의 육과 족보로 연결되어 있는 이 세상의 가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죽이고자 한다는 겁니다. “인간도 아닌데 죽는 것을 사사로이 여기지 말라. 내가 원하는 인간은 따로 있다.” 그쪽이 바로 이스라엘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구약의 구도 내에 등장함으로써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과의 싸움을 붙여 놓고,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의 생각하는 그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이라는 개념 자체를 구약 전체가 분명하게 갈라놓고 있어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고, 자기가 하나님께 가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는 거죠. ‘아버지’하고 ‘하나님’하고는 방향이 완전히 반대 방향이죠. 교회라는 게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는 자로 하여금 그쪽은 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여야 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하나님 쪽이 아니라, 예수님이 아버지 쪽으로 간 그쪽으로 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 야고보서 1장 16절에 나오는, “속지 말라.” 너희들은 깊숙하게 속고 있었던 겁니다. 심지어 종교도 마귀가 만들었다는 것, 교회도 마귀가 만든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상상을 못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마귀의 주장이었습니다.

막상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마가복음 15장 15절에 보면, 어떤 놀라운 변경이 생겨요.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죽일 자를 죽이는 게 아니고 죽일 자는 살리고, 죽이지 말아야 할 분은 죽이고.

그게 우리가 태어난 세상의 기본입니다. 그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의미의 망 자체가 전부다 속임수였던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이 위에 있다고 생각하고 위로 올라가지만, 주님은 반대로 위에 계신 분이 땅 아래로 내려왔어요. 인간들은 위쪽을 향해 가지만 주님은 아래에 천국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위에 있는 천국을 상상해서 참 살기 좋을 거라는 기대감에서 찾고 기도하고 하지만, 막상 땅에 온 천국에 대해서는 전부다 겁을 집어먹고 안 가려고 합니다. 주님은 추락했어요. 그런데 인간은 상승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는 속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속지 말라고 하는 것은 흩어진 열두 지파, 야고보서 1장 1절에 나오는 흩어진 열두 지파가 기본 틀을 만들었을 때, 이스라엘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독특성과 특수성이 이스라엘 주변의 똑같은 인간들이 있는 이방 민족과 어떻게 대립되고 대조가 되는가를, 네가 현재 눈으로 보고 있는 이 공간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시 한번 보라는 거예요.

여러분, 주기도문 아시잖아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 있으니까 그쪽으로 찾아오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늘에 있는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한다면, 그 말을 제자들이 알아들었으면 그때부터는 땅을 봤어야죠. 땅에 개입된 하나님의 나라를 봐야죠. 땅에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땅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그 하나님의 일을 주목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열두 제자들도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상과 철학에 휩싸여서 죽여야 할 자는 살리고, 존경해야 하고 존중해야 할 예수님은 죽여버리고, 그러니까 우리가 속해있는 세상 자체가 거꾸로 된 세상입니다. 반대로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봐야 해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빌립보서 2장 6-9절에 보면 방향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주님은 십자가 지기까지 긴 그림자 같은 방향성을 끌고 내려와요. 마치 공수부대 요원들이 헬기에서 레펠타고 내려오듯이요. 헬리콥터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땅에 내려왔다는 이것만 보지 마시고, 위에 있던 공수부대가 땅에 내려오면서 등짝에 뭘 끌고 왔는가? 구조 끈을 끌고 온 거예요. 우리는 그 구조 끈을 따라 구원이 되는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하나님께서 위치를 바꾸는데 빌립보서 2장 6절부터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어디까지 낮추시는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게 해 놓고 9절에 계속 보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지극히 높혀’, 높였다. ‘낮추시고 높여서’, 하늘에 계신 분이 낮아졌고 그 낮아지신 분만을 높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걸 사람의 아들이라고 보는 거예요. 인자, 사람의 아들, 제대로 된 사람의 모형, 원판.

