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의 경로
2026년 3월 22일 본문 말씀: 야고보서 1:15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잉태’‘낳는다’는 것은 생물체에나 해당되는 표현입니다. 이 죽은 시체같은 자들에게 이런 생물적 표현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 내부에 인간이 감히 통제할 수 없는 다른 수상한 생물체 같은 게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통제하는 욕심’이 아니라 ‘인간이 통제하지 못하는 욕심’이 인간의 관리 선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바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겁니다. 욕망을 출발점으로 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는 인간을 죄의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곧 인간이 죄에 대해서 역시 통제권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망 역시 인간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망을 이르게 한 ‘욕심’과 ‘죄’마저 인간에게는 통제권이 없습니다. 이는 인간은 자신의 미래나 운명에 대해서 본인이 관여할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겁니다. 단지 인간의 육신과 일평생은 인간이 감히 통제할 수 없는 다른 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다루어질 뿐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발견할 수 없는 것, 인간이 손쓸 수 없는 것, 이게 뭘까요? 히브리서 11:3에서는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여기서 ‘보이는 것’과 ‘나타난 것’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즉 인간들의 세계란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타난 것’에 대해서 접근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욕심’, ‘죄’,‘사망’ 개념에 대해서는 보이는 것으로만 제한되어 있는 인간들이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것’에 속하는 분에 의해서 그 본질이 들추어집니다.
예수님의 투입으로 비로소 드러난 ‘욕심’, ‘죄’, ‘사망’ 개념은 제대로 된 유일한 생명체로서 ‘잉태’, 장성‘생산’이라는 표현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들 세 개념은 이미 이 세상에 ‘시험하는 자’, 곧 ‘사단에 의해서 장악된 세상’을 전제로 합니다. ‘시험하는 자’와 유일하게 ‘시험받는 자’에 의해서 형성되는 ‘시험의 장(張)’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이 이 과정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흙이라는 비-생물체에서 시작해서 결국 흙이라는 비-생명체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험하는 자, 곧 악마는 인간을 극구 ‘살아 있는 자’라고 처주고서는 궁극적으로 자기만 사랑하라고 부추깁니다. 욕심이란 바로 ‘사단의 마음이나 생각’을 말합니다. 곧 ‘괴물의 마음이나 생각’입니다.
이런 시험의 세계에 예수님께서는 뛰어들어오셔서 다음의 세 구절을 가지고 말씀 세계의 정체를 드러내셨습니다. 세 구절 모두 다 십자가에서 외친 구절입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27:46의 말씀입니다.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두 번째 구절을 요한복음 19:30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세 번째 구절은 누가복음 23:46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버림받으시고 그리고 그 버림받은 자체가 ‘다 이루심’의 실내용이 되시고 그 다음에 아버지의 안식에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합류해서 쉬게 되십니다. 이 절차를 따라 성도의 육신도 적용받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유월절 희생양이 나옵니다. 이것은 짐승입니다. 비-생물체인 흙이 아니라 일단 짐승이라는 생물체가 한시적으로 이 절차에 들어갑니다.
이는 골로새서 1:15-16에 의해서 진짜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욕심’, ‘죄’, ‘사망’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뛰어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짐승인 유월절 양에서는 장차 예수님에게 쏟아지는 말씀이 들어오게 됩니다.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를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출 12:23) 이 말씀은 인간의 그 어떤 행함도 일체 이 양의 피에 섞어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기존의 인간의 형상은 거부하신다는 말입니다.
사단의 마음으로 무장되어 자기 챙기고 자기를 위한 입법에 나서는 자들은 어디까지나 자기에게 소용되는 존재이지 결코 천국에 소용이 되는 존재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피흘리는 양’은 요한복음 1:5에 의해서 ‘빛’이 됩니다. 이 ‘빛’의 등장으로 졸지에 이 세상은 ‘어두움’이 됩니다.
빛과 어두움이 조우, 곧 만남의 현장이 곧 성도의 역할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으로서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자리에게 주님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4-5)
이로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신 것은 이 세상 전부가 하나님을 핍박하는 것에 동조되어 있음이 밝혀집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즉 죄란 빛과 어두움이 만났을 때만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사도 바울의 삶은 다음과 같이 달라졌습니다.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기를 지키는 법을 스스로 만들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밝힙니다. 그것은 율법과의 만남에서 자기 속에서 오로지 죄가 가장 기초가 되어 작용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챙기는 것이 곧 죄이며 이 죄로 인해 주님께서 핍박받고 있음을 온 천하에 신나게 알리는 것이 사도가 맡은 연극 배역이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처지에 주목하지 말고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활동함에 주목하고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강-야고보서 1장 14-15절(욕심의 경로) 260322-이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야고보서 1장 14-15절입니다.
