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아버지’란 뜻이죠. 성경 말씀은 잠언서 17장 6절,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어버이는 자식의 영광이요 자손은 늙은이의 면류관이다(공동번역)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어버이는 자식의 영광이다.(표준새번역)
Childrenʼs children are a crown to the aged, and parents are the pride of their children.(NIV)
Childrens children [are] the crown of old men; and the glory of children [are] their fathers.(KJV)
Grandchildren are the crown of the old, And the glory of sons is their fathers.(NASB)
Grandchildren are the crown of the aged, and the glory of children is their fathers.(ESV)
자, 한 가정에 대해서 어떤 질서 같은 걸 언급한 것 같은데…. 가정이라는 것은 그냥 돈 벌고 오순도순 살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성경은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신 이유에 대해 ‘면류관’을 뽑아내고 ‘영광’을 뽑아내는 현장으로서 가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손자든 자식이든 아비든 노인이든 간에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죠. 낳는 건 맞는데 만들어낸 건 하나님의 몫입니다.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하나의 기계장치라고 보면 됩니다.
방앗간에 기계 있잖아요. 정미소에도 기계 있죠, 방앗간에도 있듯이. 고춧가루를 방앗간 기계가 만들어낸 건 아니죠. 창조한 게 아니죠. 방앗간 부속품이 떡가래를 만든 건 아니죠? 이용했죠. 그 기계를 이용했잖아요. 이용해서 떡가래 나오고 고춧가루가 나오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로 사용해서 그 아비와 손자, 자식 이런 새로운 육 덩어리를 이 땅에서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관여했다 이 말이에요.
그럴 때 인간들이 ‘내 자식은 내가 낳았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낳게 하고 손자를 갖게 함으로써 손자가 활동할 때 할아버지 입장에서 할머니 입장에서 그리고 또 부모 입장에서는 ‘어떻게 저게 인간이 기대했던 영광에서 성경 잠언서 17장 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떻게 매치가 되겠느냐?’를 생각해야 돼요.
자식의 존재와 손자의 존재가 이 가정에 하나님의 영광을, 내가 자식만 만드는 게 아니고 영광도 아울러 만들겠다는 그 관계가 어떻게 엮여지는지를 알아야 돼요, 이 잠언서에서. 그래서 ‘나한테 자식이 있는가? 아비는 자식의 영광이다.’, ‘손자 있나? 할아버지의 면류관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그 자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해야 될 일을,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잠언서를 통해서 줘요.
이 가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이 있는데 조건들을 하나씩 보게 되면 잠언서 22장 15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하나님의 영광, 자식이 내 영광이다, 자식이 있음으로써 아비는 영광을 얻는다는 게 자연스럽게 그냥 나오는 게 아니겠죠?
또 잠언서 23장 13절에서 14절을 보면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아이를 훈계하라 이 말이에요. 훈계 안하는 걸 안하기, 훈계 안하기를 안하기, 우리 가정에는 ‘훈계 없다’라는 말을 안하기, 훈계 없는 가정 되지 말기,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한마디로 해서, 죽어라고 패라 이 말입니다. 이래도 너 안 죽어? 죽어라고 패라 이 말입니다. 그래도 잘 안 죽을 걸? 이런 얘기에요. 채찍으로 때림으로써 애가 죽고 사는 것은 내 채찍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파악하라 이 말입니다. 상당히 폭력적인 아비고 폭력적인 할아버지가 되겠죠.
아까 잠언서 17장 6절에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식의 영화니라” 이 대목에 있을 때는 그냥 자식 있고 손자 있으면 자동적으로 ‘이 가정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영광되다’라고 평가를 받을 것 같았는데, 막상 잠언서 22장 15절과 잠언서 23장 13-14절을 보니까 이거 뭐 난리를 쳐야 되겠죠. ‘패라. 그래도 안 죽는다.’