따라서 예수님이 끌고 온 레펠의 그 긴 줄이 있잖아요? 그 줄을 놓치면 안 되겠죠. 주님께서 위에 계시다가 아래로 내려왔다는 것은, 그 절차 안에 이스라엘 역사가 들어있고요, 이스라엘 역사는 이거에요. 스타팅 포인트 starting point에서 엔딩 포인트 ending point까지, 시작점에서 끝점까지의 경로를 이스라엘 구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시작점에서는 모든 인간은 속고 있어요. 끝점에서는 비로소 속지 않는 인간이 탄생합니다. 하나님의 장자,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의 열매고요. 속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식사기도예요. 식사기도는 뭐냐? 모든 것이 만료된 상태에서 하는 기도가 식사 기도입니다. “하나님, 오늘도 주의 기도처럼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식사 기도를 편하게 한다는 것은 ‘이게 마지막 기도라 할지라도 저는 상관없어요’라는 뜻이에요. ‘안 주셔도 되는데 양식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엔딩 포인트, 끝부분에 형성된 그 공간에 우리가 놓여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죠.

강이 있는데 죽음의 강이라고도 하고, 그냥 보통의 강이라고 합시다. ‘강을 건너기 전에 저 다리가 떠내려가면 어떡하지, 다리가 무너지면 어떡해?’ 또는 ‘다리를 건너다가 유혹을 받아서 내가 뒤돌아 가면 어떡하지?’ 하지만 일단 다리를 다 건너고 난 뒤에 내가 어떤 유혹을 받았고, 어떤 식으로 걱정과 근심을 사서 했는지 돌아보는 차원에서 하는 기도, 그 기도가 식사기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에게 음식을 주십니까?’ 가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죽음이라는 강조차도 건너게 하고 난 뒤에 식사 기도를 하게 하십니까?’ 즉 ‘주기도문의 완료성을 제 안에서 발현되게 하십니까?’ 아, 식사 기도 안 하려고 버티는 제 가족이 있어요. 이게 만료된 상태에서 느긋하게 하는 기도인데요.

우리 외손자한테 물었어요. “넌 학교 가서 식사 기도 하느냐?” 안 하는데 다른 아이들이 놀릴까봐 안 한다는 거예요. 단서가 붙어요. 그런데, 그러나 마음속으로 기도한다는 거예요. 이게 꼼수 같기도 하고, 요령 같기도 하고요, 속아 넘어가는 이 세상에 대해서 눈치 보며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고요.

이 세상 모든 것이, 그 자체가 바라바를 살려야 된다는 사실이고, 바라바를 살려야 될 이유는, 예수님을 우리 눈에서 삭제시키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살인강도를 살림으로써, 예수가 하는 모든 것을 일거에 삭제 delete, 컴퓨터에서 문서를 지우듯이 한꺼번에 삭제시켜서 없애버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 속지 말라고 하는 사도 야고보의 이야기는, ‘지금 네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너의 반석은 무엇이냐?’를 이야기해 보라는 거예요. “너 어떻게 살지?” 질문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너의 반석은 뭐야? 평소에 너는 어딜 딛고 살아가느냐? 네가 딛는 든든한 바위, 어딜 딛고 살아가느냐? 어떤 원칙이 너에게 박혀 있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뽀빠이 만화에 보면 뽀빠이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그저 나다. 나는 비범하지 않다. 다만 나는 다를 뿐이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산다. 그리고 종국에는 죽는다.” 거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속지 말라!” 그러면 뽀빠이 같은 인간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난 내 뜻대로 하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난 남의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그 이유가, 아예 남의 말을 안 듣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 속을 일이 없죠, 인간은. 인간은 평생 누구한테 속고 사는 적이 없어요. 야고보 사도의 말은 새삼스러워요. “속지 말라” 하면, “보이스 피싱 전화가 오지도 않는데 뭘 속아? 나는 나대로 살아. 각자 남하고 달리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야. 나는 지금까지 내 뜻대로 살지 않은 적이 없어. 그러니까 속지 말라고 하는 것은 나에게 해당 사항이 없어. 나는 속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고 그냥 내 식으로 살아왔어.” 인간은 이런 식으로 대꾸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 “속지 말라”가 상당히 인간들에게는 낯설어요. ‘속은 적도 없는데 새삼스럽게 속지 말라고 하느냐?’ 이 구도가 이방 민족의 구도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에서의 ‘속지 말라’는 아주 특이합니다. 이스라엘에서 ‘속지 말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하나님의 언약을, 약속을 주고 난 뒤에 이방 민족들이 그 약속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애쓸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너를 장악하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언약 구도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 그 바깥으로 나가는 그런 속임으로 들어가는 짓은 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이스라엘 구도, 공간이라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이스라엘 구도가 뭐냐? 아까 이야기했듯이 스타팅 포인트에서 엔딩 포인트, 시작점과 끝점 사이의 경로를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민족을 통해 보여줬단 말이죠. 그 경로를 보여줄 때 구원의 끈은 언약이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레펠링해서 오면서 뒤에 가져오는 끈, 높은 자인데 낮아지는 끈, 높은 자인데 낮아져 오신 분이 주위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고 이야기해요.