야고보서 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람이 잉태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욕심이라는 게 있고, 그 욕심이 잉태했는데 그것이 바로 죄가 되고, 그다음에 그 죄가 장성하게 되고, 장성하고 난 뒤에 또 뭘 낳는가? 사망을 낳는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인간의 육신 따로 놀고, 인간 속에 있는 욕심이 인간 자아의 간섭과 관리에서 벗어나 따로 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인간 속의 욕심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서 따로 논다는 겁니다. 내 안에 괴물이 있는데 그 괴물이 ‘욕심’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이 성립되려면, 모든 인간 속에 귀신이 들어있을 때나 성립이 됩니다. “나는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데 제대로 못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보통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잖아요? “잘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닦달하거나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서 괴물을 보고 있다. 네 안에 욕심이라는, 물컹물컹 살아있는 그 마귀의 속성을 보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 네가 관여할 바가 못 된다.”
이 말은, 인생의 내 미래 내 운명에 대해서 일체 내가 관여가 안 됩니다. 관여할 수가 없어요. ‘아, 그때 신앙생활 잘할걸. 바르게 살 걸. 예수님 잘 믿을걸. 하나님 잘 경외할걸.’ 그 출발점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야고보서 1장 14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되어 있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이 현실은 왜곡된 엉터리 현실인데, 진짜 현실은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이 아니고요, 인간을 시험케 하는, 곧 마귀가 생각하는 그 현실을 인간이 그대로 수용하면서 살 뿐이에요. 인간이 자기 욕심에 대해서는 읽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 속에 있는 죄에 대해서, 욕심에 대해서, 사망에 대해서 인간이 읽지 못하는 이유가, 인간 자체가 시험하는 자, 곧 마귀가 만든 현실에 옴팍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 분석, 곧 세상 이해에 대해서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어요. 읽어낼 수가 없으니까 뭐라고 하는가? ‘잘할걸. 하나님 잘 믿을걸. 이렇게 될 것 같으면, 지옥이 있을 것 같으면 진작 예수 믿을걸.’ 자꾸 자기의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 자기 운명이 다 이루어지는 것처럼, 최종적으로 모든 게 종결되는 것처럼 그렇게 오산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이 마귀의 시험으로 가득 찬 세상, 충만한 세상이거든요. 마귀의 시험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이 욕심이라는 것, 욕심이 잉태하고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 것, 욕심, 죄, 사망은 누가 읽을 수 있고 누가 해석할 수 있는가? 시험하는 자에 의해서 시험받는 자 예수님만 그 개념을 해석해 낼 수 있습니다.
욕심이 뭐냐? 그것은 예수님만 알아요. 죄가 뭐냐? 인간은 모릅니다. 예수님만 죄를 알아요. 사망이 뭐냐, 죽음이 뭐냐? 인간은 모릅니다. 인간은 자꾸 죽겠다, 죽겠다고 하는데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죽지 않는데 마귀가 너 죽는다고 협박 공갈을 해댄 거예요.
인간은 목숨이 끊어져 봐야 다시 의의 부활로, 그리고 악의 부활로 다시 부활돼요. 인간은 안 죽습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없어요. 죽음은 지금 누구한테만 있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만 죽음이고 인간에게는 아예 죽음 자체가 없습니다. 다만 숨을 안 쉴 뿐이죠, 숨을 안 쉴 뿐이고 우리 주변에서 흙이 돼서 사라질 뿐이에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인간은 생물체가 아니고 흙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명백하게, 분명하게 성경을 봅시다. 흙에서 인간이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 인간적인 견해를 덧붙이지 맙시다. 인간은 흙에서 나와서 인간인 척, 척을 하다가 도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흙이 아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흙이 있어서 흙이 잉태하고 장성하고 뭘 낳고 하는 것은 흙에 해당 사항이 없어요. 그것도 흙이고 이것도 흙이고 저것도 흙인데요, 뭐 거기에 새삼스럽게 생물체에나 해당하는 흐름과 그 흐름에 따른 개념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해당 사항이 없어요.
잉태하는 것도 인간이 잉태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시험하는 자가 욕심을 잉태하죠. 마귀가 욕심을 잉태하는 거예요.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시험하는 자의 심정, 또는 마음, 또는 생각 그게 욕심입니다. 흙이 무슨 욕심을 부립니까? 마귀 욕심이 흙 속에 들어온 겁니다. 우리 속에 들어온 마귀 욕심을 우리가 못 빼내서 사달 난 거예요.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겁니다.
우리 속에 마귀의 생각과 마귀의 마음이 들어왔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이게 욕심인데 욕심의 특징은 나를 챙기는 게 악한 거예요. 욕심 앞에 뭐가 붙어요. 악한 욕심입니다. 악은 뭐냐? 나를 챙기는 것이 바로 악이에요. 이스라엘하고 미국하고 공격해서 미사일 공격으로 얻어맞은 이란 사람들의 현재 고민거리는 ‘어떻게 하면 이란이 유지될 수 있는가?’ 자기 챙기는 거죠. 그게 악이에요. 그게 악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회사 챙기는 거, 자기 나라 챙기는 거, 애국심, 자기 교회 챙기는 거, 자기 가족 챙기는 거, 무조건 내 거 챙기면 그게 사탄의 마음, 악의 마음이고 그게 바로 욕심이라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내 것 챙기니까 그다음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내죠.