이 말은 뭐냐? ‘네가 마음잡고 패도 죽을 만큼은 안 패잖아.’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때리기 없기’가 아니고 반대에요. “훈계치 아니치 말라” 했으니까 이건 ‘때리지 말라’의 반대가 되어서 ‘나는 안 때린다’는 그런 마음자세를 갖지 말라는 뜻이에요. ‘참, 어떻게 이 귀한 너를… 내 영광인데 어떻게 손을 대?’ 하나님은 그게 아니에요. 때려야 영광이지, 안 때리면 영광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맞아야 인간이 된다는 뜻이죠.
잠언서 29장 15절에 보면,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될 것은 ‘임의로 하게 되면 자식을 욕되게 한다’는 이 말과 아까 잠언서 22장 15절,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녀로 태어나게 했는데 그 자녀가 태어나면서 완제품이다?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천하의 말썽꾸러기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할아버지의 말썽 속에 있는 썩은 속성이 그대로 아비에게로 전달되고 아비의 썩은 속성이 그대로 자식에게로 전달 될 때,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을 미화하거든요. 자꾸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나만큼 착한 사람 나와 보라 그래.’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자식을 낳아보니까 뭐 돌연변이도 아니고 ‘이런 게 왜 나왔지? 내가 성격이나 모든 자질 면에서 이 정도로 엉망진창이야? 혹시 내 자식 아닌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자식을 보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불만요소가 있다는 말은 평소에 아비나 어미가 본인을 보고 뭔가 본인에 대해서 환상을 만들고 있고 자기에 대해서 뭔가 엉뚱한 꿈으로써 자기를 위장하고 포장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자식을 통해 들통 내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팹니까. 보통 부모는 자식을 때릴 때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때리잖아요. “엄마가 네가 미워서 때리는 줄 아느냐? 제대로 하란 말이야.”하고 때리잖아요. 때릴 때 엄마는 자기 딴에 정의를 실현하는 중인 줄 알고 있어요. 정의 구현하고 있는 중입니다. 거기다가 교회 좀 다녔다고 “잠언서 봐. 잠언서 13장 24절, 22장 15절 봐.”
잠언서 13장 24절을 보게 되면 “초달(楚撻)을 차마 못 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초달이 뭐냐? 회초리에요. 회초리를 들 줄 모르는 자는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부모다 이 말이에요. 내가 썩은 데서 썩은 게 나왔으니까 자식을 때리는 방식으로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든지 면류관을 받을 쨉이 못 됩니다.’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식을 허락함으로써 이건 자식이 문제가 아니고, 자식을 통해서 내가 그동안 감추어왔던,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더러운 면을, 자식과 함께 나란히 손을 잡고 신약 같으면 십자가 앞에서 “못난 내가 못난 자식을 낳아서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럼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너는 낳기만 했지, 만드는 것은 내가 만들었다.” “왜 이런 자식을 만들었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네 자식을 통해서 밝혀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 이 말입니다. 그것도 제대로 비추는 거울이에요. 나의 다른 면을 자식을 통해 움직이는 형태로서 우리 앞에 보여줍니다. 단순히 평면적인 이미지, 사진 정도가 아니고 영화 필름 정도가 아니고 잠도 같이 자고 밥도 같이 먹으면서 자신의 어두운 면이 바로 내 앞에서 까불고 찧고 있고 철도 하나도 없으면서 자기 칭찬하면 자기가 최고인 줄 아는 그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 자식은 바로 나의 오만을 바깥으로 끄집어낸 모습입니다.
그러니 그 자식과 부모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를 안다면 그게 바로 내가 생각했던 나 잘되는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십자가 영광. 아버지가 독생자 예수님을 아낌없이 내쳤던 그 숨어있는 진짜배기 영광. 독생자의 영광이죠. 사람들의 영광 말고, 대단한 하나님의 영광 말고,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그 독생자의 영광을 우리 가정에서 반복적으로 체험케 하는 것, 이게 가정의 설립 목적입니다.