주위 사람들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누구한테 속은 적이 없는 사람인데 왜 새삼스럽게 속지 말라고 하느냐?” 속은 적이 없는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주님의 말씀은 이미 몽땅 다 속고 있다는 걸 전제로 주신 겁니다.

요한복음 9장 39-41절에 보면 심판에 대해 언급하기를 이렇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우리가 소경인가?’ 이 말을 바리새인들이 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 집에도 거울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거울에 비춰봐서 소경이 아닌 거예요. 왜냐하면 진짜 소경이면 거울에 비춰봐야 소용이 없어요. 그냥 보나 비춰보나 못 보기는 마찬가지니까.

거울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고 또 다짐하고, 또 확인하고 매일같이 하는 것이 ‘내가 남한테 혹시 속아 넘어가는 게 아닌가?’에 신경 바짝 쓰면서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받으면서 계속 확인하며 내린 결론이, 나는 소경이 아니라는 거예요. ‘나는 소경이 아니다. 세상을 똑바로 보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네가 심판받는 거야.” 속지 말라고 했을 때 “아이고 속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속지 말라고 하니까 “저는 속은 적이 없어요.” 이러는 거예요. 이게 스타팅 포인트와 엔딩 포인트가 달라서 그래요. 이미 속음의 세상인 그 강을 건너고 난 뒤에 주님의 인식과 안목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속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똑같은 발언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도 아주 기쁘고 즐겁게 해요. “주여, 내가 평생 살아온 것이, 속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마귀한테, 이 세상한테 속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사는 데가 어디냐면 교도소에요. 교도소는 자기 잘못은 모르고 세상을 원망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의 집합체에요. 주님은 이 세상 전체를 형무소로 봅니다. 형무소장이 누구냐 하면, 마귀예요. 그 마귀가 인간에게 취미 생활하라고, 문화생활 하라고 준 게 종교 생활, 신앙생활입니다. 마귀가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This is church, 이게 교회입니다. 교회 들어오시면 여기서 예배드립니다. 목사님 여기 계시죠. 말씀 잘 들어야 해요. 순종해야 되고요. 물론 사모님도 잘 챙겨 줘야 하고요. 그리고 세례받아야 합니다. 성경 공부도 하세요. 기도는 이렇게 하고, 회개는 이렇게 하고…, 잘못하면 반성해야 하고 고해 성사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 가는 사람이 “그러면 저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뭘 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떡을 주십니다.” ‘아이고, 떡 가지고는 성에 안 차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큰 인물 될 것이고,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자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기독교로 완전히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귀가 만든 자기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 놀이문화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오셔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십자가를 지셨단 말은 뭐냐? 그동안 마귀가 인간을 속일 대로 속인 그 모든 속임수를 자기 몸에 다 담아버린 사건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이미 강을 건너고 난 뒤에…, 이미 강을 건넜어요. 성도는 죽음의 강을 이미 넘었어요.

님아, 그 강을 넘지 말라고요? 아니요! 이미 그 강을 건넜어요. 건너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껍데기인 이 육신, 육신과 육신에서 야기되고 있는 그 욕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신의 긴 그림자가 어떤 속임수의 수모를 당하고 있는지를 느긋한 마음으로 뒤돌아보는 삶, 그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삶이에요.