그런데 로마서 8장 24절에 보면 단칼에 단호하게 인간의 희망을 잘라버립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그것은 소망의 근처도 못 간다.’ 그 뜻을 알기 위해서 히브리서 11장, 요즘 자주 등장해요, 11장 3절에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고 나타난 소망이 소망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마귀의 심정으로, 마귀가 만들어낸 시험으로 가득 찬…, 누구 시험하려고? 메시아, 예수님 시험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찬 이 세상과 같은 동지, 그의 일부가 되어서, 한패가 되어서 어떤 것을 소망하고 희망하더라도 결국 보이는 것이에요.
제가 태어나서 경험했던 것이 우리 집안 이야기거든요. 우리 집안사람들 특히 할아버지나 삼촌들 보면 어떤 규칙이 세워지느냐 하면, ‘아, 술이 술을 낳는구나.’ 술 먹는 할아버지에 또 술 먹는 삼촌, 할아버지 술 먹고 돌아가셨고요, 삼촌도 술 먹고 돌아가셨고요. 참, 집안 모두가 술을 먹어요. 어렸을 때 어른들 보면 술 먹는 모습밖에 안 보여요. ‘술이 술을 낳는구나.’
그걸 약간 더 추상화시키면 욕망이 욕망을 낳아요. 아버지의 욕망이 아들의 욕망, 딸의 욕망이 돼요. 아버지가 품고 있던 사탄의 마음이 아들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그 욕망을 구체화해서 뭐 하느냐? 인간은 ‘나타난 것’에서가 아니고, 보이는 것에서 자기에게 욕망거리를 집중시킵니다.
불교에서 ‘견물생심’이라고 하죠. 왜 욕심이 생기는가? 보이니까 욕심이 생긴다는 거예요.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술이 술을 낳듯이 욕망이 욕망을 낳고, 그다음에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을 낳아요. 그러다 보니까 어떻게 되느냐? ‘나타난 것’에 접근이 안 돼요. ‘보이는 것’에서 ‘나타난 것’에 대한 모든 경로가 끊어졌어요. 단절되어 있어요. 욕망이 안 채워지니까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을 대체하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돈 벌고, 애쓰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야고보서 1장을 보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라고 할 때 ‘하하, 내가 욕심을 부렸구나.’ 이렇게 하는데 그것은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욕심이 뭔지도 모르고, 죄가 뭔지도 모르고, 사망이 뭔지도 모르는 데서 나오는 한탄이에요.
여기서 잘못된 욕심의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전에 제가 분명히 해 둔 게 있죠? ‘인간은 보이는 것만 찾는다.’ 보이는 것에서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고, 보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마저 채우려고 하는 거예요. ‘나타난 것’으로 접근할 수가 없어요.
‘나타난 것’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지난 수요일에 제가 설교했습니다. 지난주 수요일 설교를 다 들으셨죠? 남편 죽고 빚을 못 갚아서 아들 둘이 산채로 팔려 가게 된, 풍비박산된 과부의 집이 있어요. 그 과부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를 찾거든요.
그때 선지자가 제시한 것이 다른 게 아니에요. “이웃집에 가서 빈 그릇을 다 모아라”(왕하 4:3) 선지자가 그 여인에게 먼저 이렇게 물었던 거예요.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왕하 4:2). 그때 그 여자가 “없나이다. 제게는 볼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라고 한 거예요.
그게 마지막 희망인데 이제 그게 끝난다는 거예요. 그때 엘리사 선지자가 요구한 것은 마지막 희망마저 갖다 부어버릴 빈 그릇이 필요한 거예요. 이웃집에서 가져온 것은 일체 빈 그릇이에요. 그 빈 그릇은 남편이 죽고 아들이 팔려 가는 그 절망, 그 절망에 의해서 생겨난 빈 그릇이에요.
그리고는 엘리사가 “문을 닫아라” 하지요. 다시 말해서 채권자와 관계 끊고, 세상과 관계를 끊고, 지금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타난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 나타난 것이 뭐냐? 절망을 그 빈 그릇 안에 채우는 거예요, 그것도 기쁘고 즐겁고 신나게.
인간은 흙이에요. 흙 주제에 희망을 품을 자격 자체가 없어요. 흙이 흙으로 돌아가면 됐지 뭘 더 원합니까? 흙은 흙으로 돌아가면 될 텐데 괜히 인간인 척을 하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있는 생물인 줄 알고 있어요. 인간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마귀의 욕망이 터를 잡은 거예요.
악마가 그 틀을 잡아주죠. 뭐라고? “널 챙기는 것이 네가 존재하는 이유다. 어떤 일에 있어도 너는 너만을 챙겨라. 넌 널 사랑해야 돼.” 이게 악이잖아요. 그게 악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 욕심을 모를 때 나오는 사례 두 가지의 예를 들겠습니다.