‘어미’. 아까는 ‘아비’였죠. 어미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난해한 중에서도 난해한 항목에 들어갑니다. 일단은 창세기 3장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어미’라고 했을 때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 숨어있는 존재로 보셔야 돼요. 전면에 누가 나서는가? 어미가 나서는 게 아니고 아비가 나서요, 아비가. 전면에 나설 때 그것은 존재의 대표가 되거든요. 존재의 대표자가 아비가 되면 어미라는 존재가 따로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라 하는 것은 있어도 없는 존재로 있는 거예요. 이것을 여자들이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것은 신비로움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전혀 신비롭지 않아요. 식상해요. 식상하고 한두 번 대단하다 하더라도 돌아서면 짜증나요. 그러나 은근히 뒤에 뭔가 숨어있는 것, 그 존재는 신비롭습니다.
예를 들면, 노을. 해는 졌는데 해의 잔적, 흔적은 다 지지 않았죠. 그냥 해 색깔로 방금 해가 사라졌던 지평선 전체를 가로로 쫙 장식하잖아요. 거기다가 외로운 전봇대 하나 서 있어 보세요. 감수성 폭발이죠. 시커먼 전봇대 있고 뒤에 노을이 배경으로 쫙 깔리고. 그 뉘앙스, 그 이미지가 성경에서 나오는 어미의 역할이고 기능입니다.
그러면 여자를 좀 여자 대우해주면 되지 않느냐? 성경에는 여자가 그걸 싫어해요, 여자가. 왜냐하면 여자가 왜 단독적으로 ‘나는 여자다. 너는 남자, 나는 여자.’ 이렇게 나설 수 없느냐 하면 이게 저주받아서 그래요. 저주받는다는 것은 저주의 원류에 종속된다는 겁니다. 저주의 원류가 누구냐? 마귀에요.
뱀과 결탁되면서 뱀과 서열관계가 형성되어서 저주의 총화, 저주의 총체는 마귀가 받아요. 마귀가 받고, 그다음에 마귀가 받은 저주에서 흘러나온 저주가 그다음 차례가 되는 여자에게 임하고 그 여자에게 임한 저주가 마지막에 어디까지 임하느냐? 남자, 아담에게 임하게 됩니다.
된통으로 저주를 받은, 변경이 안 되는 저주를 받은 악마는 눈에 안 보여요. 그러나 아담은? 이 세상은 남자의 시계잖아요. 남자는 눈에 보여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세계 중간에 모호한 중립, 겹쳐진 부분, 그게 바로 여자입니다. 있는 것 같은데 없는 것 같이 살아야 돼요. 이미자가 불렀던 <여자의 일생>. 여자라 하는 것은 있음으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남자 뒤에서 훌쩍훌쩍 눈물로 지새워야 될 여자의 숙명, 그걸로 고착시키는 것이 남자 중심의 사회에요.
처음 교회 나왔다. 목사님들이 성경 읽으라고 하는 데는 주로 창세기부터가 아니에요. 마태복음부터 읽으라 해요. 신약성경 분량이 짧으니까. 마태복음 1장에 딱 들어서면 여기서부터 여자들이 화딱지가 확 올라오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여기까지는 족보다 이해가 되는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남자는 10개월 동안 임신하면서 애가 들어있는 그 고통을 알아?’하면서 마태복음 1장 2절에서 진도가 안 나갑니다, 화가 나가지고. ‘고통도 모르는 게. 고통을 아는 여자가 주인공이지.’ 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느냐 이 말이죠. 여자가 있는데 여자는 왜 쏙 빠지냐 이 말이죠.
그것은 여자가 현대의 교육 물을 먹어서 그렇지, 여자의 본심은 이렇습니다. 저주를 받았는데 여자의 저주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 대목이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인데요. 자식을 낳는 고통이 남편에게는 일체 전달이 안 된다는 거예요. 오롯이 누가 홀로 덤태기로 담당한다? 여자만 담당하는 거예요, 여자만.