그것은 종교도 아니고, 교회 생활도 아니고 신앙생활도 아니에요. 그냥 예수님의 삶이에요. 내가 하는 신앙생활, 내가 하는 기도 생활이 아니고 주께서 일하시는 현장이에요. 우리는 거기에 참여된 상태고요. 왜? 우리는 죽은 자니까요. 죽어 있는 우리에게 우리 안에서, 살아있는 주님께서 주님의 자기 활동을 죽어가는 우리 육신을 통해서, 늙어가고 있는 우리 육신을 통해서 지금 마음껏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까요? 요한1서 4장 1절에 보면…, 이미 강을 건넜어요. 엔딩 포인트에 있는 천국에 이미 도달했다고요. 제가 이렇게 하면 ‘천국 꼬라지 하고는! 이렇게 사는 게 천국입니까?’ 하는데 어차피 껍데기, 같은 쓰레기인데요. 하루하루 먹을 양식 있는 것만 해도 감사의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느긋하게 식사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이게 주께서 하시는 일인데 우리를 데리고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건너온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 사람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가, 주식값이 올랐다, 기름값 좀 내렸다, 뭐가 어떻고…, 전쟁 끝나면 삼성전자 주식을 사야 하니, 금을 사놔야 하니…, 이런 식으로 그 관심사가 온통 거기에 몰려있잖아요.

그런데 누가복음 21장 26절에 보면 특이한 단어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기절하리니’ 얼마나 낯설기에 기절할 지경입니까? 얼마나 평소에 마귀한테 속았으면 기절초풍할 일이 일어납니까?

‘아니었어, 아니었어!’ 평온한 세계, 사람들이 원하는 세계, TV 뉴스에 나오고, 유튜브에 나오는 모든 것이 십자가가 아닌 마귀 입에서 나온 속임수라는 사실을 마지막 때에 알고 속았음에 너무 충격받아서 어느 정도라고요? ‘기절!’ 기절해서 자빠지는 거예요. “아니었어, 아니었어!”

왜 그렇게 기절할 수밖에 없는가? 거짓 영들이 전부다 예언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열왕기상 22장 20-21절에 보면 미가야 선지자가 나타나는데, 그 미가야 선지자가 특별히 하늘나라의 회의에 참석했어요. 너무 영광된 거죠. 거기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누가 아합왕을 꾀어서 죽게 할꼬” 할 때 마귀가 “제가 꼬시겠습니다”하고 나섰다는 거예요. 미가야 선지자가 하늘나라 회의에서 그걸 본 거예요.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요. 마태복음 14장 28-31절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습니다. 질문 들어갑니다. 여러분, 베드로처럼 물 위를 한 번 걸은 것이 부럽습니까, 삼성 재벌이 부러워요? 우짜다가, 경상도 말로 우짜다가 물 위를 한 번 걸었다. 그래서 뭐? 그게 뭔데? 그게 돈 돼요? 물 위를 한 번 걷는 게 내 건강을 책임집니까?

물 위를 걷던 베드로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물 위를 걷는 놀라운 체험을 한 그 베드로가 속았어요. 어디서 속았어요? 십자가에서 속았어요, 십자가에서! 물 위까지도 걸었는데요. 자기 장모의 병이 나았는데요. 온갖 칭찬을 다 받았는데요. 물 위를 걸은 것 가지고 마귀의 그 단단한 속임수의 망을 뚫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살면서 이렇게 세상을 정돈해 주시면 참 편해요.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뉴스와 유튜브의 이야기와 AI의 모든 주장은 나름 예언자 역할을 합니다. 모든 과학 논문들, 박사학위 논문들, 과학사, 생물, 물리, 화학의 모든 것, 자연 과학, 경제분야에서 노벨상 받은 모든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이 땅에서 우리 자신들이 예언자라는 그 주장이에요.

“박사님!” “예!”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특히 이란 전쟁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이 자기 정규군을 이란 영토에 상륙시키겠습니까, 사우디아라비아가 참전하겠습니까, 후티 반군이 홍해 노선을 막겠습니까…?” 언론에 나오는 모든 질문은 예언자도 아닌 게 지금 예언자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거짓의 영이 그 속에 있어서 거짓을 내뱉고 있습니다. 왜? 그 안에는 십자가가 없으니까요.