첫 번째는 수도원, 수녀원. 된장 만들고 참기름 팔아서 자기 도 닦는 수녀원과 수도원. 수도원과 수녀원의 특징은 봉쇄적이에요. 밀폐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끊고, 극단적인 자기 사랑이 수도원과 수녀원입니다. 나는 사람을 끊고 하나님과 교제하겠다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마귀의 시험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인간이 태어난 곳에 있던가요? 그런 공간은 없어요. 주님께서 “넌 수녀원에 들어가라”라고 하던가요? 수도원에 가든 수녀원에 가든 그게 다 마귀의 시험의 공간입니다. 수도원 수녀원이 얼마나 무식한지 A.I보다 못 해요. A.I의 특징은 아첨하고 아부하는 식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게 인공지능이에요.
질문해 보세요. 인공지능이 “참 좋은 질문이십니다.” 이게 아첨이잖아요. 그러니까 교회 나와서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살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아첨하고 아부하는 세상을 피해서 나만은 독립적으로 순수성을 추구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옴팍 마귀의 시험에 든 거예요.
‘보이는 세상은 더럽다. 나만이 깨끗한 공간에 있다.’ 무슨 깨끗한 공간이 있어요? 성도가 됐으면 성도 욕심의 해결책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십자가 없으면 욕심을 해결할 해결책이 없다는 뜻이에요.
주님께서는 어떻게 했느냐? 십자가에, 예수님 피의 그 죽음에 함께 못 박아 버려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비닐 있잖아요? 비닐을 벽에 감아놓고 가위로 밑에서부터 잘라요. 그러면 비닐 끈이 되겠죠. 박힌 채로 바람이 불면 비닐 끈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나게 갈기갈기 찢어져서 바람에 흩날리겠죠. 흩날려도 괜찮아요.
왜냐? 그 정과 욕심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바람에 날려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에 나와서 온갖 아부란 아부는 다하고요, 아첨이란 아첨은 다 하세요. 왜? 우리의 본색은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상관없는 겁니다. 나의 갈기갈기 찢어져 흩날리는 그것을 가지고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성도로서 이건 주의 영광이 되지 않는데…’ 쓸데없는 근심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끝까지 자기 사랑을 포기 못 하고 있는 겁니다.
바람에 날리면 그냥 바람에 날리세요. 우리의 미래, 우리의 운명은 내가 걱정할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희망의 대상이 안 돼요. 우리는 희망을 가지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인 척하는 이게 ‘보이는 거’거든요. 그게 나타날 때는 인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흙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진짜 인간은 우리 안에 예수님만 나타나요. 수도원이나 수녀원은 인공지능보다 더 못합니다. 사람에게 아첨할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세상은 아첨과 아부가 없으면 돈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있어요. 또 하나의 예가 바로 욕망이 신념이 되어서 이념화되는 단체에요. 쉽게 말해서 좌파, 데모하다가 정치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젊을 때 혈기 가지고, 명분 가지고 나설 때는 세상을 한 번 바꿔보겠다는 거예요. 그게 마귀의 사주를 받아서 나온 마귀의 생각인 것을 모르는 겁니다. 나중에 세월 지나서 보니까 자기의 이념을 외치고 사상 투쟁을 한 게 얼마나 부끄러운 과거인지요? 그 동지들, 같이 운동했던 동지들은 다 돈벌이하고 있어요. 이념, 신념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 다 욕심들이었어요. 다 철딱서니 없는 짓들이에요. 결국 자기 본색은 정권 잡아서 한자리하고, 대대로 그 자리 물려주는 거 그거잖아요. 노조도 마찬가지고요. 자기는 노조 위원장하고, 그다음에 자기 아들 그 회사에 취직시키는 거, 그거 외에는 뭐가 있습니까? 그때 그 순수했던 열정? 열정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냥 철딱서니 없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허무하고 허무한지 ‘One Battle After Another, 2025’라는 영화가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받은 영화가 그걸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의 정치 투쟁은 전부다 헛짓이다, 전부다 헛짓이에요. 사람을 미혹하는 헛짓이에요. “너 대신 투쟁 해줄게. 그래서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 나한테 힘을 실어줘. 내 운동에 동참해 줘.” 그게 전부 다 마귀 짓이에요. 이게 바로 인간 욕심의 두 가지 양상입니다.
쿠바의 운동가 누구입니까? ‘체 게바라? 난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 뭐 어쩌고저쩌고. ‘나라가 독립하기 위해 내가 휘발유를 붓고 민족을 살리리라.’ 손가락을 긋고 참…, 어떻게 저렇게 마귀에 속해있으면서도 본인이 마귀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오늘 본문 야고보서 1장 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계열, 이 경로, 이 노선, 메시아인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인 악마의 세계에 아버지의 뜻에 의해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참여해요. 이 노선에 뛰어든다고요. 뛰어들면서 진짜 욕심이 뭔지, 죄가 뭔지, 그리고 사망이 뭔지는, 뛰어든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에서 비로소 이 개념이 구현되는 겁니다.