그러면 여자가 자식 낳을 때 고통을 당했으면 여자에게 나중에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되지 않습니까? 뭐 보험료를 더 올려준다든지 상속분할에서 딸이 더 많이 가져가든지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그게 아니에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을 사모한다는 말은 뭐냐? 이것은 강요에 의한 그리움이 아니고 자발적 그리움이에요. 자발적 그리움. 언제 말입니까? 집에 형광등 갈 때라든지 밤에 비올 때 누가 똑똑 두드리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누가 필요하다? 든든한 남편이 안전망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차 빵꾸 났을 때, 길에 가다 덩치 큰 남자가 위협할 때 그때 같이 있던 개가 지켜줍니까? ‘나도 내 남편 있다!’ 이래야 일의 수습이 되잖아요.
보호자를 자발적으로 요청함으로써 여자에게는 결핍이라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 존재의 많은 부분이 결핍되어 있어요. 이 자리를 든든한 남자에게 양도할 마음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 날 때부터 여자가 아니라 저주받은 여자에요.
남자는 선악과 따먹고 쿨하게 남자 본인 위주로 돌아섰는데 여자는 남자만큼 쿨하지 못하고 늘 이렇게 빈자리가 있어요. 이게 남편이 있어도 마찬가지에요. 이상적인 남성형은 없어요, 이 땅에. 없으니까 늘 빈자리로 남겨두고 이 빈자리를 온전히 채워서 나의 사모함이라는 욕망을 영원히 영생토록 충족시킬 빈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 여성의 존재 자리입니다.
남자는 뭐 한 방이에요. 안되면 뭐 나만 죽으면 되지. 가룟 유다가 남자 아닙니까. 여자는 계속 기다려요. 죽더라도 기다려요. 내 곁을 비워놨으니까. 나는 나를 사모할 수 없는 저주를 받은 거예요. 나는 나를 사모하는 게 아니라 내 대신 사모할 분을 항상 모집하고 고대하고 있는 입장에 있어요.
베드로전서 3장을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3장 1절에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되어 있고 그 예가 6절에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다음 나온 말이 더 놀라워요.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는 말이 뭐냐? 그의 딸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딸’이라 하는 것은 하나의 가정에서 자리가 변경되지 않고 그 족보가 확정되었다는 안도감을 허락하죠. 확정되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누구와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과 관련 있는 선택된 언약 사람이죠, 지상에서. 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남자는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대표자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해서 아브라함에게 복 주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했어요. ‘사라에게 복 주는 자는 복을 받고 사라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언약이 주어져서 복이라는 개념을 하나님이 주셨다’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준 복의 주인공은 기존의 모든 저주, 아담에게 준 저주, 여자에게 준 저주를 충분히 복으로 전환시키는 그러한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고 언약을 통해서 이 세상에 방문한 거예요. 마치 심판 때 노아 방주와 같은 기능이에요.
따라서 사라는 남편 하나 잘 문 거예요. 세파트도 그런 세파트가 없어요. 꽉 물었어요. 딸이라도 좋고 당신의 개라도 좋으니까 소속으로 언약 안에 방주 안에 소속으로 확정되었으면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내가 뭐라도 되도 내가 고마워하겠다는 그런 태도. 이게 ‘순복’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 남편에게 순복하는 게 아니에요. 순복이라는 말은 언약과 관련지어서 그 언약 안에 드는 세계의 자리에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입장에서 한 자리 꿰찼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자가 어떤 자의 어미다? 앞으로 그런 사라 같은 마음자세를 가진 자를 하나님 보기에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자로 규정하고 그 산 자의 최종 선배가 누굽니까? 하와라는 뜻이에요. 하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남녀 간의 문제가 아니에요. 언약 속에 들어가야 되는데 언약 속에 들어가려면 나는 남자, 나는 여자라는 그 관계, 육적인 성별은 이미 죽고 난 뒤에 언약적으로 주어진 관계죠. 그러면 이것은 장차 올 남편 되신 예수님 앞에서 남자든 여자든 누구든 모두가 영원한 여자가 되는 그 관계로 영원한 자리가 확보된다는 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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