“장이 좋지 않을 때 유산균 먹어야 합니까, 말아야 할까요?” 하여튼 아침에 나오는 TV 뉴스를 비롯해서 모든 내용이 건강에 관한 거예요. “관절질환은 어떻게 예방해야 합니까, 설탕을 먹어야 돼요, 말아야 돼요? 설탕이 우리 몸을 해코지하는 아토피 현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 모든 것, 이 모든 것에 홀딱 홀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 자신이 강을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엔딩 포인트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안 속아 넘어가려고 철저함에 철저함, 더욱더 철저함에 완벽에 완벽을 기울여서 뽀빠이가 하는 말처럼 “나는 그저 ‘나’가 되고 싶다. 나는 내가 원하는 내가 되고 싶다. 끝!” 그게 나의 반석이에요. 내가 원하는 나.

그러면 언약은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뭐냐? 속지 않는 유일한 민족 이스라엘 속에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주보 뒤에 보면 창세기 이야기가 나와요. 창세기 15장 이야기를 전제로 해서 제가 언급을 해놨는데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아브라함이 뭘 해요. 제물을 쪼갭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창 15:9-11).

이스라엘은요, 하나님의 장자예요. 반면에 기존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장자가 아니고 천국에서 안 받아주는 자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오늘 본문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작업에 나섰는데, 말씀 곧 언약이 주어지면 아들이 발생되는 겁니다. 아들은 어디서 발생되는가? 인간의 육을 쪼갤 때 그 틈 사이에서 아들이 나와요.

출애굽기 4장 24-26절에 보면요,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어요. 죽이려고 했는데 부인되는 십보라가 얼른 죽어가는 자기 남편에게 인공 호흡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 남편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아들에게, ‘아차, 내가 안 한 게 있지’ 하고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니까 죽어가는 아버지가 아들로 인하여 살았어요. 그 아들은 애초에 죽을 뻔한 적도 없었고요.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출 4:24-26).

모세 부부 사이에 아들이 있고 아들에게 어떤 언약적인 특이 현상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게 할례에요. 그래서 십보라가 하는 말이 “당신은 피 남편이다.” ‘피를 중개하지 않으면 나의 남편이라고 할 수 없는 사건이 방금 일어났다’ 이 말입니다. 쪼개져야 되는 거예요.

닭의 에너지가 달걀이에요. 그러니까 달걀이 나온다는 것은 닭에서 닭의 에너지가 뽑혀 나온 그 덩어리가 달걀이거든요. 언약의 에너지가 나오기 위해서는 쪼개져야 되는데, 그 쪼개지는 방법으로 주께서 쓰시는 게 뭐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시키고 난 뒤에 남자에게는 흙, 무기물이 되게 하고, 여자에게는 생명이라고 했어요.

왜 같은 부부인데 한쪽은 흙이고, 다른 한쪽은 왜 생명인가? 주님께서 저주를 보낼 때 스타팅 포인트와 엔딩 포인트, 시작점과 끝 지점을 악마로부터 시작합니다. 남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남자가 빠진 상태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싸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남자는 이래도 빠지고 저래도 빠지고, 남자가 낄 자리가 없어요. 남자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게 되고요. 저주를 내리시고, 그 저주의 흐름을 타서 그 저주의 흐름에 참여하신 분이 곧 생명이다, 이 말입니다. 저주를 따라서 오게 되면 그 저주 속에서 비로소 생명이 분수처럼 분출되도록 하는 전략대로 하나님께서 하심으로서, 저주 내리는 하나님도 합당하고, 저주는 저주대로 옴팍 합당하고 저주 안에서의 생명도 합당하고 정당한 행위로서 주께서 자기 백성을 저주 안에서 생산케 하는 작업에 나섰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렸는데 상위의 제물과 하위의 제물로 두 층으로 나눠서 상위에 있는 제물은 암컷이고, 아래쪽에 있는 제물은 수컷이 돼요. 창세기 15장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이것은 상위계층의 제물들이지요. 그리고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이렇게 수컷은 하위 제물로 취하면서 제물은 둘로 쪼갭니다.