왜 그런가? 인간은 흙이기 때문에 마귀로부터 탈출하는 이 상황을 맡길 수가 없어요. 이 ‘잉태-장성-낳는다’라는 이 세 가지는 무생물이 아니고 누군가 살아있는 생물체에 해당되는 것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잖아요. 이 현상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뛰어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뻔하게 다 알고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을 제끼고, ‘그건 형상도 아니다. 진짜 형상은 이렇다.’ 해서 예수님이 뛰어드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3-15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읽겠습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해서 인간은 창조된 분에 의한 창조물에 지나지 않지, 인간은 창조에 대해서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진짜 형상이 투입되어서야 비로소 발견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의 존재보다 피의 존재가 먼저다’ 이 말입니다.
피가 먼저 있고 인간은 나중이에요. 피 흘리신 분의 형상만이 하나님이 받아주는 형상이에요. 피 없는데 천국에서 받아주질 않습니다. 피 없으면 안 받아줘요. 요한계시록에 어린 양의 피로 희게 되었다(계 7:14)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한테 소용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천국에 소용되는 삶을 사는가?’ 그걸로 인간이 둘로 쪼개지는 겁니다. 나눠지는 거예요.
여러분의 하루 일과가 자기에게 소용되려고 삽니까, 아니면 하늘나라에 필요하다고 사십니까? 모든 생각과 사고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이건 꼭 해야 해.’ 왜요? 왜 꼭 해야 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야 하니까. 우리 가족 행복해야 하니까.’ 그래 놓고 기도하기를,
“주여, 욕심을 냈습니다.”
“아니, 넌 욕심이 뭔지도 몰라.”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아니 넌 죄 몰라.”
“그래서 제가 죽습니다.”
“아니. 넌 안 죽어.”
배우는 연기할 때 자기가 연기하는 줄을 알아요. 모든 인간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마지막 최종적 결말을 위한 역할의 배우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문제에요. 이게 진짜인 줄 알고 있어요. 내가 열심히 해서 진짜 나를 창조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연기인데! 단지 연기하는 거거든요.
주님께서는 이 경로를 어떻게 밟았는가? 여러분이 아시는 세 가지 성경 구절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마태복음 27장 46절입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주께서 이 땅에 와서 이 경로, 그러니까 욕심, 죄, 그리고 사망이라는 이 경로를 새롭게 읽고 새롭게 해석하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니까요- 하나님의 진짜 형상을 투입해서 하는 절차의 첫 번째는,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아요, 버림받습니다.
두 번째는 요한복음 19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두 번째가 ‘다 이루었다’에요. 십자가랑 같은 지점이에요.
세 번째가, 누가복음 23장 4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안식입니다. 첫 번째는,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두 번째는, 그 버림받음이 곧 ‘다 이루었다.’ 세 번째는, ‘이제 저도 아버지처럼 저도 안식하렵니다.’ 드디어 자기 영혼을 맡겼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할 때 뭘 다 이루었느냐? 흙 말고, 말씀과 관련된 유일한 생명체는 예수님의 육신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됩니다. 우리가 말씀 지키고 Q.T.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 근처도 못가요. 우리는 말씀 보고 지킨다고 해 놓고는 보이는 것, 나타난 것 말고 보이는 것 가지고 ‘이 보이는 것에 대해 또 어떤 혜택을 주실까?’ 자기의 헛된 소망만 생각하면서 말씀을 보니까 이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게 아니에요.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말이에요. 다 이루었으니까 예수님만 생명체에요. 예수님이라는 생명체가 오시기 전에 구약에서는 흙 되는 인간은 배제하고 거기에 인간은 아닌데 생명체가 뭐가 들어가는가? 유월절 어린 양이, 짐승이 들어가요. 짐승이 들어감으로써 ‘마귀가 접수한, 마귀가 다 장악한 이 세계에서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짐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는 겁니다.
너희가 집에서 키우는 양과 말씀이 만나요. 영어로 encounter 조우(遭遇), 만남인데 어려운 말로 ‘조우’라고 합니다. 조우, 만남이라고 할 때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게 지구인과 외계인의 만남입니다. 도저히 만날 수가 없죠? 위치한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습니다.
‘PROJECT HAIL MARY, 2026’ 영화에 그게 나와 있어요. SF영화입니다. 지구인과 외계인의 만남. 그런데 외계인의 모습은 이름이 ‘로키’ 다섯 개의 바윗덩어리에요. 지구는 포동포동한 피부로 되어 있는 주인공이죠. 이것이 범종설(panspermia), 모든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이 지구라는 환경에 있는 생명체는 포동포동한 살결, 그리고 저쪽 먼 나라 지구에서 12광년 떨어진 그 환경의 생명은 다섯 조각으로 움직이는 바윗덩어리, 생명은 생명인데 진화에 따라 다르다는 그 범종설을 담고 있습니다.
