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장 4-7절이에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선택’ 나왔죠? ‘예정’ 나왔죠?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단어 나왔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독 행위입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 일을 위해서 6절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거저’입니다. “거저 주시는바”에요. ‘거저’ 주시는 겁니다. 찾아와서 ‘거저’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교회를 만들어서 ‘행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행해야! 기도해야 구원받고, 방언해야 구원받고, 뭘 행해야 구원받고,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거저’라는 바탕 자체를 인간의 행함으로 낙서하고 있어요. 마귀가 낙서하고 있습니다. 전부다 주님의 행적으로, 주님행적의 무늬로 장식해야 하는 데 거기에 내 행위를 섞어놔요.
그렇게 섞어놓으니까 “기도했는데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헌금했는데 십일조 했는데 내 사업은 왜 망했습니까?” 이렇게 나와요. 그다음에 에베소서 4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 말은 뭐냐? “네 속에 피만 활성화 되느냐?”라고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네 속에 거저 주시는 피, 언약의 피, 네가 개입되지 않은 피, 아버지와 아들만 개입해서 다 이루어버린 그 피에 네가 합류했느냐? 마치 세례 요한이 물속에 풍덩 잠긴 것처럼 네가 그 핏속에 풍덩 잠겼느냐?”를 묻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형성된 그 구조, 그 구조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데 그래서 그 새롭게 만든 피조물이 구조에요. 구조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걸 ‘중합체’라고 이야기하는데 서로 대조되는, 서로 대립되고 대조되는 두 성질을 두 개의 방으로 만들어 낸 구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되셔서 예수님에 의해서 형성된 그 구조가 예수님의 언약의 효과로 인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우리 구조로 들어오는 거예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습니다. 긍휼은 로마서 9장에 나와요. 16절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의 긍휼, 사랑, 은혜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긍휼을 받았단 말이죠. 우리의 몸은 이제 긍휼로 꽉 차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언약의 피를 작동하려면 언약의 피의 완성에 참여했던 예수님의 구조와 동일한 구조로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그 옆에 다른 방이 있어야 돼요.
그 다른 방이 뭐냐? 옛사람, 행위의 방이 또 마련되어 있어야 돼요. 행위의 방이 있고, 그다음에 긍휼의 방이 생겼는데 이게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생기는 구조고, 마귀에 속한 사람들, 지옥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대립적인 구조가 없어요.
쳄버 chamber, 방이 두 개가 있어요. 한쪽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요.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영원성으로 정리 정돈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악마가 선악적인 행함을 가지고 우리에게 치고 들어와요. ‘너 인생 잘 살았어, 잘 못 살았어? 실수했어, 안 했어? 잘못했잖아. 말씀에 대해서 네가 잘못했잖아. 너 벌 받아야지’ 이런 식으로 치고 들어옵니다.
우리의 행함에 대해서 ‘우리가 뭘 행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계속 집중하고, 몰입하고, 집착하게 만드는 것이 들어오게 되면 그 은혜의 쳄버가 행함의 방으로 바뀌어요. 그러면 우리는 절망이에요. 절망적입니다. 그런데 방의 구조가 2개가 되어서 행함의 방으로 들어가면 어느 방으로의 전환이 가능하냐 하면, 또 다른 방이 생겨서 긍휼, 거저 주심으로 가득 차 있는 방의 시선, 관점으로 내부에서 옮기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한 구조를 우리 성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놨어요. 불만층이 감사의 층으로 내부 이전이 가능한 구조, 이게 언약 완성의 효과입니다. 그리고 우리 육신이 이 땅에서 70이고, 80이고, 90살 살다가 죽을 때까지, 요양병원에서 막 눈 감을 때까지 이 내부 투쟁은 멈출 기색이 안 보여요. ‘그래, 은혜받았어. 나 이제 복음 알아.’ 그런데 우리 몸이 처해 있는 이 상황은 ‘그렇지만 하나님…’ 꼭 ‘그렇지만…’ 이렇게 시작해요.
또는 젊은 애들 표현으로 ‘글치만…’이지요. “그렇지만 제가 왜 이렇게 불행합니까?” 그러면 긍휼층에서 행함층에 묻지요.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저 행복하고 싶습니다.”
“긍휼층에서 말합니다.” “행복하지 마. 너는 말씀을 원해야 해.” 말씀을 원해야 하는데 행복을 원하고 있어요. 행복을 원하는 이유는, 본인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면 주님이 또 물어요. “네가 생각하는 불행이란 어떤 경우를 불행이라고 말하지?”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불행이 뭔 줄도 모르면서 불행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그것은 사탄으로 하여금 계속 공격받고 있는 몸인데, 그 몸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손수 체험했던 몸이에요.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인간의 죄악 된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고 그 기도의 응답도 가능하다고 히브리서 2장에 나옵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방금 제가 얘기한 두 개의 구조 차원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인간이 옛사람이죠. 옛사람은 그냥 사람이에요. 인간이기 때문에 보통 아담에서 태어난 인간이 마귀의 시험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선행으로써, 하나님께 충성과 봉사로써, 말씀에 충실함으로써 그 난관을, 불행을 이겨보려고 하는 것, 그게 마귀의 늪에 빠진 거거든요.
마귀의 늪에 빠졌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모든 행함을 총동원해서 남들 앞에 신앙이 있는 척을, 티를 내는 그런 요령을 부리는 거예요. 신앙을 내 힘으로 견지하고 유지하려는 시도, 마귀는 신났죠. ‘와, 너 믿음 좋구나. 그런 시련을 이기는 것 보니 믿음 좋구나.’ 이런 식으로 막 막 놀려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의 말씀은, ‘시험을 감당할 다른 방으로의 이전은 네가 할 몫이 아니고 초과적으로 내가 너에게 그렇게 해준다’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피팅 Fitting 서비스라고 해요. 맞춤 서비스입니다. 성경 표현대로 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이 ‘예스’가 된다.
이것은 끝나봐야 알아요. 끝나봐야 안다고요. ‘주님, 이러다가 저 신앙 진짜 자빠집니다. 나 진짜 좀 도와줘야 해요. 안 도와주면 나 진짜 바이바이, 굿 굿바이…’ 여기서 춤을 추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나올 때 그 절망,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절망.
주께서 뭐라 하겠습니까? “야~, 참 너도 어지간하다. 끝까지 너를 포기 못 하네. 너는 계약 당사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계약 밖에 있으면서도 너는 아직도 너 자신부터 출발하네.” 그렇게 하십니다. 어떤 상황이 오든 피팅하는 거예요. 옷 피팅하듯이 딱 맞도록 하는데, 그렇게 맞도록 하는 게 뭐냐?
“네 속에 방이 하나만 있는 게 두 개가 있어.” 거저 주시던 방으로 나오게 되면 모든 것을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뒤돌아보면 고마움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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