저주 속에서 언약이 실현되면 거기서 생명이 나오게 하리라는 그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서 주님께서는 악마가 인간을 속였던 그 속임수와 저주를 온몸으로 다 본인이 받았어요. 본인이 저주를 온몸으로 다 받으니까, 마귀의 지시를 받는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가만있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핍박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님은 죽이는 겁니다. 세상이 거꾸로 돼도 완벽하게, 완벽하게 거꾸로 된 거예요. 예수님은 예언자의 성취에요. 제사장의 성취고 왕의 성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인간 세계에서 자체적으로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을 뽑아놨어요, 가짜가! 그걸 두고 미가야 선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천상 회의에 참여해서 다 봤는데…” 위쪽이죠, 엔딩 포인트, 위쪽에서 봤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탄이 자진해서 인간 마음속에 하나하나, 각자, 모든 인간 속에 거짓말하는 영을 다 심어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출생할 때부터 악마의 속임수를 받는 수용체가 장착되어 있어요. 인간 자체가 악마의 속임수의 수용체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마귀 나름대로 완전히 자신만만했죠. 왜? 모든 인간을 속였으니까. 마귀가 인간을 속였던 그 속임수, ‘떡으로 산다. 종교로 산다. 결국 인간의 영광은 눈에 보이는 세상 영광의 한계다.’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모든 인간을 속여 왔습니다.

“하나님 기도 열심히 할 테니까 기도 하면 뭐 주시렵니까?” 이거거든요. 벌써 인간의 마음속에 그게 속임수로 잠재되어 있기에 신앙적이고, 성경적이고, 교회적이고, 기독교적인 어떤 것을 해도 그걸 타고 악마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거예요.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주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그건 교회가 아니야. 내가 쪼갤 거야.” 인간을 쪼개서 인간 내부에 악마의 속임수가 있던 수용체를 죽이고,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영으로서 예수님이 스스로 희생되신 십자가 어린양 제물을 그 안에 박아 넣습니다. 박아 넣는 그 여정이 바로 긴긴 이스라엘 역사의 여정입니다. 그 이스라엘 역사의 여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거’예요.

예를 들면 지난 금요일 광주 강의에서 제가 언급했는데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에게는 자식이 없어요. 가인이 있었고 아벨도 있었는데, 아벨은 형한테 맞아 죽어서 없고, 가인은 아버지 어머니하고 관계가 끊어져서 없어졌어요. 그래서 창세기 4장 25-26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따라서 가인은 죽이는 자였어요. 그리고 아벨은 죽은 자예요. 죽이는 자는 아버지의 언약과 끊어졌기 때문에 없어진 자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벨의 그 죽음 대신에, 대신에 누구를 보내느냐? 다른 씨, 다른 씨앗을 보냈는데, 그 씨를 보낸 그때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가 지금 일을 벌이고 있다는 그 하나님을, 바로 언약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만, 교회에서 하나님을 찾지만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요. 그런데 아버지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어요, 인간치고. 전부 다 하나님께로 간다고 해요, 하나님께로. 제가 촌에서 10년 이상 설교하면서 세례 줄 때 문답하는데 그때 제일 답답한 게 그거예요. 연세 드신 할머니들이, 하나님은 잘 아는데 예수님이 누구냐고 하면 말을 못 해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왜 그러냐 하면, 마음속에서 자기하고 하나님만 있으면 되지 예수님조차도 걸 거치는 거예요. ‘아이고, 예수님도 고마운 분이지요.’ 이 정도로 해 놓고는 세례 달라는 거예요. 예수님은 고마운 분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 주인공이냐 하면, 자기가 살아있는 거예요.

여호와께서 일하는 장소가 어떤 장소였느냐? 일단 죽은 장소가 되어야 하고, 이미 관계가 끊어져 천국에는 존재할 수가 없는 그 빈자리부터 일을 시작해요. 따라서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온다는 말은, 죽은 우리를 살린다는 뜻이고, 없어진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뜻이에요.