조우, 서로 만나는 거예요. 만나는데 짐승과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는 거예요. 말씀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장차 말씀이 육신 되시는 분의 지시가 들어있고,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생명체 안에는 장차 예수님이 지상의 모습으로, 생명체로 왔을 때 벌어지고 일어나는 현상을 양이라는 실습 재료로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는 겁니다.
그렇게 보일 때 하나님의 지시가 뭐냐? “양을 잡아라.” 그다음에 “피를 내라.” 그다음에 “피를 가지고 문설주에 발라라.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 천사가 올 때 그 피를 바르면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넘어갈 것이다.” 이게 외계의 소리에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고 외계의 소리라고요. 성경책이라는 동화책, 신화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고 외계의 소리라고요.
그 외계의 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지구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졸지에 흙이 돼버리는 겁니다. 흙이 되고 그 흙 속에 예수님의 생각이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생각이 들어가면 우리는 말씀에 입각한 제대로 된 욕심의 사람이고, 죄의 사람이고, 사망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욕심 없는 사람이 아니고, 죄 없는 사람이 아니고요, 안 죽는 사람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알고 있던 개념이 제대로 박혀버리는 겁니다. 박혀버릴 때 나오는 현상 하나가 바로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드디어 조우, 만남이 이뤄져요. 외계에서 온 예수님과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사울이라는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묵상해서 하나님과 만나겠다고 철저하게 종교적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조우, 만납니다. 마치 지구인과 외계인이 만나는 그 장면에서 모든 일을 예수님이라는 외계인이 했을 때 그런 외계인인 주님을 만났던 지구인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이 뭐여야 하는가? 예수님이 알려줍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행 9:4, 22:7).
여기서 ‘핍박’이라는 말을 했어요. 존재하는 자체가 핍박이었어요. 이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핍박하고 시험했던 귀신이, 마귀의 심성을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그 ‘예수님을 핍박함’을 비켜갈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회개라고 하는 것은 뭐냐? 그 핍박했음을 그대로 드러내면 돼요. ‘제가 한평생 한 게 주님에 대한 핍박뿐이었습니다.’ 핍박뿐이라는 말은 ‘주님의 피로 씻음받음’에서 그 피라는 요소에 나의 행함이 조금도 섞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에요. 핍박하는 자와 피의 만남은, 나를 지키는 법을 우리는 한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24시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세요. 제가 말씀드릴까요? 여러분들이 아침에 눈 떠서 밤에 꿈속에서까지 하는 일은 뭐냐? 나를 지키는 규칙과 법을 입법하는 것, 만들어내는 그것에 몰두해요. ‘어떤 규칙과 어떤 패턴으로 살면 날 계속 지킬 수가 있는가?’ 오로지, ONLY 이것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핍박했던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따로 법을 만들 필요가 없다. 왜? 내 속에 있는 법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핍박하는 식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게 율법이에요, 그게 율법입니다. 핍박 안 한 적이 없어요. 성경에서 뭐라고 하면요, 우리는 이렇게 대꾸하면서 핍박합니다. “그 말씀이 맞기는 한데 그러면 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데요?” 이런 식으로 구시렁구시렁. 주님께서 “방금 뭐라고 했는데?” “아무 소리 안 했습니다. 그냥 사는 게 힘들다, 뭐 그 정도밖에 안 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한 것처럼 ‘네가 빈 그릇에 기름을 채워서 팔라’는 그 말은 희망을 팔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체험한 절망, 그 절망을 팔아버려라.’ 절망을 팔아서 네가 살아라, 그 말입니다. 절망을 파는 그 신남, 신나는 그것, 이 세상 모든 눈에 보이는 인간들은 희망을 이야기할 때 나는 절망을 이야기하면서, 그걸 내세우면서 살아갈 이유를 찾은 거예요.
‘나는 남편 없고, 나는 자식 없다. 나는 나도 없다. 벌써 죽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었고, 주님의 죽음이 일찌감치 나한테 쑥 들어왔다.’ 그게 바로 레위기 25장의 율법의 완성, 주께서 ‘다 이루었다’의 내용이 그 과부 속에 들어온 거예요.
“당신, 요새 할 일도 없는데 무슨 재미로 사노?”
“나? 아무것도 없는 재미, 절망하는 재미로 산다. 와? 부럽나?”
‘희망 주세요’라고 하지 말고, ‘꿈을 주세요’라고 하지 말고, 내 꿈은 뭘 해도 개꿈이라는 사실, 흙이 되었으니 마땅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미 정해진 코스인데 거기서 더 욕심 내지 맙시다. 주님께서 이 땅의 인간을 단지 심판하시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심판만 할 것 같으면 “욕심이 잉태한 즉 사망을 나눔이라” 이러면 끝나는 문제예요. 중간에 세 개를 둘 것이 아니라 두 개만 있으면 돼요. “욕심이 잉태한즉 너는 죽게 되었다” 이러면 끝나는데 의도적으로 욕심을 통해서 죄를 낳게 만들고 그 죄를 양성화시킵니다. 음성화하지 않고 죄를 양성화시켜요.