주보에서 로마서 4장 언급을 그렇게 한 겁니다. 아브라함이 뭘 믿었느냐? 아브라함이 ‘원래 나 없습니다’를 믿었고 ‘나는 뭐냐? 나는 죽었습니다’를 아브라함이 믿은 겁니다. 죽은 자가 기도하겠어요? 없어진 자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겠습니까?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는 거예요. 이걸 공식화시킨다면 ‘죽은 자의 말은 하나님에게는 필요 없습니다.’

죽은 마당에 내 말은 필요가 없어요. “회개하나이다.” 주께서 “입 다물어. 죽은 놈이 무슨 회개를 해? 죽었는데 그냥 죽어 있으면 안 돼?” 우리가 죽어 있는 정도가 아니고 주님을 죽인 자예요. 우리는 가인이에요. 우리는 바라바예요.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걸 부끄럽게 여겨야 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성경적으로 맞는 것 같은데 우리 가운데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겠습니까?” 하는데 엔딩 포인트 ending point, 이미 끝난 상태에서 주께서 준비한 사람이 있어요. 로마서 10장 15절에 나오는데 그가 누구냐 하면, 보내심을 받은 자예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의 그 원천이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 보면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아주 대담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해요. 보통 우리가 “어디 출신입니까?” 그러면 “저는 광주 출신입니다” 하든지 “저는 서울 출신입니다” 하잖아요. “출신이 어딥니까?”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라고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은 자기의 주민등록을 깝니다. 그런데 나이가 있어요. ‘창세 전’입니다. 창세 전부터였어요. 사도바울의 끈이 굉장히 길어요. 자기의 육체적인 것은 모태로부터 출발해요. 스타팅 포인트 starting point죠. 그런데 자신의 최후, 천국 가 있는 나의 그 본질, 그 본질은 창세 전부터 시작했다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대담한 발언을 이렇게 함부로 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도 함부로 해야 해요.

주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시작점, starting point에서 끝점 ending point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신약에까지 달리면서 거기에 율법을 줍니다. 율법을 주면서 여자의 후손과 관련됐기 때문에 ‘없는 데서, 그리고 죽은 데서’의 역할을 누가 떠안느냐? 남자가 떠안는 게 아니고 여자가 떠안아요.

여자가 떠안는 그 내용이 민수기 27장 4절에서 11절에 나오는데 굉장히 길어요. 내가 민수기 27장 1절만 보겠습니다. “요셉의 아들 므낫세 가족에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나아왔으니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그들이 모세한테 왜 찾아왔느냐? 3-4절에 나옵니다.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스려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에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여기 기업(基業)이 나와요. 상속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아들을 만든다는 말은, 그것도 야고보서 오늘 본문에서 첫 열매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첫 열매를 상속분으로, 하나님의 자기 작품으로, 온전히 자기 언약의 작품으로 만든 첫 열매를 확장시키고 팽창시킬 때 그들이 새로운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기업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볼 때 구약의 구도, 여호와의 주신 기업과 상속분을 받을 때 천국 백성으로 인정된다는 그 구약의 구도를 그대로 가져와야 야고보서 1장 17-18절의 말씀이 이해되는 거예요. 이것이 뭐냐? 하나님의 개입이에요.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은 하늘에서 은사로 주고 그 은사의 결과, 에너지가 뭐냐, 열매가 뭐냐? 아들, 첫 열매를 맺는 거예요.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출 4:22, 약 1:18).

이스라엘 사람들도 인간인지라 남성 중심이었잖아요. 그래서 남성 중심으로 율법을 해석했는데 그 틈새를 깨고 여자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신약의 마지막 엔딩 포인트까지 가는 그 하나님의 상속분, 하나님의 친히 만드시는 작품을 우리 안에 장착해달라는 요청을 한 겁니다.

그만큼 여자 몫은 없었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죽었으니 그 딸들은 오빠 집에서 살아야 하니까 자기 고유의 것은 다 날아가 버렸죠. 그런데 내가 오빠 집에 얹혀살든 어떻게 살든 간에 하나님이 주신 상속분이 나로 ‘너는 내 장자’라고 인정하는 증거가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반석은 뭡니까? 뽀빠이처럼 살래요? 여러분은 무엇에 바탕을 두고 사는 겁니까? 하나님의 상속분이 있어야 돼요. 상속분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없는 자로 간주했을 때 상속분의 윤곽이 드러나요. 성도의 삶은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속임수라 하는 것을 강을 건넌 상태에서 파악하는 겁니다.