양성화시키는 그 코스, 우리가 지금 흙인 주제에 인간인 척하면서 겪어야 될 코스가 이 코스예요. 죄를 장성하게 하는 것, 죄를 키우는 그 재미가 있어줘야 해요, 재미가! “요새 뭐하고 사노?” “죄짓는 재미로 산다.” ‘보이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결과물을 남긴다’는 이 작업에 우리를 주께서 동원시킨 겁니다.
잠언서 31장 3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스스로 ‘나는 못생겼다’ 여기는 사람들은 이 구절이 은혜가 안 될 거예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런데 자기가 좀 예쁘다고 하는 사람한테는 이게 또 절망이에요.
‘예쁘게 만들어 놓은 걸 취소할 수도 없고 내가 어쩌란 말이에요? 예쁜 게 도저히 감당이 안 되네’ 이런 거 있잖아요. 이게 지금 여러분한테는 해당이 되지요? 그런데 그게 거짓되고 헛되다는 거예요.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나는 솔로>라는 프로에 나와서 잠언서 31장 30절을 좀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참 예쁩니다.” “아닙니다. 이거 다 거짓된 겁니다. 다 가짜고, 헛됩니다. 예쁜 것을 예쁘다고 마음에 새기는 이것이 바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죄입니다. 이거 뭐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이 예쁜걸!” 이런 거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그 시험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것이 마태복음 2장 16-18절에 보면 나옵니다. 약간 긴데요. 한번 읽어보겠어요.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이게 예레미야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31장 15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예레미야의 이 말씀이 말씀 되게 하기 위해서 혹독하게, 실제로 이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는 그런 현장을 주께서 만들어주는데, 거기서 그 아픔을 받은 자 이름이 뭐냐 하면, 공통적으로 이름이 정해지는데 ‘라헬’이에요. 라헬은 누구냐 하면, 구원받은 야곱의 본처 이름이 라헬이에요. 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구원받았다는 그 말입니다. 자식은 죽었는데 구원은 받아요.
이걸 누가 누가 자진해서 이렇게 하겠어요. 그래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으면, 거기에 누가 갑자기 끼어드느냐 하면, 마귀 들린, 괴물 들린 인간이 갑자기 이 대목에 끼어들어요. “잘할게요. 앞으로는 죄 안 지을게요. 욕심을 낮추겠습니다.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춰서 욕심 없이 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말씀에 게으르지 않고, 말씀 잘 보면서 주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훅 들어와요.
누가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라고 할 때 ‘그 마지막이 사망, 지옥’이라니까 나를 지옥에서 스스로 빼내는 방안을, 야고보서 1장 15절을 가지고 참조를 해서 자기가 자기를 건지려는, 구원하려는 시도로서 인간이 끼어들게 돼 있습니다. 이 대목 해결 안 되면 오늘 설교 헛방이죠. “앞으로 잘할게요.” 그런 말이 서슴없이 나옵니다.
말씀을 볼 때 인간이 ‘욕심’이라는 것을 해석 못 한다는 말은, 성경 전체에 대해서 해석을 못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성경해석을 못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미래와 자기 현존에 대해서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그 두려움은 누가 줬는가? 그 안에 괴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마귀가 인간에게 두려움을 준 거예요.
‘제대로 신앙생활 안 하면 너 지옥 가도 좋으냐? 제대로 똑바로 하란 말이다!’ 이런 두려움을 우리에게 계속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자기를 수습하려고 애를 써요. 아까 벌써 해결책 제가 드렸잖아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 우리의 정과 욕심은 주님께서 땅! 땅! 땅!…, 십자가가 예배당 저 뒤편에 걸려 있네요.
십자가에 우리의 목을 아예 달아버렸어요. 남은 것은 마음대로 풀리고 있는, 인간인 척하고 있는 배설물 같은 나의 존재, 나의 존재가 이 세상에 아직 남아 있어 풀리고 있다는 말이죠. 풀리고 있는 이유는, 배설물 같은 우리의 존재가 많이 찢어지고 갈라져서 풀려야 마귀와 접촉하는 표면적이 넓어져요.
이것도 하다가 저거 하다가…, 어떤 걸 해보세요. 거기서 죄가 안 나오는지. 다 죄가 나오게 되었어요. 인간은 ‘보이는 것’에서 보이는 것으로 대체하는 이 대책 이외에 다른 대책은 없어요. ‘나타난 것’으로 접근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한테 와서 외계인처럼 만나게 해줘야 해요.
만나는 그때의 현상을 요한복음 1장 5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뭘 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 현상에 대해서, 그 현장에 속하고 받으면 돼요. 그게 뭐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바로 요 현장입니다. 빛과 어둠의 조우, 만남의 자리가 오늘날 우리의 육체입니다. 세상 쪽으로 걸쳐 있는 우리의 육체.
빛이 무엇이며 어두움이 무엇이라는 것,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어두움에 속했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깨닫지 못했을 때 나오는 성깔이 뭐냐 하면 바로 복수예요.
로마서 12장 19절에 보면, 복수하지 말라고 심판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런데 인간은 복수하고 싶어 해요. 복수하는 게 흔하게 나타나는 게 뭐냐 하면, 내 인생 이렇게 조져 놓은 것이 다 남 탓이에요. 다 남 탓입니다. 남 탓을 하는 이유가, 온 국민이 우울증 환자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울증 환자가 아닌 국민이 없어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그 태극기 앞의 모든 국민이 다 우울증 환자예요.
기분 풀이한다고 BTS 공연 넷플릭스가 중개하고요, WBC 야구대회 8강 올라갔다고 좋아하고, 또 6월이 이제 기다려지는 거예요. 손흥민이, 축구 북중미 월드컵이 있죠. 전부 다 보이는 것으로 우울증을 그냥 그때그때 달래는 것, 그 방법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어요. 왜 전부 우울증 환자니까. 왜? 남 탓하니까.
주께서는 “빛과 어두움의 만남의 장소로 나는 너를 지정했다.” 지정하는 그 장소, 빛도 알고 어두움도 아는 그 장소로서 이미 우리는 예수 안에, 예수님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이미 구원된 거예요. 정과 욕심을 십자가 안에서 못 박은 사람만이 빛도 알고 어둠도 아는 거예요.
그런데 빛을 모르는 사람은 우울증 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해결책은? 해결책은…?’ 맨날 해결책은? 해결책이 이미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게 보기 싫고, 듣기 싫어하는 그 성경책에 이미 해결책이 나와 있어요. 그 해결책이 뭐냐? 빌립보서 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다시 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했죠. 예수님이 아버지한테 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그대로 사도바울에게 대입해 봅시다. 대입해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이렇게 돼요. 핍박하니까 버릴 만하잖아요. 핍박하니까 버릴만하다는 말이지요.
핍박하는 자가 어디 천국에 가려고요? 핍박하는 자는 지옥에나 가라는 말이지요. “너는 핍박하는 자다.” 그다음에 예수님이 십자가 안에 그것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다 이루었다”고 했어요. 뭘 다 이루었어요? “빛과 어두움의 만남의 장소를 지정한 것을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장 5절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 사도바울에게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이야기하면서 빌립보서 4장 11-13절에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 비결이 뭐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안식 안에서 모든 일이 나한테 안식이 되는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를 지키는 법이 따로 필요치 않기 때문에. 이게 성도의 삶의 표준입니다. 나를 지키는 법을 따로 만들 이유가 없다니까요.
우울증 환자가 법 만들어 봐야 우울증이죠. 그거 뭐 있겠어요? 아까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이야기, 자기 아들이 헤롯의 정권에 의해서 강제로 죽임을 당할 때 그 라헬, 그 죽었던 아들의 어미들의 공동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하지만 바로 그런 과정을 거칠 때, 그런 과정을 거칠 때 사도바울의 고백,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습니다”라는 것…, “하나님이 내 아들 살려내세요” 이런 식이 아니고요, ‘주님보다 내 아들을 더 사랑했습니다’라는 그 마귀의 사랑, 마귀의 괴물적인 정신을 폭로 당하고 들추어짐을 당할 때, 이게 바로 빛을 거부하고 빛을 핍박한 어두움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해요.
주님께서 매 순간 모든 것을 말씀에서 벗어나서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입각해서만 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도 아닌 게 인간인 척하면서 자기를 지키는 식으로 살다 보니까 매 순간 그냥 핍박거리만 자꾸 만들어내요.
하지만 주님께서 끈질기게 빛으로 찾아오게 되면, 외계인과의 조우, 빛과 우리가 만날 때에 ‘아, 생명이라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생명이 아니고,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나를 다루고 있고, 그 생명 안에 우리가 놓여 있다’라는 사실, 이미 영생에 들어왔기 때문에 말씀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게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삶의 원칙이고, 기준이고, 기쁨이었던 겁니다.
모든 것이 주 안에서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롬 8:28), 예스(고후 1:20)가 되고 ‘주께서 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라는 그 고백, 스스로 자기를 책망하거나 책임질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 절망, 그런데 그 절망조차도 다 이루어내신 하나의 경로고 순서였다는 걸 깨닫고, 마지막 안식에 들어가신 우리 주님처럼 이미 주 안에 있으면서 다시 우리 자신의 과거사를 보는 것처럼, 주님의 과거사로서 함유돼 있다는 사실을 연기하듯이, 배우가 하나의 역할을 맡듯이 주께서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감사하면서 수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