그렇게 파악된 상태에서 나도 속음으로 살았는데 속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을 때, 완료가 되었을 때, 완성되었을 때는 비로소 속지 않기 때문에 ‘그동안 속았다고, 속지 말라’고 언명(言明)할 수 있는 그 권리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구원받은 자는 비로소 예수님의 안목과 공유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인식과 관점을 공유해서 남은 세월을 살면서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마귀한테 속고 있다’라는 것을 보내심을 입은 자인 우리 입을 통해서 주의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들으면 듣고, 안 들으면 그만이고 뭐 그렇죠.

왜? 이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니까요. 미가야 선지자가 몇 명 전도했습니까? 무슨 전도를 해요, 그냥 외쳤을 뿐이죠. 미가야 선지자는 손해 볼 거 하나도 없어요. 거짓의 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면 그만이죠. ‘속지 말라’에서 ‘속았다’의 반대말이 ‘안 속았다’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얼굴들 보니 별로 감사한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의 반석은 ‘창세 전’입니다. 아까 본 갈라디아서 1장 15절의 말씀처럼 그 뿌리가 창세기 전부터 주께서 설계한 거예요. 그 설계한 대로 주께서 우리 안에서 일해서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남들에게 속지 마!” 이 말이에요. “유튜브에 속지 말고 세상에 속지 말고, 세상의 과학자들과 철학자와 신학자에게 속지 말고 목사에게 속지 말라.” 이 말이에요.

제가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매주 듣고 있는데 그 목사님의 설교가 오후 되면 늘 올라오거든요. 안 빠트리고 듣는 이유가, 그 목사님의 설교는 간단해요. 그분의 설교 하이라이트가 뭐냐 하면, 욕설입니다. 욕하는 이유가 뭐냐? 내가 복음을 안다, 내가 주의 사도다, 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내가 여러분들을 구원해 줄게, 라는 인간에 대해서…, 물론 그 목사님이 절제를 많이 해요.

어느 정도까지 욕설하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주님이 하신 그 정도까지만 욕을 해요. 많이 절제하죠. 개…, 그리고 뱀 새끼라든지, 독사 어쩌고 거기까지만 하는데 사실은 본인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더 하고 싶은데 꼭 안 빠뜨리는 게 있어요. “여러분, 제가 가짜인 걸 아시죠?” 설교를 수십 번 해도 본문과는 관계없어요, 어떤 본문이든 그게 하이라이트예요. 막 욕하고 싶어서 미쳐요. “지나 나나 다 가짜인데!”

그분의 결론은 뭐냐? “모든 일은 주님이 홀로 하십니다”에요. ‘이 본문에서 어떻게 연결해서 저렇게 나오나?’ 할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에요. 그 목사님의 설교가 차분히 죽 가는데 들으면서 나도 기다려져요. ‘이제는 욕할 때가 됐는데…’ 하게 되면 그 멘트가 똑같아요. “나 예수 믿는다는 작자들, 내가 주의 목사라는 작자들, 복음 안다는 작자들, 나는 이제 성경을 안다는 작자들….”

그걸 듣는 교인들이 지루하지도 않나 싶어요. 그런데 똑같은 걸 반복하면서도 기쁘게 그 이야기를 한다는 거예요. “나도 포함됩니다, 나도!” 하면서 아주 기쁘게 자신을 포함한다고요. 그분이 하는 일은 뭐냐? “나는 가짜다. 나는 나한테 속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속이고, 그래서 나는 속고 삽니다.”

그 목사님처럼 이걸 아주 감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이미 천국에 도달했기에 우리는 속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재주가 없음을 또다시 주께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속지 말라는 그 말을 이제는 모든 일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완료된 것에 대해서, 이미 아들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의 내부 순환  (0) 2026.04.05
욕심의 경로  (0) 2026.03.22
시험의 표준  (1) 2026.03.15
형제의 본질  (0) 2026.03.08
낯선 지혜  (1) 2026.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